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하여 -2-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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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에 대하여] -2-

 

6.

 

‘루오’의 그림, ‘교외의 그리스도’.

달빛에 그림자 길게 떨군 예수 그리스도와 두 어린아이를 그린 그림.

쓸쓸한 그림이지만 노란 달빛의 은은한 밝음에는 어떤 구원(救援)의 따뜻함이 어려있다.

여명(黎明)은 희망의 이미지.

 

사양(斜陽).

서산 넘어 지는 해.

붉게 드리운 노을은 꺼져 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

사위(四圍)로 스며드는 어둠은 사위어 가는 목숨의 슬픔.

사양은 멸망의 이미지다.

 

어머니와 가즈코와 나오지와 우에하라. (내게는 ‘나오지’에게서 오사무의 체취가 너무 짙었지만, 사양은 가즈코의 일인칭 서술구조의 소설로서 당연히 가즈코가 주인공이다.)

‘어머니’는 참으로 아름다운 허무(虛無)였다.

귀부인의 우아한 기품을 지닌채 아름답게 소멸하였다.

그리고 ‘나오지’는 정체성에 대한 존재론적 질곡 속에서 고뇌하다가, 끝내 ‘자신의 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나오지의 패덕(悖德)스승인 소설가 ‘우에하라’도 필경은 소설 직후(直後)에는 폐병으로 죽었을 것이다.

‘나오지’의 누나 ‘가즈코’

그녀만이 낡은 도덕에 대항하여, 굳건한 혁명의 마음으로 '일본의 전후(戰後)'를 살아 냈을 것이다.

뱀의 영리함과 비둘기의 순결함으로.

 

도쿄의 대저택을 처분하고 시골 퇴락한 별장에 기거하는 몰락한 귀족 모녀, 어머니와 가즈코.

나날이 수척해가는 어머니와 대조적으로 나날이 생명력이 빛을 발하는 가즈코.

가즈코는 어머니와 나오지의 죽음 후, 더욱 삶에 대한 강인한 욕망을 이어갔던 것이다.

 

패전(敗戰)후 일본을 사는 사람들.

어제의 가치는 어디로 가뭇 사라졌는가

‘덴노 헤이카 반자이!’

초개처럼 목숨을 바쳤던 군국(軍國)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전후, 일본이라는 사회는 실로 단기간에, ‘군국(軍國)’으로부터 홀연 ‘민주(民主)’로 돌변하였다.

어제의 성전(聖戰)은 졸지에 침략전쟁이 되었고, 무수한 부모형제친구의 죽음은 그냥 헛된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하루 아침에 가치관은 전도되어 모든 삶의 양식은 달라졌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그 모든 변모가 그냥 직수굿이 받아들여졌다.

 

애니메이션 영화 ‘반딧불의 무덤’이 떠오른다.

어린 오라비 세이타는 누이 세짱의 주검을 화장(火葬)하고 살아갈 근거와 의욕을 잃어 버렸다.

소년은 역사(驛舍)의 기둥에 기대어 굶주림으로 죽어 간다.

역무원은 무슨 지렁이를 시험하듯 죽었나 살았나 걸렛대로 쿡쿡 찔러본다.

“곧 미군이 진주 할텐데, 이런 꼴이라니. 도무지 창피해서.. 쯧쯧”

긂어 죽어가는 거렁뱅이 소년 세이타를 피해 지나가면서 창피해 하는 사람들.

그들은 불과 두어달 전, 공습의 불바다 속에서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장렬하게 부르짖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이토록 가변적인 가치관.

이토록 지독하게 위선적인 인간성.

그건 얼마나 허무하고 얼마나 징그러운 놈인가.

오사무의 영혼은 또다시 절망하였을 것이다.

 

일본의 몇 양심들도 죽을만큼 부끄러워 절망하였다.

그 부끄러움은 니힐리즘과 데카당스로 표출되어 자학적 파멸로 치달았다.

다자이 오사무를 포함한 이른바 ‘무뢰파’들의 하강지향(下降志向)의 태도는 나름대로 구원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미우라 아야코-빙점을 쓴 기독교 작가-’같은 이는 그 부끄러움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인간은 살고 타락해야 한다. 타락 할 때까지 타락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구원되어야 한다.>

<나는 리베르땅입니다. 무뢰한입니다.>

 

취생몽사(醉生夢死).

절망의 삶.

킬로친 킬로친 슈루슈루 슈

또하나의 오사무의 페르소나, 그것은 바로 데까당 ‘우에하라’였다.

그 절망이었다.

 

‘가즈코’.

그녀는 살모사(殺母蛇).

어머니(낡음)를 잡아먹고 새로운 생명을 얻고자 하는 살모사.

절망을 딛고서 일본의 전후(戰後)를 살아내고자 하는 혁명의 여전사.

‘가즈코’의 혁명이란.

'가즈코’가 ‘우에하라’에게 보낸 편지들과 글을 보자.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에게 리얼리즘은 없습니다. 나는 소설가 따위를 동경하지는 않습니다. 갈매기의 니나처럼. 나는 당신의 아기가 소원인 겁니다.>

 

<만나면 됩니다. 부탁이예요 제발 이리로 와 주세요. 나의 입 양쪽 언저리에 생긴 보일까 말까한 주름살을 보아 주세요. 세기적인 슬픔의 주름살을 보아 주세요. 나의 어떠한 말보다도 나의 얼굴이 나의 가슴 속의 생각을 분명히 당신에게 알릴 것입니다.>

 

<나의 희망은 당신의 애첩이 되어 당신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일이에요. 이러한 편지를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살아가려는 여자의 노력을 조소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생명을 비웃는 사람입니다. 나는 항구의 숨막힐 듯 괴어있는 공기에 견딜수가 없어서, 항구 밖에서는 폭풍이 분다 해도 돛을 올리고 싶은 거에요.나를 비웃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모두 휴식하고 있는 돛입니다.>

 

<세상에서 좋은 사람이라며 존경받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고 가짜라는걸 나는 알고 있어요. 나는 세상을 신용하지 못하는 겁니다. 딱지 붙은 불량배만이 나의 편입니다. 딱지 붙은 불량배. 나는 그 십자가에만은 걸려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만인에게 비난을 받아도 그래도 나는 답변할 수가 있어요. 너희들은 딱지도 붙지 않은 가장 위험한 불량배가 아니냐고. m.c (마이 체홉, 마이 차일드)>

 

편지를 세통이나 보냈는데 우에하라로부터는 답장이 없었다.

‘가즈코’는 ‘나오지’의 방에서 책을 가져와 읽는다.

‘카우츠키’의 ‘사회혁명’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의 ‘경제학 입문’이나 ‘레닌 선집’등.

 

<어머니가 읽는 책은 위고, 뒤마부자, 뮈세, 도데등인데 나는 그들의 감미로운 얘기 속에서도 혁명의 냄새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룩셈부르크의 책, 경제학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실로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정말 단순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것 뿐이다. 혹시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여튼 이 책이 내게는 하나도 재미가 없다. 경제학이란 인간이란 인색한 것이고, 그리고 영원히 인색할 것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전혀 성립되지 않는 학문이다. 인색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분배의 문제나 기타 문제에도 아무런 흥미가 없은 일이다.그런데도 나는 이 책을 읽고 또 다른 곳에서 기묘한 흥미를 느낀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아무런 주저도 없이 한 쪽에서부터 모조리, 옛날부터 내려오는 사상을 파괴해 나가는 저돌적 용기이다. 아무리 도덕에 어긋나도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새침하게 주저앉지 않고 달려가는 유부녀의 모습조차 상상할수 있다. 파괴, 사상,파괴는 불쌍하고 슬프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다. 다시 건설해서 완성하려는 꿈, 그리고 일단 파괴하면 영원히 완성의 날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리운 사람 때문에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시즘에 슬프도록 일편단심인 사랑을 하고 있다.>

 

<나는 혁명을 동경한 일도 없었고 연애조차 몰랐다. 지금까지의 세상 어른들은 이 혁명과 연애 두가지를 가장 어리석고 기피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쳤고 전쟁 전에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그걸 믿고 있었다.그러나 패전후, 우리들은 세상의 어른들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무엇이건 그들이 하는 말의 반대쪽에 진실로 살아갈 길이 있는 것 같아서 혁명도 연애도 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며, 맛이 좋은 너무도 좋은 일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심술궂게 우리들에게 설익은 포도라고 거짓말을 해서 가르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혁명과 사랑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는 것을.>

 

<어린애일지라도 어리광만 부리고 있을수는 없다. 나는 이제부터 세상과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아아, 어머니처럼 남과 다투지 않고 미워도 원망도 하지 않고 아름답고 슬프게 생애를 끝낼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최후이며 앞으로의 세상에는 존재할 수가 없는게 아닐까. 죽어가는 사람은 아름답다. 산다는 것, 살아 남는다는 것, 그것은 무척 흉하고 피의 냄새가 나는 더러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나는 임신해서 구멍을 파는 뱀의 모습을 다다미 위에 그려 보았다. 그러나 살아 남아서 마음 먹은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 세상과 싸워 나가자. 어머니가 마침내 돌아가시게 되자 나의 로맨티시즘이나 감상은 차츰 사라지고, 뭔가 나 자신 마음 놓을수 없는 나쁜 지혜를 가진 생물로 변해 가는 심정이 되었다.>

 

<어머니가 죽었다. 전투 개시. 언제까지나 슬픔에 젖어 있을수도 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쟁취해야 할 것이 있었다. 새로운 윤리, 아니 그렇게 말해도 위선 같다. 사랑, 그것뿐이다. 로자가 새로운 경제학에 의지해야만 했듯이, 나는 지금 사랑 한 가지에 매달릴수 없으면 살아 갈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종교가, 도덕가, 학자, 권위자의 위선을 파헤치고 하느님의 진정한 애정이란 것을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그 열 두 제자를 사방에 파견하려 하실 때, 제자들에게 가르친 말씀은 나의 경우에도 무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전대 속에 금 은 돈을 넣어 가지 말라.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은 양을 이리 가운데 넣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와 같이 온순하게 하라.>

 

어머니가 죽었다.

전투개시.

가즈코는 용약(勇躍) 뛰쳐 일어나 동경으로 올라가 우에하라를 해후하였다.

 

<이게 저 나의 무지개, mc, 나의 삶의 보람인 그 사람인가? 6년. 봉두난발은 옛날 그대로이지만, 그것은 슬프게도 불그스레하고 바래고 엷어졌으며 얼굴은 누렇게 떠서 눈가는 붉게 짓무르고 앞니가 빠지고 늘 입을 오물오물거려서 한 마리의 늙은 원숭이가 등을 구부리고 방구석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킬로친 킬로친 슈루슈루슈... 하룻밤 저 술값 1만엔. 그것만 있으면 나도 일년 쯤 편하게 살수 있을돈인데.아아, 이 사람들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나의 연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가 싶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아무렇게라도 끝을 볼때까지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도 노상 미워만 할수 없지 않을까. 살아 가는 일, 살아 가는 일, 그건 어쩌면 이토록 숨이 막히는 사업일까.>

 

<“술을 무척 많이 마시는군요. 날마다 그래요?”“그럼, 아침부터야.”“맛이 좋아요? 술이?”“맛없어.”그렇게 말하는 우에하라씨의 말에 나는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일은?”“통 못해. 무얼 써도 허무하기만 하고, 그리고 그저 슬퍼서 어쩔수 없어. 생명의 황혼, 예술의 황혼, 인류의 황혼, 그것도 비위에 거슬려.">

 

<“유트릴로”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걸 말했다, “아아, 유트릴로, 아직도 살아 있는 모양이야, 알콜의 망자, 시체야. 최근 십년간 그림은 애틋하게 속되어서 모두 못쓸 것 뿐이야.”“유트릴로만이 아니겠죠, 다른 거장들도 모두...”“그래. 쇠약이야. 그러나 새로운 싹이 크지 못한채 쇠약하고 있어요.”“서리. 프로스트 온 세상에 서리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아요.”>

 

유트릴로의 그림을 나 또한 얼마나 좋아하는지.

고즈넉한 어느 골목의 황색의 담벼락.

나는 그 그림을 보았을 때 단번에 오사무가 떠올려졌다.

이른바 ‘풍크툼’이라는 걸까.

우아한(?) 쓸쓸함이 엄습하여 나를 좀 고급스런 슬픔에 젖게 하는 유트릴로의 그림들.

 

<난 귀족이 싫어. 뭔가 참을수 없는 오만한 데가 있어. 가즈코씨 동생 나오지도 귀족으로서는 좋은 사람이지만 때때로 문득 서로 융합되지 않는 건방진게 보인단 말야. 난 시골 농부 자식이거든. 이렇게 시냇가를 걷고 있으면 반드시 어린 시절, 고향 개울에서 붕어을 잡고 송사리를 건지던 일이 생각나 견딜수 없는 심정이 되곤 하지. 당신네 귀족들은 그러한 우리들의 감상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랄뿐 더러 경멸까지 하고 있어. “투르게네프는?”“그 자식은 귀족이야, 그래서 싫은거지.”“그렇지만 사냥꾼의 일기는..”“음, 그것만은 약간 좋더군.”“그건 농촌 생활의 감상?”“그 자식, 시골 귀족이라는 정도로 타협할까”“나도 지금은 시골 사람이에요.밭을 갈고 심어요. 시골의 가난뱅이.”“지금도 내가 좋은가?”난폭한 어조였다. “내 아기를 가지고 싶은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위가 떨어져 내리는듯한 기세로 그 사람의 얼굴이 다가오고, 다짜고짜 나는 키스를 당했다. 성욕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키스였다. 나는 그 키스를 받으면서 눈물이 났다. 굴욕의, 분노의 눈물과도 흡사한 씁쓸한 눈물이었다. 눈물이 한없이 눈에서 흘러 내렸다.>

 

이 대목을 읽고서 나는 투르게네프를 찾아 읽었었다.

 

이윽고 '가즈코’는 ‘우에하라’의 남성에게 몸을 열었다.

 

<“당신은 건강을 해치고 계시죠? 각혈을 하셨죠?”“어떻게 아나? 실은 일전에 제법 지독하게 했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과 같은 냄새가 나는걸요.”“죽을셈 치고 마시고 있어. 살아 있는게 슬퍼서 어쩔수 없단 말이야. 쓸쓸하다느니 고적하다느니 그런 여유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슬픈 거야. 음산한 탄식의 한숨이 사방 벽에서 들려 올 때, 자신들만의 행복이 있을수 없지 않아? 자신의 행복도 광영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심정이 될까? 노력? 그 따위 것은 다만 굶주린 야수의 밥이 될 뿐이야,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아, 비위 상하나?”“아아뇨.”“연애만 그게 아니지, 그건 가즈코 씨의 편지가 맞아.”>

 

<나의 연애는 사라져 버렸다. 날이 밝았다. 죽은 듯 자는 아침의 얼굴. 희생자의 얼굴, 귀중한 희생자. 내 사람, 나의 무지개, 마이 차일드, 미운 사람, 교활한 사람, 이 세상에 다시 없을 정도로 굉장히 아름다운 얼굴같이 보였다.

사람이 다시 소생해 온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려 나는 그의 머리를 쓸어올려 주며 내 쪽에서 키스했다. 슬프고 슬픈 연애의 성취.

우에하라씨는 눈을 감은채 나를 끌어안고 “비뚤어져 있었던거야, 난 농부의 자식이니까.”이젠 이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말자. “난 지금 행복해요, 사방 벽에서 탄식의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의 지금은 행복감은 포화점에 이르고 있어요.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행복해요.”우에하라씨는 후후 웃으며 “그러나 이미 늦었어, 황혼이야.”“아침이에요.” 동생 나오지는 그 날 아침 자살했다.>

 

나오지는 가즈코가 우에하라의 씨를 받은 바로 그 날 아침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가즈코’는 우에하라의 아이를 잉태하였다.

 

<어쩐지 당신도 나를 버리신 모양입니다. 아니 차츰 잊어가고 계시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나는 행복합니다.아기가 생겼으니까요. 뱃 속의 작은 생명이 나의 고독한 미소의 씨앗이 되고 있답니다.>

 

<이 세상에 전쟁이네 평화네 무역이네 조합이네 정치네 하는 것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불행하신 겁니다. 가르쳐 드리겠어요. 여자가 좋은 아기를 낳기 위해섭니다.>

 

<나에게는 애초부터 당신의 인격이라든가 책임이라든가 하는 것에 의지할 심정은 아니었습니다. 나의 한 줄기 연애의 모헙의 성취만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완성되고 이제 와서는 나의 가슴 속은 숲 속의 늪처럼 조용합니다.>

 

<나는 승리했습니다. 마리아가 설사 남편의 아이가 아닌 자식을 낳았어도 마리아에게 빛나는 영예가 있다면 그것은 성모자가 된 것입니다. 나에게는 낡은 도덕을 태연하게 무시하고 좋은 아기를 얻었다는 만족이 있습니다.>

 

<당신은 술을 먹고 악덕생활을 계속 하시겠지요. 희생자, 도덕의 과도기의 희생자. 당신도 나도 틀림없이 그것일 겁니다. 혁명은 도대체 어디서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들의 주변에서는 낡은 도덕은 역시 그대로 추호도 변함없이 우리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나의 1회전 싸움에서는 낡은 도덕을 아주 조금 밀어 냈을겁니다. 2회전 3회전을 싸워 나갈 작정입니다. 그립던 사람의 아기를 낳고 키우는 일이 나의 도덕혁명의 완성인 것입니다.>

 

<사생아와 그의 모친. 이 아이를 단 한번만이라도 당신의 부인에게 안겨 주고 싶은 겁니다. (나오지는 우에하라의 아내를 짝사랑하였었다) 아 아기는 나오지가 어느 여자에게 비밀로 낳게 한 아이예요. 이유는 묻지 말고. mc 나의 코미디언, 쇼와 22년 2월 7일>

 

혁명가 가즈코의 로맨티시즘은 슬프게 저린 아름다움이었다.

가즈코는 오사무의 또 다른 페르소나.

그녀는 그러니까 오사무가 꿈꾸었던 ‘희망의 가능태’였을꺼나.

 

당초, ‘다자이 오사무’라면 내 안에 쓸거리 넘칠 듯 싶었다.

그런데 막상 끄집어 내려니 어떤 정제(整齊)된 건더기는 만져지지 않는구나.

흐음, 나는 오사무에 대하여 무엇을 얼마만큼 쓸 작정인지.

계획도 구상도 없다.

거듭 뇌이건대 그냥 쓰련다.

오사무의 책들 펼쳐 떠오르는 대로의 느낌을 주절거릴 참이다.

관리창을 열어 보니까 익명의 여러분들이 읽어 주시던데 부담스럽다.

나의 벗들이야 내 밑천 뻔히 아시는 바이지만, 그래도 아무개님들 애정어린 뱀눈은 내게는 피곤한(?) 긴장이기도 하다.

한 작가를 천착(穿鑿)할만한 소양(素養)도 재능도 없는 자의 감상적인 글조각.

두루, 그리 알아서들 읽어 줍시사는 부탁을 또 드린다.

 

7.

 

‘다자이 오사무’의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 修治)

1909년 6월 19일 아오모리(靑森)현 쓰가루(津輕)군 카나기마치(金木町)에서 태어났다.

 

연보(年譜)를 들추어 그의 면모를 더듬는다. [연령기준- 일본은 ‘만(滿)나이’를 쓴다-, 개편전의 일본 구학제(舊學制)]

 

7세 : 카나기 소학교에 입학하여 13세때 수석 졸업.

14세 : 고향인 아오모리 중학교에 입학, 부친 사망.

16세 : 작가를 지망하여 동인지 활동.

18세 : 동경 히로사키 고등학교 입학,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깊은 충격, 이때부터 화류계 출입하여 게이샤(童妓) ‘오야마 하 츠요’(小山初代)를 만남.

19세 : 습작시대, 동인지에 ‘무간나락(無間奈落)’발표.

20세 : 좌경사상 심취, 수면제 자살기도.

21세 : 동경제국대학 불문과 입학, 정치운동 관여, 긴자의 호스티스 ‘타나베(田部) 아츠미’와 동반자살기도하여 바다에 투신하였으나 여자만 죽음.

22세 : ‘오야마 하츠요’와 동거, 반제국주의 학생운동 가담.

23세 : 좌경사상을 접는다.

24세 : 처음으로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는 필명을 사용하여 작품활동.

26세 : 동경제국대학 제적(除籍). 산중(山中)에서 목 메어 자살기도. 약물 ‘파비날’중독, 소설 ‘역행'이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가 되었지만 2등으로 낙선.

27세 : 약물중독악화로 입원, 처녀창작집 '만년(晩年)' 간행.

28세 : ‘칼모틴’자살 기도. 첫사랑 ‘오야마 하츠요’와 헤어짐.

30세 : 고등여학교 교사 ‘이시하라 미치코’(石原美知子)와 결혼. 태평양전쟁 발발.

32세 : 장녀 소노코(園子) 탄생. ‘오오타 시즈코’(太田靜子)와 만남. 흉부질환으로 징용면제.

33세 : 모친 사망. 동경 공습으로 처가등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집필.

35세 : 장남 ‘마사키’(正樹) 출생.

36세 : 종전(終戰).

37세 : 피난생활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동경으로 귀환.

38세 : 사양(斜陽)집필. 차녀 ‘사토코’(지금 작가로 활동중) 출생, ‘오오타 시즈코’사이에서 낳은 딸을 인지하여 하루코(治子)로 명명.(지금 작가로 활동중), 포장마차에서 전쟁미망인 ‘야마자키 토미에’(山崎富榮) 만남.

39세 : ‘인간실격’집필, 1948년 6월13일 밤 ‘야마자키 토미에’와 타마가와 죠스이(玉川上水)에 투신. 19일 사체 발견.

 

오사무의 고향 ‘쓰가루(津輕)’.

나는 토쿄 북쪽으로 가보지 못하였는데, ‘쓰가루’는 혼슈(本州)의 최북단 벽지(僻地)로 풍토적 기질이 유별난 지방이라고 한다.

지독한 사투리를 구사하고 개방적이지만 강인한 생명력과 고집 그리고 끈질긴 인내심과 반골기질을 지닌 사람들, 한겨울에는 눈이 깊은 혹한의 땅.

일견 러시아적 분위기가 짙은 그런 고장이라고 하는데, 반골기질은 모르겠으되 호방한 개방성에다 강렬한 생명력과 끈질긴 인내심, 게다가 투박한 사투리라니.

오사무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내게는 오사무가 나이브한, 섬세하고 세련된 도회적인 분위기로써만 느껴지니 말이다.

 

원래 오사무의 조상은 성씨(姓氏)도 없는 (近世까지도 일본의 하층민에게는 성이 없었다) 보잘 것 없는 농투성이였는데 증조부대(曾祖父代)에 이르러 겨우 발신(發身)하였다고 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그의 조부(祖父)는 고리대금업으로 재산을 불리고 토지를 사들여 부자가 되었으며, 부친대(父親代)에 이르러서 쓰시마 가문(家門)의 부귀영화는 절정을 구가하였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 났을 때 가장 출세하였다. 그 무렵 귀족원의원이 되었고 아버지는 우유로 세수를 했다. -수필 중에서->

 

<나는 무지한, 끼니도 제대로 못 먹었던 가난한 빈농의 자손이다. 우리집 가계에는 단 한명의 사상가도 없다. 단 한명의 학자도 없다. 단 한명의 예술가도 없다. 공무원, 장군조차 없다. 정말이지 평범한 그야말로 시골 대지주일 뿐이다. 큰집은 무척 튼튼하게 지은 집이었지만 그러나 아무런 아취가 없었다. 서화 골동품 가운데 예술적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가계에는 복잡하거나 어두운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재산다툼 같은 것도 없었다. 그 가문에서 남한테 뒷손가락질을 받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은 나 혼자였다. -수필 중에서->

 

아버지 쓰시마겡에몬(津島源右衛門)은 아오모리 굴지의 대지주이며 대부호, 고액납세자로 귀족원(貴族院)의원과 중의원(衆議院)의원까지 역임하여 ‘긴끼의 대감’이라 불려진 지방의 명사였다.

 

으리으리한 부자집에서, 11명의 형제들중 10번째 도련님으로 태어난 오사무.

일본 역시 가부장적 전통의 나라, 가장(家長)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어린 오사무는 아버지를 두려워 하였다.

그리고 14살때 아버지 사망후, 훗날 아오모리현 지사까지 지낸 그의 장형(長兄)은 오사무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권위의 존재였을 것이다.

 

삐가번쩍 웅장한 대저택(大邸宅).

30명이 넘는 고용인들. (한 집에 부리는 사람이 서른이라니)

가문의 문장(紋章)이 청동으로 아로 새겨진 마차(馬車)..

 

노할머니(曾祖母)와 아버지와 어머니, 여럿의 형 누나와 남동생 하나, 숙모와 숙모의 딸들.

층층의 대가족, 그리고 서른명이 넘는 하인과 하녀들.

 

많은 책들이 ‘다자이 오사무’를 얘기할 적에 그의 환경적 요인을 꺼내든다.

좌익운동, 여성편력, 마약중독, 음주벽, 여러번의 자살기도...

빈자(貧者)를 착취하여 축재한 가문이라는,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죄의식과 아버지라는 위선적 권위와 아버지에 대한 공포등에 관하여.

 

오사무에게 집안환경에서 비롯된 위선적 권위에 대한 혐오라던가 빈자를 향한 죄책감 같은게 없었던건 아니었지만, 그의 아웃사이더의 고독감이나 죄의식이나 수치감은 그의 영혼이 지닌 보다 근원적인 기질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아의 불꽃에 소진되는 이상팽창된 영혼>.

오사무는 다른 별의 영혼을 가지고 지구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오사무는 귀족적인 당디즘의 오의를 나름 즐겼으며 소원(疏遠)하였더라도 가족들을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나 형은 경멸을 당할이만큼 속물은 아니었다.

그의 단편 '일등(一燈)'이나 유작으로 발견된 일기체의 장편 ‘정의와 미소’를 보라.

형제끼리의 우의와 애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그려져 있는지.

 

어떤 책의 해설을 보니까 <‘다자이 오사무’는 생애에 걸쳐 자신의 평전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써 있었다.

동의할수 없다.

‘다자이 오사무’는 오로지 문학을 ‘썼다’.

최후(거의)의 작품 ‘인간실격’이 워낙 강렬하였기 때문에 나온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실격’에서 오사무의 자아가 너무나 강렬하여서 오사무의 다른 작품들이 그 빛에 가려져 버린 측면이 강하다.

오사무의 섬세한 감수성이 직조한 작품들에는 삶의 밑바닥에 깔린 진실과 고뇌 와 슬픔의 감동, 더불어 고결한 도덕성 까지도 갖추고 있다.

 

난 오사무의 전작품을 모두 읽지는 못하였다.

내게 있는걸 살펴보니, 오사무의 자전적 색채를 띈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추억(1933), 잎(1934), 광대의 꽃(1935), 쓰가루(1944), 고뇌의 연감(수필1946), 인간실격(1948), 정의와 미소(유고).

 

‘추억’은 자신의 유년와 소년시절을 회억한 빼어난 소년기 문학이다.

열등감과 소외감과 엘리트의식,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위한 어릿광대짓 약한 사람을 향한 동정심, 아웃사이더 의식, 소년다운 연정(戀情)...

‘인간실격’의 ‘제1의 수기’와 동일시점을 다루지만 인간실격에서처럼 자기학대적 과장이 없다,

얼마전 읽은 ‘정의와 미소’또한 그렇더라.

이상(理想)과 현실 사이를 방황하는 한 소년의 갈등과 고뇌를 섬세한 일기체의 문장으로 유려하게 그려 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가족들간의 애정, 특히 주인공 형제간의 참으로 성숙된 우애가 넘치고 있었다.

‘잎’은 간결한 아포리즘들로 오사무 자신의 심리를 절묘하게 묘파해 내고 있는 소설같지 않은 소설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내비치는 오사무의 자의식에 과장된 왜곡은 보이지 않았다.

‘광대의 꽃’에서는 두 번째 자살기도(바다에 투신하여 여자만 죽고 자신은 살아 남은 사건)를 객관적 시점으로 담담하게 그려 내고 있다.

그렇지만 죄의식(여자만 죽었다는)을 견디면서 내적진실(자의식과 수치심)을 토로하려는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거기에서 과장되어 확대 재생산된 자의식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실격’의 ‘오바 요조’로부터 곧바로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하여 그를 대입하여서는 안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