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일족> -其4-
-2015년 5월 20일 포스팅-
책부족 추장님, 일본에 대하여 ‘아베일족’등으로부터 오도(誤導)될 법한 내 감정적 비약을 은근히 염려하신다.
일본에 오랜 기간 거주하였고. 지금도 잦은 왕래가 있으며 많은 일본친구를 갖고 있고 일본문화를 사랑하는 분으로써. 특별한 경우의 부정적인 측면을 일본에 편만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취급할까보아.
그렇지만 나 역시 일본문화와 일본인을 남보다는 훨씬 좋아하는 편, 추장님이 친일(親日)이라면 나 또한 못지않은 친일이다.
적어도 우리보다는 일본이 훨씬 열려있는 사회이고 다양한 가치들이 공존하는, 어떤 사회적 이슈의 데미지에도 우리보다는 흡수력과 탄성(彈性)이 큰 풍만한 사회이며, 일본인들의 또레랑스는 우리보다 훨씬 포용력이 크고 세련된 것으로 나 역시 생각하는 사람이다.
허지만 조금은 할수 없다.
'아베일족'은 내게 몹시 불편했던 것이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특수군(特殊群)과 일반군(一般群), 그리고 고(古)와 금(今)...
귀납적 추론에 있어서 인과적(因果的) 오류라던가 일반화의 오류를 넘나듦은 어쩔수 없노라고 중얼거린다.
내가 방점을 찍고 싶은 부분 ‘다테마에 (建て前)인데, 내 수준으로서 이 부분에 대한 논거(論據)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러하니, 감정적으로 과장과 비약에 의존할수 밖에 없음을 헤아려 주시라, 추장님.
대충 마무리하자.
자아억압(自我抑壓)으로 형식성에 순복하는 외형을 띄는 건 일본인에게 자리잡은 일종의 집단무의식이 아닐까.
和(わ)를 위하여 개별적 자아는 통제되어야 한다.
자아는 일정한 틀 속에서 정형화된 형식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은 감정모체의 진실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내면적으로는 분노로 들끓고 있을망정 외부로 표출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반듯하게 정돈된 형식을 취한다.
일본의 욕설문화(?)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후지고 낙후된 문화장르(?)일 것이다.
고작 빠가(バカ,바보) 마누케(マヌケ,멍청이) 고미(ゴミ, 쓰레기) 따위.. 우리나라에서는 욕 축에도 끼지 못할 어휘들이 그들에게는 지독하게 모욕적인 언사가 된다.
우리는 '이 새끼.. 저 새끼.. 죽여버린다 ..' 따위가 오히려 친구끼리의 친밀도의 증표가 되기도 하고, 왠만한 주사(酒邪)나 어지간한 주폭(酒暴)도 묵시적으로 용납되지 않는가.
우리나라 남도의 그 현란한 욕지기를 고스란히 일본어로 그들에게 들려주면 혼비백산, 주먹도 나가기전 욕(辱)펀치에 지레 뻗어버리고 말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자아의 배설(排泄)에 익숙하지만 일본인은 자아배설에 서툴기 짝이 없다.
일본인에게는 자아가 근거하는 감정모체, 이른바 '혼네'(本音)는 순치(馴致)된 형태로 타인에게 표출되지 않으면 안된다.
'혼네'는 은유적 우회적 문화적 양식적으로 변형된 형태, 곧 '다테마에'(建て前)로 나타나야 한다.
체면치레 인사치레 예절치레와 같은 겉치레문화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사회에서는 없을수가 없는 것들이다.
어느 민족에게나 '다테마에는 있을 것이지만 일본의 ‘다테마에’문화는 유독(唯獨)하게 발달하였을 뿐더러 매우 독특하다.
잘 알다시피 일본 부모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첫째 덕목은 “他人に 迷惑(메이와쿠)を 掛けるな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는 것이다.
'메이와쿠'(迷惑)는 말하자면 '혼네'를 그대로 드러냄으로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혼네를 드러내는 것은 바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다.
다테마에가 일종의 위선처럼 보일수도 있겠으나 일본인에게 다테마에는 하나의 양식화된 진실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겉치레 인사에 대하여 '빈 말이라도 고맙다'고 흔히 말을 하지만 일본인에게 '다테마에가 '빈말'이라는 의식이 없다.
다테마에라는 것이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가 투사된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얼마전 추장님께 얘기하였었는데) 전여옥의 '일본은 없다'에 보면 저자가 경험한 이런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많은 여자들이 벌거벗고 목욕중인 여탕에 보일러인가를 손 보려고 남자가 들어온다.
그런데 남자나 여자나 그렇게 태연할수 없더란다.
벌거벗은채 수건으로 앞부분만 가리고 남자가 일하는 주위에 둘러서 보일러가 어쩌니 저쩌니 대화도 나누면서..
보일러를 손본다는 명목의 다테마에가 서로간 쑥스럽다거나 부끄럽다는 혼네를 마취시켜 버린 것이다.
혼네가 다테마에에게 마비된 전형적인 현장의 모습이 그러한 것이다.
베네딕트는 ‘일본의 행동동기는 기회주의적이다’라고 말하면서 일본의 이중성을 국화와 칼에 비유하였다.
마음 속에는 칼을 품고 있으면서 얼굴에는 웃음을 가득 띄고 손으로 국화를 건낸다는...
삼엄하게 날 선 칼 한자루 품고 있는 마음으로 세련된 솜씨로 잘 손질된 국화 한송이를 내미는 손,
그 이중성은 그들의 위선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엄격한 자아통제인 것이다.
그런데, ‘칼’을 아무리 우회(迂廻)하고 은유(隱喩)하고 순화(順化)하더라도 '칼'과 ‘국화’의 괴리는 너무 크다.
'칼'이 '국화'의 얼굴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아베일족에 등장하는 셋부쿠에 깃든 심리적 다테마에에 대하여서이다.
그들은 다테마에에 의하여 마취된 혼네가 죽음을 납득함으로서 자신의 배를 가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 납득함이 감정모체의 진실인가는 차치(且置)하고...
죽음을 생각하는 혼네의 복잡한 정서가 완벽하게 표출되는... 과연 셋부쿠라는 저 직선적인 죽음의 동작인가 하는...
그들은 정말은 죽고싶지 않는데 억지로 죽는 것이 아닌가하는...
순사(殉死)
그건 일종의 타살이 아닌가.
다른 형식의 순장(殉葬)이 아닌가.
대강..
마무리가 안된다.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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