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레 미제라블 <전,후>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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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

 

***동우***

2012424

 

책부족 이번달 텍스트.

빅토르 마리 위고 (Victor-Marie Hugo,1802~1885)1862년에 발표한 대하소설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Full Text (동서문화사의 6권 짜리)로 읽었다.

방대한 분량, 거의 한달에 걸처 완독하였다.

그 많은 내용중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 독후감이랍시고 끄적거릴까 난감해지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얼마나 친근한 캐릭터인가.

장발장이라는 인물은.

장발장뿐인가, ‘미리엘 주교’ ‘꼬제뜨’ ‘자베르’ ‘마리우스’ ‘떼나르디에’ ‘에뽀닌느’...

어린시절 ! 무정이라는 책이름으로 읽었던 동화(童話)... ‘장발장이라는 제목의 학원사 소년문고... 그리고 두권짜리 소설 레미제라블’.

그리고 장발장으로 분()장가방’ ‘리노 벤추라’ ‘장 폴 벨몽도’ ‘리암 니슨의 영화들... 귀에 익은 뮤지컬의 노래들.

6권짜리라고 전혀 다르게 읽힐리야 없겠지만 풀 텍스트의 레미제라블은 느낌의 강도(强度)가 역시 달랐다.

 

세상을 증오하던 전과자가 어느 주교에 감화되어 개과천선한다.

그리하여 교양과 지혜와 용기와 관대함을 갖춘 완벽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가 벌이는 감동적인 행각(行脚)... 땀을 쥐게 하는 추적과 도피... 사랑과 갈등과 용서... 비열한 악당들과의 쟁투와 모험.

서스펜스와 함께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는 스토리.

레미제라블의 줄거리는 어찌 보면 사뭇 신파적(新派的)이다.

그렇지만 그 스토리가 통속(通俗)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찌 세계명작의 반열에 오를수 있었겠는가.

정밀한 리얼리즘... 간결하고 힘있는 문체... ‘레 미제라블은 격조(格調)높은 시정(詩情)이 녹아있는 대로망이었다.

더불어 대목 대목마다 설파(說破)하는 빅토르 위고의 박학강기(博學强記)에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의 철학적 사유는 무거웠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통찰은 예리하였으며, 다양한 분야에 대한 박물학적, 백과전서적 지식은 고금을 넘나들며 빛을 발하였다.

대혁명과 제정(帝政)과 왕정복고와 공화정에 관한 생각들에는 위고의 시대적 고뇌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빠리'라는 도시를 묘파한 풍경화와 풍속사(風俗史), 심지어는 은어(隱語)에 관한 언어학적 논설(論說)까지.

빅토르 위고는 나를 압도하였다.

그는 명실상부 대문호(大文豪)의 면모에 여실한 위인이었다.

 

'빠리'

혁명과 사상과 그리고 낭만의 도시.

수백 년,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표방한 계급사회의 족쇄에 묶여 신음하였던 도시.

그런 파리에서 1789년을 기점으로 하여 인간정신은 고양(高揚)되었다.

빠리의 공기 속에 배어있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세계사적 혁명이념.

위고는 빠리의 그러한 진보적 가치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빠리를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가 묘사한 빠리의 골목들과 술집들, 그리고 거대한 지하하수도.

심지어 빠리의 건달패와 부랑아들 까지도 그는 혁명의 숨결로써 사랑하였던 것이다.

악당 떼나르디에의 아들인 빠리의 꼬마 양아치 가브로슈’.

이 소년을 묘사한 대목을 읽으면서 내게는 어떤 그림이 떠올려졌다.

2월 혁명(1830)’을 그린 것이라는 낭만파 화가 '드라끄로와''민중을 이끄는 여신'.

그림을 보라.

젖가슴을 드러낸 여신의 왼 편에서 양손의 권총을 휘두르며 바리케이드를 넘어 전진하는 소년이 보일 것이다.

빠리와 혁명과 소년.

빅토르 위고의 심상의 어떤 그림, 그 상징하는 바를 유추해 낼수 있을것만 같다.

위고는 드라끄로와의 그림에서 차용하여 '가브로슈'라는 소년을 창작하지 않았을까.

 

<빠리의 부랑아는, 여기서 강조해 두거니와 표면상으로는 확실히 마멸되고 상처 입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거의 아무런 상처도 없다,

프랑스 민중혁명의 찬란한 성실성 속에 빛을 떨치는, 생각만 해도 멋진 사실은, 바닷 속에 포함된 염분과 마찬가지로 빠리의 공기 속에 포함된 관념이 만들어 내는 일종의 비부패성이다. -本文->

 

<빠리는 비상한 쾌활함이 있다,.... 빠리는 당당한 위용을 지니고 있다, 빠리는 세계를 해방하는 훌륭한ه14일을 가지고 있고, 모든 국민에게 테니스코트의 선서(헝법제정일의 맹세)를 하게 하고, 84일 밤(1789년 이날 밤 귀족의 특권폐지가 결의되었다)에는 불과 세 시간 만에 천년의 봉건 제도를 허물어뜨렸다....

빠리는 그 빛으로 각국의 독립투사를 가득 채워준다. 워싱턴을, 코스큐스코(러시아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폴란드 장군), 볼리바(스페인의 지배를 물리치고 볼리비아를 세운 장군), 보싸리스(그리스 독립전쟁의 영웅), 리에고(스페인 장군이며 애국자), 벰을, 마닌(오스트리아 지배에 저항한 이탈리아 애국자), 로페츠를, 존 브라운(미국의 노예 폐지론자, 교수형에 의한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남북전쟁이 촉발되었음), 그리고 가리발디(오스트리아 및 나폴리 왕국과 투쟁한 이탈리아 애국자). -本文->

 

<빠리는 미래의 불이 켜지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에든 존재한다.

1779년에는 보스턴(1773년에 일어난 미국 독립전쟁에 관한 사건), 1820년에는 레옹섬(1839년 니카라과 공화국 독립에 앞서는 사건), 1848년에는 뻬스트(항가리 독립), 1860년에는 빨레르모(이탈리아의 통일)에 빠리는 존재했다.

빠리는 지상의 위대한 것을 빛나게 한다, 바이런이 미쏠롱기에서 죽고, 마제트(페스트를 연구한 프랑스 의사)가 바르셀로나에서 죽은 것은 빠리의 입김에 불려간 것이다, 빠리는 미라보의 발 아래서는 연단이 되고, 로베스삐에르의 발 아래서는 분화구가 된다, 빠리의 책과 연극과 예술과 과학과 문학와 철학은 인류의 지도서이다, 빠리는 빠스깔, 레니에, 꼬르네이유, 데까르트, 장 자끄 루소를 가지고 있고, 매 순간을 통해서 볼떼르를, 각 세기를 통해서 몰리에르를 가지고 있다,

빠리의 지붕 위로 올라오는 연기는 세계의 사상이다.... 단호하게 행동할 것, 진보는 이것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웅대한 정복은 많든 적든 모두 대담성의 대가이다. 혁명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몽떼스끼외가 혁명을 예감하고, 디드로가 그것을 설명하고, 보마르셰가 선전하고, 꽁도르세가 계획하고, 아루에(볼테르)가 준비하고 루소가 깊이 검토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 당똥이 그것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과감하게!”라는 이 부르짖음은 이른바 성서의 빛이 있으라이다. 빠리는 행동하였다. -本文->

 

내 부박한 역사지식으로도, 실로 그러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빠리'야 말로 혁명의 세계수도였다.

온갖 정치적실험이 가능태로서 나타났다 스러졌다.

 

레 미제라블에는 종교와 철학과 사상과 행동주의에 있어서 많은 개혁가의 이름이 등장한다.

요한 후스, 루터, 데까르트, 볼테르, 꽁도르쎄, 로베스삐에르, 마라, 바뵈프, 쌩 시몽, 로버트 오웬, 푸리에...

혁명과 반혁명.

피보라 치는 숙청.

그리고 교차적으로 등장하는 반동(反動).

, 파리는 그야말로 격동의 도시였던 것이다.

고리오 영감에서도 말한바 있는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의 프랑스사는 내게 비상한 흥미를 유발한다.

그에 관한 문학과 음악과 그림은 늘 내 가슴을 뛰게 한다.

그 옛날 중고교 시절 세계사 시간, 선생의 노가리는 조금도 내 가슴을 덮여주지 못하였었지만.

 

레 미제라블1815년 장발장의 출옥(出獄)으로부터 시작하여 1832년 장발장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기간 중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한 소설이 레 미제라블이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도외시하고 '레미제라블'을 들여다 본다는건 어불성설이다.

 

장발장 등장 무렵의 역사를 개관한다

1789714: 파리시민이 바스띠유감옥을 공격함으로 대혁명의 봉화는 올랐다.

17929: 자코뱅당에 의하여 국민공회가 성립되어 공화정을 선언하였다, 이른바 로베스 삐에르의 1차 파리코뮌이다.

1793: 루이16세가 처형되고 다음해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 역시 길로틴에 목이 잘렸다.

1794: 이제는 로베스 삐에르가 숙청되어 그도 역시 길로틴에 목이 잘렸다.

1795~1799: 도독(都督)정부가 수립되어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주도권을 잡았다.

1799: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이 제1대 집정이 되어 집정(執政)정부가 성립되었다.

1804~1815: 나폴레옹 1세가 황제로 등극하여 제국이 들어섰다.

1806: 나폴레옹에 의하여 신성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1812: 나폴레옹, 러시아원정에서 패퇴하였다.

1813: 나폴레옹, 라이프찌히에서 연합국과 교전하였다.

1815: 나폴레옹,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다.

1815~1824: 부르봉왕조가 망명에서 돌아와 루이 18(루이 16세의 동생)가 왕이 되었다.

 

왕정복고 첫해인 1815.

그 해,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왔다.

대혁명(1789)무렵, 본시 장발장은 무지랭이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누이와 7명의 조카를 부양하며 살던중, 굶주리는 조카들을 위하여 빵을 훔치다가 체포되어 5년형의 선고받았으나 수차례 탈옥을 시도하다가 형이 늘어 19년만에 만기출옥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엄밀하게 말한다면 인민의 혁명이 아니었다.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마르크스의 프로레타리아 혁명이 발아(發芽)하기에는 변증의 역사는 아직 요원하였다. 프로레타리아 계급적 이념은 커녕, 개념조차 성숙되지 않았다. 우선은 역사 속에 부르주아의 시절이 더 무르익어야만 했던 것이다.> 

혁명으로 인민의 삶은 개선되지 않았고, 그들의 삶은 여전히 피폐하였다.

권력과 법률과 제도는 여전히 인민을 위한 장치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발장은 힘이 장사이며 또한 영리한 사나이였지만, 나쁜 천성으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궁핍이 그를 감옥에 가두었던 것이다.

<목에 차는 칼, 붉은 작업복, 족쇄, 피로 물든 감방의 나무판 침대 -本文에 묘사된 감방->

그 참혹하기 그지없는 감옥생활이 그를 세상을 증오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그러나 그러한  민중 속에 잠재되어 꿈틀거리는 미래의 희망을 보았다.

그리하여 '레미제라블'을 썼을 것이다.

 

<사회에는 법률과 풍습으로 말미암은 처벌이 존재하며 그것이 문명 속에 인위적으로 지옥을 만들어내어(감옥을 말하는 듯) 신성한 운명을 인간의 불행으로 뒤엉키게 하는 한, 그리고 이 시대 3가지 문제, 프롤레타리아의 탓으로 남자가 낙오되고(장발장을 말하는 듯), 굶주림으로 여자가 타락하고(고제뜨의 어머니 팡띤느를 말하는 듯), 어둠 때문에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악당 뎨나르디에의 아들 가브로슈를 말하는 듯) 3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또 어떤 지역에서 사회의 질식상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한, 다시 말해 넓게 보아 이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한 이러한 책들이 쓸모없지 않을 것이다. -186211일 오뜨빌하우스에서 빅토르 위고->

   

<민중은 대부분 글을 읽지 못한다, 그렇다고 빛이 이 집단을 꿰뚫을수는 없는 것인가?

, 철학자들이여 가르쳐라. 비춰라 불태워라. 생각하는 바를 숨김없이 털어 놓아라. 큰 소리로 말하라. 민중과 광장과 친하라. 교육을 시켜라. 권리를 선언하라. 마르세예즈를 노래하라. .

이 군중들은 훌륭하게 승화될수 있으리라, 정성을 다하라. 그리고 사상으로 하여금 하나의 선풍을 일으키게 하라. 이 군중들은 훌륭히 승화될수 있으리라

때로 번득이며 세차게 진동하는 저 광대한 주의(主義)와 도의의 불바다를 이용할줄 알지 않는가. 그 맨살이 드러난 발과 팔, 누더기, 무지, 비참, 비천함, 암흑 이러한 것들은 이상을 얻기 위해 쓰여질 것이다

여러분이 발 밑에 짓밟고 용광로 속에 넣어서 녹이고 끓이는 이 하찮은 돌멩이도 머잖아 찬란한 결정체가 될 것이다, 갈릴레오나 뉴턴이 천체를 발견한 것도 실로 이 모래알 덕택이다. -本文->

 

1815년의 왕정복고

공화의 이념으로부터 탄생한 나폴레옹은 제국을 건설한 황제였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폴레옹은 '앙시엥 레짐'은 아니었다. (나폴레옹 법전을 생각해보라)

위고는 나폴레옹보다 부르봉왕조의 부활에 더욱 절망하였을 것이다.

 

<독재정치의 종말, 유럽의 한 체제는 완전히 허물어졌다. 제국은 멸망해가는 로마처럼 암흑 속에 쓰러졌다. 사람들은 암흑시대처럼 다시 심연을 보았다.

멸망한 제국은 사실대로 말하면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더욱이 용감한 사람들 눈에 눈물을 흘리게 했다.

만약 영광이 제왕의 칼 속에 들어있는 것이라면 제국은 지난날 영광 그 자체였다.

제국은 압제자가 줄 수 있는 모든 빛을 지상에 흩뿌렸다. 그것은 어두운 빛, 아니 더 나아가 깜깜한 빛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어두운 밤의 소멸은 일식같은 인상을 주었다,

루이 18세는 다시 빠리로 돌아왔다.

코르시카인이라는 말은 베아른인(부르봉가문의 발상지)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루었다.

뛸르리 궁전 둥근 지붕에 나부끼는 기는 흰 기가 되었다. 망명자가 왕좌에 앉았던 것이다.... 

제왕들은 다시 왕위에 오르고, 유럽의 지배자는 우리 속에 갇히고(세인트 헤레나), 구체제는 신체제가 되고, 지상의 모든 빛과 그림자는 완전히 그 위치를 바꾸었다, -本文->

 

<허위가 1789(대혁명)과 결혼하고, 신권설(왕권신수설)이 헌법의 탈을 쓰고, 가짜제도는 입헌적이 되고, 편견과 미신과 저의는 헌법14(왕은 국가의 최고 수령으로서 육해공군을 통솔하고, 선전포고를 하고 평화와 동맹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관리를 임명하고, 법률의 적용과 국가의 안녕을 위하여 필요한 규정 및 명령을 내린다)를 핵심으로 하여 그 위에 자유주의를 칠해 놓았다. 구렁이가 허물을 벗는 식이었다

인간은 나뽈레옹에 의해 위대해 졌으며 아울러 왜소해 졌다, 이상은 화려한 물질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공상이라는 기묘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미래를 웃음거리로 만든 것은 위인의 중대한 실수였다. 그래도 민중은 대포에 몸을 바치면서도 그 포수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 그를 눈으로 찾고 있었다.

그는 어디 있는가,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마렝고와 워털루에서 싸운 어느 상이군인에게 지나가던 한 행인에게 물었다. -本文-> 

 

낡은 유럽, 유럽은 또다시 옛날로 돌아갔다.

1815년 빈회의에서 조약을 만들고, 유럽은 그것을 복고라고 이름 지었다.

황제(나폴레옹)가 경멸하던 미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옆길로.

빅토르 위고의 낭만주의냄새 물씬한 소설들.

위고의 소설들은 감동적이면서도 재미 또한 예사롭지 않다.

노트르담의 곱추’(예전 내 닉네임이 카지모도였었다)

그리고 93

노트르담의 곱추15세기가 배경인지라 예서 언급할 필요 없지만 '93’(혁명 직후인 1793년을 말한다)에서 혁명에 대한 빅토르 위고의 생각을 들여다 볼수 있다.

 

내가 '93'을 읽었던 시기는 장년이 훨씬 넘어서였다.

읽던 중, 내게 엄습한 감동의 빛깔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중학교적 학교 근처인 청진동 만화방에서 보았던 한 만화가 아련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어렴풋이 제목도 기억났는데 고성(古城)에 갇힌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박기당이나 김경언 류의 그림이 아님은 분명한데.. 김종래 였을까..)

낯이 익었다는 건 그 만화에서 느낀 감동이었던 것이다

 

레미제라블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왕정복고(王政復古) 시기가 배경이지만 '93은 대혁명의 동란기가 소설의 배경이다.

정부군(혁명군)에 대항하여 브레따뉴지방의 방데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방데의 왕당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정부군이 파견된다.

왕당군의 사령관은 완고한 반동(反動)인 늙은 '랑트나크 후작'이고 정부군의 지휘관은 젊은 이상주의자 '고뱅'이었는데, '랑트나크''고뱅'의 할아버지 뻘이 되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념을 달리하는 동족상잔, 빅토르 위고 역시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출신이었다.)

왕당군이 패하여 랑트나크는 성을 탈출한다.

그러나 불타는 성에는 인질로 잡혀있던 아이들이 갇혀 있었다.

아이들 어머니(만화의 한대목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여자는 한없이 약하지만 어머니는 한없이 강하다")의 처절한 비명.

'랑트나크'는 아이들을 구하려고 죽음을 각오하고 성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구하고 체포된다.

그리고 군법회의에서 기꺼이 사형을 선고 받는다.

혁명군 사령관 '고뱅'은 번민한다.

다음 문장은 인터넷에서 업어온 것이다. (나는 지금 책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조금전 인터넷에서 좋은 글을 얻었다)  

 

<봉건제도의 화신(化身)이었던 그가, 돌연히 변모하여 인간성을 찾았는데 자유와 해방을 표방하고 있는 우리가 유혈의 참사와 형제살해를 되풀이하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혁명이란 도대체 인간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가족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억압하기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혁명은 최상의 현실을 긍정하기 위한 것이다. 혁명의 의의는 가족이며, 인간성의 확보다. 혁명은 인민의 출현이며, 실로 인민은 인간의 공동체다.

무엇을 위한 혁명인가?

번민하던 고뱅은 한 밤중에 감옥으로 랑트나크 후작을 찾아간다

랑트나크 후작은 대관절 너는 이 군주에의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냐?”면서 너희들은 마구 두들겨 부수고 허물어뜨리는 것밖에는 모르는 야수라고 호통을 친다.

고뱅은 후작에게 자신의 외투와 모자를 건네주고 감옥 밖으로 내보낸다

공안위원회의 포고령에 의하면 적의 지휘관을 풀어준 지휘관은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감옥에 갇힌 고뱅을 시무르댕(고뱅의 스승인 혁명사상가)이 찾아온다.

여기서 두 사람은 혁명과 인류의 진보에 대해 치열한 논전(論戰)을 벌인다.

시무르댕은 권리와 의무가 평형을 유지하고, 비례세와 누진세, 병역의무제, 계급의 철폐, 이런 모든 것 위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공화국이 건설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뱅은 지금 말씀하신 것 어디에 헌신·희생·극기·관용·친절·사랑을 두시는 겁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선생님의 공화국은 인간을 계산하고 조정하고 통제하지만, 제 공화국은 인간을 자유로운 창공으로 데리고 간다고 말한다.

나는 유클리드 기하(幾何)로 된 사람을 원한다는 스승에게 제자는 저는 호머의 시로 교육된 사람을 원한다고 말한다.

개인은 누구에게나 신세를 지고 살고, 모든 사람은 서로 양보하는 넓은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알고 있다는 제자에게 스승은 엄격한 법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대꾸한다.

나는 정의(正義)밖에 인정하지 않네라고 스승이 말하면 제자는 정의 위에는 공정(公正)이 있다고 말한다.

스승이 가난한 사람의 구제를 말하면 제자는 나는 가난을 근절하고 싶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유토피아를 원하지만,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고뱅은 그 차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선생님은 의무적인 병사(兵舍)를 희망하시고, 저는 학교를 원합니다. 선생님은 군인같은 인간을 꿈꾸고 계시는데, 저는 시민적인 인간을 상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무서운 인간을 그리며, 저는 사색적인 인간을 그립니다. 당신은 칼의 공화국을 건설하려 하시고, 저는 정신적인 공화국을 세우기를 원합니다.”

다음날 아침, 경애하는 사령관의 죽음을 앞두고 고뱅의 부대원들은 시무르댕에게 그의 구명을 탄원한다.

하지만 시무르댕은 냉정하게 법대로 시행하라!”고 외친다

단두대의 칼날이 고뱅의 목에 떨어지는 순간, 시무르댕은 권총으로 자기의 심장을 쏘아 자결한다.

혁명은 화합일치이지 공포가 아니다

 

위고는 '93에서 프랑스대혁명이라는 역사의 동란기의 한 순간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로베스피에르·당통·마라 같은 혁명가들의 외모와 사상, 그리고 그들 간의 알력, 국민공회 의사당의 풍경,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고 실천에 옮기려는 인간군상(群像)의 모습,

혁명의 수도파리의 터질 듯한 긴장과 부조리, ()혁명의 소굴인 방데 농민들의 낙후되고 소박한 삶과 생각이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다가온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소설로 읽는 프랑스혁명사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단순히 프랑스 역사의 한 단면을 그려내는 것이 위고의 뜻은 아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혁명과 반혁명,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 관용에 기초한 세상을 꿈꾼다

여기서 '93''레미제라블'과 통한다

 

고뱅은 시무르댕에게 말한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겁니까? 보편적인 공화국만이 민중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민중을 위협하는 일은 그만둡시다. 위협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민심을 공포에 의해 끌어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새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을 행하기 위해서 악()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단두대를 그대로 세워두기 위해서 왕위를 뒤집어엎는 것은 아닙니다

왕에게는 죽음을, 국민에게는 삶을 줍시다. 왕관은 쓰러뜨립시다. 그러나 그 목은 용서합시다. 혁명은 화합일치이지 공포는 아닙니다. 사면이라는 말은 저에게는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로 여겨집니다.

저는 제 피를 흘릴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전쟁의 유혈을 원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싸우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저는 군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용서할 수 없는 처지라면 애써 이길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싸우는 동안 우리는 적()에 대해서 적으로서, 그렇게 행동합시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후에는 그들의 형제처럼 행동합시다.”>

 

이 소설을 또 한번 읽고 싶거니와 다른 이에게도 일독을 권하고자 한다.

레미제라블못지않은 감동을 보장한다.

 

'레미제라블'에서도 혁명에 대한 빅토르 위고의 생각은 '장발장''미리엘 주교'에게서 구현되어 있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이념을 위하여.

2천여년전 예수라는 사나이는 유대의 황야에서 사랑을 외쳤고, 1789년 빠리의 인민들은 바스띠유를 공격하였다.>

<혁명후 길로틴(단두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이 잘려 나갔다.

길로틴은 바로 법률의 집행이었고, 이념의 규현이었던 것이다.

길로틴은 사람을 삼키고 그 고기를 씹고 피를 빨아 마시는 악귀였다.>

<개혁가들은 무신론자이며 유물론자들이었다.>

 

레미제라블에서 그들은 미리엘 주교에게 강변한다.

<“낡은 세계는 정의의 이름아래 무자비하게 파괴되어야 한다. 정의에는 분노가 있는 법이고, 올바른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이다.”>

 

대혁명후 프랑스에서는 온갖 정치적 실험들이 행하여졌다.

내게는 그 현장에 '히틀러'도 보이고 '스탈린'도 보인다.

혁명후에도 민중의 궁핍은 여전하였다.

레 미제라블에서 묘사된 대목들.

농민들은 손수레가 없어 사람의 등으로 거름을 져내고, 초가 없어 관솔이나 송진에 적신 새끼를 태웠다.

반년치 빵을 한꺼번에 만들어 말린 쇠똥으로 구워내어 겨울에는 그 빵을 도끼로 쪼개어 먹을수 있도록 하루 종일 물에 담가 두었다.

당시 프랑스에는 출입문과 창문을 합쳐 문이 3개 밖에 없는 농가가 132만호이고 두 개짜리가 1817천호, 그리고 출입문 하나만 있는 농가가 346천호였다고 한다.

환기가 안되고 집안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온갖 질병이 발생하였는데, 출입문세 창문세라는게 있었기 때문에 문을 적게 만들었던 것이다.

법률은 공기까지도 백성들에게 팔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퇴한 늙은 혁명가(자코뱅당의)는 미리엘 주교에게 단정적으로 말한다.

<“누가 뭐래도 대혁명은 인류의 가장 힘찬 걸음이었다. 그리고 숭고한 것이었다. 혁명이 인류를 신성화 해준 것이다. 그리고 인류는 곤욕을 겪었지만 인류는 진보하였다”>.

 

, 그러할 것이다.

낡은 것들의 족쇄를 끊어 버릴수 있는 칼날.

그 칼날은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어버리는 알렉산드로스의 단칼일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천년 켜켜이 엉켜 있는 그 난마(亂麻)를 무슨 수로 단칼에 해결할수 있을런가 말이다.

 

-계속-

 

 

<레미제라블> -後-

 

현실 속에서 혁명의 이념은 늘 초조하다.

옛것을 뒤집어 엎고 단번에 새 판을 짠다는 것이 그리 쉬울손가.

혁명은 숨가쁘게 바쁘다.

추상(抽象)으로 어른거리는 이상(理想)은 손에 잡힐듯 가차운데 현실에서는 마냥 질척거린다.

초조함에서 우러난 성급함과 과감성. 그건 혁명이 가진 하나의 속성(屬性)이다.

그리하여 혁명아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내던진다.

역사에 헌신하는 거룩한 희생이라는 의식으로 말이다.

스스로에게까지, 그들의 이상주의(理想主義)는 사랑과 연민이 깃들 여유가 없다.

그러하므로 ‘당세(當世)의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더라도 역사는 진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은퇴한 자코뱅당의 인사가 미리엘 주교에게 말한 것처럼.

그렇지만, 펄떡펄떡 심장이 뛰는 산 것들의 목숨.

그 현장(現場)에 발을 딛고 있지 아니한 사상이나 행위가 인간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가 있단말가.

아무리 전대미문의 위대한 이상주의라 할지라도.

‘93년’에서 고뱅이 절규하지 아니하였던가.

개별적 생명의 구체성을 곰곰 들여다 보라.

거기에 무슨 이념이 있는가.

삶의 디테일, 그 곳에 이념에 근거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삶이란 공동체적 논리의 틀 속에서 설명되어 질수 있는 일관적인 관념 따위가 아니다.

규정지어 질수 없는 것이 실존의 모습이다.

생명이란 생명마다 고유(固有)함으로써 변화무쌍하게 찬란(燦爛)한 것이다.

“나는 어떤 관념 때문에 죽는 사람들에 대해서 신물이 난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것이다.”-알베르 까뮈-

앞에서 나는 말하였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혁명이념.

이를 위하여 예수는 ‘사랑’을 설파하였고 18세기 후반의 빠리는 바스띠유를 공격하고 길로틴을 춤추게 하였다.

 

‘레미제라블’의 이야기가 통속이 아니기 위하여는 장발장의 개심(改心)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의 인격에 감화(感化)된 그것만으로 한 인간의 영혼이 송두리째 바뀔수 있다는 신비함.

단순무지하고 난폭한 전과자가 어떻게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갱생(更生) 할수 있을까하는 비밀.

일거(一擧)에 장발장으로 하여금 새사람이 되게 하였던 사람은 디뉴의 주교 '마리엘'이었다.

'사랑함'과 '용서함'으로써,

마리엘 주교, 그는 진정한 예수의 사람이었다.

그의 예수는 도그마 속에서 형해화(形骸化)된 예수가 아니다.

죄는 인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근거한 것.

마리엘 주교는 죄(罪)의 문제를 ‘에덴의 선악과’에 미루는 그런 도그마의 사제(司祭)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회적 환경’과 ‘무지’가 ‘죄’를 만든다는 사실, 사회과학적으로 그는 적확(的確)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 그 누구도 멸시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그는 가난한 자와 도적과 사형수에게 아버지며 형제며 친구였다.

 

本文에서.

<“신(神)이 본디 선량하게 만든 인간이 다른 인간으로 말미암아 악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운명과 환경에 의하여 영혼이 병드는 것이다.”>

<“너의 행복의 넘침에는 언제나 남의 몫이 들어가 있다”>

<"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은 천사의 꿈이다. 땅위의 모든 것은 죄를 면할수 없다. 죄는 일종의 인력과 같다.">

<"무지한 인간에게는 되도록 많은 것을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된다, 무료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죄악이다. 사회는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암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죄인은 죄를 저지른 자가 아니라 영혼 속에 그늘을 만들어 준 자이다.

여자와 어린이와 하인과 약한 자와 무지한 자의 과실은, 모두 남편과 어버이와 주인과 강한 자와 부자와 학문있는 자의 탓이다.">

 

'마리엘 주교'의 입은 '빅토르 위고'의 입이다.

그는 혁명의 '이성적(理性的) 초조함'으로 범하는 불의에 대하여 결코 순복할수 없었다.

그에게 인간의 이성(理性)이란 놈은 그다지 믿을만한 물건이 되지 못한다.

순수이성이란 헛된 망상, 이성에는 곧잘 불순물이 섞여 이성은 분노하고 이성은 증오한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유발하고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부른다.

그러나 이성의 바닥에는 또 하나의 마음의 세계, 사랑과 연민이란 것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인간에게 깃든 영적인 어떤 것이다.

'고뱅'은 '시무르댕'에게 묻는다.

<분노와 증오와 폭력 속에 헌신과 희생과 극기와 관용과 친절과 사랑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마리엘 주교는 말한다.

<“진보는 주님의 믿음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면 안됩니다, 무신론자는 인류의 나쁜 지도자입니다.”>

<“재판관은 정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사제는 연민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연민은 한결 높은 정의 바로 그것이오.”>

미리엘 주교는 기독교의 사제(司祭)였지만 어쩌면 그는 ‘범신론자(汎神論者)였다.

그의 사랑이란 신앙을 넘고 신앙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지나친 사랑이었다.

위고가 말하는 ‘지나친 사랑’이란, “맑은 물과 같은 ‘순수한 친절’, 그것이었다.

"순수한 친절"

<“그는 ‘주님’을 연구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에 매혹되어 있었다.”>

<천재들에게는 체계적 사상은 있는데 행위는 없다. 천재들은 추상과 순수사변의 바닥 모를 심연에 빠져 들어가, 갖가지 교리 위에 높이 앉아서 자기들 사상을 신에게 제시한다. 그들의 기도는 의론의 제출이며 그들의 예배는 질문이다,>

<주교는 지름길, 곧 복음서의 길만을 택했다. (이를테면 성서의 해석이 아닌 예수의 팩트만을)>

<주교는 자신의 법의에 엘리야의 외투주름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예언자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의미일 것). 그에게 예언자다운 점은 하나도 없었다. 이 겸허한 영혼은 오직 사랑할 뿐이었다. 그것이 그의 전부였다. 서로 사랑하라, 완전무결한 이 말 한마디, 거기에 그의 모든 교리가 있었다, 그는 단순한 하나의 인간이었다.>

은접시를 훔쳐 도망간 장발장이 헌병에게 잡혀 끌려 왔을 때 미리엘 주교는 그의 절도를 은폐하고 은촛대까지 내어준다.

<내 형제인 장발장, 당신은 이제 악에 사는 게 아니라 선에 사는 것이오. 나는 당신을 위해 당신의 영혼을 샀소. 나는 당신의 영혼을 암담한 생각과 파멸의 정신에서 끌어내어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로써 장발장의 심령에는 기적의 폭풍우가 불기 시작하였다.

전율과 불안.

그는 어제와 같은 단순한 인간으로 남아 있을수는 없었다.

고뇌하는 인간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자기 마음 속에 일어나는 것을 그는 도무지 무엇인지 이해할수 없었다, 그의 영혼에 주교는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마치 너무나 강렬한 빛이 어둠 속에서 나온 그를 고통스럽게 하였다.>

장발장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소년의 40수짜리 은화를 발로 밟아 감추었다.

자율신경계 까지 침투한 자신의 범죄본능을 발견하고는 장발장은 전율하고 번뇌한다.

은화를 돌려 주려고 미친듯 소년을 찾지만 소년의 자취는 찾을수 없다.

도중에 만난 어떤 신부에게 장발장은 외친다.

“사제님 나를 체포해 주십시오! 나는 도둑입니다!”

들판에서 몸부림치면서 부르짖는 장발장.

“아! 나는 불쌍한 인간이다!”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은19년 이래 처음 터뜨린 울음이었다.

이 마지막 악행은 그에게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한없이 울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울고, 흐느끼며 울었다, 여자보다도 연약해 지고 어린아이보다도 무서움에 떨면서. 울고 있는 동안에 그의 머리 속이 차츰 밝아져 왔다. 기이한 밝음, 홀가분하고 무서운 밝음이었다,>

<그의 과거의 생애, 최초의 과실, 길고 긴 속죄, 그리고 짐승처럼 되어 버린 겉모습, 서서히 굳어져 냉혹해진 내면, 그토록 많은 복수를 계획하며 기다린 석방, 주교의 집에서 일어난 일, 마지막으로 그가 저지른 일, 소년에게서 40수를 훔친 일, 주교의 용서 뒤에 있었던 일이니만큼 더욱 비겁하고 더욱 흉악스러웠던 그 죄. 그 모든 것이 그의 머릿 속에 또렷이 되살아 나 이제까지 본 적 없었던 밝음 속에 떠올랐다.>

그날 밤.

어느 마차꾼이 새벽 3시쯤 주교관 앞을 지날 때 비앵브뉘 각하(미리엘 주교)의 집 문 앞 어둠속에서 기도드리듯 돌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한 사나이를 보았다.

그 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선량한 인간이 되려면 천사가 되어야 하고 나쁜 인간으로 머물러 있으려면 악마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장발장은 악마는 되지 않기로 결심하였고, 그러니 천사가 될수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굳세고 굳센, 강인한 천사.

장발장은 죽을 때까지 미리엘 주교로부터 받은 은촛대를 생명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몇년후.

장발장은 마드렌느(장발장이라는 이름은 소년의 은화를 훔쳤고, 가석방의 조건을 어긴 수배죄인의 이름이었다)라는 이름의 공장주(工場主)와 시장(市長)이라는 성공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교양과 지혜와 관대함을 갖춘 人士로.

그리고 자기 대신 체포된 남자를 구하기 위하여 부귀와 존경의 세계를 박차고 그 어두운 감옥, 그 비참함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하는 놀랍고 강력한 힘.

그 힘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참혹한 감옥생활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그리고 진실과 정의를 향한 양심 사이의 갈등.

그 과정에 빅토르 위고는 많은 장(章)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하여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연이어 닥치는 여러 장애를 극복하고 드디어 재판정에 등장하여 '내가 장발장이노라'고 선언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한 인간에게 그 존재를 생활을 평화를 햇볕을 빼앗으려 한다. 나는 살인자가 되려 하고 있다. 가엾은 한 사나이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산채로 죽은 죽음, 감옥이라고 부르는 그 죽음을. 다시 죄수 장발장이 되는 의무를 다하자. 그것이 바로 진실의 부활이다.>

장발장이라는 사나이의 영혼의 변모.

그것은 변화(變化)가 아니라 가히 변용(變容)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인간 마음의 신비함에 대하여 강변(强辯)한다.

<아, 인간의 마음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복잡하고 신비로우며 무한한 것은 없다. 바다보다도 더 장대한 광경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이요, 하늘보다도 더 장대한 광경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이다. 감동과 전율 없이는 이 삶에서 인간의 의식 밑바닥을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

 

옆길로.

게거품 물고 남의 불륜(不倫)을 질타해 마지않던 사람들, 자기가 하면 로맨스인가.

제 나름으로 정당(正當)한 이념을 코끝에 걸면 까짓 방법론이야 어떠랴하는 배짱인가.

전술전략적 유리함 있다면 무언들 마다하랴.

작금, 스스로의 가치를 스스로 배신한 어느 정당 (통합진보당)의 꼬라지를 본다.

무릇 이념이란 순정(純正)함으로 고귀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 자유와 평등과 박애. (초기에는 ‘박애’ 대신 ‘권리’였다고 한다)

삼색기(三色旗) 휘날리며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가슴들은 순정한 피로 뜨거웠을 것이다.

그들은 소명감에 불타서 외쳤다.

인민이여 일어나라! 혁명이다! 우리의 적 ‘앙시엥 레짐’. 수천년 얼어붙은 저 빙하, 막강(莫强)하게 결속된 저 연대(連帶). 저것을 녹이고 깨부수자! 선혈(鮮血)로써 녹이고 증오로써 깨뜨리자!

동지들의 피가 흐른다, 적들의 피가 흐른다. 강물처럼 흐른다.

삼색 깃발은 피에 젖었고, ‘라마르세예즈’를 부르는 목소리는 복수심으로 들떠 있다.

‘시또양’(시민동지)은 서로서로 눈이 붉다.

혁명아(革命兒)들은 열에 들떠 죄다 눈들이 붉다.

열정으로 붉고 소명감으로 붉고 조급함으로 그들의 눈은 붉다.

그리고 작금, 시대정의의 담론(談論)이랍시고 하나의 주의주장을 핏대세워 떠드는 사람들의 눈 또한 대체로 붉더라.

느끼건대 그들 이념이 표상하는바 정의로움은 자의적(恣意的)이기 일쑤이다.

근본적으로 순정함이 아니라 전략상 강개(慷慨)함으로 그들의 눈은 붉다.

1962년 5월 한강을 건너는 군인들의 눈은 붉었다.

문화혁명의 홍위병, 알카에다의 자폭전사, 킬링필드의 크메르루즈, 국가사회주의 나치의 눈도 붉었을 것이다.

붉은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편면(片面)의 노선(路線) 뿐이다.

눈가리개로 결승선(목적)을 향하여서만 시야(視野)가 고정된 경주마.

다원주의(多元主義)적 사고는 용납될 수가 없다.

편협한 이념의 성취만이 오로지한 절대선(絶對善)이다.

수단과 과정에 대한 심사숙고는 목적에 종속된 차선(次善)일 뿐이다.

그들은 이념의 일관성에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개별적 삶을 쑤셔 넣는다.

개별적 삶의 구체성이란 이념을 위해서는 호리의 가치도 없다.

북녘, 배고파 우짖는 인민들의 삶을 주체사상의 이념 속에다 우겨 넣는다.

나는 꽃제비의 참상을 접할 때마다 살이 부르르 떨린다.

굶어죽고 얼어죽는 판에 주체사상 따위가 한그릇 밥이 되고 한조각 입성이 된단말가.

붉은 눈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집단주의’로서의 가치 뿐이다.

집단주의란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개념이다.

목적지상주의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집단이다.

거창한 목적을 위한 창조행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격앙된 흥분이 바로 집단주의의 붉은 눈을 만드는 것이다.

붉은 눈의 프로파간다는 죄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따위인 것이다.

집단주의, 동지와 동무들의 연대(連帶).

집단이 개별을 잡아 먹고, 목적이 과정을 잡아 먹기 십상인 연대.

위대한 지성들은 말하였다.

‘전체는 거짓이다’라고

‘집단에 지성은 없다. 광기만 있을뿐’이라고.

‘대중은 결코 최고기준에 도달할수 없다. 오히려 최저기준으로 개인을 끌어 내린다’라고.

처칠이 말하였다던가.

“20대에 진보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40대에 보수가 아니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열정과 지혜를 통찰한 얼마나 근사한 말씀인지.

젊은놈들이 늙은이를 향하여 ‘꼰대’라 하는 것도 옳고 늙은놈들이 젊은이를 향하여 ‘애숭이들’하는 것도 옳도다.

공자님의 약관(弱冠)이라는 말씀은 젊은이를 좀 얕잡아 보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남아사십불혹(男兒四十不惑)이라는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빠져 버렸네.)

 

그런데 어인 일인가.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앙시엥레짐(부르봉 왕가)은 거침없이 빠리에 진입하여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복고정부는 ‘보나빠르뜨’를 이겼고 옛 왕권신수설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 복고정부는 프랑스에 전면으로 맞섰다. 집단의 권리와 개인의 권리, 곧 국민의 주권과 시민의 자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여 국민의 권리를 부인하였다. -本文->

1817년경, 왕정(王政)은 점점 공고해져갔다.

<폐하, 민중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런 두려울게 없습니다. 위험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요컨대 그들은 천민이옵니다.-本文->

 

왕정복고의 세월, ‘시또양 (시민동지)’은 모두 어디에 있었던가.

집단이 되지 못한 시또양.

어찌하여 그들은 또다시 왕권에 복속하는 직수굿한 신민(臣民)으로 되돌아 가고 말았는가.

아, 그것은 ‘붉은 눈’의 피로함 때문이었다.

질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혁명의 정서로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카리스마도 인민들을 피곤하게 하였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는 삶의 구체성을 체현(體現)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먹고 자고 입고 사랑하는 일상성의 삶의 형태에서 붉은 눈은 불편하고 곤혹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미라보’와 함께 뛰었고 다음엔 ‘로베스삐에르’, 세 번째는 ‘보나빠르뜨’와 함께 뛰느라 완전히 지쳐 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은 잠자리와 안식처를 요구하고 있었다. -本文->

그러나 빠리는 죽어 있는게 아니었다.

일찌기 빠리는 인류를 각성시켰고, 가지가지 정치적 실험이 이루어 진 도시였다.

빠리야말로 현대를 아우르는 근세사의 뭇 이데올로기의 명실상부한 수도였다.

인민은 다시 일어났고 좌절하다가 다시 일어났다.

반동과 혁명은 교차적 등장하였다가 사라졌다.

풀은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공화의 이념은 빠리의 대기에 언제나 녹아 있었다.

그리고 공화주의자 빅토르 위고는 빠리를 사랑하였다.

'레미제라블'에서 위고는 선언한다.

<1789년의 대혁명은 인간에게 제2의 영혼이랄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대혁명은 인간을 재창조하였다. 19세기는 그 위업을 계승하고 덕을 입은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1802년 출생하여 1885년에 죽어 팡테옹에 묻혔다.

대혁명(1789년) 이후 출생하여 나폴레옹 치하에서 소년기를 보냈고 왕정복고기에 청장년기를 지냈다.

1830년의 7월 혁명과 1848년의 2월 혁명의 와중에 그가 있었고,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3세)의 쿠데타에 항거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다.

‘레미제라블’은 1862년, 그의 만년의 작품이다.

‘사랑함’‘용서함’‘순수한 친절’.

‘길로틴’과 대척점에 있는 이 순정한 어휘들.

대혁명으로부터 거의 한세기 후, 노대가(老大家)의 작품에 나오는 언어들이다.

혁명의 진정한 완성은 휴머니즘에 있다는 위대한 시인의 통찰.

장발장은 죄를 묻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죄를 용서하는 자였다.

행동하는 양심이었고 행동하는 정의였다.

도그마에 갇혀있지 않은 기독교 정신과 혁명의 이념은 크게 다를바 없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자유하라, 평등하라, 서로 사랑하라.

<위고의 83년간에 걸친 일생은 19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사회의 변천과 함께 그의 사상과 작품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일관해 흐르는 것은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의 불같은 정열이다. 위고의 시는 시대의 낭랑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이렇게 너무나 낙관적인 이상주의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열적인 웅장함은 감상에 빠지기 쉬운 낭만파 시인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비길 데 없는 천성과 함께 위고를 낭만파 지도자로 만들었고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시인의 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 -위키피디아->

 

여섯권에 이르는 빅토르 위고의 이 장대한 소설에서 할 말이 이뿐일까마는 힘에 부처서 서둘러 마무리하련다.

작가는 많은 장을 할애하여 소설의 배경이 되는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신앙에 관하여. (수도원에 관한 것도)

역사와 철학에 관하여. (특히 허무주의에 대한).

폭동과 반란과 혁명의 정의(定意)에 대하여.

‘바리케이드’에 관하여. (시민혁명에 대한 물리적 정치적 사회적 역학같은.)

워털루 전쟁에 대하여.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을 그리워하였다)

은어(隱語)에 관하여 (위고는 지질학을 연구하듯 은어를 연구하였다. 알아들을수 없는 나는 대충대충 건너 뛰었지만, 옛 프랑스 통속어의 밑바닥까지. 프로방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영어 독일어 로망어 라틴어 바스크어 켈트어까지.)

'빠리의 미립자 연구'라는 항목에서는 빠리의 악당과 범죄자 건달패들의 얘기도 들려준다.

 

장발장 외 다른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 대하여도 몇마디 언급한다.

 

팡띤느.

<5년 동안 헤어진 아기를 그리워 하면서 죽는 꼬제뜨의 어머니 팡띤느의 슬픔... 머리카락을 10프랑에 팔고서. 이제 우리 아기는 춥지 않겠지... 사러가요 고운 것을. 들길을 거닐면서. 들국화는 푸르고, 장미는 붉고. 들국화는 푸르고. 우리 아가는 귀엽네....>

 

악당 떼나르디에의 딸 에뽀닌느.

<짝사랑하는 마리우스를 구하려 목숨까지 내어주는 눈물겨운 순애보(殉愛譜)...>

 

꼬제뜨와 마리우스의 사랑.

<천사처럼 순결하게 사랑한 두 사람...>

 

마리우스.

<부르봉파이자 과격파였던 낡은 외피를 완전히 벗어버렸을 때. 귀족주의, 근왕당, 왕당파의 옷을 벗었을 때.완전히 혁명파가 되고 깊은 신념을 가진 민주파가 되고 거의 공화파로까지 되었을 때. 마리우스는 오르페브르 강가의 어느 인쇄소로 가서 ‘남작 마리우스 뽕메르씨’라는 이름의 명함을 100장 주문했다.....>

 

마리우스의 외할아버지 질노르망.

<로베스삐에르를 위해 일한 놈들, 부오나빠르뜨(나뽈레옹을 노인은 이렇게 불렀다)를 위해 일한 놈들은 전부가 강도야! 국왕을, 정통 국왕을 배신한 놈들은 모두 반역자야!....>

 

자베르 경감.

<단순한 두가지 감정으로 구성된 성격. 주권에 대한 존경과 반역에 대한 증오. 도둑질이나 살인등 범죄는 반역의 다른 형태로 취급하는 사나이....금욕주의자이고 진지하고 엄숙함을 지닌 음울한 몽상가.... 광신자처럼 겸손하고도 거만한 그의 눈초리는 차디차고 날카로운....그의 생애는 경계와 감시 두마디 말로 요약할수 있다....세상에 봉사하는 것을 양심의 신조로 삼은...직무수행은 바로 그의 종교...청빈과 고독...제 아비가 탈옥했더라도 어미가 죄를 저질렀더라도 잡아들일 사나이....종장에 장발장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경험한 자베르는 도무지 견딜수가 없다..그의 인간성에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훈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살을 택하여 세느 강에 몸을 던진다....자베르는 무언가 무서운 것이, 죄인에 대한 찬탄의 마음이 영혼 가운데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런 존경, 이런 일이 있을수 있는가. 그는 무섭고 소름이 끼쳐 몸을 가눌수 없었다....자베르의 마음에 일어난 일, 그것은 직선적인 양심이 휘어지는 것이고, 영혼의 탈선이며, 저항할수 없는 힘으로 똑바로 돌진하여 신에게 부딪쳐서 부서지는, 바로 청렴의 붕괴였다....>

 

얼렁뚱땅 마무리 하련다.

‘레 미제라블’

소설의 마지막 장.

장발장 무덤의 비석에는 희미한 흔적의 글씨가 보였다.

 

<그가 잠들었네. 운명은 그에게 몹시 가혹했어도 그는 살았네. 천사를 잃어버리자 그는 죽었네. 올 일은 찾아왔네. 낮이 가면 밤이 오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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