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신호> <꾸사까> <마뜨료나의 집>
<신호>
-가르신 作-
***동우***
2016.01.11 04:41
러시아 작가.
보세볼로드 미하일로비치 가르신 (Vsevolod Mikhailovich Garshin, 1855~1888)의 '신호'
꼬비에뚜님 댁에서 업어와 올립니다.
가르신은 정신발작으로 33세 때 요절한 제정 러시아 시대의 작가이지요.
허가를 받지 않고 밭에다 양배추를 심었다가 벌금을 물고 폭행까지 당한 선로원 바실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철도 레일을 어긋나게 합니다.
그것을 발견한 세몬은 수백명의 승객을 실은 객차가 다가오자 다급한 상황에서 칼로 자신의 팔을 찔러 손수건을 피로 물들여 나무가지에 매단 깃발을 흔들어 기관사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피를 너무 흘린 세몬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뒤늦게 후회하여 달려온 바실리는 그 깃발을 받아 돌진하는 기관차에 신호를 보내어 열차를 멈추게 합니다.
++++
<숲을 빠져나오니 철도 둑이 눈앞에 높이 보였다. 위쪽 선로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 무엇인가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세몬은 조용히 둑에 올라 그 남자 쪽으로 갔다. 누가 볼트를 훔치러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보고 있노라니 그 남자는 일어섰다. 손에는 쇠로 만든 지렛대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 선로가 옆으로 빠져나가게 그 지렛대로 손질해 놓은 것이다. 세몬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건 바실리가 아닌가. 그는 뛰어 올라갔다.
그러나 상대방은 쇠로 만든 지렛대와 집게를 들고 둑 반대편으로 곤두박질하듯 뛰어내려갔다.
"바실리 스체바노비치! 제발 돌아와요! 지렛대를 이리 줘! 아직 아무도 몰라. 선로로 돌아와요. 죄를 짓지 마시오!"
그러나 바실리는 돌아보지도 않고 숲 속으로 사라졌다.
세몬은 빠져버린 선로 위에 서 있었다. 버들가지 다발도 떨어뜨렸다. 다음 열차는 화물차가 아니다 객차다. 그러나 그는 정차시킬 도리가 없었다. 신호기가 없는 것이다. 선로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수도 없었다. 맨손으로 큰못도 박을 수 없었다. 뛰어가야 했다. 뭔가 연장을 가지러 간수 초소로 뛰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아, 하느님 도와주십시오!"
세몬은 간수 초소 쪽으로 뛰어갔다. 헐떡이면서 마구 뛰었다. 금새 고꾸라질 것 같았다. 숲을 빠져나갔다. 이제 간수 초소까지는 1백 싸궤(1싸궤는 2.134미터)밖에 안 된다.
이때 공장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여섯시다. 여섯시 이분에는 열차가 온다. 아아, 하느님! 죄없는 사람들을 구원하옵소서! 그러는 사이에도 세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을 기관차의 왼쪽 바퀴가 선로가 끊긴 곳에 충돌해 크게 흔들리고, 기울어지면서 침목을 부숴 산산조각을 내는 광경이었다. 거기에다가 급커브에 경사, 그리고 둑이 있다. 11싸궤는 구를 것이 틀림없다.
특히 3등차는 사람이 꽉 찼을 것이다. 그 속에는 어린것들도 있을 터인데... 그들은 지금 모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앉아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느님, 저에게 가르침을 주소서... 안 되겠다. 간수 초소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늦다.
간수 초소까지 뛰어가지 않고 세몬은 뒤로 돌아서서 전보다도 더욱 빨리 뛰었다. 정신없이 뛰었다. 자신도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겨우 뽑힌 선로까지 돌아왔다. 그의 버들가지가 묶인 채로 놓여 있었다.
그는 몸을 굽혀 버들가지 하나를 뽑아가지고,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또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열차가 오는 것 같았다. 먼 곳에서 기적 소리가 들렸다. 선로는 희미했지만 규칙적으로 진동하기 시작하는 것이 들렸다. 더 뛸 힘이 없었다. 그는 위험 지점에서 약 1백 싸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이때에 번갯불처럼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그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고 장화목에서 칼을 꺼냈다. 그리고 성호를 그었다. 하느님 구원하소서!
그는 칼로 왼쪽 팔굽 위를 찔렀다. 피가 솟아올라 뜨거운 냇물처럼 흘렀다. 그는 손수건을 피에 적셔가지고 펴서 버들가지에 비틀어 매어 붉은 기를 세웠다. 버티고 서서 그는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열차는 이미 보였다. 기관사는 그를 보지 못한 듯 자꾸 접근해 왔다. 1백 싸궤의 거리로 저 무거운 열차를 멈출 수 있을지!
피는 자꾸 흘렀다. 세몬은 상처를 옆구리에 대고 눌러 그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상처가 깊었던 것이다. 세몬은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검은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그것도 아주 컴컴해졌다. 귀에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에게는 열차도 보이지 않았고,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 속에는 단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제는 서 있을 수가 없다. 넘어지겠다. 기를 떨어뜨리겠구나.'
'나는 열차에 치이겠지... 도와주십시오, 하느님. 교대할 사람을...'
그대로 눈앞은 캄캄해졌고, 그는 정신을 잃고 기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그 피묻은 기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의 손인지 그것을 붙잡아 난폭하게 달려드는 열차를 향해서 높이 들어올렸다. 기관사가 그것을 보고 조절기를 닫아 증기의 흐름을 바꿨다. 열차가 멈춰섰다. 여기저기 차량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와 구름같이 모였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한 남자가 기절해 쓰러져 있고, 또 한 남자가 그 옆에 피묻은 헝겊을 나뭇가지에 매어 들고 서 있었다.
바실리는 모든 사람들을 둘러본 다음 고개를 푹 수그리며 말했다.
"나를 묶어주시오. 내가 선로를 끊었소."
++++
이 소설, 책임감에 대한 교훈적 내용으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곁들인, 청소년용으로 만들어진 책이었을 겁니다.
바실리는 불평불만 분자입니다.
반면 세몬은 인정 가득한 긍정주의자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갈증으로 목마른 사람 앞에 반쯤 물이 담긴 컵이 있습니다.
'물이 반이나 남아 있구나. 고마운 일이야' 라고 하는 사람.
그리고 '물이 고작 반밖에 안남아있네. 빌어먹을' 이라고 하는 사람.
느끼는바 사람에게는 저마다 낙관성이거나 또는 비관성의 기질적 경향이 있습니다.
성정(性情)으로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경험이거나 환경으로 형성된 후천적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분히 그렇더라는 말입니다.
그런 경향성이 이를테면 이데올로기로 진화하는 원인적 기질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아닐겁니다.
인간도 세상도, 어떻게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명확하게 구분 지을수 있겠어요?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는 인간은 커녕 사람사는 세상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자체도 그렇거니와 인간의 현실은 훨씬 더 난해하고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ㅎ
새해도 슬슬 타성으로 익어갑니다.
좋은 한주의 시작을.
***꼬비에뚜***
2016.01.11 16:58
안부가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요.
좋은 작품들을 풀어펼쳐주시는 공덕에 경의를 표합니다.
***동우***
2016.01.12 05:00
꼬비에뚜님.
방대한 도서관 애용하면서 나야말로 새해 인사가 이리 소홀하였습니다.
꼬비에뚜님의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더욱 건필하시고 두루 평안하옵소서.
꼬비에뚜님.
작품 몇 올리면서 잡설 지껄이는게 공덕이라 하시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날더러 그러시면.
그 많은 자료들 수집하여 정리하고 섭렵하여 스스로의 지식곳간을 풍요롭게 하시려니와 나같은 사람에게 까지 끼처주시는 꼬비에뚜님의 적덕(積德)은 어떡하구요? ㅎ
<꾸사까>
-안드레예프 作-
***동우***
2016.02.18 04:43
안드레예프의 ‘꾸사까’
떠돌이 개 꾸사까.
생애 처음으로 잠간동안 인정(人情)이라는 걸 맛보았습니다.
그렇지만 필경.
그런 호사는 자신의 팔자에 없는거라는걸 꾸사까는 너무나 절절하게 느낍니다.
개는 울부짖었다...
이 문장이 가슴을 에이게 합니다.
<"세속의 삶에서 고통을 받는 것은 인간 뿐만이 아니다. 동물들도 똑같은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똑같은 영혼을 갖고 있다. 모든 생명은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 - 안드레예프->
++++
<꾸싸까는 떠나 버린 사람들의 흔적을 좇아 한참을 헤매다가 기차역에 도착했다. 흠뻑 젖고 먼지투성이가 된 채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꾸사까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묘기를 부렸다. 처음으로 테라스에 뛰어올라 뒷발로 일어서서 유리가 끼워진 문을 통해 안을 관찰했다. 발톱으로 문을 긁기까지 했다. 실내는 텅 비어 있었고 꾸사까에게 달려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사방이 갑자기 닥친 기나긴 가을 밤의 어둠에 휩싸였다. 어둠이 빠르고 조용하게 텅 빈 별장에 스며들었고 관목숲에서 소리없이 기어나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뚝뚝한 비와 함께 흘러내렸다. 차양을 벗겨 낸 테라스는 넓고 생경스럽게 텅 비어 보였다. 빛은 아직 좀더 오래 어둠과 싸우며 더러운 발들이 지나간 흔적을 우울하게 비워주었지만 곧 빛도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다.
밤이 찾아 왔다.
그리고 밤이 찾아 왔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됐을 때 개는 크고 처량하게 울부짖었다. 절망감에서 우러나온 우렁차고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는 단조로우며 순종적인 빗소리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어둠을 가르고 벌거벗은 검은 들판 위에서 울려 퍼지다가 사라졌다.
개는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단조롭고, 끈질기며 희망을 상실한 채 평온했다. 그리고 이 울음소리는 그것을 들은 사람에게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는 암흑 같은 밤이 빛을 향해 질주하면서 신음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서 따뜻한 곳으로, 환한 불로,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으로 뛰어들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개는 울부짖었다.>
++++
개는 울부짖었다.
깊은 밤 캄캄한 하늘로 고개를 치들고 울부짖는 한마리 외로운 개의 울부짖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듯 합니다.
그 소리는 단조롭고, 끈질기며 희망을 상실한 채로 평온합니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사람에게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는 암흑 같은 밤이 빛을 향해 질주하면서 신음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어서 따뜻한 곳으로, 환한 불로, 자신을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으로 뛰어들고 싶어지게 만듭니다.
숲의 밤하늘을 향하여 울부짖는 늑대. (늑대도 개科이지요.)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이 생각납니다.
도회에서 사랑을 듬뿍받고 생활하던 개 '벅'은 어쩌다 팔려가 혹독한 알라스카의 환경 속에서 약육강식이라는 생존의 원리를 터득하여 점점 야성의 개로 변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던 새 주인 '존 손턴'이 살해 당하자, 벅은 미친 듯이 인디언들을 뒤쫓아 그들을 물어 쓰러뜨립니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지요.
벅도 밤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우~워 우~워 늑대울음을 웁니다.
개는 울부짖었다...
사랑을 갖지 못한 산 것의 고독한 울음소리...
퐁네프의 연인.
미셀(줄리엣 비노쉬)가 떠나자 떠돌이 노숙자 알렉스(드니 라방)는 자기 손가락에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면서 울부짖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잊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자연 속에서 더불어 이어가는 목숨인데 동물이라고 무에 다르겠습니까?
정이 없으면 거지도 노숙자도 왕후장상도 외롭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개도 늑대도 고양이도 쥐새끼도 외롭습니다.
개 또한 살고자 하는 생명의 한가운데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입니다.
그런데 나는 보신탕을 먹을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목숨은 슬픈건가 봅니다.
안드레예프.
인터넷에서 주어온 그의 프로필을 아래 덧붙입니다.
++++
레오니드 안드레예프 (Leonid Andreyev 1871-1919)
1871년 러시아 오룔 태생. 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스물일곱살에 단편 '바르가모트의 가라시까'로 데뷔. 50편의 단편소설을 썼으며 고리끼, 톨스토이, 꼬롤렌꼬, 체호프와 같은 거장들에게 인정을 받은 20세기 러시아에서 매우 인기있는 작가 중 한명. 1905년 혁명에 동조한 혐의로 경찰의 탄압을 받았는데 이 시기의 대표작이 '유다 이스까리오트'와 '교수대에 대달린 일곱 명의 이야기'이다. 전제주의에 항거하고 민중의 행복과 자유의 승리를 추구하는 혁명사상에는 동조하였으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폭력성에 회의를 느끼고 핀란드로 망명했다가 48세에 심장질환으로 생을 마감한다. 안드레예프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모든 생명은 똑같은 영혼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고통을 느낍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생명 경외심에서 그의 겸손함과 따뜻함을 느낀다.
++++
<마뜨료나의 집>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作-
***동우***
2016.01.21 04:13
아슴한 기억 속 감동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명작, '암병동'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은 것이 한 40년 쯤은 지났을까...
벼르기만 하다가 '수용소 군도'는 여적 읽지 못하였습니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Aleksandr Solzhenitcyn, 1918~2008)의 '마뜨료나의 집'
텍스트 파일을 구할수 없었던 솔제니친이었는데 꼬비에뚜님 댁에서 업어와 얼른 올립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습니다.
<마뜨료나는 우리는 이 여인 바로 옆에 살면서 누구 한 사람도 이 여인이 의인(義人)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없으면 어떠한 도시도 서 있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의인 말이다. 도시뿐이랴, 온 세계도…>
소외된 삶을 살지만 탐욕과 가식이 없으며 남을 동정하고 배려하며 누가보든지 말든지 할일을 묵묵히 하는 촌여인 마뜨료나..
하찮게 살다가 하찮게 죽어간 그녀가 도시를 국가를 지구를 바로 서게하는 의로운 자라고 합니다.
솔제니친이 줄곧 저항하였던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마뜨료나 일테지요.
솔제니친의 '마뜨료나의 집'
3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주어 온 솔제니친의 프로필입니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Aleksandr Solzhenitsyn)
솔제니친은 1918년 카프카즈의 키슬로보드스크 시에서 태어났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직전 사망하여, 그는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후일 그는 대학에서 물리와 수학을 전공하지만,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모스크바의 역사, 철학, 문학 전문 학교의 통신 과정을 이수하였다. 21세 되던 해, 대학 동창인 피아니스트 나탈리아 레슈토프스카야와 결혼하였고, 졸업 후에는 시골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포병 장교로 전쟁에 자원 입대했다. 여기서 그는 '붉은 별', '조국 전쟁' 등 2개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45년 포병 대위로 동프러시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근무하던 중 반소(反蘇) 선동과 스탈린에 대한 부주의한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8년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는다. 그 뒤 카자흐스탄 탄광 지대의 수용소를 거쳐 형기 만료로 석방되었으나, 주거지 제한으로 카자흐스탄 발하시 호수 근처에 묶여 살았다. 그러다 1956년 소련 내부에서 반 스탈린 운동이 일어나자, 그 여파로 석방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중학교 물리와 수학 교사로 근무하였다.
솔제니친은 1962년 11월 〈노브이 미르〉지 11월호에 스탈린 시대 강제 노동 수용소의 참상을 다룬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그 이름을 처음으로 알렸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반향은 대단하여, 그는 이 한 편으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도약했다. 그 뒤 계속해서 1968년 『암병동』, 1973년 『수용소 군도』를 파리에서 출판하였고, 그 때마다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 때문에 1974년 당국에 검거되어 국외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소련 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망명 생활 중에도 『소련 지도자들에게 주는 서한』, 『수용소 군도 2부, 3부』, 『솔제니친 작품집』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나는 글 한 줄을 쓰는 데 1년이 걸린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모국어의 낱말 하나, 장, 절 하나하나에 깊은 사랑과 열정을 바치면서 글을 쓴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1970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등 뛰어난 작품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4년에는 오랜 설움의 시간이 끝나고, 복권되어 러시아 시민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2007년 러시아 작가로서 최고의 명예로 꼽히는 국가공로상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8년 8월 3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
***동우***
2016.01.22 04:34
사람은 생물학적 존재이지만 인간적 존재임을 전제로 하여 인간입니다.
더불어 사람은 사회적 존재에 앞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인간적 존재입니다.
인간관계란 동물적 관계도 아니고 사회적 관계도 아닙니다.
인간적 공감, 인간적 연대감을 벗어난 관계는 인간을 벗어난 전혀 공허하고 삭막한 관계입니다.
사회주의는 인간적 동질성보다 사회적 동류성에 우겨넣어 인간을 규정하려 하지만 말입니다.
어떤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색맹(色盲)은 익히 아는데.. 어떤 종류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미맹(味盲)도 있다고 하는군요.
그러니 사람의 어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감맹(感盲)도 있을법 합니다.
극단적 감맹(感盲)이라면 사이코 패스니 소시얼 패스니 하는 부류가 그렇겠지요.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은 새를 자기 몸의 일부처럼 부리며 새를 타고 하늘을 납니다.
꼬리를 새와 연결하여 완벽한 교감을 만들어내지요.
하나의 관념이 형성되면 인간을 잘 보려하지 않습니다.
이념의 교감에서는 곧잘 인간이 배제되곤 하지요.
마뜨료나가 교감하는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이념이라는게 깃들어 있을까요.
사회주의나라, 집단농장에서도 내처진 노파..옛날 이념이 없었던 젊은날을 그릴때 그녀의 볼은 언제나처럼 황색이 아니라 장밋빛으로 물듭니다.
<... 이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의 눈앞에는 청색과 백색과 황색의 1914년 7월의 광경이 떠올랐다. 구름이 흐르는 아직도 평화로운 하늘과 수확에 용솟음치는 사람들. 나는 상상 속에 두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등에 큰 낫을 짊어진 거무죽죽한 건장한 사내. 보리 다발을 가슴에 안은 볼이 빨간 여자. 그리고 노래. 야외의 노래. 기계를 사용하게 된 요즈음에는 결코 부르지 않는 노래 ...>
<... 색이 바랜 낡은 머릿수건을 쓴 마뜨료나의 둥근 얼굴은 스탠드의 아늑한 조명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살이며 평상시의 남루한 복장으로부터 해방이라도 된 듯이 무서운 선택을 앞에 놓고 전율하는 처녀의 얼굴. 그렇다… 잘 아는 일이다… 나뭇잎이 지고 눈이 오고 그 눈도 녹았다. 다시 경작하고, 다시 씨를 뿌리고, 다시 곡식을 거두어들인다. 또다시 나뭇잎이 지고 다시 눈이 내린다. 그리고 하나의 혁명. 이어서 또하나의 혁명. 그러고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
***동우***
2016.01.23 05:43
<그것이 국가의 것이건 개인의 것이건 간에 소유물로 나타내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도브로 (재산과 善이란 두 가지 뜻이 있는 러시아어라고 한다)라는 낱말을 생각할수록 기묘한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의 러시아어 제목이 'Matrenin dvor' 입디다.
본문에 나오는 저 '도브로'라는 어휘에는 재산과 선이라는 중의가 있다고 하니까, 제목의 단어 'dvor'가 '도브로'가 맞다면, 마뜨료나의 善이 바로 마뜨료나의 재산이라는 등식으로 파악해도 무리가 없을듯 싶습니다.
마뜨료나는 가구를 갖추려고도 하지 않았고 (악착같이 돈을 저축해서 물건을 산 다음, 그 물건을 인간의 생명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짓이므로) 악덕이나 기형(奇型)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한 고운 옷도 원치 않았습니다.
자기 남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 채 버림받은 여인이었고 여섯 자식을 차례차례 잃었지만 선량 그대로의 그 성격은 결코 잃은 적이 없는, 형제나 친척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여인입니다.
살아 생전 아무런 댓가도 없이 이웃에 품앗이를 하였고, 죽었을 때는 아무런 저축도 없었습니다.
마뜨료나의 재산이라곤 더러운 산양과 절름발이 고양이와 무화과나무뿐이었지요.
<우리는 이 여인 바로 옆에 살면서 누구 한 사람도 이 여인이 의인(義人)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가 없으면 어떠한 도시도 서 있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의인 말이다. 도시뿐이랴, 온 세계도…>
솔제니친은 세상을 세우고 있는 것은 마뜨료나와 같은 '거룩한 바보'의 존재 때문이라고 하는군요.
혁명가가 순정한 마음으로 헌신하는 혁명의 열정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바쿠닌, 트로츠키, 마오쩌둥, 러시아 2월 혁명, 중국대륙의 대장정, 소련 중국의 소비에트, 김산(장지락)의 아리랑, 체 게바라...
그런 책들을 읽을적에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콧끝이 시큰합니다.
그러나 혁명이 성공하여 하나의 체제가 세워지면 반드시 혁명의 순정함은 변질됩니다.
소비에트적 이상(理想)은 관료화 시스템화 효율화 형식화 이념화에 매몰되어 개별은 사라지고 맙니다.
집단화된 프로파간다의 구호가 인간을 압도하고 마는 것입니다.
솔제니친은 스탈린주의에 저항하여 소련으로부터 쫓겨나, 소련의 붕괴를 가장 선두에서 지켜본 작가입니다.
그렇다고 솔제니친이 망명지 미국과 서유럽의 사회를 긍정의 눈으로 본 것은 아닙니다.
시장경제 만능의 신자유주의 역시 시스템화 효율화 세계화에 매몰되어 개별은 사라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자본제일 자본만능이라는 프로파간다가 인간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솔제니친의 옛 공동체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
나 또한 그러합니다.
나는 때로 어떤 역사의 변증을 몽상합니다.
집단화된 문명은 시나브로 야만이 되어 갈 것이라는, 그리하여 인류는 오랜 변증의 선택을 거쳐서 필경 부족적 삶의 양태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그런 징조를 느끼고 있는바, 진토가 된 먼먼 훗날 나 웃으리로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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