내 것/잡설들

갈매빛 그늘 -4-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2:30
728x90

 

-잡설-

 

<갈매빛 그늘> -4-

2008년 1월 27일

 

 

이종석(李種奭)

아버지의 아버지, 내 할아버지.

1893년 8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나 1973년 3월 1일 서울 서교동 숙부댁에서 돌아가셔서 남양주의 마석 모란공원에 묻히셨다.

마석 모란공원.

할머니도 할아버지 곁에 잠들어 계시고 막내숙부도 화장하여 뼛가루 돌탑에 담아 그 곁에 있을뿐더러, 큰숙부(李鎭雨) 내외분과 작년 돌아가신 작은숙부(李吉雨)도 그곳에 잠들어 있다.

 

장년(壯年) 이후 주로 부산서 활동한 의사. 부산시 초대(?) 의사회장.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에 눈매가 아름다운 분이였고 상당히 과묵하셨다.

아버지없는 나의 사춘기에 절대적 영향을 행사하신 어른이었지만 조손(祖孫)이 긴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은 내게 없다.

애비없는 손자에게 어떤 종류의 애틋한 마음은 없었겠는가마는 그 마음을 표현하신적 한번도 없었고, 무조건 어려운 할아버지 앞에서 사춘기 따위의 마음을 여쭈어 올린다는건 언감생심 꿈도 꿀수 없었다.

 

보생의원(普生醫院)

1920년대 초부터 1988년도 반세기 넘어 까지 부산 영도의 대교동에 위치한 그곳은 말하자면 집안의 근거지. 일족을 이루는 하나의 성(城).

삼촌고모들 그곳서 성장하여 자랐을 것이고(영주동에도 집안의 근거가 있었던듯한데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작은아버지(이진우)댁 사촌들의 유소녀기와 나의 사춘기 거친 방황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혀 있는 곳.

요즘도 난만한 내 꿈 속, 많은 부분 데포르마숑된 보생의원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할아버지가 열었고, 작은아버지가 뒤를 이었고, 종장에 어머니가 운영하다가 부동산업자에 팔아버린 보생의원.

이백여평 대지에 지어진 일본식 목조 2층 건물.

많은 방들(입원실등). 그러나 고교적 그 수많은 방들중 내 것으로 고정된 방은 없었다.

수술환자(산부인과 환자) 넘치면 난리난듯 급하게 이곳저곳 방을 비워 주어야했던 그 시절의 1호실, 2호실, 5호실과 건넌방.

그 시절 나만의 공간 갖기를 나는 얼마나 열망하였던지.

꿈꾸는 나만의 두어평 공간, 마스터베이션의 신음 가득한 음습한 공간일터였더라도.

연인이 사랑을 나눌 공간 한칸 구하려는 절절함을 그린 '제 8요일'이라는 동구의 어느 작가의 소설에의 절실한 공감으로 나는 '방'이라는 제목으로 어줍잖은 희곡을 쓰기도 하였었다.

 

은퇴하신 할아버지 상왕(上王)처럼 물러가 거처하시던 2층의 할아버지방은 군것질거리가 벽장 속 끊이지 않았고 유일하게 흑백 TV가 있었던 방.

작은아버지 부부 거처하던 1층의 제일 안쪽 아랫방.

함안댁과 애순이의 선의 가득한 헌신의 모습들과 드넓었던 재래식 부엌과 그녀들의 노동이 아프게 기억난다.

나는 차마 부르주아의 도령이었을까마는.

그 곁에 붙어있었던 안방이라 불리던 3면 문짝이 붙어있던 곳 아랫목에 기지개 켜던 ‘아나’라고 불리던 고양이도 생각난다.

병원에 고용된 최선생님과 김선생님과 남돈이아저씨와 용건이... 병원부분의 대기실, 진찰실, 수술실과 어두컴컴한 약제실방.

 

할아버지는 그렇게 내 사춘기를 카프카적 이미지로써 지배하고 계셨던 것이다.

일제말 할아버지의 창씨명은 白木種奭.

할아버지가 당연하듯 창씨를 하였더라도 나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한 시대의 ‘삶의 자리’란 함부로 부끄러워 할수 있는것 또한 아니라는걸 나는 안다.

할아버지의 삶의 자리란 대가족을 거느린, 부르주아로써의 당위에 부끄러움은 없다.

친일파(당시 친일파라는 어휘가 있었을까)라는 삶의 방법론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내 할머니, 손갑술(孫甲術)

1894.1.25 울산 장내면 출생. (이 기록에 도움되는 두툼한 옛날 手記의 호적초본이 있다)

할머니 돌아가신 해가 언제더라?

할아버지 가시고나서 몇해 더 사셨는데. (1981년 10월 1일이었구나-나중 附記-)

본관 밀양 (부 손종호 모 이주옥)

열남매 가까운 많은 자손을 생산하신 늠름함.

다만 큰 아들인 내 아버지(고모님 한분과) 빼고는 참척(慘慽)을 겪지 않으신 복 받으신 분.

나이드셔 몸은 엄청나게 비대해 지셨지만 자그마한 몸집의 영감님에게는 꿈쩍을 못하셨다.

진밥과 콤콤한 젖깔 같은걸 좋아하셨고, 화투 육백은 할머니께 배웠다.

 

1967년 가을 새벽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지원병으로 입대하는 날의 새벽, 현관문을 나서려니 보생의원 대기실 소파 끝에 비대한 할머니는 앉아 계셨다.

“가거래이”

꼬깃꼬깃한 지폐 몇장 손에 꼭 쥐어주시던 할머니.

 

 

오늘은 안녕.

'내 것 > 잡설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매빛 그늘 -6- (1,4,3,3)  (0) 2019.09.25
갈매빛 그늘 -5- (1,4,3,3)  (0) 2019.09.25
갈매빛 그늘 -3- (1,4,3,3)  (0) 2019.09.25
갈매빛 그늘 -2- (1,4,3,3)  (0) 2019.09.25
갈매빛 그늘 -1- (1,4,3,3)  (0) 2019.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