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소피의 선택 -윌리엄 스타이런- 1,2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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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소피의 선택> 前

윌리엄 스타이런 作

 

 

***동우***

2010년 5월 5일

 

1979년 미국에서 출간된 소설 ‘소피의 선택 (Sophie's Choice)’

윌리엄 스타이런 (William Clark Styron, Jr. 1925~2006) 作.

2010년 5월 책부족의 과제로 읽은 책이었다.

완독후 웹하드에서 영화를 다운받아 보았다. (1982 년도 제작, 감독 ‘알란 파큘라’, 메릴 스트립, 케빈 클라인, 피터 맥니콜, 리타 카린등 출연) 

소설의 임팩트는 영화에서도 여실하였다. (미국영화 100대 영화중 하나라고 하며, 메릴 스트립은 이영화로 아타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책과 영화 공히, 내 영혼은 고통으로 신음하였다.

 

우선 ‘엘리 위젤’의 책을 끄집어 내어 베껴 쓴다.

아래는 ‘엘리 위젤’의 글이다.

<그리고는 세 희생자의 앞을 지나는 분열식이 시작되었다.

두 어른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들의 길게 늘어진 혀는 팅팅 부었고 색깔도 변해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밧줄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몸이 가벼웠으므로 소년은 아직도 살아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우리의 눈앞에서 반시간 이상이나 고통 속에서 그대로 매달린채 삶과 죽음의 사잇길에서 몸부림치며 서서히 죽어갔다.

우리는 소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아야만 했다.

내가 그의 앞을 지날때에도 그는 아직 살아있었다.

나는 등위에서 아까 그 사람이 다시 묻는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때 나는 나의 내부에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한 목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어디 있느냐고? 그는 여기에 있어. 그는 여기 교수대위에 목이 매달려 있는거야.'

-여러 민족가운데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밤낮으로 고문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이 화장장에서 산채로 최후를 마치는 광경을 보게하신 영원한 우주의 주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림자는 이내 노인을 위에서 덮첬다.

노인은 바닥에 뒹군채 그림자로부터 주먹 세례를 받으며 비명을 질렀다.

'마이어. 마이어. 내 아들아! 나 애비야. 아이쿠 난 네 애비다. 네게도 주려고.. 네게도 주려고..' 이내 노인은 무너졌다.

주먹안에는 조그만 빵조각이 쥐어져 있었으며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것을 본 아들이 아버지위에 덮쳐 나꿔챘다.

노인은 가래끓는 낮은 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모든 사람의 무관심 속에 숨을 거두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몸을 뒤져 빵을 찾아내서는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들 역시 멀리 가지 못했다.

그를 본 두사람이 달려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거기에 가세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갔을 때 내 옆에는 두구의 시체가, 아버지와 아들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때 나는 열다섯살 이었다.>

<자유인으로서 취한 우리의 첫 행위는 너나없이 음식물에 달려드는 일이었다.

보복을 하는 일도, 가족을 찾는 일도 먹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맞은편 거울의 저쪽에서 해골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해골이 노려보던 그 눈빛을 나는 결코 잊을수 없다.>

<고난이란 인간에게 가장 저열하고 가장 비열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오.

당신을 짐승이하로 만들어 버리는 고난도 있어요.

한조각의 빵을 얻기위해서 그리고 한숨의 잠을 자기위해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당신 친구들의 영혼까지도 팔게 되요.>

 

다음은 소설 ‘소피의 선택’에서 소피의 말이다.

<그곳에서 짐승처럼 행동했다하더라도 이해해 줘야 해요.

나치는 사람들을 짐승으로 만들어 놓았으니까. 만일 나에게 칼을 손에 쥐어주고 유대인을 죽이라면 죽였을 것이고, 폴란드인을 죽이라면 죽였을 거예요.>

 

아래는 내 기억 속에 아슴하게 남아있는, 어디선가 들었던 에피소드이다.

<철판위에 아이를 안은 여인을 올려 세운다. 철판은 서서히 달구어진다. 아이를 부둥켜 안으며 비명을 지르는 여인. 점점 바닥은 뜨거워지고 여인은 아이를 내려놓고 그 위에 올라선다.>

 

아래는 소설 ‘소피의 선택’중 한 대목이다.

<“전 유대인이 아니예요. 아이들도 유대인이 아니예요!”

“저는 독실한 가톨릭입니다”

군의관이 약간 비틀거렸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이거지?”

“그 분은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말씀하셨지? 아마”

소피는 두려움에 목이 콱 막힌 것 같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하려고 하는 찰나에 군의관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하나만 데리고 있어.”

“비테? (뭐라고요?)”소피가 말했다.

“네 아이들중에 하나만 살려줄수 있다고.”

“그럴수는 없어요!”그녀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지른 비명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천사들도 이렇게 큰 소리로 절규하진 못했을 것이다.

“이히 칸 니히트 벨렌!”(저는 선택할수 없어요!) 그녀가 외쳤다.

“닥쳐!”그가 명령했다. “지금 당장 선택해. 알았어? 안그러면 아이들 둘다 보내 버릴꺼야. 빨리!”

“제게 선택하라고 하지 말아 주세요.”그녀가 목쉰 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선택할수 없어요.”

“그러면 둘 다 보내 버려.”군의관이 부관에게 말했다. “나흐 링크스.(왼쪽으로)”

“엄마!”소피가 에바를 밀쳐 내고 비틀거리며 콘크리트 바닥에서 일어나자 에바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어댔다.

“이 아이를 데려가세요!”소피가 외쳤다. “내 딸을 데려가요!”

그러자 부관은 에바의 손을 잡아끌고는 죽음을 언도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아이는 끌려가면서 계속 비명을 지르며 울었고 자꾸만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나 소피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짠 눈물에 눈이 완전히 가려져 에바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을 보지 못했고, 항상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만약 그 표정을 보았더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여전히 곰인형이랑 플루트를 꼭 끌어안고 울부짖으며 끌려가는 에바....>

 

아래는 내 안의 어떤 인물이 부르르 떨며 중얼거리는 소리이다.

<소피, 독하고도 독한 년, 

엔간하면 셋바닥 깨물고 그 자리에서 자진하것다. 

아들놈 딸년 양팔 끼우고 함께 불구덩이 뛰어들던지.

고 어린 가스나 불구덩이 끌려가는걸 빼히 보면서 지캉 머스마 자식캉 우찌 살것다고. 

에이 독한 년!>

아래는 내가 내 안의 그 인물을 달래며 하는 소리다.

<여보슈, 결국 소피는 혓바닥을 깨물고 죽었어요.>

 

아, 홀로코스트.

책이나 영화에서 홀로코스트를 접할 적마다 내 영혼은 짐승처럼 신음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당하는.

나 태어나기 불과 수년전 벌어졌던 그 끔찍한 현장.

2차대전이 끝나자 인류는 ‘Never Again!'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스탈린의 시베리아, 크메르 루즈의 킬링 필드, 관타나모, 북한등등 끔찍한 현장이 없지는 않았지만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만큼 끔찍한 것으로 내게 어필하지는 않는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나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 그런 생각 자체가 사뭇 고문이다.

내 인간성이라는 것을 임상실험대에 눕혀 놓고서는 심신(心身)의 극한의 부위들을 예리한 칼로 마구 저미는 듯하다.

순한 양 <그야말로 번제(燔祭-홀로코스트->처럼 직수굿이 그 구렁텅이로 끌려 들어가는 자들의 무기력함에 심장이 벌렁벌렁 떨린다.

한켠으로 당하는 그들이 오히려 싫고 밉기까지 하다.

가해자들의 당위에 찬 당당함과 이성적인 포즈에는 이가 갈리고 살이 떨린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어떤 집단 속에서 내게 어떤 당위와 개연성이 주어진다면 내 인간성 속에 타인을 향한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고 단언할수 있을까말이다)

 

책부족 제위께서는 집단 속에 존재하는 개별적 이성이라는 걸 믿는가.

인간이란 지극히 개별적인 존재다.

나는 집단적 사고 속에 명징한 이성이 숨어 있을 거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집단이 주장하는 일관된 이념이라는 것의 정체 또한 믿지 않는다.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것도 믿을수 없다.

역사에 예정이 어디있고 어디 역사가 변증의 법칙으로 진행된단 말가.

칼뱅도 틀렸고 맑스도 틀렸다.

그리하여 나는 혁명을 믿지 않는다.

역사에 대하여 희망이 있다면 역사적 학습에 의한 끊임없는 개혁 뿐이다.

혁명으로 무르익은 집단에는 이성이 없다.

혁명을 부르짖는 배후의 그 이성이란 놈은 감정과 마찬가지로 쉽사리 왜곡되어 버린다.  

군거적 순종의 원리 (群居的 順從의 原理 -Herd Allegiance-)에 의하여.

인간 존재가 지닌 마성의 핵심에는 집단성이 있다. 인간 하나하나는 선량하지만 집단을 이루면 가혹한 행위도 망설이지 않는다.

나치 전범 아히히만의 재판을 본 한나 아렌트는 “악의 얼굴이 이토록 평범하다니”하고 몸을 떨었다.

아도르노는 “전체는 거짓이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였다.

까뮈는 말하였다.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서 신물이 난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것이다.”

 

‘소피의 선택’에서 아우슈비츠의 수용소장 헤스를 보라. (소피가 한번만이라도 아들을 보기 위하여 엎드려 그의 구두를 핥았던)

헤스는 사디스트가 아니었고, 폭력적이거나 특별히 위협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신부가 되었을수도 있었던-아돌프 히틀러를 만난후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념과 그의 지도력에 홀딱 반하여, 투철한 의무감과 복종정신으로 무장하여 맹목적으로 헌신하였을 뿐이다.

국가사회주의 이념인 게르만 순혈주의를 위하여 살인기술의 개발(효율적으로 많은사람 죽이기-생산성(productivity)을 추구하는 생산관리 시스템)에 재능을 발휘하였을 뿐이다.

그는 대단히 헌신적이고 엄격하고 완고한 정신의 소유자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결코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다. 그들을 우리 민족의 적으로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유대인들과 다른 포로들을 똑같이 대했다. 어떤 경우에도 증오는 내게는 낯선 감정이다.”

어머니에게 두 아이중 하나를 죽을 자로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던 군의관을 보라. (그는 당장 죽일자와 당장은 살려둘 자를 가르는 임무에 지쳐 있었고 술을 마신 상태였다.)

<교묘하게 관용을 베푼다는 점에서 가장 빛나는 죄악, 바로 선택이었다.>고 작가는 썼지만 다음과 같은 대목도 소설 속에는 있었다.

<그는 자기가 참여한 야만적인 범죄에서 지루함과 근심, 심지어 혐오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죄악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말로 표현할수 없을 만큼 지루한 작업이었을 뿐이다. 그의 비행은 죄악과 신이 없는 진공상태에서 사무적으로 행해졌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그의 영혼은 천상의 행복을 갈망하고 있었다.>

집단과 이념에 사로잡힌 그들의 왜곡된 이성이 그들의 영혼을 도덕적 진공상태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설 속에 이런 대목도 나온다.

<문제는 그들의 양심을 극복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물리적인 고통이 다가왔을 때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느낄 동물적인 연민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즉 이들은 ‘내가 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건가’라고 말하는 대신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런 끔찍한 일을 지켜 봐야 하다니. 이 임무가 하필이면 왜 내게 떨어진 걸까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치즘이라는 신념에 사로 잡혔다는 점에서 헤스와 군의관도 필경은 이상주의자였다.

 

인간은 완벽하지 아니하고, 인류 속에 내재된 부조리함은 개선은 될지언정 완벽하게 없어질수는 없을거라는게 나의 생각이다. 

이념.

완전한 평등, 완전한 박애, 완전한 자유의 사회가 반드시 도래한다는, 역사적 필연성을 믿는다는 것.

그를 위하여 역사발전 중에 개별적 희생은 어쩔수 없다는 생각.

그러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누구이관대 완벽을 꿈꾸는가.

당신은 태어나 살다가 뉜가 오라하면 가야 할 불완전 덩어리로다. 

이상주의? 이념? 변증법적 역사발전? 

헛소리 말라.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집단적 선의속에 도사린 저런 광기가 보이지 않느냐? 

이념이라는 상징조작 이미지조작에 스스로 최면에 걸린채 춤추는 어릿광대들. 

반동(反動)은 역사발전을 막아서는 수구꼴통이 아니라 인간을 이상화하는 바로 너희들이노라. 

인간은 사는 존재이지 합목적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니라. 

합목적성을 띈 인간해석이란 죄 거짓이니라. (나는 크리스찬이라 자임하지만 솔직히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쩌구하는.. 예정론 따위 칼빈적 사고가 못마땅하여 냉담자가 된 사람이다.) 

인간을 개조하고 인간을 정리하고 인간을 규정하는 바로 너희의 무리가 반동일지라. 

국가나 사회가 무엇이냐? 

함께 사는 것, 인구가 많아지니 규범도 필요하고 질서를 위하여 개인의 행복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떤 구속적 제도도 필요하겠지. 악독한 범죄를 저지른 놈들 일벌백계의 채찍도 내리쳐야 되겠지. 전쟁도 있을수 있겠지. 

그러나 그 것은 어떤 이념을 위한 것이 아니야. 개별들의 행복을 위해서야. 

가치관의 일관성? 인격의 일관성? 나는 일관성이라는 말을 우습게 여긴다. 

인간이란 본시 일관성의 동물이 아니다. 

인간적 삶의 디테일 속에 어디 일관성이 있단 말이냐? 낮에는 점잔을 떨더라도 밤에는 짐승이 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일진대. 

인간이란 존재는 본시 그렇게 만들어 진 것. 낮과 밤이 틀리고 똥눌때와 똥누고 나서 틀리다. 

누군가 얘기하였다. 

“박정희 안에는 소비에트도 있고 미국도 있고 애국주의도 있고 민족주의도 있고 독재자도 있고 오입쟁이도 있고 영웅도 있고 아버지도 있다.”

 

내게는 진보에서 펄럭이는 이념의 깃발도 꼴사납고, 보수의 동굴 속에서는 고리타분한 냄새가 난다.

우파라던가 좌파 따위로 가른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매우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수구꼴통에게서 넘치는 진보적 생각들을 읽을수도 있고 좌빨 속에 존재하는 수구꼴통을 심심찮게 찾아낼수도 있다. 

입으로 표방하는 정체가 아니라 그의 감정모체(Emotional Matrix)가 어떤 색갈의 것이냐의 문제이다.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과 종교'를 읽어보라) 

불교 속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속에 가부좌 틀고 앉아 계시는 붓다 또한 본다. 쉬바이처처럼 말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생각, 세상은 이상적인 집단사고에 의하여 이상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녀의 책에서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라고 묻는다.

나는 '리볼루션 (revolution) 보다는 이볼루션(evolution)이라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녀가 날더러 구제불능의 반동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수구꼴통일 터이지만 어쩔수 없다.

 

-계속-

 

 

<소피의 선택> 後

 

바르샤바에 있던 소피는 전쟁 발발후 어느 날 돌연 체포되어 20개월 동안 아우슈비츠의 나락 속으로 떨어졌다.

외곽의 농촌에 사는 친구에게서 엄마를 위하여 고기(햄)를 몰래 들여 오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지독하게 재수없는 우연한 상황때문에)

유대인도 아인, 폴란드의 젊은 여성과 어린 아들과 딸이 고작 고기 한덩이 때문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유대인이라면 씨말리기라지만 폴란드의 어린 아이들까지 무슨 명목의 연좌인지.)

광기를 수반하는 집단이 만들어 내는 행태가 본시 그러하니 무슨 원칙이 있겠는가.

대부분의 폴란드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몹시 혐오하여 학대였지만 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나치의 희생자가 되었다.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이며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의 신봉자인 소피의 아버지와 소피의 남편은 정작 나치에 의하여 총살 당하였던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또 하나 기가 막힌 대목. 

종족우월주의를 부르짖는 나치의 레벤스보른정책은 또 무슨 지랄인지.(점령국의 이민족 아이들중 우수한 아이들을 유괴하여 총통에게 충성하는 가정에 입양시켜 철저한 국가사회주의 환경에서 독일인으로 기른다는 정책, 검사에 불합격된 아이들은 가차없이 집단 학살되었다.-소피는 아들 얀을 이 아이들에 포함시켜 살려 보려고 그토록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밀았다.)

 

선택(選擇).

여럿 중 하나를 고르기. 

나의 먹고사니즘인 강의, 내가 수강생들에게 씨부리는 단어중 ‘기회비용’이란 것이 있다. (내 경제학에 대하여 무에 안다고? 내 먹고사니즘은 詐欺에 기반한...)

선택한 것 말고, 포기한 대안중 가장 최선의 것이 기회비용이다. (선택한 것(기대수익률)은 적어도 기회비용(요구수익률)보다는 커야 한다는 투자론의 개념.)

선택’이란 계산(計算)이라는 이성적인 요소와 만족이라는 감정적인 요소가 딱 맞아 떨어질 때 발현되는, 비교우위의 것을 고르는 경제적 인간의 행동양식이다.

소피의 선택.

어린 두 자식중 불구덩이로 밀어넣어야 할 하나를 고르는 것.

순간적으로 딸을 밀어낸 소피.

그건 무의식중 남아선호사상의 발현인가, 그리하여 딸은 기회비용이었단 말가.

아니, 거기엔 호리(毫釐)도 이성과 감정의 작용은 있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그건 추호도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착란이 내지른 비명(悲鳴)이었다.

‘소피의 선택’에서 소피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나 남편... 반다의 요청... 라디오.., 거짓말... 미치광이...

소피는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아니하였다.

지독하게도 팔자 사나운 한 여인이 내지른 단말마의 비명이었을 뿐이다.

네이선에게로 돌아가 함께 목숨을 끊은 것까지도.

그런데도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이라고 붙였다.

탁월한 파라독스....

 

'소피의 선택'에 등장하는 세 사람. 

소피와 네이선과 소설의 話者인 스핑고.

화자(話者)인 스핑고는 작가지망생.

이른바 WASP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의 스팩을 갖추고 있는 인물. (남부출신이라는 죄업이 있지만)

스핑고는 네이선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존경하면서도 그의 여자 소피를 사랑하게 된다.

네이선은 하버드 출신에 노벨상감 연구에 매진하는 생물학자라고 뻥을 치는 과대망상에다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으며 마약까지 하는(1947년 당시에는 미국에서도 마약이라면 끔찍하게 취급되었었던 듯)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 부르주아 집안의 자식이다.

제 정신일 적에는 여러 분야의 박학다식함을 과시하며 역사를 논하고 철학을 농하고 문학을 재단하며 과학을 비평하고, 세련된 농담과 언변으로 좌중을 매혹시키는 사람이다. (유대인이라는 병적 자의식이 있지만)

소설가 지망생인 스핑고는 자신이 쓴 글에 대한 네이선의 평가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도 한다.

 

소피와 네이선과 스핑고.

이 캐릭터의 조합은 (일반적 삼각구도의 상투성에 익숙한) 내게는 다소 낯설다.

작가는 10여년 동안이나 이 작품을 구상하였다고 하니까, 이 캐릭터의 조합이 소설의 전개상 어떤 유기적인 장치로서 마련 되었음직 한데 내게는 작가의 숨겨진 의도가 쉽사리 간파되지는 않는다.

플롯상 필연적인 조합이라기 보다, 의도적으로 어떤 낯선 것들의 우연성을 상정하고 그 부딪침의 방전의 불꽃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게 아닐까 하는, 그래서 상당히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스핑고와 네이선 두 사람이 함께 시소의 한 편에 올라 타더라도 소피 쪽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소피의 고백에 따라 점진적으로 그 강렬함을 경험하고 전율케 되는데, 이에 비하면 스핑고나 네이선의 것들은 조족지혈이다.)

그래서 스핑고와 네이선에 관련된 그들만의 사적인 대목들은 좀 장황하게 읽혀졌다. (이 소설의 분량은 상하권 거의 천페이지에 이른다)

 

소설은 1979년 출판되었고 영화는 1982년도에 제작되었다. 

이야기의 현재 時制는 내 生年인 1947년이고 장소는 뉴욕이다.

그때 미국 뉴욕의 풍경과 세태풍속, 사람들의 의식(성의식까지) 같은 것들이 스핑고의 입을 통해 그려진다. (그 시대의 미국, 특히 뉴욕을 이 소설을 읽노라면 어느 정도는 알것도 같다)

남부출신 (포크너에 대한 이해가 책읽는 부족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깊어진다) 스핑고,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어쩔수 없이 팔아버린 노예소년 아리스테 얘기는 인상적이었지만 좀 장황하게 읽혀졌다.

인종차별과 인종학대라는 동일하게 부각된 주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것이 아우슈비츠와의 연결고리는 약하였다.

 

뉴욕 부루클린 분홍색궁전 (다가구주택).

스핑고의 방 위층에서 울려대는 교성과 신음과 탄성, 그것이 끝나자 연이어 들리는 베토벤 교향곡ل번의 느린 악장, 조금 있다가 남자의 구타음과 쌍욕설의 악다구니.

소피와 네이선의 관계는 ‘섹스, 음악, 폭력’이라는 세 단어로 축약해도 좋을듯 하다.

네이선과의 섹스 그리고 음악, 그리고 네이선의 폭력.

이 중 진정한 소피의 ‘것’은 베토벤 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소설에 나오는 소피의 음악들을㺞년도 훨씬 넘은 내 고물 턴테이블 위에 자켓의 먼지를 털어 내고 LP를 걸었다는... 나의 센티멘탈.)

내게는 그러 하였다.

소설을 관통하여 흐르는 클래식 음악만이 오로지 소피의 구원이었고 진정한 '소피의 것’이었을 거라는.

비록 소피가 원하였더라도 섹스는, 물론 네이선의 폭력도 소피의 ‘것’은 아니었다.

네이선이 어느날 우연히 발견하여 보살폈던 여인이 소피였고, 이 사나이는 소피에게 빠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소피의 금발을 살려내고 엉덩이의 살을 올리고, 틀니를 끼워주는등 그녀의 아름다움을 부활시켰다. (소피는 본시 굉장한 미인, 소설 속에서는 소피의 아름다움이 sexual한 쪽으로만 주로 묘사되었지만. 영화에서 소피를 연기한 메릴 스트립은 결코 미인이라고 할수 없는 배우, 그런 의미에서는 미스 캐스팅이었다)

 

네이선은 소피에 도취하고 소피는 그런 네이선에게 자신의 존재를 기탁(寄託)한다.

두 사람의 부딪침은 '미치광이의 관념적 절망'과 '리얼리즘의 절망'이 맞부딪쳐 튀는 불꽃이었다.

섹스와 음악과 폭력...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는 미친 사랑.

미치광이 네이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피. (씨애틀의 쟁님은 수용소에서 나치에 협력한 소피의 죄책감 때문에 유대인인 네이선에게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의견이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네이선의 가학(加虐)은 오히려 소피의 도피처였을거라고.

마조히즘의 쾌락이 아니라, 징벌로 치유되는 죄의식...

죄의식이 도망가 숨는 하나의 방어기제...

네이선의 미치광이까지도.

<나도 한때는 그리스도와 성모를 믿었지만, 이 가혹한 세월이 흐른 뒤에는 하느님이 영원히 가버렸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이제는 기도할수 없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나로 하여금 그렇게 고통스러운 죄책감 속에서 살게 하신 그들. 죄책감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요.> 

섹스에의 탐닉.

때로 소피에게는 색정광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오르가즘 속에는 리비도와 타나토스가 공존한다.

소피는 살아 남기 위하여 죽는 것이다.

섹스는 그녀의 방어기제였다.

 

네이선, 나는 그가 싫다.

그는 관념적인 인간이다. 

눈만 뜨면 사람 살태우는 냄새를 맡으며 살아보지 못한 그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게 싫다.

"어떻게 당신은 살아남았지? 다른 사람들은 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당신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술책을 부렸어? 그 작고 예쁜 엉덩이를 대줬나?“

뉴욕의 브르주아인 네이선의 유대인적 ‘관념’ 따위가 감히 소피의 ‘리얼리즘’ 못지않게 절망하는 폼 (고작 정신분열증에다 마약쟁이인 주제에)도 꼴 뵈기 싫다.

유대인 네이선은 남부출신 스핑고를 향하여 소리친다.

“오늘날의 남부는 인류와 연계를 맺을 권리를 포기해 버렸어. 남부의 백인 하나하나가 다 바비 위드의 비극에 책임이 있어. 누구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어.”

스핑고는 마주 소리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죄로 수세기에 걸쳐 부당하게 박해받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당신은- 그래, 당신말야, 젠장!- 어떤 일에 대해서라도 한 민족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용서받을수 없는 일인가를 알아야 해요! 심지어 독일 민족이라도”

소피가 곁에서 말한다.

“강제수용소에 대해서 뭘 알고 있어, 네이선 랜다우? 아무것도 모를 걸. 이제 그만해!”

죄업(罪業)의 연좌제, 죄의식의 연대를 읊조리는 네이선.

그는 역시 관념적 인간인 것이다.

 

저 일반화의 오류. 그런 것들이 인간을 구분하여 도식을 만들고 이념을 만들고 프로파간다의 깃발을 흔들면서 대중을 현혹한다. 

인간을 뭉텅이 뭉텅이로 나누어 개념정리를 하는 사람들, ‘반딧불의 무덤’을 보면서 일본의 면피성 철면피를 욕하는 사람들, 일본문화를 사랑한 그 시대 사람을 죄 친일파로 갖다 부치는 사람들, 북한을 옹호하면 죄 빨갱이로 몰아 부치는 사람들, 북한을 욕하면 죄 수구꼴통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

 

소피의 나라 폴란드.

“스팅고, 앞으로 언젠가 폴란드에 가서 직접 보고 폴란드에 대하여 글을 써 봐요. 정말 아름다운 나라예요. 그리고 정말 슬픈 나라고요. 상상해 봐요. 내가 거기서 자란 이십 년이 폴란드가 자유로왔던 유일한 기간이었어요. 공부하고 배우고 음악듣고 봅여름 일요일이면 교외로 나가 즐길수 있었고, 아래층에서 들리는 어머니가 치는 피아노소리, 슈만과 쇼팽과 베토벤과 스카를라티와 바흐...”

쇼팽의 나라, 뀌리의 나라 폴란드는 참 슬픈 나라였구나.

아, 나는 200 만명이나 되는 폴란드 사람들이 나치에 의하여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전율하였다.

 

극도의 광기에 사로잡힌 네이선에게 쫓기듯 남부로 도망가는 소피와 스핑고.

스핑고는 사랑하는 소피와 남부에서의 목가적인 결혼생활을 꿈꾸며 행복해 한다.

그러나 워싱톤 인근 호텔에서 스핑고와 격렬한 정사후 (작가는 잔인할 정도로 그 정사장면의 디테일을 묘사하고 있다) 소피는 '사는게 끔찍해요'라는 메모를 남기고는 사라진다.

'리얼리즘'의 죽음에 중독된 소피는 '관념'의 죽음에 중독된 뉴욕의 네이선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분홍궁전에서 소피와 네이선은 함께 죽는다.

전축에 걸려 있던 레코드들(겹겹이 레코드를 올릴수 있었던 예전 전축)은 퍼셀의 '트럼펫 볼룬터리', 하이든의 '첼로협주곡',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글룩의 '오르페오 중에 '에우리디케의 비가', 그리고 가장 위에 걸려 있던 마지막 음악은 '인류의 기쁨 되신 예수'였다. (헨델이나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인듯) 

죽음의 순간 음악만이 그들은 죽음의 품격을 함께 하였을까.  

그리고 소피와 네이선은 나란히 묻혔다.

 

스핑고만이 남아 중얼 거린다.

<어느 누구도 아우슈비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소피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글을 쓸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 악이 결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줄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결코 설명할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제까지 아우슈비츠에 대해 나온 설명중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은 단정짓는 문장이 아니라 되물음이었다.

질문: 아우슈비츠에서, 신은 어디 있었는가?

대답: 인간은 어디 있었는가?>

 

그렇다. 신은 없었다. 그 질문은 벌써 끝이 났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 있었는가? 그 야만의 순간에 인간은 어디 있었단 말이냐? 

아아, 알겠는가.

인간은 가학자와 피학자의 얼굴로서 바로 그 현장에 있었던 것이다.

신이 떠난 그 현장.

어느 놈은 가학자로서, 어느 놈은 피학자로서.

운명으로서 말이다.

한국말로 팔자소관으로서 말이다.

 

<그대의 사랑이 살아있는 모든 것에 흘러 넘치게 하라.

이 말의 진실성, 아니 진실성이 아니라면 불가능성에 대한 문제. 아우슈비츠가 인류 혈관의 흐름을 가로막는 치명적인 혈전처럼 거대한 사랑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막지 않았던가? 아우슈비츠같은 선뜩한 건축물이 세워지게 내버려 뒀던 세상에서 개미나 불도마뱀, 독사,두꺼비,독거미,혹은 광견병 바이러스- 혹은 축복받은 아름다운 생명체들조차도-등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만큼 사랑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 않았던가?>

 

추억의 코니아일랜드에서 스핑고는 눈물을 흘린다.

<소피와 네이선은 물론이고. 에바와 얀, 에바의 외눈박이 곰 인형, 에디 파렐, 바비 위드. 내 어린 흑인 구세주 아리스테, 마리아 헌트, 냇 터너, 반다무크호르흐 폰 크레추만, 구타 당하고 배신 당하고 학살 당하고 순교 당한 이 시대의 희생양들, 나는 600만명의 유대인이나 200만명의 폴란드인들, 혹은 100만명의 세르비아인들, 500만명의 러시아인들을 위해 울지는 않았다.

인류 전체를 위해서 울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내게 의미 있는 존재로 다가선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렸고,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내 흐느낌은 어느새 절규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다.

애드가 알란 포의 시가 홀연 마음에 새겨졌다.

“차가운 모래 아래서 나는 죽음을 꿈꾸었으나

새벽녘에 깨어나 보니

밝은 샛별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이 날은 심판의 날이 아니었다. 아침일 뿐이었다. 아름답고 빛나는 아침.>

 

소피의 선택. 

작가는 가해자를 적극 비난하여 항변하지도, 피해자 일방을 적극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냥 가해자 피해자 모두를 진득하게 설명해 내려고 노력하였을 뿐이다. 

내 보기에 작가는 운명론자이다.

선과 악이라거나 행복과 비극이라는 대비되는 극단의 양면성이 구현되는 것은 종이 한장 차이.

어쩌면 작가는 팔자소관에 대하여 장황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

삶의 플룻은 논리가 아니다, 어디 인과(因果)가 있는가.

삶은 드라마가 아니다. 어디 기승전결이 있는가. 

작가는 시간의 동시성 속에 존재하는 공간의 이중성, 또는 동일한 인간이나 사안에 존재하는 그 이중성을 운명론적으로 묘사하고, 인간존재 양식의 부조리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성실하였다.

동일한 시간이나 공간, 그리고 한 존재 속에 공존하는 부조리함,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한 작가의 성실함.

이 소설의 덕목이다.

 

인간성 속에 존재하는 선과 악. (나는 집단의 악과 개별의 선으로 읽고 싶지만)

피해자 속에 도사린 가해자의 이중성.

미국이 안고 있는 북부적 악과 남부적 선, 또는 그 반대.

뉴욕이라는 밝고 활기찬 대도시에 도사리고 있는 음흉한 어둠들 (소피는 지하철의 어둠 속에서 낯선 손에 의하여 성폭행을 당하고 그녀의 의식은 다시 그 어두운 기억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네이선 속에 존재하는 선의와 광기의 이중성.

섹스 속에 숨어 있는 쾌락의 기쁨과 죽음의 기쁨의 이중성. (또는 미국 처녀들이 갖고 있는 섹스관의 이중성)

아아, 무엇보다 생명 속에 내재된 죽음이라는 그 절대적 이중성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음하였다.‘우리는 살아있는 죽음인가, 죽어가는 살아있음인가’)

 

필경 작가일 스핑고가 말한다.

<그곳에 있지 않았던, 그리고 마치 다른 행성에 살았던 것 같은 우리에게는 동시적이기는 하나 효과적으로 비교하거나 의사소통 할수 없는 다른 종류의 시간이 존재한다는 개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소피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여 죽음의 문을 들어가는 그 시간에 스핑고는 몸무게를 늘이려 바나나를 마구 먹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 동시적 시간의 공간적 이질성.

전혀 소통될수 없는 다른 영역이 동시성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1980년 5월의 광주.

그때 서로 마주 대치한 두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다고 하자.

구호를 외치는 장발의 한 젊은이와 그에게 총을 겨누는 진압군으로 출동한 한 젊은이,

죽이는 자와 죽임을 당하는 자.

그들 두 사람의 운명적 인과(因果), 그 개연성의 간격이 그토록 크다고 생각하는가.

그러한가. 

총 쏘는 자와 총 맞아 죽는 자.

그 둘을 도치(倒置)시키는 건 절대로 불가한건가.

그 어떤 이유가 있어 그 둘은 절대적으로 나뉠 수밖에 없는겐가.

내 알아먹게 그 이유를 대어 보라.

도처에서 시시때때.

운명을 결정짖는 인과(因果)의 그 사소한 간격, 그 터무니없음에 놀랄 것이다.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일관성 따위가 아님을. 이념 따위가 아님을.

아주 작은 삶의 디테일 때문이었음을.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의 고통만이 아니다.

인간성의 고통이고 실존의 고통이다.

책을 덮고, 마음 무거운 중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

생명을 단순하게는 느껴보자고.

단순하게는 말이다. 

고양이의 목울대의 벌떡거림을 손가락의 감촉으로 느껴보자는.

파리 한마리를 잡아 산채로 손아귀에 넣어 살며시 쥐어 보자는.

꿈틀거리는 목숨.

얼마나 징그럽게 끔찍한건지.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선이며, 생명을 방해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악이다>

쉬바이처의 말이다.

 

책부족 여러분.

어쭙잖게 쉬바이처로 도망가는 나를 용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