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크눌프>
-헤르만 헤세 作-
***동우***
2014.06.10 04:22
'헤르만 헤세'가 1914년에 발표한 '크눌프, 그 삶의 세 이야기(Knulp, Drei Geschichen aus dem leben Knulps)'
1.초봄
2.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3.종말.
上中下 3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크눌프'는 자신의 자아를 내부적 고뇌를 통하여 삼부작으로 표현한 헤세의 분신 같은 작품이라고 합니다.
소설 기조(基調)에 소박함과 평화와 낭만과 향수(鄕愁)가 흐릅니다만, 거기에는 절대 고독한 존재로 살다가는 인간에 대하여 작가가 관조(觀照)하는 존재론적 슬픔같은게 짙게 배어있습니다.
아웃사이더의 삶을 사는 크눌프의 방랑.
우리의 한살이, 저자거리의 생활인(生活人)으로 살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리이까.
삶과 죽음...
초원의 빛과 꽃의 영광.
그 찬연함에 소멸(消滅)이 깃들어 있지 않다면 어찌 詩가 되리오.
***eunbee***
2014.06.10 17:19
간밤에 읽다 남겨진 부분을 이 아침에 읽느라
브런치 준비도 하지않고 열독(?)에 빠졌어요.
어쩜 이렇게 재미있대요. 오 랄라 ^^♡
크눌프
그가 만들어낼 앞으로의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제 토스터에 빵을 굽고 버터를 꺼내오고
나를 위한 커피, 딸을 위한 생강차를 끓이겠어요.
내일 올려질 글이 조바심나게 기다려 지는 일도 오랜만이네요. 호~~
***동우***
2014.06.11 04:39
섬세한 은비님 감성의 현을 건드리는 모종의 문학적 분위기, 이제 내 좀 압지요.
그런데 크놀프, 2부 3부.
별 재미있는 이야기꺼리는 없어요. ㅎ
은비님의 엊저녁 석식.
토스트와 커피.
커피 즐기지 않는 비문화적 내 코에 끼치는 은비님 문화의 향기 흠향(歆饗)하오이다.
***동우***
2014.06.11 04:21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응집된 생명이 하나의 개체를 이루어 한세상 살다가 이윽고 그 생명은 흩어져 주검으로써 자연 속으로 분산한다.
인생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두 대립물의 통일체로서의 한살이다.
살아있는 것들의 본질이란 生과 死라는 내적모순에 의하여 변(變)한다는 것이다.
생(生)과 변(變)은 동의어. 아,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변증법적이다.
죽음의 덧없음과 생명의 어여쁨.
생명의 배후에 그 덧없음이 없다면 산 것들이 어찌 아름다울수 있을런가.
아름다움과 허무.
오로지 홀로 짊어지고 가는.
++++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헤세-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덤불과 돌은 모두 외롭고
수목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밝던 때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가만히 격리하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말 현명하다 할 수가 없다.
안개 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
***eunbee***
2014.06.11 16:47
잼나게 읽었어요.
어떤 사건만이 재미난 것이 아니고 그보다 문장이 아름다운 것을 더 선호해요.
고요한 돈강을 다 읽어낸 것도 자연에 대한 섬세하게 아름다운 묘사 때문이었을거예요.
중학교 때 단짝친구는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였지요.
어느날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나는 저런 아름다운 멜로디가 흐르면 가사는 뭘까, 가사가 붙여진다면...'하는거예요.
나는 그말에 '가사가 없으니 더 아름다운게 아닐까' 내 경우 그 아름다운 곡에 가사는 전혀 필요도 없으니 궁금하지도 않거든요.
친구가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도 저런 성향에서 인가보다,했었지요 ㅎㅎ
이제 브런치 먹어야겠넹^^
오늘은 하클렛(감자 삶아 라클렛 치즈 얹어 녹여 먹는 스위스 음식. 우리 가족이 매우 좋아해요)
동우님도 좋은 오후!
오늘 읽은 글 중에서는 묘지에서 나눈 이야기가 젤 맘에 남아요. Merci, Mon Ami ♡^^
***동우***
2014.06.12 01:53
알고 있다우, 사건보다 문장의 분위기, 특히 회화의 느낌처럼 묘사하는 자연과 풍광. 작중인물의 심상과 어울어지는 그런 것...
아마 은비님께는 그러한 서사는 추상의 서정으로 접수될듯 합니다.
아직 읽지 못한 고요한 돈강.
소설이나 영화에 관한 은비님의 언급은 독서와 감상 욕구를 자극하는데, 솔로호프의 그 방대한 대하소설 읽어 보게 되겠는지..
예전 광복동 입구에 '클래식'이라는 음악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일주일 한번씩 KBS의 공개 프로그램이 있었지요.
두 단계의 과정인데, 첫번째는 클래식이나 재즈같은 기악곡(가사나 제목이 없는 작품# 식의 , 이를테면 절대음악)의 음악 몇소절을 틀어주는겁니다.
그러면 그 음악적 영감을 출연자가 무슨 이야기로 만들어 읊는 거지요. (창작이거나 추억같은 내용으로)
두번째는 노래로 만들어지지 않은 시를 주어, 곡을 붙여 노래를 하게 하는 것.
상품이라고는 고작 LP레코드 몇장.
좀 어려운 과정인데, 출연자가 시원찮으면 내가 가끔 땜빵을 했다우.
지금은 작고한 여수중 선생(방송국 PD, 연극 연출가, 시나리오작가, 첼리스트이기도)이 그 프로를 총괄하는 대빵(심사위원장을 겸한)이면서 또한 우리 굿쟁이들의 대빵이기도 하였어요.
서너번인가 출연하여 레코드를 얻었어요.
살짝 여선생의 힌트가 있었던 부정직한 수상이었답니다. ㅎ
은비님.
나도 현실적이고 서사적 인간이랍니다.
***동우***
2014.06.12 01:34
크눌프.
[삶은 얼마나 단순하고 명확했던가! 당시에 그는 아무렇게나 행동하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삶은 그에 동의했고,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국외자였다. 배회하며 구경하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젊은 날에는 사랑받았으나 이제 병들고 나이들자 혼자 남게 되었다.]
자신의 생활을 이루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도움닫지도 못한채 지닌 재능을 허랑방탕 헛되이 쓰다 가는 者.
[난 약간 멋들어지게 휘파람을 불 수 있고, 아코디언도 연주하고 때때로 시도 지을 수 있네. 예전에는 달리기도 잘했었고 춤도 못 추는 편은 아니었지. 그게 전부야. 그러면서 나 혼자만 즐거웠던 건 아냐. 대개 친구들이나, 젊은 아가씨들 또는 아이들이 함께 있었고, 그들은 재미있어하면서 때때로 내게 고마워하곤 했어.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만족해도 될 것 같네]
누구로부터도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도 끼치지도 아니하면서 세상을 떠돌면서 음유시인으로 한세상 살다가는 者.
[꽃들은 모두 안개 자욱해지면 시들어야 하는 운명, 인간 또한 죽어야만 하리니, 무덤 속에 눕게 되리. 인간 또한 꽃과 같아, 봄이 오면 그들은 모두 다시 살아나리라, 그때는 더 이상 아프지 않으리, 또한 모든 것 용서 받으리.]
그 계기가 어린 시절 사랑이라거나 욕정같은 것으로 품었던 관계의 배신과 허무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더라도.
그는 주어진 삶을 오로지 낭비(浪費)하다 가버린 사람일까.
죽기 전, 크눌프는 하나님과 얘기를 나눈다.
[“이 철부지야, 이 모든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근심걱정 모르는 방랑자가 되어 이곳저곳에서 어린아이 같은 행동과 어린아이의 웃음을 전달해 주어야만 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니? 그래서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너를 사랑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너에게 고마워하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겠니?”
“하지만 그것도 모두 제가 아직 젊었을 적, 옛날 이야기입니다! 전 왜 그것들로부터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또 훌륭한 인간도 못 되었을까요? 시간이 충분히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그만 만족하거라. 한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모든 일이 선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왔고 그 어떤 것도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정말 모르겠니? 그래, 넌 지금 신사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갖고 저녁에는 주간지를 읽고 싶은 거냐? 넌 금세 다시 도망쳐 나와 숲속의 여우들 곁에서 자고 새 덫을 놓거나 도마뱀을 길들이고 있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그래요”
“그럼 모든 게 좋으냐?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느냐?”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
고향,
[귀향자는 고향의 빛과 향기, 소음과 냄새를 다시 한번 만끽하였고, 고향에 와 있음으로 해서 느끼게 되는 아주 흥분되고 만족스러운 친밀감을 즐기고 있었다. 가축시장에서 농부들과 시민들이 벌이는 소란, 양지바른 곳에 서 잇는 갈색 밤나무의 그림자, 어두운 빛깔의 가을 나비들이 뒤늦게 시내 담벼락에서 벌이는 장례 비행, 시장 분수대가 사방으로 물을 뿜어대며 내는 소리, 양조업자의 아치형 창고 입구로부터 풍겨오는 포도주 향기와 그곳에서 들리는 둔탁하고 서투른 망치질 소리, 그리고 친숙한 거리의 이름들. 그 이름 하나하나는 또다시 더들썩한 여러 가지 기억들과 금세 연결되곤 했다.]
호사수구(狐死首丘).
여우도 제가 태어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 죽는다는데 아, 내게는 고향이 없구나.
그러나, 섭리의 本鄕.
그 빛의 깨달음 있으리로다.
‘聖 프란치스코’를 깊이 묵상할지어다.
<“바로 문 뒤에 서 있는 죽음의 형제여, 인류를 용서하시오. 사람들은 당신의 그 고상한 뜻을 이해 못하는군요. 그러니까 그들은 당신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eunbee***
2014.06.12 07:44
「한탄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모든 일이 선하고 바르게 이루어져 왔고 그 어떤 것도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정말 모르겠니? 그래, 넌 지금 신사가 되거나 기술자가 되어 아내와 아이를 갖고 저녁에는 주간지를 읽고 싶은 거냐? 넌 금세 다시 도망쳐 나와 숲속의 여우들 곁에서 자고 새 덫을 놓거나 도마뱀을 길들이고 있지 않을까?」'
중학교 때인가 친구 손에 들려져 있던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그 때 읽었더라면 무얼 알기나 했을까,하며 읽기를 마쳤답니다.
「이제 더 한탄할 게 없느냐?」
하느님이 물으셨다.
「없습니다」
크눌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게 웃었다.
「그럼 모든 게 좋으냐?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느냐?」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걸까요.
머잖은 그 어느날엔가
'돌아간다'는 말 그대로 담담히 돌아갈 수만 있어도.
올 때 이미 갈 때가 마련되어 있었을 터이니.
동우님 덕분에 매우 좋은 소설, 매회분마다 단숨에 읽었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종말'도 정말 정말 아름답게 읽히는 글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진심으로 Merci beaucoup!!
***동우***
2014.06.13 05:19
은비님.
아직 까마득하게 먼 훗날이지만, 그 때가 아니더라도 은비님이야말로 '모든 것이 제대로 되었어요'
떼제베 파업은 풀렸나요?
오늘 은비님의 액상프로방스 여행.
편해야 할터인데..
리딩북.
은비님의 메르시 보꾸는 내 최상의 기쁨.ㅎ
Merci, Mon Ami JH.
***eunbee***
2014.06.13 05:39
떼제베 파업은 계속중인가 봐요.
다행히 이 나라 철도 파업은 최소한의 서비스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정신(?)/취지하에 전면 파업은 법으로 금했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타고갈 엑상프로방스행 떼제베는 '기차는 9시에 떠나네' 랍니다.
다녀 올게요.^^
***베로니카***
2014.06.12 21:50
두말하믄..
너무 좋아해서 헤세에게 빠져있던 젊은 시절..
시방은 책 한권 읽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블에 글 올리기도 뭐하고
꽃들로 흐드러진 우리 뜰을 사진찍어 올리지도 못하고..
아마도 시간은 있는데 그냥 블을 방치하는 수준이랍니다
은비님도 다시 보이고 좋으네요
어제 오늘 비가 와 주어 할일이 태산이었답니다
풀도 뽑아야지 꽃도 찢어서 옮겨야지...
아휴 근데 선생님, 이거 누가 하라고 시켰음 클나겠어요
이제 나이 들어서 허리 팔 다리가 아프니 낼은 한의원에 가야겠어요
***동우***
2014.06.13 05:23
오랜만, 베로니카님.
할일 태산이라...
전주 한옥게스트하우스 하록당 접고 시골생활, 좀 편하실법 한데.
그리 바쁘시군요.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시는, 나이들어 아픈 허리 팔다리..
그래도 어쩐대요 베로니카님.
가끔 내 블로그 리딩북으로라도 독서 갈증 좀 푸시구려.
베로니카님 반가워 나도 인사합니다.
-독서 리뷰-
[[헤르만 헤세]]
<시인> <신비한 새> <고난의 길> <소나기>
<시인>
-헤르만 헤세 作-
***동우***
2013.03.26 05:01
헤르만 헤세(리딩북에 여태 없었군요), 가장 그 다운 단편소설 하나 올립니다.
시인.
내 지껄임, 아래 이문열의 해설로 갈음합니다.
++++
<추상의 절실함과 아름다움>
삶에 대한 눈뜸의 중요한 내용중에 하나는 우리의 일생을 인도할 가치의 별을 찾는 일이다. 어떤 이는 그런 특성을 강조해 성장소설의 일종으로 구도소설이라는 용어를 따로이 쓰기도 한다.
헤세의 '시인'은 비록 소품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구도소설이다. 자신의 삶을 채워주는 가치로 시를 선택한 한 젊은이의 수련과 성취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깨달음, 그의 성취의 내용은 지극히 추상적이다. 그가 한 위대한 시인이 된 것은 알겠으나 무엇이 어떻게 위대한지를 독자들은 쉽게 파악할 수 없다. 어쩌면 헤세 자신도 그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막연한 느낌밖에 가지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아름다우면서도 감동적이다. 시의 본질 혹은 완전한 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는 별로 듣지 못했으면서도 우리는 한 위대하고도 완전한 시인을 만나고 완성된 시를 읽은 듯한 감동에 젖는다. 그 이상 진정한 시가 무엇인지 알 듯한 느낌까지 준다.
무엇이든 구체적이고 명료하지 않으면 못견뎌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감동이 미덥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때로는 추상적이고 몽롱한 것이 더 절실한 감동으로 다가드는 수도 있다. 하물며 죽는 날까지도 그 진상을 온전히 알기는 어려운 우리 삶의 얘기에 있어서랴.
삶은 흔히 길걷기에 비유된다. 또 한바탕 꿈이라 일러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는 세상에 나있는 수많은 길, 우리가 꿀 수 있는 여러 꿈중에 하나일 수 있고 시인은 눈뜸이란 길 위에서의 길 찾기, 꿈속에서의 꿈꾸기일 수도 있다. 처음과 끝이 다 바라보이는 길이 어디 있으며 앞과 뒤를 가지런히 꿰일 수 있는 꿈이 어디 있으랴.
깊고 오묘한 깨달음의 내용을 조리있게 펼쳐 보여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진실의 힘이다. 그러나 때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아름답게 그려 보이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우리를 감동시킨다. '시인'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아마도 한혹이 시인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넉넉한 살림과 자애로운 부모, 아름다운 약혼녀와 다정한 친구들,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명망 -그와같이 세속적으로는 별로 모자람이 없는 현재와 제법 많은 것이 보장된 미래를 내던지고 진정한 시에 자신을 송두리째 내맡긴 그의 일생은 구도소설의 흔해빠진 원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감동적이다.
길찾기의 외로움과 고단함 혹은 꿈꾸기의 허망함도 그가 한 시인으로 완성되면서 애절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끝까지 추상적이고 애매한 깨달음의 내용까지 절실한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다가들게 한다.
헤르만 헤세는 십대 후반의 나를 매혹시켰던 작가이다. 내가 아름다운 시를 읽는 기분으로 읽은 그의 단편들은 아주 많고 그중에는 객관적으로 보아 '시인'보다 뛰어난 작품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을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이 작품이 그를 일관하는 어떤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출세작 '피터 카멘첸트'로부터 작가적 성가를 높여준 '나르시르와 골드문트' '싯다르타' '데미안'같은 작품에 이어 만년의 대작 '유리알 유희'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외형상으로는 교양소설, 성장소설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을 일관하는 것은 추상성과 애매함이다. 틀림없이 주인공들은 깨달음을 얻고 완성에 이르지만 그 내용은 과정의 엄숙함과 진지함에 비해 지극히 빈약하거나 알듯말듯한 추상의 안개 속에 휩싸여 있다.
어쩌면 그것이 지성과 논리를 앞세우는 강단평론가들이 때로 그를 경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원인일지도 모르나 내 개인적으로는 그런 태도에 전혀 동조하고 싶지 않다. 이미 말했듯 그것은 그가 가슴 저리게 그려내는 길찾기의 과정과 추상적이어서 오히려 더 절실하고 아름다운 완성과 해탈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바로 그런 헤세의 특징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단편으로 성장소설의 또 다른 유형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문열-
++++
***teapot***
2013.03.27 04:24
헤르만 헷세가 동양적인 이야기를 잘도 썼네 싶어 찿아보니~
새 아버지는 인디아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는 선교사였고, 외삼촌은 일본에서 활동한 교육가로 불교연구의 권위자였다는군요. 이러한 환경은 헤세가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했다고 하네요~
어쩐지.....
중국 소설을 읽는 것 같았읍니다.
시인이 돼기가 이리 어려운데 우리 주위에는 시인이 너무 많네요.
그들이 모두 시인으로 돼가는 과정에 있다고 봐야겠지요.
시인대신 "시인과 정인" 이라 부르면 그분들이 화를 내시려나요?? ㅎㅎㅎ
***동우***
2013.03.27 05:10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정말 시인이 많기도 하더군요.
사이버 세상에서는 시인으로 등단하기가 굉장히 수월한가 봐요.
좋게 보아 줍시다, 티팟님.
많은 이들이 스스로 시인이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건 나쁠 것 없을듯...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지지 않겠어요? ㅎ
그래요, 동양적 조예가 깊은 헤르만 헤세.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 매우 흠취(歆趣)하는 작가지요.
헤세의 '데미안'은 일종의 성장통으로 겪게되는 소설이기도...
***베로니카***
2013.03.31 14:56
자연을 사랑하고 자유를 갈망한 소년 헷세..
그 시절에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 이블속에서나 밥상머리서나..
아니 아지못할 고통의 소용돌이속의 헷세
내 청춘을 여지없이 뒤흔들었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데미안" 등등
어휴, 그 주인공들은 바로 나였고 내 가슴에 살아있는 연인이었음을..
그리고 헷세의 수채화 작품 속에서 그의 맑은 영혼
아니 세상적으로 정신병에 시달려서 ...
그러고보니
왜 이 띨한 사람도 현실보다 이상적인 세계에 더 잘 살고있는 느낌입니다. 때때로...
엊그제는 "안나 카레니나"란 영화가 나왔길래 (물론 몇번째이지만)
오만과 편견을 감독한 조 라이트감독을 만나고자 미친년처럼 갔었지요
음 조금 독특한 매력을 가진 그러나 조금 빈약한 키이라 나이들리는 웃을때가 좀 많이 어색한분위기였고
음.음..하면서 스스로
역시 웃을때는 소피 마르소가 잘해줬고요. 조 라이트감독이였지만서도 어딘지 좀 그랬었어요
어쨌던 찜질방서 누웠는데 (전 영화나 책에 빠지면 빠져 나오는데 조금 오래걸리걸랑요.)
꼬진 핸폰은 잘 챙기면서 사물함 열쇠를 자다가 놓친듯
아침에 후닥닥 내려와 옷장을 여니 아니나 다를까 빽속의 돈들이 하나도 없는것,,
잠시 머리가 하얗더니 카드라도 그대로 있는거 확인후
내가 참 띨한게 죄다 ..안도의 한숨을 ..
그날따라 왠 돈을 그리 많이 갖고왔노.. 나한테는 소판 돈처럼 많은 돈이었는뎅
그럴줄 알았으면 봄옷이라도 하나 질르는건뎅... 아니 그 꽃가게 앞에서 탐낸 그 커다란 꽃항아리라도 손님들을 위해 주문했어야 했는뎅...
미처 미처 ..
후회는 뭐 ..그냥 미친년처럼 터덜터덜 돌아왔지요
이렇게 현실을 멍충하게 살아서 어찌 여기까지 왔나... 스스로 참 용감 대견... 스스로 위로하면서도요. 허이유~~
***동우***
2013.04.01 06:49
나보다 연배가 아래인 베로니카님.
우리는 데미안 앓이로 동시대를 살았군요.
안나 카레니나.
나도 세편의 영화를 보았지요.
그 옛날 줄리앙 두비비에의 흑백화면, 비비안리가 안나역.
그리고 소피 마르소의 안나.
이번에 나도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로 아주 색다른 안나를 보았지요.
키이라 나이틀리.. 오만과 편견에서 처음 접했던 배우인데, 내 타입의 미인은 아니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여배우.
각진 턱에 큰 입술, 영국식 발음의 영어(영어 무식한 내 귀에는 그렇게 들립디다.)
베로니카님도 느끼셨겠지만 이 영화는 무슨 연극과 얼버무린 영상이었지요.
무대적 연기와 무대적 진행과 무대적 배경..
손동작이 멋진, 춤추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안나 카레니나로서는 나 역시 어딘가 어색해 보였습니다.
안나의 연인 역은 너무 어린 티가 났었고, 브론스키역도 좀 시시한 느낌... 톨스토이의 원작이 아니라 새로운 안나 카레니나를 창조한듯.
찜질방.
나는 여행가 숙박을 위하여 자주 이용하는 곳.
아무리 술에 취하여 잠들더라도 옷장에서 돈을 잃어버린 적은 없는데... 전주 양반 고을에서 무슨 재앙. 쯧쯧..
근데 이런 적은 있답니다. 찜질복 주머니에 5만원권 지폐를 넣었다가 그대로 옷통(빨래통)에 집어 넣어 잃어버렸다는.
이건 순전히 내 섬망탓. 뉘를 원망하리오.
베로니카님 스스로 자꾸만 띨하다고 자폄하시는데, 나야말로 띨함의 극치.. 하
<신비한 새>
-헤르만 헤세 作-
***동우***
2014.09.15 04:13
사유함(思惟)을 떠나... 우선 헤르만 헤세는 이야기꾼입니다.
한편의 우화(寓話)처럼 쓴 '신비한 새' (몬탁스 마을의 새).
이야기의 뼈대, 독일 어느 마을에 구전되어 온 어떤 설화(說話)를 차용했을까요?
교훈적 풍자적으로 이야기가 은유하는 바는 비교적 명료합니다만 헤세적(?) 기호가 아주 없지는 않아 보입니다. ㅎ
신비한 새(아프락사스는 아니지만), 아벨, 카인...
예전 직장생활중.
모모(某某)한 교수나 학회나 협회같은 곳의 연구자료로 의뢰받은 설문지 작성에 귀찮아하였던 생각이 납니다.
사지선다(四枝選多)식으로 몇개의 답변 항목을 사전에 규정하여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달라는.
그런데 물어보는 많은 문항이 그 성격상, 답변에 있어서 매우 애매하고 추상적이고 장황할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들을 단순화로 디파인(define)하여 제시된 일정한 항목으로 규정하여 달라는 요구에는 그만 짜증이 치밀고는 하였어요.
정리 분류하여 논리적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학문적 행정적 연구자료의 효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속으로는 차라리 주관식 서술형이라면 쉬울 것을.. 편의적 관료주의 어쩌구 하면서 붕어우는 소리를 냈습니다.
행정이나 과학이 추구하는 효용적 논리적 가치의 틀과 경제가 추구하는 이기적 물질적 가치의 틀.
신비한 새를 그 틀 속에 우겨넣으려는 인간의 무모함.
틀 속에 우겨 넣을수 없는 것 규정할수 없는 것, 몬탁스의 새는 맑은 눈으로 인간의 탐욕을 물끄러미 내려다 봅니다.
으흠, 살라스터가 자살한 이유를 알듯도 합니다그려.
신비한 새.
읽으면서 아까부터 나도 우화 하나를 구상해 봅니다만.
못난 재주나마 지껄여 볼꺼나...
다음에. ㅎ
<고난의 길>
-헤르만 헤세 作-
***동우***
2014.09.16 05:54
놀이 짙어 처연한가.
뒤로 돌아 갈 길은 없다.
피할수 없노니. 나 바라노라.
섭리의 궁극을.
그윽한 동경(憧憬)을 담아.
삶의 끝자락.
자기완성이나 자기실현은 아니다.
자기를 해체하여 투신하는 것이다.
전체에게로.
태초의 어머니, 신에게로, 자연에게로.
술 깬 아침, 헤르만 헤세 청랑하고나.
가을이다.
++++
<고독으로 가는 길>
-헤르만 헤세-
세계가 너에게서 떨어져 나간다.
지난날 네가 사랑하던
모든 기쁨이 다 타 버리고
그 재 속에서 암흑이 위협한다.
더 강력한 손에 밀려
어쩔 수 없이 너는
네 속으로 가라앉아서
추위에 얼며 죽은 세계 위에 선다.
너의 뒤에서, 잃어버린 고향의 여운이
아이들의 소리와 은은한 사랑의 노래가
흐느끼며 울려 온다.
고독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어렵다.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꿈의 샘도 말라 있다.
그러나 믿으라.
네 길의 끝자리에 고향이 있으리라.
죽음과 부활이
그리고 무덤과 영원한 어머니가.
++++
<소나기>
-헤르만 헤세 作-
***동우***
2014.09.17 04:54
'헤르만 헤세'의 '소나기',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열여섯 소년의 감성, 어떤 부분 황순원의 '소나기'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늘 구름 소나기 바람 숲 나무 호수 아침과 저녁과 밤 숲과 나무들.. (헤세는 나무를 숭배하는 사람, '나무들'이라는 책도 썼지요)
아름다운 에를렌호프 별장.
사려깊은 아버지, 가슴이 넉넉한 아주머니(집안의 오랜 가정부인지 유모인지, 에바부인이 연상되기도), 방문객인 아름다운 숙녀 투스넬데와 소녀 베르타, 그리고 아버지의 오랜 친구 호인인 교수... 그리고 현학적이고 다소 성마른 성격의 가정교사..
헤세가 묘사한, 별장을 둘러싼 자연의 아름다움도 부럽고 저 부르주아적 환경도 부럽습니다. (번역이 좀...)
그러나 청춘은 질풍노도.
열정의 달콤함과 고뇌의 쓰라림.
사춘기 소년 소녀의 말할수 없이 미묘한 그 마음밭이 만져집니다.
내게도 있었으니까요.
유월. 소나기.
청춘의 기억.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사라져야함으로 아름다운 것들이여.
***동우***
2014.09.18 04:25
아직 덜 익은 청춘.
내면에서는 뜨거운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성(異性)이라는 미지(未知)의 영토를 향한.
그를 향한 벅찬 설레임과 막연한 기다림.
그리고 기쁨과 아픔과 슬픔..
파울은 치미는 것 같은 무엇, 이글이글 끓는 어떤 것, 팽창된 무엇이 자기 주위와 내부에서 뭉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듯이 느낍니다.
찬란한 계절 유월, 소년은 소나기 빗물에 반항적인 슬픔을 적십니다.
헤르만 헤세의 수채화는 유명하지요.
소설에서도 자연과 심리를 채색하는 헤르만 헤세의 붓질은 아련하게 섬세합니다.
회억건대 청춘은 고통스럽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아름다웠습니다.
번역이 우리말 정서의 정치(精緻)함으로 좀 더 이뻤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쉬움, 헤르만 헤세의 시 한편으로 벌충합지요. ㅎ
++++
<모래에 써 놓은 것>
-헤르만 헤세-
아름다운 것, 매혹적인 것은
그저 한줄기 바람이요 소나기라고.
소중한 것, 황홀한 것, 사랑스러운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구름과 꽃, 비누 거품,
불꽃놀이,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거울에 비친 여인의 눈길,
그리고 그 밖의 놀라운 것들,
이 모든 것은 나타나기 무섭게 사라진다고.
그저 한순간만 지속할 뿐이라고,
그저 한줄기 바람이요 향기일 뿐이라고.
아, 이 사실을 우리는 서럽게도 알고 있다.
지속적인 것, 고정된 것은
우리 가슴에 그렇게 와 닿지 않는다.
차가운 불길이 담긴 보석,
찬란하고 묵직한 황금 난간,
수없이 많은 별들조차도
너무 멀리 있고 낯설다. 그것들은
우리 무상한 존재들과 같지가 않다.
우리들 마음속까지 미치지 않는다.
그래, 정말 아름다운 것,
사랑스러운 것은 스러지기
마련인 것 같다. 언제나 금방 사라진다.
가장 소중한 것들은, 이를테면
음악 소리는 살아나는 순간
어느새 도망치고 사라진다.
바람이요 흐름이요 질주일뿐이다.
가벼운 슬픔이 맴돌 뿐이다.
심장이 한번 뛰는 순간만큼도
지속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모든 소리는 들리기가 무섭게
어느새 사라지고 흘러가 버린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은
확고한 것,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덧없는 것, 흘러가는 것, 인생과
형제처럼 신의로 맺어져 있다.
지속적인 것, 그러니까 바위나 별들,
보석같은 것들은 우리를 지치게 할 뿐.
우리는 영원한 변화 속에 떠도는
바람이나 비누 거품 같은 영혼이다.
우린 시간과 결혼한 자, 유한한 존재.
우리는 장미 꽃잎에 맺힌 이슬이나
짝을 찾는 새의 울음소리나
변화무쌍하게 노닐다가 사라지는 구름이나
반짝이는 눈이나 무지개나,
날아왔다가는 어느새 사라지는 나비나,
지나가는 길에 들려오는
웃음소리 같은 것에서
기쁨을 찾거나 슬픔을 느낀다.
우리는 사랑한다. 우리와 같은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바람이 모래에 써놓은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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