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시계태엽 오렌지>
-앤서니 버지스 作-
***동우***
2011년4월 4일
시계태엽 오렌지 (A Clockwork Orange)]
저자 : 앤서니 버지스(Anthony Burgess, 1917~1993)
출간년도 : 1962년
영화 : 시계태엽 오렌지
제작년도 : 1971년
감독 : 스탠리 큐브릭
출연 : 말콤 맥도웰, 패트릭 매기, 마이클 베이츠, 워렌 클라크
책부족 이번 달 텍스트 ‘시계태엽 오렌지’
소설을 읽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손색없는 巨匠)의 영화를 웹 하드에서 다운받아 다시 보았다.
발표당시 소설은 걸작으로, 개봉당시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대표작으로 회자되었다는데.
으흠 나로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테제는 명확하게 느꼈지만, 그에 따른 내 사유의 컨텐츠는 빈약하여 내비추기 부끄럽고나.
‘시계태엽 오렌지’를 읽으면서 켄 케이시의 소설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간 새’가 금세 떠올랐다.
‘뻐꾸기..’도 ‘시계..’와 같은 1962년도 출간된 책이다.
‘밀러스 포먼’감독의 동명(同名)의 영화를 보고나서 읽었던 삼중당 문고판. (아직 내게 있어 다시 후르륵 훑어 보았다)
‘뻐꾸기..’는 영화와 소설 둘 다 당시 20대인 내게 깊은 울림을 준 작품들이었다.
천방지축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맥머피’는 ‘잭 니컬슨’이 연기한 영상으로 아직도 기억에 삼삼하다.
그를 정신병동의 질서 속에 우겨넣기 위하여 전두엽을 제거하는, 이른바 로보토미수술을 시술하여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리는 절대권력 간호부장 (영화에서는 ‘루이스 플래처’粉).
저항은커녕 생각하는 능력 마저 잃어버린 맥 머피, 그로부터 자유의지라는 걸 깨닫게 되었던 인디언 거한(巨漢)은 배게로 맥머피의 얼굴을 눌러 질식사 시키고서는 정신병원을 탈출하여 노을을 향하여 달린다.
자유로운 영혼이 억압하는 것들을 향하여 내지르는 저항의 거친 숨소리.
감동이 없을수 없었다.
그 무렵 덜 여문 내 정신에게 엄습한 모종의 위기의식이라도 있었던겔까.
기성(旣成)적 형식에 점점 길들여져 순치(馴致)되어 간다는 불안한 어떤 느낌이라도.
나를 옥죄고 있었던 게 무언가 두리번거리는 척 해보았지만 그냥 거기까지였을 뿐이었다.
‘시계태엽 오렌지’
주인공 1인칭의 서술로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3부로 나뉘어진 지극히 단순한 구조.
드라마적 복선(伏線) 따위는 애시당초 없는 소설인지라 단선적(單線的)으로 술술 읽혀 나갔다.
영국의 60년대식 슬랭과 지독한 욕설이 난무(亂舞)한다던데(해설에서) 번역이 점잖았던지 우리말 쌍소리는 그닥 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때로 생경한 의미의 언어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였지만, 그냥 뭉개고 읽어 나가다 보면 문맥에 방해가 될 것도 바이 없었고.
서사구조는 단순하다.
교화(敎化)될수 없는 인간, 절대악으로 묘사된 주인공 알렉스.
권력은 그를 마치 파블로프의 '침흘리는 개'로 만들어 버린다.
폭력과 섹스등 악행의 욕구가 엄습하면 조건반사적으로 극심한 신체적 고통이 유발되도록.
악(惡)이 선(善)으로 교화된 성공적인 성공사례로 석방된 알렉스.
그러나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투신한다.
그 충격으로 옛 악성이 회복되는 알렉스.
그러나 이제 그는 악이 아닌 평범한 삶을 희구한다.
소설의 외피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권력의지의 부당함’이라는 명제. 그 구도로 읽으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알렉스로부터 제기되는 명제들.
인간의 순수한 ‘자유의지’란 정말 존재할수 있는겐가.
그렇다면 자유의지에 의하여 미래가 결정되는 것인가.
어쩌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건 하나의 착각은 아닐까.
신학의 예정론, 물리학의 결정론, 모종(某種)의 법칙에 의한 것은 아닐까.
알렉스는 소설의 새로운 대목이 시작될 때마다 모두(冒頭)에서 중얼거린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
자, 이제 어떻게 될까.
이 대사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의미심장한 함의(含意)가 있는 세리프라는걸 나는 어렴풋 깨달았다.
작가가 순수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절대적 가치를 주창(主唱)하고자 하였다면 이런 대사는 쓰지 않았을 것이다.
쉽지 않은 소설이었다.
내리 두 번을 읽었다.
다소라도 작가의 속내에 닿았을까마는 재독 후에 고개를 주억거리기는 하였다.
아무튼 이 소설에서 ‘뻐꾸기 둥지 위를 날아간 새’를 떠 올렸던건 나의 오류였다.
소설의 형식은 은유적이고 풍자적이었다.
‘어느 악소배(惡少輩)의 행적과 회개’라는 제목의 풍자소설로서 읽혀도 그닥 어색하지는 않았을 듯.
1960년대 런던, 그 세트의 무대에서 등장인물들은 흡사 작위적인 연기를 하고 있는듯 하였다.
드라마는 필연(必然)보다는 거의 우연(偶然)이 이끌어 가고 있었다.
열다섯살짜리 소년 알렉스의 세리프는 사뭇 노숙한 철학자연(然)하여 어울리지도 않았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과장되고 유형적(類型的)이고 상투적이었다.
사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우연(偶然)과 아이러니로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현실감이 별로 없었다.
가정환경이나 근로가치등... 언급되는 사회환경도 알렉스의 사악함과의 인과(因果)는 뚜렷하지 않았다. <인과론(因果論)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듯>
아마 그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악소배(惡少輩)들이 저지르는 악행들은 그야말로 사이코패스에 못지 않은 것이었지만 하드고어적으로 끔찍하지 않았고.
권력의지가 개인에게 가하는 비인간적인 행태 역시 ‘조지 오웰’이나 ‘고스타 가브라스’ 영화에서와 같은 그 음산한 전율은 별로 느낄수 없었다.
그러니까 소설의 제재(題材)는 어두운 것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소설의 분위기는 밝고 경쾌하였다.
혐오와 분노의 감정은 좌뇌에서 여실하였으되, 우뇌에서 증오의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악함은 있었으되 을씨년스럽지 않았음은 이 소설이 현실을 벗어난(그러함으로 현실을 빗댄) 하나의 풍자(諷刺)로서 감정에 접수되는 까닭이었을 것이다.
오로지 악행(惡行) 그 자체에 함몰된 열다섯살 짜리들, 두목 알렉스와 세 꼬붕 피트와 조지와 딤.
지식인 노인을 두드려 패고, 늙은 술주정뱅이에게 이유없이 무차별 폭력을 가하고, 패거리 싸움에서 면도칼과 자전거 체인으로 끔찍한 부상을 입히고, 복면을 하고 가게에 침입하여 주인부부에게 사정없는 폭력을 행사한후 푼돈을 강탈하고, 차를 훔쳐타고 외딴 집을 찾아가 작가부부를 폭행하여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 부인을 윤간하고, 오줌을 싸 재끼고, 소녀들을 꼬셔 집단 섹스를 벌이고, 살인을 하고...
알렉스 일당이 가는 곳에서는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한다.
무조건적 무목적적인 악행들이다.
다른 꼬붕들은 그래도 현실적 욕망따위의 불순한 것들이 섞여 있지만 알렉스 이 녀석은 그야말로 순수(純粹)한 사악함 덩어리다.
그리고 말할수 없이 교활하다.
질서와 규율과 권위에 대하여 침을 뱉으면서도 꼬붕들 앞에서는 질서와 권위를 내세운다.
모든 기성의 아름다운 것들을 폄훼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클래식 음악을 모욕하는 꼬붕을 후려친다.
그의 사악함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그의 선택인가, 성악설에 기반한 인간성의 문제인가.
의지가 작용하였는가, 천래적(天來的)으로 타고난 어떤 것인가.
정치상황이거나 시대상황이 만든 괴물인가.
사회구조적 모순이 원인인가.
가정상황이나 교육의 문제인가.
철학자연(然) 씨부리는 알렉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그런데 여러분, 악의 원인이 무엇인지 놈들이 발톱을 물어 뜯으면서 연구한다는 말은 나를 웃게 만들었지. 선의 원인은 밝히지 않으면서 왜 그 반대쪽이냐고. 만일 인간이 착하다면 그건 지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난 그런 기쁨을 방해할 생각이 없어. 그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야. 난 그 반대 쪽을 더 두둔하겠지만 말이야. 더욱이 악이란 자기 자신이 유일한 존재, 즉 혼자로서의 너 또는 내가 책임지는 것이고, 이때 자아란 하날님(하나님) 또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데 그건 신의 커다란 자랑거리이자 기쁨인 거야. 그러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으면 악이란 있을수가 없지. 무슨 말인가 하면 정부 놈들이나 재판관들 또는 학교의 접장들은 인간의 본모습을 인정할수 없기 때문에 악을 용납할수 없는거야.”
알렉스를 마약보다 더 취하게 만드는 음악.
음악은 또다른 알렉스의 악의 표상이다.
악을 고무하는 음악, 아,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아름다운 음악이 고양시키는 것은 그의 악마적 감성이다. (사이코패스 유영철은 살인한 사체를 절단하면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를 크게 틀어놓고 그 끔찍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음악이 최고조에 이르면 폭력적인 상상도 극에 달하여 알렉스는 오르가즘에 취한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은 로마의 토가를 입고서 예수를 매질하거나 못 밖는 일을 하거나 성서에 등장하는 여인과 그 짓을 하는 상상을 한다.
인간들을 더 세게 패주고 갈가리 찢어 마룻바닥에다 내팽개치는 상상 속에서 알렉스는 바흐의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해하게 된다.
아, 축복. 축복. 천국!
그는 벌거벗은채 베토벤의9번 마지막 악장을 들으며 환희의 절정으로 절규한다.
“소년이여, 천상에 떠오르는 상어여. 천국의 살해자여. 불타는 마음으로, 고양되고 황홀에 빠져, 우리는 당신의 입을 때리고 당신의 냄새나는 엉덩이를 걷어 차리라.”
살인으로 15년형을 받고 국립교도소에 수감된 알렉스.
“그건 교도가 아니었지, 그 냄새나는 지옥 구덩이와 인간 우리에서 2년을 지내며, 야만적인 깡패 교도관 놈들에게 차이고 맞고, 냄새나는 교활한 죄수들, 성냥공장에서 강제노동, 교수같은 늙은이들의 지루한 강의....”
그곳을 벗어나기 위하여 알렉스는 모르못(실험쥐)이 되기를 자원하였다.
루드비코 요법.
모종의 주사를 놓은 다음 머리와 가슴에 전기자극을 장치하고 눈꺼풀을 집게로 벌려 눈을 감지 못하도록 고정시키고 의자에 붙들어 꼼짝 못하게 하고서는 그의 눈 앞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다.
영화는 죄 잔인한 장면으로 점철된 것들.
그 장면마다 알렉스에게는 전기자극이 주어진다.
“늙은이에게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 늙은이의 대갈통이 클로즈업되자 피가 아름다운 붉은 색으로 흐르고 있었지...계집애를 보여주고 윤간당하는 장면...비명소리와 비극적인 음악....나는 갑자기 토하고 싶어졌지....온몸이 아파왔고, 괴로워 몸부림을 치기 시작하였지....칼로 눈을 도려내고 뺌을 도려내거나 온 얼굴울 난도질하는 영상... 이빨이 전부 뽑히고 비명과 피가 낭자...여러 놈들이 노파의 상점을 습격하여 할망구를 불태워 죽이는 영상...일본인의 고문장면, 칼로 대갈통을 자르는 장면...“영화를 멈춰! 제발, 제발 멈춰 주세요. 더 이상 견딜수 없어요!”
“너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인간의 신체에 당연히 일어아야 할 것들이란다. 넌 정상이 되는 중이고 또 건강하게 변하고 있는 것이지. 보통 사람들은 건강할 때 증오하는 대상을 보면 공포와 구토감을 느끼지. 이제 너는 증오하는 대상이 바로 네가 예전 즐겼던 악이 되는거야.”
“아! 나는 그런걸 원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요, 다만 아플 뿐이에요!”
망막을 통하여 뇌리에 접수되어 의식하게 된 악행은 이제 말할수없이 끔찍한 고통이 되었다.
영화의 배경음악인 베토벤의 교향곡까지도 고통이 되어 버렸다.
“더러운 개새끼들. 난 초강력 폭력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아. 견딜수 있어. 그러나 음악을 가지고 그러다니 치사한 일이야. 내가 아름다운 루트비히 판이나 헨델이나 그 음악들을 들을때마다 아파야 한다는 건 견딜수 없어.”
장관과 교도소장등의 임석 하에 행해지는 마지막 시험 무대.
알렉스는 어떤 사나이에게 모욕을 당하고 구타를 당하고 짓밟힌다.
그를 때리려고 주먹을 처드는 순간 엄습하는 메스꺼움과 고통.
벌거벗은 이쁜 여자에게 욕정이 치솟아 손을 대려고 하는 순간 엄습하는 고통과 갈증 그리고 끔찍한 메스꺼움.
루드비코 요법.
신부 왈.
“나는 그 요법에 대하여 회의해. 그 요법이 과연 진짜로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나. 선함이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란다. 6655321번(알렉스의 수인번호)아, 선함이란 우리가 선택해야 할 어떤 것이야. 선택할수 없을때는 진정한 인간이 될수 없는거야.”
“너는 착한 아이로 만들어질거다, 악의 행동을 저지를 어떤 욕망도 이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 신은 선 그 자체와 선을 선택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시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는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 낫지 않을까.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다.”
“나도 모르겠다, 모든 일이 잘될지도 몰라, 누가 알아? 신은 신비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니까”
“저 애에게는 진정한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자기이익, 육체적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모독하는 괴이한 행동을 하게 되는 거죠. 그게 진심에서 한 행동이 아니라는걸 확실히 알수 있어요. 쟤는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또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수 있는 신의 피조물도 더 이상은 아니지요.”
브로드스키 박사(루드비코 요법의 창시자)왈.
“이 아이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구원입니다, 신의 천사 앞에서 환희를. 우리는 고차원적인 윤리에는 관심이 없어요. 결과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알렉스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단어를 외쳤다.
“내가 무슨 태엽달린 오렌지란 말이야?”
그때 어떤 늙은이가 일어섰다.
“너는 불평할 명분이 없다, 얘야, 너는 선택을 한 것이고, 이 모든 게 네가 선택한 결과야.
알렉스는 석방되었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
신문에는 대문짝만한 기사.
‘이 사람은 새로 생긴 범죄자 갱생 국립연구소의 첫 수료자로서, 두 주일 만에 범죄심리가 치료되었고, 지금은 법을 두려워 하는 시민이 되었다.’
그를 반기지 않는 부모, 슬픈 마음을 위로받고자 모차르트의 음악을 찾아 듣지만 그 음악 역시 그에게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사악함은 여전히 내재되어 있으나 행동을 할수 없는 알렉스는 이제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나약한 소년일 뿐이다.
도서관에 가서 전처럼 성경속 폭력과 색정의 장면들이 위안을 주지 않을까하여 성경을 펴들었으나 또다시 속이 메스꺼워 몸을 비튼다.
옆의 늙은이가 묻는다.
“무슨 일이냐, 얘야? 뭐가 문제니?”
“끝을 내고 싶어요, 해 볼건 다 해봤어요, 사는게 너무 힘들어져 가요.”
옛날 악행의 대상이었던 늙은이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등장한 경찰이라는 놈들은 옛날 꼬붕 패거리였다.
그들에게도 무참한 폭력을 당하고 알렉스는 방황하다가 외딴 집을 찾는다.
‘아, 제발 도와 주세요. 경찰에게 두드려 맞고는 길가에서 죽게 내벼려 졌어요.’
알고보니 그 집은 예전에 습격하여 악행 (윤간당한 작가의 아내는 결국 자살하였다)을 저지른 바로 그 작가의 집이었다.
알렉스는 곧 그를 알아보았으나 악행 당시 복면을 하고 있었으므로 작가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였다.
집권당과 반대파인 작가는 그를 환영한다.
‘또다른 희생양이군, 우리 시대의 희생양. 쉬게나, 가엾은 청년. 그들은 너를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었어, 네겐 선택할 권리가 더 이상 없다는 거지, 넌 사회에서 용납되는 행동만 하게 되었어. 착한 일만 할수 있는 작은 기계지. 너는 아주 강력한 무기가 될수 있어. 이 정부가 정권을 잡지 못하도록. 정부의 제일 큰 자랑은 지난 몇 달동안 시행한 범죄통계 정책이지. 야만적인 어린 깡패들을 경찰로 모집한 것,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고 의지력을 갉아먹는 조건반사 기법을 도입한 것 말야. 전체주의적 체제에 우리는 맞서야 해.’
알렉스는 묻는다.
‘그러면 내게는 무슨 이득이 있나요? 지금의 상태가 치료가 되나요? 내가 다시는 속이 메스껍지 않고도 베토벤의 합창을 들을수 있는 날이 오나요?’
그러나 결국 그 작가는 알렉스가 아내를 죽게한 범인임을 알아채고 말았다.
공공적 정의감에 고무되었던 작가는 이제 개인적 복수의 희열에 사로잡혔다.
클래식 음악은 알렉스에게는 이제 견딜수 없는 고통임을 진작 간파하고 있는 작가는 교향곡을 크게 틀어서 2층의 알렉스에게 들리도록 한다.
“음악소리는 점점 커지고, 방문은 잠겨 있었다. 딤과 빌리보이 놈이 경찰로 나를 검문하기 전 내가 생각했던거, 그건 내 자신을 포기해 버리는 거, 끝장을 보는 것, 이 사악하고 잔인한 세상을 아주 떠나버리는거야. 안녕 안녕 하날님이 내 삶을 파괴한 너희들을 용서하시기를.”
2층에서 투신하는 알렉스.
그러나 알렉스는 죽지 않았다.
등뼈와 손목과 발목이 부러졌을 뿐이다.
반대당의 사람들은 환호하였다.
“친구야, 어린 친구. 대중들은 지금 분노하고 있다. 넌 자유를 위하여 아주 휼륭한 일을 했다”
범죄자 교정 정책의 소년 희생자, 살인정부라는 표제의 신문이 불티나게 팔렸다.
알렉스의 부모가 병상으로 찾아온다
엉엉 엄마가 울자 알렉스가 소리쳤다.
“아, 그만해요. 안그러면 진짜로 울부짖고 소리를 치게 만들 거야. 이빨을 차버릴까 보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말을 했더니 알렉스의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말한다.
“어머니께 무슨 말버릇이니 너를 이 세상에 낳아준 분인데.”
“그래요. 이 더럽고 구린 세상에 말이죠. 두 사람 다 꺼지세요.”
의사가 알이 가득 남긴 새집의 그림책을 펼쳐 보이며 그의 악성회복을 테스트한다.
“아, 부숴 버려야지. 통째로 들어올려 벽에다 집어 던지든지 벼량 같은데셔 떨어 뜨려야지, 그러고는 기똥차게 부서지는걸 봐야지.”
공작새의 그림.
“꼬리털을 다 뽑아내고 죽겠다고 소리 지르는걸 보고 싶군. 이렇게 뽐내고 있으니까 말이야.”
이쁜 계집애의 사진.
초강력 폭력과 함께 그짓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 오른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언덕을 오르는 그림.
망치와 못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토벤의 9번 마지막 악장을 듣는다.
아, 아름다운 악장, 희열이 찾아 온다.
“난 제대로 치료가 된거야.”
마치 붉은 새 피가 몸 속을 흐르는 것 처럼 알렉스의 사악함은 회복된 것이다.
추락하여 땅에 부딪친 그 충격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새로운 꼬붕들을 거느리고 악행에 나서는 알렉스.
아, 그런데 이상할사!
알렉스에게 악행이란 옛날과 같은 그런 즐거움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치 부드러운 뭔가가 내 속에 들어온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이해할수 조차 없었어.”
격렬한 관현악에 흠취하였던 음악의 취향까지 변하였다.
“심지어 조그만 내 방에서 듣고 싶은 음악도 전에는 비웃기만 했던 종류였어. 독일가곡 리트 따위.. 그 음악은 아주 조용하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것 같아서 옛날에 침대에 누워 바이올린과 트롬본과 팀파니 속에 파묻혀 듣던 엄청 큰 교향악단 연주들과는 달랐지. 뭔가가 내 몸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는데, 난 무슨 병이 났거나 아니면 옛날에 놈들이 나한테 저질렀던 일 때문에 내 대갈통이 뒤집혀서 진짜로 미치게 된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지.”
“아마 나도 이때껏 살아온 삶을 살기엔 너무 늙었는지 몰라. 난 열여덟이야. 열여덟에 볼프강 아마데우스는 콘체르토와 교향곡과 오페라와 오라토리오 같은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지, 프랑스 시인은 열다섯에 최고의 시를 썼다지. 그러니까 열여덟은 하나도 어린 나이가 아니야, 그럼 난 무얼 해야 하지?”
그리고 일흔살 정도의 노인이 되어서 난롯가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난롯불이 타오르고 따뜻한 저녁이 차려진 곳의 옆방으로 들어가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될거라는. 그 옆방에는 옹알거리는 내 아들이 누워있는,,, 그래 그래 내 아들이야...그 때 난 몸 속에 텅 빈 자리를 느꼈고 스스로 놀랐어, 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된 거야. 철이 든다는 것이겠지....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는 짐승같은 것이라고 볼수 있지. 아니, 그것은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란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거야.”
“내 아들이라, 아들이라. 아들을 낳아 녀석이 말귀를 알아들을 정도의 나이가 들면 이걸 설명해 줄거야. 그러나 그때도 녀석이 이해하지 못하든지 또는 듣고 싶어 하지 않던지 해서 내가 저지른 짓거리- 야옹거리는 암수 고양이에 둘러싸인 못생긴 할망구를 죽인 것 말이야-을 벌인다고 해도 내가 멈출수는 없겠지. 녀석도 제 아들놈을 막을수 없을거야. 그런 일은 세상이 끝날때까지 돌고 돌아서 계속되겠지, 마치 거인처럼 된통 큰 녀석, 그러니까 하날님-코로바 밀크에게 감사드려야지- 이 커다란 손에서 구리고 기름때 낀 오렌지를 이리저리 굴리는 것처럼 말이야.”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 놓은 성정(性情)이라는 것.
인생이란 그러한 것인가.
한시절 질풍노도의 광풍속에 잠겨 있다가도 때 이르면 따스한 햇살속 안온함에 잠기기도 한다.
아, 생명을 창조한 섭리가 그러한 모양이다.
하날님(신을 빗댄 알렉스의 하나님)의 시계태엽.
자유의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스스로 조절 통제할수 있는 능력.
그리하여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선택하여 결정할수 있는 힘.
인간의 욕구와 욕망은 다만 동물적인 본능일 뿐인가, 혹은 의지(意志)의 근원인가.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욕망과는 전혀 다른 순전한 이성의 영역인가.
사람의 태어남에는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호리도 없다.
그런 인간에게 순수한 ‘자유의지’란 허여(許與)될수 있는 것일까.
작금의 내가 나의 의지라고 의식하는 것들, 그것은 순수한 자유의지일까.
혹 착각은 아닐까.
자유의지의 충돌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 것인가.
하나의 자유의지의 발현은 또 다른 자유의지의 발현을 좌절시키는데, 거기 어디에 순수한 자유의지가 존재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결정론은 어떠한가.
선택할수 없는 주체도 인간이라고 할수 있는가.
악을 선택하는 사람이 강요된 선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을까.
캘빈의 예정론 앞에서 자유의지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일정한 자극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반응을 나타낼까.
예전 귓등으로 들은 풍월 ‘라플라스의 악마’가 훗날 과학적 진실로써 밝히 드러날 때가 올것인가.
외딴집 작가의 입을 빌어 말하는 것은 작가 버제스의 목소리인지.
“인간, 즉 성장하고 다정할수 있는 피조물에게 기계나 만드는 것에 적합한 법과 조건들을 강요하려는 시도나 또 수염이 난 신의 입술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는 시도, 여기에 대항하여 나는 나의 칼, 펜을 든다.”
‘자, 이제 어떻게 될까.’
나는 지금 나의 의지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오늘 나의 의지는 내일 어떻게 실현되어 있을까.
혹은 나의 내일이란 내 의지와는 하등 관계없는 '이미 차려져 있는 밥상'은 아닐까.
이 소설에 대한 나의 의견은 없다.
다만 스스로를 향한 물음이 있을 뿐이다.
아, 내 오렌지에는 시계태엽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것이든, 과학의 것이든, 권력의 것이든, 사회의 것이든, 관계의 것이든 말이다.
필경, 완전하게 제거되지는 않았을 듯 하다.
째깍 째깍.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 책을 추천하신 외과의사(전영웅님)의 글을 빨리 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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