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그리스인 조르바> 上
-카잔차키스 作-
***동우***
2011년 7월 14일
[그리스인 조르바 (Zorva the Greek)]
저자 : 니코스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 1883~1957)
발표년도 : 1946년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흑백 스탠더드 화면.
‘부주키’(그리스 전통악기)가 연주하는 ‘미키스 데오도라키스’의 음악.
그 음악에 맞추어 안소니 퀸이 추는 ‘조르바의 춤’
조르바에 관심있는 사람은 그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크레타)가 낳은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Nikos Kazantzakis, 1883~1957)
심장 어디쯤인가에서 벌떡이는 ‘살고 싶다’는 외침을 듣는다.
두뇌 어느 부위에선가 ‘너는 곧 소멸할 것이다’라는 인식(認識)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낫살 먹음에 따라 더욱 뚜렷하게, 내면에서 들려오는 두 목소리.
마음은 몹씨 살고 싶은 모양인데 거울속 늙어 가는 모습(몸뚱이)은 제 마음에게 비수같은 메시지를 일갈(一喝)한다.
“너는 곧 적멸(寂滅)로 돌아갈 것이다”
의식(意識)도 없고 자아(自我)도 없는 절대무(絶對無)의 세계.
그 단애(斷崖)의 끄트머리에서 내 영혼이 오르르 떤다.
인간을 제외한 무릇 산(生)것들의 꼼지락거림.
그것은 목숨의 벌떡임이 누리는 기쁨의 몸짓이고 목숨이 주장하는 당당함의 표출이며 목숨이 선언하는 자유함의 표상이다.
그러나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과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는 유일한 생물학적 존재가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호모 사피엔스’는 그의 삶을 생명의 순수성(純粹性)으로 살아내지 못한다.
그는 목숨에 대하여 당당하지도 엄숙하지도 자유롭지도 아니하다.
자연의 부분으로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무력함과 존재의 한계성을 깨닫는 지극히 자의식적(自意識的)인 존재로 변해 버린 인간.
날 것의 생동(生動)을 난삽(難澁)한 추상에 의존한 그의 목숨은 일견 비굴하고 불순하다.
어쩌랴. 정신은 우주를 넘나들지만 육신은 동물에 머물러 있는 것을.
정신과 육체, 그는 결코 이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성과 앎을 뽐내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무지한 존재.
자유로운 상상력을 가졌지만 육체적으로는 이미 결정된 존재.
정신을 쫓아 낼수도 없으며 육체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는 존재.
유한(有限)이라는 그릇 속에 담긴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무한(無限).
자연의 자유함으로부터 도망가 스스로가 만든 인식의 감옥에 갇힌 존재.
때로 나는 중얼거린다.
‘아아, 한 마리 동물로 살수 있더라면 나는 행복하였으리.’
쇼펜하우어는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사유(思惟)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그 놈의 ‘인지(認知)하는 죽음’ 때문에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 하였을 것이다.
의식(意識)하는 죽음은 죄의 삯이 아니라 어쩌면 진화의 에너지다.
말(언어)이라는 도구에 얹혀서 생각하는겐지 사유가 있음으로 언어가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되 생각뿐이랴, 죽음이 없었다면 필경 언어도 없었으리라.
인간의 언어는 살고자 함의 언어이고 죽음을 감득(感得)하는 언어이다.
모든 언어의 술부(述部)에는 살고 싶다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으며 죽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함축되어 있다.
언어의 모습이란 삶 속에 내포(內包)된 죽음, 죽어야 한다는 강박이 함축된 은유(隱喩)의 포름에 다름 아니다.
본질적으로 산(生)것들의 목숨살이의 기쁨에 있어서 언어란 도구는 소용에 닿는 물건이 아닐게다.
몸짓과 표정과 으르렁 멍멍 꿀꿀거림으로 족하다.
언어로서 존재를 영위하는 인간은 대지(大地)에 대한 반란군이다.
반란은 그러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초월적 자유를 획득하는 데는 실패하였고 오히려 대지가 주는 그 안온함을 잃어 버렸다.
자각(自覺)하는 유한성(有限性)에 함몰되어, 천지간(天地間)에 어중간한 상태의 인간이 되어 버렸다.
대지가 주는 자유함을 잃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욕망과 절망의 간극에서 태어난 언어, 그 진폭의 에너지로서 인류 진화의 다이나미즘을 얻었을 뿐이다.
지구를 방문한 영겁의 어떤 존재가 있다면 이 전제(前提)를 이해하지 아니하고서는 지구인과의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죽음은 늘 추상의 인식으로서 존재하다가 어느 날 느닷없는 현실로써 내게 찾아올 것이다.
무릇 존재하는 것들과의 생명적 연대감으로, 범신론적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가난한 어릿광대,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기쁨으로 그 죽음을 맞았다.
<바로 문 뒤에 서 있는 죽음의 형제여, 사람들은 당신의 그 고상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그렇다, 죽음의 고상한 뜻을 우리는 알리가 없다.
프란치스코는 적어도 초인(超人)이었지만, 범부(凡夫)로서는 그 지경에 이르기 무망(無望)하다.
절대미지(絶對未知)의 그곳, 막연하게 감득(感得)하고 있는 절대무(絶對無)의 그 암흑이 나와 같은 범부로서는 두렵지 않을수 없다.
그리하여 인간은 당당한 목숨의 자유함으로부터 도피하여 언어에 의탁하려 한다.
개념화된 언어만이 알수 있을 미지(未知)의 그 곳으로.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다.
<주여, 나는 무엇입니까? 죽어가는 생입니까. 혹은 살아있는 죽음입니까?>
그의 실존적 번민(煩悶)은 필경 신앙에 합일하여 구원을 얻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는 형이상학적 관념을 명제로 하여 그의 신학(神學)을 완성시켰을 것이다.
나도 어거스틴처럼 그 초월적 그윽한 평강(平康)의 품안에 내 영혼을 의탁(依託)코자 하지만 프로이트, 맑스, 에리히 프롬등 명징(明澄)한 이성(理性)들은 내게 악마처럼 속삭인다.
종교란 외부의 자연력과 내부의 본능적인 힘에 직면했을때 느끼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둥, 신앙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이분법(二分法)의 회의(懷疑)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둥, 아무런 실체도 없는 부르주아의 아편적 지배도구라는둥.
천국이거나 연옥이거나 자아(自我)의 상존(尙存), 그 소망자체가 무위(無爲)하다면 실존은 과연 무슨 지푸라기라도 잡아 스스로 위무(慰撫)할수 있을런가.
아, 적멸(寂滅)의 단애(斷崖)는 더욱 아득하구나.
책부족 유월의 책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조르바는 이번으로 세번째 읽는 소설이다.
책부족 추장님의 기억 속에서 나와 공유한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었었는데 이번 것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이윤기의 번역인지라 문학성 깃든 문장은 자못 매끄러워 좋았다.
자랑컨대 나는 이십대 초반에 니체를 읽었다.
옛 번역본 딱 두 권. ‘비극의 탄생’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고백컨대 치기(稚氣)의 허영으로서 읽었던 나는 니체를 읽은 것이 아니었다.
니체의 문학이나 혹은 문장, 아니 나열된 어휘만을 읽었을 뿐이었다.
내게 남은 것은 니체의 오의(奧義)가 아니라 상투성 가득한 언어 부스러기들 뿐이었다.
그 후 대면한 카잔차키스.
그는 기억 속 형해화(形骸化)된 니체의 언어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주었다.
니체의 그 몽롱한 글자들 몇몇이 육화(肉化)되어 구체성의 의미를 지니고 내게 엄습하였던 것이다.
‘크레타’사람인 카잔차키스가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그의 방식으로 이해하였던 것처럼.
<내 머릿속에서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문제까지도 바다와 흙과 인간의 땀냄새가 나는 따스한 실체의 형태를 취한다. 개념은 나에게 이르려면 따뜻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 냄새맡고, 보고, 만질수 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이해를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평생 세계를 떠돌았지만, 크레타에서 태어나 크레타에 묻혔다.
거칠음과 모순과 혼란과 격정과 마초이즘, 어리석은 명예심과 피비린내 나는 복수, 프랑스의 코르시카섬이나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 또는 메리메의 소설속 어떤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는 섬, 크레타.
카잔차키스 역시 여자의 에로틱한 체취에 자지러들고, 양의 뒷다리 요리와 포도주에 게걸스러우며, 밤하늘 가득한 별떨기에 경탄하는 오딧세우스의 후손이 아닐수 없었다.
성과 속, 영육(靈肉)의 갈등, 코를 자극하는 지상적인 냄새들과 정신이 맛보는 천상의 향기..
그리하여 카잔차키스는 일찍부터 육체적 욕구와 고행자적 성인(聖人)의식의 갈등으로 그의 정신세계는 분리되어 서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명제는 바로 이와 같은 이분법의 극복, 이 둘의 합일(合一)이었다.
영혼이 육화(肉化)되던지, 육체가 영화(靈化)되던지,
카잔차키스의 74년 일생은 온 세계를 떠돌며 뭇 사상과 사조와 생각들을 씹어 맛보고 뱉어내고 절망하면서, 다시 새로운 것들을 편력하면서 죽기 살기로 고뇌하고 사유한 생애,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생전에 미리 써 놓았다는 그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그리하여 그는 도달하였는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내게 ‘네 존재를 해방시켜 존재를 자유롭게 하라.’고 속삭인다.
자유(自由)
언어로부터의 자유.
존재의 유한성, 이중성으로 부터의 자유.
사후(死後)를 향한 희망이나 두려움으로 부터의 자유.
‘군거적(群居的)순종’으로부터의 자유.
아, 그러나 나는 자유로부터 자꾸만 도피하려 한다.
평생 순치(順治)된 내 존재의 속성이 그러하니 이를 어쩌랴.
나는 그가 다다른 곳 여기저기를 장님 코끼리 더듬듯 더듬고 있을 뿐이다.
나의 구루.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유, 그 몸뚱이를.
-계속-
-독서 리뷰-
<그리스인 조르바> 中
처음 그에게 영혼의 자유를 깨닫게 한 사람은 니체였다.
<인간이 자유가 되는 유일한 길은 투쟁뿐, 그 자유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두려움도 없고 보상에 대한 희망도 없이 싸워야 한다.>
영혼과 육체,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등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끝없는 투쟁.
영혼의 자유란 곧 존재의 본질과 벌이는 거대한 싸움임을.
인간의 본성(本性), 천형(天刑)의 프로메테우스적 숙명을 초극하는 것.
관념이 아닌 존재적 실체가 그곳에 이르러 존재로서 납득하기 위하여 초인(위버멘쉬)이 되어야 한다는 것.
육체란 결코 초극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초인(超人)이란 육체를 근거로 우뚝 선 사람.
그는 자서전에서 썼다.
<구원의 문은 우리 손으로 열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우리에게 초인은 희망이다, 초인은 대지의 종자이며 해방은 그 종자 속에 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우리를 심연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인간은 마땅히 저 자신의 본성을 뛰어넘어 하나의 초인이 되어야 한다, 신의 빈자리를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 주인의 명령이 없어진 지금, 우리 의지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아토스산에 올라 성자(聖者)의 수련을 통하여 예수에 이르려 하였으나 육체를 악마와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영혼지상주의에 절망하여 산을 내려왔고, 니체로 인하여 존재의 자유를 깨달았으나 이내 니체를 버렸다.
단테와 말라르메의 시를 사랑하였지만 또한 언어의 공허함으로 절망한다.
<내 길동무 단테, 나는 천당과 지옥과 연옥을 내 집인양 드나들었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괴로워했고 지복을 기다렸고 지복을 맛보았으며 무아지경에 빠져 들기도 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단테를 덮고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만 단테의 하늘에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돌아보자 조르바가 뒤에 있었다.>
<애독하는 말라르메. 그토록 애송하였던 그의 시가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생명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창조의 섬광을 상실한 종교에서 제신(諸神)은 결국 인간의 고독과 벽면을 장식하는 시적 모티프나 예배용품으로 전락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도. 대지와 씨앗을 품은 심장의 열화같은 호흡이 완벽한 지적놀음, 교묘하면서도 덧없는 구조물이 되어 버린 것,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정을 쫓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
불교에 빠져 들었다.
그가 접한 부처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물질을 정복한 초인.
‘이 세상의 모든 유혹 가운데 가장 무서운 유혹인 희망을 정복하라.’
희망까지도 초월한다는, 육체로부터 영혼으로의 철저한 전이(轉移)라는 불교사상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없고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나는 놀랐다. ‘부처가 그 최후의 인간이다!’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다. 부처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 있다. 그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空)이다.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나는 외친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서는 물은 흐르지 않고 풀은 자라지 않으며 아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생각했다. 내 기필코 언어를 동원하고 언어의 주술적인 힘을 빌고 그 마술적인 율동에 의지하여 그를 포위 공격하고 무찔러 내 오장육부에서 내쫓고 말리라 하고. 불경을 베껴 쓴다는 것은 더 이상 문학을 위한 공부일수는 없었다. 그것은 내 내부에 도사린 무서운 파괴력과의 생사를 건 싸움이며, 내 가슴을 말리는 위대한 부정(否定)과의 결투였다.>
<명상하는 금욕주의자는 제자들에게 설법한다. ‘자기자신 안에 행복의 근원을 갖지 않는 자에게 화있을진저! 남을 즐겁게 하려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금생과 내생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
<어려서 영원이라는 말은 사랑, 희망, 국가, 하느님같은 말 쪽으로 가파르게 기울어졌다. 한 단어 한 단어를 정복하면서 나는 흡사 위험에서 벗어나 무럭무럭 발전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겨우 말을 바꾸어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런 경력의 내가 이제 2년 전부터는 ‘부처’라는 말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확신했다. 부처는 최후의 우물, 마지막 심연의 언어이며 영원한 구원의 문이 될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카잔차키스의 크레타인(人)의 육체는 영화(靈化)될수 없음으로 또다시 절망한다.
<부처에서 벗어나고 모든 형이상학적인 근심인 언어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고 헛된 염려에서 내 마음을 해방시킬 것, 지금 이 순간부터 인간과 직접적이고도 확실한 접촉을 가질 것.>
<어둠이 내려 책을 읽을수 없었다. 나는 부처, 하느님, 조국, 이상. 이 모든 허깨비들에게서 풀려나야 한다. 부처, 하느님, 조국, 이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
한동안 공산주의와 레닌과 러시아를 사랑하였다.
이상주의.
러시아 땅에 정착되어 경작되려 하는, 인간성이 갖고 있는 유용하고 고상한 도구인 이성(理性)에서 구원의 싹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본질적으로 커뮤니스트가 될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이상주의는 소설 속 조르바에게 쫑코를 먹고 꼬리를 사린다.
<두목, 제발 좀 끼어들지 말아요. 오늘 인부들에게 한 이야기, 그게 뭐요? 사회주의라고? 개코같은 소리! 당신은 목자요, 자본주인가요? 결단을 내리쇼!>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그런데도 두목은 이걸 알지 못해요. 당신에겐 이 인간이라는 것, 세상사라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모양인데. 내게 물어봐요! 짐승이라고 대답할께요. 이 짐승을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 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 갈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 따위 소리를 하면 안돼요.>
그렇다, 정연하게 정리되고 납득되고 이해되는 인간성이라니, 어림 없다.
자연의 사생아(私生兒)이지만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유혹에 약하며 강한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동물이다.
이기심을 해석하는 것이 경제학의 요체, 생각건대 아담 스미스는 옳다.
카잔차키스가 교회로부터 파문 당하였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의 해설중 한 구절.
<초인 예수. 의지의 힘에 의해 물질에 대한 승리를 거두는, 내면에 지닌 생명력과의 유대가 있기 때문에 물질을 정신력으로 변형시키는 인물, 하지만 전체적인 승리란 사실상 가정, 육체의 쾌락, 국가, 죽음의 공포 따위 온갖 형태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거치는 하나하나의 승리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카잔차키스에게는 자유가 투쟁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투쟁이라는 과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예수가 끊임없이 악의 유혹을 받으며 그 유혹에 마음이 끌리는 심지어 굴복까지 한다는 상황이 필수적인데, 그래야만 유혹에 대한 궁극적 거부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카잔차키스를 생각하면 뒤따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역시 이념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그것으로 일생을 산, 생각이 육화(肉化)된 사람
‘성 프란치스코’와 ‘알베르트 쉬바이처’.
<프란치스코는 마지막 중세인이며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다, 그리고 쉬바이처는 추악하고 부정적인 것과 불의가 충만한 현대에서 새로운 르네상스를 알리는 최초의 인물이었다. -카잔차키스->
하나님에 미친 사람. 예수의 오상(五傷)을 자신의 몸뚱이에 육화한 사람,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코, 그는 잔인한 시련에 찬 투쟁을 통하여 우리의 가장 숭고한 의무를 다하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것은 도덕이나 진리나 아름다움보다 더 드높은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물질을 갈고 닦아 바로 영혼으로 승화시키는 그런 의무를.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는 말년에 쓴 소설 ‘성 프란치스코’를 알베르트 쉬바이처에게 헌정하였다.
최고의 이상(理想)으로서 주위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써 인식할수 있었던 정신, 람바레네의 쉬바이처.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 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쉬바이처->
카잔차키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벌이는 절절한 투쟁과 난만한 축제의 현장을 그처럼 생생하게 내게 보여 준 작가는 없었다.
능숙한 마술사처럼 물질을 영화(靈化)하고, 영혼을 물화(物化)하여 내게 들려준다.
육체와 정신, 이성과 감성, 영혼과 악마, 파토스와 로고스.
그의 소설적 스케일은 크고 거칠다.
문학의 미학적 심리적 디테일에 연연하지 않고 곧장 인간과 영혼이라는 주제로 직입(直入)한다.
그리하여 불합리한 논리를 신비한 논리로서 내게 납득시킨다
그에게서 ‘메토이소노’라는 어휘를 배웠다.
합일(合一)이며 성화(聖化).
물질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임계상태를 넘어서는 변화,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거룩하게 되기, 성화(聖化).
광산업을 몽땅 말아 먹고 소설 속 인물 ‘나’와 춤을 추는 ‘조르바’.
<보라, 조르바는 사업체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이다, 나는 위대한 자유인을 겨우 책 한권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다.>
생(生)에 미친 사람 조르바.
성인전집에 나오는 금욕주의자가 자신의 남근을 잘라버린다는 얘기를 듣고서 ‘참 병신같은 친구도 다 있네. 그건 장애물이 아니에요. 이 답답한 양반아, 그건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라오.’하면서, 디오니소스를 방해하는 자신의 아폴론을 서슴없이 제거하는 사람 조르바.
산투리 연주에 걸치적거리는 자기 왼손 손가락 한마디를 도끼로 내려쳐 자를수 있는 사나이, 조르바.
조르바의 안에는 오디세이의 속(俗)된 신들의 체취가 스며있는 무대, 거대하게 꿈틀거리는 에게의 바다가 있다.
육체 속에서 넘실거리는 영혼의 바다와 영혼 속에서 노호하는 육체의 바다.
그에게 영육(靈肉)은 다름이 아니다.
<조르바는 인간의 영혼에 존재하는 삶의 힘을 보여 주었다.>
예순다섯의 조르바.
지금의 내 나이가 딱 그러하다.
혹여 내 내면에 조르바가 있을까 뒤져 보지만 쫌팽이의 안에는 아무리 뒤져봐야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계속-
-독서 리뷰-
<그리스인 조르바> 下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하였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전쟁을 겪으며 사람도 죽여 보았고, 숱하게 계집질도 하였고, 여러 나라를 떠돌았고, 가지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만고풍상을 겪은 사람이다.
그의 마음은 활짝 열려있다.
새가슴 나와는 비교할수 없어, 그의 가슴은 뉘에게도 꿀리지 않는 원시적 배짱으로 두툼하다.
그의 두뇌는 살이에 대한 통찰력과 지혜로 가득하다.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단순명쾌하게 풀어버린다.
조르바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언어의 숲에서 어정거리는 ‘나’에게 일갈한다.
사유만 있고 행위가 없는 것, 논리는 있으나 가슴이 없는 것들을 향하여.
그의 말대로 책들을 쌓아 놓고 확 불이나 싸질러 버린다면, 아, 그제서야 우리는 조르바처럼 인간이 될수 있을런지 모른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 그 이야기 좀 들어 봅시다. 요 몇 년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득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종이도 한 50톤 씹어 삼켰을테지요. 그래서 얻어낸게 무엇이오?”“모르겠어요. 조르바.”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쑥쓰러웠다, 나는 가장 단순한 질문,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받은 셈이었지만 그에게 설명해 줄수는 없었다. “모르신다!”조르바의 둥근 눈이 놀라움으로 열리면서 소리쳤다, 내가 춤출줄 모른다고 고백했을 때와 표정이 똑 같았다.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책들, 왜 읽고 있는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씌어져 있는거요?”“책에 씌어진 것은 인간의 혼미에 관한 겁니다. 조르바. 인간의 혼미야말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있답니다.”“인간의 혼미 좋아하시네.”>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는 벌레가 우글우글한대요. 자 두목, 갈증을 참을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숴 버리고 물을 마실테요?>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합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은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그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요? 웃기지 맙시다!>
<내게는 이건 터키놈, 저건 불가리아놈 이건 그리스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놈 아니면 터키놈이기 때문이지요. 이제 그런 것 상관하지 않아요.>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불쌍한 것이 있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자 역시 마시고 먹고 사랑하고 두려워 한다. 이 자 속에서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ㅡ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판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 되니까.>
<여자, 내가 어떻게 이것들을 좋아하지 않을수 있겠어요? 젖통만 쥐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손을 들어 버리는 이 가엾은 것들을 말입니다.>
이 마초이즘은 또 어이하나.
생(生)의 날것인 조르바.
조르바는 소설 속의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는 대지의 내장(內臟)에서 불쑥 튀어나온 사나이를 행운처럼 만났던 것이다.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 그 노동자의 두 손이 함께 다룰수 있는 곡괭이와 산투리...>
조르바의 하느님은 금욕주의자가 아니다.
삶을 구속하는 신이 아니다.
육체를 경멸하는 신이 아니다.
도그마가 아닌, 그의 신은 바로 자유다.
<나가면 어디로 갑니까! 가봐야 하느님의 손바닥 안인데, 구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언짢으세요?>
<자유를 택하시겠다? 그래요. 하지만 저 청동 손에 갇혀있을 때만이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해 보시죠. 하느님이라는 단어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의 자유가 없다고 생각하세요?>
신성(神聖)이라는 것, 오토의 책 ‘누미노제’의 정체란 정녕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존재의 모순을 극복할수 있는가.
<나는, 인간이 성취할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곳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봅니다. 잎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 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 봅니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을 빨아 올리는 걸 감지합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 되는게...”나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순간 그 순간에 시작되는게 바로 시(詩)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르바가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아 말을 끊어버린 것이었다. “무엇이 시작되지요? 왜 말을 하다 맙니까?”조르바가 안달을 부리며 채근했다. “조르바 그 순간에 위험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 아찔해지거나 정신을 잃고 또 어떤 사람은 겁을 집어 먹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용기를 북돋워 줄 해답을 찾으려다가 하느님! 하고 소리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잎사귀 가장자리에서 다시 심연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용감하게 나는 저게 좋아 하고 말하지요.”“두목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맨날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응시하지만 무섭지는 않아요. 그러나 좋아한다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좋아하다니 어림없지. 나는 좋아한다고 말했다는데 동의할수 없습니다.”조르바는 또 말을 끊었다가 다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렇다고 양처럼 제 목을 쑥 삼도천의 뱃사공에게 내밀고 ‘여보쇼, 카론씨, 이것 좀 잘라주게’이렇게 소리칠 만큼 얼빠진 놈도 아닙니다, 나는 천당으로 직행하고 싶어요.”>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듣고 당황하고 말았다. 법이 명하는 대로 자진해서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현자가 누구였던가? 필연에 순응하고 필연적인 것들은 자유의지의 행위로 바꾸어 놓으라고 한 사람은? 이게 해탈이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비참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필연을 극복하여 외부적 법칙을 영혼의 내부적 법칙으로 환치시키고 존재하는 것을 깡그리 부정하고 자기 정신의 법칙에 따른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인간의 긍지에 찬 동키호테적 반동이 아닐까! 이것은 결국 자연의 비인간적인 법칙을 반대하고 지금 존재하는 것보다 더 순수하고 우수하고 도덕적인 새 세계를 창조하려는 행위가 아닐까?>
굳센 사나이, 위대한 에고이스트 조르바.
<“나는 오직 조르바, 나만 믿어요, 조르바가 딴 놈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요. 조르바도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건, 내가 아는 것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수 있는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게요.”>
<“두목 겁나는게 뭔고 하니 늙는 것이라오. 죽는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늙는다는건 창피한 노릇입니다,”>
생(生)이란 그에게 매순간 경이로운 관능, 바로 그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반라의 몸으로 문께에 선 조르바는 ‘나’에게 경이롭게 외친다.
<“저게 무엇이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무어라고 부르지요?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건 처음이오!”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르바 혹 돌아버린건 아닌가요?”“무얼 비웃고 있어요? 당신 눈에는 안보이는가요? 두목, 봐요 저 모든 기적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술 말이오.”그는 밖으로 달려나와 봄철 망아지처럼 풀밭을 구르고 춤을 추었다. 해가 떠올랐다. 나는 손바닥을 펴고 그 온기를 받았다. 오르는 수액..부풀어 오르는 젖가슴..나무처럼 영그는 영혼,, 영혼과 육체도 같은 물질로 빚어졌음을 실감할수 있었다.>
<사면(斜面)을 내려가면서 조르바가 돌멩이를 걷어차자 돌멩이는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조르바는 그런 놀라운 광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돌을 바라보면서 가벼운 놀라움의 표정을 지었다. “두목 봤어요?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태초에 이 땅에 나타났던 사람들처럼 조르바에게 우주는 진하고 강력한 환상이었가. 별은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져 갔고 바다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부서졌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동물과 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어린 아이처럼 조르바는 모든 사물과 생소하게 만난다.
그는 영원히 놀라고, 왜, 어째서, 하고 캐묻는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다가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그에게는 물, 여자, 별, 빵이 신비스러운 원시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고 태초의 회오리바람이 다시 대기를 휘젓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여자를 봐도 그는 말을 멈추고 큰일이나 난 듯이 말한다. “대체 저 신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그는 묻고 또 묻는다. “여자란 무엇인가요? 이렇게 설레이게 하는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이 빨간 물이 대체 뭐지요? 늙은 가지에 새가지가 뻗으면 처음엔 아무것도 없지요. 그리고 거기에 처음 달리는 건 쓰디 쓴 열매 뿐이지요, 시간이 지나고 태양이 이 열매를 익히면 마침내 꿀처럼 달콤한 물건이 되지요. 이게 포도라는 겁니다, 이 포도를 짓이겨, 우리가 술고래 성 요한의 날 열어보면, 아! 포도주가 되어있지 뭡니까, 이런 기적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빨간 물을 마시면, 오, 보라, 간덩이가 몸이 주체할수 없이 커지고, 하느님께 시비를 겁니다. 두목, 말해봐요.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
디오니서스 조르바.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즐거움.
그 즐거움이 있음으로 인생이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다.
밥과 고기와 술은 바로 정신(情神)을 만드는 원료.
조르바는 기쁨에 겨워 춤을 춘다.
<“춤춥시다.”“싫어요.”“나 혼자 출테니까 멀찌감치 떨어져 앉으시오, 받아버리지 않게.”춤추는 조르바, 그의 늙은 육신 속에 그 몸을 들어다 어둠 속에 유성처럼 던져 버리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영혼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 절망적인 생각들을 춤으로 출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조르바는 박자를 맞추느라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브라보. 젊은이! 종이와 잉크는 지옥으로나 보내버려! 상품, 이익 좋아하시네. 광산, 인부, 수도원 좋아하시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배우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소. 그 이야기를 춤으로 보여 드리지.”>
<나는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주위세계에 함몰된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모든 것, 여자와 빵과 물과 고기와 잠들이 유쾌하게 육화하여 조르바가 된데 탄복했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그 날램, 긍지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 그의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은 모래 위에다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조르바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바다와 여자와 술과 그리고 힘든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던져 넣고 하느님과 악마를 두려워 하지 말지어다. 그것이 젊음이란 것이다!>
<“조르바 가엾은 부불리나 여사를 잘도 잊어버리시는군요.”“두목, 새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스스로에게 말하지요. 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 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 밖에는. 키스나 싫컷 하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모하는 과부를 찾아가서 쾌락을 나눈다.
<다음 날. 나는 무아지경에서 내 외부와 내부를 기웃거리며 이 생명의 기적에 경탄했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무엇이 일어났다는 것인가? 어째서 우리의 손과 발과 배가 이처럼 완벽하게 세계와 조화하는 것인가. 나는 부처의 원고를 폈다. 원고는 완성되어 있었다. 최후의 부처는 꽃피는 나무 밑에 누워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다섯가지 요소, 흙 물 불 공기 정신에게 해제를 명하고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조르바에게 복 있을진저, 조르바는 내 내부에서 떨고있는 추상적인 관념에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살아있는 육체를 부여했다. 조르바가 없으면 나는 다시 떨게 되리라.>
<더 이상 나는 괴롭히던 이런 이미지에 시달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뛰어넘은 터였다. 부처에 대한 내 예배는 완성된 셈이었다. 나 역시 손을 들어 부처에게 해제를 명한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언어와 언어의 도액(度厄-제도의 올가미)하는 능력을 빌려 부처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해제했다. 나는 마지막 구절을 원고에다 휘갈기고 한 소리를 지르고 나서 붉은 연필로 내 이름을 큼직하게 썼다. 그로써 부처와 결별이었다.>
<언어에 감금되고 언어에 의해 타락한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대지의 속삭임과 입놀림 그리고 미동(微動)까지 놓치지 않고 감청할수 있었고, 비가 내리면서 씨앗이 불어 터지는 소리도 들을수 있었다, 나는, 하늘과 대지를 남자와 여자처럼 맞붙어 아이를 낳던 시절의 하늘과 대지로 느낄수 있었다.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해안을 덮쳐 핥아 갈증을 달래는 바닷소리도 들을수 있었다. 나는 행복했고ㅡ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행복을 체험하면서 그것을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바다에 발목을 담구고 존재의 심연에서 나는 소리쳤다. 유아독존! 오, 대지여! 나는 그대의 막내, 그대 젖줄을 빠는 나는 그대를 놓치지 않으리라. 그대는 다만 한순간의 삶을 내게 베풀겠지만 그 한순간이 젖이 되고 나는 그 젖을 빨 것이오. 나는 몸을 떨었다. ‘영원’이라는, 신인동감(神人同感)의 언어가 나를 잡아 먹을 것 같았다.>
‘나’는 고승(高僧)은 어림없는 일개 잡놈.
조르바에 의하여 난해한 화두(話頭)를 풀고서 주장자(拄杖子)로 법당의 마루를 내리치면서 깨친 자의 우렁찬 할(喝)!소리가 내게 들리는 듯 하다.
<다시 한번 내 가슴은 고뇌로 가득찼다. 세계란 무엇일까? 나는 궁금했다. 세상의 목적이란 무엇이며 우리 한순간의 목숨이 어떻게 하여 세상의 목적을 이룰수 있을까? 조르바에 따르면 인간이나 사물의 목적은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정신을 창출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한 차원을 높여서 보면 똑같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왜? 무슨 목적으로? 육체가 와해되어 버린 뒤에도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의 잔재가 남아 있을수 있을까?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영원불멸을 그리는 우리의 끝없는 염원은 우리가 영원불멸하다는 사실에 유래한 것이 아니라 짧디짧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 영원불멸한 것을 섬기는데서 유래한 것은 아닐까?>
<그는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쩔수 있다는거요? 죽이기 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테니까. 더 이상 당신은 필요없어요!>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 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조르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날 눈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 불어닥친 굉장한 강풍, 내가 자고있는 오두막, 나는 진작 이걸 비끄러매고 필요한 곳을 보강해 두었지요. 나는 불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것보게 아무리 그래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수 없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거니까. 내 불을 끌수도 없어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되지.”조르바의 이 몇마디 말에서 나는 인간이 취해야 할 도리와 강렬하면서도 맹목적인 필연에 부딪쳤을 때 우리가 맞서 대적할 어조를 감득했다.>
관념, 공포, 소망.....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 부자유(不自由)를 향하여 조르바처럼 호령하였다.
<내 영혼에는 들어오지 못해.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수도 없어. 나를 뒤엎다니. 어림없는 수작!>
그는 자유함을 획득하였다.
실존인물이었다는 조르바.
내 내부에서도 실존인물일 터인 조르바.
그러나 나는 그를 해방 시킬수가 없다.
나의 조르바는 필경 나와 함께 묻히거나 태워 없어질 것이다.
아, 나의 자유는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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