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아베일족 (阿部一族)> -其5- (1,4,3,3)

카지모도 2019. 10. 1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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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일족> -5-

-2016520일 포스팅-

 

 

'모리 오가이''아베일족'.

독후감을 쓰다가 중동무이한게 1년 전이로구나.

마침 소설의 텍스트 파일도 구하여 올렸으니(일부이지만) 마저 쓴다.

뭐하고 뭐 안한것처럼 찜찜하였는데 어설프게나마 마무리하여 부담을 벗으려 한다.

 

'남양군도'(조성윤)를 읽었다. <저자의 친필 인사와 사인이 책 속장에 씌여있는 책을 받아 읽는다는 건 기쁨이다. 조교수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수만명의 일본인들이 투신자살하였던 사이판 섬의 반자이클리프 (만세절벽).

미군은 함선에서 고성능 스피커로 투항을 권고하였지만, 그들은 혹은 자식을 목졸라 죽이고 혹은 가족들끼리 손에 손을 잡고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부르짖으면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저자는 말한다.

그들의 투신은 국가가 국민에게 명령한 억지죽음이었다고

집단자결이 아니라 황민화 교육이 등을 떠밀어 죽음으로 내 몬 집단강제사였다고.

 

죽음에 안달하는 듯한 저 기괴한 퍼스낼리티... 

순사(殉死)가 오버랩되어 되어 모리 오가이의 '아베일족'을 다시 읽었다.

순사 역시 무언가가 등을 떠밀어 자신의 배에 칼을 박게 하는 것이 아닐까.

 

저 인간성의 내면, 감정모체의 현장은 과연 어떠한 모습이길래.

서당개 들은 풍월 떠올라 '칼 구스타브 융'서껀 책갈피를 들쳐본다.

융에 의하면 인간의 퍼스낼리티에는 집합무의식(集合無意識, 또는 集團無意識)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개인무의식(個別無意識)과 더불어, 아득한 조상으로부터 연연히 축적된 경험이 종()이라는 집단적 퍼스낼리티(personality) 에 깃들어있는 무의식.

집합무의식.

몇년전 읽었던 '리처드 도킨스''유전자의 자기복제'(ESS)와는 시쳇말로 통섭(通涉)하는 바가 없을까 모르겠다. <문화적 유전자 ''의 자기복제(ala)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가설도 있더라만...아무렴 내 천학(淺學)이 무얼 깊게 궁구할랴만,>

어쨌거나.

융은 집합무의식의 이미지의 추상성을 태고유형이라고 하였다.

그 태고유형 중 하나가 바로 페르소나(persona)이다. <융은 페르소나를 무의식의 겉면이라고 부른다>

우리 퍼스낼리티는 진짜배기 자신의 것(自我)이 아닌 거짓 성격을 무의식적으로 연출할수 있다는 것인데, 그 얼굴이 바로 페르소나이다.

이를테면 대세(大勢)에 아부하려는, 퍼스낼리티의 비겁한(?) 쪽의 얼굴이라고 할까.. 

생존을 위하여 진짜배기 자아와는 다르게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또하나의 표정이 페르소나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아득한 옛날로 부터 모듬살이에 순치(馴致)되어 생존해 왔다.

자아(自我)가 집단(集團)에 반발하는 바 있더라도 억제되어져야 한다.

안그랬다가는 집단으로부터 소외되어 생존을 위협받게 된다.

그리하여 '군거적 순종' (群居的 順從, Herd Allegiance)은 후천적 본성으로 퍼스낼리티에 고착되어버렸다.

이른바 '군거적 순종의 원칙'이다.

인간은 절대고독을, 절대자유를 감당해 내지 못한다.

독고적(獨孤的?) 실존(實存)의 고고(孤高)함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려 하는 것이다

개별(Individualism)에서 집단(Groupism)으로

자유로부터 속박에게로

에리히 프롬은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에 맹목적으로 함몰된 당시 독일 국민의 집단적 심리를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설파하였다.

그 또한 페르소나의 작동원리로서 나는 이해하고 있다.

 

페르소나는 자아(自我)의 뜻과는 다르게 짓는 무의식의 표정이다.

이상적인 것은 조화로운 관계의 자아와 페르소나를 갖는 퍼스낼리티일 것이다.

그러므로 페르소나와 자아의 불일치는 필경 퍼스낼리티의 긴장을 초래한다.

페르소나는 자아를 침범하여 구속하고 자아는 페르소나에 저항하거나 순복한다

지나치게 발달한 페르소나는 점점 확대되어 자아와의 동일화를 지향하는데, 융은 이를 페르소나의 팽창이라고 부른다.

성공한 페르소나의 팽창은 자아를 압도하여 자아와의 동일화에 성공한다는 것이다.

페르소나가 팽창에 실패했다는 것은 자아가 페르소나로 부터 도망가거나 소외되어 그 괴리가 더욱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팽창에 성공한 페르소나(자아아의 동일화)는 더욱 확대되어 결국 타인에게까지 투사된다.

이를테면 일종의 파시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권위주의.. 카리스마..독선.. 헌신.. 자기희생..폭군..독재..아집..군림..지배.. 

반면 실패한 페르소나의 퍼스낼리티는 열등감과 소외감에 시달리며 골방으로 숨어든다.

죄의식..포비아.. 피해망상.. 대인기피.. 히키코모리..오다쿠..변태.. 색정광.. 

 

생각건대 일본문화는 집단주의(Collectivism)의 요체인 '' ()에 기반한다.

나는 다테마에()를 와()라는 태고유형에 기반한 일본인의 페르소나라고 생각한다.

다테마에는 화()에 의하여 고무되고 강화되고 팽창하여, 일본인은 보다 발달된 다테마에(페르소나)를 갖고 있다

일본인의 혼네(本音)는 다테마에를 떠나서는 고독하고 공허하고 불확실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일본인의 퍼스낼리티.

극도로 직선적이고 집체적이고 폭력적이고 대의적인 모습이 있는가 하면 한켠에는 지독하게 나이브하고 탐미적이고 쾌락적이고 개별적이고 예민하고 허무적인 측면이 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감각의 제국'을 보라.

밖에서는 군국주의의 군대가 저벅저벅 거리를 행진하고 있는데, 골방에서는 오직 섹스에만 골몰하는 한쌍의 남녀가 있다.

페르소나의 팽창(시대의 집체적 프로파간다)에 마취되지 못하고 음습한 색정(色情)의 세계로 도망간 자아는 변태적 쾌락의 절정에서 남자의 성기를 절단한다.

일본인의 도착적 섬세함은 변태적 페티시즘을 '후미코의 발'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소설)에서처럼 탐미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순사(殉死)

한 사람이 죽으면 우르르 따라죽기.

나는 하나의 실존적 자아가 진정으로 따라죽기(殉死)를 원하여 셋부꾸를 결행한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다.

저 순사의 주종(主從) 관계에 죽음에 이를만큼, 하나의 퍼스낼리티가 전 존재로써 수렴할만한 가치가 어드메 있는가.

느끼건대 저들의 관계는 존재론적 무거움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일본 대하 드라마 '군사 칸베에''공명의 갈림길'을 참으로 재미있게 보았다.

소설 영화 드라마 연극등으로 아마 수천번 다루어졌을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이어지는 일본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

그 서사를 재미롭게 끌고가는 힘은 오로지 난무하는 권모술수, 마키아벨리즘에 있었다.

세력 간의 합종연횡(合縱連橫)은 중국의 전국시대와 실로 비할 바가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센고쿠시대(戰國時代)를 종결지었는데 그 결정적 승리요인 역시 눈치와 배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배신을 약속하였지만 동서군(東西軍) 어느 편에 붙을까 눈치로 관망(觀望)하다가 이에야스가 대포 한방 먹이자 어마 뜨거라 하고는 동군으로 돌아선 고바야카와 히데야키>

그런 관계에 무슨 자아가 수긍할만한 대의적(大義的) ()이 있으며 공의(公義)에 입각한 헌신이 있겠는가.

내 보기에 사무라이의 하지(耳心, 수치감)도 기무(義務)도 기리(義理)도 옹()도 지극히 사적(私的)인 것이고 매우 타산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죽은 주군과 따라 죽는 가신 간에 생전 목숨바처 사랑한 동성애의 흔적도 없다.

 

저들의 순사(殉死)

경술국치로 자결한 이범진 홍범식 황현의 나라를 잃은 그 절망감에 이르기에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다.

성리학적 윤리관에 입각한 분노, 성삼문의 죽음에는 감히 비교할수 조차 없다.

동성애의 순애보, 몰리나 ('마누엘 푸익'의 소설 '거미여인의 키스')의 죽음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순사(殉死)

순사자의 반열에 오르면 남은 가족의 미래는 보장된다니까, 내게는 보험자살(保險自殺)의 모습도 보인다.

모리 오가이의 또다른 소설 사카이 사건’(기 포스팅)에서 하급무사들이 셋부쿠, 그들에게는 세간의 관심과 떠들썩한 명성과 군중환시(群衆環視)리에 행하는 셋부쿠.

죽음의 퍼포먼스, 내게는 허영적 죽음의 모습도 보인다

어쩌면 쾌락적 충동(에로스적 타나토스적 충동)도 있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저렇게 죽어서는 아니된다.

어미가 자식이 아내가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저렇게 다루어서는 아니된다.

 

순사((殉死)라는 것을 너무 폄훼하고 모욕하였는가.

그러나 나는 오히려 호모 사피엔스가 지닌 인간성이 모욕 당한 느낌으로 소름이 끼친다.

 

못마땅함으로 마구 뇌까린다.

저것은 자아가 동반되지 않은 페르소나만의 죽음이다.

저것은 팽창된 페르소나가 마취된 자아를 꼬드겨서 실행하는 거짓 죽음이다

사적(私的) 멘탈리즘으로 죽는 개죽음이다.

다테마에로서 죽는 위선적 죽음이다

죽음을 모욕하는 날나리 죽음이다.

 

맥락도 없는... 횡설수설이지만 힘에 부처 마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