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영화 레미제라블 (1,4,3,3)

카지모도 2019. 9. 25. 04:09
728x90

 

-영화 리뷰-

 

<레미제라블>

 

***동우***

2013년 1월 19일

 

영화 : 레 미제라블 (뮤지컬)

제작년도 : 2012년

감독 : 톰 후퍼

출연 : 휴 잭맨, 러셀 크로우, 아만다 사이프리드, 앤 해서웨이, 헬레나 본햄 카터

 

나는 작년에야 ‘레미제라블’을 풀 텍스트(full text-동서문화사刊 여섯권짜리-)로 읽었다. <그로써 내 속물교양(俗物敎養)은 만족하였다는겐지.>

그리고 그저께는 남포동 대영극장에서 '톰 후퍼' 감독의 뮤비컬(뮤지컬영화) ‘레미제라블’을 감상하였다.

사랑, 구원, 꿈, 절망, 집념, 정의, 모험, 용기...

혁명을 배경으로 한 인간사의 장중한 로망.

그리고 시정(詩情)넘치는 영상과 심금을 울리는 노래들.

영화는 나를 충분히 감동시켰다.

 

여섯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책, 레미제라블.

당연히, 원작에서의 많은 장(章)들이 영화에서는 생략되거나 압축되어 있었다.

세계 명작반열에 오른 작품을 영화화 할 적에는 이 점(생략과 압축)에 있어서 다소 자유로운 바가 없지 않을 듯하다.

사람들 의식 속에는 이미 작품의 서사가 권위로서 자리잡고 있을 것이고, 내용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영화를 만드는 자나 영화를 감상하는 자 사이에 어떤 묵시적합의가 있음직하다.

서사의 흐름에 있어서 압축과 생략도 가능할 것이고, 어떤 암시적 영상 하나 삽입함으로서 상황의 비약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생략된 것들.

장발장을 감화시킨 마리엘 주교이야기라던가, 장발장의 개심과정이라던가, 자신으로 오인된 사람 대신 감옥을 선택하기까지의 장발장의 갈등이라던가, 빵띤느가 꼬제뜨를 임신하게 되는 사연이라던가, 떼나르디에의 과거사의 비밀이라던가, 가브로슈와 파리의 부랑아들 얘기라던가, 코끼리 형상의 구조물에 대한 것이라던가, 마리우스의 가족사(家族史)라던가, 꼬제뜨와 마리우스의 사랑과 에뽀닌느의 짝사랑의 디테일한 내용 같은 것들...

 

뿐인가, ‘빅토르 위고’의 박학강기(博學强記)가 설파하는 방대한 내용들.

신앙과 수도원에 관한 고찰(考察)이라던가, 역사와 철학의 논고(論考)라던가, 허무주의에 대한 변설(辯舌)이라던가, 폭동과 반란과 혁명에 대한 정의(定意)라던가, 바리케이드의 물리적 역학성과 정치적 사회적 상징성에 관한 것들이라던가, 워털루 전쟁에 관한 역사적 고찰이라던가, 은어(隱語)에 관한 논설(論說)이라던가, 빠리의 악당들과 범죄사(犯罪史)에 관한 것들...

 

그 방대한 서사(敍事)와 빅토르 위고의 그 박학강기를 어떻게 두어시간 남짓의 영화에 모두 담아 낼수 있으랴.

‘빅토르 위고’가 강변(强辨)하는 생각의 일단을 영화라는 장르에다 소롯이 담아낼수 있다면 영화로서는 최선일 것이다.

 

<아, 인간의 마음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복잡하고 신비로우며 무한한 것은 없다. 바다보다도 더 장대한 광경이 있으니 그것은 하늘이요, 하늘보다도 더 장대한 광경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이다. 감동과 전율 없이는 이 삶에서 인간성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다.>

 

영화는 뚜렷한 캐릭터의 인간상들을 파노라마처럼 등장시켜 휴머니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 '레미제라블'은 원작의 줄거리에 매우 충실하였다고 생각된다.

줄거리의 엑기스를 압축하여 영화의 시놉시스는 원작의 서사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영화에는 소설에서는 들을수 없었던 음악이 있지 않은가.

영화 '레미제라블'은 다름아닌 ‘뮤지컬 영화’였던 것이다.

정서적 전달력에 있어서 '노래'는 '언어'보다 얼마나 월등한 도구인지.

노래는 서사구조의 압축이나 생략과 비약을 얼마든지 가능하게 하여 준다.

그것도 매우 아름답게.

뮤비컬 ‘레미제라블’은 대사(臺詞)를 일절(一切) 배제하고 노래로서만 이야기한다. <이런 방식을 ‘song through’라고 한다던가.>

그리고 이 영화는 기존 뮤지컬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매우 독창적인 방식을 사용하였다고 명성이 자자하다.

그것은 바로 배우들의 노래가 라이브(동시녹음)로 불려 졌다는 것. <기존에는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노래와 촬영현장에서 배우의 연기를 조합하는 방식이었는데.>

촬영현장에서 라이브로 노래한다는 것은 연기자가 노래에 몰입하여 노래가 연기와 겉돌 여지가 없을 것이다.

연기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는 연기와 혼연일체가 되어 연기자의 감정의 진폭은 극대화 되었을법 하다.

이런 방식의 뮤지컬영화에서는 연기자는 무엇보다 먼저 가창력을 갖춘 사람임이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스크린과 스피커에서 명멸(明滅)하는 시청각적으로 '살아있는' 노래들은 객석의 나를 고조된 감동으로 몰아 넣었다.

 

가슴이 먹먹하여 울컥 울음같은 것이 비어져 나오게 한, 처절하도록 절망적으로 부르는 빵띤느의 노래, ‘I dreamed a dream’.

 

어린 꼬제뜨가 동경을 가득 담아 부르는 뮤지컬 넘버.

구름위의 성.. 장난감 가득한 방.. 많은 아이들..아무도 야단치지 않는 곳..구름 위의 성..흰 옷 입은 천사의 자장가..

아, 가엾어라. 고아 소녀 꼬제뜨.

 

‘Suddenly’를 부르는 장발장.

꼬제뜨를 향한 장발장의 사랑. <꼬제뜨야말로 장발장의 개심(改心)이 형상화된 하나의 표상이 아닐손가>

 

말하자면 연적(戀敵)일 터인 꼬제뜨에게 마리우스의 편지를 전달하러 비오는 빠리거리를 걸으면서 부르는 에뽀닌느의 노래, ‘On My Own’.

사랑하는 이의 사랑심부름을 하는 처지.. 그 서글픔.. 마리우스와 거니는 상상으로 행복해 하는.. 가련한 여인..

 

마리우스와 꼬제뜨와 에뽀닌느가 부르는 삼중창도 아름다우면서 슬펐다.

 

갈등과 희망과 불안과 포부, 각자의 입장으로 노래하는 혁명(봉기)전야 합창과 연창(제목이 ‘내일이면’이던가).

내일이면.

꼬제뜨와 영국으로 도피코자 하는 장발장.. 마리우스와 꼬제뜨의 연모의 감정..에뽀닌느의 짝사랑의 애달픔.. 혁명아들의 꿈과 불안.. 한탕 하고자하는 떼나르디에 부부..

내일이면.

 

영화는 클라이막스를 향하여 치닫는다.

 

마지막 몹씬(mob scene).

내 얼굴은 붉어지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군중의 대합창.

심장의 북소리..결코 노예는 되지 않으리., 내일의 새 삶을 위하여 함께 싸우자.. 바리케이드 넘어 자유를 위하여..

커다란 감동을 자아내는 장중한 시퀜스였다.

 

이제 영화에 대하여 불만을 좀 늘어 놓으련다.

캐스팅에 대한 불만.

내 느끼건대 '휴 잭맨'의 장발장은 미스 캐스팅이었다.

내가 보아 왔던 장발장 <리노 벤추라. 장 폴 벨몽도. 리암 니슨등>중에서 가장 장발장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휴 잭맨이었던 것이다.

내게 정착된 장발장은 무거운 이미지인데, 휴 잭맨의 마스크는 장발장이기에는 너무 로맨틱하였다.

사람 좋은 인상, 풍부한 표정, 쌍거풀진 눈에서는 곧 눈웃음이라도 흐를듯 한 인상의 휴 잭맨.

그리고 내 귀에는 노래하는 휴 잭맨의 음색도 비교적 맑게 들렸다. <인생사 온갖 신산(辛酸)을 겪은 장발장의 음색은 좀 탁하여도 좋았을걸>

어쨌거나 '러셀 크로우'의 자베르에 비하여 '휴 잭맨'의 장발장은 가벼웠다.

 

반대로 '에디 레드메인'이 연기한 마리우스는 좀 더 로맨틱하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에디 레드메인은 주근깨 자욱한 개구장이의 느낌, 좀 늠름한 미남이었으면>

그리고 꼬제뜨와 마리우스의 사랑에도 좀 더 로맨틱한 방점을 찍었으면 좋았을 걸. <꼬제뜨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는 다소 가볍게 취급되었다는 느낌, 차라리 아만다 사이프리드가 에뽀닌느를 맡았더라면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 속의 ‘떼나르디에’는 철저한 악당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희극역(피에로)의 악당으로 등장하는데, 너무 젊은 떼나르디에였다 <에뽀닌느와 가브로슈의 아버지이고, 먼 옛날 워털루전장에서 마리우스의 친부(親父)와도 모종의 복잡한 인연이 있는 떼나르디에인데.>

기왕 떼나르디에를 희극역으로 설정하였으면 좀 더 능글맞은 악역으로 만들었으면.

그 마누라 역의 '헬레나 본햄 카터'도 명성에 비하여 좀 가볍게 취급된듯.

 

‘러셀 크로우’의 자베르는 매우 좋았다. <러셀 크로우의 노래 솜씨도 그런대로 뛰어났다.>

위고가 창조한 특이한 개성, 놀라울이만큼 철두철미한 법가주의자 (法家主義者) 자베르. <그의 자살은 참회나 속죄로서의 자살이 아니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가치관이 붕괴되어 그 혼돈스러움이 선택하는 죽음이었다.>

소용돌이치는 물의 몸부림 속으로 투신하는 장면은 참으로 상징적이고 인상적이었다.

 

앤 해서웨이는 최고였다.

연기도 노래도 의상도 분장도, 표정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미스 캐스팅에 있어서, 감독 '톰 후퍼'는 '라이브'의 가창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배우의 마스크를 희생한 측면은 없었을까.

나는 무대공연의 뮤지컬과 뮤지컬 영화는 전혀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할 상이한 장르라고 생각한다.

무대의 뮤지컬은 관객의 귀에 소구하는 바(음악성)가 비교적 중요하게 취급된다면, 영화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비쥬얼에 빙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영화는 몽따쥐로서 가공된 예술, 롱 테이크와 클로즈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예술성있는 어떤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디오보다는 비디오를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탈리 웃'<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이나 '오드리 헵번'<마이 페어 레이디>의 역을 '코니 프란시스'나 '바바라 스트레이샌드'가 맡았었다면 그 뮤지컬영화들은 성공할수 없었을거라고 생각한다. <라이브가 아닌 더빙노래의 그 미묘한 어색함을 알아채지 못하는 나의 수준이라서 그럴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눈이 불편한 것보다는 귀속임쯤이 어떠랴 싶다.

내 느낌이 그렇다는 말이다.

 

매스(mass)를 상대로 하는 영화인데 수많은 그 취향을 어찌 다 맞추랴.

완벽한 캐스팅이란 없다.

이상은 객쩍은 푸념이었고. 영화 '레미제라블'은 매우 좋았다.

 

그리고 그제, 영화를 보고나서는 듬뿍 술을 마셨다.

그 날의 음주가 영화의 감동때문이었으면 좋으련만.

좋은 영화를 보고 우울한 술을 마셨다.

산다는게 무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