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테스> 前
-토마스 하디 作-
***동우***
2010년 7월 30일
[테스 (Tess)]
원제: [더버빌가의 테스 (Tess of the d'Urbervilles)]
著者 : 토머스 하디 (Thomas Hardy, 1840~1928)
영화 : 테스 (Tess)
제작년도 : 1980년
감독 : 로만 폴란스키
출연 : 나스타샤 킨스키, 피터 퍼스, 존 베트, 존 콜린, 토니 처치.
테스.
‘테레사 더비필드’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인의 슬픈 이야기.
비극의 서막.
가난한 농사꾼인 테스의 아버지 ‘잭 더비필드’가 우연히 자신이 옛날 노르만의 명문인 더버빌 가문의 직계후손이라는 사실을 얻어듣게 됨으로 시작되었다.
빛바랜 양반명색에, 서푼짜리 자부심과 허황한 꿈을 갖게 되는 아버지로 부터.
서사의 종장.
아득한 옛날부터 솔즈버리 평원에 신비로운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신석기 시대의 거대한 석조구조물 스토운 헨지.
그곳에서 체포된 테스가 처형됨으로 비극적인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더버빌가문과 스토운헨지.
오래된 것들, 이것은 소설의 모두(冒頭)와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알레고리일 법 하다.
몰락하여 사라진 몇백년전 가문의 후광, 그 흔적에 연연하는 어리석음.
그리고 몇천년 전 돌무더기의 유적.
영화로웠던 한 시절 환영(幻影)의 추상성과 형해화(形骸化)된 거대한 실체성.
되돌아 보니 청춘의 찬란함이란 찰나(刹那)처럼 느껴진다.
죽네사네 하였던 한때의 사랑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던가.
시공(時空)에 따라 인습과 생각들은 또 얼마나 가변적인 양상을 드러내는지.
테스가 지니고 있는 저 순결성이란 이 시대 젊은 여자들에게도 그리 무거운 것일까.
테스의 저 순애보는 이 시대 젊은 여자들에게도 그토록 절절한 것일까.
책부족 이번달 책 ‘테스’.
텍스트는 아주 오래전 출간된 ‘주우(主友)세계문학 (이가형 번역본)으로 읽었었지만 내게 ‘테스’라고하면 대뜸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가 떠오른다.
영화의 인상이 그만큼 강렬하였던 것이다. (개봉관 재개봉관등을 찾아가며 서너번은 보았을 것이다.)
우선 영국 웨섹스지방의 풍광(실제로는 프랑스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는데)의 화면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영화의 미장센은 섬세하였으며 두시간 남짓 압축된 시네마 트루기는 허튼 구석 조금도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영화 속 테스 ‘나스타샤 킨스키’는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피어난 어여쁜 요정이었다.
청순미와 관능미를 복합적으로 간직한 신비로움.
바람둥이 알렉이 처음 만난 테스를 유혹하는 장면.
겁에 질린 커다란 눈. 하얀 이가 살짝 보일듯 열린 붉은 입술, 그 입술 앞으로 내밀어진 빨간 딸기...
그 순간 나는 배신하고 말았다. 잉글릿 버그만을, 오도리 헵번을, 까뜨린 드뇌브를,
나스타샤 킨스키는 순식간에 내 여신으로 군림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신.
후방에서 원경으로 잡은, 광활한 황무지에서 체포되는 테스, 거대한 석조 구조물 스톤헨지는 안개 속에 아스라이 아웃포커스 되고....
그 후 ‘로만 폴란스키’와 ‘나스타샤 킨스키’의 영화를 열심히 찾아 감상하였지만 워낙 테스의 이미지가 강해서였던지 실망을 거듭하였을 뿐이다.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나스타샤 킨스키가 출연한 ‘캣 피플’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후 빔 벤더스 감독의 '파리, 텍사스'에서 만난 나크타샤 킨스키는 서늘하게 슬펐다.
파리 텍사스. 사막의 모래바람, 외롭고 서러운 황무지, 유리벽에 갇혀 하나씩 옷을 벗는 나스타샤 킨스키,... 울지 말아요 내 사랑, 여긴 유럽이 아닌 황무지(텍사스)의 파리예요,.. 이게 인생인걸요, 아직 멀었어요,.. 눈물을 닦고 또 걸어가세요....
늘 하는 얘기인데, 예전에 분명 읽었던 책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토마스 하디의 ‘테스’는 내게 새롭게 읽혀졌다.
자꾸만 나스타샤 킨스키가 오버랩 되는 거야 어쩔수 없었지만 소설속의 테스는 영화 속의 테스보다 훨씬 순결한 이미지였고, 헌신적이었으며(가족과 에인젤을 향하여), 매우 성실하고 착한 성품으로 의지가 굳고 용감하였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 테스가 더욱 가여워 시시때때로 눈물이 맺히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내 입에서 자꾸만 맴도는 우리 속담 하나.
‘여자팔자 뒤웅박팔자.’
여자 팔자는 남자 만나기 나름.
테스가 운명의 떠밀림으로 알렉 더버빌이라는 바람둥이 사나이를 만난 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면, 그보다 에인절 클레어라는 어정쩡한 이상주의자를 만나 결혼한 것 역시 테스 운명의 기구함이었다.
여자팔자 뒤웅박팔자.
이러한 생각은 동서고금 다를바 없을 터. (여성의 자주독립을 부르짖는 작금의 시대정신에 배리되는 그 무슨 망발이냐고 한다면 입은 다물겠지만, 따지고 보면 제인 오스틴 여사도, 샬롯 브론테 여사도 이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며, 현대 여성들도 이 생각에서 완전하게 자유롭지는 못한게 사실이 아닐까하고 속으로는 군시렁거린다.)
원제(原題)는 ‘더버빌가(家)의 테스’ 부제(副題)는 ‘순결한 여인’.
작가 토마스 하디가 붙인 제목과 부제는 적절하여, ‘더버빌’과 ‘순결’은 소설을 이루는 중요한 두 축(軸)의 알레고리이다.
하, 그 놈의 더버빌이 무엇이관대 어리석은 부모는 어여쁘고 순진하기 그지없는 테스를 낯선 늑대 아가리 속으로 들이 밀어 순결을 잃게 하였을까.
<오 어머니, 나의 어머니! 당장 가슴이 터질 것 같은 테스는 몸부림치면서 몸을 세워 어머니 쪽으로 돌렸다. 어떻게 그런 걸 미리 알 수 있어요. 넉 달 전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어린애였어요. 남자들이 그렇다는걸 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어째서 미리 주의시켜 주지 않았느냐 말이에요! 부잣집 아이들은 소설 같은걸 읽고 그들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방법을 알아요. 하지만 난 그런 걸 배우지도 못했고, 또 어머니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어요! 그녀의 어머니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널 좋아해서 어떻게 될 거라는 걸 네게 미리 말해 준다면, 거만하게 굴면서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젠 다 지나간 일이니 잊어버리자꾸나. 그렇게 되도록 이미 작정된 것이고, 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야! 그녀의 어머니는 앞치마로 눈물을 닦으면서 넋두리처럼 뇌까렸다.>
순결을 잃고 사생아를 출산한 테스는 이제 건강미 넘치던 발랄한 옛 그녀가 아니었다.
성숙한 아름다움은 매력적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한층 어두워지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복잡한 여인으로 변해 버렸다.
자연.
소설이 묘사하는 영국 웨섹스 지방의 풍광과 기후와 계절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울뿐더러, 서사구조와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서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랄까 그 색조를 일관되게 만들고 있었다. (로만스키의 영화 역시 그러하였다.)
그리고 농촌의 모습과 그 생활상의 이모저모의 모습들은 디테일한 것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작가의 농촌 경험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고, 작가의 고향을 향한 애정도 엿볼수 있었다.
그러나 자연은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곳일뿐 아니라, 힘든 노동과 가난의 괴로움이 점철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테스는 자연(농토)의 딸이었고,(웨섹스의 자연을 벗어난 테스를 상상하기는 힘들다.), ‘테스’에게 있어서 그 자연이란 환희이며 또한 고통이기도 한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토마스 하디의 싯적(詩的) 문장.
<숲속에서 이는 바람은 거대하고 슬픈 영혼의 탄식..>
테스에게는 자연의 그 신선함과 무구한 그 건강성(에인젤이 테스에게 반한 소이이기도 하다)의 아름다움이 있으며 또 한편 땅으로부터 규정지어진 가혹한 운명적 조건 또한 테스의 것이기도 하였다.
테스는 무능하고 게으른 술꾼 아버지와 경박한 어머니와 여섯의 올망졸망한 동생들을 거느린 가장격인 맏딸이었다.
'테스'의 대목대목.
대영제국의 찬란한 빅토리아시대 영국서민이 겪는 가난과 착취의 모습, 도래한 기계문명의 양상, 인습의 편협함에 함몰된 사람들의 의식구조, 영국국교회 캘빈교회등 다양한 종교적 편린들이 엮여 있었고, 교회와 기계문명과 상류사회를 향한 풍자등 작가의 비판적 눈길도 있었다. (책부족이 읽었던 영국의 근대소설들, 채털리부인의 사랑,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에서 우리는 영국 사회와 서민의 리얼리즘을 접한적이 없었다.)
알렉 더버빌과 에인젤 클레어라는 두 남자.
어찌하여 테스는 알렉을 그토록 싫어하였으며 에인젤에게는 그토록이나 함몰되었을까.
에인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테스, 그 사랑이라는 것의 정체란 과연 무엇인가.
소설 속 두사람의 사랑은 참으로 아름다웠지만 (탤보데이스 낙농장에서의 행복한 사랑의 정경), 테스 비극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두사람 사랑의 순수성과 순정함에 대하여 폄훼하는 것을 용서치 않겠지만 독자인 나야 어떻게 생각하든 무슨 상관이랴.
말롯마을에서 지나가는 행인이었던 에인젤과의 잠간 동안의 그 첫만남에서 테스는 에인젤에게 (시쳇말로) 바로 꽂히기는 하였다.
훗날 안타깝게 부르짖는 테스.
<왜 그때 머물러 저를 사랑해 주지 않았어요? 제가 동생들과 함께 살던 열여섯 살 때. 당신이 풀밭에서 춤출 때 말이에요. 아, 어째서 우린 그대로 헤어졌을까요!>
클레어에 대한 테스의 사랑은 하나의 신앙과 같았다.
지도자로서, 철학자로서, 또는 친구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다 갖춘, 선(善)의 전부인 것처럼 테스는 거룩하게 그를 믿었다.
그의 육체를 이루는 윤곽의 모든 부분은 남성미의 표본이었고, 영혼은 성자의 것이며, 그의 총명은 예언자의 것인양 생각되었다.
클레어에 대한 테스의 사랑은 그녀의 호흡이요, 생명이었던 것이다.
에인젤에게 빠져버린 테스의 비극이 불쌍하여 나는 좀 삐딱해지련다.
<아, 테스여, 무릇 여성제위여. 사랑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절절 끓는 목숨이 되는가. 사랑이란 모름지기 성적인 끌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니, 여자가 남자에게 끌리는 까닭은 사랑이 일종의 화학작용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생리주기와 남자의 미세한 몸냄새등이 교합하여 만드는 옥시톡신이라는 호르몬의 작용. 혹은, 진화심리학에 의하면 사랑의 맹목성이란 짝짓기 승부에서 완벽한 배우자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훌륭한 핑계꺼리라고도 하더라.
별 볼일 없는 사내녀석과 죽네사네 하는 딸네미를 억지로 떼어놓았더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재낀 그 사랑이란 놈의 정체란 실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일수도 있느니라.
그러다가 맞선으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신혼여행 다녀와서는 하하호호 얼굴 가득 희색만면이더라는 이야기꺼리 세간에 흔하디 흔하다.
그 사람 아니면 못살아요. 라고라?
아서라 말어라. 사랑의 개별성은 쉽게 전이되는 것이란다.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부모 말씀이 진리란다, 얘야.>
.
그러니까.
에인젤을 향한 애오라지한 그 사랑이란 놈이 테스의 신세를 망쳤다.
내 느낌으로는 테스의 진면목을 파악하고 이해하여 수렴하는 사람은 차라리 알렉 쪽이었고, 그러므로 테스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알렉이 아니었을까한다.
나는 테스가 알렉의 청혼을 받아들여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그리하였으면 테스는 행복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소설이란 놈이 이루어질 턱이 없을 테지만, 테스에 스민 나의 감정이입의 상태는 그 정도로 연민에 가득차 있었다. 하하)
-계속-
<테스> 後
에인젤 클레어.
캘빈교의 목사아버지와 캐임브릿지 출신의 경건주의류(類) 형들을 두었지만 막내인 그는 이를테면 이단아(異端兒)의 폼을 잡는 나름 투철한 이념가(理念家)였다.
예정론이라던가 인과응보, 또는 신비주의에 경도된 기독교 교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였고, 형이상학의 추상성이라던가 인습과 전통의 엄숙주의나 허위성을 경멸하여 그리스적 현세(現世)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理想主義者).
그러나 내 보기에 에인젤은 여자에 대하여 혹은 세상사(世上事) 인간사(人間事)에 대하여 유취(乳臭)한 애송이일 뿐 아니라. 여자에 대한 남자의 책임이란데 대하여도 비겁한 녀석이다.
내 알거니와 이념가란 대부분 이와 같은 얼치기다.
몽롱한 이상(理想)에 사로잡혀 현상(現像)의 진정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렴하지 못한다.
현상에다가 자신의 이념을 투사하여 해석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가 사랑한 대상은 테스가 아니었다.
자신의 이상이 투영된 테스, 자연의 건강함과 신선함 그 아름다움의 이데아를 테스에 덧씌워 그녀를 사랑하였던 것이다.
그가 말하지 않는가.
<“내가 사랑한 여자는 당신이 아니오. 당신 모습을 한 다른 여인이었소.”>
에인젤에 대하여 작가가 의도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언행에 뿌리깊은 남성우월주의를 나는 보았고, 무엇보다 에인젤은 지독한 자기중심적 인간이었다.
짐짓 자신의 이상(理想)에 어긋난 테스의 현실(처녀성을 잃고 출산한 전력)을 용납치 못하여 절망하는 폼을 잡고 있지만, 그는 또한 위선자였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였더라도 그의 감정모체는 여전히 고루한 인습에 얽매여 있었던 것이다.
테스의 순결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고, 테스의 본질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는 청맹과니였을 뿐이다.
자신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 않았던 그 영역, 정작 그의 관념의 실체는 바로 그곳에 고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을테지만그 에인젤은 '강남좌파' 캐비어 좌파' '신재보수 언재진보'였던 것이다.
<그녀의 얘기(고백)가 끝나자 이제껏 애정에 넘친 그의 태도는 앞을 다투어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고, 어리석었던 반소경 같은 어린 시절의 메아리만 되풀이해 들렸다. 클레어는 아무런 표정없이 불을 뒤적이고 있었다. 한참 타다 남은 불을 뒤적이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비로소 그녀의 고백의 힘이 그의 뇌리에 미친 것이다.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지고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계속 마루 위를 걸어다녔으나 클레어의 초조한 태도는 아무리 애써도 괴로운 심정이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었다.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그녀가 언제나 듣던 감성이 넘치는 소리가 아닌 가장 어색한 음성이었다. "테스!" "네, 에인젤." "나는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 될까? 당신 태도로 보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소. 설마 당신 머리가 돈 건 아니겠지! 당신은 돌지 않았어. 여보, 테스! 하지만 그런 가정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지 않소? ""나는 맑은 정신으로 말씀드린 거예요." 그는 현기증을 느끼면서 말을 이으려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그렇다면, 왜 미리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어! 아냐, 하려고 하는 것을 내가 말린 일이 있지. 이제서야 생각이 나는군! 이러한 그의 말들은 표면에만 이는 잔물결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의자 위에 몸을 굽혔다. 테스는 방 복판에 있는 그에게로 다서 눈물로 흘리지 않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가, 무너지듯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그대로 방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당신을 용서해 준 것처럼!" 그녀는 바싹 타들어가는 입으로 속삭였다. "저는 당신을 용서했어요!"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용서받은 것같이 저를 용서해 주세요! 당신을 용서해 주지 않았어요, 에인젤?" :그렇지, 당신은 날 용서했어요." "그런데 당신은 저를 용서하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 "이것 봐 테스, 당신의 경우는 용서를 바랄 수 없는 거야! 당신은 전엔 지금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소. 그런데 지금의 당신은 예전의 그 인간이 아니야." 그는 말을 멈추고, 갑자기 기분 나쁜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지옥에서 들려 오는 것처럼 소름이 오싹 끼치는 해괴한 웃음이었다. "제발 그만 하세요! 죽을 것만 같아요! 저를 가련하게 여겨 주세요!" 클레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발딱 일어나 소리쳤다. "에인젤, 에인젤! 왜 그렇게 웃으셨죠? 그 웃음 소리가 얼마나 저를 괴롭히는지 아세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제껏 오로지 당신만을 바라고 그리워하며, 또 당신의 행복만을 위해서 기도해 왔어요. 그게 바로 제가 품고 있는 당신에 대한 생각이었어요. 에인젤!" "알고 있소." "당신이 지금의 저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어요. 당신이 사랑하시는 게 지금의 저라면 어떻게 그런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어요? 전 무서워요. 당신을 사랑한 이상 어떤 변화나 어떤 굴욕에도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어요. 저는 더 이상의 것도 바라지 않겠어요.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제 남편인 당신이 저를 사랑하지 않겠다는 거죠?" "다시 말하지만, 내가 사랑한 여자는 당신이 아니란 말이오." "그럼 누구란 말씀이에요?" "당신 모습을 한 다른 여인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테스는 느꼈다. 클레어는 자기를 순진한 가면을 쓴 죄많은 여인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아채자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뺨은 힘없이 처지고, 입술은 마치 마른 나무의 조그만 구멍 같았다.>
브라질에서 심각한 고난을 겪으면서 비로소 사안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에인젤.
실패한 이상(理想), 실패한 영육(靈肉)의 꼬라지가 되고서야 에인젤은 다시 테스를 찾았다.
아래는 내 세리프.
<흐음.. 아이고. 여보게 에인젤, 너무나 늦어 버렸네.아니, 늦고 자시고 간에 자네는 다시금 테스를 찾아서는 아니 될 노릇이었네. 자네는 테스의 내면적 현실(테스의 성품과 자존심과 생각등등)을, 테스의 환경적 현실 (거간의 테스의 역정)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 얼치기 이상주의자인 자네가 그녀에 관하여 갖고있는 상상력이란 너무나 빈약한 것이었다네. 아아, 근본적으로 자네는 테스의 본질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사람일세그려. 극도의 경제적 궁박, 맏딸로서 이고 진 가족의 생계, 테스의 빼어난 미모, 주변의 사내들, 알렉의 끈질긴 유혹, 급변하는 영국 사회 경제적 환경...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면 은행에 맡겨진 보석을 팔던지, 자네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든지 함으로 궁박에서 벗어나 있을거라는 따위의 자네 생각이란 얼마나 안일한 것이었던지. 알렉에 비하여 자네는 풋내기, 테스의 자존이라는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내였다네. 당장 돈이 필요할거라는 알렉의 얘기에 테스는 “시아버지한테 있어요. 부탁만 하면 얼마든지 받을 수 있어요.”라고 대응하였고 알렉은 말하였다네. “부탁만 하면 말이지. 하지만 테스, 당신은 그런 부탁 따윈 하지 않을 걸. 난 당신을 잘 아니까 말이야.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그런 돈 부탁을 할 여자가 아니야.” 자네가 샌드본 고급별장에 산다는 테스(테스는 이미 알렉의 정부가 되어 있었음에도)를 찾아 가면서 한다는 추론이란 고작 이따위였지. “그녀는 이 많은 저택들 가운데 어느 집에 고용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자네는 근본 남성우월주의자, 이혼을 하여 주었다면 자유로웠을 테스였는데 자네의 고루하기 짝이 없는 관념은 테스를 그저 꽁꽁 묶어 두었을 뿐이었다네. 자네를 향한 애오라지 테스의 붉디붉은 사랑의 일념 또한 자네 무엇 한줌 알고 있었나. 자네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테스의 격정, 그토록 꿋꿋하였던 테스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테스의 격렬한 마음밭의 현실을.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테스의 내면적 현실에 두루두루 무지한 자네의 어리석음이 그녀를 교수대로 내몰았던 것이라네.>
다시 소설로 돌아오자.
<"당신을 두고 간 나를 용서해 주겠소? 나에게로 와 줄 수 있겠소? " "너무 늦었어요." 그녀의 음성은 날카롭게 방안에 울렸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당신을 올바르게 생각하지 못했소.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오!" 그는 애원하듯 말했다. "그 이후에, 아니 너무 늦게 나는 깨달았다오. 그립고도 사랑스러운 테스!" "너무 늦었어요, 늦었어요!" 심한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한순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초조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에인젤! 오시면 안 돼요. 비키세요!" "그럼 당신이 내가 앓아서 이렇게 되었대서 사랑하지 않는단 말이오? 당신은 이처럼 변덕스런 여자는 아닐 텐데 난 일부러 당신을 찾아온 거요. 이젠 어머니와 아버지도 당신을 기꺼이 환영할 거요!" "그래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늦었어요.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단 말이에요." 그녀는 마치 꿈속에서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렸다. "당신은 아무것도 물라요. 당신은 이곳 사정을 모르시나요? 모르신다면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았소." "저는 당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그녀는 다급한 듯 계속해서 마을 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갑자기 피리 소리 같은 지난날의 애조 어린 음성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당신에게 애원하는 편지를 썼어요! 그래도 당신을 오시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당신은 이제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했고, 또 기다리는 제가 바보 같은 여자라고 늘 말하고 있었어요. 그 사람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한테도 무척 고맙게 해 주었어요. 그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그이는 나를 다시 찾아온 거예요." 클레어는 뚫어지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린 그는 병에 지친 사람처럼 갑자기 풀이 죽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한때 장미빛을 띠었던 손, 그러나 지금은 한결 부드럽고 화사한 그녀의 손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녀는 말을 계속했다. "그 사람은 지금 2층에 있어요. 왜냐고요? 당신은 결코 돌아오시지 않을거라고 나에게 거짓날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돌아오셨어요! 이 옷도 그가 해 준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었어요! 그러니 제발 떠나 주세요. 에인젤, 이제 다시 찾아오지 말아주세요. 네?" 그들은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보기에도 애쳐로울 만큼 덧없는 그들의 심정을 뚜렷이 엿볼수 있었다 두 사람은 현실에서 자기들과 감싸 줄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 같았다. "아아, 내 잘못이었소! " 클레어가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의 말은 아무 반응도 일으키지 못하는 침묵과 같았다. 나중에 가서야 뚜렷하게 느낀 것이지만, 그는 어떤 한 가지 일을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테스가 지금 자기 앞에서 서 있는 육체를 정신적으로 자기의 것이라 인정하지 않고, 다만 물 위에 뜬 송장처럼 살아 있는 의지에서 떨어져 나가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몇 순간이 또 흘렀다. 그는 테스가 사라지고 없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정신력을 집중하고 서 있던 얼굴이 점점 싸늘해지면서 비참한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얼마 후 그는 정처 없이 홀로 거리를 걷는 자신을 발견했다.>
알렉을 살해한 테스. 에인젤은 테스의 살인에 대한 그 동인(動因)을 추호도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
나는 다음 대목에서 에인젤이 너무도 괘씸하여 숨을 씨근덕거렸다.
<자신이 저지른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알지 못하는 그녀는 오히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듯 편안한 얼굴이었다. 자기 어깨에 기대어 행복감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 에인젤은 더버빌은 가문의 핏줄엔 무슨 잘못된 힘이 있기에 이런 탈선을 저지르게 만드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마차와 살인에 얽힌 전설이 문득 그의 마음을 스쳤다. 어지럽고 흥분된 머릿속을 가다듬어 상상력이 미치는 데까지 생각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고, 일시적인 환상이라면 서글픈 일이었다.>
알렉 더버빌.
작가가 결코 알렉을 호의적으로 그리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알렉을 철저한 악인으로 만들었어야 소설적 재미가 있었을 법한데 어쩐 일인지 작가는 그렇게도 하지 않았다.)
나의 인상비평(印象批評)으로서는 알렉은 악한이 아니었다.
소설이 씌어진 그 시대 영국적 가치관이 갖는 인물론이란 알수 없지만, 이 시대 한국적 시각으로 본다면 외적인 조건이나 성품에 있어서 알렉의 (시쳇말로)스펙은 에인절보다 웃길로 느껴진다.
테스의 처녀를 빼앗은 알렉은 바람둥이였겠지만 파렴치한은 아니었다. (테스의 처녀를 농락한 전제도 완전히 결혼을 배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론적으로 테스에게는 성실한 사나이였고, 무엇보다 에인젤은 테스 내면적 현실에 무지하였던데 반하여 알렉은 적어도 테스를 파악하고 있었다.
테스 용모의 어여쁨에 탄복하면서 오히려 어쩔줄 몰라 하였던 면면도 그닥 보기에 안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의 미모에 찬탄하는 남성과 함께 하는 여성의 행복이란 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알렉은 그녀의 입술에 딸기를 물려주고 그녀를 꽃다발로 만들줄 아는, 여자에 대한 미학적인 안목이 있는 남성이다.
테스가 현대인이었다면 얼치기 이상주의자인 에인젤보다는 당연히 알렉의 사랑에 방점을 찍었을 것이고 알렉의 청혼을 기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알렉이 전도자가 되었고, 무신론자인 에인젤로부터 영향을 받은 테스의 기독교 신비주의에 대한 비평으로 인하여 다시 파계하고 테스에 열중하는 알렉. (이 부분은 좀 어색하였지만)
<그러나 그런 얘길 하러 이곳에 온 것은 아니오. 내 형편은 이렇소. 당신이 트랜트리지에서 떠난 뒤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곳이 내 소유가 됐소. 그러나 나는 그 집을 팔고 아프리카로 전도하러 가려고 결심했었소. 전도 사업에 아주 서투른 건 사실이지만. 당신에게 부탁하는 건 부디 나의 의무, 즉 당신에게 저지른 잘못을 갚을 단 한가지 보상을 내게 맡겨 달라는 거요. 다시말해서 내 아내가 되어 나와 함께 가 줄 수 없겠소?>
<"결혼하지 않겠다는 거지, 테스. 그래서 난 평생을 이 과오를 그대로 지닌 채 살라는 거요?" 그들이 밭고랑을 건너자마자 알렉이 되풀이했다. "할 수 없어요." "하지만 어째서?" "당신에 대한 애정이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용서해 준다면 자연히 사랑을 느끼게 될 거 아니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어째서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지." "나는 다른 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설교하기로 약속은 했지만, 가지 않겠소. 한때는 경멸하던 여자를 보고 싶은 간절한 욕망에서 말이오! 아냐, 경멸한 일은 사실 한 번도 없을 거야. 당신을 경멸하지 않은 이유는, 오직 순결하기 때문이었소. 당신은 자기 처지를 깨달았을 때 재빨리 결단력 있게 내 곁에서 떠났소. 그래서 난 당신을 경멸할 수가 없었소. 그러나 당신은 얼마든지 나를 경멸해도 좋소! 나는 산 위에서 기도를 올리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직도 숲속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었어! 하하!" "오, 알렉 더버빌!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가 뭘 했다는 거예요?" 그는 비웃는 투로 말했다. "뭘 했느냐고? 고의적으로 한 일은 없지. 그러나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타락을 부채질했어. 테스, 적어도 당신의 그 눈과 입을 다시 보기까지는 더할 수 없이 의지가 굳은 사람이었소. 그런데, 왜 그때 나를 유혹했지? 다시 보지 않더라면 나는 꿋꿋한 남자로 변함이 없었을 거요. 이브의 입을 빼놓는다면 이토록 남자를 미치게 하는 입은 없었어!" 그의 음성이 가라앉았고, 까만 눈에서도 뜨겁고 장난스러운 빛이 번뜩거렸다. "이 마녀, 귀엽고도 요염한 바빌론의 요부, 당신을 다시 만난 순간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단 말이오!" "당신이 나를 다시 만난 것은 나로서도 피할 도리가 없었어요!" 테스는 뒤걸음질치며 말했다. "그 일은 나도 알아. 거듭 말하지만 당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오. 그러나 당신이 천대받는 걸 보면서 법적인 권리도, 또 당신을 가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 같소!" "그 사람을 욕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지금 여기에 없단 말이에요!" 그녀는 몹시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분을 대접하세요. 당신한테 나쁘게 한 것도 없잖아요! 떳떳한 그 사람의 이름을 더럽힐 추잡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제발 돌아가 주세요!" "가지, 돌아가지!"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말했다. "난 장터의 가엾은 주정뱅이들에게 설교하겠다던 약속을 어겼소. 이런 장난 같은 짓을 하다니! 한 달 전만 하더라도 이런 건 생각지도 않았소. 난 가겠소. 그러나 당신을 멀리 할 수 있을까!" 그러더니 갑자기, "테스, 한 번만, 꼭 한 번만 안아 줘. 지금. 당신을 괴롭힌다고? 그런 내가 할 소리요. 당신이야말로 나를 괴롭히고 있소." "난 결코 당신을 괴롭힌 일이 없어요!" "그런 당신은 날 괴롭히고 있어! 잠시도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조금 전에 날 노려보던 그 매서운 눈초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나를 따라다닌단 말이오! 테스, 당신을 다시 만나고 부터 청교도의 물결 속에 흐르던 강한 힘이 다시 당신에게로 쏠리고 있소. 그때부터 종교로 통하던 운하는 바짝말라 버렸어. 그렇게 만든 건 당신이란 말이오!" 알렉이 외치듯 말했다.>
소설의 종장.
<정의의 심판 은 이루어졌다. 그리스의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말대로 불멸의 수호신은 테스와의 희롱을 끝마친 것이었다. 그리고 더버빌 가문의 기사와 귀부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의 무덤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묵묵히 바라보던 두 사람은 마치 기다라도 하듯 땅에 꿇어앉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깃발은 여전히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기운을 되찾은 그들은 함께 일어나 손을 마주잡고서 언덕을 내려갔다.>
테스 출판 당시 긍정적인 평가보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까닭은 토마스 하디의 비관주의적 세계관 때문이라고 한다.
테스에는 기독교적 선악에 대한 인과론적 사상, 착한 것에 따르는 보상(報償)이라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팔자’라고 하는 염세적 숙명론이 지배한다.
테스와 같이 ‘팔자’란 어쩌면 한 실존의 ‘선택’에 따른(소피에게는 선택의 여지마저 없는 팔자였지만) 결과론적 측면이 있지만 아아, 그러나 인간은 평등하지 아니하다.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인간불평등 기원론)
루소는 자연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의 문명(사유재산의 소유)이 불평등을 싹트게 하였다고 한다. (자연에도 불평등은 당연히 엄존한다. 이를테면 영양과 사자, 고양이와 쥐새끼, 건강과 불구, 미남과 추남, 천재와 천치... 루소도 열거한바 자연적 불평등)
그렇다면 금수저 은수저 같은걸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의 불평등.
말하자면 운명적 불평등, 이것 역시 자연법에 의하여 허용되고 설명 가능한 불평등인가.
뒤웅박 팔자라던가, 팔자소관이라던가 하는 영역의 그것 말이다.
낫살 먹은 내가 하늘을 우러러 투덜댄다.
테스의 팔자가 왜 저 모냥이어야하느냐고.
구름 사이로 바울이 얼굴을 내밀더니 콕 내 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 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 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끽 소리 못하고 나는 그만 고개를 옴츠린다.
어ᄍᅠᆯㅑ, 테스의 비극은 슬픔으로만 내 안에 고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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