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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를 생각한다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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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

2013년 4월 13일 포스팅

 

[['생텍쥐페리'를 생각한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

얼마전까지만 해도 내게 ‘쌩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왕자의 투명함과 정결함과 순수(純粹)함..

한줄기 서늘한 허무(虛無)와 짙은 우수(憂愁)가 감돌고 있었던 어린 왕자의 사막. <T.E.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사막이 그러하였듯이>..

 

그래서 내게 쌩텍쥐페리의 책은 '어린왕자'만 가지고 있는줄 알았다.

찾아보니, 언제 샀는지 쌩텍쥐페리의 다른 책 몇권이 눈에 띠었다.

한번도 펼친 자욱없이 책장 한 구석 뒷편에 꽂혀 있었던, 생텍쥐페리 평전(評傳) ‘신 앞에 선 작가’와 옛날 삼성판 세계문학 전집의 ‘성채'와 그의 단편집등.

내게는 어린왕자의 이미저리(imagery)가 ‘생텍쥐페리’라는 작가의 전부로 자리잡고 있었던가 보았다.

그래서 생텍쥐페리의 여타 다른 책들은 관심을 둘 여지가 없지 않았나 싶기도하다.

 

그런데 달포 전부터 나는 ‘쌩텍쥐페리’에게 ‘이른바’꽂혀버렸다. <계기는 밝히지 않으련다>

책으로 또는 사이버로 열심히 그의 글들을 찾아 읽었다.

그리하여 쌩텍쥐페리의 많은 작품들을 읽었다.

연후(然後), 독후의 소회(所懷)를 짧게 말하라고 한다면 이러하다.

‘쌩떽스’(생텍쥐페리의 애칭)는 어린왕자에만 머물 작가가 아니었다는.

‘어린 왕자’하나만 두고보더라도 더 깊이있는 사유로 어프로치했어야 했다는.

외로움과 사랑스러움과 정결함과 우수(憂愁)같은 이미저리만이 아니라 철학적 명제로 가득찬 은유(隱喩)를 읽고자 했어야..

 

앙뜨완느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 Exupéry).

1900년 프랑스 리용에서 태어나 마흔네살(1944년)되던 해 애기(愛機)와 함께 홀연히 지구별로부터 사라져 버린 작가. <독일군에 격추되었을 것으로 추측>

그는, 비행(飛行)을 사랑한 파일럿이었고 사막과 별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창공(蒼空)에서 내려다 보는 대지(大地)와 별무리 찬란한 밤하늘 우주의 의미를 천착(穿鑿)한 사색인이었고, 스페인 내전과 2차세계대전 그리고 항공로 개척에 투신한 행동인이었다.

그리고 어린 왕자의 맑은 눈으로 세계와 인간을 인식하려한 철학자였다.

더불어 시정 넘치는 글을 쓰는 작가였고.

 

쌩떽스(애칭)의 감정모태, 나는 상당히 보수적인 그의 면모를 읽었는데 그것은 기독교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도그마의 기독교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17년 무렵부터 생떽스는 그 이전의 종교적 관습을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신학이나 형이상학이 근대 인간의 인성(人性)과 모순되는 것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기독교의 예정론적(종말론적) 역사관과 세계관의 인식에서 벗어난, 역사발전을 신봉한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역사발전.

그것은 맑스의 ‘변증법적으로 도래하는 역사발전’이 아니라 '축적되는 문명'으로서의 역사발전'인 것이다.

 

[내일의 문명은 인간을 신과 유사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나의 문명은 인간의 존엄에 입각해 있다 -전투조종사-]

[니체의 발자취를 따르며, 신과 인간의 교대라는 명제를 답습하고 있는 측면이 쌩떽스에게는 있었고, 신이 없음으로 인간의 가능성은 더욱 확장될수 있다는 생각이 그에게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을 구축함에 있어 쌩떽스에게 경의와 공명을 표하기도 하였다. –평전에서-]

 

내게 느껴지는 쌩떽스의 영혼은 지극히 종교적인 모습이었다.

적어도 세상과 인간을 파악하는 그의 태도는 이성(理性)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신적’(神的-신비주의적) 통찰(通察)..

파스칼이 설파하는 ‘이성이 아니라 심정(心情)에 직관되는 신의식(神意識) 같은.

 

[우리는 神을 향해 걷는 영원한 유랑민이다... 神은 잠시 우리의 세대를 길로서 선택하고 그것을 다 써버린다.–성채-]

[주여, 나는 당신의 곁으로 갑니다. 당신의 이름에 의해서 나는 땅을 경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씨를 뿌려 주세요. 나는 이 큰 촛불을 세웠습니다, 이번에는 당신이 거기에 불을 붙여 주십시오 –성채-]

 

인간성에 깃든 영혼의 위대함, 존엄성, 인류의 연대감, 미소, 사랑, 갈망...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은 <축소(縮小)된 것일망정> 여전히 그의 영혼에 깃들어 있었던 신적인 어떤 영역이었을 것이다. <내 주제에 쌩떽스의 종교관을 언설(言說)할수 있을까마는>

그는 믿었다.

이윽고 멸망하는 유한성(有限性)의 존재인 인간이지만, 개별적 인간성 안에는 그 유한성을 초극하는 어떤 생명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간의 생명보다 더 영속적인, 구제되어야 할 그 무엇이 인생에는 있을 것이다. -야간비행-]

[하나의 문명은 그것이 영혼에 대하여 제시하는 내적인 확산의 양과 질에 의하여 측량된다. 정신적인 확산의 감각 속에서야말로 모든 사람의 의지는 서로 통할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 확산에의 기호를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감동적 찬가이다... 신(神) 속에 평등 존엄 우애 희망의 덕이 있다...인간의 종교 기독교는 우리 배후에 모방해야 할 범례로서 존재한다. -평전에서-]

 

무엇보다 비행(飛行)을 사랑하였던 쌩떽스.

쌩떽스는 진실로 비행기와 비행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실증주의적 과학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비행기라는 기계는 근대과학의 산물이고, 파일럿(특히 개척기의 파일럿)은 그 기계를 목숨으로서 신뢰하는 엔지니어가 아닌가>

비행에 의하여 쌩떽스의 사유(思惟)는 고양(高揚)되었다.

대지와 사막과 길과 산맥과 바다와 도시와 사람들을 조감(鳥瞰)하면서 구름의 냄새와 별의 향기에 취하여 그의 시흥(詩興)은 고무(鼓舞)되었을 것이다.

비행이 있음으로 그는 인류적 연대감과 행동주의와 인간의 책무에 대한 자각도 있었을 것이다.

위험한 비행을 통하여 사나이다운 용기와 진지함으로 인간이라는 조건을 성찰하려고도 하였을 것이다.

나와 같은 속물은 때로, 눈 아래 펼쳐지는 거시적시각(巨視的視覺)에 의하여 스스로에다 만화같은 거시적 의미를 슬쩍 대입케도 되더라. <맞바람 거센 금정산 산정(山頂)에서 저 아래 도시를 내려다 보면서 지긋이 어금니를 깨물면 홍진(紅塵)의 저자거리 세상사가 좀 우스워 보이고, 자못 제우스라도 된듯 전능하고 오만한 영웅주의의 공상으로 자뻑(?)하기도.. ㅎㅎㅎ>

쌩떽스의 친구들, ‘메르모즈’나 ‘기욤메’에게서는 도저(到底)한 히로이즘(영웅주의)이 넘실댄다.

자연과 개척과 생명에 도전하여 행위하는 그들은 파일럿이었다.

영웅이란 인격의 고귀함과 희생정신으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행동하는 휴머니스트들이다.

그 직무는 위선도 아니고 허영도 아니고 오로지 그들 인간성이 자각한 각성된 하나의 직무(職務)였다.

사람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정신의 농밀성>이야말로 신적(神的)인, 영웅적인 그 무엇의 씨앗.

정신의 농밀성에서 행동주의는 탄생한다.

그 행동주의로 인하여 인간은 점진(漸進)이 아니라 비약으로 확장된다.

 

[인간은 어머니인 대지에서 중력에 대항해서, 동시에 중력의 은혜를 받으며 성장한다. 중력이라는 장애는 하나의 기회이니까.]

[인간은 확실한 본능에 사로잡혀서 스스로의 생성을 구한다. 단 인간은 그 생성에 대하여 어떠한 하나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수도사의 기도하는 시간.. 파스퇴르가 집중하는 현미경.. 세잔느 무아경의 그림..그와 같은 정신의 농밀성.]

[생명은 선사시대의 암흑 속에서 태어나 데카르트 바하 파스칼과 같은 높은 꼭대기를 향하는 수액의 상승과 같은 의식의 상승, 그것이 인생의 의미다.]

[행동은 인간을 사멸로부터 해방시켜 준다...이윽고 멸망하는 육체.. 육체가 멸망해도 살아남는 사업과 교환하는 삶....해결은 없을지라도 전진하고 있는 여러 힘의 행동... -야간비행-]

[하나의 문명이란 몇백년 동안에 축적된 신념, 습관, 지식등의 유산이다. 이러한 것을 윤리로 증명하기 어려운 때도 더러 있지만 도로가 항상 사람들을 어디론가 이끌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해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내적인 확산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전투조종사- ]

[하나의 문명은 그것이 영혼에 대하여 제시하는 내적인 확산의 양과 질에 의하여 측량된다. 정신적인 확산의 감각 속에서야말로 모든 사람의 의지는 서로 통할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성장해야 하고 그 확산은 인류의 연대의식과 통한다.

문명을 창조하여 인류를 고양하고 문명은 진보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 없이는 있을수 없는 여러 가치를 창조 때까지는 큰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의 우주를 책임을 가지고 구축해야 한다.]

 

한때 쌩떽스는 인류애 넘치는 ‘사회적 인간상(人間像)’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는 1935년 소련(소비엣 연방)을 방문하였다. <나도 알건데, 당시 프랑스의 좌파들은 사회주의의 현장인 소련에 경도되어 소련방문이 잦았는데 어떤 이들은 실망하거나 절망하고 어떤 이들은 고취되었다.>

혁명에 의하여 역사상 새롭게 창조된 ‘사회적 인간상(人間像)’.

그것은 쌩떽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스탈린 치하의 당시 많은 소련인민들, 평등과 박애와 풍요가 넘치는 지상낙원건설의 소명감에 불탔던.>

평전에 의하면 그 때 쌩떽스는 경탄(敬歎)과 적의(敵意)를 동시에 느꼈다고 한다.

인류애 넘치는 새로운 인간상을 혁명정신과 사회제도가 만들어 내는 것에는 경탄을 금치 못하였지만, 그 획일적 이념적 인간에 대하여는 심한 모멸감과 적의를 느꼈던 것이다.

평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지 않아 모르겠으나, 쌩떽스와 같은 사람이 소련사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했을리는 만무하다.

그의 ‘개별적 인간상’은 결코 '소베엣적 인간(이념적 규격적)이 될수는 없었을 것이다.

쌩떽스의 '개별적 인간'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신적(神的)인, 달리 말하면 인간은 기적적(奇蹟的)인 객체인 것이다.

 

인간과 역사는 변증(辨證)의 대상이 아니다.

인류의 미래는 기독교적 결정론도 아니고 변증에 의한 역사발전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초월의지에 의한 것도 아니고 논리에 의한 것도 아니다.

쌩떽스는 소비에트의 인간성, 그 이념적 개성을 향하여는 깊이 경멸하였을 것이다.

인류의 아득한 미래는 불가지(不可知)한 것이므로 인간의 정신은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로운 정신이 문명을 창조하고 인류는 진보한다.

인간의 목적은 바로 거기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론에 사로잡힌 이념적 인간은 변증법적 역사발전, 한 천재의 논리가 만든 도그마를 위하여 그 방법론에 집착할 뿐이다.

 

'인간의 대지'는 아직 신(神)을 상실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언제나 새롭게 창조된다.

인간의 정신에는 신적인 존재가 깃들어 있다.

정신은 자유로워야 한다.

쌩떽스는 '인간의 대지'의 마지막 이 문장에 집착하였다고 한다.

[정신의 입김이 점토 위에 불려질 때에 비로소 인간은 창조된다.]

 

그러나 그에게 집단과 개별의 조화라는 명제에 대한 고뇌는 없었을까. <쌩떽스가 가지고 있었던 과학인과 시인으로서의 기질...>

개인이 집단을 압도하는 것이 영웅주의라 한다면 집단이 개인을 압도하는 것이 말하자면 사회주의랄까.

이 조화에 쌩떽스적 신의 개념이 개입되는 것은 아닐까. <흐음, 책으로부터 베껴쓰는 횡설수설.. 신의 감각이 결여된 정치학 과학..신을 소유한다는 불가능보다도 신을 추구하는 인간의 걸음..역사 속에서 인류생성의 걸음 속에서 계속 신은 만들어지는 것...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인간은 스스로를 능가하는 것에 봉사...이 초월이 인간의 정신의 이상적인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을 위한 통로가 된다...>

 

생텍쥐페리.

그는 인간의 삶, 그 의미에 깃든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깊이 인식한 성실한 사상가였다.

스스로에게 묻노니.

너는 진지하게 시공(時空)의 유한성 속에 갇힌 너의 존재의미를 인식함이 있는가.

아 묻지 말라, 부끄럽다.

나는 지독하게 개별적인 인간유형이노라.

사고와 행위 공히 사적(私的) 한계에서 머무는, 결코 이기(利己)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부류의 인간이다.

인류애 역사발전 선의 사랑 정의 평등과 같은 가치를 향한 한줌 갈망 가져 본적 있는가.

그 비스무리한 것 한조각 내게 있더라도 관념으로 형해화(形骸化)된 자국 뿐이리니.

혹은 위선이거나 혹은 허영의 폼잡기일시 분명하렷다.

내게는 인류애적(공간), 문명적(시간), 도덕적(정신) 각성도 갈망도 미미할 뿐이로다..

그렇게 늙어 죽을 터이나 이렇게 글 속에서나마 정신적 호사를 쬐끔 누릴 뿐이다.

 

쌩떽스는 갈망하였다.

<주여! 저는 인간의 모든 갈망이란 모두 아름다운 것인줄 알고 있습니다. 자유를 찾는 갈망과 규율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말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빵 한 조각에 대한 절규, 또 빵을 얻기 위한 희생을 무릅 쓴 갈망, 명상이 허용될 수 있는 시간에의 갈망, 그러한 시간을 벌게 할 수 있는 노동에의 갈망, 육신을 치료해 주는 연민에의 갈망, 차츰 이륙해 나가야 하는 미래에의 갈망과 구원해 내야하는 과거에의 갈망등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