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좁은문> -1-
-앙드레 지드-
***동우***
2014.11.19 04:32
사춘기적, '좁은문'을 읽고서 몇날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구원의 여인상.
깨끗한 소녀, 고결한 소녀, 피에타...
남자에게 최초의 여성성은 어떤 이미지로 스며드는지.
누구에게나 어딘가 고결하고 왠지 애린하고 무언가 따뜻한... 그 비스무리한 감성일듯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슬픔이 팔딱거리는 이 조그마한 영혼, 흐느낌으로 온통 흔들리는 이 연약한 육신에 대해서는 너무도 심한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여전히 무릎을 끓고 있는 그녀 곁에 서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이 새로운 격정을 무엇이라 표현할지 몰랐다. 단지 그녀의 머리를 내 가슴에 꼭 껴안고 내 영혼이 흘러넘치는 입술을 그녀의 이마에 대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랑과 연민, 그리고 감격, 희생감, 정성이 뒤얽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도취되어 나는 힘껏 하느님을 불렀고 이제는 내 삶의 목표가 공포와 악의 삶으로부터 이 소녀를 보호하는 것 뿐이라 다짐하면서 스스로 내 몸을 바치기로 했다.>
'알리사'라는 이름.
구원(久遠)의 여성. 베아트리체, 순결덩어리.
욕정은 커녕 용변도 상상되지 않는 이름.
그러니까 사랑이란 영혼의 고결한 합일.
순결한 도취.
<주여! 제롬과 제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의지하면서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평생을 통해 마치 두 사람의 순례자처럼 때때로 둘 중 한 사람이, "피곤하면 내게 기대." 하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네가 곁에 있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해." 라고 대답하면서 당신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주시옵소서.>
동성애 성향(性向)과, 무릇 이원론의 골짜기에서 허덕이는 '앙드레 지드'의 고뇌.
사춘기 그때에는 그런걸 도무지 느낄수 없었습니다.
시대가 그랬거니와 내 개별에 있어서도, 내 사춘기는 그닥 순진한 것은 아니었을터인데.
앙드레 지드(André Gide.1869~1951)의 '좁은문'
일곱번 정도로 나누어 올립니다.
아직 미독(未讀)이시라면(읽으셨더라도 다시), 꼭 읽어보시기를.
앙드레 지드와 그의 아내 마들레느.
앤도 슈사쿠(遠藤周作)를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리용의 묘지에 마른 잎이 구르는 어느 슬픈 가을날 늦은 오후.
앤도 슈사쿠는 사념에 젖습니다.
'하얀 묘지'
앤도 슈사쿠가 들려주는 이야기, '앙드레 지드'를 완벽하게 느낄수 있을겁니다.
자판 두드려(공치사.ㅎ), 댓글란에 서너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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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묘지 (1)
-앤도 슈사쿠 (遠藤周作)-
가을이 되면 묘지는 하얗다.
리용은 10월 말부터 이미 겨울날씨다. 하늘은 맑고 부드러운 햇살이 퍼부어 내리는 가을 날은 너무나도 변하기 쉽고 너무나도 슬프다. 묘지를 수놓는 느릅나무며 아카시아의 잎은 모래처럼 메마른 소리를 내면서 마구 흩날린다. 그것들은 묘지를 이내 황금빛으로 뒤덮고 그 황금빛의희미한 빛 속에서 십자가는 유달리 하얗게 빛나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나는 묘지에 가서 독서를 하기도 하고 골똘이 무슨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주 드물게 입구의 철책을 살며시 누르고서 늙은 부인이 성묘하러 오는 일이 있었다. 때로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새빨가 빛갈의 꽃다발을 묘표(墓標) 앞에 놓고서 고개를 숙이는 일도 있었다. 나는 그녀들의 고요한 기도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느릅나무에 몸을 기대고서 그 광경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기도를 받는 사람은 그녀들의 죽은 아들인지, 그렇지 않으면 옛날에 사랑했던 애달픈 사연이 있는 사람인지, 나는 이 곳을 찬아오는 여인들이 사자와 대결하는 표정을 좋아했다....
그녀들이 찾아오지 않는 날이면, 나는 프랑스 책의페이지를 한장한장 차가운 페이퍼 나이프로 자르면서 지칠줄 모르고 읽어 나갔다. 이곳의 고요는 다른 어느 곳보다도 훨씬 더 깊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그즐에 물들어 있기 때문일까. 들리는 것이라곤 끊임없이 흩날려 떨어지는 마른 잎 소리 뿐이었다. 그 소리에 나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를 남겨두고 이승에서 먼저 떠난 사람, 자살한 벗이며 선배의 환영이 좀 더 선명하게, 좀 더 애달프게 눈앞에 어른 거린다.
그리고는 황혼이 찾아왔다. 묘지는 시시각각 장미빛으로 물들고, 황금빛의마른 잎 위에 있는 심자가의 그림자는 점차로 엷어지고, 그러다 한순가느 조금 전보다도 더욱 짙은 그 자취를 땅위에 남기는 것이었다.
오늘 오후에도 나는 이곳에서 한 권의 조그만 책을 독파했다. 그것은 스위스에서 발행한 앙드레 지드의 <지금은 너의 추억 속에서>라는 제목의 그와 그의 아내 마들레에느와의 괴로운 사랑의 추억을 고백한 책이었다. 소년 시절부터 나는 지드를 읽을때마다 지드와 함께 그의 아내 마들레느의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지 않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들레느라고 하는 그 이름은 어쩐지 가을의 맑게 트인 머나먼 여운을 생각나게 한다. <좁은 문>의 아리사처럼 쓸쓸한 미소, 너르고 휘윱스름한 얼굴, 그늘진 눈동자를 그녀는 가지고 있는듯이 생각되었다, 사실, <한 랑릐 밀알이 죽지 않는다면>이나 <일기> 속에서 지드가 말한 마들레느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고 이ㅆ었던 바 그대로였다. 나는 지드한테서는 악(惡)을 살리는 힘과 거기에서 탈피하려고 하는 자아의 시련을 배웠고, 그의 아내 마들레느한테서는 평온하고 경건한 자세를 꿈꾸었다. 그리고 아마도 반대가 된다고 한다면 전혀 반대가 되는 이 두가지 삶의 경향을 동시에 나 자신 속에서 키우며 정신적인 갈등을 느껴왔다.
그런 까닭에, 나는 나 자신 속에, 대립과 반항을 때로는 지드 부부의 사랑의 투쟁 속에다 옮겨놓고 바라보고 싶은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드는 참다운 그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이 책만큼 언급한 일은 없었다. 예전에 단 한번 '사토오 사쿠'선생이 (그 무렵 우리들은 대학에서 선생으로부터 지드에 관한 강의를 받고잇었다) "지드와 아내 마들레느 사이는 참으로 청결한 것이다" 라고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선생은 물론 지드의 결혼생활의 청결성 속에 숨어있는 비극을 암시했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때 나는 <배덕자>에서 자기에 대한 성실성을 수행하기위해서 아내로 하여금 피를 토하고 죽게 만들었던 미셀이나, <좁은문>의 아리사에 대해서 너무나도 성스러운 여인의 영상을 기대함으로써 그녀를 계속 괴롭히고 있는줄 알지 못하는 제롬의 사랑을 어떤 전율을 가지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드 부처의 부부심리 속에 그런 것들과 똑같은 그늘이 없다고 어떻게 단언할수 있겠는가라고. 그러나 도욱더 나로 하ㅏ여금 그들의 결혼생활의 심연을 엿보게 한 것은 오히려 지드와 폴 클로델의 왕복서신에 의해서이다. 카톨리싲즘의 맹렬한 불꽃 속에서 더욱 더 우주와 인간의신비한 의미를 깨달아가는 클로델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드를 이해할수 없었다. 클로델은 너무나도 거인이요, 너무나도 드높다. 그의 비극은 그것에 대해 언젠가 쓰게 되겠지만 사도 바울의 괴로움이다. 몇 번인가 지드가 개종하리라고 굳게 믿고서 쓰디쓴 환멸을 그는 느끼게 된다. 1912년부터 이 두 작가의 대림은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마음 속에 떠올린 것은 그와 같은 대립의 과정이 아니라, 그것이 절정에 달했던 1913년, 지드의 <교황청의 지하실>이 <N.R.F>애 발표되었을 때의 클로델의 격노의 편지이다.
[어떠한 이름 밑에서 자네는 이번의 <N.R.F>의 478페이지에 잇는 부분을 쓸수가 있었는가... 자네가 이 두려운 악습에 몸을 바치고 있다고 믿어도 좋은가? 대답을 하게. 단연코 해야하네, 만약 자네가 침묵을 지킨다면, 만약 자네가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면 나는 참고 견딜수가 없을 것이네. 만약 자네가 남색가가 아니라면, 어째서 그런 주제에 역겨운 정열을 쏟는단 말인가? 자네의 아내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자네 마음의 가장 청정한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게. 자네는 알지 못하는가? 자네가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죄에 빠뜨리고 있느냐 하는 사실을.]
문제가 된 478페이지는, 로마에서 나폴리로 가는 기차 속에서 청년 라프카디오가 남색의 욕망을 회상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지드 자신이 클로델이 격노했던 것과 같이, 역겨운 이 기욕(嗜慾)을 지니고 있고,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는다면>이나 <배덕자>등에 나와 있으며, <코리든>에서는 그것을 옹호까지 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클로델의 편지에 대해서 지드가 부친 답장은 애처로왔다. 그는 마침내 신부에게 죄를 고백하듯이 클로델에게 자신의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 놓는다. [나는 여성 앞에서는 절대로 육욕을 느끼지 않네. 그것은 나의 인생의 커다란 슬픔일세... 오히려 사랑은 나의 내부에서 육욕을 방해하는 것처럼 생각되네.] 이렇게 고백하면서 지드는 클로델에게 자기를 그런 점 때문에 경멸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한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생(生)보다도 훨씬 더 사랑하고 있는 아내 마들레느를 위해서였다. [나 하나 뿐이라면 세상의 모든 모욕도 달갑게 받을거네. 그러나 나는 결혼한 몸이네]
그러나 지드의 아름다운 아내 마들레느는 클로델 이상으로 남편의 이 기욕을 알고 있었다. 클로델처럼 면박을 하는 일이 없이, 그녀는 그 때문에 홀로 고뇌하고 있었다.
-계속-
++++
***mayblue***
2014.12.14 20:05
동우님...
시간나실 때 앤도 슈사쿠의 하얀묘지 다음 편 부탁드립니다.
몸이 그리 건강한 사람이 못되어
오늘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읽지 못하겠지만
언제든 올리시는 날 즉시 달려와 즐거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좁은문 뿐 아니라 앤도 슈샤쿠의 이 ‘귀한 글’도 읽게 해주시는 동우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평안한 밤 되시길요^^
***동우***
2014.12.15 05:19
메이블루님.
앤도 슈사쿠 '하얀묘지', 댓글란에 계속 올리겠습니다, (4회 정도로)
한주의 밝은 시작을.
***mayblue***
2014.12.13 20:00
자판을 두드려 이런 귀한 글을 올리시는 분이 계시다는게 기쁩니다.^^
저도 사춘기 시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읽은 이 책을
어른이 되고서 몇번을 더 되짚어 읽어 보았는데
읽을 때마다 글 한줄 한줄 새로이 다가오는 감동들...
가슴 깊이 짙푸른 강 한줄기 흐르는 마음이었다고 할까요.
앙드레 지드..
그의 어떤 사상과 종교와 철학과 삶에서 이런 글이 쓰여졌을까
막연히 상상한 적도 있는데 올리신 글에서 그 의문점이
좀 해소되는 듯하여 고맙고 감사합니다.^^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들러서 좋은 글 감상하겠습니다.^^*
***동우***
2014.12.14 05:07
하하, 메이블루님, 본문의 소설은 자판 두드려 올리는거 아니예요.
겨우 독수리 타법 면한 주제에 긴 소설을 언제 타이핑하겠습니까?
예제 눈밝혀 다니면서 텍스트 파일 업어다 올리는 거랍니다.
앤도 슈사크의 ‘하얀 묘지’의 글만 책 펴놓고 자판 두드린다는 말씀이라우.
앙드레 지드 '좁은문'.
특히 사춘기 소년들에게 알리사는 하나의 청결함의 아이콘이었을겁니다.
순결함에 대한 선망의.
메이블루님과의 상면 기쁩니다.
그리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좁은문> -2-
***동우***
2014.11.20 05:10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공부와 노력, 경건한 생각과 깨끗한 덕행, 청교도적 규율에 의한 극기의 훈련.
그리고 독한 술같은 겸양(謙讓)에의 도취.
캘비니즘의 모럴리즘.
지상의 사랑이 지향하는 바는 곧 신앙적 사랑의 완성.
"너는 죽음이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 나는 오히려 죽음이 접근시켜 줄 것같은 생각이 드는데.. 그래 생전에 떨어져 있던 것을 죽음이 접근시켜 줄 거야.... 나는 그렇게까지 행복해질 필요가 없어. 이대로 우린 행복하지 않아?"
좁은문.
알리사와 제롬.
우리의 그 때, 이성을 향한 연애감정이란 필경 고상한 감성에 담겨지는 고결한 로망이었을랑가.
책상 밑으로 ‘벌레먹은 장미’나 ‘플레이 보이’같은 도색(桃色)적 달뜬 것들이 은밀하게 돌아다녔더라도.
그러니까 소년들은 이원론의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자들.
맑은 영혼의 숙녀와 어듭고 음습한 곳의 요부 사이를.
알리사.
요즘 아이들 저와 같은 플라토닉한 감성으로 가득한 여성성이 있을까 모르겠다.
일찌거니 해부학 생리학적으로 적나라하게 만들어진 교재 펼치고 수행되는 성교육, 도처에 범람하는 에로티시즘의 물결..
호모 에로티쿠스의 시대에 말이다..
작금, 예배당에도 드물거다.
세속적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 순수한 신(神)적인 모습만을 설파하는 교회는.
으흠, 세속의 우리가 신께로 향하는가. 신께서 양떼들의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가.
인간적 속성 가득한 기도를 용납하시는가. 예수는 신의 아들의 위광을 벗어버리고 나자렛 목수의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웃어주시려는가.
인간적인 것을 통하지 아니하고서 어떻게 신(神)적 인식에 이르랴.
하나님은 오로지 신격(神格)만으로 어떻게 인간에 다다를수 있으랴.
인간은 어차피 신이 아니었던 걸.
<아름다움은 느낄수 있는 자의 길이란다, 어린 파이드로스여. 그것이 예술가가 정신에 이르는 길이란다, 감각적인 것을 통과하는 길, 그 위험스럽고 쾌적한 길은 죄악의 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은 우리 시인들은 에로스가 옆에 와서 안내자로 나서주지 않고는 아름다움의 길을 갈수 없다는 사실이야. 열정이 우리를 고양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의 동경은 반드시 사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단다.>
***동우***
2014.11.20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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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묘지 (2)
-앤도 슈사쿠-
마들레느는 <좁은문>의 아리사와 제롬처럼 지드보다도 두 살 위인 사촌누이였다. 두 사람의 사랑의 발단은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는다면>에 자세히 씌어져 있고. <좁은문>의 서장은 그것의 투영임에 틀림없다, 소년 시절부터 이 쓸쓸하게 보이는, 무슨 일에 대해서나 체념하기 쉬운 사촌 누이 속에서 지드는 모든 아름다운 것, 모든 착한 것의 모습을 꿈꾸었다. 소녀 마들레느의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그림자는 아리사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어머니의 좋지않은 품행을 남모래 고민하고 있는 데에도 있었다. 그 추억은 한평생 그녀에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드는 결혼을 함으로써 그녀의 이 그늘을 닦아 내려고 했지만, 한편으로 마들레느에게는 평생토록 뭔가를 무서워하는 어린애같은 점이 있었다, 그녀가 죽은 후부터 지드는 그 무렵의 이미 빛바랜 사진 속에서 그러한 표정, 그 어렴풋이 사라져 가는 눈썹에 떠도는 뭔가 삶의 문지방에서 쭈뼛쭈뼛하는 영상을 알아 차리는 때가 있었다. 그는 자기와의 결혼에 의해서, 또한 그가 발견한 <지상의 양식>의 환희에 의해서 이 마들레느의 쓸쓸한 삶에의 망설임을 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드의 결혼생활에 나타난 하나의 착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접어 두자. 그의 또 하나의 착각은 마들레느를 육욕을 갖기에는 너무나 청순하다고 생각하는 점에 잇다. [나의 육욕은 다른 대상(남성)에 향하여 있었으니까.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그는 아내와의 부부생활을 회고하여 고백하고 있다. [나는 육욕은 남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성이 똑같은 욕망을 느낀다고 인정하는 건 견딜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나쁜 여자들만이 그러한 것을 맛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고배ㅑㄱ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그 이유는 설명도 변명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결혼 전에 이 이상한 경향과 남색적 기호를 두려워한 지드는 의사한테 의논하러 찾아가는 것이다. 그 고백을 다 들은 의사는 엷은 웃음을 띄면서 대답했다. [결혼해 버리게. 걱정하지 말고 결헌 해버려. 그렇게 하면 자네는 그런 걱정은 자네의 상상의 소산임을 알게 될 걸세.]
그러나 이 의사의 낙관론은 적어도 지드의 경우에는 맞지 않았다, 마들레는와의 결혼 후에도 남색적 갈망을 버릴수가 없었는데다가 지드는 아네에 대해서 육체적 사랑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모독이라고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지드는 마들레느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지 않았다, 그는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딸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저 단테의 <신곡>에 저항하여, 플라토닉 러브와 카톨리시즘을 풍자한 <좁은문>의 비극이다. 지드는 스스로 자신의 작중인물 제롬을 스탕달의 <아르망스>에 나오는 성적 불능자인 주인공을 본떠 등장시켰거니와, 적어도 육체에 관한 한 지드는 제롬 적이요, 마들레느는 알리사와 흡사한 고민을 맛보았을 것임에 틀립없다. 마들레는는 본질적으로는 모성형의 여성이었으니까 역시 자식을 가지고 싶어했을 것임에 틀립없다. 지드한테서 그것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그녀는 그 감정을 조카나 조카딸한테서 충족시킬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지상의 양식>과 같은 격렬한 생명의 찬가를 쓸수 있었던 것을 이상하게 여겼을 정도였다. 그 후부터 무슨 일이나 자기 탓으로 돌리는 수가 많은 그녀는 그것을 자신에게 남편을 매혹시킬만한 육체적인 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혼여행이 진행됨에 따라서 마들레느는 비로소 남편의 가공할 성적 비밀을 알기에 이르렀다. 로마에서 지드는 아내를 거리에 내버려둔채 사진을 찍겠다고 하고서 루이지라고 하느 어린 소년과 함께 어느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후, 지드는 아네에게 그걸 아무렇지도 않은것처럼 얘기했다. 그때 그녀는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어나 북아프리카 알제리 여행때 비스크라에서 출발하는 기차 속에서 지드와 마들레느의 자리에 3명의 중학생이 동석했다. 그들은 순진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척하고 있던 지드는 그 중의 한 소년의 셔츠 속으로 살며시 손을 딜이 밀더니, 그 팔과 어때를 애무했다. 마들레느는 그걸 못 보는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제리에 도착했을 때, 호텔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그녀는 비난이라고 하기보다는 슬픔으로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아까 당신은 꽤나 광기의 그늘을 가지고 있더군요.]
우리들은 여기서 지드를 한결같이 비난할수는 없다, 위선이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한 그이기 때문에 이러한 고백을 쓸수 있었던 것이도, 그 자신도 클로델에게 그걸 고백하고 있는 것 같이, 필사적으로 이 역겨운 욕망과도 싸은 것이리라. 아니, 오히려 한편으로는 마들레느에게서 받은 아름다운 것, 착한 것과 아울러 그 자신 속에 잇는 이 악을 하나의 삶의 가능성으로서 자신의 문학과 자아의 전개로 승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한 지드의 삶의방향은 클로델의 입장에서 보면 부정할 만한 것이었고, 아내 마들레느에게는 도저히 따라 갈수 없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그녀는 남편이 문학자이기 전에 한사람의 좋은 남성이기를 원했다. 경건한 그녀는 차츰 악마적으로 변해가는 (이렇게 밖엔 그녀에겐 생각되지 않았다) 남편과 행동을 같이 해 나갈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차츰 외토리로 밀려나는걸 느꼈다. 그러나 마들레느는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할수 있는 여성이 아니었다. 얼마 안있어 닥쳐올 무서운 파국에 대해 그녀는 눈을 돌리고 보지 않는 체했다.
첫째는, 남편의 문학을 자기 때문에 속박하기 싫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의 사상을 부정할 권리는 없다>고 그녀는 어느날 사촌 누이에게 말했다. <게다가 앙드레가 쓰지 않면 안된다고 믿는 것을 나에 대한 고려때문에 비뚤어지게 한다면 나 자신에 대해 화를 낼 것이다>
지드도 그녀의 슬픔을 모를리가 없었다. 그러나 작가인 이상 자기에 대한 성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좋다, 그것이 이 지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 그는 혼자서 남몰래 눈물을 훔치면서 그것을 참고 견뎌야만 했디.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것일까? 자식을 굶주리게 하면서까지 '시마자키 토오손'은 <파계>를 써야만 했을까> 그렇지 않으면 <파계>를 버리고 아내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어야만 했을까? 나는 일본의 평론가, 특히 '야마모토 켄기치' 씨에게 이 문제를 좀 상세히 분석해 주기를 바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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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4.11.21 04:22
지상의 행복.
그걸 마다하고 어디로 자꾸만 도피하는가, 알리사여.
당시 프랑스사회, 사촌간의 결합이 장애는 아니었을테고, 두살 연상인 제롬을 향한 알리사의 동생 줄리에뜨의 연모는?
부정한 어머니로 인한 에로스에 대한 모멸감, 그것이 하나의 원죄의식으로 엘리사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을까.
좁은문으로 통하는 길은 다만 아가페의 길, 에로스의 색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엘리사와 제롬.
유년시절부터 경건하고 청결하고 온화한 청교도적 분위기 속에서 서로에게 싹튼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이 오로지 영혼(정신)의 영역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터인데.
지상에서 누리는 사랑.
그 조건으로 육체의 영화(靈化)를 꿈꾼다면 그 사랑 참으로 가혹하도다.
오히려, 고착되고 고루한 정신을 끌어내려다 육체의 진실함과 따뜻함 속에다 담아야 할 것을.
채털리 부인처럼. 조르바처럼.
<내 머릿속에서는 가장 형이상학적인 문제까지도 바다와 흙과 인간의 땀냄새가 나는 따스한 실체의 형태를 취한다. 개념은 나에게 이르려면 따뜻한 육체가 되어야 한다, 냄새맡고, 보고, 만질수 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이해를 한다. -조르바->
***동우***
2014.11.21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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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묘지 (3)
-앤도 슈사쿠-
이 비통한,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결혼생활 속에서 두사람은 점차로 지치기 시작했다. 지드는 마들레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고, 또한 자기에게 사랑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그가 그녀의 육체 중에서 가장 사랑한 것은 손이었다. 그 아름다운 손을 마들레느는 일부러 너무 심하게 접시를 닦는다던지 겨울에도 장갑응 ㄲㅣ지 않는다던지 하여 스스로를 학대하였다.
그것은 <나한테서 떨어져 나가기 위해서였다>고 지드는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여성이 품고있는 사랑의 심리를 무시하고 있는것 같다.
이 지드의 고백록 속에서 적어도 내가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드같은 훌륭한 작가가 자기의 아내를 바라볼때, 어느 한가지 고정관념으로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들레느와 같은 여성으로서는 일단 사랑한 남성을 그렇게 간단히 거부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도 그 무렵의 마들레느의 심정은 몹시 괴로웠겠지만 문학과 아내 사이에 끼어 번민하고 있는 지드를 보기가 가슴 아팠을 것이다, 그 때 그녀는 지드를 자유로이 문학에 정진할 수 잇도록 해주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젠 자기에게 붙잡혀 잇지 않도록 자기에 대한 사랑을 단념하도록 슬픈 연극를 해 보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는 한편 그러한 자기 희생을 지향하면서도 역시 지드한테 버림받은 것이 괴로웠을 것이다.
마들레느는 이렇게 하여 점점 허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지드는 그녀더러 여행을 나가자고 했다. 처음엔 그녀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집안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으나, 결국 두명의 하녀를 즐겁게 해줄 생각으로 마음을 돌렸다.
지드 부부의 일행이 놀러간 페니키안의 자연은 아름답고, 보리밭에는 햇빛이 부드럽게 비치고 있었다.
페니키안에서 지드는 담배를 샀기 때문에 마들레느와 두명의 하녀보다 뒤쳐져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20미터 앞을 두사람의하녀 사이에 끼어 걸어가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고 저게 정말로 그녀일까하고 의심을 품을 정도로 슬프게도 늙어빠진 아내의 모습에 새삼 가슴이 아팠다.
<내 가슴은 슬픔으로 미어졌다. 회한의 눈물이 금방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상심이 된 나머지 나는 도저히 그녀들을 뒤따라 잡을수 없었다. 아아, 하고 나는 중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그녀냐고.>
그리하여 지드는 마들레느가 있는 호텔에 뒤늦게 도착했다. 거기서는 또다시 지드의마음에 타격을 줄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호텔의 보이느 그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모친께서 차 속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 살 밖에 더 먹지 않은 마들레느는 오랫동안의 괴로움과 슬픔 때문에 지드의 어머니라고 착각할만큼 늙어 보였던 것이다.
두 살의 차이가 있는 두사람 사이기는 했으나, 두 사람의 사고나 사랑의 엇갈림은 시대를 달리한 인간들처럼 서로르 떼어 놓았다.
예전에 두사람에게는 다 같이 문학을 읽고 서로 음악을 사랑한 <앙드레 왈테르의 수기>- 註 외사촌누이 마들레느와의 숙명적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영혼과 육체의 갈등을 그린 작품- 와도 같은 계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마들레느는 그러한 지드의 취미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에 대해서조차 흥미를 느끼지 않는 눈치를 보였다.
다달이 부쳐오는 <N.R.F>에 실린 클로델의 글을 보아도 남편의작품은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다.
1918년 가을이 닥쳐왔다.
이 가을과 함께 두사람 사이에는 결정적인 한가지 파국이 닥쳐왓다.
원인은 지드가 마들레느를 버려두고 한 영국 여행이었다.
마들레는는 이 여행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지드에게 버림받은 것이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 스스로 남편을 피하자, 사랑의 고삐에 휘감기거나 휘말리지 말자고 애써 오긴 했으나, 여자의 마음으로서 사랑을 잃는 것은 너무나 심한 비극이었다.
일체의 추억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 그녀는 가장 가슴 아픈 일을 저질렀다.
영국여행에서 돌아온 지드는 그 당시 쓰고 있던 <메모와르>의 어느 날짜를 조사하기 위해서, 마들레느에게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왕복서간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그녀의 침실에 있는 책상 서랍 속에 있었으며, 언제든지 지드가 요구할 때마다 그녀는 그에게 열쇠를 건네주곤 했다.
그러나 그날, 그녀의 얼굴은 갑자기 창백해졌다.
입술을 떨면서 마들레느는, 서람 속은 텅 비었고, 편지는 없어졌다고 대답했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어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당신이 출발하신 후, 나는 당신이 없는 텅빈 집에 혼자서 외토리가 된 거예요. 이젠 의지할 사람도 없었어요.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 어떻게 될 것인지고 알수 없었어요. 처음에는 죽는 것만이 나에게 남아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로 심장이 정지해 버려서 나 자신이 죽은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혼자서 고민했지요... 무슨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당신의 편지를 태워 버렸어요. 그것들을 하나하나 전부 읽어 본 다음에.."
그런 다음 그녀는 다시 한번 지드에게 되풀이해서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가지고 있던 것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어요"하고...
-계속-
++++
<좁은문> -3-
***동우***
2014.11.22 10:09
++++
하얀 무덤 (4)
-앤도 슈사쿠-
날마다 날마다 지드는 식당 구석에 앉아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해서 울었다, 밤이 되면 자기의침실로 돌아가서도 그녀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울면서도 내가 울고 있다고 그녀에게 말할수 없었다. 다만 그녀한테서 한마디 말, 한가지의 몸짓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안보는체하고 내 앞을 왔다갔다 하면서 자질구레한 집안 일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지드가 두사람의 마음을 연결하기 위해서 의지할수 있는 것은, 남이 볼 때에는 참으로 조용한 이 외관상의 무관심한 태도에 자기의 슬픔이 기만을 당하는 일이었다.
한편 마들레느는 남편의 절망이 그에게 다시 한번 참다운 신앙을 소생시켜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 덧없는 두사람의 절망적 기대마저 아무 것도 이루어주지 않았다.
이제 지드는 결혼생활에 지쳐버렸다. 자기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여길 정도로 지처버린 것이다.
아내하고는 같이 일도 할수가 없었다. 그는 마들레느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일을 찾아 떠나갔다.
1923년 8월, 지드는 아내로부터 한 통의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그녀가 가슴에 한시도 떼지 않고 달고 있더 에메랄드로 만든 조그만 십자가를 그녀의 대자(代子)인 사반느 시랑베르에게 주었다고 짧게 씌어 있었다.
에메랄드 십자가, 그러나 지드에겐 그것은 마들레느에 대한 사랑의 추억이었다.
그 십자가를 <좁은문>의 알리사에게 주었을 정도로 그것은 아내에의 사랑의 추억이요 꿈이었다....
마들레느는 이렇게 지드와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젊은 나이로 쓸쓸하게 죽어갔다.
지드는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깨달았다.
돌이켜 보건대, 마들레느를 죽인 것은 확실히 지드의 문학이었다.
아내만이 아니었다. 이 문학때문에 그는 일생동안 귀중한 친구들로부터도 버림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들이 오늘날 읽을 수 있는 그와 프랑시스 쟘, 그와 크로델, 그와 뒤 보스(평론가) 등의 서간집 속에는 그러한 친구들의 분노, 이별의 과정이 비통한 어조로 씌어져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아내에의 추억이 담긴 책을 읽고, 나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드에 대한 괴로운 연민을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
나는 작가로서의 그의 에고이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뼈저린 고독을 각오하고서 자기에의 성실성으로 일관한 그에게 나는 감동한다.
그러나 아내가 죽은 후에도 그 비극을 일종의 감상으로 바라보는 심정, 결코 마들레느의 죽음에 대한 작가로서의 책임을 슬픔 이상으로 깊이 추구하지 않는 태도가 안타까울 뿐이다.
적어도 이 책을 덮은 다음, 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지드가 아니라 마들레느의 하얗고 투명한 모습이었다.
가을의 묘지는 하얗다.
그것은 죽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그늘에 휩싸여 있었다.
마들레느가 죽은지 25년, 지드도 눈을 감았다.
그들은 그 청춘의 소망처럼 같은 무덤에 묻혔다.
죽은 후의 저승에서 사랑의 4막이 계속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말할수 있겠는가.
그러나 들리는 것은 쉴새없이 흩날려 떨어지는 느릅나무의 마른 잎 소리뿐이다,
그 소리에 나는 눈을 감으면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는 황혼이 되고, 황금 빛의 마른 잎에 덮여있는 십자가의 그늘은 차츰차츰 엷어지고, 아까보다도 더 애달픈 그늘을 이 지상에 던지기 시작한다.
-끝-
++++
***동우***
2014.11.23 04:33
'앙드레 지드'는 1869년 파리에서 출생하여 26세때 외사촌 누이 '마들레느 롱도'와 결혼하였다.
<좁은문>은 40세때 발표하였고 아내 마들레느는 지드가 68세때 사망하였다.
78세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지드는 82세에 파리에서 영면하였다.
리용의 가을, 하얀 묘지에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들으면서 '앤도 슈사쿠'는 '마들레느'를 사념하였다.
그의 손에는 '앙드레 지드'의 <지금은 너의 추억 속에서>가 펼처져 있었다.
나도 책장에서 '앙드레 지드' 전집을 꺼내어 그제부터 뒤적이고 있다.
<지금은 너의 추억 속에서>가 내 책에서는 <이제 그는 내 안에 살아있다>라는 제목이었는데, 그것을 읽고 지드의 '일기'를 예제 펴가면서 랜덤하게 읽는다.
그런데 여러 책갈피 속에는 '마들레느'가 있었다.
그렇다, 지드의 수많은 작품 속에는 '마들레느'가 녹아있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에서 '엠마뉴엘'로, <배덕자>의 '마르슬린느'그리고 <좁은문>의 '알리사'로..
특히 '알리사'에서는 필히 '마들레느'를 떠올려야만 하리라.
3살 연상의 외삼촌의 딸.
사촌누이이며 아내였던 마들레느.
유년때부터 조숙하고 다소곳하고 수줍었던 여자, 어린 지드의 눈에 우아함와 따사로움과 고운 마음씨와 지혜로움의 상징으로 비추어졌던 누나.
또한 마들레느의 내면에는 어떤 원초적 죄의식이랄까하는 어두운 색감이 없지 않았다.
영원에 대한 동경, 인생에 대한 불안감, 육체적 삶에 대한 회의, 세상살이를 대하는 자신의 연약함 같은 것들에 있어서 짙은 자의식...
1883년 겨울 어느날 밤이었다.
열서너살 쯤의 앙드레 지드는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면서 기도하고 있는 마들레느를 우연히 엿보게 되었다.
그 순간 지드의 영혼은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차 버렸다.
사랑, 아니 그의 생애는 그 때 결정되었다.
훗날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씌여져 있다.
"내가 존재를 의식하고 진정 삶을 시작한 것은 오직 그에 대한 사랑이 깨어남으로서였다"고.
<좁은 문>에서는 이렇게.
[이 순간이 나의 생애를 결정지었다...나는 슬픔이 팔딱거리는 이 조그마한 영혼, 흐느낌으로 온통 흔들리는 이 연약한 육신...나는 여전히 무릎을 끓고 있는 그녀 곁에 서 있었다. 나는 내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이 새로운 격정을 무엇이라 표현할지 몰랐다...사랑과 연민, 그리고 감격, 희생감, 정성이 뒤얽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도취되어 나는 힘껏 하느님을 불렀고 이제는 내 삶의 목표가 공포와 악의 삶으로부터 이 소녀를 보호하는 것 뿐이라 다짐하면서 스스로 내 몸을 바치기로 했다.]
지드와 마들레느.
이렇게 그들은 내면의 사랑을 통하여 순수에 대한 갈망과 열정 속에 맺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통재라.
이데아와 현상계, 영혼과 육체, 관념적 인식과 감각적 인식...
무릇 한 살이하는 인간의 비극이런가, 이원론의 골짜기는.
지드의 분열적 사랑. (앤도 슈사쿠의 '하얀 무덤'을...)
승화되고 신비롭고 순수한 영적인 사랑과, 다른 한편에는 억제할수 없는 수치스럽고 죄의식적인 육적 충동.
천국과 지옥, 모순으로 공존하는 보들레르적 갈망. (<이제 그는 네 안에 살아있다>에서 지드는 '맹목' '착란' '가혹한 무감각'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드는 반항하고 고뇌하였지만, 이와 같은 갈등을 사랑하는 마들레느에게는 끼칠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마들레느에게서 자신과 같은 육적 추잡함을 상상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들레느와의 관계를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관계에 비유하는 지드.
그로서는 분열된 자신의 사랑 중에서 오직 영적인 것, 모든 육의 충동을 벗어난 순수한 부분만을 마들레느에게 바쳐야 하는 것이다.
마들레느에게 합당하게 자신을 바칠수 있는 부분, 그것은 문학 뿐이었다.
결코 위선이 아니었고, 지드는 문학만이 자신은 물론, 남편을 향한 마들레느의 절망적인 부분에도 하나의 구원이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지드처럼 거짓을 싫어하는 사람,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토로할수 있는 그런 인격은 흔치 않다.
그리하여, <정말 마들레느와의 섹스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마는> 마들레느와의 영적 사랑에 육(肉)의 개입을 불순한 것으로 꺼려하였으며, 육체적 욕망이 다른 대상(남색이거나)을 향한다는 사실에 지드는 크게 구애되지 않았다.
지드가 <좁은문>을 쓸 적에는 마들레느와 결혼한지 10년도 훨씬 넘은 시기, 그때까지 조금도 변치않은 아내를 향한 그 순수한 영적사랑이 고스란히 알리사에게 녹아있음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나와 같은 속물도 느낀다.
모든 여성에게는 알리사가 있음을.
매춘부에게도.
***동우***
2014.11.24 05:20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는 금지되어 있기는 하지만 너무도 소중한 쾌락과 정다운 유혹이 있어 그것이 허용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이처럼 큰 매력은 덕행으로써 그것은 단념해 버릴 수 있다는 그 매력으로써가 아니면 도저히 물리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째서 나는 이 구절에서 변명을 찾아냈던가! 사랑의 매력보다 더욱 세차고 더욱 감미로운 매력이 나를 은근히 이끌고 있기 때문일까? 오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들 두 사람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을 넘어선 저 건너까지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성적악습으로 인한 고뇌.
앙드레 지드는 <좁은문>에다가 클로델의 카톨리시즘과 플라토닉한 사랑에 대한 모종의 냉소를 담고 있는가.
[가엾은 제롬! 그가 약간의 몸짓을 하기만 하면 되리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내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알리사의 여자로서(성녀가 아닌) 붉은 입술은 얼마나 제롬의 키스가 그리웠을까.
줄리에뜨의 아이 '리자'같은 아이를 얼마나 자신의 자궁으로 출산하고 싶었을까.
알리사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어머니를 인정하고, 그 어머니와 화해했어야 옳았다.
그리고 제롬은 엘리사 육체 너머의 고결한 영혼만을 바라보지 않았어야 옳았다.
[아니야 제롬, 이제는 늦었어. 사랑을 통해 우리가 서로를 위해 사랑보다 더 훌륭한 것을 엿보게 되었을 때부터 때는 이미 늦었던 거야. 네 덕택으로 내 꿈은 그처럼 높이높이 올라갔고 따라서 이제는 인간 세상의 어떤 충족감도 그것을 손상시키진 못할 것일까 하고 나는 종종 생각해 봤어. 우리의 사랑이 완전치 못한 순간부터 나는 우리의 사랑을 지탱해 낼 수가 없을 것 같았어.]
아, 알리사의 상승이 차라리 애처롭다.
***홍애(虹厓)***
2014.11.24 08:38
이 소설은, 기억을 더듬어 보아 십대에서 20대 사이에 읽은 저희 여자들에게는 스스로의 몸에 두른 방어의 벽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또래 남자들이 이 소설을 읽지 않고 읽었더라도 알리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이 소설을 읽은 여자와 소통할 수 없으며, 공감은 더욱 어렵다는 것을 그때는 이해 못하고 지금은 이해 합니다만, 그래서 오히려 좁은문에 대한 이후의 느낌은 도움이 안 되는 책, 영혼 문제에 매달려 몸의 문제에 도움이 되지 못해던 책이라고 ...
막연히 그랬습니다.
***동우***
2014.11.25 05:45
하하, 홍애님.
여자들 스스로 두른 방어의 벽이라..
회억건대, 그 시절만 하여도 여성의 순결은 미덕이었습니다.
여자 스스로도, 그리고 남자에게도. (남자의 동정이 미덕이었는지는..ㅎㅎ)
요즘은?
들은바, 경험없는 여성은 매력없는 여성으로서의 수치라던가....
그래도 이원론의 골짜기에서의 갈등은 여일할겁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가난한 남자와 천박하지만 돈많은 남자...요즘 여성들, 후자를 선택할 확률이 훨씬 높을테지만.
남자는 어떠할런지.
마돈나(madonna) 컴플렉스와 매춘부(whore) 컴플렉스.
고결함과 관능의 선택에 있어서.
나로 따져보건대... 흐음, 모르겠습니다.. ㅎ
-좁은문 계속-
<좁은문> -4-
***동우***
2014.11.25 05:28
알리사는 분홍빛 설레임과 푸른 감성 가득한 어여쁜 처녀였다.
그리고 그녀 영혼의 기질(?)은 몹시 모성적(母性的)이고 순수함과 순결함, 그리고 연민과 동정심을 갖춘 자기희생적인 것이었다. (부정한 어머니의 딸이라는 죄의식의 연유도 없지 않았을듯.)
한편, 제롬에게도 경건주의에 대한 어떤 마돈나 컴플렉스가 있었을런지.
영혼의 기질도 대체로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서로에게 깊이 함몰되었다.
그 사랑의 신비함, 필경 '앙드레 지드'는 자신의 '마들레느'를 깊이 투영하여 '알리사'를 형상화하였을 것이다.
알리사와 제롬의 사랑은 고결함과 순결함으로 영혼이 결합된 숙명적 사랑이었다.
<제롬이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가 있기 때문에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그가 없이 살아야 한다면 무엇 하나 내게 기쁨을 줄 것은 없다.>
제롬의 존재로 인하여 알리사의 삶은 의미가 있었고, 오로지 제롬의 사랑에 근거하여 알리사의 행복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렸을 때 나는 벌써 그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젊디젊은 처녀, 알리사.
얼마나 현세적 육체적 사랑의 행복과 쾌락을 구가하고 싶었을까.
<가엾은 제롬! 그가 약간의 몸짓을 하기만 하면 되리라는 것, 그리고 때로는 내가 그것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그러나 어찌 알리사가 그런걸 입밖으로 끄집어낼수 있으랴.
떄로 알리사는 자신을 '에우리디케'에 대입하여 '오르페우스'를 떠올렸을까.
'루노'와 황홀한 사랑을 나누었던 마녀 '아르미드'의 비밀정원을 생각하였을까.
제롬을 사랑하는 동생에게 자신의 소중한 사랑을 양보하려고까지 하였던 알리사.
그러나 줄리에뜨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현실 속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그 애가 내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고 행복을 찾았다는 것, 내 마음 속에 되돌아온 무서운 이기주의가 분개하고 있다는 것..하느님께서 내게 그러한 희생을 요구하시지 않는데 대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그러한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알리사의 소망.
<오오! 사랑의 힘으로 우리들 두 사람의 영혼을 동시에 사랑을 넘어선 저 건너까지 이끌어갈 수만 있다면!>
그녀가 꿈꾸었던 사랑의 완성.
그것은 영혼의 '덕'('德'이라고 번역된 부분, 경건이거나 신앙으로 대입하여도 좋을까)과 현세적 사랑의 합일이었다.
(제롬은 어느 정도 현실적, '덕'과 '사랑'의 구분을 할수 있었을런지.)
알리사의 고뇌.
제롬이 자신에게 투사하는 그 사랑의 모습은 행복과 환희이면서 고통이고 강박이었다.
알리사에게 제롬의 영혼은 너무나 고귀하고 완전한 것이었던 것이다.
<'완전'을 지향했던 것도 그를 위해서였다...내가 '덕'을 행하는 것도 모두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이다 .>
현세적 실체는 모두 방해물.
육체에서 우러나는 충동과 현실적 조건들, 현세를 벗어나고 실체를 떠난 영혼이라는 추상의 완성.
제롬이 자신에게 헌사하는 그 사랑은 무릇 육체적 현실적 제약을 뛰어넘은 완벽한 사랑의 완성으로 파악하고 있는 알리사.
<그런데 이 완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가 없어야 된다는 것, 이것이 오오, 주여! 바로 당신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무엇보다도 저의 영혼을 당황케 하는 것입니다. 덕과 사랑이 융합되는 영혼을 지닐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하지만 아아! 어떤 날에는 덕이란 사랑에 대한 항거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있을까? 내 마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경향을 감히 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오 매혹적인 궤변! 허울 좋은 권유! 종잡을 수 없는 행복의 환영이여!>
좁은문.
예수에 이르는 길.
'파스칼'(팡세)의 고뇌와 환희, '토마스 아 캠피스'('그리스도를 본받아') 경건의 행복.
<아아! 이제는 너무나 잘 깨닫고 있다. 하느님과 그의 사이에는 단지 나라는 장애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가 말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의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 사랑이 그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로 하여 지체하고 나를 사랑하는 데만 치우친다. 나는 그가 덕을 향해 앞으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 우상이 되었다. 우리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거기에 도달해야 한다.>
알리사의 갈등.
<주여! 제롬과 제가 손을 맞잡고 서로 의지하면서 당신에게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평생을 통해 마치 두 사람의 순례자처럼. 때때로 둘 중 한 사람이, "피곤하면 내게 기대." 하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네가 곁에 있는 것을 느끼는 것만으로 충분해."라고 대답하면서 당신을 향해 나아가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러나 알리사는 이내 깨닫는다.
<아닙니다, 주여! 당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알리사는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을까.
알리사는 이윽고 파스칼의 환희에 이르렀을까.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오, 주여! 당신을 모독함이 없이 종말에 이르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한편으로 속물답게 생각하고 속물답게 아쉽다.
알리사의 저 고결함을 미망(迷妄)으로, 영혼쟁이(?우유부단쟁이) 제롬은 차라리 알리사를 범했어야 했는데 하고..
아니다, 속물 속에 깃든 한줌 고상함 내게 있다면, 나는 알리사를 눈부셔 한다.
"자! 이제 잠을 깨야죠.."
줄리에뜨가 말하지만 제롬은 죽을때까지 알리사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으흠, 심리학이 생체학이 생리학이 섹스학이 밝혀 넘치는 세상.
이 소설.
섹슈얼한 매혹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요즘 아이들에게도 아름다울까.
그러나 아해들아.
사랑에는 반드시 고결함이라는게 있어야 한단다.
영혼의 고상한 부분 배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의 사랑이 아니란다.
사랑뿐이랴.
인생도 그러하단다.
***홍애(虹厓)***
2014.11.26 14:04
아름다움에 관한한, 저희때 좁은문을 읽으며 받아들인 아름다움에 대한 이미지는
오히려 낡았지만 감사한 것입니다, 작금의 아름다움 예찬을 볼 때마다
동조하지 못하는 불편함, 오래 전 아직 세상을 잘 모를 때 읽은 이런 고전에서
연유한 듯하나 그래도 그게 좋습니다.
***동우***
2014.11.27 04:52
느끼건대 홍애님.
나보다 연하이시지만, 우리는 동년배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육체와 감성과 정서까지, 작금 온통 유물론적 영혼에 동조하지 못하는 불편함....
여성성 (어쩌면 남성성 속에도)속에 숨겨진 그 고결한 부분을 여성 스스로들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성에게 전달되는 이성 고유한 영혼의 끔찍한(?) 아름다움.
천상의 아름다움, 결코 육체가 섹스가 설명하지 못할 영역.
알리사의 하나님.
섹스하는 쾌락의 육체 속에 숨겨진 모성적인 어떤 경지.
자신이 도저히 도달할수 없는 그 신비로운 지점을 제롬은 사랑하는것일겝니다.
연민인지, 헌신욕구인지...
그런 신비함은 호모사페엔스가 됨으로써 생성된듯 하지만 사피엔스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될수록 점점 옅어지는듯. ㅎ
***꿈쟁이***
2014.12.15 21:30
제가 이책을 처음 읽은 것은 국민학교 때였고, 그 내용을 이해한 것은 중학교 때였네요.
오래된 천주교 신자가정에서 자라 사춘기를 겪던 저는 알리사의 사랑의 감정을 깊이 이해했어요.
당시 저는 책속에 빠져 살았고, 또래 친구들이 남자친구를 만나고 다니는걸 눈아래로 보곤 했네요.
지금 다시 이글을 읽으니 그옛날에 느끼던 감정이 새롭습니다.^^
다시 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동우***
2014.12.16 05:22
오랜만입니다, 꿈쟁이님.
조숙하셨군요.
국민학교 때 앙드레지드의 좁은문을 읽으시고, 중학교 때 이해하셨다니.
앙드레 지드 처럼 위선을 싫어한 사람도 드물겝니다.
자신의 비정상적인 성벽을 고백하고, 얼마나 카톨리시즘의 공격을 받았는지요.
알리사.
그리고 그의 아내 마들렌느.
그녀들은 필경 앙드레 지드의 어떤 이데아의 포름이었을겁니다.
다시 읽어 옛날 느낌 되살리셨다니, 오히려 내가 고맙습니다.
자주 들러 주십시오.
***mayblue***
2014.12.15 10:55
서로의 영혼에 깊이 함몰되었던 사랑이 이토록 깊은 비극을 낳을 줄은...
댓글에 올리신 앤도 슈사쿠의 하얀묘지 너무나 감명깊이 전율하면서 읽었습니다.
저는 자아가 눈뜨는 사춘기 시절부터 헷세의 지와 사랑에 나오는 나르치스를 영혼깊이 흠모하는 한편 내 안에 골드문트를 발견하고 경멸할수록 나르치스와 같은 남성상과 알리사와 같은 여성상을 참 강렬히 이상화한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어머니의 부정을 본 마들레느와 같은 비참한 생의 단면이 있었기에...
사춘기 시절 이 문제로 죽음같은 고뇌를 했었습니다.
차마 어머니에게도 형제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상처, 번민, 슬픔, 충격...
청상과부로 사셨던 어머니를 전 제롬이 투사한 알리사처럼 살길 원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누구나 그러하듯이...
누구보다 조신하고 성실하고 수줍고 말 수가 없으시고 자식에 대한 지극한 헌신과 홀시어머니에 대한 깍듯한 공경과 예절...
그런 어머니에게서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제 삶의 모든 것을 흔들고 왜곡시키기에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제가 결혼하고도 많은 세월이 흘러서야 어머니도 여자였던 사실을 제대로 볼 수 있었지만요.
지드와 마들레느의 결혼이 불행했던 것처럼 남성과 결혼에 대한 제대로 된 관념이 없었기에
제 결혼 또한 내.외적 파국으로 치달았고 거기에 건강까지 모두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지드 자신의 기욕과 마들레느에 대한 고결한 사랑이 자신과 아내 둘 다 파멸에 이끈 것처럼
어쩌면 저도 어린시절부터 깊이 간직한 고결하고 순결한 남성상과 여성상 때문에 나와 내 남편이 파국으로 치달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편의 기욕을 알면서도
그를 비난하지 않고 인내하며 끝까지 그 영혼을 사랑한..
그리고 그 냠편의 영혼이 주님께로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염원한 그 대목에서
(지금 제가 처한 대목과 어쩌면 흡사한) 가슴깊은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바렌보임에게 버림받은 영국의 장미라 불리운 자클린 뒤프레의 생애에 대한 글을 읽고 전율하며 눈물 흘린 그 때처럼요.
하지만 이런 저 또한
세월의 그늘 속에 저도 제가 경멸하고 혐오하던 그 사람들보다 더 속물적인 저의 내.외면을 인정하게 되었고
뼈아픈 시련의 눈물 흘린 뒤에서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와 영혼과 육체의 조화로운 합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묵상하며 제 인생 2막2장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답니다.
조각조각난 퀼트원단으로 정성들여 조각보를 만들어 가듯이요.
동우님...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지드 부부의 생에 대한 깊은 여운으로 생각이 제대로 정리도 안된 약간은 어줍쟎은 혼란 속에 이런 댓글 올리는 것 실례인 줄 알면서 하얀묘지를 읽고 난 감동으로 저도 모르게 이 댓글을 쓰고 있습니다.
부탁드리건대 이 글은 그냥 지나가는 바람의 소리라 여겨주시길요.
만나뵙지 못한 님이시지만 인생 선배이시고 또한 사이버 상이라 이런 얘길 꺼낼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삶의 도정에 동우님과 같은 선배님이 계셔 기쁩니다.
***동우***
2014.12.16 05:18
mayblue 님.
인간이란 이원론의 골짜기에서 방황하다가 가는 존재인듯 합니다.
한 인간의 본성이 어찌 순정한 나르치스나 또는 순정한 골드문트로 충만되어 있겠어요?
이원론.
이데아와 현상계라던가, 정신과 욱체라던가, 아폴론과 디오니서스라던가, 로고스와 파토스라던가, 플라토닉과 에로스라던가, 모럴과 방종이라던가, 보수와 진보라던가....
하나로 규정할수 없는 인간성이고 인간의 실존이겠지요.
무릇 사회적 갈등은 저 두가지의 가치를 분리하고자 하는데서 시작되는듯도 합니다.
뉘라 인간을 어느 한가지로 규정하겠어요?
메이블루님 뿐 아니라, 이 나라 대부분 질곡의 고통 없는 가정사 드물겁니다.
나도 역시, 메이블루님과 유사한 고통 속에 신음하였었답니다.
지금이라고 여일하지 않는바도 없을거구요. ㅎ... 본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인생....
실례라니요?
지나가는 바람 소리로서는 서늘하도록 마음이 에입니다.
그래서, 메이블루님 언급하신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포스팅합니다.
차츰 얘기 나누어요.
***mayblue***
2014.12.16 13:57
두서없는 글 읽어주시고
소중한 댓글로 함께 해주심 너무 감사합니다.^^*
-독서 리뷰-
[[앙드레 지드]]
<탕자 돌아오자> <사랑의 도식>
<탕자 돌아오다>
-앙드레 지드 作-
***동우***
2013.05.02 04:54
모순과 갈등 속에서 신음한 '앙드레 지드'(1869-1951, 1947년 노벨상수상)
경건과 음란, 육체와 영혼, 순결과 배덕..
그는 공산주의자(후에는 소비엣 비평자)였고, 자위중독자였으며 동성애자였다. (사촌누이인 아내 마들레에느와의 비육체적인 결혼생활..)
내 젊은 날 한송이 순결한 백합이었던 알리사(좁은문)...
'탕자 돌아오다.'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살진 송아지보다 돼지먹이 도토리(더욱 갈증나게 하는 야생 석류도)의 깊은 맛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 장형(長兄),
실패가 있고 기근이 있고 고통이 있음에도 율법과 계율로 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인간성의 모습을 창조주께서 모를리 있을꺼나..
요즘 자주 팡세를 펴들고 우치무라 간죠를 펴든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의 내리막 고갯길, 저 높은 곳 뉜가 '돌아오라 탕자여' 손짓하시는데..
둘째 손주 미니의 네번째 맞는 돌 날 새벽.
고개 숙여 두 손 모으다.
<사랑의 도식>
-앙드레 지드 作-
***동우***
2013.08.09 05:08
여름을 찬미하라.
<그들은 들판에 펼쳐진 여름을 보았고, 탐나는 꽃을, 그 꽃이 미적지근한 그들의 손에서는 더욱 빨리 시들어 버린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고 송두리째 꺾어 버렸습니다.>
아무런 의식없이 그저 사랑에만 함몰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할진저!
<어느 날 단 하루, 여름의 어느 한 순간에만 그들의 인생곡선이 서로 얽던 것이다 -그게 유일한 접촉의 교차점이었는데, 지금은 벌써 그들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파도 가까운 모래 위에 앉아서, 뤼크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라셀은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아, 여름.
계절의 오르가즘.
그 숨가쁜 고비는 시나브로 잦아들고 있습니다.
<저는 계절과 영혼과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가을을 이야기해야겠지요.>
버려진 정원... 가을의 나뭇잎들이 갖는 눈부신 색조...잔디를 덮고 있는 가을..
꺾여진 나뭇가지.. 우거진 잡초.. 금잔디며 보릿잎 같은 풀들...
빨간 방울새가 지저귀고 있는 적갈색의 과일 나무로 가득찬 숲...
나는 가을의 찬란함을 사랑한다... 거기에는 돌 의자가 있었고 석상들이 있었으며 덧창은 닫히고 출입문들이 밀폐된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우뚝 서 있었다...
정원에는 축제의 자취가 남아 있었으며, 무르익은 과일들이 과수 울타리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오늘새벽 대기속 언뜻 느껴지는 가을 기미.
섭리의 숨결입니다.
***eunbee***
2013.08.10 05:27
방금 산책에서 들어왔어요. 공원 문을 한시간이나 당겨서 닫으니, 좀 쓸쓸해요. 맘이..ㅎ
그렇다해도 보랏빛 대기가 스러지면 푸른 저녁이 펼쳐지고 거리엔 노오란 가로등이 켜지니
어슬렁거리며 돌아오기에 딱 좋아요.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안에서 살아간다.'
가을숨결 닮은 바람 마주하며 숲을 거닐다가 떠올린 어떤 이의 말이에요.
어제부터 쉬엄쉬엄 읽고 있는 책 속에서 주워올린 말인데, 참 멋진 말이다 싶어서 맘에 남네요.
버려진 정원...마치 동우님 꿈 이야기같은 이야기가 떠오르는 콜베르의 옛저택 곁에서,
어제 읽은 저 글속의 석상을 찾아 봤어요.ㅎㅎㅎ 혹시나 여기에도 그런 정경의 그림이 숨어있지 않나 해서.ㅋ
어제 은비아빠가 찾아 주어서 예전 영화로 [위대한 개츠비]봤어요. 로버트 레드포드의...
책은 연전에 읽었는데 영화로도 보고 싶어서...
죽기 직전까지도 '데이지?'라고 부르다가 죽어간 그 사랑이 참으로....
그는 어쩜 그리도 거두어 드릴 수 없는 사랑을 했을까,하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사랑을 부를 수 있었으니
그 또한 행복한 일이구나, 했지요. 내 영화감상이 참으로 유아적으로 퇴화하고 있네요.ㅋ
올려 주시는 글, 고맙게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소설가가 되지않을까 몰라~ㅋ
이윤기 님의 '나비넥타이' 민음사 것, 두번째 독파 했어요.영어로 조그맣게 BOW TIE라고 쓰여있는 걸, 얼른 보우 티 라고 읽었지요. 이젠 영어도 불어도 맬짱 헷갈려요, 맹~해 가지고 설라무네.ㅠ
책 속표지엔 2010. 9.9. 아드님이 서울에서 보내옴,이라고 써놨네요. 내 필적이던걸요.ㅎ
아들이 가끔 이곳으로 책을 공수해 주었지요. 그것을 큰애네 집에서 다시 주워 하루종일 읽어버렸어요.
내 입맛에 딱이에요. 또 읽을 거예요. 매력있는 책이에요.ㅎ
갈치조림 맛 좋았죠. **오늘의 수다 끝**
***동우***
2013.08.11 04:51
보라빛 대기 스러지고 푸른 저녁 펼쳐지면서 노오란 가로등이 켜질 무렵.
사는 것이 눈물겹게 아름다워 지는 순간...그 아름다움 내 마음 속까지 완벽하게 깃들었으면 좋으련만.
늘 한 실존의 살아가는 모습이 그러한 모양이고, 참 멋진 말입니다. 은비님.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안에서 살아간다.'
개츠비는 그토록 순수하여 위대한 것이겠지요?
로버트 레드포드의 성실하고 진지한 인상에 비하여 레너드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는 어딘가 좀..
난 지금도 옛 헐리웃 로맨틱 무비를 보면 설레이고 눈물겹고 그러하니, 유아적 퇴행성의 영화감상은 은비님보다 아마 내가 몇배나 더 할듯.
이윤기는 나도 좋아하는 작가.
나비넥타이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네요.
오늘 아들녀석과 아내는 돌아오고, 비니미니네는 목요일쯤 귀환 예정.
홀아비 일상 벗어남이 좋은걸까, 나홀로 자유함의 종식이 아쉬운걸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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