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공지영]]
<존재는 눈물을,,>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랑하는 당신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공지영 作-
***동우***
2013.01.21 04:42
나는 공지영이 정치적으로 나부대는 그녀의 ‘트윗 때문에’ 문학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지영은 작가로서 매우 훌륭합니다.
비단 이 소설 때문만은 아닙니다. (공지영의 소설들 꽤 읽었습니다.)
적어도 문학에 있어서만은 공지영을 트통령(트윗대통령)이라는 이외수 류와 동격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이외수님을 좀 언급합니다.
입을 열면 스스로 ‘굉장한 예술가’인양 폼을 잡는 자가발전이 너무 눈부셔 나로서는 상당히 불편하였습니다.
처연한 의식이 스며있는 듯한 초기작품을 그런대로 좋게 읽었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가 보내준 책 ‘하악하악’에 이르러서는 맥이 쭉 빠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따위를 작품이랍시고.
지극히 상투적인 얘기를 시류적 트랜드에 소구(訴求)하여, 감상적 미문(美文)으로 화장한 값싼 아포리즘의 나열.
어설프지만 진지하였던 초기의 문학을 생각하면, 내게 그의 천박함은 좀 지나친 느낌이었습니다.
젊은 뉜가, 내게 이외수의 젓가락 신공의 신묘함에 대하여 얘기합디다.
‘영육적(靈肉的)으로 이외수님은 무언가 초월적 경지’에서 노니는 분이라고.
나무 젓가락으로 그리는 그림과 글씨, 그리고 나무젓가락으로 휘젓는 무공(武工)을 보라고.
<안목없는 내 눈임을 전제합니다만.> 그가 구사하는 캘리그라프는 손재주있는 사람이 쓴 백화점에 내걸린 POP 글씨체였습니다. 내게는.
옛날 학교 교지(校誌)에 내 친구가 익숙한 솜씨로 그렸던 삽화, 그 컷과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다만, 던져서 두터운 판지를 꿰뚫는 나무젓가락은 신기하기는 합디다.
이외수님은 내 블친 한 분과는 참으로 가까운 사이이고 책도 보내주었는데 내가 이런 소리를 지껄입니다.
그러나 찬(讚)함과 훼(毁)함 더불어 자유로우니 사이버 세상의 편편함이겠지요. ㅎ
공지영.
역사, 민주, 변혁.
생각건대 공지영에게는 한 시대를 향하여 미안함의 트라우마같은게 있는듯 싶습니다.
그녀의 장편 ‘고등어’는 공지영의 한 시대에 대한 미안함 짙은 회고록은 아니었을까요?
느끼건대, ‘도가니’라던가 ‘의자놀이(아직 未讀)’는 그 미안함이 부추기는 그녀의 앙가주망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녀의 트윗도 역시 그런 맥락의....)
그러나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는 그와는 격이 다르게 읽혀졌습니다.
386 공지영이 예순넘은 내게 인생의 어떤 깊은 맛 (성찰이랄까..) 그런 걸 느끼게 하여 주었습니다.
현대인의 고독한 일상.
아니 한국적인, 지극히 한국적인 삶의 양태.
먹고사니즘에 덜미를 잡힌 삶, 그토록 바쁘면서 도무지 그 바쁘다는 본질의 의미를 깨달을 念도 없이 그저 바쁜 일상.
불안하고 때로 외롭기는 한데, 치유하여 주는 사랑의 손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퇴근하여 한 잔 술로 시름을 달랠 뿐이지요.
다음 날이면 쓰린 속 움켜쥐고 또 직수굿이 그 무기미 속으로 또다시 침잠하여야 합니다.
김훈의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
그에 대한 성찰을 생각할 겨를은 없습니다.
타성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바라노니, 내 자식들 내 손주들의 삶은 그러하지 않기를.
<니가 돈만 아는 그런 얼굴을 하는 게 나는 싫어, 그가 말했다. 돈만 아는 것은 물론 싫은 일이었다. 이 세상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기가 막힐 일은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분명 있기는 했지만, 그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단지 한 달을 살아 갈 뿐인 돈을 받는 일의 무서움을 내가 알게 된 것은 정확히는 이혼 후의 일이었다. 아이는 자라고 있었고 이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나도 꿈꾸었었습니다.
끔찍한 밥벌이의 무기미한 일상을 보기좋게 벗어 팽개치는 어느 찬란한 날의 도래를.
<나는 빨리 늙어 버릴 거야. 첫 연금을 타면 제일 먼저 흔들의자를 사겠어, 그것을 베란다에 내다 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을 거야.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흐르는지를 바라보면서 내내 거기 앉아 있을 거야 아마 생각하겠지, 이렇게 허망해져 버릴 것을 왜 그렇게 볼이 빨개지도록 뛰어다녔을까, 나는 거기 앉아서 내 젊은 날의 욕망을 비웃을 거야. 하지만 내게 그런 시간이 남아 있을 거라는 꿈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욕망을 지금은 소중히 여기겠어.>
그러나 그 어느 날의 그 도래는 환희였던가.
그 도래함에도 사랑은 있지 아니 하여...
<우리는 좀 더 깊은 눈을 뜨고 그것들을 천천히 하나씩 곱게 땋아 내려야 해. 그게 사는 거야. 아주 작은 행복 하나를 부여잡기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는 줄 너는 아니? 진짜 허망한 건 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휩쓸려가 버리는 거라구. 너는 늙어서 흔들의자를 내다 놓고 앉아 그걸 생각하며 울게 될 거야.>
***동우***
2013.01.21 04:52
그리고 아무나 그 무기미함을 호기롭게 내팽개칠수 있는건 아닐 것이다.
유 파이어!.
필경은 해고라는 완강한 등 떠밂에 의하여 쫓겨나기 십상.
<그만 뛰지, 공은 이미 하늘로 올라가 버렸어. 이제는 날개가 달린 사람이 필요해.>
아,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사랑은 사람에게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안되는데.
영겁으로 부터 영겁까지.
그래야 사람은 비로소 살아낼수 있는 것인데.
<한때는 희망으로 빛나던 이 길을 당신들도 언젠가 절망으로 걸어갈 날이 있을 것이다. 희망으로 한번 빛나 보지 않은 길은 결코 절망으로도 이르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길의 탓은 아니지만, 경계하라! 그 변덕스러운 삶의 갈피를 언젠가 음악이 멈추고 무도회가 끝난 것처럼, 귓속으로 먹먹한 정적이 스며들지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금 경계하라! 불행조차도 고여 있지 않다는 진실을 나는 완벽한 침묵의 공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때 저를 매혹시켰던 책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지요.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그 책은 진리를 말하고 있었던 거예요. 모든 것은 변한다. 저는 그 구절만 빼놓고 그 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믿었지요. 그 책이 나에게 주었던 진실이 진실인 것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어리석게도 생각했던 거예요, 세상에,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언제나 거기 있어 주는 것이 한 가지쯤 있었으면 했지요. 그게 사랑이든, 사람이든, 진실이든 혹은 나 자신이든 나는 기대어 서 있고 싶었나 봐요. 존재란 건 원래 머무르고 싶어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페루로 갔습니다.>
<사랑은 완성되어야 할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이지요. 혁명이 그렇고 삶이 그렇듯이. 하지만 우리는 끝을 보고 싶어 했어요.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 같아지는 거라고. 그 중간은 존재하고 그 과정도 존재하며 사실은 삶이란 게 바로 그런 과정들일 뿐인데 말이지요. 삶조차 완성될 수는 없는 건데요. 나는 조급히 끝을 만지고 싶어 하는 그 여자를 사랑한 만큼 증오했나 봐요. 끝이 보이지 않았던 내 희망을 사랑하고 증오했듯이 아마 그래서 그 여자 없이도 페루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높은 봉우리, 마추픽추 한 언덕빼기, 이제 영원히 그곳에 머물게 될 새들의 주검들 속에서 마지막까지 버티며 날개를 퍼덕이던 새 한 마리가 움직임을 멈추었고, 생을 맹세하고 막막한 대양 위를 날아가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 낸 그의 푸른 눈빛이 멍해지면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아, 세세년년 세월의 두께는 무슨 전설을 만들어 내는가.
은행나무이거나 공룡이거나 잃어버린 도시 맞추픽추....
공룡은 사라졌지만 은행나무는 현실의 가로수로 눈 앞에 있고..
폐허로 남은 마추픽추.
이제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잃어버린 도시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왜 그 도시를 그토록 힘들여 지었을까...
<가벼워지고 싶었다.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서 날개가 돋도록. 마추픽추 신전의 모양을 모방해서 만들었을 칵테일의 초록과 자주의 층이 작은 유리잔 속에서 조금씩 무너져 내려 이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다지요?
몸이 가벼워지자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는 조급한 마음도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면도 자국이 남아 있는 턱을 한번 쓸었다.
로맹 가리가 쓴 소설 말이군요. 어디서나 새들은 죽어요. 그리고 어린 새들이 또 태어나겠지요. 페루에 대해 궁금하신가요?
아니요, 전 페루에 대해 아는 게 없어요.
알고 싶지 않으신 거로군요. 죽을까 봐.>
페루, 새들이 가서 죽는 그 곳은 세상의 끝인가.
새들, 페루에서 죽다.
아,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꼬마 모모와 로자 아줌마와 하밀 영감님.
<모든 존재는 저마다 슬픈거야. 그 부피만큼의 눈물을 쏟아내고 나서 비로소 이 세상을 다시 보는 거라구 너만 슬픈게 아니라...
아무도 상대방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린 서로 마주보며 그것을 닦아내 줄수는 있어. 우리 생에서 필요한 것은 다만 그 눈물을 서로 닦아줄 사람일 뿐이니까. 네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해.>
살이의 고달픔과 외로움과 ..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존재의 본질은 눈물이다.
꼬마 모모는 할아범에게 묻는다.(자기 앞의 생)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수 있나요?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수 있나요?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수 있나요?
모모는 죽은 로자 아줌마의 시신을 가꾼다. 예쁘게.
그건 사랑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공지영 作-
***동우***
2013.09.24 05:40
진정한 혁명가가 되기 위한 강철같은 의지와 연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엄격한 공동생활, 먹거리 입거리 잘거리의 극심한 궁핍, 체포에 대한 불안, 자본론등 소화해야 하는 엄청난 양의 학습분량....
스물네살짜리 여자와 스물 다섯살짜리 남자.
남녀 사이의 그깟 말랑말랑한 감정따위는 반동(反動)이다.
혁명가는 오로지 소명감과 강철대오의 동지애로써만 기뻐야 한다.
잠시잠깐 사랑이라는 감정에 넋을 빼앗겼던 (이념에 목숨을 건) 남자는 부끄럽다.
"어젯밤엔 술이 과했던 것 같구나. 우리 둘 다."
그러나 여자는 말한다.
"난 당신을 사랑하는 것에 목숨을 걸 수도 있어요"
공지영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분명 '레닌'에게서 차용해 왔을 것이다.<'무엇을 할 것인가'는 레닌의 유명한 명제, 이를테면 혁명에는 이성의 힘(공상에서 과학으로)만이 아니라 감성의 힘도 필요하다는 그런 것 쯤으로... 얻어들은 내 풍월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작가는 그것을 명확한 주제로 삼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념에 헌신한 과거 운동권 사람들, 빛바랜 추억들.
좀 쓸쓸하고 좀 슬픈듯한 공지영의 어떤 문학적 감수성이 내게 짙게 만져진다.
(전에도 말한바 있는데) 공지영에게는 과거 운동권에 대한 어떤 죄의식(미안한 감정)같은게 있는것 같다.
'고등어'등 많은 소설의 기조에 흐르는 정서, 또는 그녀의 정치적 언행에서 느껴지는 어떤 분위기...
(트위터 같은데서) 좌파적 편향성 짙은 그녀지만, 문학적으로 공지영은 유치한 트윗질하는 이외수류 보다는 월등하게 빼어난 소설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하는 당신께>
-공지영 作-
***동우***
2014.07.10 03:36
'사랑하는 당신께'
'공지영'은 스스로 '자신의 문학의 출발은 페미니즘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통속은 무어란 말입니까?
비열하고 위선적인 어떤 사내의 인격.
혹은 남성성에 대한 통념적 생물학적 사회구조적인 관대함이거나 성적억압구조,
그에 대한 통렬한 반어적인 멜로드라마인가요.
그러함에도 '당신을 사랑했다'는 여자의 저 순진성은 ..
그러함에도 '당신을 사랑하고자 한다'는 여자의 절망적 자존인가요.
여자가 죽은 후 저 남자새끼, 파이란의 최민식처럼 몸부림치며 흐느껴 울지는 않았을것 같습니다.
***해나***
2015.05.10 22:37
여자는...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보고
슬퍼하고 반성하길 바랐을까요?
저런 류의 남자도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
변할 수 있을까요?
여자들은 가끔...그런 착각을 하는 것 같아요.
내 사랑이 너를 혹은 나를...구원할 거라는.
***동우***
2015.05.11 04:52
해나님.
남자가 여자를 향하여 갖는 이중적 환상이 있다지요.
탕녀와 마돈나.
그러하다면 마돈나에 속한 여성적 부분은 필경 '내 사랑이 너를 구원하리라'하는 환상 또한 갖지 않겠어요?
그건 어쩌면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 실제적 효험으로 작용할수도 있을겁니다.
그런데 그것도 상대방에 따라 다르겠지요만.
공지영의 소설 속 저 남자에게는 무망할듯.
여성의 내면, 작열하는 태양아래 묵묵히 사막을 걷는 '낙타' (서영은 '먼 그대')는 남자의 환상 속 어느 부분일런지.. ㅎ
-독서 리뷰-
<봉순이 언니>
-공지영 作-
***동우***
2014.11.15 07:06
1950~60 년대, 도시의 왠만한 집에서는 죄 식모를 데리고 살았었다.
본격적인 산업화가 태동되기 전인지라 여공(女工)도 드물었고, 궁핍한 촌 여자아이가 도회지로 나올수 있는 손쉬운 코스가 아마도 식모살이였을까.
보릿고개가 있었고 사람값이 헐하였던 시절, (무에 확실히 정해놓은 봉급이랄 것이 있었을까)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몇푼 돈으로 부릴수 있었던 식모.
그 소녀들은 내 누이들.
신설동의 유년시절.
기옥이 누나, 떠올리려니 어머니와 더불어 아슴하게 따뜻함 적시누나.
범일동 윤소아과와 정능의 박의원.
누가 젖엄마를 우리집 식모라고 하면 나는 아니라고 울음을 터뜨렸었는데...
벌써 세상을 떴을... 그리운 젖엄마. 이선희.
그리고 보생의원의 함안댁과, 애순이...
공지영의 장편소설 '봉순이 언니'
4회 정도로 나누어 올립니다.
좋은 주말.
***동우***
2014.11.16 04:24
봉순이 언니'는 공지영의 자전적 성장소설이기도 합니다.
담배와 술, 그리고 막연한 성적충동과 저 되바라진 생각들.
고작 대여섯살짜리, 공지영(짱아)은 참으로 조숙(早熟)합니다.
그런데 공지영의 아이적만이 저리 되바라졌을까요?
눈을 감고 자기최면으로 기억을 퇴행시켜 옛 아이를 한번 들여다 봅니다.
그대, 마냥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아이였던가요?
으흠, 나남없이 빨간 새끼악마 한마리를 만날지니.
창경원 벚꽃놀이, 또다시 버림받을까봐 아주머니의 손을 꼭 잡고 한사코 놓지 않으려는 소녀.
주인의 눈을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애절하게 슬픈 눈빛.
그건 절대적 선의(善意)의 눈빛입니다.
위선(僞善)은 누구의 것일까요.
"엄마, 봉순이 언니는 우리 식구 아냐?"
"아니긴, 우리 식구지."
그렇지만 봉순이는 필요에 따른 '딸처럼' 일뿐 결코 '딸'은 아니었습니다.
<쟤가 너무 잘해 주었더니 이젠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오려고 하네… 어디라고 지가 따라나서, 나서길, 주제를 알아야지, 참, 너무 잘 대해주어서도 안돼…어머니는 자신이 언젠가 “있는 집 사람들이 더 무섭다”고 말한대로 “있는 집 사람들”이 되었고 그래서 무서워진 것 같았다.>
첫사람 봉순이.
<아직도 봉순이 언니는 내가 서러울 때, 내가 따돌림당할 때, 내가 혼자 외로울 때 나를 안아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엄마였고 언니였고 그러면서 친구인 그녀는, 내 첫사람이었다.>
훗날, 짱아 자신의 위선 또한 스스로 참혹합니다.
내 누이 봉순이들, 나 또한 그러하였을겁니다.
***동우***
2014.11.17 07:13
"짱아, 넌 우리 넸째랑 닮았다"며 환하게 웃던 식모.
값진 것들은 눈도 안주고 아이들 옷만 훔쳐 고향으로 도망간 미경이.
열아홉 소녀 봉순이는 두드려 맞은 몰골로 배가 불러 돌아왔다.
그러나 봉순이는 ‘미워도 다시 한번’ 의 문희처럼 예쁘지도 않았고, 병식이라는 놈팽이는 신영균처럼 듬직하지도 않았다.
미경이 봉순이, 식모로 인하여 여섯살짜리 짱아는 어렴풋 알아채는가.
산다는 것의 신산(辛酸)한 모습..사람은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사는 이 세상에 공주는 없다는 걸, 밀밭을 닮은 금빛 머리칼도,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소녀도, 심연처럼 푸른 눈동자와 높고 커다란 성에 사는 신비의 마왕과… 대체 그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일까.>
<아마 산다는 게, 아마도 힘겹고 슬프고, 등불 하나 없이, 먼 먼 들판을 걸어가는 일 같다는 걸, 누구나 헨젤과 그레텔보다 험하고 처량하게 숲속을 헤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을 나는 봉순이 언니의 울음소리를 통해 미리, 내 인생의 낮은 배경음을 듣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봉순이 언니, 그 따뜻한 품이 그리웠던 짱아는 이불 속 봉순이언니 품을 파고든다.
그러나 후욱 끼치는 피비린내.
그것은 필경 짱아가 이제 살아야 할 세상의 냄새였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이불 속으로 들이민 내 머리 위로 축축한 피비린내가 후욱하고 끼쳐왔고, 동시에 내 손에 두툼하고 헐렁한 언니의 배가 만져지는 것이었다.>
정능, 어머니(박의원)는 이층건물을 신축하였다.
공사기간중 젖엄마는 목수와 정분이 났는데 어쩌면 그것은 젖엄마의 첫사랑이었을라나.
그때 젖엄마는 내 곁을 떠났고 나는 한동안 풀이 죽었을 것이다.
그 다음 우리집에 들어온 코가 문드러진 (매독때문이라고 하였다) 할머니.
나는 그 할머니가 몹시 무서웠다.
양광 따스한 겨울 어느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집안은 적요하고 할머니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악아, 이리 온."
할머니는 나를 불러 내 손에다 군밤 몇알을 쥐어주었다.
할머니 눈은 너무나 슬퍼 보였고, 할머니 손은 참 따뜻하였다.
할머니에게도 나만한 아이가 있었을까, 그때 나를 감싼 느낌은 온통 할머니의 유순함이었다.
그 후로 나는 할머니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중 알았는데, 어머니보다 약간 연배였을까 할머니로 불릴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할머니라 불렀는데, 그 이는 우리집에 그다지 오래 있지는 않았다.
불현듯 생각난다.
***동우***
2014.11.18 05:03
천지간에 홀로 '되똑하니' 남겨져 '남의집 살이'로 살아온 봉순이.
그녀가 꿈꾸는 소박한 따스함.
<맛있는 게 있으면 내가 그이 밥그릇에 하나를 놓아주고, 또 맛있는 게 있으면 그 사람이 내 밥그릇에 하나를 놓아주고, 그렇게 말이야. 평생 누가 내 밥그릇에 먹으라고 그렇게 슬며시 맛있는 걸 놓아준 적이 있었을까. 아마 그사람 뿐일꺼야. 모르겠어. 오는데 자꾸만 이건 인연이라는 생각이 드는거야.>
못 배우고 가난한 자의 삶에 중첩된 여자의 삶인지라 그래서 더욱 가혹한 뒤웅박 팔자런가.
<남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봉순이 언니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지만, 아마도 그건 다른 방식으로 불행해졌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삶에서 사소한 일이 없는 이유는, 사소한 그 일이 바로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총체이기 때문에 결국 사소한 그 단서가 아니라 그 사소한 것의 방향을 트는 삶의 덩어리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걸 내가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공지영은 자신의 좌파적 기질을 세상에다 노정(露呈)하기를 서슴치 않는 작가이다.
<고맙게도 내게 여자로서 이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제3세계, 식민지에서 자란 지식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준, 모욕과 참담함과, 절망이라고 이름짓고 싶었던 순간들을 베풀어주신 신.>
공지영은 언제나 저 '신'에 대하여 미안해 한다.
연대시절의 그녀, 나는 그녀의 소설 속에서 '운동권'에 대하여 <미안해> 하는 그녀의 어떤 정서를 읽는다.
좌파적 기질, 그런 미안해하는 정서가 강박하는 의식적(意識的) 행위는 아닐까하는....
짱아의 인생에 '첫사람'이었던 봉순이.
어린 짱아가 존재로써 느꼈던 첫사람, 그건 자본주의 세상에 있어서 어떤 하이라키적 연민은 아니었을터인데.
어른이 되어 이렇게 말할줄 아는 짱아.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가 한번 남자와 도망갈 때마다, 그녀가 얼마나 목숨을 걸고 낙관적이어야 했을지를.
이혼을 하고, 남자에 대해 비관적이고 비판적이며 신랄하게 결혼제도의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나말고, 그녀가, 남자 하나를 따라 나설 때마다, 얼마나, 목숨을 걸고 기필코 희망을 가져야 했는지를.>
그러면서도 우연히 지하철에서 그 옛날의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봉순이를 냉정하게 외면하고 달아난다
<그런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돌아봤을 때 놀랍게도 그녀가 날 바라보고 있었어. 설마, 하는 눈빛으로… 희미한 확신과 놀라움과 얼핏 스치는 그토록 반가움… 나는 돌아보지 않았어, 엄마… 너무 많은 세월이 지났고, 그녀의 얼굴이 가물거려서… 그래 그래서야, 삼십년이나 지났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게다가 아직도 버리지 않은 희망… 같은, 게… 그 눈빛에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봉순이의 낙관과 희망의 눈빛,
그 눈빛이 그토록이나 끔찍하게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나 같으면 쓸어안고 엉엉 울듯도 싶은데.
봉순이에 대하여 무엇을 미안해 하는가, 작가는.
운동권에 대한 '미안함'과는 무엇이 다를까.
나를 작은 오빠라고 불렀던 보생의원의 애순이.
애순이는 눈이 커다랗고 이미자의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불렀고, 매우 영특하였으며 자신의 처지로서는 눈이 꽤 높았다.
그 아이는 한사코 마다하였지만, 나이가 차 보생의원의 어른들은 서둘러 애순이를 시집 보내려 하였다.
신랑감은 버스깐 같은데를 돌면서 행상을 하는 생활력 강한 용호동의 총각이었다.
대신동의 자그마한 결혼식장, 내가 사회를 보고 형이 그애의 손을 잡고 입장하였던가.
그런데 식장에서 애순이는 그리도 울었었다.
애순이는 한사코 첫날밤을 거부하고 다음날 돌아왔고, 그 결혼은 파토가 되어 버렸다.
그 후에도 보생의원을 친정처럼 드나들었는데, 언젠가 풍문으로 미국 가 산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군병사와 연애를 하였다던가)
가끔 정말 가슴 저리도록 그 누이가 보고싶다.
***홍애(虹厓)***
2014.11.18 23:30
공지영 소설 중에 봉순이 언니는, 너무나 베스트셀러여서 못 읽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다시 거꾸로 읽어가면서, 처음부터 읽지 않으니 못 읽겠다 하고 다시 포기 하고 말았지만
더 와 닿은 사연은 동우님의 애순이 이야기 입니다.
무척, 영특하여 용기있는 여성이군요. 동우님의 그리움 이해되고도 남습니다.
***동우***
2014.11.19 04:51
홍애님,
요즘 바야흐로 독서에 영화에 공부에 맹렬하신 근황 손바닥으로 봅니다.
이웃의 블로그, 스마트폰으로는 들여다볼뿐 비좁은 자판 두드려 댓글 남기기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아요.
더구나 카톡이다, 카스다, 페이스북이다, 트위터다..SNS는 더욱.
그 신속하고 짧막한 동시성의 커무니케이션, 낯익지 않은건 아무래도 나이 탓인듯 싶기도 하지만, 홍애님도 좀 느끼시는 것 같아 동병상련,ㅎㅎㅎ
공지영은 트위터에서는 좌파의 선봉인듯.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운동권에 대한 어떤 '미안한' 정서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것 같아요.
학생때 운동권으로 구류도 살았다지만,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은 어떤 회한이 있는듯. '고등어'에서 진하게 느껴집니다만.
내게는 이 소설에서도 그런 정서가 전달됩니다.
애순이, 소식이 궁금하다기보다 그냥 보고 싶습니다.
오래전 소식 끊긴 누이..
참,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이 소설도 참 진도가 나가지 않는군요.
너무 재미가 없어서.
공부하듯 등장인물의 관계와 심리와 의도를 파악해가면서 문장을 해석하듯 읽어야 하니. 원.
제임스 조이스, 의식의 흐름은 내 취향에 그다지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1/3쯤 읽었는데 다 읽고 나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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