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제인 에어> 前
_샬롯 브론테 作-
***동우***
2010년 7월 4일
‘샬롯 브론테 (Charlotte Brontë, 1816~1855)’가 쓴 장편소설 ‘제인 에어 (Jane Eyre)’
영화로 만들어진 ‘제인 에어’는 적어도 다섯편 이상은 되지않을까 싶다.
그 중, ‘수잔나 요크’(제인 에어役)와 ‘조지 C. 스코트'(로체스터役)가 출연한 ’제인 에어‘를 본 것은 아주 옛날이었다. (남포동 제일극장).
그리고 2년전 쯤 비디오로 보았던 ‘프랑코 제피렐리’감독의 ‘제인 에어’ (제인 에어 역에 ‘샬롯 갱스브로’, 로체스터 역에 ‘윌리엄 허트’)
이들의 필모그라피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구나.
‘프랑크 제페릴리’는 두말할 것 없는 명감독,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잘 알려졌지만 본시 그는 유명한 오페라 감독.
‘샬롯 갱스브로’는 프랑스 가수 ‘세르쥬 갱스부로’가 아버지이고 왕년의 미국배우 ‘제인 버킨’이 어머니다. ‘제인 버킨’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출연한 바 있다. (그리 늙은 모습은 아니었는데, 나만 늙었는지..)
로체스터 역의 ‘윌리엄 허트’.
전번 책부족이 읽었던 ‘거미여인의 키스’, 그 영화에서 게이 ‘몰리나’를 연기하였던 바로 그 배우다.
‘로체스터’와 ‘몰리나’를 동일인물로 상상해 보라.
배우라는 직업의 변신스킬, 놀랍지 않은가.
그리고 ‘프랑크 제페릴리’의 ‘제인 에어’는 상당히 우울한 톤이었다.
덜 여문 감성에 낙인이 찍히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사춘기 무렵 내게 그러한 낙인이었다.
중동중학 3학년 어느 봄날 새벽 (그 시절 단체관람은 대개 새벽에 이루어졌었지), 태평로 아카데미극장의 흑백화면의 ‘폭풍의 언덕’(윌리엄 와일러 감독, 마르 오베른,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영화를 보고나서 나는 도무지 마음에 일렁이는 파고(波高)를 주체할수가 없었다.
얼마후 인사동 헌책방에서 구해 읽은 얄팍한 책(일본소설을 번안한 다이제스트였을 것)에서도 그 강렬한 인상은 여전하였고, 몇년후 삼성출판사의 완역된 소설을 두어번이나 읽었었는데 그 때에도 느낌은 퇴색하지 않았다.
Wuthering Heights. (폭풍의 언덕)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운명적이었고 어쩌면 초자연적인 것이었다.
요크셔 거친 황야를 무대로 펼쳐지는 격정적 드라마, 하릴없이 소년의 심장은 격랑(激浪)으로 요동쳤던 것이다.
진짜배기 사랑이란 히스클리프와 캐시처럼 운명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와 같은 비극적 로망이어야 한다는, 사춘기의 여린 감성에 호도(糊塗)된 사랑관(觀)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한동안 저자거리의 필부필부의 사랑 얘기, 예제 영화에서 접하는 시시한 사랑놀음 따위는 죄 사이비(似而非)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소설을 읽고 알았지만, 놀라웠던 것은 작가가 인생의 연륜도 세상사 경험도 일천하기 짝이 없는 스물여덟의 처녀였다는 사실이었다.
브론테 자매.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막내 ‘앤 브론테’(남자 형제도 하나 있었지)
그들이 작품을 쓴건 서른 전의 처녀 때였고, 세상사 경험도 많지 않아 그들이 고향을 벗어나 보았자 브뤼셀 정도.
규방에 들어앉은 규수로서 오로지 상상력에 의하여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과 같은 명작을 창작해 냈던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도 흔들의자에 앉아서 오로지 머릿속에서 번득이는 추리로서만 오리무중의 살인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였지.)
경험과 견문없이, 독서와 상상력만으로 창조할수 있는 예술세계.
영국 여인네들의 독특한 에토스가 느껴지지 않는가.
목사인 홀아버지 슬하의 세 자매(한명의 남자형제와)가 생활하였다는 목사관의 풍경. 그녀들 책의 행간에서 컨텍스트를 유추해 볼 뿐이다.
그들의 감수성은... 읽은 책들은... 주위에서 얻어들은 옛 이야기들은...그들의 정신을 매혹시킨 것들은... 꿈꾸었던 이미저리들은...함께 얘기를 나누었을 내용은....가치관...인생관...인간관의 형성은... 상상력은... 가끔 체리주 한잔씩도 하였을테지...형제들 모여 연출 연기 나누어 연극 비스무리한 것도 했다는데...그림도 그렸겠지...형제 자매들 문학적 토로는 나름대로 어떤 규칙도 있었을거라...세익스피어, 제인 오스틴의 얘기도 나누었을 거라... 성적인 것들도 있었겠지...다툼도 없지 않았을거고...감정의 디테일들은...18세기 아직 고루한 풍토의 영국 시골 마을에서... 세 자매... 그 푸른 것들...그 붉은 것들... 노란 것들...희고 검은 것들은....
브론테 자매의 목사관의 거실은 내게는 벅찬 부러움의 그림이다. (어린 시절 정능의 너른 집과 형과 누이가 있었고 우리 형제는 책도 읽고 영화도 보고 꿈도 꾸고 이야기도 나누었을 터인데, 내게 그런 그림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쨌거나 ‘제인 에어’는 책부족의 올해 주제인 ‘여성읽기’의 텍스트로서 매우 적절한 선책(選冊)이었다. (모래여자, 채털리, 소피, 앞으로 읽을 헤스터, 테스, 롤리타, 춘향이, 블룸...)
그리하여, ‘제인 에어’라는 유니크한 여성상에 대하여 사적(私的)으로 사무치는바 없지 아니하여 좀 장황하게 지껄이려 한다.
책부족께서는 늙은 감정의 어지러운 객설을 모쪼록 용납하라.
자매 중 맏언니 샬롯 브론테가 나이 서른의 처녀시절에 쓴 소설.(유일하게 결혼을 경험한 샬롯은 서른 여덟로 가장 오래 살았고, 나머지 동생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그녀가 묘사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서른살 처녀가 어떻게?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만큼 인간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이 놀라웠다.
더불어 소설적인 재미도 각별하였다.
빅토리아조 영국의 분위기, 시대적 배경과 자연과 풍물의 묘사에서도 이국의 의고적(擬古的) 정감을 느낄수 있었고, 플롯에는 서스펜스가 배어있어, 뻔히 알고 있는 스토리임에도 긴장감은 느슨해 지지 않았다.
세련된 대사는 상황에 따른 적절한 감정이 실려 있으면서도 그 의미는 자못 심장하였다.
여주인공의 일인칭 시점(視點)으로 쓰여진 꽤 많은 분량의 장편. 이 소설을 한번쯤은 읽어 보았다는 느낌이 있을 거라는 책부족 추장님의 지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다이제스트로 축약한 것들이나, 영화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으므로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인상의 ‘제인 에어’가 선입견으로 자리 잡았을 법하다. <고등학교적 영어공부 한답시고 다이제스트로 된 영한(英韓)대역의 문고본을 들고 카세트 테이프의 발음을 따라 중얼거리면서 공부한 적도 있어서, 어린 제인 에어가 외숙모네 붉은 방에 갇혀서 부르짖는 ‘Let me out! Let me out!의 원어민 여자의 발음은 아직도 내 귓가에는 선하다.)
무엇보다 제인 에어는 소설보다 영화로서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로체스터는 너무 늙었었다. (내가 본 영화의 조지 스코트가 그랬고 윌리엄 허트 또한 그랬다.)
싱그러운 처녀와 노추한 늙은이의 구도란 그 조합이 썩 보기 좋은 것은 아닌 것이다.(그런 영화를 볼적마다 나는 처녀 쪽이 아까워 혀를 찼다)
그러나 소설 속(영화처럼 비쥬얼이 없는) 로체스터는 제인 에어의 사랑의 반려로서 손색이 없었다.
나이는 마흔이 아니 되었고.(열 여덟 제인 에어에 비하여는 스무살가량 연상이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냉정함과 시니컬한 포즈 뒤에는 젊은 열정과 예술적 감성이 풍부한 매력적인 사나이였다.
에드워드 로체스터.
겉으로 보기에 그는 언제나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빈정거리는 투로 이야기하는 거만하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서른 아홉쯤의 사나이.
마흔전이지만 벌써부터 인생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시큰둥하다.
사람을 대하는 그의 눈은 언제나 ‘이 속물’하는 투의 경멸의 빛을 띄고 있었다.
끊임없이 타인의 속물성을 탐색하면서 실험하고 쾌감을 느끼는 버릇이 그에게는 있다. (로체스터가 집시노파로 분장하여 어쩌구하는 대목은 좀 무리스럽다는 생각 없지 않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어쩌다 아버지와 형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본시 자기 것이 아니었을 재산과 지위는 얻었지만, 본시 그는 가문의 희생양으로서 아웃사이더였다.
올곧게 물려받은게 아닌 손필드의 대저택과 많은 재산과 지위는 그에게 우연한 결과의, 말하자면 그로서는 스스로 웃기는 팔자였던 것이었다. (우연에 의존하여 얻게 된 그러한 행운은 로체스터 의식속에는 일종 자기경멸일수도, 또는 자의식에 작용하는 아픔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택 3층의 한 방에 감추어진 로체스터 의식구조의 상징적인 비밀이 있었다.
아버지에 의하여 정략적으로 아내로 맞이하게 된 여자, 미치광이 아내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하녀의 전문적인 관리하에)
그러므로 손필드 저택은 로체스터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밖으로만 떠돌았는데, 환락의 영역 역시 그의 본령은 아니었나보다.
방랑중 파리의 정부(情婦)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는 남녀에게 피식 경멸의 웃음을 띄고서는(결투가 있었지만 그 또한 진지한게 아니다. 어린애에게 총알 한방 다리에 박아주었다는 식...) 그녀에게 지갑을 던져주고 그 정부의 어린 딸인 아델을 거두어 손필드의 저택으로 데리고 왔던 것이다. (객기였을까, 아델을 거두어줄지언정 로체스터는 그 어린아이에게 곁을 내 주지는 않는다.)
어느 날, 아델의 가정교사 ‘제인 에어’는 자신의 고용주에게 또박또박 얘기한다.
<"아델은 어머니의 잘못에도, 또 당신의 잘못에도 전혀 상관이 없어요. 나는 그애를 사랑해요. 엄마에게는 버림받고 당신은 자식 대우도 해주지 않잖아요. 이제까지보다 더 그애를 사랑하겠어요.">
인생이란 진지한 것이 아니고, 보편적 인간성이란 그에게 조롱스러운 속물들의 교집합일 뿐이라는 로체스터의 기질은 좀 기이한 편이다.
그러나 그는 외롭다,
그래서 그의 무의식은 언제나 진정한 친구를 찾아 헐떡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로체스터는 인간성에 실망하고 인생을 조롱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허무주의자의 면모로서 제인 에어를 만났던 것인데, 그런데 제인 에어는 뜻밖의 여인이었다.
스스럼없는 솔직함, 떳떳함,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사물의 정곡을 향하여 곧장 비판적 신랄함을 날리는 그 담백한 용기.
<“나는 당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세상을 널리 아는 것만으로 나에게 명령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로체스터의 예술적 직관력은 제인 에어의 그림에서 그녀 내면의 뜨거운 열정, 상상력의 자유로움, 어쩌면 이데아의 경이로움을 발견하기도 한다.
제인이 그린 그림 속에는 머릿속의 어떤 생각과 이상이 표현하였을 초현실적인 그림들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사상의 그림자만은 이 그림에 나타나 있소. 그런데 이 그림들은 소녀의 것으로 보기는 좀 특이해. 당신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요정적인 데가 있어. 이 샛별의 눈은 틀림없이 꿈에 본 것이겠지. 어째서 이처럼 맑은데 조금도 빛나지 않는 눈을 만들 수 있었을까. 위에 있는 별이 눈빛을 억제하기 때문인가? 거기다 또 바람을 그리는 것을 당신은 누구에게 배웠지? 하늘과 언덕에는 질풍이 무섭게 불고 있어. 당신은 어디서 타르모스 산을 보았지요? 이건 타르모스 산이야.”> (타르모스산이란 무엇인지?)
에드워드 로체스터.
그는 여태까지는 누구에게도 열어보이지 않았을 속마음을 이제 제인 에어에게만은 열어 보인다.
<"그렇소. 당신 생각대로 난 결점이 많지요. 내게도 좋지 않은 행위나 타락한 생활이 있어요. 스물한 살 때 나는 인생의 진로를 그르쳤어요. 그 뒤 바른 항로로 접어든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않았다면 나도 당신처럼 선량하고 총명하고 때 없는 몸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조용한 마음, 맑은 양심을 갖고 있는 당신이 부러워요. 오욕과 죄없는 기억은 하늘의 보배예요. 청정 무구한 생명의 샘이오."“열 여덟 살 때의 당신의 추억은 어떤 것일까요?""대단히 좋았소. 자연은 나를 착한 인간으로 기르려 했던 것 같아요. 나는 악당이 아니오. 나는 타고 난 성격에서보다도 오히려 환경 탓으로 하찮은 도락에 식상하고 있소. 당신은 나쁜길로 빠지지 않고, 의연했어야 옳다고 하시겠지? 운명이 나를 괴롭혔을 때 나는 지혜가 부족했소. 제인 에어 선생, 후회는 생명의 독이라오.">
이제 로체스터는 손필드의 저택을 떠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제인 에어가 있으므로.
내 비약(상상)은 로체스터의 내면의 갈등을 나름의 대사로서 읊는다.
아래는 나의 세리프다.
<“아아, 내 인생도 가치가 있을수 있다. 아름다움으로 나는 다시 시작할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처녀가 내 곁에 있지 않느냐. 어쩌면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하나의 가치있는 아름다움을 주신건지도 모른다. 내가 이걸 취하는 게 잘못된 것일까.”>
또 한켠으로는.
<“에드워드 이 놈아, 온 세상 돌아다니면서 온갖 오입질이나 하고 다닌 놈, 저 순결하고 고결한 처녀아이에게서 다시 네 인생의 행복을 찾겠다고? 네 더러움으로 저 깨끗함을 오염시케겠다고? 아서라 말아라. 팔자 더러운 네 놈은 미친 마누라나 거두면서, 취커니 깨거니 그렇게 한세상 살는거지 무어, 허무한 인생살이..그렇게 살다가 가는거지 무어.”>
어쩃거나.
그리하여 로체스터는 늘 제인의 곁에서 서성거린다.
자의식에 겨운 마흔짜리 부자 사나이가 열여덟짜리 고아 처녀의 사랑을 얻으려고.
그가 표출하는 겉모습이란 냉소적인 빈정거림이지만 그의 내면은 끊임없이 제인에어를 모색하고 실험하고 탐색한다.
거만하고 냉정하고 단호한 사나이 로체스터, 아, 어떤 선남(善男)의 선녀(善女)를 향한 프로포즈가 이토록 지난하였을까.
이제 제인 에어의 역정에 대하여 말할 차례다.
친척 집에 얹혀 눈칫밥을 먹고 살았던 ‘제인 에어’.
이 대목을 읽으면서 느닷없이 내 마음 속 묻혀 있던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르는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나는 중동중학 2학년, 형은 경복고 1학년, 누이동생은 이화여중 1학년이었던 1961년 무렵. (연배있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그 시절 중동은 2차였고 경복과 이화는 1차 명문이었다.)
어머니와 우리 세남매(내 젖엄마도 있었다)는 정능에 살았다.
의사였던 홀어머니.
병원을 증축하면서 예제서 빚을 끌어쓰는둥 어쩌구 하다가, 당신의 건강도 경제도 두루 해처 버렸다.
어머니는 부산의 시부모에게로 내려가 입원을 하였고,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속에다가 무언가 물어뜯는 짐승 한 마리를 키우게 되었는데, 그 때 부터였을까.
형과 나는 자하문밖(부암동) 어느 집에 방하나 얻어 하숙하였다. (그 하숙집이 생각난다. 주인 두분 다 경상도 문둥이, 그 무렵 5.16이 터졌고 한국은행 다니던 아저씨는 병역기피로 해직되어 미국유학하였던 아저씨는 영어학원을 차렸었다, 아주머니는 국어교사였고)
그리고 계집아이인 누이동생은 안암동 숙부댁에 맡겨졌다.
어느날 형의 학교로 배달된 두툼한 편지 한통이 있었다.
숙부댁 곁방에서 누이동생과 한 방을 쓰던 여대생(사촌동생들의 가정교사)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 편지를 보낸 시점은 숙부댁 가정교사를 그만 둔 후였다.)
오두마니 앉아서 엄마를 그리워 하고 오라비들을 보고 싶어 하였던 열세살짜리 소녀가 그리 눈에 밟혔던가.
편지는 지극한 선의와 정성으로 가득차 있는 미문(美文)의 글월이었다.
이 세상 혼자 내던져진 느낌일 한 소녀에게 필요한 사랑에 대하여... 형제의 결속에 대하여... 사랑의 나눔에 대하여... 서로의 위로에 대하여... 고난의 극복에 대하여... 희망과 용기와 사랑에 대하여... 언젠가 함께할 가족.... 사랑을 잃어버리지 말아 달라는.... 무슨 학대 같은게 있어서 이런 편지를 보내는게 아니므로 행여 숙부님을 원망하거나 해서는 아니 된다는 간곡한 당부와 더불어...한방에서 생활하며 한동안 지켜 보았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었을 어린 소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에이는 동정심으로... 작은 소녀와 그 오라비들이 동생처럼 생각되었을... 일종의 소명의식으로서... 정신적으로나마 도움을 주고자 마음 먹었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여 조심스럽게... 단어와 어휘와 문장을 고르고 다듬었을...
내가 읽었던 어떤 문학작품보다도 진실하고 감동스러운. 성숙하려면 아직 멀었을 열네살 짜리 생각 속... 하나의 익은 성찰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던, 예쁜 글씨체의 명문(名文)의 두툼한 분량의 글이었다.
그 편지는 내 의식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 때 나는 고아는 아니었을테지만, 그 편지로 인하여 내 안에서 무언가 물어뜯는 짐승은 좀 유순하여 졌고, 내 창밖을 후려치던 바람소리는 좀 잦아들었다.
고맙고 아름다워... 그 이름을 뇌이면 지금도 목이 멘다.
죽을 때까지 얼굴도 소재도 알리 없을 그 누나. (봉투에는 본인의 이름과 대학과 과명만이 적혀있을 뿐이었는데,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이를 만나려고 돈암동 학교까지 찾아갔으나 숫기없는 나는 결국 만나지 못하였다.)
그 편지는 생면부지의 타인을 향한 완벽한 선의였고 동정이었고, 그리고 내게 완벽한 문학이었다.
비로소 밝히는바, 그 이는 1962년 그때 성신여대 2학년으로 미술을 전공하였던 ‘정순자’ 누나.
살아 계신다면 지금 70대 초반일 그 이, 추상일지언정 예순넘은 가슴 식을 때꺼정 영원히 촉촉한 기억으로 간직할 분. (한참 훗날 누이동생에게 그와 같은 편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얘기 하였지 싶은데 너무나 오래전 일이라....)
어쨌거나.
고아가 성장하는 과정이란 자기식으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그 방법론을 깨닫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
느낌으로 다소 이해하는 바, 제인 에어는 고아였다. (춥고 배고팠던 로우드 자선학교 시절, 제인에게도 템플 선생과 헬렌 버언즈라는 ‘정순자’누나가 있었다.)
그리하여 내가 제인에게서 발견한 덕목(德目)은 자존(自尊)과 독립(獨立)의 정신이었다.
천지간 기댈 곳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사람이나 사회나 관습이나 제도에 대하여) 쉽게 취하게 되는 것이, 복종이나 타협, 또는 일종 비굴한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 속에서 홀로 살아내기 위하여, 제인이 줄곧 견지(堅持)하였던 태도는 바로 자존(自尊)이었다. (18세기 영국 사회의 소녀로서, 작금 현대에 이르러서 더욱 쉽지 않은 덕성..)
그렇다,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중요한 힘은 다름 아닌 바로 제인의 강인한 자아(自我)였던 것이다.
사람의 자아 속에는 감정적인 것을 지향하는 측면과 이성적인 것을 지향하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제인의 정신은, 가슴에서 갈등하는 파토스와 머리에서 작용하는 로고스를 조화롭게 할줄 아는 지혜가 빚어낸 것.
그녀는 감정적이지만 또한 이성적이었고 현실주의자였지만 또한 이상주의자였다.
파토스나 로고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이를테면 중용(中庸)의 오의를 체득하여, 소설 속 제인 에어라는 여성의 캐릭터를 기품있게 만들었다.
외숙모 댁에 언혀 사는 열살짜리 고아 제인이 느끼기에 외숙모의 학대(외사촌 오빠 존 리이드와 더불어)는 자심한 것이었다.
특정한 사람에 대하여 느껴지는 불가해한 감정 중에는 ‘주는 것없이 미운 사람’이란 것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파토스적인 감정의 하나이다.)
외숙모 리이드 부인에게 제인 에어란 아이는 ‘주는 것 없이 미운 아이’였다.
죽은 남편이 거두어 온 고아로서, 예쁘지도 않고 애교도 없으며 고분고분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는 아이, 자신의 아이들과는 어울리려 하지 않고 책만 읽는 아이였고, 게다가 자신이 부당(不當)하다고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고개를 바딱 처들고 따지고 드는 아이.
제인의 외숙모가 특별히 냉혹한 사람이었다기 보다 리이드 부인과 제인 에어는 천성적으로 궁합이 맞지 않은 그런 사이였다는 느낌이다.
일일이 옳고 그름을 따지고 어쩌고 생각하기도 전에 우선 미워 죽겠는 그런 여자 아이가 바로 제인 에어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리드부인이 제인 에어를 학대하는 외양을 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리드부인에게 제인 에어는 무조건적으로 ‘주는 것없이 미운 아이’(오로지 파토스만 작용하는)였을 뿐이다.
리이드 부인이 브로클허스트씨에게 제인에게는 남을 속이는 버릇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브로클허스트씨가 돌아가고 나서 열 살짜리 제인은 눈을 똑바로 뜨고 외숙모에게 말한다.
<"나는 남을 속이지 않아요. 만일 속이고 싶으면, 외숙모를 좋아한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겠어요. 나는 존 리드 말고는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요.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좋은 여자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박정한 사람이에요. 당신이야말로 남을 속이고 있어요.">
그리고 마음 속에 있는 맺힌 것들을 말로서 뱉어 내자마자 제인은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자유롭고 승리에 찬 기쁨, 복수의 쾌감, 그 뜨겁고 짜릿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그녀의 파토스는 말할수 없는 만족감에 젖었던 것이다.
허지만 이와 같은 흉포한 파토스적 기쁨은 곧 그녀의 다른 자아인 로고스적 회한(悔恨)에 직면하게 된다.
파토스의 뒷맛은 피냄새가 나고, 녹을 핥는 것 같은, 독을 마신 것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 녀의 로고스적 자아는 그러한 난폭한 언동보다는 좀더 나은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고, 캄캄한 분노의 세계가 아니라 밝고 따뜻한 부드러운 기분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또한 8년후 제인의 파토스와 로고스적 자아의 조화로운 기품은, 리이드 부인이 죽기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오로지한 그 파토스을 압도하였다.
열여덟이 된 제인을 리이드부인은 임종 무렵 침상 곁에서 상면하였는데, 제인이 내미는 화해의 손길을 한사코 뿌리친 채로 고정관념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채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다. (제인은 외숙모에게 용서와 사랑을 구하였고, 리이드부인은 끝까지 간직한 제인을 향한 미움의 감정을 감추기는 커녕 그 감정을 굳이 토로하면서까지- 아, 리이드부인은 그 미움의 감정을 들려주기 위하여 제인으로 하여금 먼길을 달려 오게 하였던 것이다.)
리이드부인이 냉혹한 사람은 아니었더라도 이 부분에서는 참으로 냉혹하였으며 또한 불쌍한 사람이었다.
오, 모쪼록 어린 제인의 기품은 내게 요원할지라도 적어도 늙은 리이드 부인을 닮은 임종은 내게 있지 말지니.
-계속-
[제인 에어 2/2]
제인의 자존(自尊).
외숙모의 저택이나 로우드의 학교생활에 비하여 손필드는 제인에게 말할수 없이 행복한 곳이었다.
그것은 로체스터를 사랑하므로 얻게 되는 제인의 감정적 기쁨과 더불어 생겨난 행복이기도 한 것이다.
(아래 발췌문은 중략도 많고 내가 멋대로 변형한 문장도 많다.)
<‘손필드에서 즐거운 나날이 흘러갔다. 이 지붕 밑에서 보낸 처음 석 달 동안의 고요하고 단조롭고 쓸쓸했던 것과는 얼마나 큰 차이일까! 이 집안에서 느꼈던 쓸쓸한 기분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어두운 상념도 모두 잊혀졌다. 진종일 활기찬 움직임으로 가득했다. 나는 로체스터 씨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머지않아 잉그람양이라는 귀부인과 결혼할 것임을 느꼈다고 해도,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사랑을 식게하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잉그람양을 질투하지 않는다.’>
지위로나 재산으로나 미모로나 재능으로나 무얼 보더라도 까마득하게 높다란 ‘잉그램’양이라는 귀부인에게 제인은 주눅 들지 아니 하였다.
그녀의 통찰력은 잉그람의 언행에서 그녀의 가치를 간파하였고, 제인의 자존(自尊)은 조금도 상처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자존이 사랑의 기쁨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미스 잉그람은 훌륭해 보이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아름다운 용모와 뛰어난 예절은 있었지만 천성은 나면서부터 가난했고 마음은 거칠었다. 그 토양에서는 아무 것도 자발적으로 꽃피지 않았고, 스스로 익은 자연적인 그 신선함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녀는 선량하지도 않았고, 책에서 배운 사치한 문구를 흉내낼뿐 독창력도 없었다.’>
그러나 제인의 사랑의 성취란 언감생심의 꿈.
현실에서 두 사람의 간극은 너무도 컸던 것이다.
로체스터가 잉그람 양과 결혼하고 나면 자신은 손필드를 떠나야 함도 익히 알고 있었고, 그것은 이루 말할수 없이 슬픈 사실일테지만 그녀의 로고스는 이를 수렴하여 독신을 결심하고 있었다.
제인은 그림을 그린다.
자신을 다스리기 위한 일종의 자위놀음이다.
자신의 얼굴은 흑백의 초크로 못생기게 그리고, 원색의 화려함으로는 잉글람의 초상을 그린다.
그리고는 그 두 그림을 비교하는 것이다.
용납하지 못하는 자신의 파토스를 자신의 로고스로서 이해시키고자 하는 눈물겨운 몸짓이다.
그러나 제인을 향한 로체스터의 사랑 역시 깊었다.
어느 여름날 로체스터는 제인 에어에게 청혼하였다.
이 대목은 세익스피어 희곡의 아름다운 한 대목을 읽는 것 같다.
장황하지만 인용한다.
<제인은 격정에 쫓기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에게 있어 이제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된 이상 나는 여기 있을 수가 없어요. 저를 감정이 없는 자동 인형으로 아세요? 감정이 없는 기계로? 입으로부터는 빵을, 손으로부터는 삶에 필요한 한 잔의 물을 빼앗기고도 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가난하고, 신분도 낮고 또 못 생긴 조그만 여자라고 해서 저를 영혼도 감정도 없는 인간으로 아셨나요? 그렇다면 저를 잘못 아신 거예요. 제게도 당신 못잖은 영혼과 감정이 있어요. 만일 하느님께서 얼마간의 아름다움과 풍부한 재산을 베푸셨더라면, 제가 당신 곁을 떠나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처럼 당신 역시 저와 헤어지는 것을 괴로워하도록 해 주셨을 거예요. 저는 습관과 인습, 그리고 이 허물어지기 쉬운 육신을 통해서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저의 영혼이, 또 당신의 영혼이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우리 두 사람이 무덤을 지나 하느님의 발밑에 평등하게 서 있는 것처럼. 그래요, 우리들은 평등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서로 평등해!" 하고 나를 두 팔로 끌어당겨 자기 가슴에 안고, 입술로 내 입술을 힘껏 누르며 그는 말했다. "이렇게 제인!" "그래요, 정말" 나는 대답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해요. 당신은 결혼할 분이- 당신보다 훨씬 못한 사람과 결혼하려는 분이니까, 당신은 조금도 공명을 느끼지 않으면서, 당신이 진정 사랑하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 사람- 아닌가요? 저는 당신이 그 사람을 비웃는 것을 똑똑히 보고 들었습니다. 전 그런 식의 결혼을 경멸하는 거예요. 그러니 제가 당신보다는 더욱 낫다고 생각돼요. 이젠 놔 주세요. 가도록 놓아 주세요." "제인, 조용히, 죽을 힘을 다해 자기 깃털에 상처를 입히는 미친 새처럼 제발 그렇게 몸부림치지 말아요." "전 새가 아녜요. 어떤 그물에도 유혹당하지 않아요. 전 독립된 사고를 가진 자유인이에요. 그 의사로써 판단하여 저는 당신과 헤어지려는 거예요." 나는 다시 한 번 자유로이 되려고 몸부림치고 그의 앞에 꼿꼿이 섰다. "그런 당신의 의사가 곧 당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거예요." 그는 말했다. "내 곁으로 와 주시오, 제인. 그리고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 봅시다." "저는 두 번 다시 당신 곁으로 가지 않아요. 이미 떨어져 나갔어요. 되돌아가지는 못할 거예요." "그러나 제인, 나는 아내로서 당신을 부르고 있는 거요. 내가 결혼을 생각한다면 상대는 오직 당신 뿐이오. 제인, 나는 잉그람 양과 결혼할 의사가 전혀 없소. 당신이라는, 거의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당신이라는 사람을 나는 내 몸처럼 사랑하오. 가난하고, 신분도 낮고, 잘 생기지 못한 조그맣고 평범한 사람에게, 나는 나를 남편으로 받아 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제게!" 나는 소리쳤다. 그의 진지한 태도와 예의를 벗어난 말투를 나는 서서히 믿기 시작했다. "당신 외엔 친구도 하나 없고, 당신이 주는 돈 외엔ف실링도 가지지 않은 제게 말예요?" "그렇소, 당신에게요. 제인, 나는 나의 것으로써 완전한 나의 것으로 당신을 손에 넣고 싶소. 빨리 그렇게 한다고 대답해 주시오." "로체스타 씨,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해주세요. 달이 있는 밝은 쪽으로 얼굴을 돌려 주세요." "왜?" "당신의 얼굴에서 마음을 읽겠어요. 저쪽을 봐 주세요." "자아, 실컷 보시오. 마음대로, 그리고 어서 읽어요. 나는 괴로우니까." 그의 얼굴은 빨갛고, 근육이 경련하고, 눈빛이 이상스레 빛나고 있었다. "오오, 제인! 당신은 나를 고문하는구려!" 그는 외쳤다. "그 꿰뚫는 듯한, 그러면서도 성실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당신은 나를 고문하는구려. 제인, 나를 에드워드라고 불러요. 이름을 불러요. 그리고 ‘에드워드, 당신과 결혼하겠어요’라고 빨리 말해 주시오." "진정이세요? 정말 저를 사랑하세요? 진심으로 아내가 되기를 원하세요?" "진심으로. 맹세하라면 맹세하겠소. 그럼 맹세하지." "그럼 로체스타 씨, 저는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에드워드라 불러요. 나의 조그만 아내!" "사랑하는 에드워드!" "이리 와요, 이젠 아주 내 곁으로." 그는 뺨을 내 뺨에 비비면서 가만히 속삭였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오. 나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소." "주여 용서하소서!" 얼마 후에 그는 덧붙였다. "인간의 간섭을 난 용서하지 않아, 나의 것인 이 사람을 나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사랑이 성취된 기쁨에 취하여 로체스터는 가지가지 보석과 의상과 여행의 선물을 안겨주려 하였지만, 제인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로체스터의 그러한 즉흥적 감정상태였다.
일방적으로만 퍼부어지는 부(富)의 세례를 그녀는 조금도 기뻐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그것은 제인의 괴로움이어서 제인은 한사코 거부한다.
부의 불균형의 문제는 사랑의 주제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사회 관습적인 의미의 결혼이라는 형식에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수 있다는 사실이 제인은 괴로운 것이다.
그와 같은 물질적인 것에 종속되어 사랑의 독립성이 훼손될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자존을 건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정신이란 자유로운 것, 종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녀의 사랑 역시 무엇엔가 종속되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외숙모가 숨겨놓고 내게 알려주지 않은 편지, 얼굴도 모르는 삼촌이 날 양녀로 하여 유산을 물려주고 싶어한다는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구원이야. 내가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자립은 할 수가 있잖아. 로체스타 씨에게 인형처럼 사치의 대상이나 되고, 황금빛이나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용납할수 없어.>
기실 제인의 이상주의는 사뭇 엄격해 보이지만 그녀의 현실주의는 굉장히 영리한 것이다.
제인은 도그마의 사람이 아니다.
비둘기처럼 순결하지만 뱀처럼 교활한 것이 어쩌면 제인에어이다.
<"당신은 세린느 바렌(아델의 어머니)에 대해서 말씀하신 걸 기억하세요? 다이아몬드나 캐시미어의 천을 준 걸 말예요. 저는 당신의 영국제 세린느 바렌이 되지는 않아요. 전 아델의 가정교사로 행동할 거예요. 다만 그것으로서 집과 식사와 또 연봉㺞파운드의 급료를 벌겠어요. 그 돈으로 제 옷을 사고, 당신에게선......" "내게는......?" "당신의 마음을 받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 보답으론 제 마음을 드리니까요. 그걸로 빚은 상쇄되는 거예요." “흠, 그 냉정한 거만과, 순수한 자존심에 있어선 아마 아무도 당신을 당할 수 없겠소.">
<그는 일어나서 내게 가까이 왔다. 그의 눈은 독수리처럼 빛났고, 붉은 얼굴 가득히 부드러움과 정열이 넘쳐흘렀다. 나는 겁이 났다. 그러나 곧 기운이 솟았다. 정에 이끌린 장면이나 심한 애정의 표현은 삼가야 한다. 나는 그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었으므로 곧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래서 그가 다가왔을 때 쌀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와 결혼하려는 거예요?" "나의 제인에게서의 그런 질문은 좀 우스운데......" "아니, 저로선 당연한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의 미래의 아내는 함께 죽어야 한다면서요? 그런 이교도적인 사상은 어찌된 일이에요? 전 당신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그건 분명해요." "아아, 내가 가슴 깊이 원하고 바라는 건 당신과 함께 사는 것 뿐이야. 당신에게 죽음이 있어서야 될 말인가." "아녜요, 저 역시 때가 오면 죽어야 할 권리가 있어요. 다만 그때를 기다릴 뿐이지, 인도의 아내처럼 따라 죽는 것은 할 수 없어요." "그래. 내가 멋대로 가사를 바꾸어 노래한 것을 용서하시오. 그리고 용서의 표시로 화해의 키스를 해줄 순 없겠소?" "물론 해드리고 말고요." 그는 나를 '이 고집통' 이라고 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여자라면 자기를 칭송하는 노래엔 뼈까지도 녹아 버릴 텐데." "네, 그래요. 전 고집통이에요. 부싯돌처럼 고집스러워서 이제부턴 그런 저를 자주 보실 거예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결혼식장에서, 일단의 불청객의 폭로로 결혼은 깨어졌다.
제인 에어는 비로소 손필드 저택에 울리는 이상한 웃음소리와 어느날 밤의 방화와 방문객이 잇빨상처를 입은 내막, 곧 저택의 삼층에 숨겨진 로체스터의 미치광이 아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더불어 사랑하는 로체스터의 그 어두운 표정 뒤의 그림자의 정체 또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의자에 앉았다. 지치고 피로했다. 테이블에 두 팔을 얹고, 그 속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언제나처럼, 별로 눈에 뜨이는 변화도 없이 보통 때처럼 그대로 내 방에 있었건만 어제의 제인 에어는 어디에 있는가? 그녀의 생활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앞날은 어떻게 되는가? 제인 에어, 열렬한 기대로 가슴 부풀던 여자- 막 신부가 되려던 여자 - 이제 그녀는 다시금 차갑고 고독한 여자로 돌아갔다. 생활은 더욱 비참하고 앞날은 황량해졌다. 희망은 모두 사라졌다. 나는 나의 사랑을 바라보았다. 아아, 사랑은 이미 그로부터 뒤돌아서 있었다. 성실은 시들고 신뢰는 무너진 것이리라! 로체스터 씨는 이미 내게 있어 그 전의 그가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배반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는 결백한 진실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이제 그의 곁을 떠나야만 한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나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나!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일시적인 정열이었을 뿐 진실이 아니었던가. 아아, 눈이 먼, 나약한 행동 뿐인 제인 에어여!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어둠이 소용돌이쳐 갖가지 상념이 검은 탁류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스스로 절망하고 긴장이 풀리고 기진한 나머지, 나는 큰 강가의 모래펄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먼 산에서 홍수가 일어나 내게 거센 물결이 닥쳐오는 듯했다. 일어설 의지도, 피할 기운도 없이 나는 오직 죽기를 원하며 넋을 잃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제인의 로고스는 로체스터를 더욱 사랑하고 있었다.
어쩌면 완벽한듯한 그에게도 흠결이 있어, 움츠러 들었을지 모를 여태까지의 그녀의 자존은 다시 살아나서 제인은 어쩌면 일견 만족하였는지도 므르겠다.
<'내가 로체스터 씨의 신부가 아닌 것은 내 슬픔 중에선 가장 작은 부분입니다. 그 황홀한 꿈에서 깨어, 그것은 공허하고 무의미하기 그지없는 것이라는 것도 나는 참을 수 있고 이겨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설임 없이 이 자리에서 그분 곁을 떠나는 것만은 할 수 없어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요.' 그러나 내 마음속의 목소리는, 너는 꼭 그렇게 하리라고 예언했다. 나는 이 결의와 싸웠다. 폭군처럼 드세어진 양심은 정열의 목덜미를 쥐고, '나는 무쇠 같은 팔로 널 끝없는 고통의 수렁에 빠뜨릴 테야.' 하고 으르렁대는 것이었다."그럼 나를 데려가 줘요!" 나는 소리쳤다. “아니, 넌 네 힘으로 가야 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바른쪽 눈을 도려내고 바른팔을 잘라야 한다. 그리고 심장을 제물로 삼고 네 자신이 사제가 되어야 하는 거야.">
<“나는 오랫동안 당신의 방문 밖에서 귀기울이고 있었어. 어쩌면 그토록 움직이는 기색도, 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던지. 마치 죽음과 같은 정적이야. 5분만 더 지체했다면 나는 이 문을 뜯어냈을 거요. 흠흠, 당신은 역시 날 피하고 있군. 아니, 조금도 울지 않았어. 얼굴이 창백하고 눈동자에 빛은 없지만 눈물 자국은 없어. 그러는 당신의 가슴엔 피눈물이 흐르고 있겠지, 제인! 어째 한마디의 나무람도 없소? 뭐라도 좋으니, 내게 한바탕 퍼부어 봐요. 당신은 그저 내가 앉힌 장소에서 그대로 내 얼굴만 지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요? 제인, 제인 난 당신을 괴롭힐 생각이 아니었어. 당신은 지금 내가 한탄하는 만큼의 슬픔은 느끼지 못할 것이오. 날 용서해 주오." 기꺼이 나는 그때, 그 자리에서 그를 용서했다. 그의 동공에 서린 회한을 보았고, 어조에도 절실한 동정이 담겼으며 사나이다운 기백이 넘쳐흐르는 그의 표정이며 태도에는 나에 대한 변함 없는 애정으로 가득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용서했다.>
<“이젠 손필드 저택을 아주 닫아 버리겠어요. 현관에 못을 치고, 아래층의 문들엔 판대기를 쳐 버리겠소. 풀 부인에겐 연봉ق백 파운드를 주어 당신이 말하는 소위 내 아내, 그 악귀와 함께 여기서 살도록 하겠소.”"당신은....." 하고 나는 말을 막았다. "불행한 그 사람에게 너무 심하시군요. 그 사람이 미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요!" “제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당신은 나를 오해하고 있군. 내가 그녀가 미쳤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럼 마찬가지로 당신이 미쳤다면 내가 미워할 줄로." "그렇게 생각해요." "그건 잘못이야, 제인. 당신은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고, 내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소. 당신의 살 속에 있는 세포 하나일지라도 그것은 나의 그것과 똑같을 정도로 내겐 귀중하고, 또 사랑하오. 어떤 괴로움이나 아픔을 받더라도 당신의 마음은 내 보배요. 그것이 설혹 잘못되었을 때라도 마찬가지요. 아니, 난 손필드로부터 떠나는 얘기를 하고 있었지. 모든 준비는 다 갖춰져 있소, 제인. 내일 출발합시다. 이 지붕 아래서 하룻밤만 더 참으면 돼요. 날이 새면 이 비참과 공포를 우리는 영구히 벗어나는 것이오.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소.">
<새 출발을 하는거야. 당신은 나의 아내가 되는 거요. 난 결혼한 사람이 아니니까. 당신은 로체스터부인이고, 실질적으로나 명목상으로 난 내가 살아 있는 한 당신만을 지키겠소. 우리는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에 있는 흰 색의 별장으로 가서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고 깨끗한 생활을 합시다. 당신을 내가 그릇된 길로 이끈다거나, 당신을 정부로 만든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마오. 아니, 왜 고개를 흔드는 거요?”"로체스타 씨, 당신의 부인은 살아 있어요. 스스로 인정했잖아요. 당신의 원대로 내가 함께 살면 그것은 정부가 아니고 무엇인가요? 부인하셔도 그것은 궤변에 불과해요." "제인, 나는 성질이 온순하지 못해, 그걸 잊었나? 조심해요!">
그리고 로체스터는 자신의 아버지와 형에 대하여, 자라온 환경에 대하여, 결혼에 얽힌 사연에 대하여, 기나긴 이야기를 제인에게 들려 주었다.
<“이야기가 언짢소? 기분이 나쁜 것 같군. 나머지는 다음날에 할까?" "아녜요, 지금 하세요. 참 안된 일이군요. 당신은 불행하신 분이군요." "제인, 연민이라는 것은 받는 사람에 따라선 그것을 그자의 면상에 도로 던져 주고 싶은 것이라오. 하지만 당신의 연민은 그와는 달라. 제인, 당신의 연민은 사랑을 잉태한 모성이오. 그 고민은 심적인 정열을 낳기 위한 진통이오.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겠소, 제인." "이야기를 계속하세요. 그분이 미친 것을 알았을 때의 당신 심정을요." "제인, 나는 절망의 극한까지 도달했소. 나와 그 심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오직 조금 남아 있는 한 가닥 자존심 뿐이었소. 세상 사람들은 나를 음산하고 불명예스러운 눈으로 보았소. 그러나 나는 내 자신의 눈으로부터 더러움 없는 자가 되려고 결심하였소. 그녀가 살아 있는 한에는 나는 다른 아내를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알았소. 나보다 다섯 살이 위인 그녀는 정신이 허약한 반면에 육체는 몹시 건강해서 내가 죽기 전까지는 살아 있으리라는 것도 알았소. 그래서 내 나이 스물여섯에 나는 이미 모든 희망을 잃었소. 어느 날 밤 나는 그녀의 고함 소리에 눈을 떴소. 그녀는 정신 이상 선고를 받은 후엔 쭉 감금되어 있었소. 불처럼 무더운 밤, 흔히 서인도에는 태풍이 오기 전의 날씨가 바로 그렇지요. 나는 다시 잠들 수 없어서 창문을 열었소. 지진처럼 우람한 파도 소리가 침실에까지 들려서, 검은 구름이 그 위를 뒤덮고 있었소. 달을 뜨거운 포탄처럼 커다랗고 빨갛게 파도 속으로 잠기려 하고 있었소. 이런 광경에 가뜩이나 감격해 있는데 저 광인이 계속 내지르는 저주의 말이 귓속 깊이까지 울려 오고, 그녀는 악마처럼 증오를 담은 목소리를 내질러 그 속에는 두고도 분명하게 들리고 있었소. '이런 생활은 지옥이다.' 하고 마침내 나는 말했소. '이것은 지옥의 공기야, 지옥에서의 고함 소리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내게는 이런 생활로부터 탈출할 권리도 있다!' 나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탄환을 장진한 피스톨이 들어 있는 트렁크를 열었소. 자살하려 했던 것이오. 그러나 그 생각은 사라졌소. 나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자살의 의사와 계획을 품게 한 극단의 절망의 위기는 곧 사라졌소. 하나의 희망이 내게 '가라!'하고 소리쳤소. '유럽에서 살도록 해라. 어떤 오욕적인 이름이 네게 붙여졌어도, 어떤 추악함이 네게 있어도 그곳에선 너를 알지 못한다. 너는 그 미친 여자를 영국으로 데려가, 그에 알맞는 간호와 경계 밑에 손필드 저택에 숨겨 두는 것이다.. 그리고 네 마음에 맞는 여행을 즐기며 새로운 인연을 만나라”“그녀를 여기 두고 당신은 무얼 했나요? 어디에 있었어요?" "나는 도깨비불이 되었다오, 제인. 그래서ك월달의 메마른 바람처럼 닥치는 대로 방황했다오. 대륙으로 가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전하였소.”>
<나는 무서운 시련을 맛보고 있었다. 불붙는 무쇠처럼 억센 손이 나의 내장을 움켜잡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타는 지옥. 나는 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그 공포의 한순간.. 나는 이 분에게서 떠나야 한다. 오랜 침묵 후에, "제인!" 하고 너무나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까닭 모를 불길한 공포가 슬픔에 찬 나를 돌덩어리처럼 싸늘해지게 만들었다 - 왜냐하면 그 조용한 말소리는 바야흐로 뛰어들려는 사자의 허덕임이었으니. "제인, 그렇다면 당신과 나는 이 세상에서 서로 각각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건가?" "네." "아아, 제인, 그건 너무해! 날 사랑해서 안 될 일이라도 있나?" "당신의 말을 따르는 것은 잘못이에요." 그의 얼굴에 눈썹이 치떠지고 난폭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각오하고 있었다. "잠깐만 제인, 잠시라도 좋으니 당신이 떠난 후의 내 생활을 한 번 상상해 봐요, 무엇이 남겠소? 당신과 함께 내 모든 행복이 박탈당하고, 아내라는 그 미치광이가ك층에 있을 뿐이야. 그곳에 묻혀 있는 시체와 나와는 뭐 별다를 게 있소? 그렇게 되면 나는 어쩌라는 거요, 제인? 한 사람의 길동무 - 그 작은 희망을 이제 어디서 구한단 말이오?" "제가 하는 것처럼 하세요. 하느님과 자신을 믿으세요. 천국을 믿는 거예요.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는 거예요." "그럼 아무래도 승낙할 수 없다는 말이오?" "네." "그렇다면 사랑과 더러움이 없는 생활을 나로부터 빼앗으려는 건가? 또 다시 흙탕물 같은 정욕, 더러운 악행을 팔러 다니라고 나를 내던지는 거군요?" “당신에게 그걸 강요하는 건 아녜요. 우리들은 누구나가 시련과 싸우고 극복해 나가도록 생을 타고난 거예요. 그러니 저도 당신도 그걸 따라야지요. 제가 당신을 잊기도 전에 당신은 저를 잊으실 거예요." 나는 싸웠다. 나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로체스타 씨는 나의 뚜렷한 생각을 확립시키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노여움은 절정에 닿았다. 뒷일은 어쨌건 그것에 몸을 내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주저없이 내게로 다가와 팔을 붇든 후 사정없이 나의 허리를 낚아챘다. "아아, 이처럼 연약하면서도 이처럼 굳센 것이 또 있을까. 나의 손아귀 속에서는 여린 갈대처럼 약하기만 한 게!" 이를 악물고 그는 나를 힘껏 껴안고 마구 흔들어 대었다. "나의 두 손가락으로 꺾여질 이 몸뚱아리, 하지만 굽히고 부수고 꺾어 봐서 그게 무슨 소용이람? 이 눈을 봐라, 필사적인 각오로써 대담하고 겁이 없이 용기 이상의 것으로 나를 보면서 엄연한 승리에 차 내게 반항하고 있다. 이 겉 껍데기를 허물어 봐야 무슨 소용인가. 이 눈을 떠라, 겁을 모르는 아름다운 것에는 내 손도 미치지 못한다. 당신의 마음에 상관없이 당신을 잡아 본들 당신은 향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아아, 제인, 내게로 와 주구려."아아, 무한한 비애가 담겨진 그 목소리, 말로는 다하지 못할 그 애수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는 괴로움. "전 가야 해요." "알았어, 그렇다면 가요. 하지만 잊지는 알아요. 이처럼 괴로워하는 나를 두고 당신이 가는 것을 말이오. 당신 방에 돌아가면 내가 얘기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오. 내 생각을 해보고 괴로움을 알아 줘요." 그는 돌아서서 소파에 몸을 던지고 얼굴을 묻어 버렸다. "오오, 제인! 내 희망, 나의 사랑, 내 생명이여!" 그는 오열을 참아내지 못했다. 길고도 강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때 문께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곧 되돌아갔다. 물러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도 주저없이 나는 그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쿠션에 묻은 얼굴을 내게로 돌려 그 눈에 입을 맞추었다.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소중하신 저의 주인님!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시길......" 나는 말했다. "하느님은 모든 재난과 과실에서 당신을 구원하십니다. 당신을 인도하시고 위안을 주시며, 이제껏 제게 베푸신 친절에 대한 보다 훌륭한 보답을 주십니다." "보답으로라면 당신의 사랑이야. 그것이 없으면 내 가슴은 찢어진다. 그러나 제인은 내게 반드시 사랑을 줄 거야, 숭고하게, 아낌 없이."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돌았고, 눈은 빛났다. 그는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내게로 벌렸다. 그러나 나는 포옹을 피하여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안녕히 계세요." 그의 곁을 떠날 때 나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영원히, 안녕히 계세요.">
제인은 로체스터의 저 파토스를 잠재울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의 파토스 역시 그와 함께 있고 싶다는 열망에 휩쌓여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제인의 로고스는 필사적으로 그러한 눈먼 열망을 이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로체스터의 정부(情婦).
그것은 스스로에게 있어서 파토스만이 환호하는 ‘낙원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사랑하는 로체스터를 도덕적 암흑 속으로 빠뜨리는 치명적인 인도의 손길이었다.
그날 밤 제인 에어는 아무도 모르게 몇푼의 돈과 몇 옷가지만 챙겨든채 손필드의 저택을 빠져 나와서 정처없는 발길을 옮겼다.
이것만이 제인 에어라는 한 여성이 가지고 있는 어쩔수 없는, 슬픈 도덕적 자존(自尊)의 고결(高潔)함이었다.
고난 끝(굶주림에 지쳐서 구걸을 하는등, 제인 에어는 낯선 곳에서 죽더라도 로체스터를 떠났음에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에 위트크로스라는 고장에 둥지를 튼 제인 에어.
그곳에서 고모의 자제들인 두사람의 여성과 한사람의 남성인 사촌들도 해후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형제로부터 자신에게 막대한 재산이 상속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근대소설의 드라마적 안일한 대응은 폄훼할 요소가 아니다.)
2만 파운드. 속물 호사가(好事家)인 나는 그 돈의 규모를 대충 계산하여 보았다.
아델의 가정교사로서 제인이 받는 연봉이 30파운드였으니까, 2만 파운드라면 연봉의 약 700배. 연봉 30파운드를 천만원쯤(극단적으로 적게 잡은 우리돈의 개념)으로 환산하여 보니, 2만 파운드라는 금액은 70억이라는 큰 재산이다.
자신에게만 상속되어진 그 재산을 제인 에어는 법률적 공증을 거쳐서 고종 사촌인 형제 세사람과 천파운드씩 나누어 갖는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공정하지 못한 처사에는 언제나 분연(忿然)하였었다.
법적으루다 정당하게 취득한 재산을 우연히 알게 된 사촌들이지만 촌수(寸數)의 공평함에 따라 나누어야 한다는 욕심없는 제인.
작위적이지만 제인 에어의 면모로서는 적실한 모습이다.
어느날, 제인 에어에게 신비한 현상이 찾아왔다.
<방 안에는 달빛이 가득 찼고, 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 고동 소리가 내게 들려오는 듯하더니 갑자기 그 심장이 뚝하고 형언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에 꿰뚫리는가 싶은 순간 어떤 전율이 전신에 퍼졌다. "무엇을 들었나요? 뭘 봤습니까?" 세인트 존이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어디선가 부르짖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다. '제인! 제인!' 하는 소리를...... "오오, 하느님, 저것이 무엇일까요?" 나는 허덕였다. 나는 저것은 '어디일까요?' 하고 물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허공에서도, 지하에서도 아닌 것이다. 분명히 들었으나 어디서, 또한 어디로부터인지를 영원히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가 잘 기억하는, 내가 그토록 사랑한 목소리, 바로 에드워드 페어펙스 로체스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괴로움과 슬픔에 미친 요귀처럼 가슴을 찢을 듯이 부르고 있었다. "가겠어요!" 나는 소리쳤다. "기다리세요! 곧 가겠어요!" 나는 문께로 달려가 복도를 내다보았다. 어두웠다.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어디 계세요?" 나는 소리쳤다. 마쉬 글렌의 골짜기 이쪽 저쪽에서 메아리가 대답했다. "어디 계세요? 당신에게로 가겠어요.">
바로 그 시간 로체스터는 기도하면서 제인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공간을 초월하여 그 목소리가 제인에어의 귀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내 귀에는 “캐시! 캐시! 죽음으로라도 돌아오라!”눈보라 속에 부르짖는 히스클리프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하다.
어떤 분위기로서 브론테 자매는 이 신비주의를 나누어 가졌을까.
모두에 이 소설이 내게 끼친 것이 로고스적인 감동이라고 하였는데, 제인과 로체스터의 감성에서 느껴지는 사랑의 주된 색조는 아무래도 파토스적인 것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다.
허기는 이성적 사랑이라니, 게 무슨 맛이 있다고.
해후.
로체스터 아내의 광기는 손필드의 저택을 태워 버리고 남편을 장님과 외팔이로 만들어 버리고 나서야 스스로의 죽음으로서 끝장이 났다. (심신상실자에 대한 나의 비정한 어투가 문제라면 소설을 내밀수 밖에, 나도 일견 그러하거니와 내 주위에도 숱하게 있지만)
제인에게는 재산이 생겼고, 비록 로체스터는 불구가 되었지만, 비로소 두 사람은 완벽한 조건으로서 해후하였다.
적어도 제인 에어는 완벽하게 독립된 정신으로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선 것이다.
<"뭐라는 거야? 나는 이제 무슨 광기에라도 사로잡힌 것일까?" "망상이 아녜요. 광기도 아니에요."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만 목소리 뿐이고 게다가 보이질 않으니.“나는 더듬거리는 그의 손을 붙잡아 두 손으로 꼭 움켜잡았다. "오오, 그 사람의 손이다!" 그는 외쳤다. "이것은 그 사람의 조그맣고 가는 손이야. 그럼 손 말고도 또 있겠지?" 나는 팔을 붙들리고, 어깨를 - 목을 - 허리를 안기어 끌려갔다. ”이건 제인이지? 분명 제인이야. 내 말이 맞지. "제인 에어! 오오, 제인 에어다!" "나의 둘도 없는 주인님!" 나는 대답했다. "마침내 당신을 찾아서 돌아왔어요!" "정말이오? 살아 있소? 당신은 살아 있는 나의 제인인가?">
<“내 곁에 있어 주겠단 말이오?" "물론이에요. 당신만 지장 없으시다면 전 당신의 이웃, 당신의 간호사, 가정부, 뭐라도 다 좋아요. 책도 읽어 드리고, 함께 산책도 하고, 곁에서 시중을 들며 당신의 눈과 손발이 되어 드리겠어요. 제가 있는 한은 이제 당신을 쓸쓸하지 않을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마치 사자처럼 달라져 버렸어요. 머리는 독수리 날개 같아요. 손톱이 새 발톱같이 되었는지 어쩐지는 아직 못 보았지만 말예요." "이쪽 팔엔 손톱은 커녕 손도 없어." 그는 가슴께로부터 절단된 팔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그저 끔찍히 뵈는 뭉뚱한 살덩어리일 뿐야." "애처로워요. 당신의 눈과 이마의 덴 자리를 보면요. 하지만 이상하지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더 사랑하게 되어 정신을 차릴수도 없을 것 같으니 말예요. 당신이 형편없는 여자라고 생각할 것 같은 막말을 하면 큰일이지요. 자아, 잠깐만 놓아 주세요. 불도 좀 보고 청소도 해야 하니까요.">
<"저녁은 먹은 적이 없어." "그래도 오늘 저녁은 잡수세요. 전 배가 고파요. 당신도 저녁 먹는걸 그저 잊고 있을 뿐이에요." 메어리를 불러서 나는 다소나마 이 방을 기분 좋게 꾸미게 했다. 그리고 그가 즐길 듯한 식사 준비를 했다. 그의 곁에서 나는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를 위로하고 또 용기를 주는 듯했다. 또한 그렇게 느끼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의 앞에서 나는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내앞에서는 그도 행복했다. 눈은 멀었어도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찼고 희열로 이마는 밝게 빛났다. 얼굴의 윤곽도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제인 에어.
오래참음, 절제, 근검, 사랑, 희락, 화평,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제인에어가 가지고 있는 로고스적인 아름다움, 그 덕목의 근원은 기독교의 그것이다.
파토스의 아름다움까지도,
그리고 그녀가 부당한 대상에 저항하는 아름다움 역시 기독교의 그것이다.
이 소설에는 세사람의 청교도의 전형이 등장하지만, 제인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았음을 주목하라.
첫째, 브로클허스트.
자선여학교 로우드의 이사장인 이 사람의 기독교는 유황불 지옥과 근검 소박에만 방점을 찍는 독선적이고 엄격한 기독교이지만 죄 거짓이다.
마누라 딸들의 호화로운 의상, 로우드 자선학교의 예산 착취는 눈에 뻔하다.
위선자, 외식(外飾)하는 사람, 전형적인 바리새인,
제인은 진작 이 사람을 간파하고 있었다.
둘째, 헬렌 번즈.
결핵으로 콜록이던 제인의 유일한 벗.
제인이 이 소녀의 병상에 누워 함께 자던 날 밤에 죽었다.
순결한 신앙.
현실보다는 천국의 삶을 동경하여 제인에게 속삭이는 현실적 삶의 허무.
제인은 그녀를 사랑하였지만 헬렌 번즈의 천국에 동행하기를 거부하였다.
셋째, 세인트 존 에어.
실은 제인의 고종사촌이며, 잘생긴 목사로서 확고한 신앙의 소유자.
그의 자아는 투철한 목적의식만이 지배한다.
소명감에 불타는 엘리아같은 사나이.
그를 사랑하는 어여쁜 여인이 있고 그의 파토스는 그녀에게 기울어 있지만 의지로서 그를 부정한다.
제인에어의 로고스적 외양만을 취하여 결혼하여 함께 인도에 가서 전도의 삶을 살자고 강권하지만 제인에어가 그의 청혼을 수락할 리가 없다. (존 에어의 청혼이 없었고, 로체스터 주변의 변화가 없었다면 헌신적인 봉사의 삶이란 제인에게는 딱 맞았을지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완강하게 외면하는 존 웨어, 그의 왜곡된 파토스가 제인에어는 슬펐던 것이다.
여성.
제인 에어처럼 운명에 휘둘리지 않은 삶을 살았던 여성은 누구였을까.
마사 퀘스트, 채털리 부인, 노라 정도...
아아,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빨래처럼 휘두르지는 않았구나.
그러나 대부분 드라마 속의 여성들이란 제인에어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지, 드라마는 비극적이라야 먹히는 법..)
운명에 휘둘리며 살았던 여성들.
소피, 다음달 읽을 테스, 카추샤, 춘향이, 월선이, 소피아, 마리아,
특히 테스는 얼마나 제인 에어와 배리(背理)되는 캐릭터인지.
남성제위에게 묻건대, 그대의 반려로서 '제인 에어'는 어떠한가.
환호하려는가.
내게 묻는다면 '글쎄요'다.
(술자리같은데서 객쩍게 회자(膾炙)되는, 남자들이 바라마지 않는 여성상, 거실에서는 숙녀 침실에서는 창녀.... 어쩌구하던데.. ㅎㅎ)
위대한 작가 안톤 체홉이 보여 주었던 한 여성상이 있다.
체홉의 ‘귀여운 여인’
줏대없는 나약함으로 오로지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삶만을 희구하는, 순종적이고 귀여운 여인 '올렌카'같은 여자가 나는야 좋더라.
‘제인 에어’같이 올곧고 뻣뻣한 여자보다는.
실없는 마무리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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