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作-
***동우***
2013년 11월 29일
1962년 발표된 박경리 (朴景利, 1926~2008)의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
1963년 이듬해 유현목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김동원, 황정순, 이민자, 엄앵란, 최지희, 박노식, 주선태, 신성일등이 출연)
그 영화를 유튜브로 다시 보았다. 물론 공짜로. (화질이 썩 좋을리없는 흑백영상, 그래도 얼마나 놀라운 세상인가)
아슴한 기억 속의 인물들이 되살아나 내 옛 감성을 자극하였고, 간밤에 책장에서 박경리의 소설을 꺼내, 밤을 새면서 다시 읽었다.
좀전 책장의 대미(大尾)를 덮으면서 눈꼬리에 번지는 눈물을 훔쳤다.
아, 박경리가 내게 주는 여실한 감동.
소설의 재미와 감동은 이러해야 하느니.
이 소설의 모두(冒頭)를 여는 소제목은 '통영(統營)'과 '비명(悲鳴)'이다.
통영과 비명이라는 두 어휘에는 의미심장한 알레고리가 있음직하다.
‘통영'이라는 고장은 김약국이라는 한 가족을 조감(鳥瞰)하는 것이고, '비명'은 이 서사의 비극적 모습을 클로즈업한 것일듯 한.
한반도 남녘땅, 아직 내 발길 닿지 않은 곳 많을테지만 서남부 경남은 내게는 익은 곳이다.
통영.
늙어 더욱 절절한 고향 거제사랑을 토로하는 영재, 통영이 고향인 상곤이, 고성촌놈 무성이등 가까운 친구들도 있고.
옛날 보생의원에 함께 사셨던 숙모님이 사천분이라 고용인 여럿이 그 쪽 사람들이어서 독특한 그 지역 사투리는 지금도 내 귀에는 참 정겹게 들린다.
뿐더러 거제와 통영은 직장생활중 대우조선 삼성조선 신아조선등으로 출장길이 잦았던 곳.
무엇보다 통영은 박경리의 소설로 인하여 내게는 더욱 익숙한 곳이다.
통영이라는 고장은 박경리의 여러 소설속에서 서사의 액추얼리티를 실감으로 느끼게 하여 주는 곳.
고향에 대한 작가의 곰삭은 애정으로 묘사된 통영.
작년, 통영 세병관(洗兵館) 너른 마루에 아내와 모처럼 귀국한 아들놈과 함께 올랐다.
수백년전 옛사람들의 이름이 씌여진 현판들을 올려다 보면서 젖어드는 감회.
그 이름들은 세병관과 관련된 군관 병졸 장인 일꾼들의 이름들이 아닐까하는데.
빛바랜 먹물의 희미한 글씨였지만 내 마음 속에 일렁이는 그 이름들은 죽어 퇴락(頹落)한 이름들이 아니었다.
박경리의 소설 어느 대목에서 툭 튀어나올것같은 살아있는 인물들처럼 내게는 느껴졌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서리서리 맺혀진 삶의 자리...
더우기 그곳은 통영이 아닌가.
박경리 필생의 역작, '토지'의 인물들.
윤씨부인, 최치수, 별당아씨, 강포수, 귀녀, 서희, 길상이, 용이, 월선이, 기화, 환국과 윤국이, 양현이, 조준구, 임이네, 조병수, 장연학, 윤보, 함안댁, 몽치, 한복이, 이상현, 유인실, 임명빈... ('토지'의 등장인물을 모두 열거하자면 ‘토지’의 인명사전을 펴놓아야 할 것)
그리고 '김약국의 딸들'에 등장하는 사람들.
관약국 김봉제 영감과 불같은 성격의 김봉룡 형제...비상먹고 자살한 봉룡의 젊은 각시 숙정이, 그녀를 짝사랑하다 봉룡의 칼에 맞아죽은 나그네...큰아버지 봉제영감댁에 입적된 봉룡의 아들 성수(김약국)... 봉제영감의 아내 송씨, 그 외동딸 연순이...봉제영감의 여동생 봉희, 그의 아들 이중구와 아내 윤씨, 그들의 두아들 정윤과 태윤...연순의 신량 강택진, 강택진의 정부였던 작부 옥화, 그 사이에서 생겨난 아들... 김약국(성수)의 아내 한실댁(분시)...머슴 지석원, 그의 아들 한돌이...김약국의 다섯딸, 용숙,용빈,용란,용옥,용혜...김약국의 어장감독 기두, 그 아버지 서씨...아편쟁이 성불구 용란의 남편 연학이...
박경리가 창조한 사람들은 왜 그토록 내게 느꺼운가.
그건 물론 박경리의 뛰어난 작가적 역량일 터.
그 인물들에게서는 내게 정서이거나 감수성이거나, 감정모체의 원형질이 용해되어 있는듯한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이 땅에다 뿌리박고 연연하게 이어온 삶의 자리들.
세상과 시대와 무수한 관계 안에서 부대끼면서 한세상을 정한(情恨)으로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이야기들.
그들은 내 삶이 겪었던 나의 아지매 아재비들, 곧바로 감정이입이 가능한 내 리얼리즘 속의 범부범부(凡夫凡婦)들이다.
내 집단무의식 속에 들어앉아 있는 낯익은 유령들인지도 모르겠다.
김약국 집안 몰락의 풍경은 내게 낯설지 않다.
그 모습 또한 나의 한세월 숱하게 보았고 또한 겪었을 것이다.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혐의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가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
김약국 (성수, 영화에서는 김동원이 역을 맡았다)
어머니를 비상 삼켜 자살케 한,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어디선가 객사하였을 아버지.
어린 성수에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미움과 그리움이 교차되는 미묘한 것이었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사촌 누부(누나) 연순을 연모하지만 그건 이루어질수 없는 슬픈 사랑.
[누부, 나 그만 타관에, 타관에 가고 싶다. 별안간 어린 시절의 말투로 돌아간다. 타관에? 연순의 얼굴이 상기한다. 아부지를 찾고 싶다. 돌아가셨다면 그 흔적이라도 알고 싶다. 실상은 저 배를 바라보려 오는 것이다. 연순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아부지는 연순 누부를 닮았다면? 누부는 와 시집을 가아? 시집 안 가고 죽으믄 처니구신이 돼서 집안을 망친단다. 가지 마라! 한평생을 성수하고 같이 살 수 있나. 성수도 장가가고, 이쁜 각시하고 살 기 앙이가. 나는 안 간다!]
그는 필경 시니컬하고 내면적인 사람이 되었다.
[넓은 집안에, 쥐죽은 듯 고요한 집안에 김약국의 웃음이 메아리친다. 걱정마오. 아무리, 내가 먼저 죽지 당신이 먼저 죽겄소? 부드러웠다. 떨리는 음성이었다. 멍하니 뚫어진 두 눈, 광대뼈가 불거진 양볼, 그 희던 얼굴빛마저 거무죽죽하였다. 김약국은 일어서서 사랑으로 들어간다. 불쌍한 것들 ,,, 나직이 뇐다. 김약국은 두루마기를 벗어 걸고 자리에 앉아 바둑판을 끌어내었다. 영감도 이자 다 늙었구마.]
남들에게는 점잖고 인정많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비추어지지만 김약국은 내게는 비겁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그는 제도와 관습에 숨어서 우유부단하다.
딸들의 비극에 대하여도 수수방관하는, 그는 일종의 관념적인 사람이다.
비극에 적극 개입하여 영육(靈肉)으로 맞아 싸우는 사람은 언제나 한실댁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이여.
장씨부인(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에서 눈을 돌리고, 그대들의 분노는 한실댁을 보면서 토로하라.
풀 먹인 한산모시를 빳빳하게 떨쳐입고 고고한척 헛기침이나 하면서, 유유자적 고종명(考終命)하는 저 김약국에게 종주먹을 날려라.
결국 사위의 도끼에 찍혀 비명횡사하는 한실댁.(영화에서는 황정순)
한실댁이 가엾어서 내 가슴속 빈바람 소리 들려온다.
[한실댁은 허방을 짚으며 간다. 집 앞 가까이까지 왔을 때 사방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뒷산에는 부엉이가 울고 있었다. 집 앞의 느티나무 가지가 바람에 소리를 내고 있었다. 느티나무 둘레에 친 새끼줄에 감긴 흰 종이가 어둠 속에서 팔랑거린다. 한실댁은 와락 달겨들어 그 새끼줄을 잡아 뜯는다. 이 썩은 고목나무얏! 이날까지 손발이 잦아지게 빌었건만 무슨 영검이 있었노? 이자 물밥 천신도 못할줄 알아라. 한실댁은 주먹으로 나무를 치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얼마 가지않아 그는 미친듯 집에서 뛰어 나와 느티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목신 신령님, 살려주시이소. 죽을 죄를 졌입네다. 인간이 미련하고 불민하여 신령님 무서운 줄 모르고 죄를 저질렀입네다. 불쌍한 자식들 명철하신 신령님께서 애인하게 여기시어 보살펴주시이소. 죄가 있으믄 이 어미가 받겄입니다. 한실댁은 땅 위에 머리를 조아리고 쉴 새 없이 절을 한다.]
김약국과 한실댁 사이의 다섯 딸.
[그러나 한실댁은 그 많은 딸들을 하늘만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딸을 기를 때 큰딸 용숙은 샘이 많고 만사가 칠칠하여 대가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고 했다. 둘째딸 용빈은 영민하고 훤칠하여 뉘 집 아들자식과 바꿀까보냐 싶었다. 셋째딸 용란은 옷고름 한 짝 달아입지 못하는 말괄량이지만 달나라 항아같이 어여쁘니 으례 남들이 다 시중들 것이요, 남편 사랑을 독차지하리라 생각하였다. 넷째딸 용옥은 딸 중에서 제일 인물이 떨어지지만 손끝이 야물고, 말이 적고 심정이 고와서 없는 살림이라도 알뜰히 꾸며나갈 것이니 걱정 없다고 했다. 막내동이 용혜는 어리광꾼이요, 엄마 옆이 아니면 잠을 못 잔다. 그러나 연한 배같이 상냥하고 귀염성스러워 어느집 막내며느리가 되어 호강을 할 거라는 것이다.]
맏딸 용숙이. (영화에서 이민자)
부모나 형제의 어려움 따위는 그녀에게 추호도 아랑곳할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형제의 몫을 가로채고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여인.
내면은 끔찍하도록 징그러운 여인이지만 다섯형제중 세째 용란과 더불어 그녀는 미인으로 태어났다.
[그보다 집에 있는 침모와 하녀들이 혀를 내두른 것은, 용숙이 자기의 물건이라고 실 한 바람, 골무 한 짝 빼놓지 않고 싹 쓸어간 일이었다."숭측하제. 그 집 마당에 풀 안 날까?”그렇게 욕심이 많고 독해서야 어디 사람이 찾아가겠느냐는 뜻이다.]
박경리는 언제나 선악(善惡)을 불문코 자신이 창조한 모든 사람들을 연민한다.
그러나 박경리가 스스로 경멸해 마지 않으면서 혀를 차는 사람이 몇 있다.
그들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박경리의 혐오감이 내게는 뚜렷이 느껴진다.
'토지'에서는 '조준구 부부'와 '임이네'가 그들이다. (살인자의 아들로 잔인한 일본밀정 '거복'에게 까지 연민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박경리인데)
이 소설에서는 '용숙이'와 '강택진'이 그들이고. (오로지 관능에 함몰되어 어머니까지도 죽게 만든 '용란이'를 얼마나 작가는 연민하였는지)
부모로부터 가장 믿음을 받는 이지적인 용빈이. (영화 엄앵란)
집안의 비극으로 인하여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회의한다.
[그리구 용빈이는 건강하고 총명하고, 어떤 난관이라도 이겨낼 거야. 자신이 없어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 소리 하면 못 써요. 인생이란 사철이 봄일 수는 없잖아? 가을이 오면 잎이 떨어지고 한겨울이 오면 헐벗고 떨어야 하지만, 이내 봄이 오지 않니? 희망을 잃어서는 안돼요. 제가 잘못하여 희망을 잃었겠어요? 누군가가 저의 희망을 앗아가지 않았습니까? 케이트 선생님. 용빈은 절망하구 있군. 절망밖에 남은 게 없어요. 용빈이, 너의 가정의 불행과 너의 슬픔을 위해 기도 올리지 않겠니? 케이트 선생님, 저는 기도 드리지 않겠어요. 미움과 원망에 가득 찬 마음으로,,, 주님을 부를 순 없어요 ,,, 케이트는 혼자서 오랫동안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선 케이트는 차분한 미소를 띠며 용빈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절 싱싱한 나무라 하셨죠? 케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선생님! 용빈은 벌떡 일어섰다. 전 가겠어요.]
세째 용란이. (영화 최지희)
한돌(영화 환해)와 불장난을 하다가 아편쟁이 연학에게 시집가는 미인.
용빈은 선교사 케이트에게 토로한다. (영어로 말하기 때문에 동생을 '그'라고 호칭한다)
[하지만 용란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죄악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울지 않아요. 수치심도 없고, 슬픔도 없단 말이지? 케이트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예. 어떻게 보면 아무 생각도 없는 것만 같아요. 동물이 자기의 먹이를 빼앗겼을 때 포악해지는 그런 노여움 뿐이에요. 원시인의 상태라고나 할까요. 본시 인간들이란 다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 여자는 사랑을 느끼기보다 본능에 움직였어요. 거기 대하여 모욕을 느끼기보다 신선한,,, 표현할 수 없군요. 바보처럼 천진한 그의 인간성에서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어요. 용란은 한돌이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남자일 경우에도 ,,, 아마 ,,, 그럴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육체에다 영혼을 주셨는데, 그 여자는 악덕을 악덕으로 알지 못하고, 수치를 알지 못하고, 더욱이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케이트 선생님, 저는 그 여자에게서 때때로 천사와 같이 순진한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웬 까닭일까요? 그 여자의 더러운 습성이 깃든 모습 속에서 저는 더러운 것을 느낀 일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아름답게 만들어주신 그 미모의 탓일까요? 악과 선은 언제나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 자신이 악을 악으로 알지 못할 때, 그럴 때 우리는 그 여자를 두들겨 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간음을 범한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건 우리의 생각일 뿐이며 우리가 보는 사실일 뿐예요. 그 여자는 몰라요. 자연 속에서 어떤 생물이 자라나듯 그 여자는 다만 존재해 있을 뿐입니다. 그 여자가 어떤 가장 유치한 정도라도 신비를 느꼈을 것 같습니까? 영혼과 육체를 같이 주시지 않고 본능과 육체만 주셨다면 하나님은 그 여자를 벌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 여자에게 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벌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모르니까요. 벌을 받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예요, 어머니예요, 그리고 우리들이에요.]
그리고 기두. (영화 박노식)
아름다운 용모의 용옥이를 향한 기두의 연모(戀慕)의 마음, 그 심리밭을 나는 충분히 더듬어 볼수 있을 것 같다.
넷째 용옥이.(영화 강미애)
부모와 형제를 향하여 저토록 헌신하는 딸.
기꺼이 자기희생적인 삶을 선택하는 여성.
용옥이가 맏이로 태어났다면 김약국 집안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결국 그녀는 아기를 꼭 껴안은채 침몰된 배에 갇혀 죽었다.(왜 착한 사람은 언제나 불행한 최후를 맞는지..)
[사회의 질서라는 건 실상 나약하기 짝이 없는 거야. 그리고 또 완강하기 짝이 없는 거지. 그것은 모두 자연의 흐름이다. 기를 쓰고 덤빌 필요는 없다. 인간의 작의로 된 건 아니니까. 인간은 개인으로 살았고 개인으로 죽었다. 어떤 변혁이 와도 인간은 의연히 개인으로 대처한다. 개인이 질 때도 있다. 그 사회의 변혁이란 역사를 위해서 혹은 어느 집단을 위해서 있었다고 생각지 않아. 개인을 위해, 개인의 생활을 위해 있었다. 정윤의 말에 천만에, 아니지요. 일본제국이란 집단은 조선이란 집단을 먹었소. 개인이 먹은 것은 아니요! 태윤은 소리를 바락 질렀다.]
냉소주의 허무주의.
정윤(영화에서는 신성일이었던가?)에게서 어떤 나를 보게 된다.
씁쓰레한 기분으로.
그래,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이다.
집단의 자(尺)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개별을 잴수 없다.
삶의 자리를 그 어떤 철학이 조망할수 있으랴.
어떤 과학이 삶의 내용을 설명할수 있으랴.
인간의 본질은 아무도 모른다.
중구난방.
아무리 유물론(唯物論) 유신론(有神論) 유심론(唯心論)을 씨부려봤자 현학(衒學)의 잠꼬대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틀려먹었다.
"인간의 진정한 본질은 사회 관계의 총체성이다"라니.
인간은 절대 사회의 소산물은 아니다.
저 김약국의 비극을 일제강점기의 통영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요인에서 나는 결코 찾을수 없었다.
사르트르도 틀려먹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이다"라니.
저들 전통과 관습의 삶 속에 어디 한조각 자유로운 실존적 자각이 있었고 실존적 선택이 있었던가
아, 뉘라 인간의 운명을 납득할수 있을까.
타고난 성정(性情)에 의한 것인지, 타고난 의지인지, 살고 있는 환경인지, 혹은 태어난 유전(遺傳)때문인지.(똑같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형제의 저토록 상이한 기질과 성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김약국의 딸들.
그래, 업(業)이다. 카르마다.
박경리의 문학은 얼마던지 업을 얘기해도 좋을만큼 아름답고 슬프다.
소설 속 저 만장의 사설처럼 한살이는 슬픈 것.
[어하넘 어하넘 어나라 남천 어하넘 멀고 먼 황천길을 인지 가면 언지 오나 부모님도 잘 있이소 형제간도 잘 있이소 이팔청춘 젊은 몸이 인지 가면 언지 오나 활장같이 굽은 길을 살대같이 내가 가네.]
[어하넘 어하넘 어나라 남천 어하넘 명정공포 우뇌상에 요롱 소리 한심허다 이 길을 인지 가면 언지 다시 돌아오리 북망산천 들어가서 띠잔디를 이불 삼고 쉬파리는 벗을 삼고 가랑비 굵은비는 시우 섞어 오시는데 어느 누가 날 찾으리 어하넘, 어하넘 ,,,]
불현듯 어떤 이미지가 떠올라 박경리의 '시장과 전장'을 꺼내 편다.
한 대목을 펼쳐 자판 두드린다.
[빙하, 어느 빙하인가, 유리알같이 얼어붙은 길과 채마밭, 달빛이 미끄러진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너 참 질기기도 하여라’
얼음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그 말을 누가 했을까. 음, 음. 누가 했을까’
그는 그 생각에 골몰하여 추운 것도 잊고 그냥 쭈그리고 있다.
‘그 말을 누가 했을까. 누가 했을까. 누가 했을까’
지영은 얼굴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그리고 다시 사방을 살핀다,
신비스럽게 아름다운 눈세계. 눈이 쌓이고 얼음이 되어 버린 대지 위에 달빛만 소나기처럼 내리 쏟아진다,
무릎으로 땅바닥을 짚고 가슴을 피며 냇물처럼 흘러가는 무한히 무한히 긴 침묵을-
지영은 땅에 엎드려 소리쳐 통곡한다.
‘아무도 오지말라! 이 땅에. 아무도 오지말라! 이 땅에. 내 혼자 내 자식들하고 얼음을 깨어 한강의 붕어나 잡아먹고 살란다, 북쪽의 백곰처럼 자식들 데리고 살란다! 아무도 오지말라! 아무도! 영원히 영원히 이 밤이 가지 말구.’
박경리는 운명론자였을까.
아, 그래.
박경리는 불가지론자, 신비주의자다.
박경리에게 있어서 生이란 불가해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삶은 힘든 것이었지만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녀가 살아낸 목숨들의 관계, 불가해(不可解)함으로써 그리 아름다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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