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황석영 2 [[탑. 한씨연대기]] (1,4,3,3,1)

카지모도 2019. 12. 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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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

-황석영 -

 

***동우***

2015. 7. 31

 

미군 보급부대에 파견되어 마치 여행자처럼 할랑한 근무를 즐기다가 제비뽑기에 의하여 차출된 보충병인 ''가 투입된 곳

R포인트는 버려진 보급대대 앞의 오래된 불탑(佛塔)이 위치한 전략적 지점이다

현지인의 종교적 상징물인 ''을 적()이 옮겨가지 못하도록아홉명의 병사들은 나이어린 하사관의 지휘아래 그 곳을 지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후퇴통로인 교량은 파괴되었고 보충병력의 지원은 난망(難望)한 처지인 상태에서 이 작전이 언제까지 계속될런지 알수가 없다.

 

생포한 게릴라 인질을 방패로 삼아 그 덕에 포격(砲擊)은 없지만밤마다 적은 각개로 출몰하여 공격을 시도하고 목탁 두드리는 소리 호각소리 고함소리등으로 병사들의 심리를 교란하여 한시도 긴장을 늦출수 없다

소총수가 죽고 지휘관인 하사가 죽고 통신병이 죽는다.

급기야는 백병전이 벌어진다.

 

그때 빰빠람빠 기병대의 나팔소리와 함께커다란 탐조등이 환하게 원반의 불빛을 비추면서 미군의 건십이 나타난다.

 

<착검!

선임조장이 외쳤다자동소총에 대검을 꽂고화력망을 뚫고 배수로 속으로 뛰어든 몇 명의 게릴라들을 맞았다어둠 속의 눈그들의 장총과 자동소총 끝에 꽂힌 날카로운 알미늄의 창끝마주치는 첫 순간에 적을 제압해 버리지 못하면 죽는다적의 창끝을 위로 쳐올리면서 개머리를 휘둘러 가슴을 강타한다적이 뒤로 넘어진다군화발로 그의 면상을 차면서 다른 자를 맞는다최초의 공격에 적을 찌르지 못하면…… 나는 몸을 맞추어 적의 옆구리로 파고들며 대검을 내밀어 육박해 들어간다총대로 그의 총검을 막아 올리고 발로 급소를 올려찬다.

우리 주위가 조명을 받은 듯이 환해졌다커다란 탐조등의 원반이 땅바닥을 핥으면서 지나갔다두 대의 건십이 대숲과 도로 위에 기총소사를 내리 갈겼다저항선을 계속 넘으려던 적들이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다헬리콥터가 한 곳에 머물러 빙빙 돌면서 유탄과 로케트포탄을 내쏘았다적의 배후에 있던 지원병력이 흩어져 밀림으로 쫒기고 있었다선임조장이 배수로 밖으로 뛰어나갔다네 사람은 모두 도로 양측으로 전진하면서 쫓겨가는 적을 사격했다사수가 미처 달아나지 못한 적의 부상자들을 철저히 사살했다우리는 도로가에 머물러 적의 퇴각을 확인한 다음초소로 되돌아왔다통신병은 배수로 속에서 무전기를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우리는 모두 넋이 빠져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사람다운 모든 것이 탈진되어 의식이 흐려졌다나는 배수로 속에 꿇어앉아 토했다전투가 끝나버렸는지아니면 다시 끝없이 시작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리는 서로 누가 남았는지 바라보기조차 귀찮았다그래서는 죽은 자들의 굳어진 몸뚱이 사이에 넘어져 졸기 시작했다.> 

 

다음날미군의 블도저는 거침없이 탑을 무너뜨린다.

포인트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현지인의 종교적 의미심리전 일환으로서의 전략적 가치란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던가.

전쟁이라는 매스(mas)속에 그 따우 디테일은 병사의 목숨처럼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경제가치에 속절없이 종속되는 무릇 가치처럼탑 따위가 전쟁에서 무슨 인간사적 담론이 담겨있을런가.

전쟁의 본질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하고 다만 추악할 뿐이다.

 

전쟁의 진실이 존재하는 곳.

그곳은 오로지 적()을 향한 개별적 증오 없이도 살육(殺戮)이 당연한 병사의 현장이다.

그 현장을 황석영은 ''에서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황석영이 누구인가이 소설의 배후에는 아메리카의 거대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미 제국주의 자본의 맛에 절은 양심

<그러나 나는 본대의 대원들과 보병들을 생각했고가끔 마음의 갈등이 있었을 때엔 내일 꼭 작전엘 나가리라가리라하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전이 수행되는 곳그 곳은 우리의 전장(戰場)이 아니라 아메리카의 전장(戰場)이었다.

그 어떤 도덕적 명분도 정치적 당위도 없이 시작된 전쟁월남전.

제국의 용병으로 끌려 온 병사들한반도와는 무관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전쟁에 병사의 목숨이 짓밟힌다.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탑의 메타포...

 

<탑이라구나는 저런 물건에 관해서 명령받은 일이 없는데.

아직 통고되지 않았을 겁니다아군은 월남군에게 탑을 인계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인민해방전선은 저것을 빼앗아 옮겨가려고 했습니다.

나는 얘기하고 싶지 않았으나불교와 주민들의 관계참모들의 심리전적 판단이며 마을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애썼다그렇지만 말하고 나자마자 우리는 깨끗이 속아 왔다는 것을 알았다그게 누구의 것인가내 말이 다 끝나기 전에 불교라는 낱말이 나오자 이 단순한 서양 친구는 으흥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중위가 말했다.

그런 골치 아픈 것은 없애 버려야지미합중국 군대는 언제 어디서나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가 있네세계의 도처에서 말이지.

나는 우리가 탑과 맺게 된 더럽고 끈끈한 관계에 대해서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다장교는 자기가 가장 실질적이며 합리적인 강대국 아메리카인의 전형임을 내세우고탑에 대한 견해도 그런 바탕에서 출발할 것이다한 무더기의 작은 돌덩어리가 무슨 피를 흘려 지킬 가치가 있었겠는가나는 안다우리가 싸워 지켜낸 것은 겨우 우리들 자신의 개 같은 목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그러나 나는 역겨움을 꾹 참고 말했다.

중지시켜 주십시오.

중위는 내게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기계 앞으로 걸어가서 중사에게 뭔가 일렀다배불뚝이 미군 중사는 불도저 위에서 뛰어내리면서 투덜거렸다.

노란 놈들은 이해할 수 없단 말야.

중위가 비워둔 2. 5톤을 가리키며 여단본부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말했다우리는 전사자의 시체와 장비를 싣고 R을 떠났다차가 바나나 숲을 채 돌아가지 못해서나는 불도저의 굵직하게 가동하는 엔진 소리를 들었다불도저는 빈터의 가운데로 돌격했고떠받친 탑이 기우뚱했다가 무너져 자취를 감추었다탑의 그림자마저 짓이겨졌을 것이다달리는 트럭이 일으켜 놓은 먼지가 시야를 차단했다.>

 

황석영는 졸병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였지만그의 작가정신은 '레마르크' (철저한 르포르타주 수법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와는 기질을 달리 한다. (자신의 경험 속에 거대담론적 은유를 포함시키는

''을 쓰고나서 오래후 황석영은 '무기의 그늘'로 다시 월남전을 궁구한바 있다.

식민지화에 의한 정치적 종속의 구닥다리 제국주의 대신 등장한 미국의 신제국주의.

그것은 달러문화의 이식(달러는 세계의 돈이며 지배의 도구였다.), 미국의 지속적 이익을 위한 경제적 대상으로의 종속이었다

 

나도 하야리아부대 미군의 피엑스를 구경한 적 있었는데 촌 구멍가게와 같은 우리부대 피엑스와는 실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곳은 당시 우리나라 백화점의 빈약함에도 감히 견줄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 피의 밭에 던진 달러그리고 무기의 그늘 아래서 번성한 핏빛 곰팡이꽃.>

당시 그 달라에 목이 매어 위정자는 월남 참전을 결정하였고그 달러의 향그로움에 킁킁 코를 맡으면서 한반도의 병사들은 파월을 결심하였다.

그리고 살아 돌아온 개선 용사의 짐꾸러미가 미끼가 되어 파월 지원은 멈추지 않았다.

신형 전자제품들부대에 돌아다니던 C 레이션의 맛은 황홀하였고정글화 정글복은 비싼 값을 치루고 걸치는 병사들의 신패션이었다.

무용담으로 포장된 치열한 전투 이바구들포탄에 죽고 부비트랩에 죽고 눈멀고 귀먹고 팔다리 없는 부상병들은 나트랑 미군 휴양지에서 아오자이 하늘거리는 콩까이와 미국맥주 마시던 자랑에 묻혀버렸다.

미군 피엑스와 친하지 않았던 어떤 보병은 탄피를 더블백 가득 담아 귀국하여 한 몫 잡았다던가.

 

당시 우물안 개구리 나에게 월남전이란 고작 그 수준이었지만월남전은 세계사적 전환점이었다.

국제질서와 정치사적 사상사적 문화사적으로.

아메리카의 패권적 자유주의는 전쟁의 시발에 있어서도 전쟁의 수행과정에 있어서도그 도덕적 타락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반전운동은 세계 곳곳에서 불꽃처럼 번졌고 기성가치는 불신의 대상이었고 젊은이의 의식은 좌파로 기울었다.

3세계의 의미는 새로이 정립되었고 마오쩌둥과 체 게바라는 영웅으로 부각되었고 한켠에서는 히피문화가 창궐하였다.

 

그런데 우리 개별이 겪었던 월남전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세계사적 거대담론에서 벗어난.

영화 '국제시장'과 같은 소소(小小)담론에서 벗어난

 

마이클 치미노의 '디어 헌터올리버 스톤의 '플래툰스태니 큐브릭의 '메탈 자켓프란시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등등 월남전을 다룬 좋은 영화들이 많이 있었지만사실적이건 관념적이건 거기 우리 개별적 월남은 없었다.

 

황석영의 '' '무기의 그늘안정효 '하얀 전쟁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등등 좋은 소설들이었지만 거기에도 진솔한 개별의 월남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병사의 현장그곳에 있는 진실.

그 어떤 먹물 폼 그 어떤 로맨티스트의 폼도 잡지 않고정글 속에서 죽어간 한 소총수의 기록.

'서부전선 이상없다처럼 씌여진.

 

***野草***  

2015.07.30 19:10

 

동우님.

더위에 잘 지내시는지요?

가져갑니다감사~~~

 

***동우***  

2015.07.31 04:57

 

야초님의 와병그리고 이겨내신 투병역정에 박수를 쳤습니다.

산행으로 다져진 건강한 모습뵙기에 좋았구요.

가져가십시오얼마던지..

 

 

 

-독서 리뷰-

 

<한씨 연대기> -1-

-황석영 -

 

***동우***  

2015.08.04 04:16

 

1972년 창비에 발표되었던 황석영의 '한씨 연대기'

3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고지식한 한 지식인의 역정을 작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리얼리즘은 그래서 더욱..)

 

한씨 연대기한 사람의 연대기를 넘어선 보편성이 있습니다.

내 또래 부모세대들이 편만하게 겪었던 야만(野蠻)의 한 시절 '세월의 연대기'라 해도 좋겠습니다.

한씨와 같은 올곧은 인간성 뿐 아니라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악하거나 선하거나 강하거나 약하거나 용감하거나 비겁하거나한 모습으로 짙은 액추어리티가 있습니다.

내 주위 부모 형제 아저씨 아주머니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로 ... 내게는 말입니다.

 

어제도 말했지만이제 우리 세대마저 가고나면 저 기억의 리얼리즘은 가뭇 증발해 버리고 말겁니다.

새로이 해석(解釋)된 형해(形骸)만이 남겨지겠지요.

 

인민병원 원장이 아이를 살려보려고 수술에 여념없는 한영덕에게 소리칩니다.

"까짓 애들은 또 낳는 거요지금 경무원이 기총 소사의 관통상을 입구 피를 흘리는데이런 따위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요?"

 

한씨 연대기.

내 자식들에게는 지극히 낯선 서사(敍事)일테고 우리 비니미니에게는 전설의 고향쯤 될 터이지만.

또래의 불벗님들께는 느꺼운 바 있으리니함께 읽어요.

 

***동우***  

2015.08.05 03:33

 

최인훈의 '광장'.

거기 광장과 밀실의 알레고리를 북과 남으로 대입해도 무방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느닷없이 든다.

이념에 고착된 숨막히는 밀실적 체제<최인훈의 밀실은 이런 뜻이 아니었지만>와 이기(利己)의 자유가 난만한 광장적 체제.

 

폐인이 되어 쓸쓸하게 세상을 버린 한영덕.

 

<"한 군은 내 생각에두 너무 고디식하구 순수했디요그게 이 친구 단점입네다난 이 사람하군 정반대디만 어릴 적부터 쭉 같이 자랐댔구 도재 남을 속일 줄두 모르구 융통성두 없는 이 사람 성미가 짜증이 나멘서두 밉지 않았디요아니오히려 그런 면을 도와했대시요.”>

 

<한국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돕니다.-최인훈 '광장'->

 

이념적 행패와 방임적(放任的모략에 시달리다 결국은 폐인(廢人)으로 도태되는 정직하고 성실한 하나의 개별적 인간성.

여적까지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작금도 벌어지고 있는 유효한 주제가 아닐런지.

 

흐음북에서도 남에서도 저런 행패에 시달리는 한영덕과 같은 인간성은 이명훈(광장의)처럼 남지나해에 몸을 던져야 하는가...

 

분단문학.

문학이 삶을 이야기할진데따지고보면 6.25 후의 모든 작품들은 죄 분단문학이 아닌가.

작가의 삶에서아니 한반도에 근거한 삶에서 그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이 어디 있을까.

치명적이거나 미미하거나 간에

 

그러나 해는 뜨고 지고 세월은 간다.

Sunrise, sunset

Sunrise, sunset

Swiftly fly the years....

오로지 세월이 약이다.

세월이 농도를 옅게하여 차츰차츰 다른 색감으로 치환된다.

세월은 부단하게 늘 다른 삶을 잉태하는 것이다.

새로운 삶이 옛 삶의 흔적을 돌아보아... 언젠가 우리 세대의 분단문학은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것이다.

옛 리얼리즘이 하나의 해석(解釋)으로 하여

 

<한영덕 씨가 사망했다는 전보를 받고서도 혜자는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그 애는 아버지의 죽음이 아닌그이가 내포했던시대를 새롭게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의 냉기 때문에 눈을 뜬 혜자는 서학준 박사와 고모가 잠이 든 걸 확인한 뒤에 살그머니 일어났다그애는 발꿈치를 들고 영좌(靈座앞으로 걸어가 향그릇 옆에 놓인 유품들 중에서 수첩을 집어들었다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잠들었는지 사위가 고요했다그 애는 우중충하고 비좁은 계단을 내려와 그 집을 빠져 나왔다고별식은 끝났고이제 아버지의 망령마저 떠돌 수 없도록 땅 속 깊이 묻힐 것이다혜자는 아버지의 매장에 관한 따분한 기억을 갖고 싶지가 않았다집을 나서니까 상가를 알리느라고 달아매 놓은 붉은 종이 호롱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잔등(殘燈)의 불빛이 어둠 속으로 멀리까지 쫓아왔다혜자는 다시 돌아갔다동편 하늘에 새벽빛이 부옇게 번졌고이층집 지붕이 어둠과 경계를 지으며 하늘 속에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혜자는 종이 등피를 쳐들고 거의 다 타 버린 촛불을 불어 껐다첫 차 시간이 아직 멀었는데도 그 애는 역까지 뛰어서 갔다.>

 

아버지의 삶이 내포했던 시대가 한혜자에게 겹친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세계관이 인식하는 다른 것이다.

 

나는 우리 비니미니가 저러하기를 바란다.

할미 할비라거나 못나빠진 어미 아비의 지지리 궁상그 다 타버린 촛불을 불어 끄고 신세계의 노래를 부르기를.

 

황석영.

그의 피와 그의 자의식이 맞부딪혀 빚어내는 매운 갈등....

 

***동우***  

2015.08.05 03:33

 

아래는 10 여년전 신동아에 실린 황석영 대담기사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기를.

 

++++ 

황석영 대담기사

 

서스펜스 중독에서 장바닥 일상으로 

<‘노회한 文靑황석영과의 질긴 드잡이>

 

남한 남자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밀어붙여 산 예순 살 사내그 더운피와 시퍼런 자의식 사이매운 말과 글이 칼춤을 춘다

황석영(60)은 뜨거운 사람이다단내 나는 삼복에도 저고리 땀 꾹 짜내며칼바람 이는 섣달에도 외려 가슴 풀어헤치며가보지 않은 길을 따라 엉큼성큼 질러왔다.

황석영은 차가운 사람이다()은 도무지 열 수 없는 맘속 열 개의 빗장 친 문이 있다날 선 직관시퍼런 냉소미친 바람의 소용돌이에서도 가슴 한구석은 늘 서늘했다.

오랜 세월 그는 그 붉고 푸름으로 인해 지나치게 존경받고 지나치게 경멸당했다한 사람이 쉬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미움의 쌍봉 골에서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홀로 위대했으리라. ‘장길산을 쓰고반독재투쟁을 하고북한 땅을 누비고망명생활을 하고감옥살이를 겪고이념적 사투를 벌이고두 번 이혼하고더 많이 연애하고더 세게 놀아보고그럼에도 늘 생활인이었고새로 발견한 일상이 참 소중해사람 냄새 폴폴 나게 가슴 뒤흔드는 소설 쓰마허나 세상사에 너무 밝은 것이 외려 눈치 뵈는 노회한 문청(文靑). ‘황석영은 이렇게 말했다.’

빠르고 강하고 두텁게

이제는 지루한 거 잘 참아요내가 원래 어드벤처에는 강한데 디테일에 약했거든사람들이 그래요대한민국 교도행정의 일대 승리라고.”

 

서울 동소문동 ‘문학동네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그는 지나치게 ‘신사였다조금은 안심되고 그 두 배로 당혹스러웠다그는 불편한 사람이어야 했다거칠고 날카롭고 ‘내 것에 물러섬이 없어야 했다그런데 부드러웠다달변의 속도도 잘 조절돼 있었다소문 속의 그를 확인시켜주는 건 큰 목소리단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투뿐이었다.

이튿날 오전 11고양시 대화마을 그의 집 거실에서 다시 마주앉았다그는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인사동 어딘가에서 택시 타고 귀가한다더니 그 뜻대로 되지 않았던가 보다하기야 그의 ‘앞마당인 인사동이 제 주인을 고이 놓아 보내줄 리 있겠는가미필적 고의의 음주로 괴로운 와중에도 그는 10시간의 난타를 잘도 견뎌냈다.

 

황석영은 솔직했다소탈하고 사내다웠다불편한 질문도 대충 넘기지 않았다말은 찰지고 정확하고 확실히 재미있었다. ‘대한민국 대표 구라의 현란한 입담을 누가 있어 말리겠는가. “기자들은 듣고 싶은 말을 지들이 다 가지고 온다했다. “원하는 말이 뻔하니 해줄 말도 그뿐이라 했다그는 세상의 기대에 과히 어긋나지 않는 몇 가지 버전의 ‘자기 해설집을 갖고 있는 듯했다그렇게 제법 ‘맞춰주며살아왔지만 이제는 슬슬 갑갑증이 나나 보았다세계관이 바뀐 것도 아닌데, ‘반미의 선봉민족작가 황석영을 습관처럼 찾는 이들을 보면 왜 문득 씁쓸해지고 부담스레 느껴지는 걸까그는 “감옥 가서 생긴 내공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1998, 5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황석영은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오래된 정원’‘손님을 잇따라 상재해 국내외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현재도 한국일보에 ‘심청연꽃의 길을 연재하고 있다그 와중에도 방북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심사 거부 등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최근에는 전국 대학의 국문과·문예창작과 교수 및 평론가 109명이 선정한 20세기 한국문학사 최고의 소설가로 꼽히기도 했다.

 

깊이 들여다본 황석영은 냉정했다자존심 강하고 용의주도한 사람이었다다 보여주는 것 같고아무 말이나 막 하는 것 같고때로 흥분하거나 흔들리는 듯도 했지만그는 정작 움직이지 않았으며무엇보다 상황을 제대로 장악하고 있었다실수도 있었고 깨지기도 많이 했으되 다음 순간 더 높이 내디딜 수 있었던 건이처럼 빠르고 강하고 두터운 까닭이었으리라그렇다면 제멋대로이고 좌충우돌하며 ‘구랏발이 하늘을 찌르는 그이 속 또 하나의 그는지금 그 어느 진흙밭을 구르며 제 쌍둥이의 뒷덜미를 잡아당기고 있는가어느새 대화는 수 읽기가 돼버렸다그는 프로였다

 

자살 기도한 초등학교 4학년생

 

몇몇 글에 한두 줄씩 비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 깊더군요혹 문학적 감수성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아닌지요.

아 그걸 어째 알았나맞아요그 외에도 어머니가 제 인생에 끼친 영향이 대단히 크죠.”

 

어머니 얘기 좀 해주세요.

우리 어머니는 평양 분이에요전문학교까지 다닌 신여성이었어요외할아버지는 전홍걸 목사라고평양 사람이면 다 아는 유명한 감리교 목사에 교육자고 민족주의자였어요. 3?운동이랑 신사 참배 거부로 도합 7년간 옥살이를 했는데그 때문에 일본 유학중이던 어머니는 중도 귀국할 수밖에 없었대요그런 어머니에게 자수성가한 사업가이던 아버지가 청혼한 거지요그렇게 혼인해서 누나 셋하고 저남동생 하나를 보셨어요떠밀리듯 한 결혼이라 그랬는지어머니는 맏아들인 제게 유난히 집착했어요또 평생 일기를 쓸 만큼 문학적 욕구나 소양도 있는 분이었고요.”

 

글에서도 그런 게 보여혹 외동아들인가 했습니다.

하여튼 굉장히 심했어요오죽하면 제 동생이 요즘도 술 한잔하면 ‘엄마는 평생 형만 알았다며 섭섭해하겠어요누나들도 ‘엄마는 너만 갖고 그랬다고 할 정도니까그 무서운 교육열엄청난 교육열대단했지요.”

 

그래도 중학생 때까지는 어머니 말씀을 잘 들었나보지요.

잘 들었죠그때는 방법이 없으니까근데 압력이 너무 심하니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는 가출도 몇 번하고 자살 기도도 하고

 

초등학교 때요?

그럼요새끼줄 목에 걸고 광 어디에 매달렸는데줄만 툭 끊어지고 말더라고.”

 

그때의 자살 충동이란 전적으로 어머니의 억압 때문이었나요.

그렇죠형제끼리 투닥거려도 유독 저만 심하게 때리고 그랬으니까저에 대한 지적 욕심도 굉장해서 다섯 살 무렵에는 한글을 깨치게 했어요덕분에 일찍부터 책을 참 많이 읽었죠.”

 

비관적 낙관주의자의 씨

 

황석영은 만주에서 태어났다해방 후 외가가 있던 평양에 머물다 1948년 다시 삼팔선을 넘어 영등포에 자리잡았다아버지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고 어머니는 여학교 교사가 됐다아버지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병사했다.

 

6 25가 터지기 전까지 어머니는주말이면 어린 석영의 손목을 끌고 연극이며 영화를 보러 다녔다뛰노느라 꼬질꼬질한 얼굴을 손수건에 침 묻혀 닦아가며 발걸음을 재촉했다눈에 보이는 책은 닥치는 대로 사줬다. 1?후퇴 후 대구 피란 시절에도 어머니의 책 사 나르기는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재능만 물려준 게 아니라 기본 소양까지 닦아준 셈이네요.

그게 우리 어머니의 딜레마였던 거지예를 들어 초등학교 3,4학년 때부터 꼬박꼬박 일기를 쓰게 하셨는데또 잘 쓰면 칭찬도 해주시고하지만 작가가 되는 건 결사 반대하셨거든요.”

 

부모와의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을 내 ‘손바닥위에 올려놓는 통과의례 같은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맞아요저는 그걸 넘어서서 어머니를 괴롭히는 데까지 갔죠결국 엄마가 졌지그거 참잘못 많이 했어.”

 

죄의식이 큰가요.

그런 정도는 아니고왠지 제가 어려운 때면 어머니가 꿈에 뵈어요특히 감옥에서 자주 그랬죠꿈인지 생시인지군용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 머리맡에서 이렇게 절 내려다보고 있는 거예요힘들고 어려울 때면 꼭.”

 

어머니의 남다른 교육이 선생 안에 남겨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늘 벗어나고 싶었지만또 한편으로는 그런 어머니의 유난한 관심으로 인해 세상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 듯도 해요전 스스로를 비관적 낙관주의자라 생각하거든요평소에는 조울증 비슷하니 낙담할 때도 많고그런데 결국은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죠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할수록 힘이 생긴달까.”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던 기억이 주는 힘이군요.

영등포에서 학교 다닐 때도 다른 애들은 무명옷에 검정 고무신이 다였는데전 어머니가 손수 만든 반바지에 블라우스양말에다 구두까지 챙겨 신고 다녔어요계집아이 같다고 놀림도 많이 받았죠교복도 1년에 한번씩 꼭꼭 새로 맞추고청년기엔 맞춤 구두에 불란서제 레인코트까지 챙겨 입고그 없는 살림에도 예의체면자존심 그런 거는참 무서운 어른이셨어.”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초등학교 5학년 땐가 전국단위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어요전국적으로 칭찬을 받은 거지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그 상을 받는데내가 글을 쓰면 칭찬을 받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안 거죠·고등학교에 가보니 더 그래요영등포 변두리에 사는 촌놈이 말이야그게 굉장히 가치 있는 일로 느껴졌어요.”

 

범어사·베트남·광주 

 

습작은 언제부터 했습니까.

중학교 1,2학년 무렵부터 콩트 비슷한 걸 끼적댔어요소설 꼴 갖춘 글은 경복고 입학 후부터 쓰기 시작했고. 1학년 때 교내 문학상 탄 소설을 누군가 베껴 부산 국제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일도 있어요그게 당선이 됐죠마침 부산 사는 친구놈이 알려줘 취소를 시켰지만.”

 

같은 해 단편 ‘팔자령이 학원문학상에 당선됐다어머니와의 갈등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학업에도 관심이 없었다경복고 2학년 1학기 때 처음 긴 가출을 했다. 1년 뒤 복귀했지만 3~4개월 다니다 또 그만뒀다주먹깨나 쓰는 녀석 하나를 뼈가 나가도록 ‘폭격한 탓이었다경복고 퇴학서라벌고교 편입, 1주일 후 자퇴남도 방랑동양공고 야간부 편입다시 자퇴그렇게 험한 10대 시절을 마감할 즈음, ‘입석 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탔다. 1962년이었다.

 

2년 후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그 사이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한번은 동맥한번은 세코나였다실존의 고통이 살을 째듯 아팠다한일회담 반대시위 중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건설노동자를 따라 남도로 갔다신탄진청주진주마산 등지를 떠돌다 칠북 장춘사에 들어갔다동래 범어사를 거쳐 금강원에서 행자 노릇을 했다.

 

어찌어찌 찾아온 어머니의 손에 끌려 상경을 했다던데왜 그리 쉽게 포기했나요.

그 대단한 양반이 절 보더니 무너지듯 주저앉아 웁디다그런 걸 내 처음 봤거든.”

 

1966년 해병대에 입대했다이듬해 청룡부대 2진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아닌게아니라 죽음은 도처에 있었다미국이 뭔지민족이 뭔지마약과 고문과 전쟁이 뭔지 몸으로 알게 됐다랭보를 사랑한 탐미적 문학소년은 포연 속에서 숨을 다했다. 1969 5월 제대이후 6개월은 관 속 시신처럼 폐쇄된 나날이었다얼굴도 모르는 펜팔 여자친구가 생명끈이 됐다그렇게 겨울을 나면서 쓴 단편 ‘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비로소 대면한 여자친구는 그의 첫 아내가 됐다. ‘깃발(1988)’을 쓴 소설가 홍희담씨다이들은 십수년의 결혼생활 끝에 1986년 헤어졌다.

 

왜 헤어져야 했을까요.

글쎄저는 ‘사회봉사하느라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해요두 사람 다 과도한 사회봉사를 했으니까공교롭게도 제가 광주를 잠시 비운 사이 5월 항쟁이 났어요아내는 그 불길 속에 있었고항쟁 당시에는 도청 여성부를 맡은 송백회 회장이었고 이후에도 오송회며 이런저런 일에 깊이 관여했어요저는 뭐 더했지요그때쯤엔 아예 전국 문화운동 조직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1974 년부터 10년간 한국일보에 ‘장길산을 연재한 덕분에 경제 형편은 아주 나쁘지 않았다그래도 생활은 두서가 없었다가족을 이끌고 남도 땅을 떠돌아다닌 때문이다전남 해주에서 해남다시 광주로. 1981년에는 제주도로까지 흘러들어야 했다공안당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삶은 소설가보다 ‘운동꾼에 더 가까웠다농민운동민주화운동현장문화운동지하 선전선동가족의 해체는 광주항쟁 르포집 ‘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너머발간으로 가속화됐다글과 편집을 책임진 그는 안기부에 의해 1년간 외유 아닌 외유를 해야 했다이때 두 번째 부인인 무용가 김명수씨를 만났다.

 

귀국해 보니 벌써 소문이 났더군요전 이혼하기 싫었어요하지만 호준엄마(홍희담뜻이 워낙 강경해서아이들(11)과 장길산 인세를 맡겼지요그때 마당극 안무 때문에 입국한 김명수씨와 재회했어요내 집 가서 함께 살자 그랬죠.”

 

방북과 망명감옥살이로 이들 부부가 함께한 날은 46개월에 불과했다두 사람은 현재 이혼 소송중이며지금 황석영의 곁에는 방송작가인 20세 연하의 새 동반자가 있다.

 

지루함 못 참아 떠난 모험들

 

작가에게는 결혼 자체가 부담일 수 있을 텐데왜 자꾸 그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거죠.

한국 사회가 혼자 사는 여자를 불신하잖아요그런데 사실은 남자를 더 불신해나이 들어 사회적으로 이름은 있는데 남자가 혼자 살죠유럽은 덜한데 미국은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해요제가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이니까 몇 번씩 이렇게그런데도 그게 굉장한 핸디캡이야제가 감옥에서 나와 1년간 혼자 살았잖아요아유대단히 불편하고저 새끼 지금 뭐하지바람 피는 거 아니야애인 있을 거야뭐 이런 게 아주 굉장해요.”

 

두 번 결혼에서 세 자녀를 뒀는데그런 상황이 가슴 아프거나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그런데 말예요첨에 한번 허물어지고 나니까 그 다음부턴 가정의 중요성을 별반 느끼지 못하게 돼버렸어요지금도 제게 가정은 호준엄마랑 애들 있는 그곳이에요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꾸 그 쪽에 전화해서 의논하게 되고호준엄마 좋은 사람이에요진짜 어머니 대역이라고. (제대 후)가장 힘들 때 정신적으로 날 구원해줬고또 감옥 생활 5년 동안 뒷바라지해줬고요즘 제가 안정 찾고 맹렬하게 작품 써가는 걸 보고 호준엄마가 그래요이제 안심이라고.”

 

이제 방북 얘기를 해보죠겁나지는 않았나요.

겁이야 좀 났지하지만 전 미래를 봤거든요곧 냉전이 끝나면 남북 관계도 이전과는 달라질 거다제가 원래 스릴서스펜스를 좋아해요안락은 지루해서 못 견뎌요. 6개월만 가만히 있으면 몸살이 날 지경이거든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에 와 당시 쓴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등의 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그때는 편향적이었어요편향이 심했어요.”

 

최근에 낸 어떤 책 서문을 보니세상이 너무 우로 가 있어 그럴 필요가 있었다는 식의 언급이 있던데당시도 그런 점을 인식하고 있었나요.

그때는 인식 못했죠. (손을 왼쪽으로 뻗으며)정말 이렇게 된 거예요이렇게그리고 광주를 겪었잖아요광주에서 살아남았다광주에 없었다아내는 도청에서 막 뛰어다니고 있는데그런 부채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그는 방북 당시 상황을 소상히 설명했다그의 방북은 알려진 것처럼 단신 결행이 아니었다민족예술인총연합민족작가회의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 당시 활동중이던 여러 민주화·통일 운동단체의 합의가 있었다남북민간교류의 남측 대표격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됐어요방북 후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전민련 간부로 있던 모모 인사들이 단체로 제도정치권에 들어가버린 거예요공식 서한 갖고 간 것까지 조직 보호한다고 다 없던 일로 해달라니이유야 충분히 이해됐지만 저만 공중에 붕 떠버린 건데사실 좀 괘씸했지요.”

 

김일성 주석 존경했다

 

1989~91 그는 베를린에 머물며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미국행을 결심했지만 난관이 적지 않았다그런 난감한 상황을 풀어준 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 국방성 정보국(DIA)이었다.

 

한 미국인이 나타나 ‘도와주겠다고 하더군요. ‘내일 가족을 데리고 베를린 주재 미 영사관으로 오라길래 그대로 했죠바로 영사 집무실로 안내하더니 한번에 문제를 해결해주더군요밥을 사며 ‘당신 CIA고 물었더니 자기는 국방성 쪽이래요명함에는 ‘유러피안 아메리칸 컬처 센터직원으로 돼 있더군요.

 

미국에 건너가 그쪽 펜클럽 주선으로 롱아일랜드대학에 자리를 잡았어요그런데 거기서도 또 그 ‘유러피안 아메리칸 센터간부와 직원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그 중 미8군에서 감청 업무를 봤다는 젊은 녀석은 부인도 한국사람인 게 우리말을 꽤 유창하게 했어요롱아일랜드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며 ‘제가 선생님을 보살펴 드리려고 합니다딱 이러는 거야그러면서 부탁하는 게 한 달에 한 번 식사나 같이 하재요우리집에 자꾸 드나들길래 그랬죠내가 정치적으로 매우 미묘한 입장에 있으니 출입을 삼가 달라고.”

 

쓴 글들을 보면 김주석에게 인간적으로 매료됐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요안기부 조사 받을 때도 ‘존경한다그런 말 했어요그 사상에 동조해서가 아니라역사상 존경받을 인물이 한둘인가요이순신도세종대왕도다산도전봉준도 다 존경하죠제왕부터 반역자까지 모두 역사의 고비마다 어떤 역할을 한 사람들 아닙니까김일성이란 이름을 빼놓고 한국 현대사를 논할 수 있어요항일투쟁을 했고미국과 싸웠고수십년 동안 민족의 절반을 통치했고그러니 존중할 건 존중해야 하지 않겠어요.”

 

존중과 존경은 다른 것 아닐까요그 사상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정치인을 존경한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사상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존경은 가능하죠모택동호지명카스트로까지도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세계 지식인 사회의 존경을 받는데 왜 만날 김일성만 소련 앞잡이고 그래야 합니까.”

 

전쟁을 치러서겠지요남쪽 사람에게 김주석은 ‘일 수 있으니까요.

그거는 그렇지가 않아요제 생각에 그 전쟁은 외세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일어난 거예요남쪽에 김구 선생이 집권했으면 뭔가 달랐을 겁니다그나마 남에 정통성이 생긴 건 민중들의 끊임없는 싸움 덕분이었어요근대화는 지들이 했나이름 없는 여공노동자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거지지금 정도의 형식적 민주주의도 정치인이 아닌 이름 없는 민중들의 싸움으로 획득한 거예요해방 후의 상황만 놓고 보면 사회 각 분야를 다 친일파가 잡고 있었잖습니까.”

 

내가 좌편향돼 있었구나

 

그렇다면 민족의 정통성은 북에 있다는 건가요.

해방 직후에는 훨씬 그랬죠.”

 

학창 시절에는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갖기도 했는데 선생은 어땠나요.

전 북에서 벅찬 희망과 깊은 절망을 동시에 느꼈어요그 순수함어려운 여건에서도 그런 정도의 생활을 이룬 것에 대한 감동(당시는 지금보다 상황이 훨씬 나았거든요). 남쪽이 그때 너무 엉망이라 감동이 더 컸나 봐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망했지요그 숨막히는 통제어려운 상황에서 버텨 살아남으려다 보니 사회 통제가 너무 엄격하고여기서 어떻게 살 수 있나서방 지식인들은 오해하는데북한에 수용소그런 거 필요 없어요수용소 체제니까그냥 이사만 시키면 돼요숙청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당신 가직장 바꿔그러면서 시골 어디로 배치시켜요우리도 도둑놈들은 감옥살이 잘하는데 높으신 분들은 당뇨 터지고 막 쓰러지고 난리잖아요그거랑 한가지예요주민들이랑 똑같이 김매고 삽질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그냥 가버려요.”

 

주체사상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비해 제 3세계적이라고 봐요의식을 추상적 관념이 아닌 가장 고도의 물질적 작용으로 보거든유물론 입장에서 보면 참 이상한 건데그렇게 규정하면서 ‘사람이 다 결정한다사람의 손으로 세상을 개조할 수 있다’, 그렇게 주체로서의 사람을 강조하는 거예요그게 제 3세계 형편에는 잘 맞거든거기 덧붙여 생존논리인데수령론이라든가 그런 거세계 최강 미군과 대치하고 있으니 북한 입장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도쿄대 와다 하루키 교수 말대로 빨치산 국가가 된 거지국가 자체가 농성 체제라 이거야다 머리에 띠 두르고누가 화장실 갈라 그러면야 이 새끼야 너 어디 가그렇게 된 거지전 북한 체제가 저렇게 된 데는 자신들의 잘못도 있지만 더 큰 책임은 외세에 있다고 봐요너무 막강하니까.”

 

그럼에도 ‘내가 좌편향돼 있었구나하는 자각을 한 건 언제였습니까.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할 때였죠이건 참 말하기가 어려운 부분인데해외 친북단체들의 관료주의조직이기주의전 그런 게 대단히 잘못됐다고 봤거든요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최근 들어 남한이 민주주의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거예요그를 통해 좌로 편향된 시선이 어느 정도 정상화한 거죠올바른 민주주의야말로 진정한 국가 안보 아니겠어요.”

 

북한 인사들과는 여전히 잘 지냅니까.

왜요사고도 제법 났지요저쪽도 원칙이 없어너무 경직돼 있고 무리한 걸 요구하기도 하고또 제 근작 ‘손님이 신천학살의 범인은 우리 자신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잖아요북한은 지금껏 그걸 미제국주의자의 만행으로 규정해 왔거든요그래서 지난번 방북 때 ‘섭섭하다’‘민족작가가 이래도 되나그런 타박을 꽤 많이 들었어요.”

 

죽음 생각케 한 이념적 줄타기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힘겹던 시기는 언제인가요.

뻔하잖아요. 1980년대, 1990년대지광주에 대한 부채감이 그 중 제일이었고그 다음이 이념적 갈등이었어요개인이 혼자 망명해서 버틴다는 게 굉장히 힘들거든요북도남도 엄청난 국가적 세력인데 거기 외세(미국)까지삼면에서 들어오는 압력이 엄청났어요이념적 줄타기그게 굉장히 힘들었지요제 속에 문학에 대한 고집꿈이 없었다면 그만 포기하고 그 중 어디로든가 넘어갔을 거예요그러면 일단 곤경에선 벗어날 수 있으니근데 만약 그랬으면 지금쯤 미쳐 팔짝 뛰다 죽어버렸을 거야말할 수 없이 좌절해서.”

 

줄타기를 하려면 줄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제겐 한국의 독자들이었어요.”

 

-1993 년에 귀국했는데그러고 보면 참 적절한 시기에 돌아온 것 같네요.

잘했죠만일 그때 더 버티다 DJ정권 들어선 뒤 왔으면 독자들이 뭐라 했겠어요약은 놈그랬겠지.”

 

-1980 년대 중반부터 1998년 출옥 때까지 작품을 거의 쓰지 못했지요고통스럽지 않던가요.

아주 고통스러웠죠또 하나 빠진 게제 내부 말이에요가정이 불안했잖아.”

 

그땐 재혼한 다음 아닙니까.

사실 그게 제일 불안했어요뿌리뽑힌 가정을 복원시키고자 했던 일련의 몸부림이 수포로 돌아간 듯한 데서 오는 아쉬움방북을 결행한다거나 극단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그런 행동들도 다 그거랑 연관이 있었던 거죠뭔가 붙잡아주는 게 없으니 모든 에너지가 그런 쪽으로 몰렸달까.”

 

작가로서 잃어버린 15년에 후회는 없나요.

왜 없겠어요후회라기보다는 회한인데가정이 그렇게 파괴되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걸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그러고 나서 겪은 우여곡절누가 물으면 웃으면서 그냥 그래요죄 받았어.”

 

하지만 세상에 100% 나쁜 일은 드무니까얻은 게 있다면 그 중 큰 게 뭘까요.

제가 그 중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지금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아직 한국의 많은 작가들은 이념적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든요내면에서또 무의식적으로그런데 저는 굉장히 자유로워졌어요양쪽을 넘나드는 긴 고통의 방랑 끝에 얻은 선물이죠.”

 

대한민국 교도행정의 일대 승리

 

감옥생활을 통해 많은 변화를 겪게 됐다고 했는데요그 얘기로 좀 들어가볼까요.

거기서 5년을 있었는데 처음 3년간은 정말 제대로 싸웠어요제가 양심수 아니유반찬만 좀 부실하게 나와도 단식투쟁을 했으니까. 5년 동안 18덕분에 이 11개가 빠져나가 버렸죠지금 요 앞니 몇 대만 빼곤 다 가짜(틀니)예요독방생활이 3년을 넘어가니 말을 잊어버리고 세상사를 잊게 되더라고요정말 힘들다 절감할 즈음 자꾸 꿈에 아주머니 하나가 보여요얼굴도 희미한데 하여튼 여자로서 남자인 나를 위로해주고 가는 거예요그래 운동시간에 조폭들하고 담배 피우다 물어봤죠.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한데 이거 왜 이러냐’, 그랬더니 걔네가 ‘그 아줌마요!’하는 거예요자기들도 다 만나봤다나그래서 우린 이 감옥터에 사는 터주 귀신인가어쩌구저쩌구 했어나중에 아는 정신과 의사한테 물어보니그 여성이 바로 어머니래요너무 힘드니까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구원의 여인을 불러올린 거지.

어쨌든 그 무렵 전 위기를 감지했어요이러다 죽겠는데감옥 가면 책 많이 읽는다는데그렇게 혼자 돌아앉아 읽는 책은 관념일 뿐 피와 살이 되지 않아요그런 식으로 몇 년 더 살다 보면 신비주의에 빠져 도사 비슷하니 되거나얄궂은 사상가로 꼬리표를 바꿔 달기 십상이지더불어 몸은 자꾸 약해지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작가로서는 끝장 아니오.

이래선 안 되겠다감옥을 저잣거리로 만들어 예행연습하지 않으면 난 죽는다딴따라의 세계디테일의 세계로 들어가자바깥과 소통하자그래서 절 풀기 시작했어요책 안 읽고 잡범들과 음담패설 주고받고운동하러 나가면 애들이 그래요. ‘총장님나오셨습니까!’‘야 임마내가 왜 총장이냐그러면 인석들이 웃겨, ‘여기가 국립대학 아닙니까.’그렇게 2년을 보냈어요.”

 

효과가 있던가요.

아 있었죠사실 작가가 감옥 갔다오면 다시 글 쓰기가 힘들거든요저 나올 때도 그랬어요황석영이 이제 소설을 다 썼다고근데 어쩐지 전 맘이 편했어요아마 난 잘 쓸 거야난 정직하게최선 다해 살았어독자들도 그걸 알아줄 거야그리고 보세요. 3개월 만에 적응해버렸잖아요바깥세상에 본령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게임은 끝나버린 거야!”

 

출소 8개월 후쯤 한 인터뷰를 보니 ‘인생에는 정말 중요한 만남이 몇 안 된다하는다소 관조적인 감상이 실려 있던데요.

그건 이런 걸 거예요망명감옥 생활로 제가 근 10년을 한국 사회와 떨어져 있었잖아요특히 감옥 생활은그게 죽음이랑 같은 거더라고세상은 다 잘 돌아가는데 나만 쏙 빠져 있잖아그러다 보니 이전에 가치를 뒀던 인간관계사회관계에 냉혹해지더라고요다 별거 아니다 하는지금도 그 영향이 커요섭섭해하는 후배들이 많죠하지만 그때 그런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면 출소 후 이렇게 왕성한 작품활동을 할 수 없었을 거예요우선 몸이 갔을테고김남주 봐요여기저기 휘둘리다 아깝게 갔잖아요.

애들이 막 살갑게 그래요석영이형왜 이렇게 연락이 없고왜 이런 모임 안 나오고전 속으로 냉랭하죠그걸 내가 어떻게 다 감당해또 사람들이 그러는 것도 꼭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야사실 사람 관계나 만남의 80~90%가 사교 아니요제가 황구라다 뭐다 그런 별명을 얻은 것도그게 다 사람 좋아해서 그런 거거든요어떤 자리에 갔을 때 분위기가 좀 침체돼 있거나 하면 꼭 제 책임인 것 같고 스스로 견디질 못하고.”

 

인간관계를 냉소적으로 보게 된 건가요.

냉소라기보다는 관계를 절약하게 된 거죠떨어져서거리를 두고 보게 됐어요.”

 

-계속

 

 

 

 

<한씨 연대기> -2-

 

작가는 곧 ‘떨어져서 보는 사람일 수도 있을 텐데이전의 선생은 ‘들어가서 보기를 주로 하지 않았나요.

그거 아주 중요한 얘기예요떨어져 볼 줄 알게 되면서 생산력이 왕성해졌어요.”

 

내 속은 세수 안 한 꽃사슴

 

- ‘오래된 정원이나 ‘손님을 보면 객관성이라는 단어보다는깊이 들어가되 떨어져 보는 듯 묘한 느낌이 살아 있던데요.

자기 내면으로 많이 후퇴한 거죠뒷걸음질한 거예요그러다 보니 자기 안의 것이 밖으로 많이 나온 거고다른 말로 하면 일상적인 것에 강해졌달까일상적이라는 건 주위니까바로 요기니까개인·사생활·행복·사랑그렇게 1980년대에는 소홀했던 것들그 전엔 모험·변화그런 데에 굉장히 과감하고 유능했는데사실은 그때 가장 부족했던 게 주변일상이었던 것 같아예전에 전 일상을 못 견뎠거든요너무 지루하고그래서 백낙청 선생이 ‘한국교도행정의 일대 승리란 농담을 하신 거죠감옥 가서 그렇게 달라졌으니까.”

 

이전의 문학관은 폐기하고 만 건가요.

오히려 확장된 거죠사람들이 절 보고 자꾸 민족작가민족작가 하는데 저는 ‘X잡가라 그래요옛날 식의 경직된 사고이념편향적인 사고는 한마디로 뭣도 아닌 거야지금 전 문학소년 시절의 열정으로 돌아가 있어요감옥에서 알았거든요 ‘인생파구나.”

 

시대의 변화도 한 몫을 했겠지요.

제가 굉장히 운이 좋았어요감옥 나와보니 IMF사태 충격이 쫙 밀려와 있더라구요사회도 흥청망청하기보다는 자기 성찰에 몰두하는 분위기고그러다 보니 옛날의 제가 추구했던 여러 서사의 틀이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어요그 속에서 저는 또 나름대로 다른 ‘패션으로 자기 정비를 할 수 있었고또 이전보다는 아무래도 민주화가 진전된 상태니까.”

 

사실은 대단히 많은 사람을대단히 격렬한 방식으로 만나온 삶 아닌가요.

저는 세계적인 마당발이에요한국사회해외동포사회그 주변의 외국인들북한 사람들또 전국을 떠돌며 살아 시골 구석제주도까지 다 아는 사람이 있어요여야 망라한 정치인 대부분을 알고감옥에서도 마당발이었다니까요요 며칠 전에도 강남 갔더니 나이트클럽 하는 주먹 한 놈이 ‘총장님하고 깍듯이 굴대요.”

 

선생은 ‘내가 중심이 아니면 못 견디는 사람아닌가요.

그래서 어떤 여성이 그러더라고. ‘당신들 다 메시아 콤플렉스야!’아 젊을 때야 그랬죠지금은 아니에요많이 노숙해졌어요.”

 

어쨌건 선생은 자신의 직관이나 판단력에 대단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혹 선생의 체험만을 절대화하는그런 은밀한 오만함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요.

저 그런 면 있어요그래서 되려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데 어려움을 느낄 때도 있고하지만 그게 꼭 직관에 대한 자신감 그런 건 아닐 거예요그보다는 당대 흐름보다 늘 몇 걸음 앞서 왔달까황아무개가 뭘 하면 꼭 그 일이 핵심으로 떠오른다는 식의글쎄그게 자신감인가.”

 

후회도 하지 않는 분으로 보이거든요.

아니에요사주를 보면 ‘자책을 아주 깊이많이 한다그렇게 나와요.”

 

주로 어떤 것에 대한 건가요행동관계?

글은 아니고 행동양식사람 관계남들이 보면 큰 잘못도 아니고 큰 실수도 아닌데 괜히 불안해하고제가 속은 세수 안 한 꽃사슴이잖아요세수 한 사슴은 너무 이쁘니까.”

 

가정 상실의 고통  “죄 받았어

 

선생에 대한 외부의 시각 중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게 있다면요.

흔히들 절 투사다 뭐 그렇게만 생각하는데또 그런 시각의 기사들이 워낙 많이 나왔고하지만 제 작품 읽은 사람이라면 이 인간이 참 서정적이구나 하는 걸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또 한가지는 뭐냐면워낙 여러 일을 겪다 보니까이를테면 똥을 많이 싸놓고 다니잖아요일이건 사생활이건 뭐건필요 이상으로 절 오해해서 비난하거나이를테면 구설수라 그럴까전 전혀 그런 사람 아닌데또 제 이름을 팔고 다니는 사람도 많고.”

 

그렇다고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저는 만날 두들겨맞고 살았어요끌려가고 감시받고국가조직 전체가 절 비난하기로 마음먹은 시대를 살았는데요 뭐그래서 젊은 문인 시절부터 그런 시선들에 대해선 포기하고 살았어요하지만 상처는 되죠안타깝고 약오르고요즘은 외려 무덤덤해졌어요.”

 

예술가 중에는 인간적 흠집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선생은 어떤가요.

제 치명적인 약점은 가정을 잃어버린 여러 원인들바로 그거예요가정을 왜 그렇게 소홀히 했을까애들한테 참 미안하죠.”

 

작가의 생명은 오직 세계관

 

민중문학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잘살아도 되나뭐 그런 비난도 들어보셨죠.

그냥 웃죠 뭐저보다 훨씬 게을렀던 작가들도 제 나이 되면 다 잘사는데저 처음 감옥 나와서는 갈 데가 없어 신촌의 한 오피스텔에 웅크리고 있었어요 4년 부지런히 일해 겨우 이 정돈데하지만 뭐라 하겠어요치사하게.”

 

나이 들면서또 감옥 생활을 거친 후 가장 크게 변한 것이 있다면 뭘까요.

편해졌어요욕망에 대해 편해지고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게 되고.”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뭐였죠.

 그런 게 꽤 있었죠뭐 그런 거 있잖아요여러 가지요.”

 

혁명이요?

그렇죠혁명적인 거남북 사이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한다든가 하는 거.”

 

왜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게 됐죠.

이젠 글 쓰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요예술가로서의 자아에 더 충실하고 싶은 거죠평화가 좋고이데올로그로서 무언가의 얼굴마담 노릇 하는 것도 마땅찮아요.”

 

세대를 뛰어넘는 문학이란 결국 현실밀착적이기보다는 시대초월적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도그렇지만 결국 문제는 세계관이에요동시대(이건 최소한 60~70년을 뜻하는 겁니다)의 시대정신을 뭉뚱그려 짚어낸 작품이라면 고전이 될 자격이 있겠죠또 당대를 얘기할 때마다 빠짐없이 언급되는 기념비적 작품도 있겠고요한마디로 말해 당대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은 작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저는 분단시대 작가이니 분단시대의 문학을 하고 있는 거지요제가 뭘 쓰건연애 얘기를 하건 뭐건 간에 그건 우리 시대의 산물이에요훗날 이 시대를 논할 때 더불어 기억되겠죠시대와 밀착한 작품은 역사에서 규정을 받는 거니까고려시대 청자신라시대 불상 하는 식으로.”

 

그런 기준으로 선생의 작품을 평가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고전도 있고 기념비적인 것도 있다고 봐요고전은 역시 ‘장길산이고이건 세대를 뛰어넘어 읽힐 거고기념비적이라면 ‘한씨연대기’‘객지’‘손님같은 걸 들 수 있겠죠.”

 

선생 문학의 강점미학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전부 세계관이죠작가는 관점이 다예요첫 문장부터 마지막까지 바로 세계관.”

 

주의자선포는 자승자박

 

선생 인생의 자부심은 무엇입니까.

이 정도 먹고살면서 타작을 쓰지 않았다는 것또 하나는 삶으로서의 세계와 작품세계를 일치시키려 노력해왔다는 거죠.”

 

뭔가 도달하지 못한 경지가 있다면요.

우리나라에선 아직 발자크나 도스토예프스키괴테 같은 대가가 나오지 못했어요전들 이왕 문학을 시작한 바엔 왜 대가가 되고 싶지 않겠어요그러려면 아시아적 정신을 세계적 보편성의 그릇에 담는 작업이 선행돼야죠노벨상이 대단한 건 아니지만만약 한국 작가가 노벨상을 받는다면 그건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맞물릴 겁니다.”

 

요즘 독자들이 바라는 건 무엇일까요.

재미있는 서사지요제가 쓰고자 하는 소설이 거기에도 잘 맞으리란 확신이 있습니다옛날부터 ‘당대 대중의 감수성이 어디로 가고 있다하는 것을 잡아내는 데는 자신이 있거든요그 다음이 ‘애매모호함에 대한 위무예요현대 삶의 특징이 애매모호함 아니요.”

 

요즘 소설이라는 게그 애매모호함을 강화하는 쪽이 더 많잖아요.

그것도 필요하겠죠하지만 위무와 해명이 더 중요해요왜 현재의 삶에 이르게 됐는지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죠.”

 

선생은 예술가이길 원한다지만또 많이 변했다 하시지만자꾸 작가가 아닌 거물로 느껴지니 이를 어쩌면 좋습니까.

글쎄 그게 문젠데살아온 전력 땜에 그래요일부는 전설이 되고그게 또 무너지면 무참하게 무너지잖아요.”

 

예전에도 예술가로 소비되다 예술가로 죽고 싶다는 생각 했습니까.

예전에는 못했죠.”

 

요즘 개인주의자임을 선언하는 작가들이 늘고 있는데요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도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죠개인과 사회를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는 없는 일이거든요그 이분법이라는 거전 원체 싫어해요.

 

아마 그런(개인주의적풍조의 배경에는 1980년대의 과도한 사회의식 편향이 있을 거예요그런데 1990년대로 넘어오고 또 저쪽을 가차없이 버리고 개인·사생활·행복·가족그런 주변부로 쑥 내려와 버렸잖아요전 그 두 가지 가치가 어떤 지점에서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요그렇게 해서 이뤄지는 서사그런 게 중요하지요.”

 

문학적으로 성숙하면 절로 그리 되지 않을까요자기 선언과 관계없이.

작가가 섣불리 무슨 주의자임을 선포하는 게 굉장히 자승자박하는 거거든요.”

 

선생도 1980년대에 자승자박을 겪었잖아요.

예 한번 겪었죠.”

 

이쯤에서 선생의 사상적 궤적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군요.

제대 후 사회의식을 갖기 시작하면서 진보적 서적을 보기 시작했죠민중문학을 하면서는 사회주의 이론서문학비평서마르크스주의 기본서들을 봤고요현장에서 겪는 일들이 있으니 그만큼 흡수가 빨랐어요. 1980년대 초부터는 북한 서적도 봤죠하지만 쭉 견지한 것이 있다면 ‘예술로서의 문학에 대한 신념이었어요때문에 사회과학 쪽에 과도하게 편향됐던 1980년대에는 소설을 거의 쓰지 못했죠.”

 

북한 방문에 이어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는 걸 목격했는데어떻던가요충격이 오잖아요희망이라는 것도 사실 초라한 측면이 있고.

그렇죠초라하죠아주 초라하고 남루한 거죠특히 하나둘 밝혀지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체주의적 통제·만행·관료주의아주 지긋지긋하잖아요그래서 망명 시절 정신적으로 굉장히 위태로웠어요자살 직전까지 갈 정도로.”

 

그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했죠.

결국은 문학이 절 살렸죠오직 써야 한다는 생각만 했어요그래서 또 모국어의 땅으로 돌아올 결심을 한 거고저는 선택의 여지가 굉장히 많았어요여러 제안도 많이 받았고요북한에서도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북에서도요?

미국 가기 전 들어갔더니 김주석이 ‘거긴 캥구단(갱단)도 많은데 어찌 살겠냐며 같이 살자 그래요김주석이야 해본 말이지만 밑의 사람들한텐 교시 아니요우리 식구 잡아놓으려고 난리가 났죠여권도 안 주고 비행기 표도 안 주고요그래우리로 치면 안기부장을 하는 강모라는 지식인한테 이런 말을 했어요.

형님난 이북 체제에서 못 삽니다월남자나 월북자는 분단 체제에 봉사하게 돼 있어요그리고 난 남한 역사의 산물입니다내가 통일운동 하려면 내 땅 가서 해야지 왜 여기 있습니까또 내 독자가 수백만명이오그들을 버리고 내가 어딜 갑니까대신 해외에 체류하다 귀국할 때는 꼭 인사를 하겠습니다.’그렇게 설득해서 겨우 나왔어요제가 귀국할 때 김주석에게 공개 편지를 쓴 것은 다 그런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제가 북에서도 언제나 당당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과거지사 때문이에요.”

 

내 판내가 만들며 살았다

 

사회주의 붕괴 후 우리 지식인 사회에는 엄청난 혼란이 왔죠일종의 전향 선언도 적지 않았는데요선생의 경우에는 그 혼란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가요.

귀국해 감옥생활 하면서 비로소 정리가 됐어요사회주의적 명제는 살아있다문명이 계속 이런 식(자본주의식)으로 갈 수는 없다하지만 꼭 그 방향이 마르크스레닌주의냐그래서 아시아적 상황에 맞는 새로운 사상을 고민하게 된 거죠이제 제 전망은 동아시아주의입니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겠군요.

냉전시대에는 ‘미 제국주의라는 말을 썼지요그것이 이젠 ‘세계화라는 두리뭉실한 말로 대치됐어요하지만 전략은 훨씬 더 노골화됐거든이제 중요한 건 반미가 아니라 반세계화예요동아시아주의가 곧 반세계화주의고정보화시대니 뭐니 패션은 바뀔 수 있어요하지만 세계사적 문제의 본질은 심화될 뿐이죠미국식 소비양식이나 생활문화를 거부하면 종족이 소멸하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어요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게 동도서기(東道西器)가 아닌 서도동기(西道東器)예요여기서 ‘서도 ‘동도의 비판을 통해 거듭난 ‘서도예요서도와 동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또 다른 문명관인 거죠.”

 

그걸 문학의 측면에서 설명한다면 어떤 건가요.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보세요그게 사실은 강간당한 문화야백인 피의 농도에 따라 계급이 나뉘니까요참 재미있는 게 남미 문학의 바탕에 깔려 있는 건 결국 아즈텍잉카의 신화설화전설이거든백인들은 가질 수 없는 그 무엇그런데 도구는 스페인 말침략자의 언어를 써요그게 오히려 그릇이 된 거 야우리 문학도 마찬가지예요분단 상황이라든가 그런 걸 어떻게 세계적 보편의 언어로 전달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이제 그걸 고민해야죠.”

 

그렇다면 선생이 요즘 힘주어 말하는 동아시아 연대란 결국 문학적 범위에 국한한 건가요.

아니죠종래 해온 것처럼 시민운동으로서의 연대지요지식인운동문화운동전 항상 새로운 문학을 하게 되면 제가 갈 길을 스스로 개척해왔어요내 판을 내가 만드는 거죠. ‘객지를 쓰면서는 노동판에 들어갔고, ‘장길산쓸 때는 또 문화운동 하면서 연희패놀이패소극장 같은 걸 도처에 만들고 다녔고요.”

 

작품을 쓰는 것과 그를 외면화해 판을 짜는 것은 층위가 다른 문제 아닌가요.

전 그렇게 생각 안 해요글을 쓰면 그게 전파되고 시대화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야죠젊었을 때는 그게 참 빨리 진행됐어요밀어붙이는 힘이 강했으니까이제는 조심스럽고 아무래도 준비를 오래 하게 되네요.”

 

찰랑한 잔에 물 한방울 더하기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나요.

그 전에 작가적 욕망이랄까 그런 건데글을 쓰면 그게 책이 돼 나오고그것들이 다시 자기 생명력 가지고 사회에서 여러 다양한 모습의 일감으로 연결돼 새 판으로 형성되길 바랍니다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고그 속에서 수많은 변화를 겪었지요.”

 

그렇다면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인의 본령일까요.

꼭 그렇다기보다 저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힘닿는 대로 그렇게 살 거예요전 평생을 제 행동과 삶문학세계관이런 것들을 합치시키려 노력하며 살았어요물론 다른 작가들이야 안 그럴 수도 있죠하지만 저도 이젠 문화적 행위 이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이어 그는 작가라면 모름지기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첫째새로운 글에 도전하며 늘 변화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둘째컴퓨터건 사회과학이건 뭐건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셋째미묘한 문제이긴 하지만문학 이외의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해요다 해내기 힘들면 그 중 두 가지라도 실천해야죠.”

 

하지만 역시 꽤 무겁군요같은 맥락에서 말이죠일각에선 선생이 과도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는데요.

민족작가다참여작가다 해서 여전히 절 ‘경성(硬性)’으로 딱딱하게만 보는 거저도 그건 싫어요저는 문인이니까요.”

 

동인문학상 후보 거부만 해도사람들은 그걸 단지 한 소설가의 발언으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그게 사람들 기대예요그 사건만 해도 안티조선운동 쪽 요구하고 맞아떨어지면서 문학인선언에 지식인선언까지일이 아주 커졌으니까요황석영씨가 찰랑찰랑한 잔에 물방울 하나 넘치는 역할을 했다그렇게들 말하대요.”

 

안티조선운동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심사 거부를 선언한 건 아니었나요.

아니 그런 것보다한마디로 굉장히 약오르고 욕스러웠어요내 나이 육십이 다 됐는데, (심사위원·후보의반 이상이 문단 후배들이고.”

 

그럼 안 되나요.

아니글쎄그건 좋다구그런데 그걸 공개적으로 젊은애들하고 막 섞어서 잔류탈락어쩌구저쩌구그건 말이 안 되지한마디로 권력을 보여주려 한 것 같아요뚜렷한 경향성을 가진 신문사가일정한 혹은 애매한 경향성을 가진 문인들을 모아 종신 심사위원으로 만들고 자기 경향에 합당한 작품 뽑아서 공개적으로 민다는 건그건 권력 과시지전 거기 휘둘리고 싶지 않았어요원래 제가 무슨 상 받는 걸 즐기는 사람이 아니에요글 쓰는 게 뭔 대단한 일이라고 상 주고받고 난리들이야그리고 아무 이념적·정치적 흔적도 없는 그런 상이란 존재하지 않거든그러니까 정치적 사회적 이념에 따라 고를 수 있는 거지요.”

 

상으로 빳빳하니 줄 세워 장사하는 건 메이저 출판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런데 액수영향력그런 게 천지차이잖아요동인문학상 상금이 5000만원이오상대가 안 돼요.”

 

좌파 팔고 ‘인품파는 자소름 돋아

 

안티조선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일부 언론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조선일보의 행태도 괘씸하고요하지만 전 안티란 말을 싫어해요안티가 뭐요정치적 용어로 말하면 ‘충실한 반대당아니에요그것에 반대하면 또 그것과 비슷한 체계가 생겨나는 거야전 그거 딱 질색이거든요근본적이고 원칙적인 걸 바꿔야 되지 않나편집권 문제재벌화하는 문제뭐 그런 것들전 그런 면에서 언론운동협의회 논조가 훨씬 어른스럽다고 생각해요그러다 보니 안티조선 쪽에서 좀 섭섭해하는 것 같긴 한데어쩌겠어요하지만 안티조선운동은 유효하고 또 결과적으로 거기 힘 실어주게 된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는 이런 얘기도 했다.

이건 좀 다른 거지만저는 어디 나와 ‘좌파다정통 좌파다하고 목청 돋우는 사람들을 보면 막 소름이 돋아요애들도 아니고세상 옳은 것은 자기가 다 달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노작가 중에서도 무슨 천상의 벌을 받아 쫓겨난 신선인 양 온갖 고고한 폼은 다 잡고 엄살 부리는 사람들영 맘에 안 들어.”

 

또 맘에 안 드는 게 있나요.

패션 다르다고 무시하는 거꼭 지 말만 맞다고 우기는 거그런 거가 아주 딱 싫어요.”

 

그럼 이문열씨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을 갖고 있나요.

이문열 김성동 김훈그런 후배들을 보면 꼭 6?때 길바닥에 버린 어린 동생 같아이문열만 해도 생각은 서로 다르지만 둘이 있을 때는 속내도 털어놓고 하는 사이거든사실 지난번 그 일은 저도 많이 불편했어요언론에서 무슨 적수 다루듯이 저랑 이문열을 딱 붙여놓고생각은 다르지만 애정이 있거든요예를 들어 이문열 책 모아다 태운 일 있잖아요그건 좀 심한 거 아뇨무슨 책을 태우고 그래안 읽으면 그만이지생각이 다르면 논리적으로 싸워야지하지만 안타까운 게어느 한 쪽에 과다하게 활용당하는 거 아니냐 하는 우려가 되고제가 전화 걸어 그랬어요아 좀 조용히 글이나 써라.”

 

그를 불로 몰고 가는 DNA

 

선생은 활용당한 적이 없나요.

난 없어요출마시켜주마 하는 동교동 쪽 제안도 물리쳤고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도 가지 않았죠뭐 무슨 대단한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쑥스러워서요그런 원칙은 있어요개인적 만남이 아닌 정치 행사에는 가지 않는다친한 정치인들이 꽤 많거든요사실 이전의 정치적 활동도 마땅히 나설 사람이 없으니 우리(예술가)가 한 거지그런데 지금도 철모르는 사람들은 자꾸 엉뚱한 요구를 해요가령 여기 일산 오기 전에 제가 충남 덕산에 살았거든요어느날 웬 농민이 전화를 해서 무조건 도와달래요당신들 스스로 할 수 있는데 왜 나보고 그러느냐 했더니아주 낡은 얘기들을 해요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작품은 어쩌고화를 버럭 내고 끊어버렸지.”

 

사실 그거몇 년 전만 해도 선생이 가장 강조하던 말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건 옛날에말하자면대중적 힘 갖고 있으면서 사회적 발언할 사람이 드물 때그걸 뭐 연예인이 하겠어우리가 해야지그런데 지금처럼 시민단체가 수백 개 되는 국면에선 오히려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제 능력을 까먹는 일이기도 해요저는 글을 써서글을 통해 해야죠지금은 글을 쓰는 게 실천이거든요.

요즘도 무슨무슨 집회에 나와달라그런 부탁들이 많이 와요하지만 시간도 없고저말고도 사람 많고또 이젠 수천명이 버젓이 시위를 해도 뭐라 그러는 사람도 없고잡아가지도 않고고문도 없고뭐 이름이나 걸어달라 그러면이렇게 보아 합당하고 보편적인 사안이면 그렇게 하라 그러지요.”

 

눈앞에 둔 계획이 있으신지요.

동아시아 연대 잡지 내는 것하고영국 가서 한 6개월 영어공부 하는 거하고또 아직 공식적으로 얘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모임을 하나 만들려고요문화 각 분야에서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 100명 혹은 150그렇게 모아 계를 조직하는 거죠그렇게 모여 한두 달에 한번씩 모임을 갖고 공부도 하고 친목도 도모하고뭐 한번 놀아보는 거죠.”

 

모임의 목적은 친목도모뿐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니고주된 이슈가 있으면예를 들어 대중이 정말 납득할 만하고 한 목소리 내는 데 부담 없는 그런 일이 있으면 힘을 실어주자독일도 보면 47그룹이라고문화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리더들이 있거든요모임을 기초로 문화정보주간지도 내고 FM방송도 하고괜찮을 거예요.”

 

꼭 그런 걸 해야 할까요그냥 글만 쓰면 안 되나요.

근데 하고 싶은 걸 어떻게 해요.”

 

피에 그런 게 있나 봅니다활동가적 기질 같은 것.

하하하글쎄 말이야.”

 

그런데 말이죠말씀 나누다 보니 자꾸 무슨 막 같은 게 느껴지네요왜 이렇죠.

잘 아네그런 거 있어요청소년기부터의 습관인데위악적이라고 할 정도까지 비교양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교양 있는 말을 교양 있게 하면 그걸 촌스럽게 생각하고 돌려서 얘기하고알아듣는 사람만 알아듣게 말하기그걸 우리끼리는 공중전이라 그러거든요.”

 

문학이라는 이름의 ‘급행료

 

몹시 추운 어느 월요일 밤편한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그와 세 번째로 마주앉았다배짱 맞는 친구들 앞에서 그는 비로소 한껏 풀어졌다뱃속 깊숙이 숨어 있던 일곱 살 어린애가 반짝 눈 뜬 형국이었다대가니 전략이니 서도동기니 하는 말들은 쑥 들어가고 없었다. ‘저것이 진정한 ‘황구라의 모습이란 말인가’, 입 벌리고 속으로 무릎을 쳤다.

그런데 그의 입담 한 자락이 심상찮았다베를린 망명시절이었다 했다.

 

그때 거기 명상하는 애들그러니까 탄트라 수행하고 참선하는 애들이랑 버섯을 먹었거든그게 아주 효과가 대단하데일종의 강력한 환각젠데쪼꼬만 거 하나 먹으니까 12시간이 넘도록 세상이 까마득해숨을 들이쉬면 창밖 멀리 보이는 가로수 불이 탁탁탁탁 켜지고또 내쉬면 그 불이 탁탁탁탁 꺼지고참선에 깊이 들면 머리가 열린다고 하잖아난 그때 이마가 열렸어뜨거운 것이기막힌 경지더라구.

근데 이게 다 좋은 게 아냐깨는 시간이 너무 길고 너무 고통스러운 거야방안의 사물이뭐 이런 물컵이며 커튼이며 그런 것들이 막 나한테 덤벼드는데그 선연한 눈빛불타는 적개심정말 다 살아 있었어존재감이 너무 선명했다구참 견딜 수없이 무섭고 숨이 막히고.

그런데 세상 만사가 다 그런 거야갈 때 너무 뿅 갔으니 올 때는 급행료를 내라 이거지그러고 보면 깨는 과정도 나름대로 의미 있었어괜찮은 경험이었어.”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어쩌면 그가 북에 간 것이나 버섯 먹고 불 켜댄 것이나 같은 맥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둘 다 그의 피가 시키는 대로갈 수 있는 한 멀리 몸 던져본 것 아닌가하지만 되돌아오는 길은 황홀하지만은 않았으리라그때 그의 곁을 지킨 건 더운 피가 아닌 차디찬 자의식이었을 테니.

그는 ‘환각에서 깨어나 보니 열렸던 이마에 벌건 자국이 남았더라고 했다자국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그에게는 아직 치러야 할문학이라는 이름의 급행료가 남아 있는 까닭이다그의 피와 그의 자의식이 맞부딪혀 빚어내는 매운 갈등황석영 문학의 본령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닐까부디 그의 속 어린아이가 좀 더 자로워지기를예순에도 들끓어 폭발하는 소설가라니우리도 이제 몇쯤 가져볼 만하지 않나

<2003 2월호 신동아>

 

++++

 

***홍애(虹厓)***  

2015.08.08 08:22

 

이게 벌써 오래 전 인터뷰군요.

그나저나이 긴 글 부분적으로 읽으면서 한씨연대기부터 황석영을 다시 읽어보자 싶어졌습니다

특히 한씨연대기를... 그러고보니 한씨 연대기를 읽었던 때는 지금은 서른이 넘은 딸이제 배 속에 있던 가을이었네요.

 

***동우***  

2015.08.09 04:43

 

홍애님.

소설이란게 그렇지요?

읽을 당시의 상황에 따라 감회가 남다른...

 

내외분 하치오지시에서의 근황은 늘 보고 있습니다.

SNS 상으로.

본시 미인이신데다 더욱 풍성해지신 미모의 모습도.

조박사님은 거꾸로 젊어지시는것 같아요ㅎㅎ

 

이제 곧 귀국하시지요?

그리고 번역하신 책 출판 건.

강력하게 권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