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깊은 강, 침묵 1.2.3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11
728x90

 

-독서 리뷰-

 

<깊은 강> <침묵> --

-엔도 슈사쿠 -

 

***동우***

2011128

 

깊은 강 ()

작가 :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

발표년도 : 1993(작가의 마지막 작품)

 

침묵(沈黙)

작가 : 엔도 슈사쿠

발표년도 : 1966

 

1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1923~1996)의 작품들.

그 옛날 청구문화사의 전후문제작품집에서 읽었던 백색인은 오래되어 기억이 아슴하다.

그의 책은 오래전 예수의 생애그리스도의 탄생’, 그리고 몇권의 수필집을 읽었었는데, 이번에 책부족 텍스트로 깊은 강을 읽었고 연이어 침묵을 읽었다.

두 책 모두 깊은 울림의 감동이 있었다.

 

2.

 

흑인영가, ‘깊은 강’ 

마리안 앤더슨이 부르는

헤어진 자켓의 먼지를 털어 LP를 낡은 턴 테이블에 올렸다.

검둥이 삶의 고달픔, 간절한 기원(祈願)이 실린 알토의 노래가 장중한 울림으로 내 영혼을 적신다.

화집을 꺼내 펼친다.

루오그림들의 무거운 마티에르가 노래에 오버랩된다.

 

Deep river, Lord.

l want to cross over into campground.

깊은 강, 하나님이여

나는 강을 건너, 우리 모임의 땅으로 가고 싶어라.

 

엔도 슈사쿠의 소설들은 말한다.

deep river요단강이 아니고, Lord야훼하나님이 아니고, campground는 유대광야 장막촌인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끄는 시나고그가 아니면 어떠랴.

요단을 어머니강으로, 야훼를 양파, 집회의 땅을 사랑덩어리의 이미저리로 보듬고서 노래하여도 무방하리.

알베르트 쉬바이처의 내면이 불자(佛子)였다고 한다면 또 어쩔터이냐

너 율법이여,

 

3.

 

깊은 강.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작가 엔도 슈사쿠, 그가 인도(印度)를 이야기 한다.

인도의 바라나시.

유장하게 흐르는 어머니 강갠지스.

시체와 화장한 재와 동물의 사체가 떠다니는 뿌연 밀크빛 강물은 더럽기 짝이 없다.

사람들은 그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입을 헹군다.

그리고 사람들은 꾸역꾸역 갠지스로 몰려온다.

죽기 위하여.

또는 주검을 보내기 위하여 사람들은 갠지스로 모여든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강물에 몸을 담근다는 것은 정화와 동시에 윤회 환생으로부터 해탈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금빛 햇살이 어둠을 가르는 걸 신호삼아, 이 도시로 모여든 순례자들이 이곳저곳의 가트로 몰려옵니다. 그들은 앞다퉈 어머니 강에 몸을 담급니다, 어머니강은 산 자도 죽은 자도 받아들입니다. 성스럽다는건 그런 뜻입니다.“>

 

정연하고 명확한 논증적 사고에 익숙한 모더니즘이 접()하는 인도는 말 그대로 카오스의 현장일 것이다.

인도를 경험한 사람은 두부류로 나뉜다고 하는데, 인도를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은 사람과 반드시 다시 찾게 되는 사람.

가보지 못한 곳, ‘깊은 강의 인도는 어떤 아늑한 노스탤지어로 나를 유혹한다. (소소한 일상 신변사의 불편에 약해빠진 나로서는 인도라는 곳은 필경 경험하지 못할 곳이지만

그러나 무언지 모를 내 안의 것이 그리워 한다.

어머니 강...

 

4.

 

깊은 강

인도수상 인디라 간디가 암살되었던 그 해, 19841031

바라나시에는 몇 사람의 일본인이 있었다.

 

이소베

암으로 임종을 맞는 아내가 남긴 말

<“나 반드시 다시 태어날 거니까, 이 세상 어딘가에, 찾아요. 날 찾아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아내가 죽기까지 그는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일에 열중하고 가정은 등한시했다.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소베는 무뚝뚝한 일본 남편의 전형, 인생이라는건 열심히 일하는 것이며 그런 남편의 모습을 여자 또한 좋아하리라 생각했다.

그에게 아내라는 존재는 무조건 안심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임종때 아내가 내뱉은 헛소리를 듣고 나서, 이소베는 인간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유대감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전생(前生)에서 일본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인도 아이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서 환생한 아내를 만나기 위하여 인도에 온 것이다.

이소베는 갠지스 강가에서 술을 마시며 아내를 부른다.

<“여보, 어디로 간거야.”>

그러나 이윽고 그는 환생한 아내를 찾는다는건 무의미 하다는걸 깨달았다.

갠지스 강에서 그는 생전의 남편과 아내라는 형식적인 유대감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의 만남을 경험하였다.

자연으로서의 융화, 영혼의 유대감.

만물과 융화되는 존재로서의 죽은 아내, 그 동질감.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이제 환생한 당신을 만나지 않아도 좋아. 당신은 이제 내 안에 있으니까.”>

 

누마다’.

어린 시절 만주 다렌에서의 기억, 만주인 하인과 검둥이 개의 기억이 그를 동화작가로 만들었다.

그는 동물과 교감한다.

피에로라는 별명을 붙여준 코뿔소 새.

그 자신의 고독과 새의 고독은 밤의 정적 속에서 서로 통한다.

코뿔소 새가 말하는 <“쓸쓸해요”>라는 슬픈 목소리를 듣는다.

중병의 병상에서 그는 새에게 고민과 후회를 털어 놓는다.

<“마누라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너한테만 털어 놓는 건데...죽는건 역시 무서워. 살아서 좀 더 좋은 동화를 쓰고 싶어”>

어려운 수술이 성공하여 기적적으로 살아난 누마다.

그러나 수술이 성공한 바로 그 순간 새는 죽었다.

자신을 대신 해 죽었다는 느낌으로 그는 구관조를 구하려고 인도에 왔다.

연대감, 생명에 대한 연민은 생명을 지닌 만물과의 유대에 대한 갈망이었고 누마다는 어머니강에서 그 연대감을 느꼈다.

 

기구치

태평양 전쟁 말기의 미얀마의 정글에서 영국군과 인도군에 쫓기는 극한의 일본군들.

굶주림과 가혹한 열대의 환경 속의 패잔병은 말 그대로 지옥의 상황속에 방기된 것이었다.

여기저기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살하는 병사들.

기구치를 돌보았던 그의 전우 스카다는 전우의 인육(人肉)을 먹고서 생존하였다.

귀환하여 알콜에 의존하는 그런 스카다의 죄의식을 곁에서 지켜보는 기구치.

가스통이라는 외국인이 스카다에게 들려준 얘기, 그 격려로 쓰카다는 고통을 치유하였고 평화롭게 죽었다

5년전 안데스에 추락한 아르헨티나의 비행기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죽은 동료의 사체를 먹고서 살아났다는 얘기였다.

죽어가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한다.

나 죽거든 내 몸을 먹어라

그들은 인육을 먹은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자신의 몸뚱이를 제공한 사람들의 가족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인도의 여신 차문다상 앞에서 기구치는 말할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마치 가그통의 얘기로 스카다의 고통이 치유 되었듯이.

차문다 여신상.

<“노파처럼 쭈구쭈굴한 젖가슴으로 아이들에게 젖을 나눠줍니다. 오른 발은 문둥병으로 짓물러 있고, 배도 허기 때문에 움푹 꺼져있고, 게다가 그걸 전갈이 물어뜯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런 병고와 아픔을 견디면서도, 쭈그러든 젖가슴으로 인간에게 젖을 주고 있습니다.”>

금빛치장 고아한 귀부인 마리아상으로서는, 인간에게 결코 줄수 없는 위안.

처참한 인간의 현실 속에 함께 숨을 쉬면서 베푸는 인간을 향한 처절한 연민.

차문다 여신상 앞에선 기구치.

원죄를 묻지 않는, 징벌하지 않는, 오직 사랑과 연민만이 가득한 신의 모습.

도그마에서 해방된 맨발의 예수,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하고 팔을 벌린 사랑덩어리 양파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미쓰코

미쓰코는 기성의 근엄한 형식을 우습게 여기는 일종의 데카당.

값싼 동정이나 사랑의 흉내짓 같은 것은 위선이라고 매도하며 끔찍하게도 싫어한다.

그녀는 제단 위, 형식미 가득한 종교를 경멸한다.

인도에서 그녀를 감동케 한 것은 적나라한 신의 모습이었다.

여신 칼리에게는 자비와 더불어 사악함이 있었지만 위선은 없었다.

여신 차문다에게는 고뇌와 질병과 사랑이 나무뿌리처럼 뒤엉켜 있었지만 위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자의식은 언제나 거짓과 위선이 없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 괴로워 하였던 것이다.

대학생활도, 짧았던 결혼생활도. 위선적인 자원봉사흉내도 모두 냉소에 가득찬 그녀의 역정이었다.

<“나는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속에 감추어진 자의식이었을 것이다.

대학시절, 그녀는 독실한 캐톨릭 신자인 철학도 오쓰를 유혹하였다.

<“당신의 신을 버려라, 그리고 나를 가져라.”>

어벙이 오쓰는 <“내가 신을 버리려 해도 신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하면서 미쓰코의 매력적인 육체에 빠져 버린다.

오쓰로 하여금 일종의 파계를 하게 한 연후, 당연히 미쓰코는 오쓰를 차버렸다.

신학생이 되어 프랑스로 떠난 오쓰.

미쓰코는 부잣집 속물 아들과 결혼하여 신혼 여행중에 프랑스의 리옹에서 오쓰와 재회한다.

<“당신에게 버림받고, 무릎을 꿇었는데 들리는 소리가 있었어요 오라. 나는 너와 다름없이 버림받았도다, 나만은 결코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는 신학생이 되어 수도원에서 신부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오쓰는 그 후 이스라엘을 거쳐, 인도 바라나시에 거처하여 예수의 흉내를 내고 있었고, 이혼한 미쓰코는 그런 오쓰를 만나볼 요량으로 인도에 온 것이다.

저마다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지고 깊은 강에서 기도하는 그 광경을 고즈넉이 바라보는 미쓰코.

시선 저편으로 강은 완만하게 휘돌아, 그곳은 반짝반짝 빛나는 영원 그 자체인 것 같은 어머니 강 갠지스.

그녀는 강이 흐르는 방향을 향하고 중얼거린다.

<“난 인간의 강이 있다는걸 알았어. 그 강이 흐르는 건너 편에 무엇이 있는지 아직 모르긴 해도. 그치만 과거의 많은 과오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이제 겨우 조금 알게 된 느낌이야.”>

그 삶들을 보듬으며 강이 흐른다는 것.

인간의 강, 인간의 깊은 강의 슬픔.

그 안에 섞여 있을 미쓰코의 영혼.

 

5.

 

오쓰

대학시절, 오쓰는 예수를 묻는 미쓰코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는 존재라기 보다는 손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아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다면 생명의 따스함, 그냥 양파나 토마토라고 불러도 좋아요.”>

어렵사리 신부로 서품받아 바라나시 창녀촌에서 기식하면서 예수의 흉내를 내고 있는 오쓰.

그는 오로지 예수에게 사로잡힌 사나이였다.

<“갠지스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 당한 인디라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 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이고 흘러 갑니다.”>

<“양파가 이 마을에 들르신다면, 그이야 말로 길가에 쓰러진 자들을 등에 업고 화장터로 가셨을겁니다. 마치 살아 계실 때 십자가를 등에 지고 걸었듯이.”>

바라나시의 창녀촌의 허름한 방에서 오쓰는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집을 읽는다.

<“나는 힌두교도로서 본능적으로 모든 종교가 많건 적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는 똑같은 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어느 종교이건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지점에 모이고 통하는 다양한 길이다. 똑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한, 우리가 제각기 상이한 길을 더듬어 간들 상관없지 않은가. -간디-”>

오쓰는 느낀다.

<“어머니의 따스함... 신앙은 이런 것이다. 따스함의 덩어리... 사랑... 일신론적인 절대적 교의가 아니라 모든 생명에 깃든 사랑...”>

<“나그네의 곁을 항상 주님은 함께 걸어간다. “자아, 내가 곁에 있도다.”하시면서“>

<“범신론적 이단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느낀다. 신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계신다. 유럽의 교회뿐 아니라 유대교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힌두교도에게도.”>

오쓰는 가톨릭 안에서 이단(異端)이라는 지탄을 받는다.

신학의 선배가 오쓰에게 말한다.

<“그토록 유럽적 기독교가 싫다면 냉큼 교회를 떠나면 되잖는가?”

나갈수 없습니다. 저는 예수에게 붙잡혔습니다.”

신은 우리들 세계에서 자라났지. 자네가 싫어하는 유럽세계에서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린 뒤, 여러 나라를 방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인도 베트남 중국 한국 대만등에서 예수는 자라나고 있습니다.”>

<“제가 이단인가요? 그 분에게 이단적인 종교라는게 정말 있었을까요? 그 분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마리아인마저 인정하고 사랑하셨습니다.”>

미쓰코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유럽의 사고방식은 너무나 명석하고 논리적이다...동양인인 나로서는 고통스럽기까지 하다...유럽인들의 신앙은 의식적이고 이성적이다..내 무의식에 깃든 범신론적인 감각... 일본인으로서 나는 자연의 거대한 생명을 경시하는 일은 참을수 없었다...그러나 유럽의 기독교는 생명 속에 서열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 냉이꽃을 피우는 생명과 인간의 생명을 동일시하는 어투를 쓰기는 하여도 그들은 이 두 가지를 똑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내게 묻는다. “그럼 너에게 신이란 뭐지?”“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 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이다.”“그건 범신론적인 사고방식 아닌가?”그리고 나서 그들은 스콜라철학의 너무나 명석한 논리를 들어 나의 어설픈 사고방식이 지닌 결함을 추궁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장세니즘적이고 마니교적인 생각이라고... 악과 선은 불가분이며 절대 양립할수 없다는 얘기였다.“>

종장에 그는 죽는다.

<“당신은 등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오쓰는 병든 노파를 등에 업고 갠지스강으로 데려가다 그를 오해한 군중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

예수처럼.

 

6.

 

오쓰는 독실한 캐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신앙하고 고뇌하고 회의하는 하나의 분신(分身)일 터이다.

진실한 크리스토교의 신앙인 엔도 슈사쿠.

자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면을 향한 진지한 탐구를 통하여 나름의 문제를 도출하여 온 정성을 기울여 그 해답을 찾아내려는 성실함 가득한 작가.

그 문제의식은 또한 보편성을 획득하여 감동적이었고, 작가적 상상력은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확 끌어들여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작금 기독교 내에서도 종파(宗派)마다 보수와 진보가 갈리어 성서해석의 문제(특히 신약의 생전의 예수를 그린 네 복음서)는 대립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 것들이 나와 같은 나이롱을 더욱 번잡케 한다.

무오설(無誤設)을 주장하는 보수적인 신학사상과 비신화화(非神話化) 논리로서 케리그마의 예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사상.

게다가 오래전, 일본 신학자 다가와(田川建三)예수라는 사나이를 읽고서는 나의 예수께서는 더욱 오리무중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른바 해방신학적 시각.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선구자가 아니라 역사의 선구자이다. 그는 역설적 반항아였다. 권력은 시대를 거부한 그를 살해하여 그의 흔적을 말살하려 하였다.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이번에는 그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랑과 진리라는 보편적 가치만을 가르치는 굴종의 우상으로 내세워야 했다. 그리하여 예수는 두 번 살해 되었다.’>

 

예수께서는 오로지 오소독스 하실터인데, 이래서야 어떻게 저 가엾은 양()무리의 신앙이 올곧게 유지될수 있겠는가?

이 점에 있어서 엔도 슈사쿠의 책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신자이건 비신자건 간에 사람들의 정서(情緖)에 수렴되는 하나의 긍정적인 정형을 형성해 주었다.

그의 책을 읽고 나는 느낀다.

예수께서는 얼마나 우리에게 가깝고 따뜻하신 분이신가.

<‘오호라 우리는 곤고한 몸이로다’>라고 부르짖으며 원죄(原罪)를 자책(自責)하는 탄식소리 들리지 않고, 요한게시록의 배교자의 죄를 묻고 심판하는 예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엔도 슈사쿠는 예수의 생애그리스도의 탄생을 썼다.

일종의 소설 형식을 빌어 저술하였지만 이 두 책은 필경 엔도 슈사쿠의 신앙고백일 터이다.

예수의 이미지는 작가에게는 구약 이사야서에서 고난의 종이 묘사한 그것이었을 듯하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우리의 슬픔을 떠맡았도다.’>.

 

그의 예수는 그러나 조직신학(組織神學)속 형해화(形骸化)된 그 예수가 아니었다.

구약의 완성자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인 예수라거나 삼위일체의 일위로서의 예수따위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수의 생애에서 작가는 인간 예수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을 뿐이다.

작가는 예수 자신의 메시아선언을 이렇게 해석하여 그리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의 대답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베드로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지상적 메시아(그리스도)를 생각하였고, 예수는 사랑의 메시아 곧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로서의 메시아를 말씀하신 거라고.

제자들의 오해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엔도 슈사쿠의 독특한 시각, ‘그리스도의 탄생

제자들은 예수의 처형 당시 무력한 스승을 외면하고 달아나고 배신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제자들을 여전히 사랑했다.

더불어 생전에 사랑 덩어리였던 그분을 제자들은 결코 기억에서 지울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배반한 자식과 이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관계이며, 거기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진 예수의 이미지가 생겨났다.

제자들은 유대교와 대립하고 타협하기도 하면서, 이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펼쳐 나갔다.

말하자면 제자들의 기억과 후회와 죄의식이 그리스도교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한편 생전 예수를 보지 못하였던 개종자 바울.

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해의 희생제물로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구약(舊約)의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 바치는 것이란 희생제물관을 백팔십도 전환시켜 신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희생제물로서의 예수라는 교의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바울의 도그마는 도그마일뿐, 작가는 깊은 강오쓰의 입을 빌어 예수의 부활의 오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파의 사랑과 그 의미를, 살아 남은 제자들은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양파를 모른척 버리고 도망쳐 살아 남았으니까요. 배반 당하고서도 양파는 제자들을 계속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 한사람 한사람의 뒤가 캥기는 마음에 양파의 존재가 깊이 새겨져,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양파의 생애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나라로 떠났습니다. 그 후로 양파는 그들 마음 속에 계속 살았습니다. 양파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속에 환생했습니다.”>

<“딴 세계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세요, 양파는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제 안에도 살아 있으니까요.”>

 

그러나 당시 예수의 제자들뿐 아니라 년년세세(年年世世)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의 의문과 고뇌는 여전히 남았다.

박해받고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어찌하여 하나님은 침묵하시는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침묵.

 

-계속-

 

 

 

<깊은 강> <침묵> --

 

7.

 

신의 침묵.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앙(信仰)하는 양()들의 처절한 절규에 응답이 없으셨다.

당신의 충성스런 종들의 고통 앞에 침묵으로 일관하셨으며 그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으셨다.

역사의 현장 곳곳.

네로의 콜로세움에서, 아우슈비츠 소피의 선택에서, 희광이 칼춤추는 새남터에서, 제암리 교회의 불구덩이 속에서.

그들은 당신을 찬양하면서 불태워져 죽었고 찢겨 죽었고 목잘려 죽었다.

그 모든 순간에 당신은 침묵하셨다.

그들은 당신의 지상성전(地上聖殿)의 의해서 순교자로써 숭앙되었을 뿐이다.

사후(死後)의 그들은 어디에 있을까.

당신께서 손수 성별(聖別)하시어 하늘나라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가.

 

, ()것들이란 본시 육체 안에서 나약하여 목숨 앞에서 비굴하다.

죽음 앞에서 삶에의 집착이란 무엇보다 강인하고, 고통 앞에서 신념이란 참으로 유약(柔弱)한 것이다.

순교자(殉敎者). 절개자(節槪者)

믿는바 가치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줄수 있는 정신.

'호모사피엔스'의 드높음, 가히 인간정신의 정점이다.

그러나 무릇 장삼이사(張三李四) 는 그들처럼 굳세고 용감하지 아니하다.

육체에 갇힌 정신이 그 육체를 초극(超克)하기란 얼마나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침묵에 등장하는 키치지로처럼.

그리고 나처럼.

 

키치지로는 당신의 얼굴(聖畵)을 짓밟고, 당신을 부정하고, 신부를 밀고하여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 현장에도 당신은 계셨을 터인데 키치지로와 같은 배교자(背敎者)의 더러운 발에 짓밟히면서도 당신은 침묵하셨다.

그런 자들은 죽은후 어디에 거하게되는겐지.

당신의 천국 명부(名簿)에서 싹 지워져 영겁(永劫)의 지옥에 떨어져 신음하는가.

무시무시한 고문과 죽음의 공포 때문에 몇 번씩이나 당신을 부정하고 살아난 키치지로.

그런데 그는 죄의식으로 흐느끼고 고뇌하면서 끊임없이 당신 곁을 서성거린다.

말과 행위로 배교(背敎)는 했을망정 그의 신앙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요? 성화를 밟은 이 발이 아파요! 나를 약한 놈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하시는 건 무리라오! 오오, 하나님 나는 어찌 해야 하나요!”>

배교자는 보통 돌변하여 거꾸로 박해자가 된다고 하는데, 여전히 신에 머물고 있는 키치지로의 신앙의 정체는 어떤 것이었을까.

어쩄거나 키치지로의 그런 피맺힌 절규에도 당신은 침묵하셨다.

 

신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당신의 부재(不在)함인가.

그렇다면 나와 같은 사람 실존의 현상(現狀)에 존재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침묵 속에 죽어간 순교자들의 마음 속에 들어앉아 있는 이는 누구란말가.

신의 침묵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신앙은 어디에 바탕하는 믿음인가.

그 연연(連延)한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 무엇이란 말가.

범부(凡夫)의 믿음이 근거하는바 그것.

고달픈 삶 속에서 얻게되는 한조각 마음의 평안함 때문인가.

역사에서 때로 보여 주셨다는 기적의 위용 때문인가.

가끔 베풀어 주신다는 신유(神癒)의 은사(恩謝)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가.

율법의 삼엄함이 겁나서인가.

도그마(敎義)의 엄정함에 속박되었기 때문인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공갈협박성 구호 때문인가.

, 그렇지만 그것뿐이어서는 보통사람으로서도 납득할수 없다.

은혜(恩惠)와 공갈(恐喝)이라는 당근과 채찍의 적절한 구사, 그것만으로 인간의 감정모체(emtional matrex), 그 존재론적 승복(承服)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이란 상당히 우스꽝스런 존재가 아닌가.

인간의 내면에는 좀 더 복잡한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발달된 뇌과학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불가지 뇌 영역은 있을런가.

예전, 읽었던 오토의 누미노제라는 개념.

막연히 피조물의식(被造物意識)이라고 느끼고 있는, 어떠한 신비한 심리 영역이 인간에게는 있지 싶다.

이러한 명제들.

나처럼 부박(浮薄)한 나이롱 따위가 접근하기에 지난(至難)하고 감당하기 너무 버겁다.

 

8.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엔도 슈사쿠.

이 성실한 신앙인은 이 명제를 향하여 오체투지(五體投地)하였다.

그는 조직신학을 궁구하거나, 성경을 논리로 읽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앙, 그 실존적(實存的) 현실로써 접근하여 이 명제를 천착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엔도 슈사쿠의 신앙은 납득(納得)하였을까.

납득하였다면 어떤 교의(敎義)에 의한 것은 아니었을게다.

그는 나름 마음의 눈으로 오의(奧義)에 도달하여 보았다.

눈물 그렁그렁한 예수의 눈망울을.

인간을 향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찬 눈망울,

그리고 그는 침묵'깊은 강이라는 소설을 썼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은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고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도그마와는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내 영혼에 끼쳤다.

나의 교회가 이단(異端)의 징후를 염려하더라도.

 

9.

 

막부시대 일본에 잠입한 포르투칼 예수회의 신부 로드리고.

그가 존경하는 스승 페레이라 신부는 진작에 일본에 파송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드리고가 일본 당국에 체포되어 상봉하게 된 페레이라 신부.

그가 살아남을수 있었던 것은 순교대신 배교를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스승의 모습을 보고 실망한 로드리고의 순교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진다.

<“나는 주님을 찬양하면서 장엄하게 죽으리라.”>

성스러운 죽음을 향한 열망.

신앙에 대한 자긍심(自矜心).

그것은 그지없는 행복감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던 신앙의 절개자(節槪者).

내가 가장 존경하는 우치무라 간조는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敎育勅語) 봉독을 거부함으로 말할수 없는 고난을 겪었고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사하였다.

신앙의 순정(純正), 그 아름다움이여.

 

10.

 

옥에 갇힌 로드리고에게 일본 막부(幕府) 당국의 회유가 있었다.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聖畵)를 짓밟으면 그 자신은 물론 고문받고 있는 신자들을 살려주겠다는 것.

실은, 박해자로서 그들은 로드리고의 내면적 배교(背敎)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예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밟는다는 형식적 행위만을 요구하였는데, 여기에는 침묵이라는 소설의 또다른 중요한 함의(含意)가 담겨져 있다.

 

평생 카톨릭 신앙에 귀의하여 살았던 엔도 슈사쿠.

그에게는 하나의 고뇌가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일본문화를 흡입하여 자란 그에게 있어서 유럽의 종교는 어딘가 맞지 않는 양복을 입은 듯한 느낌...

바로 이러한 위화감에 대한 고뇌였다.

그러한 고뇌가 결국 침묵을 쓰게 하였고, ‘깊은 강을 쓰게 하였을 것이다.

 

천년 넘도록 유럽의 풍토와 문화적 역사적 환경 속에서 생성(生成)된 기독교라는 종교.

기독교의 동양적 풍토에서의 토칙화 문제.

유럽에서 자란 정통적 기독교가 동양적 정서에 이식되었을 때... 교의(敎義)의 변형이거나 예수를 대하는 감성적 데포르마숑에 관하여...

이것은 깊은 강에서 오쓰의 고뇌이기도 하였다.

엄혹한 유일신(唯一神)의 이미지가 범신론적인 유전인자를 갖고 생성된 동양적 신의식(神意識)에서는 어떤 이미지로서 수렴되어야 하는지.

조직신학을 벗어난 변형된 도그마와 범신론적 감성에 소구하는 케리그마...

그런건 기독교가 아닌가, 이단인가.

이것은 실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본질적 문제가 아닐수 없다.

고통을 겪거나 불쌍한 사람들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무당.

울긋불긋 철릭을 걸치고 작두를 타면서 조왕신 신령님 장군신 조상신을 불러내어 질펀한 사설로 응수하면서 고통을 치유한다.

그 현장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킨다면 유황불에 던져질 독신(瀆神)이 되는겐가.

 

종교에 감응하는 것은 일단 정서(情緖)이다.

거룩한 예배당의 분위기, 은은한 찬송가, 십자가에서 내려다 보는 예수님의 선한 눈망울, 산사(山寺)의 고즈넉함, 대웅전에 번지는 향냄새, 맑은 목탁소리.

우뇌가 신앙에 감응한 연후에야 좌뇌에 도그마의 논리가 작용할 것이다.

교회에 나오시는 치매의 노인을 아는데, 그가 기억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예수가 아니라 그의 무의식에 각인된 예수의 정서적 분위기일 것이다.

 

진작 성화를 밟았던 스승 페레이라는 로드리고에게 말한다.

<“허나 그때 일본인이 믿은 것이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 아니었다네. 이 나라 사람들이 믿었던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니야. 그들만의 신이지. 그것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모른채 일본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일본인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아닌 그들의 굴절시키고 변화시킨 하나님만을 믿고 있었던거지. 일본인들은 인간을 미화하거나 확대시킨 건을 신이라 부르고 있어. 인간과 동일한 존재를 신이라 부르지,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하나님이 아니야.”>

, 페레이라의 말과 같다면, 순교하는 일본인들의 그 감정모체의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주군을 위하여 스스로 배를 가르는 사무라이의 감정모체의 진실.

그것과 기독교적 순교의 진실이 동일한 것이라면.

 

종장에 성화를 밟은 로드리고에게 카톨릭 신자였던 당국의 고위 관리인 부교(奉行,관직) 이노우에는 말한다.

<“신부는 결코 나에게 진 것이 아니오. 이 일본이라는 늪지대에 패배하신 것이오.”

아닙니다. 내가 싸운 것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가톨릭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변명이오. 가톨릭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 뿐 아니라 신도가 가능한 한 지켜야 하는 강인한 마음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렇게 보면 당신도 역시 가톨릭교의 가르침을 이 일본이라는 늪지대 안에서 어느 틈엔가 잘못 인식해 버린 것이오.”>

 

11.

 

성하(盛夏)의 한 낮, 로드리고가 보는 앞에서 일본인 신자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주검들을 정리하고 난, 처형 직후의 일본식 뜨락.

로드리고에게 엄습하는 그 고즈넉함.

오로지 하나님만을 그리면서 바로 그곳에서 목숨들이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건만.

세상이 이토록 고즈적하다니.

로드리고의 느낌으로,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하여 보자.

뇌성벽력(雷聲霹靂)은 커녕 여름 한낮의 공기 한줌 흔들리지 않았다.

초록으로 온통 푸르른 여름 풍경.

매미소리와 파리의 날갯짓 소리.

계절은 그저 생명의 오르가즘을 구가하고 있을 뿐이다.

방금 무슨 일이 있기나 하였던가.

그 천연덕스러움.

그것은 로드리고에게는 무참한 전율이었을 것이다.

, 하나님 당신의 침묵.

이 현세(現世)에서는 눈꼽만큼도 응답하실 의도가 없으신.

당신이 임재하시는 영역이란 산 것들은 알 수 없는 어딘가 미지(未知)의 어떤 곳인가.

죽음을 함으로써만 갈 수 있는.

 

12.

 

연후(然後), 옥중에 갇힌 로드리고에게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음성들이 있었다.

고문 당하는 신자들의 신음소리와.

성화를 밟으면 그들을 살려 주겠다는 이노우에의 목소리와.

그리고 스승 페레이라의 목소리.

신자들은 구멍 매달기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구덩이 속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피의 역류로 인하여 급사하지 않도륵 귀에 상처를 내어 방혈함으로써 오랜시간 고통을 유지시키는 고문.

그렇게 매달린 신도들의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는 밤새도록 그의 귀에 들렸다.

한편에서는 성화를 밟고 저들을 살게 하라는 이노우에의 목소리.

그리고 스승 페레이라의 목소리.

<“자네가 성화를 밟으면 저들은 구덩이에서 나올수 있어. 그러나 자네는 그들보다 자신의 구원이 더 소중하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저 캄캄하고 차디찬 밤에서 나도 몸부림쳤지. 나 홀로 죽게 해달라고. 그러나 그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란 말인가하고 나는 고민하였다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기 계신다면 어떠 하셨을까. , 그 분께서는 틀림없이 성화를 밟았을거야. 그리스도께서는 저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배교하였을꺼야.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이루고자하는 당신의 사랑 때문에. 물론 교회의 성직자들은 자네를 재판하겠지. 그러나 교회보다도 선교보다도 더 크고 위대한 것이 있어.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야.”>

 

이윽고 페레이라의 목소리를 따르기로 순복(順服)하는 로드리고.

그는 예수의 얼굴에 발을 올려 놓았다.

그때 홀연, 그의 귀에는 예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밝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그는 예수의 얼글을 밟았다.

일본의 어느 여름날.

아침이 오고 멀리 닭이 울었다.

그 옛날 예루살렘 베드로의 아침처럼.

그리고 로드리고의 신앙은 비로소 자유를 획득하였다.

그의 화두(話頭)는 풀렸다.

당신의 침묵을 이제야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 분은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현장에 함께 있으면서 고통을 함께 하고 있었다.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으로 몸을 뒤틀면서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있었다.

그 옛날 골고다의 언덕에서처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분은 산 것들의 고통 당하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

노파처럼 쭈굴쭈굴한 젖가슴으로 아이들에게 젖을 나눠주는, 오른 발은 문둥병으로 짓물러 있는, 허기 때문에 배가 움푹 꺼져있는, 게다가 그걸 전갈이 물어뜯고 있는 차문다 여신의 모습이었다.

 

다시 내게 엄습하는 예수 그리스도. 엄연한 액추얼리티로서.

나는 감동하였다.

예수의 진면목을 이처럼 들려주는 작품을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영화 벤허, 쿼바디스, 성의, 킹 오브 킹스,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정글지대...무수한 것들을 보았지만.

인간 예수는 남루하였을지언정, 내가 본 것들은 언제나 영광으로 찬란한 메시아 예수였다.

예수의 원광(圓光)에서는 언제나 할렐루야가 울렸다.

 

남루한 사람 예수, 여전히 남루한 메시아 예수.

그곳에 울려라, 나의 할렐루야.

왜 이 작품이 뮤지컬이나 오페라나 영화로는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클로즈업된 남루한 사나이 예수의 그렁그렁 눈물 고인 연민 가득한 눈망울... 두 팔로 문둥이를 안고 더러운 고름을 닦아주는... 무대 라임라이트의 동그라미 안의 초라한 사나이...

거기에다 헨델의 할렐루야의 장중한 합창을 배경으로 입힌다면.

이와 같이 격렬한 감동을 극적구조로서 갖고 있는 드라마는 흔치 않을 듯 싶은데 말이다.

 

13.

 

새벽.

미칠 듯 답답하여 벌떡 일어났다.

무덤에 갇힌 듯.

칼에 난자 당하여 만신창이가 된 장동건이 쉰 목소리로 애원한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불쌍한 존재, 절실한 나약함은 부르짖는다.

나이 들수록.

주여! 주여!

 

14.

 

참여정부 시절 신학대학 출신 김신일씨가 이라크 현지에서 이라크 무장단체에게 납치되었다.

무장단체가 공개한 동영상.

복면한 무장게릴라들이 뒤에 도열한 가운데 포박되어 꿇어 앉혀진 그는 단문의 영어로 나는 살고 싶다. 나를 살려 달라고 울부 짖었다.

그러나 김신일씨는 끝내 참수되고 말았다.

당시 국내의 어떤 교회의 목사라는 치의 설교가 이러 하였다고 한다.

그가 기독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 예수를 전도하고 죽을 일이지운운.

예수를 찬양하면서 의연하게 죽지 않은 김선일 씨를 폄훼하는 그 목사라는 인간.

교회는 내게서 더욱 멀어졌다.

그 목사는 결코 예수의 사람이 아니다.

한 인간의 실존적 죽음 앞에서 감히 그 따우 도그마의 양식적(樣式的)죽음을 씨부리는, 그에게는 예수가 없다.

엔도 슈사쿠의 예수.

도그마의 돌판을 들고 호통치는 부성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어머니강 갠지스의 너른 품으로 보듬어 주고 함께 아파 하는 그 분이 그의 예수다.

요한계시록의 심판하는 예수가 아니라,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연민으로 말씀하시는 모성적인 예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어머니 하나님

 

-계속-

 

 

<깊은 강> <침묵> --

 

15.

 

1970년대에 츨판된 문고본, 엔도 슈사쿠의 책을 다시 펴들었다.

그의 수필집인데 그 중 성지순례편의 기행문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 박사는 ,,에서 문명의 우열은 인종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요소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설파하였다.

()과 균()과 쇠()라는, 환경이 만든 상징적 요소들에 의하여.

그런데. 엔도 슈사쿠는 자연환경이 종교의 유형을 만들어 냈을거라는 독특한 생각을 얘기하고 있다.

 

깊은 강에서 충분히 묘사되었지만, 엔도 슈사쿠가 인도에서 본 것은 어머니의 유방처럼 풍만하게 흐르는 강물이었다.

<“화장터 바로 옆에서도 힌두교도들이 미역을 감고, 물로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는다. 거기서는 너절한 문명이 만들어낸 청정이라던가 불결이라는 감각이 성스러운 것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부정되고 있었다. 교도들은 시체들이 그곳에 잠겨지고 시체의 재가 배설물과 함께 가라앉은 더러운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 떠서 그걸 마시고 그것으로 입안을 헹구어 내고 있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갠지스강이라고 하는 사자의 고향과 일치하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힌두교도가 아니었지만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서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는 그 감각만은 동양인으로서 나름대로 알수있을 듯 싶었다”>

 

반면 유대광야에서 그가 본 것은, 나무와 풀이 거의 없는 황량한 산과 숨막힐 듯 무더운 갈색 땅 뿐이었다. (엔도 슈사쿠가 이스라엘을 방문한 것은 1970년대 초)

그 곳에서 엔도 슈사쿠는 자연이 인간을 냉혹하게 거부하여 인간을 초월해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대땅에는 강다운 강도 없었다.

가장 큰 흐름은 북방의 갈릴리호에서 유다 황야에 있는 사해(死海)에 이르는 요르단강인데, 이 강조차도 내()이지 강은 아니어서, 폭도 수량도 보잘 것 없을뿐더러 기름진 경작지도 만들지 못하였다.

해골같은 산과 쨍쨍 내려쬐는 가열한 햇볕 속에서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히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 속에서는 사람은 다만 두려움과 전율과 고독을 느끼던가, 혹은 그것을 정복해 보고자하는 투지를 불태우던가 할 뿐이다.

요컨대 이곳에서는 어머니다운 것은 일체 거부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사람은 죽은 후에 어머니인 갠지스강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유대에서는 죽은 다음 황야나 사막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유대땅은 어머니의 사랑 속과 같이 편안히 휴식하고 싶은 마음이 들수 있는 자연이 아니고, 유대의 자연은 외포감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그곳에서 드러나는 신의 이미지는 아버지 신 야훼.

야훼는 노여워 하는 신, 심판하는 신, 벌을 주는 신이지 결코 용서하는 신, 사랑해 주는 신의 이미지는 아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는 죄를 두려워 하여 부들부들 떨면서, 심판받을 것을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그 분의 노여움을 건드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아버지의 종교밖에는 발생할수 없을 것이라고 엔도 슈사쿠는 생각하였다.

그곳 광야에서 엔도 슈사쿠의 귀에는 세례요한의 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어머니 하나님아버지 하나님

성경에는 두가지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율법주의 구약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미지이고 복음주의 신약은 어머니 하나님이미지라 하지만, 구약에도 어머니 하나님의 이미지가 없지 아니하고 신약에도 아버지 하나님의 시퍼런 서슬이 없지 아니하다.

 

16.

 

지향하는바 종교의 효용은 어느 곳에 있을까.

살아 생전(生前)인가, 아니면 죽은 다음(死後)인가.

모든 종교는 고유한 교의로써 죽음 그 너머를 이야기한다.

그 정체가 영()인지 혼()인지 넋()인지는 모르겠지만 죽음후에도 어떤 형태의 ''(自我)가 연장된다는 것.

백년을 못사는 인간은 삶의 시간이 아쉽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것이다.

죽음 후에 어떤 형태로라도 존재하는 ''는 산 것들의 본능적인 열망이다.

그리하여 어떤 종교이건, 믿음에 따른 보상체계로서 사후의 비젼은 필요할 것이다.

이런 비젼이 없다면 태반의 신도들은 떨어져 나갈 것이다.

사후의 비젼이 없는, 하나의 완벽한 도덕률(道德律)을 기본으로 하여 종교가 생성될수 있을까.

과연 종교의 의의(意義)를 어디에 두어야 할런지, 유교(儒敎)가 종교인가 사상인가라는 논의는 부박한 내 사유로서는 들이대기 버겁다.

어쨌든 사후 비젼이야말로 종교의 핵심중 하나를 이룬다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그 비젼의 허술함에 나는 혀를 찬 적이 있다.

아주 오래 전 마석 모란공원, 내 할머니 갓 묻힌 무덤가에 수십명의 일가친척들이 둘러 섰다.

순복음교회 교인인 삼촌들 고모님들 숙모님들 사촌들.

당회장 조용기목사가 서교동 숙부의 저택에서 발인예배를 집도하였고, 하관예배는 그보다 젊은 목사가 집전하였다.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무덤가에서 행한 그 목사의 설교 요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고인은 지금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계십니다.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고인은 임종하기 전에 분명하게 예수님을 주()로써 고백하였습니다. 고인은 지금 틀림없이 하늘나라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나서 몇번이나 믿쓥니까? 믿쓥니까?”물었고, 고모 숙모님들은 입을 모아 믿쓥니다! 믿쓥니다!”하며 화답하였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하였다.

돌아가실 무렵 목사님의 질문에 하는 대답 한마디로 우리 할머니는 참 엉터리처럼 천국에 가셨구나. 이것을 믿을수 있단 말인가. 참 엉성하다. 저 목사님이나 고모님 숙모님들 자신들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저토록 된발음으로 믿쓥니까? 믿쓥니다!’를 연발하며 자기최면에 의탁하는 것일테지.”

당시 내게는 순복음교회 특유의 된발음의 어투가 기분학적(?)으로 굉장히 싫었고, 그보다 우리 할머니는 크리스찬이 아니었다.

딸들의 극성으로 말년에 몇 번 교회로 모셔졌을 터이지만, 할머니는 늙마까지도 나무아미타불을 입에 달고 사신 독실한 불자(佛子)였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절집을 드나들었고 보생의원 안방에는 수시로 낯익은 스님들 묵어 가곤 하였음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으흠, 놀랍지 아니한가, 엄정한 스콜라 철학이 정립하였을 기독교의 교의가 우리 할머니를 받아들이는 그 관대함이.

 

사후(死後)에 대하여 리얼리틱한 언어로서 들려주거나 그 이미지를 영화의 스크린처럼 명확하게 보여주는 종교는 없지 싶다.

들려주고 보여주더라도 그 언어는 난해하게 포장되어있고 그 이미지는 추상화(抽象化)의 모호한 포름일 뿐이다.

구상화(具象畫)가 있더라도 그것은 과장된 형태로 부풀려진 공갈(지옥)이거나 유혹(천당)이기가 십상이다.

사후(死後)는 온갖 상징체계와 다양한 은유의 언어로서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그 디테일은 종파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죽은 혼백이 인간세계를 떠도는 중유(中有)의 상태로 있어 49 재를 기다린다던가.

카르마()에 따른 억겁의 윤회(輪廻)의 시스템 속에 들어간다던가.

죽는 순간 다른 생명으로 전이되어 곧바로 환생(還生)을 한다던가.

신불(神佛)이나 조상신으로 화()한다던가.

예수 재림시 죽은 자는 천사의 나팔 소리에 의하여 다시 살아나고 예수믿는 산자들은 휴거가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인지.

죽자마자 심판에 의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인지.

 

오래전 보았던 티비 어떤 다큐멘타리 영상이 떠오른다.

주검을 연구하는 미국의 연구소.

사체가 어떻게 변화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서 흙으로 돌아가는지를 필드에 버려진 사체를 향하여 고정된 카메라의 렌즈는 냉정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사후경직이 있고, 부풀어 오르고, 꺼지고, 벌레가 끓고, 미생물에 의하여 서서히 해체되어 가는 과정.

생명이 사라진 한덩어리의 고기, 해체와 부식과 그리하여 서서히 에 이르는 과정.

가감없이 보여주는 물리적 현상의 냉정한 현장이었다.

남의 것으로부터 느끼는 유물론적 리얼리즘.

그 영상은 감동적이었지만, 거기 대입된 나의 사체가 연상되어 결코 유쾌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나도 저렇게 무()로 돌아가는구나.

주검은 육신일뿐, ()이건 혼()이건 넋()... 무언가는 영원히 무()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믿고 싶다.

뉘라 알겠는가, 죽음의 정체를.

그것은 무()일까? 의미(意味)일까?

간디가 설파하였듯 모든 종교는 인간에 의하여 이어져 내려온 것, 완벽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라도 사후의 구체성이 제시될수 없음은 당연하다.

사후(死後)는 인간의 사유가 접근할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오로지 섭리(攝理-종교와 물리법칙등등을 포괄한 만물에 작용되는 어떤 절대원칙의 개념으로 나는 이 어휘를 쓴다)의 영역이다.

죽음의 정체는 영원한 신비함으로 감추어져 있어야 한다.

그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섭리에 대한 이단(異端)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죽음이어야 한다.

설명되어 질수 없는 그곳에, 영원한 신비로써 감추어져 있지 않아서는 안된다.

상태가 보여지는 죽음, 설명되어 지는 죽음.

그것은 죽음이 아니다.

그곳에는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라는 개념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다.

그렇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란 것도 없다.

삶이 삶이기 위하여 죽음은 죽음이어야 한다.

이것이 섭리의 뜻이다.

나의 존재는 막연하나마 이것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미지(未知)의 것으로.

비옵나니 섭리여, 나의 죽음을 가득한 기대감으로 맞는 나이기를.

그러니까 종교는 죽음을, 상징과 은유의 현란한 종교적 장식성(裝飾性), 현란한 색감의 추상화(抽象化)로서만 표현하여야 한다.

산 것들을 향하여 구체적으로 죽음을 설명하여서는 안된다.

종교의 진실도 미지(未知)의 것이므로, 그게 최선이노라.

 

17.

 

결국 종교의 효용은 삶에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피조물(被造物)로서 인간, 그 삶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공(陶工)이 진흙 덩어리를 이겨서 만들어진 요강.

볼이 붓고 입을 비쭉이면서 나는 왜 상감청자로 만들지 않았느냐고 자신을 만든 도공에게 항변을 한다.

바울은 그런 요강더러 네가 무엇이관대 너를 만드신 분을 힐난하느뇨?”라고 나무란다.

뒤이어 예정론(豫定論)을 펴들고 칼빈은 요강에게 일갈(一喝)한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 무얼 만들든 엿장수 마음대로이다. 네 운명이고 팔자소관이다라고 욱박지른다.

그리고 어떠한 고난 속에서라도 직수굿이 자신을 만드신 분의 처분에 순복하는 욥을 보여준다.

욥은 오로지 창조주를 찬양할 뿐이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 실존(實存)이 이러한 신앙적 자각(自覺)을 획득함으로써 납득되어 진다면, 인간은 얼마나 행복한 존재이랴.

그렇지만 실존이란 관념이 아니라 경험이다.

()과 노()와 병()과 사() 뿐이랴.

억압과 소외와 빈곤..... 뭇 구체성인 것들로 점철(點綴)된 것이 산다는 것이다.

삶의 구체성 앞에서 종교는 어떤 능력을 행사할수 있는가.

아니, 종교가 삶의 구체성에 대하여 한줌 설명이나마 할수 있는가.

그 무엇을 실존(實存)에게 납득시킬수 있는가.

 

로드리고가 전율로써 경험하였던 신의 침묵

한 여름, 피바람의 처형후 그 때에 일본식 뜨락의 그 청승스러운 매미소리를 당신께서는 로드리고에게 납득시켰는가.

인간의 절망 불행 억압 학살 수탈 슬픔 욕망등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책임을 지는 신이란 없다.”-이문열 사람의 아들’-

아무리 독실한 신앙인이라도 삶의 구체성 앞에서 시시때때로 회의(懷疑)에 사로잡혀야 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시종일관. 조금의 흔들림없이 여일하게 주님을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이비(似而非) 신앙인이다.

광신도 역시 이단이다.

진정한 신앙인은 의심하는 신앙인이다.

회의가 없다면 광신(狂信)이거나 부두교의 주술적 마취에 흐느적거리는 허깨비일 따름이다.

성녀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는 고백하였다.

내 믿음은 어디 있는가?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도 텅 빔과 어둠밖엔 없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날 용서하기 바란다. 천국을 생각하려 애써 봐도, 공허함이 엄습하면서 그 생각이 날카로운 칼처럼 되돌아와 내 영혼을 벤다. 이 남모를 고통이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내겐 믿음이 없다. 사랑도 열정도 없다. 내가 뭘 위해 일하고 있는가? 하느님이 없다면, 영혼도 있을수 없다. 영혼이 없다면, 예수여, 당신은 가짜다.”

회의하면서 신에 귀의(歸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행하는 진정한 신앙의 몸짓이다.

좌뇌가 의심할지라도 우뇌는 신앙한다는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기독교 변증(辨證)의 천여편의 방대한 아포리즘 팡세를 쓴 빼어난 이성인(理性人) 파스칼.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 신이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고, 신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영혼이 육체와 같이 있다는 것도, 영혼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 세계가 창조된 것인지, 그것이 창조되지 않은 것인지도 불가해하다. 원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불가해하다. 신을 직감하는 것은 심정이고 이성은 아니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이성이 아니고 심정에 직감되는 신.”

 

18.

 

소설 침묵은 로드리고의 독백으로 종장(終章)을 맞는다.

나는 그들(교회)을 배반했을지 모르나 결코 그분(예수)을 배반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 여태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 분을 사랑하고 있다. 내게는 그 사랑의 오의를 알기 위해서 오늘까지의 모든 시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나라에서 아직도 최후의 카톨릭 신부이다. 그리고 그 분은 결코 침묵하고 있었던게 아니었다. 비록 그 분이 침묵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 분과 함께 있었다. 그 분의 말씀을, 그 분의 행위를 따르며 배우며 그리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깊은 강에서 오쓰의 독백이었을 것이다.

로드리고는 신앙의 가치, 그 효용(效用)을 깨달았다.

신앙은 하늘나라 천국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근거하여야 한다는 것.

인간을 연민(憐憫)하는 예수의 면모로써.

착한 것, 연민하는 것, 사랑하는 것.

무한한 우주(宇宙)에 충만한 어떤 긍정적인 기운(氣運).

태초에 인간성 속에 깃든 영성.

삶을 수렴하는 태도에 그 영성(靈性)의 깃들임.

그것이 신앙이라는.

그리고 사랑의 연대(連帶).

인간을 향하여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찬, 눈물 그렁그렁한 예수의 눈망울.

그 눈망울을 자신의 실존으로 받아 들이고 불쌍한 산 것들끼리의 동류의식.

연민.

연민으로서의 연대.

생명의 자각.

그 자각하는 연대로써 생명은 생명일수 있다는 것.

생명의 자각이란 에고(ego)의 감정이 아니다.

쉬바이처의 자각이다.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키치지로에게서 나를 본다.

나는 사소한 고난 앞에서도 당신의 얼굴을 밟을 사람이다.

청컨대.

당신께서는 기치지로를, 그리고 나를 야단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나약한 것들을 정죄(定罪)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명(生命)은 죄가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너는 살고자 하는 슬픈 그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당신께서 만드신 그대로.

창조하신 섭리가 있음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신앙한다.

파스칼의 권고.

무한대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알 수가 없다. 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신의 본질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대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내기를 걸라.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하는가? 그대가 만일 존재한다는 편에 걸어 그대가 이긴다면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반대로 그대가 진다 하여도 잃을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신은 존재하다는 편에 내기를 걸라"

 

19.

 

나가사키 소토에 마을.

그곳 언덕에는 작은 돌에 새겨진 엔도 슈사쿠의 글귀가 있다.

침묵의 비().

그 비 곁에 서서 나는 푸르른 바다를 보고 싶다.

 

人間はこのようにしいが

, があまりにもいです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가슴 시린 하이쿠(俳句).

내 생애 만난 최고의 절창(絶唱)중 하나이다.

생명에 대한 자각과 창조주를 향한 외경(畏敬)

피조물의식과 창조주를 향한 찬양이 넘친다.

생노병사 뿐이랴. 관계의 고통등등 인간사 무릇 한탄이 서려 있다.

화무십일홍이 상록(常綠)을 대하는 자포(自暴)의 한숨이 있다.

찰나가 영겁을,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을.

존재의 속성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그득하다.

주님을 향한 그윽한 사랑.

어머니에게 바치는 응석서린 어리광.

지극한 찬송의 노래.

이것은 창조주를 신앙하는 가장 인간적인 기도이다.

도그마를 벗어난 욥과 베드로와 스테판의 신앙고백이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엔도 슈사쿠.

그는 이 절창(絶唱) 하나로서도 내게 족하다.

 

'내 것 > 잡설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든 前後 (1,4,3,3)  (0) 2019.09.25
'생텍쥐페리'를 생각한다 (1,4,3,3)  (0) 2019.09.25
레 미제라블 <전,후> (1,4,3,3)  (0) 2019.09.25
영화 레미제라블 (1,4,3,3)  (0) 2019.09.25
캐치-22 (1,4,3,3)  (0) 2019.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