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아베일족 (阿部一族)> -其3- (1,4,3,3)

카지모도 2019. 10. 11.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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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일족> -3-

-2015519일 포스팅-

 

아베일족.

책장을 덮고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나의 개별적 인격이 무거운 신의(信義)에다 자신의 실존을 예속(隸屬)시켜서 엄정한 형식으로 결행하는 자결.

단호하고 단정한 그 형식미는 얼마든지 아름답다.

그런데 명색 주군(主君)짜리를 따라 죽는 순사에 대한 일련의 것들. 저게 정말로 인간적 신의에서 비롯된 순수한 것이란 말인가하는 명제가 머릿속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그건 전()과 같은 감동적 전율이 아니라, 모종의 당혹감이었다.

요매(妖魅)한 가치체계에 절대적으로 순복하려는 저 맹목의 집체적(集體的) 인간성.

인간성의 어둡고 부정적인 곳에 숨겨진 어떤 그로테스크한 모습.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모독감이랄까.. 모종의 분노까지 엄습하였다.

 

공동체 삶의 형식은 일단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 머무는 곳으로부터 시작되는게 아닌가.

사유도 윤리도 도덕도 말이다.

인간성이 본원적으로 지니고 있고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성정(性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저 가공(可恐)한 것들.

생각해 보라. 너무나 요상스럽지 아니한가.

 

한 인간이 죽었다고 하여 수십명의 인간이 당연하게 따라 죽어야 하는 저 순사(殉死)라는 것.

스스로 배를 갈라 죽겠다고 자신의 죽음을 엎드려 구걸하는 저 기묘한 간청(懇請).

자신을 따라 죽겠다는 자살 청원에 대하여 짐짓 관용(寬容)의 폼을 잡고 고개를 끄덕이는 저 괴기스런 허여(許與).

아버지의 자살이 고맙고 자랑스러워 아버지가 배를 가르고 목을 따고 피를 뿜으면서 죽어가는 광경을 태연하게 참관하는 자식들의 저 엽기적인 윤리의식.

죽으러 가는 아들과 남편을 대하는 저 천연덕스러운, 그 죽음이 자랑스러워 뿌듯해하는 어머니와 아내짜리의 요상스러운 정애(情愛).

한조각 예사로운 풍문을 심각하게 오도(誤導)된 것으로 인식하여 수치심과 치욕감으로 죽기를 작정하는 저 민감한 자의식.

위험을 무릅쓰고서 위무(慰撫)를 아끼지 않았던 절친한 친구를 그 다음날에는 창을 들고 처들어가 찔러죽이는 저 불가사의한 멘탈리즘.

 

그런 것들은 충()과 의()라기에는 너무나 사적(私的)이고 윤()이라기에는 너무나 병적(病的)이다.

생각건대 동양윤리적 사유체계가 구현하는 모습이 저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문명은 우리와 동일한 공맹(孔孟)과 불교(神佛)로부터 시발(始發)하였다는데 저것은 전혀 다른 모습이 아닌가.

저건 공맹의 것도 석가의 것도 아니다.

저들이 인식하는 인의(仁義)는 우리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질(異質)의 것이다.

부자(父子)가 그러하고 군신(君臣)이 그러하고 붕우(朋友)가 그러하다.

 

일본에서만 고유하게 조작된 관념체계.. 일본인에게만 세뇌(洗腦)된 행위규범..

도서(島嶼)의 나라는 저토록 폐쇄성(閉鎖性)의 오리지널리티를 구현하는가.

그러나 도버 해협을 사이에 둔 영국과 프랑스 국민의 가치체계는 그닥 다르지 않다.

, 현해탄의 바다는 도버보다도 엄청 너르고 깊었던 것인가.

 

다른 책들을 끄집어내 여기저기를 떠들처 본다.

이원복의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등 이것저것 일본에 관한 책들을 들여다 보았다.

 

일본은 ''()의 나라다.

7세기초 쇼토쿠(聖德) 태자가 일본 최초의 헌법(율령) 1조로서 강조한 것이 바로 <'()'를 존중하라>였다고 한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여 고립된 섬나라에서 뒤엉켜 티격태격하였다가는 모두 멸망해버리고 말것이다.

모쪼록 가지런하게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어울릴, 화할, 합칠, '' .

'()로써 정돈된 형식이야말로 일본이라는 나라의 안정과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라는 인식이 건국이념으로 뿌리깊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천수백년 동안 연연하게 이어져 일본인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사상인 것이다.

 

가 추구하는 세계관의 본령은 각자 정해진 제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질서로 이루어지는 화평의 세계이다.

그를 위하여 계급적(hierarchy) 계층구조를 공고하게 구축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천황을 허수아비로 만들지언정 최고 정점인 천황을 갈아치우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일본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정돈된 형식의 정점인 천황을 건드린다는 것은 '()의 근본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황을 만세일계(万世一系, ばんせいいっけい)의 표상으로 세워놓고 실질적 권력을 놓고 전국의 세력가들끼리 쟁투를 벌여 시대에 따라 쇼군이다 바쿠후다 간바쿠다 다이묘다하여 정돈된 권력의 형식을 메꾸어 나갈 뿐이다.

''의 디테일은 어지러워도 ''의 큰 틀은 불여튼튼이다.

유혈 낭자한 싸움은 세력가끼리의 수평적 전쟁일뿐, 민중봉기나 하극상(下剋上)과 같은 계층 간의 충돌도 일본에서는 흔치 않다

자신이 속한 계층적 지위에 대한 자각이 너무나 견고하게 굳어있어 그것을 넘는 것에 대하여는 진한 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베네딕트는 일본인에게 깃든 가장 중요한 정신적 요소는 바로 '자신에게 적합한 지위'에 대한 강박이라고 한다. 태평양 전쟁 또한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맏형님으로서 세계질서 속에서의 마땅한 지위찾기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세습된 지위에 의하여 그 영역에 안주시키기.

일본에서는 사농공상(士農工商) 간의 계급적 신분이동은 철저하게 금지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신분사회였지만 계급에 따른 의식주까지 통제하지는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의식주 자체에 대한 규제가 있었고, 우리나라는 계층이동이 일본처럼 완벽하게 봉쇄된 것도 아니었다.>

전국시대의 혼란을 평정한 도쿠가와의 에도막부 이래 계급질서 유지는 더욱 완고하여 계층구조는 더욱 강고하게 고착되었다.

막부는 이것이야말로 권력유지와 국가안전의 기본요체임을 혼란을 극한 전국시대의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간파한 것이다.

지위에 따라 그에 걸맞는 대접과 체면과 분수가 있고, 그것을 훼()하는 것은 죄()이고 수치스러운 짓이며분수를 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자신의 신분을 천래적(天來的)인 것으로 인식하라, 자신의 위치에 자족하고 그에 걸맞는 삶을 누려라,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家業), 축적된 기술의 전문성, 다양한 방면에서 빼어난 장인(匠人)들의 탄생... 이런 부분은 고착된 계층구조가 가져다 준 순기능적 열매였을 것이다.

 

일본처럼 양식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있을까.

내 듣기에 신재효가 정리한 우리나라 판소리는 일본의 노()나 가부키(歌舞伎)만큼 양식적이지 않다.

쓰모를 볼라치면 거구(巨軀)가 쭈그려 앉아 양다리를 번갈아 들았다 내렸다하는등 우스꽝스러움도 스모판에서는 빼놓을수 없는 하나의 양식이다.

일본인은 형식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양식성에서 미학(美學)을 찾는 민족이고 필경 그들의 문화적 자부심의 요체도 거기 있을 듯 싶다.

관계의 정형화(定型化) 그리고 커무니케이션의 양식화(樣式化)가 있어야 그들은 관계에 대하여 안도하고 만족한다.

일본인은 무릇 행위유발에 있어서도 동기의 명분화(名分化)를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인식한다.

일본에 가면 누구라도 느끼게 된다. 조신하고 단정하고 반듯하고 친절하고 경우바른. 그 양식화된 태도를.

그 이면(裏面)에 도사리고 있는 '혼네'(本音)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되.

 

오늘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