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리뷰-
<롤리타> 前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作-
***동우***
2010년 11월 29일
1950년대, 외설(猥褻)과 배덕(背德)을 이유로 미국에서는 출판이 거부되어 어렵사리 프랑스에서 초판이 출간되었다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Vladimir Nabokov,1899~1977)’의 소설 ‘롤리타 (Lolita)’.
러시아출신 망명인으로서 유럽에서 공부하였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불문학교수, 곤충학자이기도 했으며 테니스와 체스를 즐기고 언제나 러시아의 고향을 그리워하였다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가 영어라는 이방의 언어(볼세비키 혁명전 러시아의 부르주아였던 어린 나보코프는 영어와 프랑어를 이미 능숙할 정도로 학습받았다고 한다)를 구사하여 쓴 소설 ‘롤리타’
줄기찬 지고(至高)함으로 극진하게 정념(情念)을 쏟아 부은 한 소녀를 향한 어느 중년사내의 고백록.
험버트 험버트(작가의 익살스러운 작명, 나는 그냥 험버트라고 부르겠다)의 영육을 기울여 그토록이나 사랑하였던 롤리타인데.
작금에 이르러서는 ‘롤리타’란 소아기호증(小兒嗜好症)의 도착적인 성벽(性癖)을 일컫는 포르노 용어로 굳어지고 말았다.
여자아이를 향한 변태적인 정욕으로 저지르는 끔찍한 성범죄자의 모습에 갖다 대고서 오버랩시키는 ‘롤리타’라니.
롤리타를 그토록이나 오도(誤導)하여 낄낄거리는 저질스러운 얼굴들이 오히려 역겹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롤리타의 장르는 일종의 미학이며 철학이며 심리학이며 사회과학인데, 어쩌다 ‘롤리타’라는 진주가 돼지 구유에서 뒹굴게 되었는지...
늘 느끼거니와 이른바 포르노라고 칭하는 것들에는 기괴(奇怪)만이 넘실거릴뿐 진짜배기 포르노란 별로 찾아볼수 없다.
진정한 포르노란 성적 판타지를 불러일으켜 성적 엑스터시를 가져다주는 것이어야 한다.
클로즈업된 암수피스톤운동 따위, 몬도가네적 괴이함 따위가 아니다.
그러나 작금 포르노라고 이름붙은 것에 거의 성적 판타지는 있지 아니하다.
고급스러운 색감의 성적 엑스터시를 유발하기에는 도무지 역부족이다.
동물의 우리에다 그 종(種)의 야동을 틀어주면 번식에 효과가 있을랑가 모르겠지만.
외설이란 인간의 성애를 동물적으로서만 해석하는 그것이 외설이다.
‘롤리타’는 결코 외설의 범주에 속할 수가 없다.
나는 소설 어느 페이지에서도 성교장면을 묘사한 대목을 접하지 못하였으며 도착적 섹스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없었다.
그렇지만 상상(想像)속 내밀한 판타지를 외설(猥褻)이라고 부른다면 이를 부정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극장 속 어둠 속에 잠겨서 관람하였던 유명 극영화 어떤 장면에서도 작금의 야동을 보는 것보다 지독한 성적 엑스터시를 느꼈던 사람이니까.
그리고 롤리타가 배덕(背德)이라니.
롤리타가 어떤 도덕률을 건드렸다는 말인지.
서른 여덟의 남자가 열두살짜리 어린 소녀를 사랑하는 그게 그토록이나 비윤리적인가.
마음속 정념(情炎)의 대상에 어떤 정통(正統)적 연배의 기준이라도 있단 말인가.
회춘의 보약이랍시고 어린 여자아이를 품는 사대부 늙은이는 그렇다치고, 단테나 괴테나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에드가 앨런 포(소설에도 등장하는 애너벨 리)를 들먹거릴 것도 없다.
그대의 인간성을 한번 뒤져 보라.
제도와 관습에 질곡(桎梏)으로 갇혀있는 비의지적(非意志的)인 어떤 부분, 그 부분을 한번 느껴보라.
느낌으로 상상(想像)하여 보라.
어린 소녀를 여성으로써 사랑한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되어 지지 않는지, 자의식이 죄악감으로 몹시도 괴로워 하는지.
잡설(雜說) 하나.
생각과 상상력을 가졌기에 인간이란 언필칭 ‘호모사피엔스’다.
나는 때로 엉뚱한 상상을 한다.
일부일처(一夫一妻)가 우리 인간성(人間性)에 비추어 과연 딱 들어맞는 제도인지 따위 .
고대 모계사회의 일처다부(一妻多夫)나 이슬람의 일부다처가 인간성에 비추어 어색하게 생각되듯이 일부일처라는 제도는 좀 우스꽝스럽지는 않는가.
죽을때까지 오로지 한사람의 배우자와 정신적 육체적으로 짝을 이룬다는 것.
그렇게 해로(偕老)하는 일생이 최고의 도덕적 삶으로 칭송을 받는다는 것.
인간성의 속성에 비추어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부자유스럽다.
그건 인문적(人文的) 타협주의(妥協主義)가 만들어 낸 편의적인 산물(産物)이 아닐까. (여성제위여, 내가 무슨 성적방종을 얘기하는 것이 아님을, 유구(悠久)하게 이어져 온 이 제도를 혐오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달라. 인간성의 속성에 비추어 그렇다는 말이다)
만물이 그러하듯 인간성이란 일관적이지 않고, 감정이라는 소프트웨어는 지극히 가변적(可變的)인 물건이다.
사계(四季)가 있듯이 한 목숨에도 계절은 있고, 계절마다 색채는 유별(類別)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영화(유지태 이영애 주연의 ‘봄날은 간다’) 대사에 감동들을 먹는다고 하는데 내 보기에는 참 교조적(敎條的) 단순성, 소아적 감성의 세리프다.
하하. 아해들아, 사랑이란 변하는 것이란다.
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이란 사랑이 아니다.
형해화(形骸化)되어 버린 도그마다.
험버트라고 롤리타를 향한 정념의 색깔이 시종일관 일편단심 민들레였는줄 아느냐.
아하, 이제 얘기하겠거니와 아니었다.
1950년대,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다다와 아방가르드가 횡행하고 히피가 태동하고 난숙한 모더니즘이 권태로워서 하품하던 그 시절에.
롤리타가 윤리교과서적으루다 반듯한 이야기는 아니었겠지만 당시 그토록이나 도덕적으루다 금기(禁忌)의 책이었다니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겉으로는 난만(爛漫)한듯 하지만 속으로는 똥폼을 잡고있는 미국사회의 어떤 위선적 이중성이 느껴진다.
뒷장 해설에서 읽었던, 미국 백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형성되었을 그 심리는 미국사적(美國史的)으로 꽤 그럴듯한 사연이 있으리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한국인인 나로서는 되게 웃겼다.
당시 미국의 출판사들이 금기로 삼는 적어도 세가지 주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 첫째가 롤리타와 같이 미성숙 소녀를 정념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
둘째가 흑백인종간의 결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많은 자녀와 손자들까지 낳고 행복한 삶을 산다는 것.
셋째가 완벽한 무신론자가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다가 106세에 자다가 죽는 것.
그래서 이 책 출판 당시, 출판사에서는 작가에게 차라리 롤리타를 열두살짜리 소년으로 바꾸자고 하였다는데 이건 또 얼마나 웃기는가.
어린 소녀와의 사랑이 어린 소년과의 남색(男色)보다 더 지탄을 받는다는 발상을 하는 미국사회.
미국의 청교도적 순결주의는 과연 어떤 생각의 것이었을까.
어쩄거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포는 미국작가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서도 이런 저런 점들이 상당히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영어의 어휘(語彙)를 비틀고 희롱하면서, 이야기의 허구성을 굳이 강조하였을까.
그리하여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을 빌어 짐짓 난해하게 이야기를 펼쳐 나간 측면도 있었을까.
이렇거나 저렇거나 작가의 문장은 내게 우아하였고 관능적이었다.
소설이지만 운문(韻文)으로도 읽혔으며 어떤 부분은 그대로 시(詩)였다.
러시아 출신의 작가가 이방의 언어인 영어로 쓴 작품이라지만, 영어에 무식한 나에게까지도 현란하게 엄습하는 작가의 미학적인 문장.
이 난해한듯 아름다운 소설을 우리말로 옮긴다는게 상당히 어려웠을법 한데 민음사판의 번역(권택영譯)은 상당히 잘 된 한글의 문장이었다. (원어의 느낌만 하겠는가마는)
관음증인 듯, 노골적인듯 은밀하게, 진지한 듯 익살스럽게, 고백인 듯 농담인 듯, 퀴즈를 풀 듯, 곡예를 하듯, 노래를 부르는 듯, 비약과 은유와 상징으로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관능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문장들은 그대로 순수한 미학(美學)이었다.
일인칭으로 늘어놓는 마술적인 언어에 나는 푸욱 빠져들었다. (어떤 부분 마르케스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작가가 묘사하는 험버트의 님펫은 절실하게 아름다워서 어린아이라던가 의붓딸 따위 외피적 모습들은 시나브로 사라지고 말았다.
예술지상주의랄까, 아무런 서사적 메시지 없이도 읽힐수 있는 순수문학.
음악으로 말하자면 절대음악.
일단은 말이다. (완독후에는 작가의 메시지가 읽혔고,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이 소설의 내러티브는 한 사람의 살인죄수의 고백록(告白錄)이라는 산문적인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시적(詩的)인 감흥을 동반한 운문의 서사(敍事)로서 읽어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롤리타.
표면적으로 느끼는바, 낯선 인간성을 들여다 보는 감동이거나 그것이 나에게 투사되어 동일시를 경험하게 되는 전율이거나 어떤 격한 느낌의 추상성.
소설이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정연(整然)한 해석이 따라야 하는 문학 장르는 아닐 터이지만, 그렇다고 롤리타를 카오스적인 감동만 간직한채 책장을 덮어 버려서는 아니될듯하다.
전개와 변환과 비약.
소나타형식의 악곡을 감상하듯 감성이 수렴하는 아름다운 악장.
더불어 악장끼리 그 불협화(不協和)한 모순을 감득(感得)하려 생각을 기울이는 것은 무익하지 않다.
험버트의 미세한 변주(배리에이션)를 주의깊게 청취하여 그 흐느낌을 느낄수 있다면.
그것이 인간을 들여다보는 눈길을 깊게 한다는, 이른바 독서의 효용이고 책부족 책읽기의 당위(當爲)가 아니겠는가. 하하하
첫 문장.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ㅡ리ㅡ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소설의 모두(冒頭)를 여는 이 문장은 소설 설국(雪國)에 버금간다.
그리고 이 문장은 굉장히 함의적(含意的)이다.
삶의 빛, 그것은 험버트(험버트 험버트)의 판타지였고, 생명의 불꽃, 그것은 허버트가 항해(航海)하는 현실이었고, 나의 죄, 그것은 험버트의 배가 정박(碇泊)한 종착이었다.
그리하여 롤리타, 그녀는 험버트의 영혼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 서사의 진행을 소나타형식의 악곡으로 나누어 지껄이련다.
제1악장의 테마는 ‘님펫의 판타지’.
제2악장은 ‘항해’롤리타와 험버트의 여행.
제3악장은 코다(coda)로서 ‘정박(碇泊)’이성,타협,각성,논리,성숙,씻김굿,구원이거나.....
님펫의 판타지.
<나는 그림책, 깨끗한 모래, 오렌지나무들, 다정한 개, 바다가 보이는 풍경 그리고 미소짖는 얼굴들에 둘러 싸여 밝고 건강한 아이로 자랐다.>
어린 시절 유럽의 해변에서 에너벨(에드가 앨런 포의 은유일 것이다)이라는 소녀와의 불장난이 있었지만 그녀는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여름 바닷가에 고착된 기억의 편린은 늘 험버트에게 남아 있었다.
<그 미모사 덤불- 별무리, 전율하던 느낌, 불꽃같은 열정, 달콤한 이슬, 그 통증은 내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내 해변가의 귀여운 팔다리와 뜨거운 혀는 나를 쫓아다녔고 마침내 이십사년이 지나 나는 그녀의 마력에서 벗어난다. 오직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그녀에 의해서.>
님펫.
님프란 악녀적(팜므파탈적)인 의미이고 님펫이란 그러한 님프를 칭하는 일반명사로서 불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만든 조어(造語)이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향한 욕망이 단지 타고난 자신의 기이한 성향의 증거일까, 아니면 그 여름에 고착된 어떤 기억의 영향인가하고 고민하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의 애너벨의 이미저리가 곧바로 험버트의 님펫은 아니었다.
에너벨의 이미지도 내포된 복합적인 감성의 대상, 관능과 정신을 아우르는, 영혼이 견딜수없게 빨려드는 대상인 그 님펫.
<남자가 님펫의 마력에 빠지는 데에는 적어도 십년 이상 아니 삼십년, 사십년, 아주 드물게는 구십 년까지의 나이 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내밀한 눈이 극복하려고 애쓰는 어떤 거리, 도착적인 즐거움으로 헐떡이며 감지하는 어떤 대조가 문제이다.나도 어리고 그녀도 어렸을 때 나의 사랑스런 에너벨은 내게 님펫이 아니었다. 그 매혹적인 시간의 섬에서 우리는 똑같이 어린 목신(牧神)이었을 뿐이다.>
<아홉 살에서 열네살 사이의 소녀는 때로 두배이상으로 나이가 많은 홀린 방랑자에게 인간이라기 보다는 님프의 속성으로 보인다. 이런 종류의 소녀를 나는 '님펫'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나 그 나이의 소녀가 모두 님펫인 것은 아니다. 아홉과 열넷을 공간적인 경계로 봐주면 좋겠다.>
<드넓고 신비한 바다로 둘러싸이고 나의 님펫들이 뛰노는 매혹의 섬 말이다. 그 거울같은 해변과 장밋빛 바위들.>
<님펫이란 어떤 기준에 따른 미인도 아니다. 소위 사회 통념상 천박하다는 것이 반드시 신비스러움에 해가 되지는 않는다.
꺼질듯한 우아함, 잡을수 없고 속임수에 가득차서 영혼을 조각내는 마력은 그 나이 또래중에서도 님펫만이 갖는 매혹이다.>
<정상적인 남자에게 아름다운 소녀를 골라보라고 한다면 반드시 님펫을 고르지는 않는다.
귀여운 악마.
가랑이 사이에서 부글부글거리는 뜨거운 독, 등골을 타고 흐르는 영원한 관능의 불꽃을 가져야만 하는 끝없이 우울한 예술가, 광인이어야 한다.
이들만이 즉시 알아본다.... 건전한 아이들 속의 그 귀엽고 치명적인 악마, 그녀는 아무도 몰라보고 그녀 자신조차 환상적인 힘을 가졌는지 모르는채 서있다.>
<아, 제발 나를 좀 혼자 있게 해다오. 내 이끼 낀 정원에, 내 사춘기의 공원에, 제발 그들이 내 옆에서 영원히 놀게 해다오, 절대 더 자라지 말고.>
딤즈데일의 하숙집에서 험버트는 꿈에도 그리던 완벽한 님펫을 조우(遭遇)하였다.
<내 가슴 밑바닥에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태양이 쏟아지는 돗자리 위에서 반쯤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채 상반신을 돌려 선그라스 너머로 나를 응시하는 소녀.
(중략)
“저 애가 제 아이 로예요.”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여기 이건 제 백합들이구요.”
“그렇고 말고요”나는 말했다.
“그렇고 말고요. 정말 아름답군요, 아름다워요, 아름다워요!”>
감탄과 희열.
완벽한 님펫, 처음 보자마자 롤리타의 ‘님펫’에 전율하는 험버트.
여러 소녀들의 이름들에 둘러쌓인 ‘헤이즈 돌로레스’(롤리타의 본명)라는 음절의 이름에서도 숨을 헐떡이는 험버트.
<한편의 시, 진정한 한편의 시다! 이 <헤이즈 돌로레스(그녀!)>를 특별한 이름들의 초당에서, 장미꽃들의 보디가드와 함께 발견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하고 달콤한가, 명예로운 두 시녀 사이의 아름다운 공주, 나는 그것- 다른 모든 이름들 속에 있는 그 이름-이 왜 내 등골을 짜르르하게 했는지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소유하였던 물건을 어루만지면서 느껴워 하는 패티시즘(fetishism)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일종의 성욕도착(性慾倒錯)이라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여자의 속옷에 얼굴을 묻고 숨을 헐떡이는 그런 변태와 동급으로 취급하기를 나는 거부한다.
맹목의 감성이다.
신앙적인 사랑이고, 종교적인 숭배다.
우연히 롤리타의 몸을 스치게 되면 험버트는 쾌락으로 전율하여 마음 속으로 부르짖는다.
<아아, 내 뜨거운 솜털같은 연인아.>
<오, 신비함이여. 오, 고통스러움이여.>
쾌락에는 고통이 따른다.
오르가즘이란 어쩌면 절정의 고통이다.
아직 롤리타의 현실(육체)을 소유하지 못한 험버트의 1악장.
판타지거나 상상이거나 또는 미학, 관음증, 순수, 이데아, 시(詩), 플라토닉, 절대미(絶對美)이거나...
-계속-
<롤리타> 後
항해(航海).
롤리타의 어머니가 죽고 드디어 험버트는 님펫의 육체를 소유한다.
아니, 님펫의 현실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첫 섹스가 있기전 기대와 긴장으로 어쩔줄 몰라하는 험버트 아저씨.
<한잔 하고픈 생각이 간절하다. 긴장이 고조되어 터질 것 같다. 바이얼린 줄이 날카롭게 울린다면 내가 바로 그 줄이었다.>
몸을 열기전 롤리타는 험버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이미 경험한 자신의 섹스에 대하여,
롤리타는 순결한 여자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작은 요부는 험버트에게 몸을 열어 주었다.
<캠프에서의 소녀라는 것, 순결과 성적 호기심과 미국적 남녀의 혼재된 모임들.
예민한 숙녀배심원 여러분. 저는 그녀의 첫 번째 애인조차 못 됩니다.
나를 유혹한 것은 그녀였습니다.>
미국청소년들의 성의식에 관한 러시아 사람인 작가의 생각들.
님펫의 첫남자란 험버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험버트와 롤리타.
자동차로 떠돌면서 계속되는 여행.
작가가 험버트의 입을 빌어 묘사하는 드넓은 미국의 각 지방의 풍광과 풍속과 인상을 묘사하는 대목들에서 작가의 사회비평적 생각들이 읽힌다.
고속도로를 타고 미국 대륙을 종횡으로 여행한다는건 대양을 항해(航海)하는 것과 같구나. <미국땅 밟아보지 못한 내가 자동차여행이 항해와같다는 느낌을 알 리가 있나. 씨애틀에서 잠시 귀국한 쟁님, 책부족 서울모임에 참석하려고 (쟁님의 친정은 부산 수영) KTX 좌석에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서 서울까지의 두시간여, 여러 얘기 나누었지만 미대륙 횡단의 ‘항해’에 관한 얘기들은 인상적이었다. 미 대륙횡단은 그야말로 항해.. 망망대해를 달리다 멀리 반짝이는 항구의 불빛, 그게 모텔이고... 그 인상에 대한건 다음에 지껄이기로 하고.. 추언(追言), 쟁님과 서민정님은 절친한 외대(外大)동기인건 익히들 아실터. 그런데 두분의 미국인 남편끼리도 둘도 없이 절친한 코넬대 동기라는 건... 그 날 들은 두 쌍에 관한 저간의 에피소드에 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다음에 들려드리리다. ㅎㅎ)
험버트는 님펫의 육체에 탐닉한다.
그러나 롤리타는 몸은 주지만 결코 이 양부(養父)이거나 늙은 정부(情夫)에게 마음을 열어 준 것은 아니었다.
험버트가 롤리타의 육체를 애원하면 그 댓가를 요구하는 롤리타.
<순진함과 속임수가 공존하고, 매혹과 천박함, 우울한 불만과 분홍빛 환락이 공존하는 롤리타...>
차츰 험버트는 롤리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데 집착하는 늙은 샛서방(?)이 되어 버린다.
롤리타의 거짓말과 험버트의 폭력.
그리고는 후회하며 자신을 학대하는 험버트.
<그러고나자, 후회와 속죄의 흐느낌, 비굴한 사랑, 화해를 요구하는 어쩔 수 없는 육체의 욕망, 이 모든게 달콤하고 쓰라리게 가슴에서 솟구쳤다. 그 벨벳과 같은 밤, 미라나 호텔에서, 나는 그녀의 노란 발바닥에 키스하며 나 자신을 학대했다.>
항해이거나 또는 현실, 일상, 관성, 감각, 생활,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죄의식, 산문(散文)이거나.... 그런 2악장.
정박(碇泊)
어느날 롤리타는 사라졌다.
미친 듯 잃어버린 님펫의 행방을 탐색하는 험버트.
<어디 숨었니, 돌로레스 헤이즈? / 왜 숨어있니? 사랑하는 사람아?
(중략)
죽어가네 죽어가네, 롤리타 헤이즈. / 증오와 후회로 나는 죽어가네.
(중략)
경관님, 경관님, 그들이 저기 가요- / 돌로레스 헤이즈와 그녀의 애인! /총을 뽑아들고 저 차를 따라가요.>
몇 년 후 한 통의 편지로서 롤리타는 험버트에게 나타났다.
결혼하였고 임신하였고 돈이 필요하다는 사연으로.
권총을 지니고 롤리타를 찾아가는 험버트.
해후한 롤리타는 이제 험버트 판타지 속의 그 님펫은 아니었다.
봄이 사라져 버린 님펫.
아아, 가을의 님펫도 여전히 험버트의 님펫인가.
<비록 그녀의 외모는 시들었지만, 그리도 가망없이 늙었지만, 나는 분명코 그녀가 보티젤리의 팔 빛깔 비너스 같고, 늘 그랬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어-머-나!”그녀는 잠깐 멍하더니 놀라움과 반가움을 섞어 부르짖는다.
“남편은 집에 있어?”나는 주머니에 주먹을 넣고 쉰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 물론 누군가는 그럴 수 있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것은 첫눈에 반한 사랑이고, 마지막까지의 사랑이고,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롤리타의 남편은 상이군인이었고, 지극히 평범한 남자였다.
결코 험버트의 상상 속 그토록 심장을 떨며 질투하고 분노하였던 그런 종류의 사나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누굴까, 험버트가 찾고 있었던 인물은.
단지 그녀를 유인하여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라, 롤리타의 그 들끓는 욕정을, 그것을 빼앗아 간 자.
<“저 녀석은 내가 원하는 친구가 아냐.”
“자, 어서 그 작자 이름을 대라니까!”그의 이름은, 나의 가을의 님펫이여.>
<그리고 부드럽고 은밀하게 그녀의 가는 눈썹을 찡그리고 마른 입술을 오므리며 그녀는 말한다, 조금 조롱하듯, 어딘지 괴팍스럽게, 그러나 부드럽게, 소리없는 휘파람같이, 예민한 독자라면 벌써 눈치챘을 그 이름을.
나도 역시 지금까지 그를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른채.
충격도 놀라움도 없었다.
조용히 모든게 용해되었다, 익은 과일을 때맞추어 떨어지게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이 회고록, 그렇다- 그녀는 말하고 있었고 나는 황금빛 평화 속에 앉아 있었다. 논리적 인식을 충족시킴으로써 황금빛 끔찍한 평화를 그리려는 분명하지만 왜곡된 목적을 가진 이 회고록 속에서 내가 끊임없이 짜맞추어 왔던 패턴에 딱 맞게 모든게 순서대로 배열되었다, 적의에 찬 나의 독자들은 지금쯤 그런 논리적 인식의 만족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한 것처럼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감정도 차분히 가라 앉았다.
그는 그녀가 사랑했던 유일한 사내였다.
그녀는, 지금 벨벳 코트를 입고 자기 옆에 앉아있는, 초연하고, 우아하고, 날씬한 사십 세의 병약자가, 자신의 사춘기 육체를 세포마다 땀구멍마다 알고 숭배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 그리고 조금은 지루하고, 혼란스럽고 불필요한 사실-을 내가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상스레 안경 쓴, 지친 잿빛 눈에서 우리들의 서툰 로맨스는 잠깐 떠올랐다고 생각되었고, 그러고는 재미없는 파티처럼 치워졌다. 가장 지루하고 재미없는 비 오는 날의 소풍처럼, 지루한 운동처럼, 어린 시절을 빚어내는 한 조각의 마른 진흙 덩어리처럼.>
<“그는 돼지가 아니예요. 그는 여러 면에서 대단한 남자예요. 하지만 늘 취해 있고 마약도 했지요. 그리고 섹스의 문제에서 그는 완전한 변태였어요. 그의 친구들은 그의 노예였죠.
나는 그를 사랑했기에 그런 짓을 거부했고 그래서 그는 나를 버렸어요“>
<나는 내 가난한 진실을 외쳐댈 것이다. 내가 얼마나 롤리타를 사랑했는지 세상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롤리타, 창백하고 더럽혀지고 다른 사내의 아이로 배가 부른 여자, 허지만 여전히 잿빛 눈에 검은 속눈썹, 여전히 붉은 갈색의 아몬드빛, 아직도 칼멘시타, 여전히 나의 것, 인생을 바꾸자, 나의 카르멘이여, 어느 곳이든지 결코 우리가 헤어질수 없는 곳에 가서 살자꾸나. 나의 롤리타.>
<“지금 널 만지면 그대로 죽을 것 같다. 넌 정말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같이 갈 희망이 전혀 없는 거야? 그것만 말해 줘”
“네, 달링, 전혀 없어요”
그녀는 전에 한번도 나를 달링이라고 부른적이 없다.
“당신과 함께 가지 않아요, 그건 분명해요. 큐에게 돌아가는게 차라리 나아요.”>
그리고 롤리타는 험버트에게 선언하였다.
<그는 내 마음을 망가뜨렸고, 아빤 그저 내 삶을 망가뜨렸어요>
롤리타의 마음을 망가뜨린 자.
퀼티.
<아주 먼 훗날, 돌로레스 헤이즈라는 북아메리카의 소녀가 어떤 미친 놈에게 어린 시절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조금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면, 그것이 증명되지 못하면(그리고 그것이 증명되면 삶은 하나의 조크에 불과하다), 나는 나의 비참함을 치료할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분절적인 예술이라는 우울하고 아주 지엽적인 고통 완화제를 얻는 길 외에는.>
해설을 보니까, 본문 속 분절적(分節的)이라는 어휘는 작가의 언어희롱을 암시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방법론인 그의 예술.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굳이 서문이라는 걸 만들어 책머리에 써 넣었다.
1955년 존 레이 주니어박사라는 사람이 ‘롤리타, 혹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이 수기를 소개하면서 쓴 서문이다.
이런 단어들로서 구성되었다.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 위험스러운 성적성향에 대한 분노 / 안전한 세상을 위한 경종>
이제 님펫이 아닌 롤리타.
험버트는 이제 님펫에 집착하는 사나이가 아니다.
죄의식.
그리고 책임감과 윤리의식.
갑작스런 모럴리스트 험버트에게 나는 당황하였다.
작가는 방점을 찍어 말하고 있다.
<옛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인간들에게 도덕적 감각이란 우리가 덧없는 미적 감각에 지불해야 하는 의무다.)>
미적 감각에 지불해야 하는 도덕적 감각의 의무라.
무엇인가. 무엇인가.
몽롱하도다.
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예술이여. 사회성이여, 모럴의식이여.... 하면서 얼버무려 버릴까.
그리고. 롤리타가 진정으로 사랑하였다는 ‘퀼티’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롤리타의 마음을 망가뜨린 자.
퀼티.
소설의 종장에 이르러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아, 그는 험버트의 또 다른 자아(自我)였구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프로이트적 사고체계를 무척이나 싫어 하였다고 하는데)
퀼티는 2악장 항해시점부터 소설에 등장한다.
첫악장 판타지의 험버트는 순결한 미(美)에 침잠하여 또다른 자아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롤리타와 첫 섹스를 벌이기 직전 호텔의 테라스에서 퀼티는 험버트에게 나타났다.
바야흐로 꿈에 그리던 님펫을 범하려 하는 순간, 오래동안 간직하였던 그 아름다운 판타지가 질척이는 현실로 바뀌려는 순간에.
그리고 양아버지이며 스폰서이며 보호자인 험버트,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때문에 죽은 님펫의 어머니...
망설임.
죄의식으로 신음하는 내일의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가능성으로 기다리는 이 절대미(絶對美).
몸뚱이로 나타난 이 탐미의 대상을 어이 마다한단 말가.
<갑자기 나는 어둠 속 내 옆, 기둥이 있는 현관의자 위에 사람이 앉아있는걸 느꼈다.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나사를 돌리는 듯한 쉰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껄껄 웃고 다시 차분하게 나사를 조인다. 내가 막 가려는데 그의 음성이 들렸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애를 얻었어?”
“뭐라구요?”
“내 말은 날씨가 좋다는 거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젊은 애는 누구야?”
“내 딸이오.”
“거짓말- 그렇지 않아”
“뭐라구요?”
“내 말은 칠월은 무덥다는 거지. 그 애 엄마는 어디 있어?”
“죽었어요”
“알았네. 미안하군, 그렇다면 당신 두 사람, 내일 나와 함께 점심을 하면 어떨까. 저 시끄러운 무리(기독교인들)들은 그때쯤 다 가버릴테니까”
“우리도 갈 겁니다. 안녕히 주무시오”
“미안하오. 술이 많이 취했어. 잘 가시오. 당신 딸은 잠을 푹 자야겠더군. 페르시아인들이 말했듯이 잠은 꽃이오. 담배 피우겠소?”
“지금은 싫어요”
그는 라이터를 켰으나 술에 취한 탓인지 불꽃은 그를 피해 다른 사람을 비추었다. 아주 늙은 사람, 오래 된 호텔의 영원한 손님 가운데 하나, 그리고 그의 하얀 흔들의자,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어둠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나서 노인이 기침하고 침 뱉는 음산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현관을 떠났다. 적어도 반 시간은 지났다.>
항해 중에도 퀼티, 또다른 험버트는 끊임없이 험버트의 뒤를 좇는다.
그리고 종내, 험버트의 판타지 님펫이라는 그 절대미(絶對美)는 현실로서 퀼티를 쫓아가 버리고 말았다.
퀼티.
도덕이며 사회성이며 또한 비도덕이며 음란함이며 변태.
소설 속 험버트의 바깥부분, 소설의 밖에서 존재하는 퀼티.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는.
롤리타의 진면목의 영역이었거나 험버트의 실체였거나.
님펫은 추상으로서 소설속 험버트에게 남겨지고 말았다.
험버트 험버트의 님펫이여.
슬프디 슬픈.
이제는 님펫이 아니지만 소설 밖에서는 언제나 험버트의 님펫일 롤리타.
그녀와 헤어져 험버트는 퀼티를 찾아가 그를 권총을 쏴 살해하게 된다.
소설 속 험버트의 구원.
퀼티의 호화저택에서 뒤엉켜 격투를 벌이는 험버트와 퀼티.
<이번엔 내가 그를 덮친다, 우리는 나를 덮쳤다. 그들은 그들을 덮쳤다. 우리는 우리들을 덮쳤다.>
퀼티의 숨통을 끊기전 험버트는 자신의 자작시를 퀼티로 하여금 낭독하게 한다.
<너는 어느 죄인을 이용했기에
너는 내 불합리함을 이용했기에.
(중략)
내가 아담처럼 벌거벗고 서 있을 때
연방법과 별이 가득한 국기 앞에서.
(중략)
너는 나의 내적 본질의 순수함을 이용했기에
(중략)
너는 나의 참회를 속여 앗아 갔기에
(중략)
솜털이 보송한 귀여운 소녀, 아직도 양귀비 꽃을 꽂고
찬란한 황혼 속에서 아직도 팝콘을 먹고 있네
구릿빛 인디언들이 품팔이 소작인들을 부리는
너는 그녀를 앗아갔지
밀랍같은 눈썹을 가진 고상한 보호자로부터
그의 무겁게 내려온 눈꺼풀에 침을 뱉으며
그의 구릿빛 제복을 찢으며
그리고 새벽이면 죄인이 새로운 불안에 뒤척이게 하면서
사랑과 바이올렛의 끔찍함
네가 우둔한 인형을 조각내어
그 머리를 내던질 때 후회스러운 절망
네가 저지른 모든 죄 때문에
내가 하지 않은 모든 것 때문에
너는 죽어야만 한다.>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느낀 단 하나의 만족은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회복기, 그러니까 온갖 종류의 귀찮은 수술과 재발로 방해받는 긴 회복기를 겪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오는 안도감, 그리고 그가 나를 찾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 구태여 그것이 유령이 아니라고 변명해야 할 어려움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신이 퀼티로 뒤덮여 있다. 피 흘리기 전에 둘이 뒹굴던 그 촉각 때문이다.>
소설의 종장.
험버트는 롤리타를 향하여 독백한다.
<너의 남편 빌에게 진실해라. 다른 사람이 널 만지지 못하게 해라.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 마라. 네 아기를 사랑해라.
그리고 퀼티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랑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 가는 그림 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수 잇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
소설은 끝났다.
이제 책 뒷편(해설)에서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말한다.
<나 역시 영감과 배합의 상호작용이라는 낡은 용어에 의지하여 소설을 쓰는 그런 일반 작가이다.
나는 교훈적인 픽션을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
롤리타 안에는 어떤 도덕적 이끌림이란게 없다.
내게 픽션은 거칠게 말해 미학적 지복을 주는 한 존재한다.>
작가는 소설 속에 무슨 '참 인생'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현실이란 일반적이고 평범하고 평균적인 감정으로 구성되고 선전된 대중이다.
그렇게 상징적인 세계인데 비해, 걸작은 '창조적'이며 독특하여 현실에 맞지 않다.
따라서 작가의 실체 (리얼리티)는 오직 작품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현실은 그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배합의 기쁨인 예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오로지 그 곳에서 창작의 기쁨을 찾았다.
나의 못생긴 좌뇌의 논리가 작용하였더라도, 그렇다.
롤리타는 해석의 영역에 속한 어떤 객체가 아니었다.
분석이 가능한 어떤 인격이 아니었다.
가슴 한구석 흐느낌으로 겪게 되는 하나의 추상(抽象)이었다.
감수성으로.
아름다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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