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황석영]]
<삼포 가는 길>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삼포 가는 길>
-황석영 作-
***동우***
2013.02.14 05:20
아, 역사의 장대함이 우리의 소미(小微)한 삶을 구체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나 어쩔수 없다.
삶이란 결국 시대의 삶이다.
영달이와 백화와 정씨의 저 삶의 의식(意識)과 삶의 양태(樣態)란 당대 역사의 편린일수 밖에는 없다.
삶이란 거시와 미시의 교직(交織)의 무늬임을 어찌하겠는가.
내 또래 쯤, 70년대 초의 개발광풍을 겪었던 사람들은 기억이 생생하리라.
도시화 산업화의 그 도저(到底)한 쓰나미.
국토 곳곳에서 뭉개구름처럼 퍼져 오르던 토목의 먼지들을.
갖가지 공장들의 낮밤없는 현장의 열기를.
화류계의 하방화(下方化)로 작부집에서 북적이던 니나노 장단을.
이 땅 연연(連延)하였던 이쁜 것들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맘몬의 전범(典範)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던 한 시절.
조선소.
내 먹고사니즘의 현장이 그러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좀 알고 있다.
뜨내기 노가다 영달이를.
큰집 밥 먹고 갓 세상에 나온 정씨를.
닳고 닳아 앙칼지게 다져진 작부, 백화를.
니나노집 뚱보 아줌마를.
삶의 밑바닥에 짙게 깔려 있었던 그 비애의 색감을.
그 애환의 언저리를 나는 좀 안다.
그렇지만.
개발광풍의 그 한시절은 이 나라 역사의 마냥 부정적인 길목이었을까.
확실히 말하건대, 아니다.
나는 그 시대를 긍정한다.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의 주술 ‘잘 살아보세’와 ‘잘 살게 되었다’는 분명하게 성립되는 인과(因果)였다.
'잘 살아 보세'의 광풍이 아니었더라면 대한민국의 지금은 사뭇 달랐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제 정씨의 고향 섬, 삼포는 없어져 버렸다.
그것은 역사의 폭력이 아니라, 시대의 필연이었다.
삼포 가는 길.
이 소설을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읽을 사람은 그렇게 읽으라.
그러나 이 소설은 내게 참으로 아름답다.
백화는 업혀 엎드린 영달의 등짝은 넓고 튼실하여 따수웠고, 어린애처럼 가쁜한 백화가 영달은 애처로웠다.
내게는... 서정적 리얼리즘의 빼어난 수작(秀作)이다.
황석영.
누가 무어라 해도 나의 시대 가장 훌륭한 작가중 한 사람이다.
***teapot***
2013.02.16 02:43
녜, 동우님, 한숨에 읽어 내려갔읍니다.
이 이야기 중 백화와 영달이의 그 짧은 이야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동우님 말씀에 고개 끄덕이며~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이야기가 항상 아름다워요~
백화와 영달이가 같이가서 살림을 잘 차리고 살았더라~한다면
아휴~ 재미없어라~~
그래도 그랬으면 싶은건 저 혼자만의 생각 일까요??
소설과 현실을 구별 못하는 팔푼이~
***동우***
2013.02.16 05:32
티팟님, 비극적 결말의 이야기 못견뎌 하심을 내 아는데.
쯧쯧, 또 팔푼이 어쩌구 하신다.
그런데 삼포가는 길.
영달이와 백화의 이별, 좀 애틋하기는 하지만 그리 비극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잖아요? ㅎ
백화는 시골 고향가서 새마음으로 좋은 남자만나 자식들 낳고 알콩달콩 농사지으면서 잘 살게 되었고.
공사판에서 돈푼이나 모은 영달이는 어디 변두리 자그마한 가게라도 차려서 아들딸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ㅎ
***teapot***
2013.02.16 05:34
후편도 훌륭하게 쓰셔서 티팟을 위로 하시는 동우님이십니다.
참, 프로필 사진 잼있게 잘 보고 있어용
너무 너무 이쁜 숙녀 표정. ㅎㅎㅎㅎ
***베로니카***
2013.02.16 23:09
아니 티팟님이 말쌈하신 프로필사진은 어디있능겨요..
없꼬만이라 ..
전 왜 동우님같이 글로도 당당하시고 수려하신 분이 다른 사람들이 동우님은 어떤분이실까 뻔히 궁금도 한다는거 다 아실텐데 왜 남들 배려도 안해주신당가요
나같이 그냥 훤하게 다 보여주고 올린 사람은 좀 띨띨한가요
어디 사진 실었음 말해주시어요
아유, 이 방만 오면 워낙 많은 글을 쓰시는데 무식이 탄로날까봐 골라 읽네요
전 정말 황석영선생님 참 좋아해요
작품도 작가정신도 좋고 그냥 겉모습도 좋고 말하는 모습도 좋아해요
전에 왜 삼포가는길 티비에서 했을때 그 책인지 저 책인지는 몰라요
차화연이 주인공으로 나왔지요.
그때 친구들이나 사람들이 날 차화연 닮았다 마구 그랬었지요. ㅋㅋ
요즘은 여러 군데에서 나오는 모양, 전 티비는 잘안보는뎅
딸애가 전화가왔네요
"엄마 내친구가 엄마가 야왕에서 나오는 그 고모 닮았데"
"그냐 아고야 웃긴다 지금이렇게 늙었는데도
"아냐 엄마 그러고보니 진짜 닮았어 근데 난 우리엄마가 더 이뻥"
아공 우리 새끼가 이 엄말 달래느라 하는 말에 어찌나 기분이 좋던지
그 야왕도 한번 봤더이다 호호
보면서 아공 저 여인이 웃겠당 아유 내가 시방도 저렇게만 생겼어봐라... 혼자서 웃었답니다
***동우***
2013.02.17 03:23
베로니카님.
티팟님 언급하시는 사진은 프로필에 걸어놓은 우리 손녀 사진이었답니다.
찡그려 부치면서 똥누고 있는걸까. 몹시 신 것을 먹고서는 오만상 찡그리는걸까.
할비는 모르겠지만 티팟님이 우리 손녀더러 숙녀라고 하셔서 아차 싶어 얼른 내려 버렸지요.
더불어 베로니카님.
당당하고 싶건만 어림없는 글이거니와 무얼 이르는 말씀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려'와는 또 얼또당또한...
늙어 더욱 띨띨한 꼬라지 곳곳에 있을 터인데 베로니카님은 찾지 못하시는개비여. ㅎ
베로니카님, 따님께서 '우리 엄마 더 이뻥'라고 하시는 말씀.
어머니께 드리는 아부성 상찬의 말씀 아닌줄 나도 알아요.
모습 뵈어서, 그리신 그림도 이쁘시고..
황석영, 내게도 역시 훌륭한 작가입니다.
***베로니카***
2013.02.17 10:43
아, 글이 수려하다는 말쌈이고요 으디 있능가는 아공 찾아봐야 하는뎅 숨바꼭질합시당
젊은날 그 정도 하는 사람 어디 있겠꼬마는
우리딸 가스나는 은제 결혼하고 은제 손녀라도 안겨줄란지 끄응
부럽사옵니다
***동우***
2013.02.18 05:51
팔푼 할비의 손주 자랑, 부러워 하시우 베로니카님은.
베로니카님 따님으로 부터 손주 하나 얻어 안았을때에나 팔푼 할비 이해하리다.ㅎ
<북망, 멀고도 고적한 곳>
-황석영 作-
***동우***
2015. 6. 24
체홉, 좀 물릴듯 하여 황석영의 단편을 올립니다.
황석영의 '북망(北邙),멀고도 고적한 곳'
내가 처음 이 소설을 읽은 것은 1970년대초 현대문학지(誌)에서 였을 것이다.
그 후로 서녘 하늘에 드리운 싯뻘건 놀을 볼라치면 늘 아득히 멀고도 지극히 고적한 그곳, 북망이 떠올랐다.
그러나 여태 진하디 진한 핏빛 석양의 이미지로 새겨져 있었는데, 다시 읽으니 이미지의 오류였구나.
그건 놀(석양)이 아니라 단애(斷崖)의 속 빛, 황토의 속살이었던 것이다.
<"자네 아는가. 한이란…… 색깔이 있다면 똑 저 모양일 게야." 천천히 하늘을 배경으로 지나가는 맞은편 중동이가 사태로 비스듬히 잘려있다. 한 입 베어 문 홍도처럼 단애의 속 빛은 더욱 강렬했다.>
한 입 베어문 홍도(紅桃)처럼 강렬한 흙의 속살.
한살이 살다간 삶이 남겨놓은 한(恨)의 색깔이로구나.
청년과 노인의 몇마디 대화에서 그 한(恨)의 서사(敍事)를 유추해 본다.
옛날에 한 남자가 북녘으로부터 한 마을에 내려왔었던가 보다.
붉은 쪽 사상을 갖고 있었겠지.
남자는 마을 세도가의 과수댁과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쫓김을 받다가 총든 자들에게 붙잡혀서 죽임을 당했겠지.
과수댁은 남자의 유복자를 뱃속에 안고 마을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다가 세월이 흘러 죽었겠지.
"네 아버지와 함께 묻어다오" 하고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을거야.
라면박스에 어머니의 유골을 담아 아버지의 옛 동지였던 노인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오래된 검은 뼈와 어머니의 노란 뼈를 섞어 합장을 해드린다는....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가 알게 뭡니까. 저는 그저 어머님 원하시던대루 해 드릴 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살아냈던게 아닌 부모의 삶에 왜 청년은 설움이 북받쳤을까.
효(孝)가 별것이랴.
자식된 자 사부모(思父母)하는 마음의 아름다움, 청년은 효자로다.
어떤 이들은 황석영에게서 어떤 경향성의 색감만을 굳이 찾아 읽으려하는데 그러지 마라.
그는 젊어서도 인간과 삶의 속살, 황토의 붉은 속내를 깊고 아련한 서정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잠시 옆길로.
어제 기자회견으로 또 두드려 맞는 신경숙.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나는 그녀의 진정성을 믿는다.
세태의 색갈로, 무리진 함성으로 그녀를 보고 들으려 하지 말라.
문학의 땅에서 넘어진 그녀를 그 땅을 짚고 일어나게 하라.
작품만을 보라.
그녀는 소설가다.
아래는 6월23일字(어제) 경향신문 기사다.
곰곰 읽어보라
++++
22일 만난 작가 신경숙씨는 불면으로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벼락 속에 서 있는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실감이 안 난다”며 “나는 그냥 작가이지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겁도 두려움도 많은 편이다. 비판과 비난에 귀를 기울이면 소설을 못 쓸까봐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경기도의 한 수도원에 머물고 있다.
- ‘전설’과 ‘우국’이 비슷하다는 지적은 이응준씨 이전에도 문학평론가 정문순씨가 지난 2000년 계간 ‘문예중앙’에서 이미 제기했습니다. 당시 그 문제를 알고 있었나요.
“나는 1985년 22살 때 ‘문예중앙’으로 등단한 사람이에요. 2000년에 그런 글이 실렸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러나 읽지는 않았어요. 그때도 내가 읽지도 않은 작품(‘우국’)을 갖고 그럴(표절할) 리가 있나,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때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는 너무나 여러 가지 것으로 공격을 받고 있던 때라서 정말 어떤 글도 읽지 않았어요. 읽으면 너무 아프고 글을 못 쓸 것 같았으니까.”
- 평론은 그렇다 쳐도, 두 소설이 비슷하다는데 ‘우국’을 읽을 마음도 안 생겼나요.
“‘우국’이란 소설이 있다는 건 그때 알았어요. 1980년대 말에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는 읽었어요. 한 작가 선배가 늘 이야기하던 작품이라서. 그런데 ‘우국’은 아무리 기억을 뒤적여봐도 안 읽은 것 같은데, 지금은 내 기억을 믿지 못하겠어요. 어떤 작품을 반쯤 읽다 말고 이건 전에 읽었던 작품이구나, 하는 식이니까. 어떤 영화는 끝까지 다 본 후에야 이거 본 영화구나, 깨달을 때가 있어요.”
- ‘전설’은 어떻게 썼나요.
“지금 사직동은 아파트로 변했지만 21년 전에는 한옥들 사이로 적산가옥이 있었어요. 당시 내 친구가 그곳에 살고 있어서 자주 다녔는데, 한 초로의 아주머니가 낡은 집 나무 밑에 그냥 앉아 있거나 책을 읽는 걸 여러 번 봤어요. 아, 저이는 누구를 기다리는구나,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고 있구나, 그런 상상을 하면서 쓰게 됐어요. 오래전부터 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대적으로 읽히는 소설을 언젠가는 써봐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쓴 작품이에요. 여기(수도원) 와서 네 번쯤 읽은 것 같아요. 손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읽었어요. 어느 자식(소설)은 태어나면서부터 멀리 가서 제 역할을 다 하는데, ‘전설’은 태어나면서 나한테 비수를 들이대더니 21년이 지나 나를 찌르는구나, 이제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해서 가슴에 묻어야 할 것 같아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질문으로 남겠죠.”
- 표절 의혹이 제기됐을 때 ‘우국’이란 작품을 모른다, 작가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니 대응하지 않겠다고 한 발언이 독자들의 분노를 샀는데요.
“올 3월부터 제주도 산간지역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2010) 이후 오랫동안 작품을 못 썼고, 올해는 등단 30년 되는 해니까 꼭 새 책을 쓰고 싶어서 집을 떠나 있었어요. 핀란드에서 <엄마를 부탁해> 번역본이 나와 그곳을 방문했다 돌아와서 다시 제주도로 가려는데, 창비에서 연락이 왔어요. 오래전에 한 번 겪은 일이어서 15년 전과 같은 생각으로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어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느 작가인들…. 내가 나에 대한 비판의 글을 많이 읽지 않았고 못 읽어요. (비판이) 아주 많아요. 어떻게 읽겠어요. 그걸 읽고 감당할 자신이 없고, 기분만 나빠지고, 어떤 글은 뼛속까지 속이 상하는데요.”
- ‘전설’이외에도 <기차는 7시에 떠나네>(장편), ‘작별인사’(단편) 등 1990년대 말의 작품과 심지어 최근작인 <엄마를 부탁해>나 <어디선가…>에 이르기까지 표절 의혹이 이는 상황입니다.
“나는 16살에 시골집을 떠났기 때문에 엄마를 아는 것 같지만, 잘 모른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그것이 표절인가요. 내용이 비슷하다는 루이제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중학교 다닐 때 읽기는 한 것 같아요. 책을 읽고 소설을 쓰는 게 내 일이에요. 그런데 어떤 소설을 읽다보면, 어머 어쩌면 이렇게 나랑 생각이 똑같을까 싶은 대목이 나와요. 심지어 에피소드도 똑같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동서고금을 떠나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구나, 반가운 기분마저 들어요. 나는 문학하고 나하고 따로따로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어요. 글 쓰는 게 너무 자연스럽게 시작된 일이고, 어떤 목적도 없었어요. 쓰고 읽고 또 쓰고… 어렸을 때부터 노트에다 썼어요. 책 속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좋았어요. 문학은 뭔가 모자라고 결핍되고 못난 사람들 편이었어요. 약하고 두려운 마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편이었던 게 좋았어요. 나 같은 사람들이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이구나, 그런 생각.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고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내 소설 속에 들어와 자기 빛깔을 갖고, 읽는 사람들한테 빛을 던지고, ‘나도 이런데’라고 말하는 상황, 그런 게 내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 ‘무거운 새의 발자국’‘풍금이 있던 자리’등 1990년대 초반에 쓴 단편 제목이 시 구절에서 따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시에서 제목을 따오는 일은 당시 문단에서 종종 있던 일입니다. 시인이 제 친구였던 경우도 있고. 서로 흐뭇하게 얘기하면서 양해했던 일이지요. 만약 그게 잘못된 일이었다면, 혹시 섭섭한 마음을 가졌다면 제가 잘못 살아온 것 같아요.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늘 살얼음판 디디듯 조심스럽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했나봐요.”
-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처음에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모두 제 탓입니다. 습지가 없는데 왕골이 돋아나겠어요. 문장을 대조해 보면서 이응준씨가 느닷없이 왜 이랬을까, 의문을 안 갖기로 했어요. 대조해 보는 순간 나도 그걸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전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쇠스랑이 있으면 내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 많은 독서, 특히 필사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외워진 문장을 자신의 문장으로 오인하는 전이의 가능성도 제기됐는데요.
“글쎄요. 어떤 소설을 한 권 쓰면, 그것은 온전히 그 사람만의 생각인가요? 내가 태어나서 엄마를 만나는 순간부터 엄마는 내 안에 들어와서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잖아요. 인간이 겪는 일들이 완전히 다르지는 않은데, 같은 이야기라도 내가 쓰면 어떻게 다르게 보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내 글쓰기였어요. 그리고 나만의 문장을 쓰려고 늘 노력해왔어요. 쓰고 고치기를 반복해요. 오랜 세월이 지나 책 표지가 떨어지고 너덜너덜해도, 문장을 읽어보면 신경숙 소설이구나 싶은 글을 쓰려고 했어요.”
- 일부에서는 절필 권유도 있습니다.
“나한테는 첫 책부터 따라 읽어온 독자들이 있어요. 22살에 등단해 30대, 40대를 그들과 함께 보내고 50대가 됐어요. 비난을 자주 받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것도 내 몫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15년 전, 그런 구설과 비난에 처했을 때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아요. 한 편의 비판글이 나오면, 그걸 읽는 대신 내 책상으로 돌아가서 한 편의 소설을 더 썼어요. 나는 작가다, 작품으로 말하겠다, 대응하는 것보다 작품을 쓰는 것이 내 할 일이라고 생각했죠. 난 문학에 은혜를 입고 문학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비난을 받고 자꾸 자기검열을 하면서 앞으로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지만 절필은 못할 것 같아요. 르 클레지오가 말했듯이 작가에게는 모국어가 조국이에요. 나는 모국어를 떠나서는 살 수 없어요. 내 땅이 문학이기 때문에 땅에 넘어지면 땅을 짚고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 독자들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입장 표명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것은 모두 내 탓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 소설이 착하기만 하고 현실을 수용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어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름답다는 것을 내 문장으로 증거하고 싶었고, 내가 느끼는 온기를 함께 나누는 사람이 내 독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작가로서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지난 30년 동안 장편소설 7편, 중·단편 48편(200자 원고지 2만장 분량)을 썼어요. 부지런히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많지도 않은 것 같아요. 같은 소설을 읽고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할 때, 서로 다른 소설을 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내려놓을 수 있는 건 다 내려놓겠어요. 밖에 나가지 않고 내 책상으로 돌아가겠어요. 발표하지 않고 항아리에 넣어두더라도.”
++++
-독서 리뷰-
[[황석영]]
<몰개월의 새> <밀살>
<몰개월의 새>
-황석영 作-
***동우***
2015. 7. 27
재고(在庫)는 많이 남았습니다만 '오 헨리'는 일단 접습니다.
월요일 새벽.
황석영 최고 단편중 하나, '몰개월의 새'를 올립니다.
1976년 발표된 소설인데, 그 때 나는 책장을 덮고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이 소설에는 부박(浮薄)하게 흩어진 나의 청춘이 씁쓸한 회오와 아련하게 슬픈 그리움으로 소롯이 담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황석영은 나보다 4년쯤 앞선 연배이지만 1967년 입대한 나와는 군대시절의 정서를 공유하는 바 있습니다. (황석영은 1943년생 1966년 입대. 나는 1947년생 1967년 입대)
그는 적령(適齡) 보다 늦게 군대에 갔고 나는 영장 나오기전 지원입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군대와 나의 군대는 같지 아니하였습니다.
황석영의 군대의식에는 필경 청춘의 혹은 작가적 치열함이 배어 있었을 터입니다만 (황석영은 해병대였고 월남전에 참전하였습니다) 나의 군대는 고작 국방부 시계의 초침소리에만 귀기울이는 지리멸렬한 것이었습니다.
월남의 십자성부대를 겨냥하여 지원하였는데, ‘맹호’(해병대의 청룡과 더불어 전사위험 높았던 육군) 춘기에 걸려서 어맛, 뜨거라하고 돈 써서 빠진 비겁한 기억이 내게는 있습니다. (의무병과였는데 보급행정의 보직을 갖고 있어서 철조망 너머로 군복이나 화랑담배등을 해처먹은 부끄러운 전과도 내게는 있답니다.)
이 소설은 그러나 진부한 군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승냥이처럼 밤새껏 울부짖는 청춘에 관한 이야기랄까요.
미지의 것들에 둘러쌓인 채, 정처(定處)를 찾지못하고 무재(無在)하는 대상을 향하여 울부짖는 청춘 말입니다.
<1년 반 만에 서울을 찾아가 다시 확인했던 것은 나의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파충류의 허물과도 같은 것이고, 나는 그 허물을 주워서 다시 뒤집어쓰고 돌아온 건 아닌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싸돌아다니던 골목에는 아직도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나도 언제나 끼이고 싶어하던, 머리 좋은 치들의 비밀결사는 여전히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성공한 신사들 같았다. 모친의 식료품가게는 문을 닫았다. 그 어두운 가게의 천장 위에 내 ‘잠수함’은 뚜껑을 닫고 선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젖히고 머리를 내밀자 나는 다시 심해에 잠기는 것 같았다. 내 다락방의 벽에는 떠나오던 날의 낙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밤새껏 승냥이는 울부짖는다-라고. 지붕 건너편에서 솜틀집의 활차 돌아가는 소리가 여전히 들렸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발소집 형제는 유행가를 합창하고, 야채장수 부부는 또 한바탕 두들기고 울었다.>
내게도 화냥년같은 부산이었고 서울이었습니다.
울렁거리는 기대에 부풀어 군대를 벗어나 접하는 세상.
저자거리의 진부함은 변함없이 그대로이련만 어찌도 그리 생경하였던지요.
그 많던 친구녀석들 여자아이들, 혹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혹은 예전과는 다른 포즈로 낯설었고.. 귀대기일이 촉박할수록 그 단절감은 빨리 부대로 돌아가고 싶게 만듭니다.
세상의 진부함이 낯선 군바리의 진부함으로 괜히 우울하고 괜히 억울하고 괜히 부아가 솟고 괜히 쓸쓸합니다.
생사를 장담할수 없는 전장(戰場)으로 떠나는 군바리 수병.
약한 것, 부드러운 것, 포근한 것, 따뜻한 것, 누이나 어머니나 여선생이나 간호원이나 어린애나 비둘기 같은 것...
울부짖는 승냥이....어미품을 파고드는 새끼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면서 울고 싶었을까요.
몰개월의 새.
호마이카 막걸리 술상 두드리면서 항구의 부기우기를 노래를 부르던 작부.
나의 군바리에게도 빠꿈이 미자가 있었을겁니다.
나의 미자도 길거리 수레에서 파는 조잡한 목각인형을 손수건에 고이 싸 건내주었을겁니다.
나의 군바리도 까짓 술집작부의 유치한 선물이라고, 엇다가 하찮게 버렸을겁니다.
빠꿈이 미자의 순정이 결코 천박하지 않았는데도.
약한 것, 부드러운 것, 포근한 것, 따뜻한 것, 누이나 어머니나 여선생이나 간호원이나 어린애나 비둘기 같은 것이 거기 있었음에도.
그 무렵 어렸던지라, 살아가는게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기 때문이지요.
인생에는 유치한 것이 없다는걸 몰랐던 소치였습니다.
<트럭들이 연병장을 한 바퀴 빙 돌면서 대열을 짓더니 차례로 사단구역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헤드라이트를 켠 트럭의 행렬들은 천천히 움직였다. 군가가 연달아 들려왔다. 군가소리는 후렴에서 뒤받아 연달아 뒤차로 이어졌다. 안개가 부연 몰개월 입구에서 나는 여자들이 길 좌우에 늘어서 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들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꽃이며 손수건이며를 흔들고 있었다. 수송대열은 천천히 나아갔다. 여자들은 거의가 한복 차림이었다. 병사들도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뛰어서 쫓아오는 여자들도 있었다. 추장이 내 등을 찔렀다. 나는 트럭 뒷전에 가서 상반신을 내밀고 소리질렀다. 미자가 면회 왔을 적의 모습대로 치마를 펄럭이며 쫓아왔다. 뭐라고 떠드는 것 같았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얀 것이 차 속으로 날아와 떨어졌다. 내가 그것을 주워들었을 적에는 미자는 벌써 뒤차에 가려져서 보이질 않았다. 여자들이 무엇인가를 차 속으로 계속해서 던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무수하게 날아왔다. 몰개월 가로는 금방 지나갔다. 군가소리는 여전했다.>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뚝이 한 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다.>
<밀살>
-황석영 作-
***동우***
2015. 7. 28
황석영의 1972년 발표작 '밀살 (密殺)'
세 사내가 한밤중 깊이 잠든 마을에서 새끼를 밴 암소를 훔쳐다 개천가에서 도살(屠殺)하여, 해체된 고기를 돈으로 바꾸기 위하여 지게에 나누어 지고 황황히 그곳을 벗어나는 얘기입니다.
도살(屠殺)
하나의 생명은 순식간에 커단 짐승의 늠름함을 상실한채 몇덩이 초라한 육괴(肉塊)로 화(化)해 버립니다.
고깃덩어리의 생생한 색갈과 자욱한 피비린내만이 조금전 펄떡펄떡 살아 숨쉬던 목숨의 자취를 말해줄 뿐, 방금전까지만해도 엄연했던 하나의 목숨은 흔적도 없습니다.
소를 묶어 정수리를 가격하고 배를 가르고 뜨끈뜨끈한 피를 마시고 뇌수를 삼키고 각을 뜨는 과정을 묘사하는 작가의 표현력.
황석영은 똑 저 밀살의 현장을 함께 경험한 사람같습니다. (아니더라도 필경 도살현장에 참예하여 작가적 눈으로 세세하게 관찰하였겠지요)
<“못헐 짓 허자니 목숨이 질다는 이약이랑게.”
그들은 산등성이를 내려와 작은 소나무들의 야산에 이르렀다. 야산 아래로 옥수수밭과 높이 솟은 황토언덕이 마주보였고 들판이 내려다보였다. 칼잡이가 짐을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씻으며 말했다.
“거 꼴사나운 놈, 버리고 가더라고.”
“송아지 말여요? 냅두슈. 사삭스럽게 왜 그런다요?”
조수의 말에 칼잡이는 잠깐 생각하고 나서 말했다.
“아무래도 재수가 없을 거 같어.”
“재수가 이 판국에 워딨대여. 염라대왕도 먹어야 대왕인디.”
“갑시다 얼릉. 워쩐지 상스런 생각이 드누먼그려. 마누라가 몸을 풀었는지두 모르겄네.”
신마이의 말에 조수가 발끈했다.
“이런 지미 붙을...... 어떤 놈, 새끼 없는 중 아냐. 줄줄이 딸린 게 새끼여. 낳고 먹고 죽고 하는 것이 자그마치 일곱이다 말여.”
칼잡이는 상을 찡그리고 자꾸 침을 뱉었다. 그들은 어느 결엔가 맥이 빠져 있었다. 세 사람은 한 마디씩 중얼댔다.
“엄청 늦었당게. 해 뜨기 전까지 꺼졌어여 하는 건데 말여.”
“지금쯤은 저기 철둑을 훨씬 넘었어야 혀.”
“동네 놈덜이 지키고 있을지루 모르겠고만이라구.”
들판 멀리 마을의 지붕들 위로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여러 줄기의 연기는 바람 없는 하늘 위에 곧게 올라가 흩어졌다. 새 한 마리가 놀 속에 높이 떠서 지저귀고 있었다. 새 울음소리가 아득했다.
새뿐만 아니라 들판의 이곳저곳에서 산 것들이 깨어나고 있을 것이다.>
어미 뱃속에서 끄집어 낸 탯송아지...
합법이냐 불법이냐의 차이 뿐 도축법에 의한 도살(屠殺)이나 밀살이나 다른 생명을 무참하게 죽여서 고기를 얻는 것임에는 다름없습니다.
그보다 선량한 농가의 기둥뿌리를 도둑질한 죄가 큽니다만, 임신한 아내가 있는 저 신마이는 도살한 암소가 새끼를 배고 있었다는 그것이 윤리적 샤먼으로 몹시 마음이 불편하고 아픕니다.
그렇지만 소소한 그런 것들, 밤을 지새고 아침이 되면 산 것들은 또 살겠다고 부시럭거립니다.
산것들은 그렇게 사는 게지요.
황석영의 밀살.
방금 잡아죽인 동물의 선지처럼, 먹고사니즘의 뜨끈뜨근한 원시적 생명력의 느낌 내게 끼쳐지는바 없지 않습니다.
옆길로 샙니다.
살기 위하여 다른 종(種)의 고기를 먹어야 하는, 자연계의 다른 생명을 약탈하여 자신의 생명에 공여케 하는 먹이사슬,
그 자연선택의 법칙에는 또한 유전자의 지혜와 발호가 있다고 하는데 자연계의 생존법칙이라거나 불공평함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도 조물주의 그 깊은 뜻을 모릅니다.
생존을 위한 먹거리가 아닌, 사냥과 낚시와 같은 도락이라던가 사치를 위한(모피나 상아 같은) 도살에 대한 것은 명백하게 맥락이 다르겠습니다만, 오로지 식도락을 위한 도살은 어떨런지.. 고기 뜯으면서 이것저것 따졌다가는 고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머리에 쥐가 납니다. ㅎㅎ
도살 정도가 아니라 같은 종을 도륙(屠戮)하는 인간에 이르러서는 더욱.
월든 숲 속의 헨리 데이빗 소로우, 그리고 무한히 생명을 외경(畏敬)하였던 쉬바이처.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하는 생명들입니다.
나 또한 살고자하는 생명입니다.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 바로 나입니다 -쉬바이처-
그러나 나와 같은 범속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다른 종(種)의 생명을 내 생명 가운데서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 같은 종(種)으로서도 아득한데 말입니다.
정(情)이 버거워서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아내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물을 좋아하는 내가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는 소이(所以)도 조금쯤은 예 있을겁니다.ㅎ
***꼬비에뚜***
2015.07.28 17:28
어느날 저녁상을 앞에 놓고 아부지가 '너 이런 고기 먹을 수 있겄냐?' 하시더군요.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싱글싱글 웃으시면서 말씀하시는 걸 한번쯤은 의심해보아야 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나와 같이 자란 셰퍼드, 죤..
말씀하신 '내 생명 가운데 체험' 정도가 아니라 '도살'의 공범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미워한 많은 이유 중의 하나였습죠.
***┗동우***
2015.07.31 04:24
꼬비에뚜님.
따지고 보면 고기 먹는 사람들, 모두 도살의 공범이지요.
무감각함으로.
작가가 밀살에서도 표현하였듯, 하나의 생명과 한덩어리 육괴...
마트에 즐비하게 진열된 고기덩어리들.
대량으로 사육하여 매카니틱하게 집단 도축되는 짐승들은 일종의 공산품이지요.
거기서 생명을 느끼는 사람 뉘 있을라구요.
닭이나 돼지 같았으면 별 마음 쓰일일 없겠지만 눈 마주치고 함께 뛰놀던 개라서 그러하실터.
아득한 옛날부터 짐승은 본시 식량으로서 사육되었겟지요.
꼬비에뚜님, 아버님을 향한 노여움의 감정 눅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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