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2014년 11월 12일 포스팅
<최후의 추신쿠라(最後の忠臣蔵)>
제작년도 : 2010년 (한국개봉 2012년 2월 23일)
감독 : 스기타 시게미치
주연 : 야쿠쇼 코지, 사토 코이치
'추신쿠라' (忠臣藏)
억울하게 죽은 주군(主君) '아사노 나카노리'의 복수를 수행하는 47명 아코(赤穗)의 낭인들.
복수에 성공한 그들은 막부(幕府)의 명에 의하여 모두 셋부쿠(切腹)로 자결하고 센카쿠지에 묻힘으로 사무라이의 귀감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아마 일본인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고 회자(膾炙)되는 역사담(歷史談)일 것이다.
소설 영화 연극 드라마 가부키로 무수히 만들어졌을 것이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소설과 드라마로 몇 종류의 ‘추신쿠라'(忠臣藏)를 접하였고, 무리의 대장인 '아사노'가(家)의 가로(家老) '오오이시 구라노스케'(大石內藏助)라는 이름은 내 입술에 익다. (소설 '다케다 이즈모'作 '47 인의 사무라이' 다시 펼처 보았다).
한마디로 '추신쿠라'는 무척 재미있었다. ('미야모토 무사시'류 보다 훨씬)
'에도' 막부(幕府)의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등의 궁중비화나 당시 정치적 상황과 암투라던가, 겐로쿠(元祿)시대의 풍속과 풍물등 일본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만만치 않았다.
47인 무사들의 복수와 자결, 추신쿠라의 중심축을 이루는 그 서사(敍事).
분명히 거기에는 파토스적 미학(美學)이 있었고, 그로부터 엄습하는 모종의 감동이 없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파토스에서 우러난 직정적인 감정이란, 그들 복수의 당위와 방법론에 대한 이해와 납득(納得)이라는 것과는 별개의 감정이다.
오직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짐짓 놈팽이 시늉으로 세상의 눈을 속여가면서 오랜 기간 노심초사하는, 그러면서도 대의명분을 쌓아가는 구라노스케.
그렇지만 그 노력과 경비를 들이는 복수라면 닌자(隱者)라도 고용하여 단숨에 끝내는게 효율적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말하자면 복수를 위한 그 방법론이라는게 몹시 비효율적으로 느껴지는바 없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거사에는 '아사노'가문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자들도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오로지 무사의 의기(義氣)라는 명분으로 동참하였다.
복수를 결행하는 인과(因果)의 사슬도 그렇거니와 저들의 충절(忠節)이라는 것이 너무나 관념적이지 않은가.
우리 성삼문의 충절, 그 뜨거운 리얼리즘과는 색감이 다르다.
사육신의 충절이 액추어리틱한 리얼리즘이라면 아코의 낭인들 그들의 충절은 매우 형식적이고 관념적이며 어쩌면 제의적(祭儀的 모습까지 엿보인다.
하나의 조작(造作)된 관념적 가치에 동조(同調)하여 기꺼이 자신의 전 존재를 함몰시키는 저 행동집단.
어떤 엄정한 내적규범이 도사리고 있어, 자신의 실존을 하나의 양식성(樣式性)으로 결단내버리고 마는 것인지.
저들 사무라이의 내면, 아득하게 신비 할 따름이다.
'최후의 추신쿠라'
이 영화 또한 그런 충절과 의기에 관한 것인데,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자결로 죽고 난 그 후의 이야기이다.
거사(擧事)후, 대장 '구라노스케'의 명을 받들어 살아남은 두 사람의 사무라이가 있었다.
한 사람은 무사들의 남은 유족을 돌보라는 명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사람이 이 영화의 주인공 '마고자에몬'이다. (일본의 국민배우라는 '야쿠쇼 코지'가 粉하였다)
거사 전날, 3 대째 구라노스케를 모신 충직한 가신(家臣) '마고자'는 은밀하게 주군의 부름을 받는다.
'구라노스케'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의 뱃속에는 유복자가 있었는데 그 후사를 '마고자'에게 위탁하려는 것이다.
"네 목숨을 내게 다오."
"과분한 영광입니다. 오늘 밤으로 저는 죽었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행색을 바꾸고 살겠습니다. 주군의 유복자를 위하여 이 한목숨 바치겠습니다."
주군의 명령 한마디로 '마고자'의 사무라이로서의 명예는 유보(留保)되었다.
그토록 염원하였던 거사에 참여하지 못함은 물론, 주군은 그에게 사무라이가 아니라 비겁자가 되라는 것이다.
'마고자'는 거사(擧事) 전날 무리에서 빠져 목숨이 아까워 내뺀 6명중의 한명의 도망자가 되어버렸다.
주군의 명이다. 이제부터는 치욕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기꺼이.
주군의 여자는 딸을 남기고 죽었고, '마고자'는 갓난쟁이를 안고서 눈밭을 헤맨면서 젖동냥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
도망자의 16년.
이제 열여섯 소녀 '가네'는 50줄 '마고자'의 어린 여주군(女主君) '가네사마'이다.
언제나 그녀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극진한 공대와 지극한 정성으로 그녀를 섬긴다.
비겁자가 받아야 하는 굴종과 멸시와 모욕, 자신을 죽이려는 자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까지.
'마고자'가 살아 남아야 할 이유, 그건 '가네'를 가장 명예로운 무사의 딸로써 그에 합당한 좋은 가문에 출가시키는 것.
그때까지는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가네'는 그런 '마고자'를 사모하여 한평생 함께하고 싶어하지만 감히 주군의 딸', '마고자'로서 그건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생각이었다.
그 '가네사마'가 드디어 명문가로 시집을 간다.
드디어 '마고자'에게 덮씌어졌던 비겁자라는 오해가 풀리는 것이다.
16년 전, 전설이 된 무사 '오오이시 구라노스케'의 따님께서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간다.
옛 아사노가의 인연있는 무사들과 구라노스케의 명망을 사모하는 무사들이 구름처럼 가마를 따른다.
'마고자에몬'
임무는 완성되었고 명예는 돌아왔다.
그에게는 이제 최후의 기쁨이 남았을 뿐이다.
16년 동안이나 유보되었던 명예로운 의식(儀式)
"마지막 사명을 마친 지금 뒤늦게나마 오오이시님을 따르려합니다. 3대의 인연과 윤회와 환생의 끝에서 저를 바칩니다."
6조 남짓 좁은 다다미방, 그는 주군의 위패 앞에 무릎 꿇어 앉았다.
하오리의 앞섶을 헤쳐 배를 드러낸다.
백지로 단도를 감싸쥔다.
아랫배에 칼을 쑤셔 박는다.
고통 속에 잠기는 그 순간은 희열인가.
결연하게 닫힌 입술이 일그러지지만 눈빛은 환희롭다.
뒤늦게 달려 온 친구의 카이샤쿠(介錯, 목을 처서 고통을 끝내는 것)를 거부한다.
피바다 속에서 몸을 일으켜 스스로의 목을 가른다.
위패에 피보라가 뿌려진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애상(哀傷的)에 젖은 선율과 함께 가부끼의 대사가 흐른다.
‘이 밤이여 안녕
죽음을 향한 여정에는 무엇이 있을까
한걸음씩 사라져 가네
꿈 속의 꿈이여
애달프고나.
내 등에서 전율이 흐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저 죽음이 허무로운가.
허무하여 아름다운가.
폐부를 찌르는 파토스는 센티멘탈인가.
무엇을 얘기할까.
저 동기의 경박(輕薄)함이거나 저 명분의 왜소(矮小)함을.
저 관념의 단소(短小)함을.
저 형식적 추종의 삶의 허황함을.
저 양식미(樣式美)의 헛헛함을.
저 일본의 파시스트적 스노비즘을.
그러나, 저 처절한 형식과 관념의 아름다움 앞에서 내 로고스는 진부해진다.
두리번 두리번, 색목문명(色目文明)은 어지럽다.
포스트모더니즘, 그 현란한 수사에 자아는 호도된다.
방기하여 어지러운 삶과 형식하여 단정한 삶.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충일한가.
새삼 느끼건대, 나의 내면에는 형식이 없다.
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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