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어머니]] -前-
2012년 1월 29일
원작 : 어머니 (Mat/Mother)
저자 : 막심 고리키 (Maksim Gorky, 1868~1936)
발표년도 : 1907년
영화 : 어머니 (무성영화)
감독 : 프세볼로트 푸도프킨(1893∼1953)
출연 : 베라 바라노프스카야, 니콜라이 바탈로프
제작년도 : 1926년
채플린 영화, 요즘 젊은이들 재미를 느낄수 있을랑가 모르겠다.
본시 영화는 침묵으로 움직이는 영상, 활동사진이었다.<영상에 소리를 입히는 토키(talkie)가 발명되고 나서 내러티브의 많은 부분을 오디오에 의존하게 되었지만>
음(音)을 제거한 영상으로만 전달되는 영화.
순수 영상예술에 있어서 소리란 군더더기일 법도 하지 않은가.
표제음악 이전 순수한 음의 구성에만 관심을 갖는 절대음악처럼.
소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 영화 연출은 그만큼 치밀하고 섬세함이 요구될 것이다.
에이젠슈타인, 드브첸코와 함께 소련 무성영화 시대의 3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푸도프킨.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푸도프킨은 귀에 익은 이름일 것이다.
영화 편집이론 ‘몽타쥬’를 정립시킨 사람이고 푸도프킨의 ‘어머니’는 걸작으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어머니’는 웹 하드에서 다운받아 볼수 있다. 감상을 권한다.
어머니
우리의 입술이 ‘어머니’라고 발음을 할 때.
그 음감(音感)은 오로지 사적감정(私的感情)의 발현이다.
배타적 소유격, '나만의 어머니'인 것이다.
선택의 여지없이 내 것이 되어버린 이름.
가불가(可不可) 호오(好惡) 선악(善惡) 미추(美醜)를 초월한.
어머니와 한 몸으로 살았던 태내(胎內)에서 부터 체득(體得) 감득(感得) 심득(心得)하였을 유무형의 것들.
양(良) 불량(不良)을 불문코 생물학적이로나 심리적으로 내게만 유전되어 엄존하는 것들.
젖무덤의 냄새,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눕혀 주었던, 무작정 나를 향한 헌신의 요구가 받아들여 졌던, 손길이나 마음결이 한결같은...
어미 자식간은 배타적인 이기(利己)를 공유(共有)하고 있는 관계.
어머니는 제 새끼의 귓가에다 속삭인다.
“세상 어찌 되던 너만은 잘 살거라, 내 아이야.”
어머니의 지독하게 이기적인 그 숨결은 언제나 자식의 귓가에 따스함으로 남아 있다.
그 숨결이야말로 한 개별의 목숨이 여럿의 목숨사이의 한 세상을 살아내는 굳건한 근거였고 힘이었을 터.
어머니.
거기에 객관은 없다.
어떤 표상, 이상적(理想的)인 어머니 상(像)의 존재 따위는 헛소리다.
나는 지금 고리키의 '어머니'를 반어적(反語的)으로 얘기하고 있는 중이다.
막심 고리키.
'페슈코프'라는 본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막심 고리키’라는 이름을 지어 필명으로 사용한 작가.
‘고리키’는 러시아어로 ‘고통받은 사람’, 그러니까 ‘막심 고리키’는 ‘최대로 고통받은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밤주막’과 ‘검찰관’과 몇 단편이 떠오르지만 그의 작품은 많이 읽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고리키는 강렬한 인상으로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아(孤兒)에다가 무학(無學), 온갖 밑바닥 직업을 전전한 노동자출신의 작가.
그리고 책장 표지날개에 실린 그의 사진은 슬프게 일그러진 모습이었다.
부(富)와 미(美)와 지(知) 어느 것 하나 가진 바 없는 벌거숭이, 더부살이 인간세상을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아냈을 사람.
아하, 이 사람이야 말로 진실로 이 세상 밑바닥에서 최대의 고통으로 살았던 사람이로구나.
오죽하면 ‘최대의 고통인(苦痛人)’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였을까.
그런데 막상 접하게 된 '막심 고리키'는 내 선입견을 많이 벗어나 있었다.
막심 고리키는 고생 고생 끝에 만년에서야 겨우 소설가 반열에 올랐을 것이라는 내 짐작은 틀린 것이었다.
그는 일찌기 문명(文名)을 떨쳐 젊은 나이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톨스토이, 체홉. 레닌, 스탈린등과의 연(緣)도 예사롭지 않은 유명인으로 일생을 살았으며, 러시아에는 '고리키'라는 그의 이름을 붙인 큰 도시가 있을 정도였고, 그의 영향력은 국제적으로 파워풀하였다.
‘어머니’ 역시 내가 지레 생각하고 있었던 '최대의 고통인'의 구원(久遠)의 대상인 사적(私的) 어머니가 아니었다.
고리키의 어머니는 '내 엄마'가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였고 '대의(大義)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의 마약에 신음하는 어머니는 그곳에 없었고, 1월이 되면 가슴앓이 하는 누군가의 어머니짜리도 그곳에는 없었다.
막심 고리키의 장편소설 '어머니'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수라고 한다.
위대한 어머니의 표상.
역사와 민중과 사회를 성찰하여 각성한 어머니.
빈곤과 부당함과 불평등 가득한 질곡(桎梏)의 세상을 향하여 분노하는 어머니.
현실을 간파하고 역사를 공부하여 사회과학적 지식을 보유한 어머니.
이성(理性)과 역사의 변증(辨證)을 신뢰하여 반드시 올바른 세상이 올 것이라는 확신에 찬 어머니.
그 세상의 도래(到來)를 앞당기기 위하여 수많은 현실의 빙벽(氷壁)과 부딪혀 싸워야 함을 깨닫고 있는 어머니.
그 투쟁에의 헌신(獻身)을 기쁘게 수렴하는 어머니.
그러한 '대의(大義)의 어머니'에 감동이 없을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 그 감동은 되우 수월한 감동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표상(表象)이란 장엄하기는 하여도 계몽주의의 상투성을 배제할수는 없음직 하다.
사회주의적 가치를 표방하는 프로파간다.
신사임당이 중세조선의 시대적 가치의 표상이라고 훈계하듯이.
사회주의 도덕 교과서에 실림직한 이상적인 인간상.
고리키의 '어머니'는 일종의 계몽소설이었다.
고리키의 '어머니'는 주인공 ‘닐로브나’가 ‘내 엄마’로 부터 ‘우리의 어머니’로 진화(?)해 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단선의 줄거리.
술술 잘 읽혔다.
느껴지는 바,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표피적(表皮的)이고 도식적이어서 심리적 복선(伏線)따위를 숙고(熟考)해야 할 바도 전혀 없었다.
제대로 된 교육 한번 받아본 적 없는 닐로브나.
궁핍한 환경, 일상적인 남편의 폭력... 억압과 폭력과 착취는 당연한 사회현상.
팔자가 그러려니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위로를 찾는 그녀의 삶.
인간의 가치, 권리, 자유라는 개념은 언감생심 그녀의 범주에 속한 생각이 아니었다.
당시 짜르 치하의 러시아의 민중들의 삶이 대개 그러하였을 것이다.
남편이 죽은후 그녀의 아들 ‘빠벨’은 투철한 혁명투사가 되었다.
아들의 유무형의 계몽(啓蒙)으로 인한 자각은 서서히 닐브로나를 ‘우리의 어머니’로 만들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여사가 떠 올랐다.)
이성(理性)으로 뭉쳐진 인류의 연대.
낡고 병들고 부정의 한 것들과의 투쟁.
붉은 이념으로 펄럭이는 프로파간다의 깃발에 새겨진 ‘어머니’
<공산주의자는 종래의 사회질서 전체를 강력한 힘에 의해 전복하지 않고는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언명한다.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가 이 역명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 뿐이며 얻을 것은 전세계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맑스 엥겔스 '공산당선언'->
소설에 나오는 대목을 베껴쓴다.
<"울지 마세요. 어머니." 하고 빠벨이 다정스럽고 조용하게 말했다.
"우리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좀 생각해 보세요. 어머니는 40세 입니다. 그러나 살아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두들겨 팼어요. 나는 지금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의 옆구리에 자신의 울분을 털어 놓았던 것입니다. 자기 생활의 울분을 말입니다. 아버지는 그것에 짓눌려 있었지만, 그것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30년 간이나 착취 속에서 계속 일해 왔으면서.”>
<나타샤가 입을 다물자 빠벨이 일어나서 조용히 물었다.
"우리들이 과연 배불리 먹는 것만을 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고 빠벨은 세 사람 쪽을 똑바로 응시하고서 스스로 자신의 물음에 대답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목 위에 올라타고서 우리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놈들에게, 우리들은 무엇이든 다 보고 있다. 우리들은 바보가 아니고, 짐승이 아니며, 먹는 것만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단 말입니다. 적들은 우리들에게 고역과 같은 노동을 강요하지만 우리들의 지적 수준은 그 놈들과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지적으로 그들보다 앞서가는 것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 속에서는 자랑스러움이 떨고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멋진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여러분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군요." 하고 어머니는 언젠가 우크라이나 인에게 말했다. "모두가 당신들에게 있어서는 동지로군요. 아르메니아 인도, 유태인도, 오스트리아 인도. 모두를 위해서 기삐하고 슬퍼하는군요." "모두를 위해서 입니다. 아주머니, 모두를 위해서 입니다."하고 우크라이나 인은 외쳤다. "우리들에게는 국가라든가 민족이라든가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동지와 적이 있을 뿐입니다. 노동자는 모두 우리들의 동지이고, 부자와 권력자들은 모두 우리들의 적입니다. 올바른 눈으로 지상을 바라보면 우리들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커다란 기쁨에 감싸이게 될 것입니다. 저 위대한 '피의 일요일'이 어머니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겁니다. 그리고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생활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은 같은 것입니다. 이탈리아 인도 같은 기쁨을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같은 한 어머니의 자식인 것입니다. 지상의 모든 나라의 노동자의 동포애라고 하는 깨뜨릴 수 없는 사상의 자식인 것입니다. 이 사상이 우리들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정의의 하늘의 태양이고, 이 하늘은 노동자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어떤 사람이든 간에, 어떤 이름을 갖든 간에 언제나 우리들의 정신 상의 형제이며, 그것은 앞으로도 영구히 그런 것입니다."
이 어린애 같은, 그러나 굳은 신앙은 점점 더 크게 그들 사이에 용솟음 쳐오르고, 높아져서 그 강한 힘을 증가시켜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에게는 무의식적으로 하늘의 태양처럼, 무엇인가 위대하고 밝은 것이 태어난 것이라고 느껴졌다.>
<"끌려가겠지요." 하고 아들이 대답했다.
어머니는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슬픈 얼굴로 말했다.
"빠벨, 너는 참으로 지독한 아이로구나. 한번쯤은 나를 위로해 줘도 괜찮을 텐데 . 내가 무섭다고 말하면, 너는 한층 더 무서운 얘기를 하는구나."
빠벨은 어머니에게 시선을 보내고 옆으로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이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돼요."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두려움을 억누르면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보나마나 놈들은 고문 같은 것을 할 테지? 몸을 찌르고 찢거나 뼈를 부러뜨리거나 하겠지 ? 나는 그것을 생각하면, 얘야, 빠벨, 너무나 무서워서." "그놈들은 영혼을 부러 뜨린다구요. 그쪽이 휠씬 더 아파요.">
<어머니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머리를 흔들면서 의미깊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들 여자의 애정이라는 것은 순수한 것은 아니더군. 여자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만을 사랑하거든. 그런데 이렇게 자네를 보고 있으면 자네는 어머님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지. 하지만 자네에게 어머니가 필요할까? 게다가 다른 모든 사람들도 고통받고, 감옥에 투옥되거나 시베리아로 귀양 보내 져서 죽어가는 거라구. 젊은 아가씨들이 한밤중에 진흙탕 속을, 눈 속을, 그리고 빗속을 걸어서 가고 시내에서 이곳까지 6 킬로나 걸어오는 거야. 그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쫓기고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그 사람들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라구. 그 사람들이야말로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일세. 믿음을 가지고 말이야. 안드류샤, 그런데 나는 그런 식으로는 할 수가 없어 . 나는 나 자신에게 가까운 것만을 사랑하는 거야.">
<시내에서 발랄한 곱슬 머리 처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안드레이를 위해서 뭔가 꾸러미를 가지고 왔는데,돌아갈 때 쾌활한 눈을 반짝이면서 블라소바 부인에게 말했다.
"안녕히 계세요, 동지."
"잘 가요 ." 하고 미소를 억누르고 어머니는 대답했다.
그리고 처녀를 전송하고 나자 창문 옆으로 다가가서 봄의 꽃처럼 싱싱하고, 나비처럼 경쾌한 그녀가 조그만 다리를 아장 아장 움직이며 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동지라니." 하고 어머니는 처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기쁨에 겨워 말했다.>
<"우리들은 지금에서야 참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맛 보았습니다. 정말로 인간다운 생활을 말입니다."
"그래요." 하고 빠벨은 어머니를 바라보고 말했다.
"모든 것이 변했어." 하고 그녀는 대답했다. "슬픔도 변하고, 기쁨도 변했지."
"그렇게 되어야만 해요." 하고 우크라이나 인이 말했다. "새로운 마음이 자라나고 있으니까요. 어머니, 새로운 마음은 생활 속에서 자라 나오는 것이랍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관계의 대립 속에서 메말라 있었지요. 탐욕과 사리 사욕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병든 걸 알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대로 계속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어요.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이 나타난 겁니다. 그 사람은 이성의 불로 생활을 비추고, '민중들이여, 하나의 가족으로 단결하라.'고 외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무척 외롭답니다. 쓸쓸하고 춥고... 그래서 더욱 큰 소리로 외치며 동지를 찾고 있지요, 그러나 그의 외침은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하나로 뭉치고 서로 결합하여 힘찬 은 종처럼 울리고, 하나의 커다란 마음으로 되어가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하고 우크라이나 인은 문턱에 서서 말했다. "사람들의 앞길에는 아직도 많은 눈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보다 많은 피를 착취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슬픔과 피는 나의 가슴 속과 머리 속에 있는 희망과 비교하면 하잘 것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별과 같은 풍부한 빚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일도 참아내고 모든 일을 견더냅니다. 그것은 나의 내부에 기쁨이 있기 때문이며, 이 기쁨은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절대로 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기쁨 속에 힘이 있습니다.">
<빠벨은 분명히 듣고 있지 않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천천히 방 안을 돌아 다니면서 고개를 숙이고 깊이 생각에 잠기면서 불쾌한 듯이 말했다. "안드레이는 이 일을 쉽게 잊지 못할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 모르겠지만요. 어머니도 안드레이를 잘 아시쟎아요. 사람들은 때때로 모순된 경우를 겪게 되쟎아요? 원하지 않는데 때려야만 하는 경우 말이에요. 그 상대는 어떤 인간인가요? 똑같이 권리가 없는 인간이지요. 그 녀석은 우리보다도 한층 더 불행하답니다. 그것은 어리석기 때문이지요. 경찰, 헌병, 스파이 모두 우리들의 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이 피를 빨리우고, 똑같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모든 것이 이렇습니다. 이렇게 인간을 서로 적대시키고, 우둔과 공포로 장님을 만들고 있단 말입니다.모두의 손과 발을 묶고, 목을 조르고, 착취하고, 서로 밀고 당기고, 때리게 만들고 있는 거예요. 인간을 총으로, 몽둥이로, 돌맹이로 만들어 버리고, 이것이 국가다. 하고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빠벨은 어머니 옆으로 다가갔다.
"이것은 범죄입니다. 어머니. 수백만 명의 인간을 죽이는 가장 더러운 살인으로, 정신적 살인입니다. 아시겠어요? 정신을 살해하고 있는 거라구요. 우리들과 그 녀석들의 차이를 알고 있으세요? 인간을 때리면 불쾌한 기분이 들고 부끄럽고 괴롭습니다. 불쾌한 기분,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녀석들은 수천 명의 인간을 태연하게 죽입니다. 불쌍하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의 떨림도 없이 기꺼이 죽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은이나 금이나 쓸모없는 지폐를,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그 녀석들에게 부여하고 있는 이 불쌍한 잡동사니 일체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죽이도록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녀석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들의 영혼을 일그러 뜨리면서 까지 끝까지 지키고 있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거라구요. 그들의 관심은 자신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인 것입니다."
빠벨은 어머니의 두 손을 잡고 몸을 구부리더니 그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이 더러움과 부끄러운 부패를 전부 느낄 수 있다면 우리들의 진리도 이해해 줄 것이고, 그 진리가 얼마나 크고 밝은가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을 아들의 마음과 하나의 불꽃으로 융합시키고 싶은 감정으로 가득 찬 채 흥분해서 일어셨다.
"기다려다오, 빠벨, 좀 기다려라." 하고 숨을 가쁘게 쉬면서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것을 느끼고 있단다. 기다려다오.">
메이데이.
닐로브나의 아들 빠벨은 떨쳐 일어나 붉은 깃발을 높이 들고 민중을 이끌었다.
<"사회 민주 노동당 만세! 여러분, 이것이 우리들의 당, 우리들의 마음의 조국입니다!"
군중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이 깃발의 의미를 이해한 사람들은 군중을 헤치고 깃발 옆으로 나아갔다.
마진과 사모일로프와 구세프 형제가 빠벨과 나란히 섰다. 머리를 갸웃거리며 니콜라이가 사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젊고 불타는 듯한 눈을 한 젊은이들이 어머니를 밀어 젖히며 다가 왔다.
"전세계의 노동자 만세!" 하고 빠벨은 외쳤다.
그러자 힘과 기쁨을 점점 더 더해 가면서 수천 명의 목소리의 메아리가 마음을 뒤흔드는 울림이 되어서 빠벨의 외침에 응답했다.
어머니는 니콜라이의 손과 또 하나의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는 눈물로 목이 막혔으나 울지 않았다. 두 다리가 떨렸다. 입술을 떨면서 어머니가 말했다.
"사랑스런 젊은이들..."
니콜라이의 곰보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니콜라이는 깃발을 바라보고 한 손을 내 뻗으면서 환성을 지르며 갑자기 한 손으로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여러분!" 하고 우크라이나인은 그 부드러운 목소리로 군중의 술렁거림을 멎게 하고 노래하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지금 새로운 하느님, 빚과 진리의 하느님, 이성과 선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십자군을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들의 목적은 멀고 가시관은 가깝습니다. 진리의 힘을 믿지 않는 자, 진리를 죽을 때까지 지켜낼 용기가 없는 자, 자신을 믿지 않고 괴로움을 두려워하는 자는 우리들 옆으로 비켜서 주십시오. 우리들은 우리들의 승리를 믿는 자를 불러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목적을 모르는 자는 우리들과 함께 걷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한 사람들 앞에는 오로지 불행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전열을 짭시다. 해방된 노동자들의 축제일 만세! 메이데이 만세!"
군중은 한층 더 불어나 있었다.
빠벨이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은 공중에서 붉은 빛으로 나부꼈다.
"낡은 것들은 떨쳐 버리자!"
페자 마진의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그러자 수십 명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힘찬 물결이 되어서 그 뒤를 따랐다.
어머니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안드레이의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가 아들의 굵은 베이스 목소리와 하나의 울림으로 사이좋게 융합하고 있었다.
일어나라! 궐기하라! 노동자들이여!
투쟁에 나서라! 굶주린 자들이여!
어디선가 한무리의 사람들이 붉은 깃발을 향해서 달려왔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군중과 어울렸다. 그리고 그 외침소리는 노래의 울림 속으로 사라져 갔다.
어머니는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집에서는 숨 죽여 부르던 노래였으며 우크라이나 인은 휘파람으로 불곤 했었다.
그 노래를 듣자 어머니의 가슴 속엔 강철 같은 용기가 솟아났다.
이 용기는 지난 날의 어두웠던 과거를 씻어내 주었고, 앞으로 닥칠 위험과 두려움도 불살라 버리는 것 같았다.>
<뼈만 남은 손으로 갑자기 어머니의 팔을 잡으면서 키가 큰 깡마른 여자가 외쳤다.
"무슨 이런 위험한 노래를 부르는 거지? 어쩌려구. 어머나, 미챠도 부르고 있네."
"걱정할 것 없어요" 하고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이것은 성스러운 일이니까요. 생각 해보세요. 그리스도도 사람들을 위해서 죽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 아니냐구요."
그 생각은 어머니의 머리 속에서 갑자기 떠올랐는데, 그 간단하고 명료한 진리에 어머니는 스스로도 놀랐다.
어머니는 자신의 팔을 꽉 움켜잡은 여인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고는 깜짝 놀란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되풀이해서 말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도 만일 사람들에게 살해 당하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소설의 마지막 대목.
혁명을 고취하는 삐라를 잔득 지닌 어머니는 정거장에서 검거되었다.
전달임무는 좌절되었지만 붙잡히는 순간, 그녀는 필사적으로 군중을 향하여 삐라를 뿌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너도나도 삐라를 주워 읽는다.
닐로브나는 민중을 향하여 혁명의 숭엄한 가치를 절규하듯 외친다.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밀정이 한 손을 들어서 어머니의 얼굴을 때렸다.
"이 늙은 할망구가. 맛 좀 봐라!" 하고 표독스러운 외침소리가 뒤따랐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한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피의 쩝찔한 맛이 입 안에 가득 찼다.
그러나 주위에서 들려오는 외침소리는 어머니의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그 어머니를 때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 "새파란 것들이. "야, 이 불한당 놈아!"
"저놈들을 해치워 버려라!"
"너희들은 결코 이성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어머니는 목과 등을 떠밀리고, 어깨와 머리를 맞았다.
모든 것이 외침 소리와 악을 쓰는 소리와 휘파람소리 속에서 검은 회오리바람이 되어서 소용돌이치고,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돌아갔다.
무엇인가가 핏속으로 들어가서 목구멍을 가로막고 숨을 못 쉬게 했다.
발 밑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무릎이 꺾이고 온몸이 떨려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자신을 둘러 싼 수많은 다른 눈을 보고 있었다.
그 눈들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낯익은, 그토록이나 간절하게 사랑해 왔던 바로 그 모습들이었다.
어머니는 정거장 입구로 끌려갔다.
어머니는 한 손을 뿌리쳐 빼내서 문기둥을 움켜잡았다.
"피바다가 되어도 이 진리의 불을 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손을 호되게 후려쳤다.
"이 놈들. 너희들은 오로지 증오만을 쌓아 올려 갈 뿐이다! 그렇지만 그 증오는 너희들의 머리 위로 다시 떨어져 내려올 것이다!"
헌병은 어머니의 목을 잡고 조르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불행한 사람들 ......"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끝->
어머니 닐로브나의 저 신념은 그리하여 성취되었는가.
그렇다.
훗날 소비에트가 들어서고 고리키의 ‘어머니’는 인민의 어머니가 되었다.
'내 엄마'가 '우리의 어머니'로 승화 된 것이다.
19세기 중엽, 한 위대한 천재적 이성(理性)이 철학과 역사를 고찰하고 역사적변증의 필연으로 반드시 도래할 미래의 지상천국을 몽상(夢想)하였다.
그 후 반세기여만에, 북쪽의 한 나라에서 역사의 변증(辨證)은 앞당겨 이루어졌다.
프로레타리아 혁명은 농익어 썩은 물 뚝뚝 떨어지는 부르주아의 나라인 서유럽에서 먼저 일어나야 옳았지만.
의식화는 커녕 혁명의지라고는 있지도 아니한 농사꾼과 그때까지도 반동적 역사의식에 젖어있는 노동자들만 가득한 동토(凍土)의 나라 러시아에서 볼세비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성공하였던 것이다.
혁명의 지도자가 아무리 빼어난 지략과 지도력이 있었더라도 혁명의 펀더멘탈은 닐로브나와 같은 풀뿌리가 감당하지 않아서는 이루어 질수 없다.
남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며, 하루하루 먹고살수 있다는 것만을 감지덕지 신에게 감사하며, 세상살이 산다는 것이 그런것이겠거니, 장미빛 미래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였던 닐로브나.
그런 어머니 닐로브나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꿈에 헌신하였다.
인간승리, 인간 만만세의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어머니에게 두려운 것 무엇 있었으랴.
아들친구인 우크라니아 청년 안드레이가 들려 주었던 미래에 도래할 저 찬연한 유토피아의 세상.
<"나는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이 넘쳐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각자가 상대방 앞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시대 말입니다.
그 때에는 해방된 민중들은 가슴을 펴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앞으로 나아 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는 시기심이 깨끗이 사라질 것입니다.
온갖 증오의 마음은 그 누구도 갖지 않게 될 겁니다.
그때 우리가 누리는 것은 찌든 생활이 아닙니다.
인간 서로에 대한 봉사로 가득찬 풍요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해방된 민중들은 아무리 높은 이상이라도 성취할수 있을 겁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진리와 자유 속에서 아름다움을 위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계를 끌어 안을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훌륭한 민중이 될 겁니다.”>
알을 깨뜨리고 나온 새가 날아 도달하려는 그곳은 신의 이름 아프락사스. 선과 악이 없는, 육체와 정신을 초극한, 유물(唯物)과 유심(唯心)을 아우르는 아프락사스.
궁극의 경지(境地).
과연 혁명은 구각(舊殼)을 깨뜨리고 신천지로 날아 올랐다.
그 신천지는 유토피아였던가.
인간사(人間事) 물질의 문제로서만 헤아려 인간성(人間性)을 함께 아울어 천국을 만들었는가.
오호, 통재라!
그 순정한 꿈은 한 세기도 안 되어 안개처럼 스러지고 말았으니.
유물론(唯物論)의 실험은 역사를 낭비하고 말았다.
인간이란 혁명이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개별적이고 유심론적 존재인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계속-
[[어머니]] -後-
++++
('역사의 낭비'라는 윗 구절을 신랄하게 지적하여 주신 'ㄷㄹ'님에게 감사한다. “주어진 수명을 사는 인간의 일생에 있어서 '목숨의 낭비'라는 표현도 동우님답지 않은데 '역사의 낭비라니'” 하고 말씀하셨다. 동우님이 무슨 노스트라다무스인가. 동우님 의식 속 어딘가에 캘빈의 예정론, 역사적 결정론 따위 좀 촌스러운 것이 숨어 있는듯 하다는 의미의 말씀... 그리고 ㅎㅎㅎ하고 웃으셨다.)
'ㄷㄹ'님 인정합니다. 내 의식 속에 분명 그런게 있을겁니다. '실패한 인생'은 어떤 섭리로 부터 받은 목숨의 시간을 낭비한 것이라는 생각. 역사에 있어서도.
영화 '빠삐용'을 보면 빠삐용이 꿈 속에서 재판을 받지요. 판관의 판결이 이러했습니다.
"너는 유죄다. 네 인생을 낭비하였으므로."
그리하여 빠삐용은 탈옥의 당위를 얻지 않습니까? 하하
'ㄷㄹ'님은 나를 제법 심지가 굳고 강인한 사람으로 여기신듯 합니다. 아니올시다. 나는 형편없이 약한 사람이랍니다.
후회와 아쉬움이 점철된 일생, 자기연민, 서러워 자주 눈물짓는.... 하하. 'ㄷㄹ'님의 나에 관한 선입견 바로 잡아 주시기를.
++++
육칠년전, 친한 여성소설가(백종선)를 통하여 교유(交遊)하게 된 탈북 중년남성이 있었다.
어떤 매체에 떠나온 고향산천을 향한 향수(鄕愁) 짙은, 퍽 낭만적이고 반듯한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글월도 나누며 서울과 부산에서 함께 술도 마시고 어울렸었는데, 나는 그에게서 사회주의적 인간상의 어떤 면모를 접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리키의 ‘어머니’가 꿈꾸었던 그런 인간상.
그렇지만 곧 나는 그에게 실망하였고, 그 역시 나에게 실망하여 우리의 교류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맛본 자본주의는 어줍잖게 그를 오염시킨 듯 보였고, ‘브로디외’의 “취향이 계급을 나타낸다”의 의미로써 그는 내게 문화적으로 유치하였다.
그로서는 그런 내 포즈가 똥폼의 거만함으로 비추어 무척이나 아니꼬웠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서 사회주의적 어떤 순정한 면모는 찾아 볼수 없었다.
고리키의 '어머니'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이 넘쳐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각자가 상대방 앞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시대 말입니다. 그 때에는 해방된 민중들은 가슴을 펴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앞으로 나아 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는 시기심이 깨끗이 사라질 것입니다. 온갖 증오의 마음은 그 누구도 갖지 않게 될 겁니다. 그때 우리가 누리는 것은 찌든 생활이 아닙니다. 인간 서로에 대한 봉사로 가득찬 풍요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해방된 민중들은 아무리 높은 이상이라도 성취할수 있을 겁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진리와 자유 속에서 아름다움을 위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계를 끌어 안을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훌륭한 민중이 될 겁니다.>
이런 인간상은 혁명으로 이룩한 낭만적 전제주의 나라 소비에트에서는 필경 생겨나야 하지 않겠는가.
어이구, 이런 얘기 풀어 놓자니 힘에 부친다.
나의 천학비재(賤學非才)는 도리없이 책장에서 '리영희' 선생의 책을 펴들수 밖에 없다.
벌써 20년전.
1990년대 초의 리영희 선생의 글과 대담을 아래 옮겨 적는다.
++++
지난 10년 가량의 기간 중 중국, 사회주의 변모를 관찰하면서 나는 적지 않은 실망과 배신감에 사로잡혔었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사회의 최근 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적 인간윤리와 사회윤리의 타락을 목격하면서이다.
사회개방이 수삼 년밖에 안 되는 소련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상태를 전한다.
이기주의적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각종 부도덕 행위와 범죄사건의 증대는 아직은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할 바가 아닌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소련에서는 70년, 중국에서는 40년의 사회주의적 인간윤리 사회윤리의 체질화를 지향했던 사상과 교육, 정책과 제도의 성과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적지 않은 환멸을 느낀다.
사적소유의 원리와 행동양식은 '필연적'으로 인간성품을 퇴폐시키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근거로서 나는 소유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의 양의 유한성과 소유욕의 무한성의 불일치에서 찾는다.
유한한 물질을 수 억의 인간이 무한한 소유욕을 가지고 각축할 때, 그로 말미암은 불평등은 범죄와 타락을 발생시키게 마련이다.
자본주의는 소유욕의 경쟁을 생산의욕을 고취하는 자극제로 활용하는 대신, 그 결과로서의 불평등, 불공평, 범죄, 타락을 용인한다.
그것은 사유재산제도의 속성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위 '시장경제적 생산 및 생활양식'을 미처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사회주의적 인간, 사회윤리와 도덕성이 그렇게도 쉽게 무너지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기심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인식에 소름이 끼친다.
-中略-
중국사회가 그 낙후된 생산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장경제'(자본주의)를 도입하였다.
그러자 몇 해 안 가서 중국사회와 중국인의 행동양식과 행위의 동기 및 목적이 미국 사회와 미국인의 그것을 닳아가고 있다.
살인, 강간, 강도, 절도, 사기, 횡령, 마약, 매춘, 구걸, 부정, 부패. 이기주의와 사적 재산소유제도가 성스러운 가치를 부여받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리현상이다.
이 양자는 떼어놓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분의 속성이다.
나는 그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사회에서 전해오는 같은 과정에서의 같은 사회적 생리현상을 보면서 깊은 회의에 잠기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 소유욕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성 존중의 철학사상과 그 물질적 사회적 환경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인간성을 변화하기에는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이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는 그 답변에 고민한다.
사회주의 사회들은 한결같이 전 인민의 육체, 정신, 정서, 감정의 완전한 발육과 발전을 목표로 했고 상당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랑했었다.
또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각 사람이 그의 능력에 따라서 일하고 그 필요에 따라서 소유한다'는 원칙의 사회정의를 실현하려고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가치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적 방식으로 객관적으로 증명된다고 일관하여 주장해 왔었다.
그러나 소위 '인간성의 개조'를 위한 소련의 파블로프의 이론과 실험도 사이비과학임이 드러난지 오래이다.
'혁명적 인간형', 어쩌면 지나칠만큼 도덕주의 경향마저 지녔던 모택동 중국사회주의의 인간성 개조 노력도 실패했음이 분명하다.
북한의 지도자 중심의 '주체사상'을 지도원리로 하는 '사회주의적 인간형'도 사회개방에 의한 검증을 받기 전에는 자신있게 주장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생각하곤 한다.
인간성은 본질적인 것으로서 사회환경의 개조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기주의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제도를 낳은 바로 그 인간성이다.
도덕주의적 인간과 사회의 실현은 꿈일 뿐이란 말인가.
그 가능성을 어느 정도 믿고자 하고 믿기도 했던 나는 비과학적인 이상주의자(또는 심하게 말해서 몽상병 환자)였던가?
지난 얼마 동안의 나의 자기비판과 고민은 이 문제를 놓고 계속 되었다.
-中略-
소수의 종교적 사상적 또는 혁명적 순교자만이 생명 탄생의 시간부터 사망의 시간까지 '도덕주의적 인간'으로서 90도로 꼿꼿이 서서 살 수 있다.
거의 모든 인간은 더 많은 안일, 쾌락, 소유를 원하는 이기주의자일 수밖에 없음이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사회에서 입증된 셈이다.
그들 대중은 절대로 90도로 빳빳이 선 생존과 행동방식을 오래 수락할 수 없다. 그것을 위한 어떤 제도적 강제나 규칙도 거부한다.
이것이 소련을 비롯한 동유럼 중국 등 사회주의에서 지난 시기에 입증되었다고 나름으로 판단하였다.
결국 인간성의 불가 개조성을 인정하여 이상적 인간과 현실적 인간의 절충적 형태를 수락해야 하지 않을까.
도덕주의적 인간형이 40도 이하로 허리를 굽으면 이기주의가 압도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후자의 허용각도를 30도 정도로 규제하여 전자의 사회가치적 규범력을 60도 정도 이상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개인과 사회의 안정 및 평형을 이루는 적정상태가 아닐까.
그 이상의 도덕주의를 요구하면 개인이 반대하고 사회가 무너질 위험성이 크다.
60도의 도덕사회로 만족해야 하는가를 곰곰히 생각하고 있는 참이다.
-中略-
그런 생각은 우리 민족의 재통일문제를 놓고서도 마찬가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상주의적 인간형에 경도했었다.
강렬한 정의감, 헌신적, 자기희생적, 낭만적 전제주의.
반대로 이기주의적, 기회주의적, 현실주의 인간형을 경멸하고 혐오한다.
해방후 신생독립국가 건설사업의 길에서 전자의 인간형이 주로 '좌'의 자리에 섰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지목됐거나 그런 오명을 찍힌 후자의 인간형이 '우'의 자리로 마주섰다.
나는 해방 당시 17세로 구제중학 4학년이었던 까닭에 해방 직후와 그 후 몇 해 동안 '좌익'을 택한 인물들과 '우익'을 택한 인물들의 도덕심의 극단적 대립을 잘 보고 경험하였다.
남한의 시민으로서 말하기 거북스럽지만 그 당시 남한에서 좌익노선을 택했거나 북쪽으로 넘어간 인물들이, 해방 당시나 그후의 남한사회에서 득세한 인물들보다 인간적 윤리성에서 더 평가받았던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전자의 인물들은 분단된 북쪽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했고, 후자의 인물들은 남쪽에서 자본주의를 건설했다.
남쪽사회는 외세의존과 국가주권의 상당한 양도를 대가로 해서 일단 오늘의 자본주의 경제적, 생산적 성공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사회의 인간적 윤리성과 사회적 도덕성은 12시간 정전으로 드러난 미국 뉴욕시의 경우보다 결코 낫다고 장담할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럽다.
국가가 총동원체제로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은 사회적, 인간적 윤리성의 부재를 뜻한다.
경제적 부의 심한 불평등적 배분구조를 잠시 접어 둔다면, 남쪽 국민의 생활수준이 북쪽 국민의 그것을 능가하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쪽은 반대의 철학으로 나라 만들기를 서두른 결과, 높은 민족적 자존과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도덕적 생존양식, 그리고 동포애가 감도는 순박한 인간형 등의 사회를 실현한 것으로 주장한다.
많은 공평한 관측자, 방문객들에 의해서 그 측면의 사회적 선은 증언되고 있다. 그 대가로서 그 사회는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낙후하고 국민생활 수준에서 훨씬 낮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북쪽사회와 그곳의 인간들이 대진재 때의 중국 당산 시민들처럼 고귀한 이웃사랑과 이기심을 극복한 인간주의적 공동체를 건설했는지 여부까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더라도 남, 북한의 인간형과 사회적 현실이 극단적으로 대립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흑백논리와 이치적가치관을 경계해야 한다.
남, 북을 대립시켜서 '인간다운 생존양식의 도덕적 사회'를 택할 것인가, 또는 '돈만 있으면 어떤 물질적 향유도 할 수 있는' 물질주의적 사회를 택할 것인가라는 식의 선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같이 가치의 대립이 심각한 두 사회가 통일을 지향하는 데서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를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평화통일'의 개념과 내용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흔히 생각하는 대로 전쟁(군사력)에 의하지 않는 통일이다.
동시에 둘째는, 군사력에 의하지는 않더라도 압도적 힘의 차이에 의해서 '병합'또는 '흡수'했을 때, 국민적 가치관과 신념체계의 정면대립으로 인해서 반란, 또는 장기적인 저항상태로 통일국가의 내부질서가 붕괴의 위기에 처하지 않는, 그런 순리적 통합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 북이 서로 닮아가야 한다.
동, 서독의 통일을 평화통일의 모델로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정부의 북방정책의 목표가 그렇고, 진실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그런 성싶다.
이들은 동, 서독의 '평화적 통합'이 앞서 말한 1과 2의 조건을 다 충족할 수 있을 만큼 인간형과 사회성 측면에서 접근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 사실에서 남, 북한 사회는 동, 서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평화통일'의 두 조건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상태이다.
동독과 서독은 대전이후 다같이 과거의 파시스트, 나치주의자들을 체포, 숙청하였다.
독일민족의 민족적 정기를 함께 확립한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북쪽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숙청을 단행하여 민족정기와 자주성을 확립했지만, 남쪽은 불행하게도 숙청되어야 할 바로 그들이 국가를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실은 그후 남과 북의 국가의 성격차를 조건짓는 기본적 요소로 모든 면에 확대 재생산되었다.
사회의 민족적 도덕적 가치가 달라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서독은 자본주의지만 사회주의사상, 학문, 운동의 전통이 깊고, 사회주의 정당이 허용될 뿐 아니라 집권까지 하는 국가이다.
동독은 사회주의지만 서독 자본주의와의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넓게 공유하였다.
서독에는 간첩을 대상으로 하는 법은 있지만 동, 서독 시민의 접촉을 간첩시하는 '반공법' '국가보안법' 같은 것이 없었다.
그밖에도 공통분모적 조건의 공유가 20여 년에 걸쳐서 다져졌다.
남 북한의 사회는, 쌍방이 그런 노력을 이제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하더라도㺊년 이내에는 동 서독적 수준에 가지 못하리라고 본다.
앞에서 자세히 지적한 것처럼 지금 남, 북한의 사회내부적 실태는 상호 수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립적이다.
남쪽의 대중은 거의 제도화된 범죄와 소외의 처지에 있지만 일정한 개인주의적 자유를 권리로 여기는 생활에 익숙해 있다.
북한의 전체주의적, 통제적 사회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반면, 북한의 대중은 힘에 의해서 병합되는 경우가 아닌 한, 약간의 경제적 혜택의 대가로 인간성이 상실된 현재 상태의 비도덕적 범죄적 성격의 남한사회를 수락하기를 거부할 것으로 예상된다.
남, 북 사회와 국민이 진정한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려면 10여 년 또는 그보다도 훨씬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기 내부적 실태를 동, 서독 사이 만큼이나 변혁해야 한다.
남한은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북한은 시장경제를 수용하여 사회의 기본적 성격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을 거부하는 한 진정한 평화적 통일은 생각 할 수 없다. 현재대로의 남한에 의한 북한 통합이 북한 주민에게 불행일 만큼, 현재대로의 북한에 의한 남한 통합도 남한 주민에게 불행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통일의 열정'에 들뜬 통일논의에 별로 찬동하지 않는다.
진정 통일을 앞당기는 일은, 우선적으로 남, 북한의 군사력 감축을 진행하는 과정과 발맞추어서 남, 북의 사회를 서로 융합할 수 있을 만큼 변혁시키는 노력이다.
우리 지식인은 통일문제에서 지금의 열을 식히고 차라리 조금 냉정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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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의 책들은 역사의 구체적인 진전방향을 예측하지는 못했고, 단지 이성에 반하는 우상의 파괴나 사회정의에 대한 윈론적 제시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인 집단의 환경예측능력 상실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세계의ف급 지성인, 사상가, 이론가들도 오늘의 상황을 예측하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전환시대의 논리'등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휴머니즘이었지 마르크스나 레닌주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나의 영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닌이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까지 내 책임이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나는 지금 거대한 역사적 변혁 앞에서 지적 갈등을 겪고 있고, 지적 오류와 단견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 객관적 검증으로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하려는 것은 지식인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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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을 비판하는 일부 운동권 젊은이들에게 하고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선배란 늘 후배들의 비판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존재이므로 그들의 비판 환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레닌이나 마르크스주의에 빠져 나를 공격한다면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적, 사상적 아집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완전한 치유책이라는 구조결정론은 시정돼야 합니다. 사회주의가 모든 것을 치유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이미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80년 50년 사회주의를 실험한 본인들이 실패했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책 몇 권 읽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우긴다는 것은 얼마나 비과학적인 태도입니까. 우리는 교조적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수용한다는 사회주의적 태도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왜 아직도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위력을 갖는다고 보십니까.
역사적 특징으로 볼 때 학생운동은 이 사회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하고 이어져 왔습니다.지금은 단순 대응적이 아닌 자체논리와 운동경향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도 현상에 대한 반작용 성격이 강하고, 북한의 사상, 철학, 정책의 영향을 받는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남한문제의 해결방식으로 북한식 시각을 갖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레닌적, 김일성적 사고방식은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것이고 남한사회는 계급혁명이 가능한 상황조건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사회에 투쟁에 의한 개혁의 대상이 될 만한 많은 질병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이제 자본주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본주의적 사상과 제도가 완전히 승리했다, 이제 투쟁의 역사는 끝났다, 이런 식의 견해는 잘못입니다.자본주의는 사회주의적 가치관과 정책으로 수정, 제거, 상쇄돼야 할 많은 결점과 부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할 적이 없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검증을 하지 않은 채 미래는 나의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인류를 위해 크게 불행한 사태가 올 것입니다. 이제 자본주의는 일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느긋하게 자기 체질을 바꿔나가는 노력을 해야 할 때입니다. 사회주의가 바뀐 만큼 자본주의도 바뀌어야 할 역사적 단계에 와 있다고 봅니다.
-2년 반 전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나의 노선은 중도좌'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같습니까.
그렇습니다. 중도좌를 다른 말로 하면 사회민주주의인데, 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니는 필연적 결과로서의 인간소외와 무제한적 이윤추구 경쟁으로 인한 부패, 타락, 범죄 등을 치유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사상, 철학적 부분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난국을 풀기 위해 정부와 운동권에 하고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운동권은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목표달성의 시간단위를 좀 연장하는 사회 인식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6공은 일단 투표에 의해 수립된 정권인 만큼 정책부문의 비민주성은 부인할 지언정 그 자체를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운동권의 행동방식은 보다 유연해져야 합니다.
정부에 하고싶은 말은 국가 및 사회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 끊임없이 운동의 형식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필요성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의 세력에 국가권력을 총동원해서 대응하는 것은 미숙하고 치졸한 짓입니다.
국가의 제반 역량이 여러 측면에서 대단해졌는데도 운동권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사태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국민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해서 그 동안은 몰라서 두려워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진정 우월한 사회로 가려면 국가보안법적 사고방식과 정치행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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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을 읽으면서 나는 곳곳에서 그의 역사성 인간성 그리고 북한에 대한 상황적 인식에 있어서의 오류를 느끼게 된다.
너무 나이브하다 할까, 고리키의 '어머니'에 등장하는 이상주의적 인간형은 리영희선생이 경도한 그런 인간형이었고, 그가 꿈꾸는 이상적 사회의 인민의 모습이었다.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강렬한 정의감,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전제주의 나라.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이 넘쳐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각자가 상대방 앞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시대 말입니다. 그 때에는 해방된 민중들은 가슴을 펴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앞으로 나아 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는 시기심이 깨끗이 사라질 것입니다. 온갖 증오의 마음은 그 누구도 갖지 않게 될 겁니다. 그때 우리가 누리는 것은 찌든 생활이 아닙니다. 인간 서로에 대한 봉사로 가득찬 풍요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해방된 민중들은 아무리 높은 이상이라도 성취할수 있을 겁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진리와 자유 속에서 아름다움을 위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계를 끌어 안을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훌륭한 민중이 될 겁니다.>
이기주의와 기회주의와 경쟁과 맘모니즘이 지배하는 이 자본사회.
혁명으로 뒤집어 엎는 그게 대안이 될수는 없다.
사회주의의 꿈은 너무 나이브하다.
사회주의 혁명은 실패하였다.
북한을 보라.
기만과 억압... 또다른 계급사회...지독한 파시즘...
거기서 무슨 이상적인 사회주의 인간이 잉태될수 있을런가.
인간성에 완벽한 로고스도 없고 완벽한 파토스도 없다.
세상살이에 완전한 도덕주의도 없고 완전한 현실주의도 없다.
순수한 보수의 가치도 없고 순수한 진보의 가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理性)만은 여전히 유효(有效)하다.
나는 낙관론자이다.
세상은 나아진다.
우리 비니미니의 세상은.
혁명(revolution)이 아니라 개선과 발전(evolution)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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