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
-공지영 作-
***동우***
2017.07.10 04:56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
모두들 어디로 가뭇 사라져버린건가요.
2월 혁명은, 볼세비키는, 소비에트는, 코민테른은... 레닌은, 트로츠키는...
동지는 간데없는데, 그래도 나부끼는 깃발이나마 있는가.
오, 초원의 빛이여.
대지를 굴러가는 마른잎들이여.
너 허무하고 쓸쓸한 것들이여.
천년 도시 모그끄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답니다.
공지영의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
세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7.07.11 21:38
모스끄바에는 아무도 없다.
모스끄바.
변증의 역사가, 혹은 역사가 꿈꾸어왔던 아이디얼한 인간성이, 진실의 늪 속에서 고뇌하고 있을것만 같았던 도시.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청춘의 고뇌와 이상.
그 조각이 어느 구석엔가 파편으로라도 뒹굴고 있을것만 같았던 도시.
그러나 그 도시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서로 다가갈수 없는 언어만이 허공에서 스러집니다.
몸파는 인터걸과의 그것처럼.
철저한 타자의식으로 소통하는 도시.
<그런데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건 그토록 교육과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가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하는 거야. 곳곳에 시인들의 동상이 서 있는데 왜 이들은 패배하고 말았을까. 택시도 없고, 비닐 우산도 없고, 전화 걸기도 힘들고 그래서 문득 생각했어. 모스끄바의 명당이 그 레닌 언덕에 사관학교하고 정보부를 세워 놓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야. 서울이 한복판의 남산에다가 안기부와 텔레비 탑을 세워 놓았듯이 그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야...>
소비에트, 한 세월 그토록 순정하고 정의롭게 민중을 고취하고 강개하였던 그 이념 작금 어디 있나요?
그 열정, 인민은 그냥 프로파간다에 취하였거나 취한척 하고 있었을 뿐인가요.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이 넘쳐나는 눈으로 바라보고, 각자가 상대방 앞에서 별처럼 반짝이는 시대 말입니다. 그 때에는 해방된 민중들은 가슴을 펴고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앞으로 나아 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는 시기심이 깨끗이 사라질 것입니다. 온갖 증오의 마음은 그 누구도 갖지 않게 될 겁니다. 그때 우리가 누리는 것은 찌든 생활이 아닙니다. 인간 서로에 대한 봉사로 가득찬 풍요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해방된 민중들은 아무리 높은 이상이라도 성취할수 있을 겁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진리와 자유 속에서 아름다움을 위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세계를 끌어 안을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훌륭한 민중이 될 겁니다. -고리키 '어머니'->
공산권 붕괴(崩壞)후, 그 때 다니던 조선소 선대(船臺)에서는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진수식에서는 중공국가가 울렸습니다.
당시 회사현장에서 날마다 접하는 상황에 나는 정말 어리둥절하였었습니다.
폴란드 선원들은 대낮에도 술에 취하여 흐느적거렸지요.
자본 맛에 취한 흥청거림안가 보르겠는데, 그들에게 소비에트는 어디에도 뵈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利를 좇고 慾을 좇는 자본주의보다 더 자본주의적 인간성.
'계급이 취향을 나타낸다'는 브로디외의 명제를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
내 아버지는 언감생심, 구정물 질척거리는 장삼이사의 저자거리 어느 골목...
공산주의 실험 반백년 넘어이고 자본주의 불과 십년 남짓일텐데, 우째된 겐지 소비엣적 인간성 한오락 남아있지 않은지.
'나 (공지영)', 혁명은 커녕 청춘과 열정의 의미마저 잃어버린 저 기분은 참담함이라기보다 애린한 슬픔입니다.
리영희 선생이 이런 글을 썼었지요.
<지난 10년 가량의 기간 중 중국, 사회주의 변모를 관찰하면서 나는 적지 않은 실망과 배신감에 사로잡혔었다.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사회의 최근 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주의적 인간윤리와 사회윤리의 타락을 목격하면서이다. 사회개방이 수삼 년밖에 안 되는 소련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 상태를 전한다. 이기주의적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각종 부도덕 행위와 범죄사건의 증대는 아직은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할 바가 아닌 것 같다. 그렇기는 하지만 소련에서는 70년, 중국에서는 40년의 사회주의적 인간윤리 사회윤리의 체질화를 지향했던 사상과 교육, 정책과 제도의 성과에 대해서 심각한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정직하게 말해서 나는 적지 않은 환멸을 느낀다.사적소유의 원리와 행동양식은 '필연적'으로 인간성품을 퇴폐시키는 것일까.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근거로서 나는 소유의 대상으로서의 물질의 양의 유한성과 소유욕의 무한성의 불일치에서 찾는다. 유한한 물질을 수 억의 인간이 무한한 소유욕을 가지고 각축할 때, 그로 말미암은 불평등은 범죄와 타락을 발생시키게 마련이다. 자본주의는 소유욕의 경쟁을 생산의욕을 고취하는 자극제로 활용하는 대신, 그 결과로서의 불평등, 불공평, 범죄, 타락을 용인한다. 그것은 사유재산제도의 속성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소위 '시장경제적 생산 및 생활양식'을 미처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사회주의적 인간, 사회윤리와 도덕성이 그렇게도 쉽게 무너지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기심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인식에 소름이 끼친다.>
선생께서 추구하였던 것은 휴머니즘이었지 마르크스나 레닌주의는 아니었습니다.
선생의 고뇌, 함께 그 너머 보아요.
끊임없이 사부작 사부작하는 인류.
끊임없는 자각 (self awareness).
끊임없는 모색.
끊임없는 개선.
과학은 혁명일지언정 인간성은 진화입니다.
우리 비니미니의 세상은 지금보다 한결 좋을 것이라는 확신이 내게는 있습니다.
-독서 리뷰-
<착한 여자>
-공지영 作-
***동우***
2018.03.19 00:22
공지영(1963~ )의 장편소설 '착한 여자'
텍스트 파일 눈에 띄길래 얼른 업어왔습니다.
파일의 글들이 어지러워 교열(校?)해 가면서 15여회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이 책, 요즘 새로 출간되어 신문광고 큼직하더군요.
책에 대한 도리가 아닌지라 <R/B>의 매회분(每回分)은 이틀 공개 후에는 지우겠습니다.
全文은 친구공개 카테고리 <리딩북>에 옮겨 놓고.
나 또한 처음 읽는 소설입니다.
함께 읽어요.
***동우***
2018.03.20 00:16
동서고금, 왜 그런지 착한 여자의 삶은 대체로 슬픕디다.
오정인.
공지영은 도입부부터 한 여자 운명의 비극적 예감을 놀처럼 붉은 색감으로 물들이는군요.
***동우***
2018.03.21 00:23
교열하면서 나도 한회씩 읽고 있습니다.
어렴풋 만져지는 복선들...
사랑에 빠져버리는 오정인.
현준과 명수...
삶을 기만하고 어둠을 예감하더라도 속절없이 영혼을 혼미케 하는 저 파토스...
아, 여자여.
사랑이 무엇이관대.
오정인이라는 한 여자를 묘파하는 공지영의 섬세한 필치, 시나브로 빠져듭니다.
***동우***
2018.03.22 00:35
-인터넷에서 주어 온 글-
++++
여자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공지영의 문제 제기. 『착한 여자』는 7?년대, 뿌리 뽑히지 않은 봉건 사회의 제도 속에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불합리들에 대해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오정인의 굴곡진 인생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1997년 처음 선보인 이 작품은 시대의 무게에 눌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성의 현실, 누구나와 같이 행복을 꿈꿨지만 불행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인물의 이야기를 담아내며 그들의 상처를 가만히 보듬어 안는다. 주인공 오정인은 세상의 모든 불행을 혼자 짊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늘 불우하고 불행했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를 견디지 못해 결국 자살을 택하는 정인의 어머니.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정인은 어머니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려, 결코 불행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몸과 마음에 남은 수많은 생채기뿐이었다. 공지영은 특유의 섬세한 심리묘사로 주인공 정인의 삶을 조명하며, 착하고 상처 받기 쉬운 정인이 진정한 삶을 깨달아가기까지의 인생 역경을 그려낸다. 사랑의 갈림길에서 매번 행복할 수 없는 선택을 했던 정인은 자신의 사랑을 '거래'였다 말하고,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착한 여자'라 불렀다고 말한다. 작가는 '착한 여자'가 품고 있는 역설을 바탕으로 가슴 저릿한 연민을 느끼게 하며, 이를 통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따뜻한 격려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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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8.03.23 00:08
++++
<내 소설속의 사랑>
-공지영-
이 원고를 쓰기 위해 내 소설들을 이리저리 들추어 보다가 나는 문득 멈추어 섰다.
내 소설 속의 사랑들은, 비단 ‘착한 여자’뿐 아니라 내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 서로 사랑하고 입 맞추고 상처주며 이별했던 그들은 희한하게도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연인이기 이전에 모두 오랜 친구이고 동지였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지속되어오던 통증에 대해 처음으로 병명(病名)을 부여받은 것처럼 잠시 아뜩했다. 매일 장난삼아 구박하던 친구를 실은 몹시 사랑해왔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부끄럽고 겸연쩍기도 했다. 누가 볼까-볼 사람도 없는데-헛기침을 하고 좁은 서재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팔짱을 끼고 상기된 뺨을 만져보면서 가끔은 웃기도 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도 그런 기분이 든다.
착한 여자는 한 일간지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사적으로 말하면 최소한, 이제까지의 내 인생에서는 그때가 제일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죽으려고 했지만 약속 때문에 날마다 글을 쓰고 있었으니까. 죽어도 일간지 연재는 끝내고 죽어야 했다. 계약금도 받아 놓았는데 내가 죽는다면 나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눈매 선한 담당기자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어쨌든 죽을 힘을 다해 원고를 이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 정말 사랑이 있는지 묻고 싶었고, 진정한 사랑은 가능한지, 밤을 새워서라도 공부하고 싶었다. 공부해서 알 일은 아니라는 걸 그때도 알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하는 수 없었다.
나는 심리학 책과 여성과 남성에 관한 책을 쌓아놓고 밤새워 밑줄을 쳐가면서, 죽는 거보단 이거라도 읽는 게 좀 낫지 않을까, 뭐라도 남는 건 있겠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읽어댔다.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그랬다.
아마 그때 읽은 책으로 변변치 못한 석사 논문은 하나 쓸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웃는 때도 많다.
그렇게 힘겹게 공부하며 글을 쓰고 있는데 한번은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게 되었다. 친구는 나의 근황을 묻고 신문에 연재되는 내 소설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더니 헤어지면서 문득 그랬다.
“야, 그런데 걔네들 이제 고만 좀 재우면 안되니.”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인사동 네 길거리에서 우리는 배를 잡고 웃었다. 친구의 말은 그 주인공들이 왜 그렇게 첫 동침을 하는 게 어렵냐는 이야기였다. 때는 1990년대 중반, 남녀가 동침하는 것이 적어도 소설 속에서는 별 일도 아닌 시대에 내가 3개월 이상을 그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어 가는가를 일일이 설명, 아니 변명하고 있던 셈이었다(그래도 내 고집은 여전히 세서 그들은 그 이후로 연재하는 시간으로 한 달이 더 지난 후 동침하게 된다).
다른 이야기 같지만 얼마 전 어떤 방송국에서 나를 찾아왔다. 미국의 베스트 셀러 소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관한 프로라고 하면서 그 마지막에 프란체스카란 주인공이 남자를 따라가는 게 좋을까요 아닐까요, 물었다. 뭐 문학에 대한 질문을 한다고 하기에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는데 맥이 탁 풀렸다. 카메라도 비추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대답했다.
“아니, 처음 만난 남자랑 어떻게 잠을 자요…. 강도면 어떻게 하고 변태면 어떻게 해! 어떻게 그 사람이 누군지, 무얼 하는지 무슨 꿈을 꾸는지,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알지도 못하고 사랑할 수 있어요… 게다가 나흘 동안 같이 지낸 남자를 어떻게 따라가요? 그 담에 그 자동차 휘발유 값은 누가 내고, 모텔 값은 누가 내지요? 그러다 그 남자가 맘이 변해서 아줌마 그만 집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하면 어떻게 해요? 난 옛날부터 그 소설 맘에 안 들었어요.”
기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점잖은 목소리로 “예, 저는 그런 사람들 따라가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하고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기자는 “선생님 생각보다 참 보수적이시네요”라고 했다. 나는 또 내가 얼마나 보수적이 아닌가 변명하느라 30분쯤을 흘려보내고 싶었지만 설마 낯선 남자 따라가는 걸 진보라고 여기지는 않겠지 싶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랑은 번갯불 같은 눈 마주침으로도 온다고도 한다. 단 하룻밤 인연으로 10년을 기다리는 이야기도 많다. 그것은 그것대로 아름답고 또 설레지만 내게는 오직 꿈과 같은 이야기일 뿐, 게다가 그런 사랑을 꿈꾸거나 동경조차 하지 않으니, 내가 못하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걸 금쪽 같은 내 소설 속의 주인공들에게 차마 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처음 이 글을 청탁받았을 때 나는 왜 ‘착한 여자’의 명수와 정인을 떠올렸을까하고. 여주인공 정인은 비장한 사랑관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온 생애를 거니까, 생(生)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것들, 자존심과 꿈과 희망과 과거의 상처들까지. 거는 여자다. 그런 정인이 매번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건 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랑하는 상대는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지 구세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안한 인간에게 구세주 역할을 하라고 하면 대개는 상대방이 먼저 질려버리니까 말이다. 그래서 명수는 정인의 사랑 대상에서 언제나 제외되어 있었다. 그 남자는 너무나 쉽고 너무나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세주가 실은 자기 식구면 싱거우니까 말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명수와 정인은 한번도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제대로 밥 한번 먹고 제대로 데이트 한번 해본 적도 없었다.
정인도 명수도 따로 따로 연애했고, 또 따로따로 결혼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의도했고 독자들이 눈 밝게 알아차린 대로 그들은 끝내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작가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소설을 시작할 때 대중 얼개를 짜놓고 시작을 하고 나면 주인공들은 끝내 제 갈 길을 간다. 한 마디로, 낳아서 키워놓은 자식들처럼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나중에는 작가인 나도 속수무책이라서 주인공들이 가는 길을 열심히 따라갈 뿐이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정인과 명수는 그만 진짜 사랑을 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뒤에 나도 뒤따라 생각해보니까 실은 나도 그런 사이를 좋아하고 있었건 거 같다. 서로 못 만나고 따로 연애하고 그런 게 좋은 게 아니라, 평생을 지켜보며 배려해 주고 걱정해 주고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달려와 주는 거….
그 사람이 누군지 잘 아는 거, 좋은 거 볼 때, 맛있는 거 먹을 때, 그 사람 여기 같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거. 그게 남편이 아니면 어떻고 애인이 아니면 어떠하며, 그 이름이 무엇이든, 여자든 남자든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일까, 하는 생각이 나이를 먹을수록 들어가는 것이었다.
얼마 전 남자 친구와 몇 년 만에 마주 앉았다. 친구는 유부남이었는데, 함께 일하는 여자에게 며칠 전 사랑을 고백 받았노라고 했다. “너 그래서 안 흔들렸니”하고 묻는 걱정스러운 내 눈길을 보고 친구가 말했다.
“지영아, 너랑 나랑 친구가 되는데 20년이 걸렸어(오해 없기를 바라고 말하자면 우리가 20년 동안 그렇게 되고자 노력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런데 남녀간의 사랑은 오늘 밤도 내일 밤도 눈 한 번 맞으면 끝나는 거잖아. 그래서 난 친구가 좋아.”
++++
***동우***
2018.03.24 00:47
현준과의 결혼, 좀 뜻밖이군요.
나는 착한 여자 정인의 아픔이 현준에게 버림받음으로 다욱 슬픈게 아닐까 예상했는데...
한 여자의 일생에서, 어쩌면 결혼이 더 큰 비극을 잉태하는 것일수도 있겠지요.
***동우***
2018.03.25 00:14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
남자 고르기.
생리주기나 남자의 몸냄새등이 교합하여 만드는 옥시톡신이라는 호르몬의 작용.
거기 맡겨둘게 아니라 앞으로는 AI에 의뢰해야 합니다.
무수한 데이터에 의하여 보다 과학적 근거에 의하여 상대를 결정하여야 합니다.
파토스가 아니라 보다 로고스적인 선택을 위하여.
공지영 역시 세번의 이혼을 하였지요.
그 경험적 심리가 엿보이기도 합니다그려. ㅎ
좋은 주말을.
***동우***
2018.03.28 08:49
(작가의 내밀한 사연을 언급하는게 옳지 않다는건 알지만) 인터넷 검색하면 손쉽게 뜨는바, 작가의 이혼 역시 남편의 폭력에 연유된 것이라고 하는군요.
페니스중심주의가 편만하였던 시절, 나의 代에서도 남편의 폭력은 드물지 않았습니다만 아내를 때리는 남자처럼 못난이가 어디 있겠어요?
정인과 현준.
여자에 비하여 집안 학력등 외관상 우월한 입장의 남자, 게다가 여자가 남자에 포옥 빠져 있었던 상황이었으니.
무슨 시혜처럼 정인에게 결혼을 허여한 현준, 그러나 그의 인격에 정인은 너무나 과분한 여자였습니다.
현준이라는 사내의 우월감과 열등감, 사랑과 미움이 복합된 미묘한 심리...
자명의 역할은?
목매 죽은 어머니와 육정의 비극으로 죽은 아내 그리고 이복동생 현준...
어떤 카르마를 은유하는 것일까요.
어쨌거나 부부는 저렇게 갈라서게 되는군요.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 되는...부부라는 관계.
한반도 정세는 거세게 요동치고 정치판은 여전히 어수선하고 미세먼지는 기승입니다만 춘삼월 봄입니다.
***동우***
2018.03.30 00:32
착한 여자 오정인.
냉소주의 에고이스트 현준에게서 벗어났다 싶었더니 이번에는 또 남호영이라는 지지리 궁상을 만나는군요.
엄마에게 버림받은 내면아이의 트라우마, 일종의 정신병리적인 의존성기질의 남자.
여자의 연민에 기대어 살아가는, 또한 버림받기 전에 먼저 도망가 버리는 남자....
명수 역시 내면아이의 어린 시절 아름다운 트라우마(?ㅎㅎ)로 끊임없이 정인을 연민하는 것일테지요만.
***동우***
2018.03.30 23:20
이 소설의 프롤로그, 비오는 날 정인이 찾아갔던 게 바로 남호영 저 놈이었군요.
<"우린 이제 그만 만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빗물 젖은 길바닥의 그녀를 팽개치고 택시로 휭 달아난 녀석,
지지리궁상 못난이에다 잔인하기까지 한 녀석.
단칸 셋방에 돌아 온 정인은 자신의 손목을 그었지요.
<사랑해 보지 않은 자는 상처입지 않는 것이니, 상처는 사랑의 어두운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니다. 사랑은 사람을 상처입히지 않는다. 사랑은 아이를 크게 하듯 사람을 자라게 하고 사랑만이 사람을 성숙시켜 익어가게 한다. 상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 아닌 것들로부터 온다. 그러니 상처는, 사랑이 아닌데도 내가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들 혹은 사랑할 때 함께 올 수밖에 없는 나와 타인의 잘못들,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의 종장, 순비극으로 끝나지 않을듯한 기미가 느껴져 다행입니다.
***동우***
2018.04.02 00:23
<그건 사랑이 아니었어요. 그건 거래였다는 말이지요. 그랬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그건 거래였고 그건 흥정이었다. 아마 때로는 몸뚱이의 절규였고 애절한 호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건 사랑이 아니고 그건 흥정이며 아니 때로는 몸뚱이의 절규였고 호소였겠지만, 그래서 사랑이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 그건 사랑이었다.>
아, 세상 뭇 그 사랑 사랑 사랑들이여, 사랑이 무엇이관대 목을 매는가.
<하지만 인혜는 지금 걱정하고 있는 그 마음을 미쳤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 세상에 한마디로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지르기 전에 막을 수 있는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막으려고 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식어버릴 그 사랑 하나 때문에 그 많은 걸 바쳤느냐고 물을 수도 없다. 죽을 줄 알면서도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
작가는 세번의 이혼과 성이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면서 여성으로서의 어떤 자각이 확고하게 자리잡았을겁니다.
공지영의 페미니즘은 말합니다.
"여성 제위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리딩북, 공지영의 '착한 여자'는 내일 마지막 분이 되겠네요.
***동우***
2018.04.03 04:31
여자팔자 뒤웅박팔자.
남자가 채워놓은 뒤웅박의 내용물에 따라 널을 뛰는 여자사람의 팔자.
많은 경우 어찌하여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의 세상이어야 하는가라는 슬프도록 부당한 명제.
작금의 현실, 미투(Me Too)에서도 여실해 보입니다.
<남자들이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왜 그렇게 여자들을 지배하고 싶어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그들은 두려웠던 거야, 생명의 열쇠는 여자에게 있으니까. 일부일처제로 묶어 놓고 자신들의 성을 붙이지 않으면 영영 모든 새생명들을 빼앗길까봐 겁이 났던 거 아닐까? 남자들이 생산할 수 있는 건 막말루다 똥하고 정액밖에 더 있니?...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여자인 어머니에게 키워지지... 생각해 보면 겁먹는 것도 당연해. 원래 겁에 질린 인간들이 난폭해지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어차피 같이 사는 세상, 우린 우리 여자들의 방법을 써야하는 거야.>
그토록 단순하고 직유적인 페니스가 무슨 근거로 오만하여야 하는지요.
그토록 심오하게 은유적인 자궁에 대하여 말입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요.
설명이 불가능한 사랑이라는 놈은 後에 곧잘 설명이 가능한 증오를 가져오곤 합니다.
잔느의 슬픈 삶(모파상), 이미자가 부른 '여자의 일생'
참을수가 없도록 이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때문에/ 말한마디 못하고 헤아릴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착한 여자 오정인.
그대를 보석으로 간직하고 있는 남자에게 마음을 열고 이제 행복하라, 착한 여자여.
<완전한 城에 나를 가두고 오래 된 성벽처럼 이끼 끼고 담쟁이 무성하게 오래오래 버티다가 그 안에서 홀로 고요하고 싶다는 바람...을 생각하려다가 정인은 문득 생각을 멈추었다. 누구든 그럴 수 없다고, 산다는 것은,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 같은 것, 성처럼 멈추어 우뚝한 게 아니라, 흔들리면서 가는 거라고, 다만 그 이름이 파도인 것을 잊지 않듯이, 날마다 새로 해안선을 그리며, 덜컹이면서 가는 것은 아닐까...>
내 손주 비니야 미니야.
할비 기원컨대 너희 삶, 절대로 남자의 종속변수(從屬變數)로 살아서는 아니된다.
절대로.
곁길로.
미투에 대하여..
그러나 생각건대, '미투'가 혹여 남녀 괴리를 부추기는 과도한 '페미니즘'으로 변질되는걸 염려합니다.
상대의 성(sex)을 향한 찬탄이 성희롱으로 매도되어서는 아니됩니다.
건전한 동물로 돌아가라는 D.H 로렌스. (채털리 부인의 사랑)
제인부인(자궁)은 존 토머스경(페니스)에게 헌화하고 '존 토머스경'의 위용에 감동하고 '토머스경'을 찬미하여야 합니다.
존 토머스 경은 제인부인의 숲을 꽃으로 장식하고 '제인부인'의 어여쁨에 경탄하고 '제인부인'을 찬미하여야 합니다.
엊그제 문정희 시인이 말하더군요.
<한국 사회는 남녀의 동물적 능력만 강조하는 밀림이다. 남성의 욕망은 정력제가 대표하고, 여성의 욕망은 외모지상주의에 오염됐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운동의 본질은 '남녀 상생'인데, 자칫 '남녀 혈투'로 변질될까 봐 걱정된다.>
공지영의 '착한 여자'
함께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최미경***
2018.04.03 07:30
이른 아침 눈이 떠지면 눈을 비비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착한여자를 읽는 것.
봄을 기다리듯 매일 아침이 기다려지던 나날들이었습니다.
이제 봄은 만개하여 찬연하게 빛나고 저는 내일의 리딩북을 다시 기다립니다.
매일 새벽 동우님의 노고, 동우님의 글월에 깊은 절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동우***
2018.04.04 00:44
봄은 만개하여 찬연하게 빛나고,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리딩북이라....
오, 최미경님이 바로 내 기쁨입니다.
얼굴 모르는 미지의 벗이여.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오히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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