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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1,2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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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前

-하인리히 뵐 作-

 

 

***동우***

2010.12.28.

 

1974년에 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소설.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 1917~1985)’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혹시나 하여 웹 하드에서 영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찾았더니 짠~하고 떠오르지 무어냐.

횡재한 기분. (거듭 뇌인다. 좋은 세상이로다.)

카타리나 블룸으로 粉한 주인공 얼굴이 낯이 익어 찾아본 필모그래피를 찾아보았다.

그녀는 바로 ‘양철북(’귄터 그라스‘원작의 영화)’에서 양철북을 두드리는 영원한 어린아이 '오스카'의 어머니로 나온 그 배우였구나.

영화는 대체로 원작에 충실한 화면이었다.

이번 책부족이 읽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지난달 책부족이 읽었던 ‘롤리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문학이다.

사르트르의 앙가주망과 궤를 같이하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리고 예술지상주의 색채 가득한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

사회현실에 속박된 인간을 문학의 질료로 삼아서 사회적 이슈를 제시하여 개선과 변혁을 촉구하는 작가 하이리히 뵐. (그가 국제펜클럽을 이끌면서 유신시대 시인 김지하의 석방을 박정희정권을 향하여 강력하게 촉구하였던 사실은 그 시대를 살았던 나도 기억하고 있다.)

스스로 느끼건대 나의 기질은 대체로 나보코프 쪽이지만, 나 또한 사회구성인자일진대 뵐의 앙가주망을 외면할수도 없을뿐더러 외면해서도 아니될 것이다.

두껍지 않은 장편소설 ‘카타리나 블롬의 잃어버린 명예’가 어필하는 것은, 그 주제가 사회성 모자란 내게도 생각을 깊게 하는 ‘저널리즘과 글쓰기’에 관한 주요한 테제였기 때문이다.

모두(冒頭)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중에 ’빌트‘(실제 독일의 신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신문 '차이퉁'은 독일어로서 신문을 일컫는 일반명사라고 한다. 그런데 이 '차이퉁'은 바로 '빌트'라는 서독에 실재하는 신문임을 빗대어 적시(摘示)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시제(時制)는 독일의 통일은 생각조차 할수 없었던 1974년 무렵.

책 속의 현실은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벌어졌고 벌어질 개연성을 언제나 내포하는, 엄연한 현실성(actuality)을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작가의 태도.

후기(後記)에서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라고 하였는데 허구적인 ‘로망’이 아니라는 뜻으로 위의 말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언론의 부정적 속성에 관한 일종의 ‘현장 보고서’로 읽어주기를 바란듯 하고 나 또한 그런 인식을 가지고 이 소설을 읽었다.

하인리히 뵐은 대중을 집단적으로 호도하여 몰아갈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는. 막강한 언론권력을 향하여 말한다.

‘아무리 막강한 절대 권력도 그들만큼 항상 권력을 마구 휘두르지 않는다.’고.

수백만부 수천만부의 독자, 수백만 수천만 혹은 수억의 시청자. 그 매스(mas)적 위력을 가지고 쥐고 흔드는 위력.

포착되는 단서의 추상성 모호성에 접근하여 문자적 혹은 영상적인 가공에 따라 무한한 규정가능성의 힘을 지니고있는 언론, 이른바 매스컴.

그들은 의도에 따라 팩트(fact)를 조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렇게 조작된 언론은 사회적 여러 현상(現狀)을 왜곡하고 오도(誤導)하고 호도(糊塗)할 뿐 아니라 개인의 권리는 물론 급기야 개별의 실존 자체를 압살(壓殺)하는 무시무시한 폭력을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소설의 부제가 이러하다.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나치의 집단 여론 조작의 귀재 괴벨스가 어느 사석에서 말하였다고 하지 않는가.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1.

 

1974년 2월 20일 (수요일) 저녁 8시경.

카타리나 블룸은 루드비히 괴텐을 처음 만나는 순간 그만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나흘 후인 1974년 2월 24일(일요일) 낮 12시 15분.

카타리나 블룸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신문기자 베르너 퇴트게스를 권총으로 살해하였다.

그 나흘간의 과정이 이 사건을 이루는 전모(全貌)다.

 

2.

 

1947년 3월 2일 출생(나와 동갑), 사건 당시 스물여섯인 소설속 여주인공 카타리나 블룸.

어린 시절 사망한 아버지는 광부였고 어머니와 두어살 터울의 오빠가 있는데 어머니는 청소등 허드렛일로 남매를 부양하였다.

사건 초반, 고향의 어머니는 암수술을 받아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였고 오빠는 절도죄로 복역중이었다.

초등학교(우리나라로 친다면)를 졸업한 후 어머니의 먼 친척이며 자신의 대모인 볼터스하임 부인의 도움으로 생활과학아카데미(직업학교인듯)에 다녔고, 그후 야간학습을 통하여 국가공인 가정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스물한살때 오빠를 통해 알게 된 방직공 브레틀로와 결혼하였지만 반년만에 (남편에 대한 극심한 혐오감으로) 홀로 도시로 갔고, 고의로 가출했다는 이유로 그녀가 이혼의 책임을 지게되어 이혼하였다.

(볼터스하임부인의 진술에 의하면) 브레틀로는 전형적인 불성실한 아첨꾼으로 카타리나가 이 남자와 경솔하게 결혼 한 것은 끔찍한 가정환경에서 도망가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카타리나는 가정환경과 신중하지 못했던 결혼생활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모범적으로 자신을 발전시켰다.

사건 당시 그녀는 블로르나 박사 부부(남편 블로르나는 산업변호사이고 아내 트루데는 건축가)의 집에서 가계와 가사를 독자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블로르나 박사 집에서의 근무시간은 7시부터 오후 4시 30분경까지.

그 후의 시간은 정년퇴직한 교수 히페르츠부부 댁의 일을 하고, 이따금 시간이 나면 음식점 주인인 클로프트 씨 집일을 하거나, 리셉션, 파티, 결혼식, 단체모임, 무도회일을 돕는데, 대개 프리랜서 관리인으로 총비용과 위험부담을 떠맡고, 때로는 클로프트사의 위탁을 받아 일하기도 한다. <일의 내용은 경리일부터 조직적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음식도 만들고 이따금 서빙도 하는 종류의 일,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급 가정부나 파티 매니저 혹은 행사기획자쯤일 것이다.>

그야말로 촌음을 아껴가며 열심히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카타리나.

그녀는 대출을 받아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구입하여 혼자 살면서, 중고 폴크스바겐을 구입하여 타고 다닌다.

 

3.

 

(다른 사람의 진술로도 증명되듯이) 카타리나 블룸은 매우 순수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성실하고 반듯한 여성이었다. <또한 자기관리에 철저한 여성으로서 남자관계에 있어서 친구들로부터 ‘수녀’라고 불릴 정도>

자신의 일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매우 성실하고 계획적이며 꼼꼼하기 이를데없이 일을 처리한다.

블로리나부부가 그녀에 대하여 하는 말.

<“우리가 카타리나에 대하여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든 집안일을 계획성있고 완벽하게 도와줌으로 우리 지출은 현저하게 줄었고 우리 부부는 집안의 노동에서 자유로움으로서 그 소득은 말할수 없이 큰 것이다. 카타리나가 온 후 우리의م년간의 뒤죽박죽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괴텐의 도주방조 혐의로 연행된 뒤 그녀의 은행 거래명세표를 조사 검토한 회계사는 감탄하면서 수사관에게 말하였다.

<“맙소사, 그녀가 석방되어 직장을 구하게 되면 나한테 연락 좀 해주시오. 늘 이런 사람을 찾았지만 본 적이 없거든요.”>

 

4.

 

당시 독일(서독)사회에 대하여 알아야만 이 소설의 배경을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나치가 패전한 이후 독일에서는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도 없었고 사회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의 태도와는 엄청 다른 줄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독일(서독)은 미국의 마샬정책을 기반으로 급속하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급성장한 경제로 풍요로운 물질주의를 누리고 있는 중산층은 두터웠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1960년대 말부터 미국으로 표상되는 제국주의(베트남전으로 인하여)에 대한 저항의 몸짓은 세계 곳곳에서 거세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급기야 1968년 무렵부터, 자본주의의 안락함에 빠져있던 서구사회는 거센 물결에 직면하게 된다.

워싱턴, 도쿄, 베를린, 파리등 여러나라 도시에서 일어난 격렬한 학생시위.

학생들과 히피의 반전(反戰)시위가 미국을 휩쓸었고, 파리의 공장과 밀라노의 대학이 노동자와 학생들에 의하여 점거 당하였으며, 베를린의 대학에는 붉은기가 오르고, 도쿄의 거리는 학생들의 함성으로 가득하였다. <나의 1968년은 일개 군바리로 그런 세계사적 사조에 관하여는 까막눈이였다>

독일의 바더 마인호프 그룹이나 일본의 적군파를 비롯한 극좌 테러조직이 지구촌 곳곳에서 준동하였다. <일본 적군파의 JAL기 납치사건, 우리나라 공항에 일시 기착하였을 때의 TV의 생생한 장면들이 떠오른다.>

납치와 살인과 테러.

‘라인강의 기적’의 단물에 취하여 홍야홍야하고 있었던 서독(西獨)의 안정추구세력(보수세력)은 아연 긴장하였다.

그들의 좌파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감은 이웃에 적성국가 동독(東獨)이 있음으로 더욱 심하였을 것이고, 그런 분위기는 사회적 컨센서스로서 서독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5.

 

1974년 2월 10일 (수요일) 저녁, 카타리나 블룸이 첫눈에 홀딱 반한 사람은 바로 루드비히 괴텐.

그는 당국에 의하여 은행강도와 살인등의 혐의로 수배된 인물이었고, 진작부터 그에게는 미행이 따라 붙었으며 그와 접촉하였던 사람들의 전화는 당국에 의하여 도청되고 있었다.

볼터스하임 부인집 파티에서의 첫만남 순간부터 카타리나는 그와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괴텐은 카타리나에게는 바로 “오기로 예정되어 있는 바로 그 남자”였던 것이다.>

그날 밤 남녀는 카타리나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괴텐을 자신만이 알고있는 아파트의 비밀 출구를 통하여 도주하게 하였고 그에게 도피처의 열쇠를 건내 주었다.

밤새 그녀의 아파트를 포위하여 감시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도청의 정보를 기다리는 있었던 수사관들은 도무지 통화 기척이 없자 무장경찰대와 함께 카타리나의 아파트를 덮쳤다.

괴텐은 없었고, 집에는 <긴장을 풀고 아주 편안해 보이는,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카타리나 만이 그들의 거친 방문을 예상이라도 한듯 그들을 맞았다.

카타리나는 연행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저널리즘의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후기에서 하인리히 뵐은 말한다.

<“한 소박한 여자, 즉 썩 괜찮은 한 가정부가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나중에 그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녀의 성격상 그의 수배사실을 먼저 알았다고 해도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다, 사랑은 정말 기막힐 정도로 기이한 일이다. 범죄자를 사랑하는 여인들이 있다. 범죄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서로 첫눈에 서로에게 빠져버린 카타리나와 괴텐 두사람의 사랑은 아무래도 문학적 감성으로 접근해야 할 대목일 듯 싶다.

<"새치름하고 뻣뻣하다고 알려져 있고 친구들 사이에서 수녀라는 별명을 가진 당신이, 생전 처음 만난 사나이와 함께 어울렸다는 그걸 믿을수 없소.”>

수사당국이 카타리나 블룸을 연행하여 조사하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한 국가권력의 책무여서 카타리나도 이점은 수긍하였다.

당국은 그녀가 지난 밤에서야 비로소 괴텐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수 없었을 것이고, 정황으로 보아 누구라도 카타리나를 괴텐의 공범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카타리나는 범죄자의 도주를 협력하였고 그가 은신할 곳의 열쇠까지 건내주었던 것이다.

작가도 말했듯 그녀는 예전부터 괴텐과 연계된 테러조직의 일원은 아니었을지라도 형법에 저촉받을 만한 짓을 하기는 한 것이다.

결국 괴텐은 그며칠후 수사당국의 도청첩보에 의하여 은신처에서 체포되었다.

 

6.

 

'차이퉁'이 카타리나가 최초 연행되는 상황을 포착함으로 바야흐로 황색저널리즘의 발호(跋扈)는 시작된다.

그 주연은 '차이퉁'의 기자 튀트게스. (며칠후 카타리나 블룸의 총에 맞아 죽게 되는.)

카타리나의 족보를 캐고 이력을 더듬고 주변을 탐색하고 그녀와 관계 맺은 사람들을 흔들어 터는 둥, 이른바 취재라는 것을 하여 그것을 가공하여 기사로 만드는 것이다.

자그마한 단서에다가 울긋불긋 옷을 입히고 덕지덕지 화장을 하여 총천연색 바라이어티쑈를 연출하여 선정적인 제목을 붙여서 대문짝만하게 신문 지면에다 떡칠하기 시작하였다.

<“강도의 정부(情婦) 카타리나 블롬... 1년반 전부터 수배중이던 강도이자 살인자인 루트비히 괴텐... 정부 카타리나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어제 잡힐수 있었다.. 경찰은 오래전부터 블룸이 이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다고 추측한다...”>

<“살인범 약혼녀 여전히 완강! 괴텐의 소재에 대한 언급 회피! 경찰 초비상!”>

블로르나 박사 부부는 카타리나의 절대적 우군(友軍)이었는데. 카타리나의 연행사실을 알지 못하는 시점에 휴가지까지 찾아온 차이퉁의 기자에게 ‘누구라도 범죄를 저지를수 있지요’한 블로르나 박사의 예사로운 한마디 말. 그 말은 이렇게 둔갑되었다.

<‘카타리나는 전적으로 범죄를 저지를수 있는 사람’>이라고.

<‘카타리나는 매우 영리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블로르나 박사의 표현은 <‘카타리나는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인 여자다’>라는 문장으로 둔갑되었다.

카타리나의 혐의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블로리나박사 부부에 대하여 차이퉁은 이런 식으로 폄한다.

정원 풀장에서 찍은 블로르나와 투르데의 사진을 게재(揭載)하고서는 사진 아래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한 때 ’빨갱이 투르테‘로 알려졌던 이 여자와 이따금 좌파로 통했던 그녀의 남편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호화 빌라의 수영장 앞에서 부인 투르데와 함께 포즈를 취한, 고소득의 산업체 변호사 블로르나 박사’>

블로르나 박사의 부인 투르테는 학생때 빨간 머리 때문에 ‘빨간 투르테’라는 별명으로 불린 적이 있었을 뿐인데 그게 빨갱이로 둔갑한 것이다.

카타리나의 고향을 취재하고는 게멜스브로이히의 신부의 말은 이렇게 왜곡되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짓이든 할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의 아버지는 위장한 공산주의자..어머니는 미사용 포도주를 훔쳐 제의실에서 정부와 술판을 벌렸다.”>

남편을 잃고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알콜에 잠시 의존하였을 때가 있었을 뿐인데.

튀트게스는 암수술 후 회복실에서 면회절대금지 절대안정을 요하는 카타리나의 어머니에게 페인트공으로 위장하여 접근한다.

의식은 있으나 의사표현이 불가능한 환자의 귀에다 대고 카타리나 블룸의 각색된 혐의점과 행적들을 속삭이고 카타리나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자신의 이야기를 긍정하는 것으로 치환하여 기사를 썼다.

<“여러분에게 정보를 드리고자 항상 노력하는 우리 신문... 중병을 앓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 탐색.. 오래전 딸은 발길을 끊었다고 불평.. 그녀는 이렇게 한탄하였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죠'“>

카타리나에게 호의적일수 없는 전남편 방직공 브레톨로의 투덜거림은 극적으로 과장되었다.

<“전남편은 눈물을 삼키며 말하였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녀가 왜 내게서 몰래 떠났는지.. 우리의 소박한 행복에 그녀는 만족하지 못하였던거죠. 그녀는 출세를 하고 싶었을 거에요. 어떻게 소박한 노동자가 포르세를 탈수 있겠습니까? 나는 사회주의에 대한 그릇된 생각들은 이렇게 끝날 수 밖에 없다는걸 얘기하고 싶군요... 정직하게 돈을 벌어 어떻게 아파트와 차를... 왜 내가 그녀의 과격성과 교회에 대한 반감을 항상 두려워했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그녀를 좋아하는 나의 복잡하지 않은 애정보다는 살인범이자 강도인 한 남자의 다정한 애무를 그녀가 더 좋아했다는걸 듣는 마당에... 운운”>

카타리나의 또다른 고용주인 교감으로 은퇴한 히페르츠 박사의 <‘카타리나가 과격하다면, 그녀는 과격하리만치 협조적이고 계획적이며 지적입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내가 그녀를 잘못 보았나보군요. 그런데 난 40년간 경험을 쌓은 교육자요. 사람을 잘못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요.“>라는 말은 <”그녀의 과격함이 특별히 예상 밖이라고 하지 않았다. 모든 관계에서 과격한 한 사람이 우리를 깜쪽같이 속였군요“>라고 말했다고 둔갑하였다.

카타리나가 괴텐에게 준 은신처의 열쇠는 대학교수이며 기업가이고 정치가인 유명인사 슈트로입레더라는 중년 사내가 카타리나에게 억지로 맡겨 놓은 자신의 별장 열쇠였다.

그는 카타리나에게 홀딱 반하여서 어떻거든 꼬셔서 어찌어찌 해보려고 그녀의 아파트를 방문하여 사랑을 호소하였고 비싼 반지를 선물하기도 하였으며, 카타리나가 그 별장에서 자신과의 사랑을 이루고자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카타리나는 그런 남자들의 ‘치근거림’이 싫었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른바 이런 류의 신사들에게는 괴텐과 같은 ‘다정함’이 없었던 것이다.)

아파트 주민들이 진술한, 카타리나의 아파트를 자주 방문하였던 신사와 비싼 반지(카타리나는 반지가 그토록 비싼 것인줄 몰랐다)를 준 사람의 정체를 끝내 함구하여 저명인사의 추한 스캔들을 지켜주는 카타리나, 그녀는 의리 또한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소문에 대하여 차이퉁은 복수(複數)의 여러 남자들이 카타리나의 침실을 찾았다는 식으로 그녀의 성적 방종을 암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블룸은 년 전부터 정기적으로 신사들의 방문을 받아왔다. 그녀의 아파트가 모의의 본부였나.. 아니면 도당들의 아지트, 혹은 무기를 거래하는 장소였나?.. 겨우 스물 여섯 살의 가정부가 어림잡아도 11만 마르크가 나가는 아파트를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나? 그녀가 은행에서 강탈한 돈의 분배에 관여했나? 배후관계의 전반적 소식은 내일 주말판에서!.”>

이런 류의 차이퉁의 기사들은 당시 독일 대중의 기분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좌파에 대한 혐오감과 공포감 때문에 무조건적인 ‘무찌르자 오랑캐’의 분위기에서는 말이다.

대중은 환호하였고 더 자극적인 기사로 '차이퉁'은 그들의 환호에 부응하였다.

카타리나 블룸은 독일사회를 붕괴시키는 공산주의 두더지가 되었다.

독일로 잠입한 크레물린의 창녀가 되었다.

사방에서 욕설이 쏟아졌다.

전화통은 불이 났고 욕설의 편지들과 추잡한 섹스용품이 카타리나 블룸에게 배달되었다.

그중에는 그녀의 이웃도 있었고 지식인도 있었다.

수요일날, 변장하여 카타리나 블룸 어머니의 회복실로 몰래 잠입한 퇴트게스.

회복기에 있었던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다음 날 죽었다.

의사표시도 할수 없었던 상황에서 귀에 들리는 딸에 관하여 속살거리는 악마의 소리들은 노파에게는 엄청난 쇼크였을 것이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어머니의 주검을 수습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울지 않았다.

그녀의 성품은 그렇게 꿋꿋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나중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통곡을 터뜨리는 카타리나.

차이퉁의 기사.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행실의 충격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는데 그 딸은 강도이자 살인자인 한 남자와 다정하게 춤추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기이한 일이고, 그녀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극도의 변태에 가깝다. 이 여자는 정말 얼음처럼 차갑고 타산적일까.”>

<“괴텐에게 열쇠를 준 것도 역시 창녀와 같은 그녀가 명망높은 사업가이자 학자의 우정어린 신뢰와 자발적으로 도와주려는 마음을 악용하였다. 그녀가 신사의 방문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별장을 찾아내기 위해 청하지 않은 방문을 하려했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의 심문방법은 너무 부드러운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인간을 인간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7.

 

그러나 국가는 그러한 언론의 폭력으로부터 카타리나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과 권력은 교묘하게 결탁하여 황색여론을 에스컬레이트 시키고 있었다. (언론에 슬쩍슬쩍 정보를 흘리면서.)

연행된 초반에 카타리나는 항의하였다.

<“차이퉁지의 기사들, 국가가 이런 오욕으로부터 보호해 줘야 하지 않느냐. 왜 ‘삶의 세세한 구석까지 파고드는지’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심문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은 알수 있겠다. 허지만 심문때 거론된 세세한 사항들이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납득할수 없다. 게다가 어떻게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된 잔술로 둔갑하였는지...”>

그 항변에 대하여 당국은 말한다.

<“당연히 괴텐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대한 터라 언론보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직 기자회견은 없었지만 카타리나의 도움 때문에 가능했던 괴텐의 도주로 인해 이제 불가피하게도 두려움과 격분을 감출수 없게 되지 않았느냐. 게다가 이제 그녀는 괴텐과의 친분관계 때문에 시대사적 인물이 되었으며 이로써 당연히 관심을 가질 권리가 있는 여론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모욕적이고 어쩌면 중상일수 있는 언론보도의 세부 사항들에 대하여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소송을 제기할수도 있으며 수사 당국 내부에 ’허술한 부분‘이 있다고 밝혀지는 경우에는 그에 대해 소송을 걸고 그녀의 권리를 위해 도울 것...운운”>

<“논쟁의 여지가 분명한 형태의 저널리즘을 형사적으로 추적하는 일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이 아니다. 언론의 자유를 경솔하게 침해해서도 안되며, 개인의 소송도 정당하게 취급되고 불법적인 정보의 원천에 대해서는 신원 미상의 인물에 대한 소송이 진행될수....운운” >

<“질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그런 무리에 끼지도 않는 자는 언론에도 그를 거칠게 묘사할 빌미를 주지 않는 법이노라..운운”>

 

8.

 

카타리나 블룸은 일요일 정오경 인터뷰를 미끼로 퇴트게스를 자신의 아파트로 오게 한다.

그리고 권총을 발사하여 그를 살해하였다.

카타리나가 언제부터 퇴트게스를 살해하기로 결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초반, 그가 쓴 기사로부터 였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그녀의 분노를 상상할수 있을것 같다.

과거를 조작하여 현재를 규정짓고 미래를 절망케 하는, 언론의 무지막지한 짓거리.

누구보다 올곧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견딜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카타리나와 대면한 퇴트게스의 진정한 사과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권총을 발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는데, 퇴트게스는 끝까지 저속한 언사로 그녀를 모욕하였다.

그를 살해하고 나서 카타리나는 저녁때까지 시내를 배회하며 후회의 감정이나 죄책감을 느껴 보려고 하였으나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조금도 후회되는 바를 찾지 못하였다.

그녀는 형사를 찾아가 자수하고 체포되었다

카타리나의 변호를 맡은 블로르나는 골치가 아팠다.

공판에서 카타리나가 결코 살해할 의도는 없었고 그저 위협만 하려 했다고 진술하게 해야 하는데 그녀는 이미 목요일에 첫 번째 기사를 읽고 나서 그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카타리나가 전혀 후회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법정에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 그로서는 큰 걱정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왠지 모르게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나의 사랑하는 루트비히와 같은 조건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루드비히 괴텐 역시 당초의 혐의와 같이 거창한 테러리스트 따위가 아니었다.

그도 역시 과장된 사회적 공포가 만들어 놓은 과대포장된 범죄자였던 것이다.

살인 혐의는 주장될 수도 없고 제기되지도 않았다.

그는 군부대를 탈영했을 뿐이고, 은행강도가 아니라 두 개 연대의 군인 급여와 적립금이 들어있는 금고를 약탈한 것과 그 밖에 장부위조, 무기절도가 확인되었을 뿐이다.

두 연인의 형량은 8년에서 10년 정도 예상되었다.

 

9.

 

언론들은 기자 살해사건에 대하여 상당히 유별난 태도를 취했다.

광적인 흥분!

대서특필의 1면 기사.

호외발행.

통례를 벗어난 크기의 부고.

어차피 피살사건이란 늘상 일어나는 것인데도, 마치 저널리스트 살인사건은 뭔가 특별한 것인양, 은행장이나 은행원 혹은 은행강도 살인사건보다 더 중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퇴트게스의 장례는 경악스럽고 거의 장엄하기까지 한 의식으로 치루어졌다.

자기직업의 희생자, 민주주의의 수호는 언론의 자유가 기본 운운의 비장한 헌사가 이어졌다.

 

이야기는 끝났다.

하인리히 뵐의 분노와 더불어 나의 생각이 남았다.

언론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소구(訴求)하는바 타겟이 무엇인가 하는데 있을 것이다.

대중의 정서(情緖)인가 감정(感情)인가, 아니면 이성(理性)인가.

정서라면 예술지(藝術紙), 감정이라면 연예지(演藝紙), 이성이라면 시사지(時事紙)가 담당한다고 하면 간단할 터이지만 그렇지 못하니 탈이다.

대중을 계몽(啓蒙)하거나 혹은 계도(啓導)코자 하는 언론의 기능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대는 요즘의 언론에게서 지식을 습득하고 사상을 전수받는다고 생각하는가.

근대의 독립신문이나 한성일보나 작금 북한의 로동신문이 구사하는 계도적 프로파간다 따위에 뉘라 솔깃하겠는가.

통일적 집단적 지식의 전달은 다양하고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제 몫을 하지 못할듯 싶다.

작금의 언론은 대중에 아부하여, 소구(訴求)하는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시사지에 있어서도 보수건 진보건 자기 편의 이성에게만 소구하였다가는 지가는 떨어지고 말 것이다.

감정에 편승하지 않으면 말이다.

정치무대도 쑈우(show)가 없으면 먹히지 않는 세상 아닌가 말이다.

'카타리나 블룸’을 다룬 시사지 '차이퉁'이 대중에게 소구하는 바에는 이성 한톨 있지 아니 하였다.

오로지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대중의 정서와 감정을 자극하여 장안의 지가를 올리려는 의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른바 ‘찌라시’이기는 한데, 이를테면 왼편쪽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 ‘조중동’적 찌라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차이퉁’에서 배후에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음을 나는 느끼지 못하였다.

전형적인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의 모습 뿐이었다.

 

-계속-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後

 

11.

 

언론의 편향성(偏向性)등 언론의 부정적 속성(屬性)에 관하여 생각을 정리하여 쓰려 하였는데, 아무래도 모자란 내 생각들은 조족지혈(鳥足之血)인지라 힘에 부친다.

그래서 더욱 적실(的實)한 다른 이들의 생각들을 빌려와 땜빵하려 한다.

 

12.

 

아래 글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일하였고 ‘노사모’의 주요 멤버이기도 하였던 시인 노혜경씨가 이른바 ‘조중동’에 대하여 불편한 심기로서 토로한 글이다. (인상적으로 읽어서 보관하였었다) 

***

(전략)

언론은 왜 있어야 할까에 대한 본질적 의문이 듭니다. 

뉴스는 재미있기는 해요 . 그런데, 그 뉴스가 막상 발생한 현장에 가서 보거나 직접 겪거나 했을 땐 전혀 다른 이야기일 때가 많고, 게다가 그런 일이 점점 늘어가는 이유가 뭘까요?

제가 좀 참기 어려운 건 뜻밖에도 뉴스의 정치적 편향성이라기보다는 문법적 오류들이에요.

우선 이런 것. 팩트와 해석은 매우 다른 것입니다만, 요즘 뉴스는 팩트와 해석을 섞어버립니다.

삼돌이가 죽었다와 삼돌이가 죽은 것은 잘 된 일이다는 다른 이야기 아닙니까. 앞의 말은 사실이고 뒤의 말은 삼돌이가 죽은 데 대한 말하는 사람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삼돌이가 죽은 것은 잘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는 말하는 사람의 반응을 문법적으로 주체를 삭제하고 삼돌이가 죽은 것은 잘된 일이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슬쩍 사실보도처럼 말해버리는 언어적 기만을 통해 기자는 자기의 주관적 반응을 독자의 객관적 인지행위 속에 섞어넣어버립니다.

그럼으로써 왜 삼돌이가 죽은 것이 잘된 일인가 라는 당연한 질문이 나오는 것을 피하고 증거 제시를 생략하지요.

이런 전술을 통해 정치적 이득을 보는 것입니다. 삼돌이가 죽은 것이 잘된 일이 되려면 삼돌이는 당연히 무언가 악당이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기자가 주관적으로 삼돌이의 죽음이 잘된 일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을 독자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삼돌이가 어떠한 일을 했기에 그 죽음이 잘된 것이라고 판단하는지의 근거가 제시되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법적으로 판단의 주체가 ‘일인칭일 경우’생략할 수 있다는 이점을 활용하면, 독자로 하여금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라고 인지하게 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이건 교활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판단의 언어가 사실의 언어로 바뀌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컨대, 대통령은 말이 많다 란 말을 보십시다.

말이 많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표현이 아닙니다.말이 많다는 데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거든요. 듣는 사람의 주관적 판단이 있을 뿐입니다. 

엄마가 하루에 딱 세 마디 아버지에게 말을 해도 권위적 아버지는 ‘어허, 여자가 말이 많아’라고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저 문장은 정확하게 말하려면 ‘대통령은 말이 많다고 나(조선일보, 기득권들 등등)는 생각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를 생략할 수 있는 문법의 이점을 활용하면 어떻게 되나요?

저 문장을 읽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나는 생각한다’가 생략되었다는 것을 알고 심층구조 속에서 그 문장을 복원합니다.

그런 다음, ‘나’라는 단어의 동일성에 의하여 ‘나(조선일보)’의 생각을 ‘나(읽는이)’의 생각이라고 저도 모르게 인지하게 되는 매커니즘이죠.

종이신문을 읽는 독자 가운데 그 신문의 논조에 물이 드는 사람이 많은 건 그때문입니다.

방송의 경우 인간의 욕성이 전달하기 때문에 저 말을 하는 저 사람의 생각이라는 느낌이 그래도 조금은 함께 오거든요.

문법이 ‘나는 생각한다’를 생략할 수 있도록 만든 건, 모든 모국어 사용자가 저 문장이 생략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언어경제의 원리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언론은 그런 원리를 정치적으로 딱지 붙이는 데 많이 이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건, 판단을 내리는 주체가 그동안 언제나 언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언론의 판단에 대하여 독자가 무의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21세기 들어 일어난 대한민국 네티즌 혁명의 가장 큰 이슈가 대안언론운동이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나의 언어로 생각하기’였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언론은 팩트만 전하라, 판단은 내가 하겠다’. 인터넷 게시판 상에서 유난히 팩트라는 말이 많이 등장했던 숨은 까닭이겠죠^^?

두 번째로 강조의 오류가 많습니다.

강조의 오류라 함은, 특정 단어나 문장을 원래의 문맥에서 들어내어 강조함으로써 발설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따옴표 저널리즘이라고 하죠. 일상에서는 말꼬리잡기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번에 대통령께서 '이종석 장관의 말에 대해 대한민국의 장관이 미국이 잘못했다고 말하면 안되느냐'라고 하셨다고 언론이 와글거리는 일이나, 바로 그 이종석 장관의 발언 자체가 문제시된 상황도 똑같습니다.

그 발언이 전달하고 싶었던 본질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문장만 맥락에서 떼어내고는 인용자의 해석과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변질시키거든요.

예컨대 이종석 장관의 경우, 인터뷰한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북한 미사일 정책에서 한국이 실패한 것이 아닌가?’이장관이 답했습니다. ‘실패라고 본다면 미국이 가장 실패했고 한국이 그 다음 실패했다’.

물론 이때 저 질문의 이중질문을 통한 유도심문적 의도를 이장관이 간파하고 북한 미사일 정책에서 ‘한국이 실패했다고 질문자가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되물었거나, 또는 질문 뒤에 숨은 '한국'의 실패라는 방점을 무시하고 그냥 우리나라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다라고만 답했더라도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 답은 이중질문을 한 질문자가 유도한 데 걸려든 것입니다.

그랬으나, 언론은 그런 맥락과 본질을 무시하고 ‘미국이 실패했다’는 발언만 들어냅니다.

그 다음엔 기자가 지니고 있는 편견과 가치관으로 윤색해서 보도하지요.

그러면 이런 일들이 참여정부 들어 유난히 잦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국의 보수 언론은 원래 그렇게 해 왔습니다. 

언론에 단 한 번이라도 자기 말이 인용되어 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참여정부 들어 대통령과 정부여당의 인사들에 대한 그런 식의 공격이 늘어난 것일 뿐이지요.

우리가 언론개혁을 이야기할 때 보통 정치적 편향성을 가지고 말해왔습니다만, 저는 언론이 우리말의 문법에 대하여 저지르는 이런 폭력이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지속되면서 국민들의 사유의 능력에 손상이 가거든요,. 지속적으로 환경호르몬에 노출되면서 생식기능이 퇴화되는 것처럼요.

노무현 대통령은 언론의 그런 비본질적 태도와 단 한 번도 타협을 못한 사람입니다. 하고 싶어도 잘 안 되지요. 

이번 국무회의 발언록을 읽어들 보십시오,

거기에 모든 대답이 있습니다.

***

노희경씨의 글. 

조중동 뿐이랴, 생각건대 이 부분에서는 한겨레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13.

 

다음 글은 전에 어디선가(신문이었던가) 긁어다 보관하였던 글이다. 

*** 

9.11 테러를 미국 정부의 조작극이라고 믿는 미국인이 적지 않다. 

심지어 홀로코스트(나치스의 유태인 대학살)조차 날조 또는 과장됐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을 근거가 없다고 거부하는 불합리한 행태를 부인주의(denialism)라고 한다.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는 수단인 부인주의는 특히 과학 분야에서 기승을 부린다.

지구 온난화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으며 인간에 의해 야기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화론은 기독교를 약화시키려는 무신론자들이 꾸며낸 엉터리 학설이라고 공격한다.

흡연이 폐암과 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에 오류가 많다고 반박한다. 

부인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 종교적 신념 또는 개인적 이해관계 때문에 과학적 진실을 외면한다.

부인주의 연구 권위자인 영국의 마틴 맥키에 따르면 부인주의자는 여섯 가지 수법을 구사한다. 

2009년 '유럽공중보건저널(European Journal of Public Health)' 1월호에 실린 논문에 수법 여섯개가 소개되어 있다.

 

1. 음모론을 동원한다. 과학적 합의가 증거보다는 공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2.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이비 전문가를 끌어들인다.

3. 증거를 입맛에 맞게 채택한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증거가 아니면 깡그리 쓰레기 취급을 한다.

4. 상대방이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의 증거를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새로운 증거를 내놓지 못할 때까지 상대방을 몰아세워 굴복시키려는 속셈이다.

5. 과학적 사실을 엉뚱한 논리로 공격하여 상대방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6. 과학자를 믿지 못할 존재로 부각시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분위기를 조장한다.

부인주의자는 대부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확증편향은 자신이 가진 믿음을 확증하는 정보만을 찾아서 받아들이려는 성향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인주의를 앞장서서 부추기는 사람은 편집증이나 과대망상 따위의 성격 장애를 갖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이들은 일반 대중을 기만하는 음모를 획책하는 권력집단에 맞서 싸우는 순교자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따라서 부인주의자들은 연대의식을 갖고 사회적 쟁점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미국 예일 법대 댄 캐한은 '네이처' 1월에 발표한 논문에서 지구 온난화를 부인하는 사람은 낙태나 동성결혼 같은 쟁점에 대해서도 공동보조를 취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부인주의자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기 쉽다. 

미국의 창조론자들은 진화론과 지구 온난화 이론을 싸잡아서 국가 통제를 강화하려는 좌파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한다. 

결국 과학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셈이다.

2009년 미국 저술가 마이클 스펙터가 펴낸 '부인주의'는 인간의 불합리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고 지구 환경을 훼손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지 생생히 고발한다. 

***  

부인주의는 한국사회에도 독버섯처럼 퍼져 있다. 

이념이나 지역감정의 덫에 걸려 반대편의 주장이라면 무조건 거부하는 지식인이 어디 한둘인가.

 

14.

 

다음은 김훈의 글들이다. <2002년 출판된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에서 베껴 쓴 글들.> 

언론인이었다가 지금 작가인 김훈의 글은 실로 내 생각 따위 모든걸 포괄한다. 

그는 내게 하나의 감탄이다. 

***

[국민정서를 빙자하여 서로간 싸우는 통일론에 대하여.]

<이 싸움이 치열해질수록 공허하고 민주주의는 무내용해 보인다. 

이 싸움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불가능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은 민주주의라는 링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다. 

그래서 이 싸움의 심판은 당연히 ‘국민정서’또는 ‘여론’이라는 이름의 허깨비이다.

나는 이런 경우의 ‘국민정서’라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나는 일제시대에 태어 났더라면 조국독립을 원하기는 하지만 반일투쟁은 무서워서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친일을 할만한 지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그저 그날그날 꾸역꾸역 벌어먹고 살았을 것이다.(이런 인간상은 채만식의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비유가 좀 동떨어진 것 같지만 통일에 대한 ‘나의 정서’는 대체로 이와 유사한 것이다. 

나는 나의 이런 미적지근한 통일정서를 후안무치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국민정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비논리적인 것이라야 마땅하다. 

내가 보기에는 내 주변의 나처럼 못난 좀팽이들은 안보도 원하고 통일도 원하고 주권수호도 원하고 군대가 군대답기를 원하고 평화도 원한다. 좋다는 것을 다 원하는 것이다.>

***

[정치적인 말들의 성찬에 대하여]

<말들은 의미소(意味素)를 모두 상실한채 다만 무기들이 부딪치는 음향으로 쾅쾅거렸다.>

<욕망을 정의라고 말하는 그 말들은 허망할수록 격렬하고 격렬할수록 무내용하고, 무내용할수록 진지하고 진지할수록 기만적이다.> 

***

[소제목 ‘개발자욱으로 남은 마을’중에서]

<화염병을 비난하는 언설이 보수이며 최루탄을 비난하는 언설이 진보의 깃발로 나부끼는 이 언어의 무간지옥에서 나는 몸 둘 곳 없었다.>

<다들 제 이름만을 외치며 부르짖는다. 그래서 세상은 고막이 터질 듯이 시끄럽고,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여기는 적막강산이다.>

<지금 정의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 가는 이 합리주의의 정글 속에서 정의로운 언어는 쓰레기처럼 넘쳐 난다.>

<‘고통분담’이라는 허울 좋은 표상, 이러한 위기극복 정책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논리가 개별적 인간의 삶의 구체성 위에 바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 해 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 믿는다. 도덕은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수 있을 뿐이다.>

<空家에 살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떠났나.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분담되었나. 도대체 누가 그들의 고통을 짊어졌단 말인가. 경제발전의 학설과 위기극복의 정책들은 단 한번이라도 그들을 개별적 존재로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더 이상 가짜 희망을 말하지 말라. 민주주의와 위기극복의 이름올 인간의 구체성을 추상화하지 말라. 추상화된 언어의 합리성은 뻔뻔스럽다. 그 추상성이 권력의 힘이고, 그 뻔뻔스러움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확립해 나가고 있다.>

***

[소제목 ‘사실과 의견’중에서] 

<클린턴의 정액 몇방울의 확인. 그것이 바로 사실의 힘이다.>

<사실은 아무리 치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이미 정의를 내포하고 있으며, 여론이 사실을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여론을 이끌어갈 때 민주주의는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클린턴의 정액은 입증해 주었다.>

<국세청 언론사 세무조사에 있어서 ‘구속불가피론’과 ‘구속불가론’..중략.. 사실의 기초가 없는 이 적대하는 여론군은 신기루처럼 보인다. 적대하는 진영들은 이 신기루 속으로 또다시 ‘여론’을 끌어들이고 있다..중략..다들 격렬한 언설을 한바탕씩 토해낸 다음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후렴으로 달고 있다. 이 말은 내 편이 더 많다는 전략적 선전에 불과하다. 이 때의 국민은 허수아비와 똑같다. 사실의 기초가 없이 ‘국민’이 무엇을 판단할수 있으며, 이 사실관계를 국민이 판단해야 한다면 검찰은 왜 있고 국회는 왜 있으며 언론은 왜 있는가.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라는 협박은 민주주의의 탈을 쓴 파시즘에 불과하다. 이 파시즘은 사실을 사실로서 정립시키지 않고 사실을 대중의 정서 속에 은폐시킴으로써 권력에 접근하려는 기만술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기만술은 대중을 끊임없이 무지몽매 속세 처박아 놓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사실’이 먼저 있은 후에 ‘의견’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여론을 이끌어 가는 세상이 민주주의다. 여론이 사실을 뭉개버리는 세상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언론자유가 극도로 억압받고 있던 군사정권 시절에 언론사는 급속도로 권력화되어 갔고 특권화되어 갔다. 그 권력은 ‘자유,를 내어준 대가로 정치권력으로부터 분양받은 반대급부였다. 지금, 자본금을 잠식 당한 수많은 언론사들은 천문학적 액수의 은행빚을 걸머지고 있다..중략.... 이것은 권력형대출의 표본이다...중략.. 권력의 크기를 수치로 계량화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언론사들의 그 막대한 은행빚의 총액은 한국 언론의 권력지수이며, 부패지수이며 비리의 지수인 것이다.>

<정권대 신문, 신문대 신문, 신문 대 방송의 싸움은 본질적으로 권력투쟁이다..이 싸움은 가히 백병전을 방불케 한다.>

<권력화된 언론과 그 권력에 불안해 하는 정권.>

***

 

15.

 

다음 김훈의 글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얻은 생각중 ‘언론의 자유’의 본질과 그 가혹하리만치 엄정한 비극성을 얼마나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사실과 의견, 존재와 가치의 분리.

아아, 인간성에게서 이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니까 본질적으로 김훈의 얘기는 그리하여 우리는 절망하자는 것인가. 

****

[소제목 ‘언론의 부자유가 언론의 자유다’중에서.] 

<언론자유의 근본은 언론의 부자유이다. 

이 부자유는 가혹한 자기검열에서 온다. 자기검열이 없는 언론은 유언(流言)이다. 

언론은 당대의 사실을 당대에 말해야 한다. 당대의 사실을 당대에 말하지 않고, 한 몇 년 묵혀 두엇다가 비화(秘話)라고 해서 팔아먹는 것은 언론이 아니다. 

언론은 풍문과 싸워야 하고 비화없는 세상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

언론의 자기검열은, 이념이나 지향성에 의한 통제행위가 아니라, 우선은 사실과 의견을, 존재와 가치를 구별하는 통제행위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의 불가능 쪽에 가까운 일이다. 

‘사실’이 갖고 있는 층위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사실’은 그것은 관찰하고 전달하는 자의 주관 속에서 재편성되고 재해석되며, 의미를 부여받거나 의미를 박탈 당한다. 

‘사실’이 객관적이고 ‘의견’이 주관적이기에 앞서서, ‘사실’을 만지고 거기에 다가가는 인간의 시선이 이미 주관적이다. 

단순한 교통사고나 화재사건, 살인사건조차도 그 전후 맥락과 의미 내용을 완전무결하게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는 없다. 

나는 ‘사실’앞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의견’앞에서 식은땀을 흘린다. 

사실과 의견은 적대적이다. 의견은 사실을 비틀고, 사실은 의견의 틀 안에 갇히지 않는다. 

인간의 현실은 인간의 가치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자유는, 분리되지 않는 의견과 사실을 기어코 분리시켜 놓으려는 가혹한 부자유의 소산인 것이다. 

언론은 가치나 의견을 일체 떠난 세계의 알몸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너는 개자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결국 부자유다. 이 부자유를 스스로 수용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다. 

정치권력의 언어는 추상화되어 있고 이념화되어 있다. 권력의 속성은 언어를 추상화함으로써 삶의 구체성을 배반한다. 

정치언어의 뻔뻔스러움은 이 추상성 속에 서식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는 이 추상화된 권력의 언어와 맞서는 사실적 언어를 확보하는데 있다. 

언론의 자유는 사실로서 가치를 지향하는 과정일 뿐이다.>

**** 

<실체하는 사실과 더불어 언어라는 추상성으로 존재하는 언론상의 사실이라는 것.

언어에 의하여서만 사실(팩트)은 전달가치를 획득할 뿐이다.

그러하므로 언론의 언어는 소설이 아니어야 한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가 소설이 아니듯.

그러나 언어는 불완전하다. 우리의 언어는 더욱.

그러므로 그 언론의 불완전성과 언론의 권력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속화 된다.

언어.

김훈이 사랑하지만 허술한 우리말의 비극성.

계속 김훈을 들어보라. 

 

16.

 

다음은 어느 해인가 김훈의 강연 내용중에서 발췌한 글이다. 

***

<다시 글쓰기의 문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선악미추의 잣대로 들여다보고 글을 쓴다면, 현실과 과거 역사를 보는 우리의 안목과 우리의 포용력이 현실의 구체성을 배반하는 결과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명석하고 매우 뚜렷한 글을 쓸 수 있지만, 삶의 구체성을 배반한 것이죠.>

<당파적 진실이 글의 진실을 담보해내지 못합니다. 구체성이란 무엇인가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그 언어적 장치로 6하 원칙을 말하죠. 하지만 6하를 모두 꿰어 맞추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6하중에서 보통은 4개나 5개를 쓰죠. 사건 현장에 가면, ‘누가’를 모르는데, ‘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언제’는 범인을 잡아봐야 아는 것이고. 요행히 다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건의 진실을 말하는 것과는 아닙니다.>

<내가 대안은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불신을 갖고 있죠. 6하가 진실을 전하는 충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난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다양한 맛에 대응하는 인간의 언어가 없다는 것에 대해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프랑스어 교수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프랑스인들은 포도주의 맛을 표현하는 독특한 언어가 있었어요. “구조가 튼튼하다, 미끈거린다, 뒤뚱거려서 불안하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없는 어휘죠. 포도주를 마실 때도 어휘의 무력감을 느끼는데, 그러면 술맛 다 떨어집니다. 하물며, 이 시대의 복잡하게 얽힌 전체를 들여다보면 무력감을 느끼죠. 새로운 언어적 장치가 개발되지 않는 한, 우리의 글쓰기는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기 어렵습니다. 6하원칙에 매달려서는 이미지를 앞세우는 새로운 매체를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집에서 조선일보·국민일보를 보는데, 6하원칙을 보강하는 새로운 시도가 있을까, 그걸 넘어서는 새로운 장치의 실험, 그 결과가 있을까 하는 기대를 있는데, 아직 그런것들을 볼 수 없더군요.>

<한국어를 쓴다는 것은 조사를 쓴다는 것입니다. 한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조사를 읽는다는 것이죠. 한국어는 조사에 의지합니다. 조사를 읽지 않고는 문장을 이해할 수 없어요. 형법에 보면, “타인(他人)을 기만(欺瞞)하여 재물(財物)을 편취(便取)하는 자를 사기(詐欺)라 한다”란 표현이 있는데, 한국어는 조사 뿐입니다. 남을 속여서 돈을 뺏어먹는 자를 사기라 한다고 하면, 의미 규정력이 떨어집니다. 조사 얘기를 더 하겠습니다. 흔히 “재벌 총수 아무개씨가 몇 월 몇 일 어디에서 자살했다”고 씁니다. 이때 “아무개씨는”이라고는 쓰지 않습니다. 정책을 발표할 때는 “재벌총수 아무개씨는 ...”이라고 씁니다. “는”과 “가”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국문법 책들을 뒤져봤는데, 설명이 없었습니다. 신문은 주격조사를 뒤죽박죽해서 씁니다.>

<황지우 시인은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라고 했습니다. 시적이죠. 나라면 “새들이 세상을 뜨는구나”라고 했을 것입니다. “새들도”에는 인간의 감성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새들이”라고 하면 훨씬 잔혹한 문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새들은”은 “새들이”보다도 더 비정하고 냉혹하죠. “새들은”에서는 인간이 빠진 것입니다. “새들이”에는 그걸 바라보는 인간이 관여된 것이죠. 인간은 한 관찰자로 옆에 있습니다. “새들은”에서는 인간이 실종됐죠. “새들도”에는 의견과 사실이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새들이”에는 의견이 빠집니다.>

<의견과 사실을 구별한다는 것은 조사를 골라쓰는 것이죠. 그걸 골라서 쓰는 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칼의 노래의 첫문장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고 썼죠. 그런데 읽어보니 뽕짝냄새가 나는 거예요. 며칠 고생해서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는 걸로 바꿨습니다. 한 글자 바꾼거죠. “내가 너를 불러도 대답은 없다”와 “내가 너를 불러도 대답이 없다”는 다릅니다. 언어라는 것은 포도주를 마실때도 괴롭듯이 매일 무력감 속에서 해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신문에서 “정부는”을 주어로 하는 기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마 “정부는”이라고 쓰는 기사에는 별로 독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기사는 전망과 목표를 먼저 얘기하고 사실은 두 번째 문단이나 나중에 나옵니다. 내 생각에는 정책목표는 맨나중에 나오는 것이 맞을 터인데 말이죠. 그래서 정부가 나오면 기사가 재미 없습니다.>

<게다가 때때로 의견과 사실이 한 문장안에 뒤죽박죽입니다. 논리적으로 명백하지 못하고, 가독률이 떨어지고, 글의 신빙성이 낮아집니다.>

<당파성에 매몰된 시각이나 언어를 가지고는 복잡한 현상을 기술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언어가 시대 소통을 단절시킵니다.>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서 말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6하를 넘어서고 보강하는 새로운 글쓰기의 틀을 도입해야만 이미지를 앞세우는 미디어에 더 이상 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조사와 같은 글쓰기의 문제에서도 의견과 사실이 착잡하게 뒤범벅되어 우리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나는 결론이 없는 것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는 일호정연(一毫整然)한 말을 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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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다음은 강연이 끝난 후 청중과의 대담중에서 발췌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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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적이 아니냐는 비난에 대한 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이념적 당파성의 편은 아닙니다.난 인간은 개별적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죠. 어떤 작가는 인간은 집단적이고 계급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어요. 아마 황석영, 조정래 등 내가 존경하는 분들은 그런 듯 합니다.>

<난 임진왜란을 쓰더라도 이순신을 씁니다. 편협하죠. 인간은 계급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라는 전제가 인류 보편에 적용될 수 있는 진실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개별적 존재라는 전제를 충족하지 않는 한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 문체는 처음에는 긴문장을 썼어요. 한 문장이 원고지 6,7매에 해당했습니다. 한 센텐스가 완벽한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칼의 노래에는 짧은 중중모리를 썼습니다. 나중엔 힘이 빠져서 중모리밖에 안됐죠. 진양조로는 어림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휘모리나 자진모리로 나가자는 전략을 썼어요.><난 한문이 가지는 언어적 긴장을 매우 좋아합니다. 모국어의 문화적 능력을 별로 신뢰하지 않아요. 나는 내가 내 모국어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 모국어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빈약하고 형성과정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한자의 긴장감을 좋아합니다. “최근접 거리”란 말이 갖는 긴장감은 “가장 가까운 거리”라는 말과는 다릅니다. 나의 편견은 올바른 것이 아니길 바라는데, 나는 그렇게 씁니다. “칼이 들어가 적을 살(殺)하였다”라고 쓰지 “칼이 들어가 적을 죽였다”고 쓰지 않습니다. “죽였다”고 말할 때는 연민이라든지 죽임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지저분한 인간의 정서가 느껴집니다. 조선시대 병법은 다 “살(殺)”이라고 나옵니다. 살(殺)하는 것은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동작을 의미하는 기술용어입니다. 이걸 비난하더라도 그걸 쓸 수 밖에 없는 내적 필연성을 가지는 것이죠.> 

<철학을 우리 모국어의 언어적 질서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국어는 서정시를 쓰기 좋은 것입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처럼. 그 외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글자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생각이었으면 좋겠는데, 틀린말이 아닐 것입니다.>

<언론이 사실과 객관에 입각한 정통적인 저널리즘이기를 포기하고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하는가, 라는 두려움이 나에게 있습니다. 무서운 질문이죠. 나는 거기에 직면해 있는 거예요.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는 문제가 이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죠.>

<나는 우리시대의 언론은 하나의 세력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의 순결성을 위해서는 매우 비극적인 사태가 아닌가 싶은데, 의견을 말함으로써, 세력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 의견은 반드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야 합니다.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지 않고 말하는 의견은 욕망이죠. 사회적 의견이 되려면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야 합니다. 모든 욕망이 동등하고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사회죠. 나의 욕망과 너의 욕망이 연대되어 다수의 욕망을 형성하고, 다수의 욕망은 이념적 명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의 탈을 쓰게 되고, 그것은 정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의들끼리 연합해 세력을 이루는 것인데, 욕망에 바탕하기에 허구이고, 시대의 앞날을 말하기에 위태로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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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책부족의 눈총을 예상하고 고백건대 나는 몇십년째 조선일보를 보고 있다. (문화면과 편집이 좋아서라고 하지만)

그렇지만 행간에서 컨텍스트를 읽어낼 능력은 있다고 자부하므로 스스로 수구꼴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을 전달하는 자.

그 마음 언제나 명경지수겠는가.

그의 언어 일호의 어긋남없이 정확하겠는가.

글을 다루는 자세 천칭(天秤)과 같이 공평하겠는가.

그의 책무감 언제나 염라대왕마냥 엄정하겠는가.

그렇지만 도가 지나친 경우, 종종 정의와 인권과 도리를 압살한다.

언론을 모두 국민 성금으로 사들이고 경영자와 편집자는 임기제로 국민이 뽑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때 없지 아니하다.

김훈.

문학적 레토릭이 난만한 가운데에도 그의 언어는 정곡을 벗어나지 않는다.

거듭, 그는 내게 하나의 감탄이다.

 

‘하인리히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그 독서경험은 두루 유익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