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다자이 오사무’에 대하여] -1-
‘사양’ ‘인간실격’을 중심으로
***동우***
2012.09.07.
소설 : 사양 (斜陽) <출판년도 : 1947년>
소설 : 인간실격 (人間失格) <출판년도 : 1948년>
저자 : 다자이 오사무 (太宰 治,1909~1948)
1.
스물서넛 무렵. (1960년대말~1970년대초)
우리에게는 건배송(乾杯頌)이 있었다.
쐬주잔 부딪칠 적에는 “살루트”
막걸리 사발 나눌 적에는 “킬로친 킬로친 슈루슈루슈”.
전자(前者)는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소설 ‘사양(斜陽)’, 후자는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서 훔쳐온 주문(呪文)이었다.
암울한 색채 자욱한 전후(戰後)의 토쿄, 소설가 ‘우에하라’ 패거리들은 허무와 데까당의 폼을 잡고서 “킬로친 킬로친 슈루슈루슈”(나는 이게 어느 나라 말인지,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를 합창하면서 일본술을 퍼마셨고.
2차대전의 전조(前兆), 세기말의 검은 구름이 드리운 빠리의 카페에서 ‘라비크’와 ‘조앙 마듀’는 “살루트”하면서 독한 능금술 칼바도스 잔을 부딪쳤다.
그런 우리의 건배송에 무에 그럴듯한 뜻이나마 있어 그랬을까.
얼뱅이 문청(文靑)기질의 겉멋일시 분명하렸다마는, 울울(鬱鬱)하게 저무는 것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매혹이라던가 몰락미(沒落美)가 자아내는 정치(情致)함 쯤 있었을 것이다.
내막인즉슨 미래가 불안하여 그 두려움이 내지르는 비명은 아니었을런지.
‘킬로친..’에서는 ‘조낙영’이 생각나고 ‘살루트’에서는 ‘왕성규’가 떠오른다.
‘사양’은 조낙영에게서 빌려 읽은 책이었고 ‘개선문’은 왕성규의 권유로 읽었기 때문이다.
두 친구 각각 면모와 색감들이 대체로 그러하였다.
그 즈음.
대한민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쓰나미로 범람하였다.
기질에 맞는 놈은 제 세상 만나 설쳐댔고, 주눅 든 놈들은 그저 어리벙벙 뒤숭숭한 세월이었다.
‘잘 살아보세’는 사람에 따라 맘모니즘에 대한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의 주술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취하거나 취한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낙오(落伍)의 열패감(劣敗感)으로 똥줄이 탔을 것이다.
겉으로는 정신입네 예술입네 똥폼들을 잡았더라도 말이다.
방외의식(方外意識)인척 짐짓 시니컬한 폼잡기는 구상유취한 위선이었다.
시나브로 ‘경제’는 오로지한 절대신으로 좌정하고 있는 중이었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압축성장의 세월, 더불어 압축파괴의 세월이었다.
神으로 좌정한 경제논리 앞에서 대대(代代)로 이뻤던 것들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 시절 그 경제 神을 향하여 경배하지 않을자 뉘 있었으리.
사양(斜陽).
해는 기울어 일몰, 이제 오늘은 저물어 사라진다.
오늘은 바야흐로 멸망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칠흑(漆黑)의 밤이 지나면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터.
황금빛일지 검은빛일지.
내일의 태양은 아득하여 오늘은 그저 어둡다.
아, ‘자기 앞의 생’은 어디의 생일까.
오늘의 내일인가.
내일의 내일인가.
킬로친 킬로친 슈루슈루슈.
2.
20대 초엽, 독서량은 빈한하였고 허영은 승(勝)하였던, 그 때 접한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은 충격이었고 감동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이렇게 소설을 쓰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격렬하게 아름다웠다.
진짜배기 ‘문학’이라는 것을 만난 감격이었다.
내가 빠져들었던 ‘사양’의 주인공 ‘나오지’의 공책을 보라
[남에게 존경받으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놀고 싶다. 그러나 그런 좋은 사람들은 나하고 놀아 주지 않는다.]
[프라이드란 무엇이냐, 프라이드 말이야. 인간은 아니, 사내는, ‘나는 훌륭하다’, ‘나에게 좋은 점이 있다‘등을 생각하지 않고서 살아 갈수 없을까.]
[내가 조숙한 체 해 보였더니 사람들은 나를 조숙하다고 수군댔다, 내가 게으름뱅이인 체 해 보였더니 사람들은 나를 게으름뱅이라고 수군댔다, 내가 소설을 못 쓰는 체해 보였더니 사람들은 나를 못쓰는 사람이라고 수군댔다, 내가 거짓말쟁이인 체 해 보였더니 남들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수군댔다, 내가 부자인 체 했더니 남들은 나를 부자라고 수군댔다. 내가 냉담을 가장했더니 남들은 나를 냉담한 놈이라고 수군댔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괴로워서 나도 모르게 신음했더니 사람들은 나를 괴로운 체 하는 것이라고 수군댔다, 아무래도 어긋나기만 한다.]
[결국은 자살할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이처럼 괴로워 해도 겨우 자살로 끝날 뿐이라고 생각하니 그만 소리를 지르며 울어 버렸다.]
[불에 타서 죽는 것 같은 괴로움, 고통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럽다는 말 한마디, 반 마디, 절규하지 못한다. 예로부터 미증유, 인간 세상이 시작된 이래, 전례도 없는 바닥 모를 지옥의 기색, 속이지 말라. 사상? 거짓말. 주의? 거짓말. 이상? 거짓말. 질서? 거짓말. 성실? 진리? 순수? 모두 거짓말이다. 우시지마의 등나무는 수령 천 년, 구마노의 등나무는 수백 년이라고 들었는데 그 꽃의 술도 앞의 것은 최장ى척, 뒤의 것도م척이 넘는다고 하니 그 꽃 술에만 마음이 뛰는 듯 하다.]
[저것도 사람 자식, 살아 있다. 이론은 결국 논리에의 사랑이다. 살아 있는 인간에의 사랑이 아니다. 돈과 여자, 논리는 겸연쩍어 종종걸음으로 도망간다.
역사, 철학, 교육, 종교, 법률, 정치, 경제, 사회, 그런 학문보다는 한 사람의 처녀의 미소가 존귀하다고 하는 파우스트 박사의 용감한 실증.
학문이란 허영의 별명이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려고 하는 노력이다.]
[불량 아닌 인간이 있을까. 모래를 씹는 심정. 돈이 아쉽다. 그게 아니면, 잠든 채로 이루어지는 자연사.]
3.
다자이 오사무.
한 작가에게 그토록 매료될수 있었다니.
그때 나는 오사무의 종족(種族)이었다.
이제 늙어, 다시 읽는 다자이 오사무.
4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오사무는 다르게 읽히지 않았다.
동류의식은 여일하여 우리끼리는 그닥 퇴락하지 않았구나하고 한숨을 쉰다.
다행이란 말인지 딱하다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전자(前者)가 기분학적으로 나쁘지 아니하다.
이제 낫살들어 지껄이는 ‘다자이 오사무’는 좀 정련(精鍊)된 것이어야 할 터인데 어쩌나.
능력은 없지만 의욕만은 난만(爛漫)하다.
내 안에는 들끓는 오사무가 없지 아니하니까.
근데, 어떻게 지껄여야 할까.
4.
<자아의 불꽃에 소진되는 이상팽창된 영혼>.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다.
오사무에게 적절한 비유다.
다자이 오사무의 영혼은 지독하게 섬세하였고 지독하게 순결하였다.
지구별은 그의 별이 아니었다.
자유로울수 없었고, 자의식(自意識)은 스스로 불타 올랐다.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의 영혼을 살라 버렸다.
다시 ‘밀란 쿤데라’의 문장을 빌려온다.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세상 안에서 어떻게 살수 있는가? 타인들의 기쁨과 괴로움을 제 것으로 하지 못하면서, 그들과 한 통속이 되지 못하면서 어찌 그들과 함께 살수 있는가? 인생에서 참으로 견딜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감히 감득(感得)하는바 오사무의 존재의식은 분노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하는 모욕감으로.
스스로의 모욕감, 세상을 대하여는 한없는 부끄러움.
그리하여 그는 노여웠다
그 노여움에 이르려면 나와 같은 인종은 몇번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
뛰어난 당디가, 그 빼어난 예술성이 ‘태어나서 부끄럽다’고, 나는 새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는 자기고백에 이르려면.
아아, 천재만이 진짜배기 허무를 알고 절망을 안다.
허무가, 절망이 주는 따스함을 그대 아는가.
5.
<손님, 이 배는 몰락자만을 태웁니다.>
내 친구 조낙영이 지은 시(詩)의 일절(一節)이다.
사양호(斜陽號)라는 이름의 배.
네 사람의 몰락자.
마약중독으로 파멸해 가면서 고뇌에 뒹구는 ‘나오지’
지극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귀부인 ‘어머니’
몰락 너머 새로운 사랑과 혁명을 꿈꾸는 나오지의 누나 ‘가즈코’
패전의 현장, 동경에서 허무와 데까당으로 허물러져 가는 소설가 ‘우에하라’
4위1체 (四位一體).
네사람은 모두 ‘다자이 오사무’의 각기 다른 ‘페르소나’의 얼굴이다.
아름다운 어머니.
향기로운 기품과 오만함.
정직함과 성실함, 자존(自尊)이라는 기품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덕목.
나오지는 우에하라의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그 기품을 발견하였다.
<나의 비밀. 어떤 화가의 부인을 사랑하였습니다. 고귀라고 형언하면 좋을까, 내 주위의 귀족 가운데는 마마를 빼 놓고 그렇게 경계없이 ‘정직’한 눈의 표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고 단언할수 있습니다.-나오지의 유서->
<싸리꽃 숲 안으로 들어가 하얀 싸리꽃 사이로 더 선명하고 하얀 얼굴을 내놓고 웃음을 띠며. “가즈코, 어머니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맞춰봐” 라고 하셨다. “꽃을 꺾고 계시겠죠” 라고 말했더니 조그마하게 소리를 내어 웃으시면서, “소변을 보았어”.>
<“신문에 폐하의 사진이 나 있는 것 같았는데 한 번 더 보여 줘” 나는 신문의 그 부분을 어머니 얼굴 위로 보여 드렸다. “많이 늙으셨어!” “아니에요, 이건 사진이 잘못된 거에요. 일전의 사진은 정말 젊고 명랑하셨어요, 오히려 이런 시대를 기뻐하고 계신 거예요” “왜?” “그야 폐하께서도 이번에 해방되셨으니까요.” 어머니는 슬픈 듯이 웃고 잠시 후,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된거야” 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는 지금 행복한게 아닌가 싶었다. 행복감이란 것은 비애의 강바닥에 가라앉아 희미하게 빛나는 사금같은게 아닐지. 슬픔의 극치를 통과해서 기이한 엷은 빛을 보는 심정. 그게 행복감이라고 한다면 폐하도, 어머니도, 그리고 나도, 분명 지금 행복한 것이다.>
니힐의 정점에서도 ‘나오지’는 이 아름다운 어머니를 두고는 죽을수가 없었다.
<나는 진작 죽어야 했어요. 그러나 단 한가지. 마마의 사랑, 그걸 생각하면 죽을수 없었어요.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 그 죽음의 권리는 보류되어야만 하였어요.>
나는 오사무에게서 킁킁 냄새를 맡을수 있다.
귀족의 냄새.
내게도 있는.
로코코의 현란하고 엘레강스한, 귀족일수 밖에 없는 절망의 냄새.
자학(自虐)적 데포르마숑.
자전적(自傳的) 소설들 (인간실격, 광대의 꽃등)을 제외한 오사무의 여늬 소설은 빼어나게 아름답다.
유머러스하다.
도덕적으로도 고결한 것들이다.
산 속에서 외롭게 자란 야성적인 소녀, 그 순진무구함과 여자로서의 성숙과정 그리고 절망과 변신을 그린 소설 ‘어복기’는 한편의 환상적 동화.
‘로마네스크’에서의 기상천외한 스토리와 풍자는 ‘천명관’류 보다 훨씬 빼어나다.
'달려라 밀로스'등과 유작 '정의와 미소'등등등...
문장과 구성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오사무는 ‘스토리 텔러’로서도 뛰어난 작가였다.
'아쿠다가와'가 말하였다고 한다.
"인생은 한줄의 보들레르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오사무는 당디(Dandy)였다.
아니, 당디로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부유하고 한가하게, 오로지 우아함으로 탱자탱자하게 고급 취향의 취미나 누리면서.
'당디'로 살수 없는 외부의 삶.
그의 ‘생활의 공포’는 여기에 기인한다.
예수를 그리면서 (나는 오사무의 신앙관을 모른다. 다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가 지닌 순수하고 순결한 인간성을 그리워 하였음은 분명해 보였다 ) 순수를 동경하고 전혀 이기심없는 삶을 꿈꾸었던 오사무.
문학뿐이랴, 그는 정녕 당디의 일상을 꿈꾸지 않았으랴.
<문학에 있어서만은 절대적으로 이기적인 댄디즘을 신봉한다. -수필 중에서->
<나는 딜레당뜨(dilettant)다.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다. -수필 중에서->
<생활이란 무엇입니까? 쓸쓸함을 견디는 것입니다. -수필 중에서->
<나의 수많은 악덕중 가장 몹쓸 악덕은 나태이다. -수필 중에서->
<나의 문학생활 처음부터 아마도 끝까지. 보들레르에게만, 오직 그에게만 들어 보라는듯 고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수필 중에서->
<지금 일본에 스물일곱, 여덟 살의보들레르가 살아 있다면. 나를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말이다. -수필 중에서->
<우리 삶은 자급자족하는 아나키즘풍의 도원경이다. 미와 예지를 기준으로 하는. 아름다운 것 영리한 것은 모두 옳다. 추함과 우둔은 사형이다. -수필 중에서->
<십년지기 친구한테조차 함부로 마음을 주지 않는다. 예수그리스도의 괴로움에 고통스러워 하며 조락한 보들레르의 모습에 가슴을 태우며 그리워 한다. -수필 중에서->
<돈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다. 예술을 위하여. 상술이 좋아야 작품을 비싸게 팔아 먹던지. 부자의 상술에 비하면 늘 이류 일테지만. -수필 중에서->
<아아, 인간이 먹지 않으면 못 산다는 것은 얼마나 꼴사나운 일일까요. 이봐, 전쟁이 더 치열해져서 주먹밥 하나 놓고 다퉈가며 살아야 한다면 난 사는걸 그만둘래. -수필 중에서->
<나는 달걀말이를 좋아한다 가시가 없기 때문이다. 두부를 좋아한다. 먹는데 전혀 수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수필 중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절망과 문학.
<절망은 우아함을 낳는다. 거기에는 아무래도 미모의 사탄이 한마리 살고 있다. -수필 중에서->
<예술이란 무엇? 제비꽃.. 시시해. 시시한 것. 예술가란 무엇? 돼지코.그건 심하다.코는 제비꽃 냄새를 압니다. 오늘은 조금 신바람이 난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예술은 그때그때의 컨디션으로 생깁니다. -수필 중에서->
<문학에 난해는 있을수 없다. 난해란 자연 속에만 있는 것이다. 문학이란, 난해한 자연을 각자 자기 식으로 싹둑 잘라서(자르는척하여) 그 자른 부분의 선명함을 자랑하는데 잠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수필 중에서->
<프랑스 문학에서는 19세기라면 대개 발자크 플로베르와 같은 소위 대문호에 탄복하지 않으면 왠지 문인으로서의 자격이 모자란 듯한 이상한 상식이 있는것 같은데, 나는 별로야. 오히려 뮈세나 도데같은 작가를 몰래 애독하고 있지. -수필 중에서->
<러시아에서는 톨스토이 도스토예브스키등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나는 오히려 체홉이나 푸시킨같은 작가를 좋아하지.>
‘가즈코’가 ‘우에무라’에게 보내는 편지 말미에는 언제나 <m.c>라는 이니셜로 끝을 맺는다.
다층적인 의미가 있는 ‘가즈코’의 ‘위트’이다.
‘my comedian’이라는 시니컬한 뜻도 있지만, 그것은 주로 ‘마이 체홉 (체홉의 스펠링은?)’의 뜻이었다.
체홉의 ‘벚꽃동산’과 ‘사양’, 귀족계층의 몰락이라는 동일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사무는 체홉을 정말 좋아했던가 보았다. (내게도 체홉의 ‘벚꽃동산’은 최고의 희곡중 하나이다)
가즈코가 동경에서 우에무라의 ‘씨’를 받는 동안, 나오지는 자살하였다.
누나에게 남긴 유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누님.
나에게는 희망의 바탕이 없습니다.
안년히 계세요.
사요나라.
결국 나의 죽음은 자연사입니다.
사요나라.
누나.
나는 귀족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그는 천의무봉의 귀족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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