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하여 -3-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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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에 대하여] -3-

 

8.

 

‘인간실격’은 자서전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자기주장'이나 '자기변명'의 기록이 아니다.

주인공 ‘오바 요조’는 분명히 ‘다자이 오사무’의 한 페르소나임을 부정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사무가 자신의 자의식을 극단적으로 변용시켜서 창조한 기괴한 퍼스널리티 일 뿐이다.

오사무는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데포르마숑된 인간의 실존적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실격’에서.

'오바 요조'의 불안과 공포.

 

<나의 행복의 관념과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복의 관념이 전혀 다른 듯한 불안, 나는 그 불안 때문에 밤마다 전전긍긍하며 발광 할 뻔한 일 조차 있습니다.>

 

<나는 세계가 일순간에 지옥의 업화에 휩싸여 타오르는 것을 눈앞에 보는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와악! 하고 외치며 발광할 것 같은 기미를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

 

어릿광대짓, 현실착시, 남자첩등으로의 여자편력, 현실부적응, 자살충동, 마약, 술....

‘오바 요조’를 텍스트로 하여 정신분석한 논문을 읽은적이 있는데 대충 이런 얘기였다.

 

<어린시절 모성결핍으로 불안과 공포가 형성되고, 권위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의 냉담함으로 인해 소극성과 열등감을 갖게 된다. 게다가 하인과 하녀들로 인해 인간 불신감마저 겹치게 되자 요조의 공포는 더욱 심화되고 구체화된 형태로 형성 발전된다. 그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술과 담배를 하고 매춘부를 찾아 다녔으며, 나중에는 자살실패에 이어 모르핀에 중독이 되기에 이른다.>

 

다자이 오사무의 여자들.

그에게는 언제나 여자가 있었다.

오사무의 어떤 면모가 여자에게 그토록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지,

쾌락을 적극적으로 탐하려 여자를 찾지는 않았지만, 오사무는 확실히 여심(女心)을 자극하는 타입의 사나이다.

긴자의 호스티스 ‘타나베 아츠미’는 오사무와 서너번 만난 사이임에도 오사무의 동반자살 제의에 기꺼이 함께 하여 자신만이 죽었다.

 

아래는 모두 ‘인간실격’을 베껴 쓴 것이다.

 

<매춘부가 편합니다. 나에게는 매춘부라는 것이,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나 광인처럼 보이고, ....동류의 친화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나에게 언제나 그 매춘부들은 거북하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의를 보였습니다. 아무 타산도 없는 호의, 강매가 아닌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나로서는 그 백치나 광인 같은 매춘부들에게서 마리아의 원광을 실제로 본 밤도 있었던 것입니다.>

 

<찻집 아가씨한테서 유치한 편지를 받은 기억도 있고, 사쿠라기 마을에서 20살 정도 된 이웃집 장군의 딸이..., 쇠고기를 먹으러 가면 내가 묵묵히 있어도 그 집의 하녀가...., 단골 담배 가게의 딸로부터 건네 받은 담배갑 속에......,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가씨가 손수 만든 듯한 인형을......>

 

<여자에게 꿈꾸게 하는 분위기가 자신의 어딘가에 감돌고 있는 것.>

 

<당신을 보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뭔가 해주고 싶어서 안달할 거야, 언제나 흠칫거리며, 그리고 익살꾼인걸. 가끔 혼자서 몹시 침울해 있지만, 그 모습이 더욱 여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해>

 

오사무의 어머니는 병약하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정을 거의 느끼지 못한채 숙모의 마른 젖을 빨며 하녀들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머니와도 나는 친해질 수 없었다, 유모의 젖으로 자라 숙모의 품에서 성장한 나는 소학교 2,3학년 때까지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추억->

 

<나는 향락을 위해서 매춘부를 산 적이 하룻밤도 없다. 어머니를 찾으러 간 것이다, 젖가슴을 찾으러 간 것이다 –휴먼 로스트->

 

오사무에게는 확실히 ‘어머니의 부재’와 ‘모성 결핍에 대한 보상갈구’의 측면이 없지 아니하였다,

 

8.

 

인간실격.

앞에서 나는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고 하였고, 주인공 ‘오바 요조’에다 곧바로 오사무를 대입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잘 못 말하였다.

‘밝음(구원)’과 ‘어둠(절망)’의 교착은 오사무 문학의 이중성(二重性)이다.

많은 소설들은 ‘객관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대체로 밝은 쪽이지만 ‘자의식적 체취’짙은 것들은 지독하게 어둡다.

오사무가 자신의 이야기를 절망적인 톤으로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인간실격’이다.

‘오바 요조’는 바로 오사무 자신이며 ‘인간실격’은 오사무의 고백록임에 틀림없다.

오사무가 자신의 자아(自我)를 패러디하여, 자의식(自意識)을 확대재생산하여 창출한 인물이 ‘오바 요조’다.

'인간실격'에는 죽음을 염두에 둔 자가 토해내는 인간성의 어두운 진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실격’은 가히 고백문학의 정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어느 수필에선가 이렇게 썼다.

 

<루소의 참회록은 상대가 이웃이라서 추하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상대가 신(神)이라서 좀 낫지만 저속하다. 진짜배기 인간이 행할수 있는 지고지순의 참회의 형식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신의 아들의 무언(無言)의 엎드린 모습이다.>

 

진짜배기 참회의 고백이란 언어(言語)에 있지 않다는 말인데.

침묵의 속내를 찍는 x-ray라도 있으면 모를까, 언어없이 침묵을 어떻게 들여다 볼수 있나.

오사무는 이런 멋진 아포리즘도 남겼구나.

 

<울면서 X선은 말하였다, 나한테는 당신의 위와 골격만이 보이고, 당신의 하얀 피부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슬픈 장님입니다. -수필 중에서->

 

오사무가 구사하는 유머러스한 섬세함, 달콤한 퇴폐, 나른한 음란, 현란한 감각, 고결한 기품따위의 문학은 그가 아니라도 모모한 작가들에게서 얼마든지 얻어 읽을수 있다.

그러나 자의식에 저항하고 부끄러움에 몸부림 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 절망적인 어두움은 오사무에게 유니크한 색감이다.

같은 일본 문학가라도 오사무의 자살은 ‘미시마 유키오’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과는 얼마나 느낌이 다른가.

살면서 절망과 허무와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 있으랴.

오사무의 그것들은, 적어도 나의 무엇(?)에게는 익숙한 색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종족이라는 것이다.

 

<자아의 불꽃에 소진되는 이상팽창된 영혼>

오사무는 세상과 조화(不調)롭지 못하였고 생활이라는 것에는 지독하게 서툰 사람이었다.

세상에 대하여 도무지 뻔뻔할줄을 몰랐다.

그의 천재성은 과잉된 자의식에 줄곧 침식(侵蝕) 당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생명의 부조리(不條理)함에 마냥 답답해 하였다.

 

그는 헐떡였다.

세상과의 화해(和解), 병든 자아의 치유(治癒), 영혼의 구원(救援)을 찾아 헤맸다.

어릿광대 시늉,. 화류계 출입,. 여자들,. 가문과의 의절,. 여러 번의 자살시도,. 프롤레타리아 문학.. 좌익운동,. 술.. 마약(한때는 약물중독으로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하였다)

 

당디즘과 니힐리즘의 교착(交錯).

열등감과 우월의식, 자학(自虐)과 자존(自尊), 피로함과 생기(生氣)로움, 퇴폐와 고결함, 음란함과 도덕성,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오사무에게는 교차적으로 출몰(出沒)하였다.

그것은 구원을 향한 몸부림이거나 절망의 몸짓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생간을 쪼는 것은 독수리이지만 다자이 오사무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쪼고 있다. -쓰시마 미치코->

 

철저한 자기부정과 자기파괴.

오사무는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을 앓다 죽었다.

‘절망’을 앓다가 ‘절망’으로 죽은 것이다,

‘나오지’와 ‘오바 요조’의 절망과 허무(虛無).

거기가 바로 오사무의 본령(本領)이다.

 

오사무에게 문학은 필경 구원(救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어떤 쓸쓸한 배출구를 발견했다. 창작이었다. 작가가 되자, 작가가 되자. 나는 남몰래 소망했다 –추억->

 

그렇다면 죽기 몇 달 전 유서를 남기듯, 자살을 전제로 쓴 소설 ‘인간실격’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자기주장일까, 그리하여 자기변명일까.

 

<수치스러운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나에게는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가늠할 길이 없었습니다.>

 

현실적 생활을 영위할만한 능력도 재주도 갖지 못한 ‘오바 요조’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 위협적이고 미신처럼 들렸고,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말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그 어두컴컴한 방의 말석에 추위에 덜덜 떠는 생각으로 입에 밥을 조금씩 날라다 밀어 넣고, 인간은 어째서 하루에 3번씩 밥을 먹는 것일까, 참으로 모두 엄숙한 얼굴로 먹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으로, 가족이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하여 어두컴컴한 한방에 모여, ......온 집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영혼들에게 기도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정거장의 브릿지(육교)를 선로를 건너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상당히 세련된 유희이고, 그것은 철도의 서비스 중에서도 가장 센스있는 서비스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나는 어린 시절 그림책에서 지하철도라는 것을 보고, 이것 역시 실리적인 필요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고 지상의 차를 타기보다는 지하의 차를 타는 편이 색다르고 재미있는 놀이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이불, 이불깃, 베개카바 등이 실용품이라는 사실을 20살이 되어서야 깨닫고 인간의 알뜰함에 암연하고 슬픈 생각을 했습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감각을 갖고 있구나, ‘오바 요조’

나 또한 그러하였으니 부끄러워 하지 말라.

흐음, 오사무는 생활을 살아서는 아니 될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가난이나 전쟁이나 피난같은 것들은 없어야 했다.

부잣집 막내 아들로 구름똥이나 싸면서 탱자탱자하게.

‘당디’의 삶,

탐미적인 작품이나 쓰면서.

 

9.

 

<나는 순수를 동경했다. 무보수의 행위. 전혀 이기심이 없는 삶, 그렇지만 그건 지난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홧술을 마실 뿐이었다. 내가 가장 증오한 것은 위선이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묘하게 완고히 믿어버린 까닭이다. 이 말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을 학대하고서는 어떻게 남을 사랑하랴라는 말이다. 술을 마신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자살밖에는 없다,-수필 중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사무는 예수의 말씀을 <묘하게 완고히> 믿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인간성의 보편(普遍)이란 이기심 따위가 주인이 되는 그런 것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스스로 불편하지만 신뢰할 수밖에 없는 <기묘함으로>, 생래적(生來的) 본성의 <완고함으로> 이기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삶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닌 ‘내면의 순수함’의 불가피성을 오사무는 인식하고 있었으며, 세상의 본질은 필경 그러할 것으로 낙관하였거나 희망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지닌 내면의 척도로 세상을 인식하여 처세(處世)코자 하였다.

 

오사무에게 인간이란 난해한 것이었으며 세상이란 기묘한 것이었다.

유아기를 벗어나, 슬슬 지각(知覺)이 생기면서부터 느껴지는 세상이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경험하는 인간성(가문과 부모형제를 비롯하여)은 그가 느끼고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기심, 강자의 군림과 착취, 약자의 비굴, 위선(僞善)과 같이 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인간성의 그런 속성(屬性)의 편만함에 그는 당황하였다.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굳세게들 살아가는 사람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당함과 비참함 속에서 죄의식이나 모멸감없이 당당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낯설고 이상하였다.

그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무슨 근거로 저리도 당당하게 희노애락(喜怒哀樂)의 포즈를 취할수 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신비한 힘을 사람들은 지니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불청객인양 이 세상에 미안하였고 사람들이 두려웠고 생활이라는게 무서웠다.

줄곧 이방인의식(異邦人意識)과 두려움과 수치심은 ‘세상을 사는 오사무’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아, 이 세상은 나와는 다른 곳, 내가 태어날 곳이 아니었구나!’

 

<결국 나는 인간의 영위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 자신의 행복과 관념과 온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관념이 전혀 딴판으로 어긋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불안, 거의 발광상태에 이를 것 같은. -인간실격->

 

<이웃사람의 고통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밥을 먹기 위해 사는지, 돈 때문에 사는지. -인간실격->

 

<나는 화를 내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 동물 야수의 본성을 보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섭다. 이를테면 소가 풀밭에 조용히 누워 있다가 돌연 꼬리를 치면서 뱃가죽에 붙어있는 등에를 후러쳐 죽이는 것 같은, 갑자기 인간의 무서운 정체를 분노에 의해서 폭로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언제나 머리카락이 거꾸로 서는듯한 전율을 느끼며, 이 본성도 인간이 살아가는 자격의 한가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실격->

 

<저는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는 만족스럽게 말도 하지 못할 만큼 나약한 성격이고, 따라서 생활력도 제로에 가깝다고 스스로 느끼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염세주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삶에 그다지 의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생활의 공포에서 도망치고 싶다,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싶다는 등의 일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온 성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성격이 저로 하여금 문학에 뜻을 두게 한 동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을 떠올리다보면 저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제 문학관이나 작품이 술에 좌우될 것이라 여겨지지는 않지만, 단지 술은 제 생활을 상당히 흔들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사람을 만나도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저렇게도 말했으면 좋았을 걸 하며 분해합니다. 언제나 사람과 만날 때면 대부분은 어질어질 현기증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성격이기에 끝내 술을 마시게 됩니다. 잠자리에 들어서 여러 가지로 그 개선책을 기도(企圖)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죽지 않으면 고치지 못할 정도로까지 되어버린 듯합니다. -수필 중에서->

 

어린 시절 그는 늘 타인이 자기에게 원하는바 그 인상을 심어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인간이 두려워 피에로가 되어서 가장하는 미소.

‘기묘하게 찡그리며 웃고 있는 피에로의 얼굴’

 

‘다자이 오사무’의 종족임을 표방하는 나, 어린 ‘오바 요조’의 슬픈 익살연기에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가슴이 쓰라렸다.

어느 평론가가 말하였다.

 

<그것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하나의 수단이며, 믿을 수 없고 두렵기만 한 인간에 대한 사랑할 의지를 버리지 않으려는 어린 요조의 ‘익살의 윤리’>라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익살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나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인간을 아무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익살이라는 한 줄로 겨우 인간과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번 성공할 수 있을 정도의 위기일발의 진땀나는 써비스였습니다. -인간실격->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울고 있는 ‘내면아이’, 화려하지만 어색한 피에로가 된 ‘외면아이’의 웃음,

‘다자이 오사무’의 그 웃음.

슬픈 위악.

 

<이 남자는 공포심보다는 환희를 느끼고 있는 듯했습니다. 몸 전체에서 짜릿하게 느껴지는 강렬한 기쁨에 온몸이 떨리는 듯했습니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 몽매함, 아집, 인간 모욕... 예술이란 게 광기가 섞인 냉혹함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남자는 냉정한 사진사 같습니다. 예술가라는 사람은 역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예술가의 가슴에는 기묘하게 생긴, 냄새나는 벌레가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벌레를 사탄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여자의 결투->

 

 

-계속-

 

 

[[사양, 인간실격]] -3-

 

 

 

8.

 

‘인간실격’은 자서전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작품’이다.

'자기주장'이나 '자기변명'의 기록이 아니다.

주인공 ‘오바 요조’는 분명히 ‘다자이 오사무’의 한 페르소나임을 부정할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사무가 자신의 자의식을 극단적으로 변용시켜서 창조한 기괴한 페르소나일 뿐이다.

오사무는 자신의 내면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데포르마숑된 인간의 실존적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인간실격’에서.

'오바 요조'의 불안과 공포. 

 

<나의 행복의 관념과 세상 모든 사람들의 행복의 관념이 전혀 다른 듯한 불안, 나는 그 불안 때문에 밤마다 전전긍긍하며 발광할 뻔한 일 조차 있습니다.>

<나는 세계가 일순간에 지옥의 업화에 휩싸여 타오르는 것을 눈앞에 보는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와악! 하고 외치며 발광할 것 같은 기미를 필사적으로 억눌렀습니다.>

 

어릿광대짓, 현실착시, 남자첩등으로의 여자편력, 현실부적응, 자살충동, 마약, 술....

 

‘오바 요조’를 텍스트로 하여 정신분석한 논문을 읽은적이 있는데 대충 이런 얘기였다.

<어린시절 모성결핍으로 불안과 공포가 형성되고, 권위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의 냉담함으로 인해 소극성과 열등감을 갖게 된다. 게다가 하인과 하녀들로 인해 인간 불신감마저 겹치게 되자 요조의 공포는 더욱 심화되고 구체화된 형태로 형성 발전된다. 그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고자 술과 담배를 하고 매춘부를 찾아 다녔으며, 나중에는 자살실패에 이어 모르핀에 중독이 되기에 이른다.>

  

다자이 오사무의 여자들.

그에게는 언제나 여자가 있었다.

오사무의 어떤 면모가 여자에게 그토록 연민을 자아 내게 하는지,

쾌락을 적극적으로 탐하려 여자를 찾지는 않았지만, 오사무는 확실히 여심(女心)을 자극하는 타입의 사나이다.

긴자의 호스티스 ‘타나베 아츠미’는 오사무와 서너번 만난 사이임에도 오사무의 동반자살 제의에 기꺼이 함께 하여 자신만이 죽었다.

  

아래는 모두 ‘인간실격’을 베껴 쓴 것이다.

 

<매춘부가 편합니다. 나에게는 매춘부라는 것이,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나 광인처럼 보이고, ......동류의 친화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나에게 언제나 그 매춘부들은 거북하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의를 보였습니다. 아무 타산도 없는 호의, 강매가 아닌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나로서는 그 백치나 광인 같은 매춘부들에게서 마리아의 원광을 실제로 본 밤도 있었던 것입니다.> 

<찻집 아가씨한테서 유치한 편지를 받은 기억도 있고, 사쿠라기 마을에서 20살 정도 된 이웃집 장군의 딸이......, 쇠고기를 먹으러 가면 내가 묵묵히 있어도 그 집의 하녀가......, 단골 담배 가게의 딸로부터 건네 받은 담배갑 속에......,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가씨가 손수 만든 듯한 인형을......> 

<여자에게 꿈꾸게 하는 분위기가 자신의 어딘가에 감돌고 있는 것.> 

<당신을 보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뭔가 해주고 싶어서 안달할 거야, 언제나 흠칫거리며, 그리고 익살꾼인걸.가끔 혼자서 몹시 침울해 있지만, 그 모습이 더욱 여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해>

  

오사무의 어머니는 병약하였다.

그레서 어머니의 정을 거의 느끼지 못한채 숙모의 마른 젖을 빨며 하녀들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머니와도 나는 친해질 수 없었다, 유모의 젖으로 자라 숙모의 품에서 성장한 나는 소학교 2,3학년 때까지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추억-> 

<나는 향락을 위해서 매춘부를 산 적이 하룻밤도 없다. 어머니를 찾으러 간 것이다, 젖가슴을 찾으러 간 것이다 –휴먼 로스트->

 

오사무에게는 확실히 ‘어머니의 부재’와 ‘모성 결핍에 대한 보상갈구’의 측면이 없지 아니하였다,

 

8.

 

인간실격.

앞에서 나는 이 소설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 아니라고 하였고, 주인공 ‘오바 요조’에다 곧바로 오사무를 대입하여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잘 못 말하였다.

‘밝음(구원)’과 ‘어둠(절망)’의 교착은 오사무 문학의 이중성(二重性)이다.

많은 소설들은 ‘객관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대체로 밝은 쪽이지만 ‘자의식적 체취’짙은 것들은 지독하게 어둡다.

오사무가 자신의 이야기를 절망적인 톤으로 얘기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인간실격’이다.

‘오바 요조’는 바로 오사무 자신이며 ‘인간실격’은 오사무의 고백록임에 틀림없다.

오사무가 자신의 자아(自我)를 패러디하여, 자의식(自意識)을 확대재생산하여 창출한 인물이 ‘오바 요조’다.

'인간실격'에는 죽음을 염두에 둔 자가 토해내는 인간성의 어두운 진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실격’은 가히 고백문학의 정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어느 수필에선가 이렇게 썼다.

 

<루소의 참회록은 상대가 이웃이라서 추하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은 상대가 신(神)이라서 좀 낫지만 저속하다. 진짜배기 인간이 행할수 있는 지고지순의 참회의 형식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신의 아들의 무언(無言)의 엎드린 모습이다.>

 

진짜배기 참회의 고백이란 언어(言語)에 있지 않다는 말인데.

침묵의 속내를 찍는 x-ray라도 있으면 모를까, 언어없이 침묵을 어떻게 들여다 볼수 있나.

오사무는 이런 멋진 아포리즘도 남겼구나.

<울면서 X선은 말하였다, 나한테는 당신의 위와 골격만이 보이고, 당신의 하얀 피부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슬픈 장님입니다. -수필 중에서->

 

오사무가 구사하는 유머러스한 섬세함, 달콤한 퇴폐, 나른한 음란, 현란한 감각, 고결한 기품따위의 문학은 그가 아니라도 모모한 작가들에게서 얼마든지 얻어 읽을수 있다.

그러나 자의식에 저항하고 부끄러움에 몸부림 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 절망적인 어두움은 오사무에게 유니크한 색감이다.

같은 일본 문학가라도 오사무의 자살은 ‘미시마 유키오’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자살과는 얼마나 느낌이 다른가.

살면서 절망과 허무와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 있으랴.

오사무의 그것들은, 적어도 나의 무엇(?)에게는 익숙한 색감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자이 오사무'의 동족이라는 것이다.

 

<자아의 불꽃에 소진되는 이상팽창된 영혼>

오사무는 세상과 조화(不調)롭지 못하였고 생활이라는 것에는 지독하게 서툰 사람이었다.

세상에 대하여 도무지 뻔뻔할줄을 몰랐다.

그의 천재성은 과잉된 자의식에 줄곧 침식(侵蝕) 당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생명의 부조리(不條理)함에 마냥 답답해 하였다.

 

그는 헐떡였다.

세상과의 화해(和解), 병든 자아의 치유(治癒), 영혼의 구원(救援)을 찾아 헤맸다.

어릿광대 시늉,. 화류계 출입,. 여자들,. 가문과의 의절,. 여러 번의 자살시도,. 프롤레타리아 문학.. 좌익운동,. 술.. 마약(한때는 약물중독으로 정신병원에 갇히기도 하였다)

 

당디즘과 니힐리즘의 교착(交錯).

열등감과 우월의식, 자학(自虐)과 자존(自尊), 피로함과 생기(生氣)로움, 퇴폐와 고결함, 음란함과 도덕성,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오사무에게는 교차적으로 출몰(出沒)하였다.

그것은 구원을 향한 몸부림이거나 절망의 몸짓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생간을 쪼는 것은 독수리이지만 다자이 오사무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쪼고 있다. -쓰시마 미치코->

 

철저한 자기부정과 자기파괴.

오사무는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을 앓다 죽었다.

‘절망’을 앓다 ‘절망’으로 죽은 것이다,

‘나오지’와 ‘오바 요조’의 절망과 허무(虛無).

거기가 바로 오사무의 본령(本領)이다.

 

오사무에게 문학은 필경 구원(救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어떤 쓸쓸한 배출구를 발견했다. 창작이었다. 작가가 되자, 작가가 되자. 나는 남몰래 소망했다 –추억->

 

그렇다면 죽기 몇 달 전 유서를 남기듯, 자살을 전제로 쓴 소설 ‘인간실격’은 그에게 무엇이었을까.

자기주장일까, 그리하여 자기변명일까.

 

<수치스러운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나에게는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가늠할 길이 없었습니다.>

 

현실적 생활을 영위할만한 능력도 재주도 갖지 못한 ‘오바 요조’

 

<밥을 먹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 위협적이고 미신처럼 들렸고,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말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그 어두컴컴한 방의 말석에 추위에 덜덜 떠는 생각으로 입에 밥을 조금씩 날라다 밀어 넣고, 인간은 어째서 하루에 3번씩 밥을 먹는 것일까, 참으로 모두 엄숙한 얼굴로 먹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으로, 가족이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하여 어두컴컴한 한방에 모여, ......온 집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영혼들에게 기도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정거장의 브릿지(육교)를 선로를 건너가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상당히 세련된 유희이고, 그것은 철도의 서비스 중에서도 가장 센스있는 서비스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나는 어린 시절 그림책에서 지하철도라는 것을 보고, 이것 역시 실리적인 필요에서 고안된 것이 아니고 지상의 차를 타기보다는 지하의 차를 타는 편이 색다르고 재미있는 놀이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이불, 이불깃, 베개카바 등이 실용품이라는 사실을 20살이 되어서야 깨닫고 인간의 알뜰함에 암연하고 슬픈 생각을 했습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감각을 갖고 있구나, ‘오바 요조’

나 또한 그러하였으니 부끄러워 하지 말라.

흐음, 오사무는 생활을 살아서는 아니 될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가난이나 전쟁이나 피난같은 것들은 없어야 했다.

부잣집 막내 아들로 구름똥이나 싸면서 탱자탱자하게.

‘당디’의 삶,

탐미적인 작품이나 쓰면서.

 

9.

  

<나는 순수를 동경했다. 무보수의 행위. 전혀 이기심이 없는 삶, 그렇지만 그건 지난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홧술을 마실 뿐이었다. 내가 가장 증오한 것은 위선이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묘하게 완고히 믿어버린 까닭이다. 이 말은 결국 자신을 사랑하라, 자신을 학대하고서는 어떻게 남을 사랑하랴라는 말이다. 술을 마신다. 이런 경우에는 결국 자살밖에는 없다,-수필 중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사무는 예수의 말씀을 <묘하게 완고히> 믿고 있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인간성의 보편(普遍)이란 이기심 따위가 주인이 되는 그런 것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스스로 불편하지만 신뢰할 수밖에 없는 <기묘함으로>, 생래적(生來的) 본성의 <완고함으로> 이기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삶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지닌 ‘내면의 순수함’의 불가피성을 오사무는 인식하고 있었으며, 세상의 본질은 필경 그러할 것으로 낙관하였거나 희망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지닌 내면의 척도로 세상을 인식하여 처세(處世)코자 하였다.

 

오사무에게 인간이란 난해한 것이었으며 세상이란 기묘한 것이었다.

유아기를 벗어나, 슬슬 지각(知覺)이 생기면서부터 느껴지는 세상이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경험하는 인간성(가문과 부모형제를 비롯하여)은 그가 느끼고 있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기심, 강자의 군림과 착취, 약자의 비굴, 위선(僞善)과 같이 착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인간성의 그런 속성(屬性)의 편만함에 그는 당황하였다.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굳세게들 살아가는 사람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당함과 비참함 속에서 죄의식이나 모멸감없이 당당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낯설고 이상하였다.

그는 생각하였을 것이다.

‘무슨 근거로 저리도 당당하게 희노애락(喜怒哀樂)의 포즈를 취할수 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신비한 힘을 사람들은 지니고 있는 것일까’

불청객인양 이 세상에 미안하였고 사람들이 두려웠고 생활이라는게 무서웠다.

줄곧 이방인의식(異邦人意識)과 두려움과 수치심은 ‘세상을 사는 오사무’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아, 이 세상은 나와는 다른 곳, 내가 태어날 곳이 아니었구나!’

 

<결국 나는 인간의 영위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 자신의 행복과 관념과 온 세상 사람들의 행복과 관념이 전혀 딴판으로 어긋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불안, 거의 발광상태에 이를 것 같은. -인간실격->

 

<이웃사람의 고통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밥을 먹기 위해 사는지, 돈 때문에 사는지. -인간실격->

 

<나는 화를 내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 동물 야수의 본성을 보는 것 같아서 너무 무섭다. 이를테면 소가 풀밭에 조용히 누워 있다가 돌연 꼬리를 치면서 뱃가죽에 붙어있는 등에를 후러쳐 죽이는 것 같은, 갑자기 인간의 무서운 정체를 분노에 의해서 폭로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언제나 머리카락이 거꾸로 서는듯한 전율을 느끼며, 이 본성도 인간이 살아가는 자격의 한가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을 느꼈던 것입니다. -인간실격->

 

<저는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는 만족스럽게 말도 하지 못할 만큼 나약한 성격이고, 따라서 생활력도 제로에 가깝다고 스스로 느끼며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히려 염세주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삶에 그다지 의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 생활의 공포에서 도망치고 싶다,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싶다는 등의 일만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온 성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저의 성격이 저로 하여금 문학에 뜻을 두게 한 동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저것 생각을 떠올리다보면 저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제 문학관이나 작품이 술에 좌우될 것이라 여겨지지는 않지만, 단지 술은 제 생활을 상당히 흔들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사람을 만나도 만족스럽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걸, 저렇게도 말했으면 좋았을 걸 하며 분해합니다. 언제나 사람과 만날 때면 대부분은 어질어질 현기 증이 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성격이기에 끝내 술을 마시게 됩니다. 잠자리에 들어서 여러 가지로 그 개선책을 기도(企圖)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죽지 않으면 고치지 못할 정도로까지 되어버린 듯합니다. -수필 중에서->

 

어린 시절 그는 늘 타인이 자기에게 원하는바 그 인상을 심어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인간이 두려워 피에로가 되어서 가장하는 미소.

‘기묘하게 찡그리며 웃고 있는 피에로의 얼굴’

 

‘다자이 오사무’의 종족임을 표방하는 나, 어린 ‘오바 요조’의 슬픈 익살연기에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가슴이 쓰라렸다.

어느 평론가가 말하였다.

<그것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하나의 수단이며, 믿을 수 없고 두렵기만 한 인간에 대한 사랑할 의지를 버리지 않으려는 어린 요조의 ‘익살의 윤리’>라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익살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나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지만, 그런데도 인간을 아무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는 익살이라는 한 줄로 겨우 인간과 이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미소를 지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번 성공할 수 있을 정도의 위기일발의 진땀나는 써비스였습니다. -인간실격->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울고 있는 ‘내면아이’, 화려하지만 어색한 피에로가 된 ‘외면아이’의 웃음,

‘다자이 오사무’의 그 웃음.

슬픈 위악.

 

<이 남자는 공포심보다는 환희를 느끼고 있는 듯했습니다. 몸 전체에서 짜릿하게 느껴지는 강렬한 기쁨에 온몸이 떨리는 듯했습니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 몽매함, 아집, 인간 모욕... 예술이란 게 광기가 섞인 냉혹함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요? 남자는 냉정한 사진사 같습니다. 예술가라는 사람은 역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예술가의 가슴에는 기묘하게 생긴, 냄새나는 벌레가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벌레를 사탄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여자의 결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