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1.2- (1,4,3,3,1)

카지모도 2020. 1. 28.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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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前

-포리스트 카터-

 

***동우***

2017.05.11 07:54

 

'포리스트 카터 (Forrest Carter,1925~1979)'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오래전 야초님댁에서 업어온 파일인데, 많은 이들이 적극 권하는 소설입니다. (自傳이라고 해도 좋을듯)

 

대략 열몇번 쯤으로 나누어 올리겠습니다.

함께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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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포리스트 카터 (Forrest Carter)

미국 알라바마주 옥스포드에서 1925년 태어났다. 체로키 인디언의 혈통을 일부 이어받았다.

옥스포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미 해군에서 근무했으며 콜로라도 대학에서 공부했다. 작가로서 출발한 것은 48세가 되고 나서였다.

처녀작인 <텍사스로 가다>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인디언의 생활과 투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저서로 <조지 웨일즈의 복수의 길>, <우리는 영혼을 팔지 않았다> 등을 남기고 1979년 5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책에 대한 뉴멕시코 대학 출판부 발문>

포리스터 카터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원제: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포리스터 카터는 할아버지의 농장이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알라바마주 옥스포드에서 1925년 태어났다. 카터는 옥스포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해군에서 근무했으며, 콜로라도 대학에서 공부했다. 또한 그는 `텍사스로 가다`와 `조지 웨일즈의 복수의 길`, `산 위에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포리스터 카터의 삶은 네 다섯 살 때부터 체로키 인디언의 혈통을 이어받은 그의 할아버지와 불가분하게 얽혀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작은 농장과 농장 근처의 조그만 시골 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를 처음에는 `작은 싹` 이라고 부르다가 좀 더 자라고 나서부터는 `작은 나무`라고 불렀다. 포리스트 카터는 할아버지로부터, 감사를 기대하지 않고 사랑을 준다든지, 또 필요한 것 외에는 대지에서 가져가지 않는다든지 하는 체로키족의 생활철학들을 배워나가게 된다.

작은 나무는 자연이 봄을 탄생시킬 때 몰아치는 산의 폭풍을 지켜보았으며, 새들의 몸짓과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배웠고, 달이 찬 정도에 따라 어떤 작물을 심어야 하는지를 배웠다.

또한 작은 나무는 체로키족이 경험한 `눈물의 여로`에 대해서도, 그리고 정작 눈물을 흘린 사람은 왜 체로키가 아니라 길가에서 구경하던 백인들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들었다.

또 작은 나무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할아버지의 가게에 찾아오는 유대인 봇짐장수로부터 올바른 자선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배웠으며, 한 소작농으로부터는 잘못 발휘된 자존심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작은 나무는 할아버지의 용기 덕분에 죽음을 면하는 경험을 하고, 처음으로 백인 미국 사회의 잔혹성과 위선을 경험하게 된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는 체로키들이 세대를 이어오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오던 많은 가르침들, 할아버지가 작은 나무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가르침들이 녹아들어 있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완전히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소설속의 할머니는 순수 체로키이던 포리스터 카터의 고조모에 대해 집 안에서 전해져오던 모습과 어렸을때 자신에게 세익스피어를 읽어주던 저자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이 합쳐진 인물이다.

반면에 소설 속의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존인물로서 저자의 할아버지 모습과 일치하고 있다. 저자의 할아버지는 소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저자가 열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저자인 포리스터 카터는 1979년에 죽었다.

카터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그의 사후 10여년이 지나고 나서부터 점점 높아져갔다.

1976년에 처음 출판되었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얼마 안가 절판되고 말았지만, 86년 뉴멕시코 대학 출판부에서 다시 복간되자 해가 갈수록 판매 부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1991년에는 무려 17주 동안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1,2위로 기록되었다.

또 이 책은 같은 해 제 1회 에비상(American Booksellers Book of the Year)을 획득했는데, 전미 서점상 연합회가 설정한 이 의 선정기준은 서점이 판매에 가장 보람을 느낀 책이라고 한다.

-뉴멕시코 대학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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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언***

2017.05.11 12:03

 

포리스트 카터에 대해서 그저 떠도는 소문 정도가 아닌 다른 평가가 많습니다.

KKK단 이야기부터...

몇 자 적어봅니다.

 

***┗동우***

2017.05.12 00:23

 

눌언님의 언질 있어서, 이리저리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과연 '포리스트 카터'는 눌언님 말씀처럼 백인우월주의자이며 KKK단의 멤버였다더군요.

심지어 그에게는 체로키 인디언의 피가 한방울도 섞여있지 않다는 풍설도 있다고 합니다.

백인주류 미국사회의 위선과 잔혹함을 이처럼 묘파한 사람인데, 그 모순성과 그 양면성에 놀랐습니다.

진실로 그가 그러하다면 그는 위선자임에 틀림없습니다그려.

 

그렇지만 나는 작가와는 별개로 이 소설의 진실을 믿고자 합니다.

생각건대 적어도 이 소설은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를 갖고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쓸수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1976년, 그가 죽기 3년전 발표된 이 소설.

자신의 과거 행적에 대한 위장이거나 기만이거나 혹은 속죄였을런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인종차별의 행각이나 위선적 가면들을 차치하고서, 이 소설은 대단히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작가와 작품의 아름다움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닐테지요.

이 낫살 먹으니 우리 사는 세상사 사람사(人事) 그런 경우 숱하게 봅니다그려.

으흠, 그리하여 나는 작가는 잊고서 소설만을 읽고자 합니다.

 

내가 전혀 몰랐던 바를 귀뜸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눌언님.

그 때문에 이 책이 다소 껄끄러워졌더라도.

 

***눌언***

2017.05.15 16:15

 

그렇습니다, 존경하는 동우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 그 자체로 따뜻한 책임을 말씀으로 더욱 느끼게 됩니다.

작가와 작품의 아름다움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닐수도 있을거라는 말씀, 새겨 듣습니다.

언제나 동우님의 건필을 사랑하고 동우님의 건안하심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동우***

2017.05.17 03:56

 

그래요. ㅎ

고마워요 눌언님.

 

***동우***

2017.05.12 00:30

 

눌언님 지적으로 알게 되었는데, 작가 포리스트 카터는 이 소설 쓰기 훨씬 전에는 인종차별주의자이고 KKK단의 단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이중인격의 사람입니다만, 이 소설은 대단히 아름다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이 작가 말년의 후회이건 속죄이건 위선이건 기만이더라도...,

 

나는 일단 작가는 차치하고, 이소설의 소설적 진실만을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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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안도현의 추천글>

-안도현-

 

이 소설은 1930년대 미국을 휩쓸고 갔던 대공항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 주변부로 밀려난 인디언의 영혼의 싸움을 그 줄거리로 삼고 있지만, 그것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생명력이다.

이 책의 메시지는 어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다.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 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라는 말이 그것을 압축하고 있다.

인간다운 삶의 지속은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더 크고 튼튼하게 가꾸어야 하며, 그 비결은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물질주의의 거대한 급류에 휘말려 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설교' 는 한 가닥 지푸라기만도 못한 주제일 수 있다. 하찮은 들꽃 하나, 작은 나무 한 그루에 스며들어 있는 '영혼'을 그들은 믿지 않으려고 하니까.

일견 단순해 보이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생활방식은 실제로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온 교육의 결과이다. 그 단순성 속에는 자연에 대한 세밀한 배려와 이웃과 친구를 향한 따뜻한 신뢰가 깔려 있다.

그것은 이 책에서 백인중심주의를 상징하는 각종 '정치가'들을 묘사하는 대목과 잘 대조가 된다.

주인공 소년 '작은 나무'가 고아원에서 겪는 한 삽화는 경험적 지식을 폄하하는 미국의 기능주의 교육이 인간을 얼마나 왜소하게 만드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어느 날 고아원의 교사는 사슴 두 마리가 펄쩍거리며 시냇물을 건너는 사진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며 사슴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한 아이가 사슴이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고, 또 한 아이는 사슴이 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서둘러 건너려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교사가 뒤에 말한 아이의 설명이 맞다고 하자. '작은 나무'가 의의를 제기했다. 수사슴이 암사슴의 엉덩이 위로 뛰어 오른 것을 보면 이 사지는 짝짓기하는 사진이 틀림없다고, 이 대답으로 인해 '작은 나무'는 고아원의 목사에게 끌려가 호된 질책과 함께 참혹할 정도로 매를 맞게 된다. 요즘 말로 치면 풍기문란죄였다.

거짓이 진실을 때리고 압도하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일화를 보여줌으로써 작가 포리스터 카터는 이래서는 안 된다. 이제는 우리들의 삶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큰 소득이 하나 생겼다. 내 아들에게 귀가 닳도록 해 줄 말을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것을 손에 넣으면 무엇보다 먼저 이웃과 함께 나누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말로는 갈 수 없는 곳까지도 그 좋은 것이 퍼지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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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우***

2017.05.13 04:32

 

체로키인디언 할아버지는 주세(酒稅)라는걸 도무지 납득할수 없습니다.

할머니는 일부러 할아버지에게 조지 워싱턴이 인디언과 싸운 부분을 읽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그 냥반이 대단히 훌륭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런 훌륭한 사람이 머리에 총 맞지 않고서야 어찌 술에다가 세금을 매긴다는 그런 발상을 할수 있는지. (할아버지 삼촌은 노새에게 머리를 채인 뒤로 미친 짓을 하였지요.ㅎ)

 

인디언이 백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수 없는게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얼굴 흰 추장(백인)이 사고자 하는 걸 우리는 이해할수 없다. 어떻게 대지를, 공기를 사고팔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들을 소유할수 있으며, 내 것이 아닌 것을 어떻게 팔수 있는가. 자연은 물려받은게 아니라 현재 살고있는 사람들이 잠시 빌린 것일 뿐인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전에 읽었던 몇 책들이 떠올랐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라던가 시이튼의 동물기, 또는 유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대충 읽었던 거지만)...

 

그런데 이 작가가 '인종차별주의자'였고 KKK단의 간부였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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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함께 하는 기쁨>

-레나드 스트릭랜드-

 

할머니가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기거나 좋은 것을 손에 넣으면 무엇보다 먼저 이웃과 함께 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말로는 갈 수 없는 곳까지도 그 좋은 것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 라고 하시면서.

뉴멕시코 대학 출판국이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원제:The Education of Little Tree)를 재발간한 것은 할머니가 어린 손자 작은 나무에게 가르친 바로 그 내용, 즉 좋은 것을 이웃과 함께 하라는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처럼 새로운 세대들이 그때마다 다시금 발견하여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얼마 안되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익살스런 이야기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떠올렸다가는, 가슴절인 이야기에 눈시울을 붉히게도 하는 이 책은 읽는 동안에 그야말로 독자의 영혼이 따뜻하게 젖어들어가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의 저자인 포리스트 카터는 <무법자 조지 웨일즈(원제:Outlaw Josey Wales)>를 비롯하여 주목할 만한 몇가지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작품이 바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다. 당초 <할아버지와 나(Grandpa and Me)>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이 책은 동부 체로키 산속에서 조부모와 생활했던 이야기를 엮은 자전적인 회상록인 동시에, 1930년대 대공황기의 생활에 대한 감동적인 서술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인간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인간의 영혼에 호소하고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젖어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서 이 책과 인연을 맺었는지 또렷하게 기억하기 마련이다. 서점에서 발견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텔레비젼 북 쇼 <이 주의 책> 등을 보고 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인디언 거주지역에 들렀을 때 토산품 가게 한쪽 구석에서 이 책을 찾아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독자들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과의 첫만남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한번 읽고 나면 결코 읽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책이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읽고 난 독자들은 이제 그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세계를 보지 않는다.

1977년 초판이 간행되었을 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서평에 널리 오르내리며 극찬을 받았다. 뉴욕 타임즈에서부터 산악 지방의 주간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비평가들은 이 책에 나오는 인디언 소년의 영감 넘치는 자전적인 회상이 기계화와 물질주의에 억눌린 현대인에게 신선한 시야를 제공할것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먼저 청소년 문제나 “교육”문제, 인디언 문제나 인류와 지구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열렬한 최초의 독자들을 얻어갔다. 얼마 안 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다른 집단들 사이에서도 애독자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평상시에 책을 잘 안 읽는 사람들도 이 책만의 독특한 말투와 그 따뜻한 가치관에 깊이 빠져들었다.

10대 청소년들은 거의 신앙처럼 이 책을 사랑했다. 또한 나이가 더 어린 어린이들은 또 그들대로 자신들과 같은 연령의 주인공에게 강한 애착을 느꼈다.

도서관 직원은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 도서관 서가에 꽂힐 새가 없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미국 원주민의 생활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이 책이 신비하고 낭만적인 동시에, 인디언의 실제 생활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학생들에게 시달려 지친 초등학교 선생들은 이 책 덕분에 매력적인 어린 영혼들을 재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대한 독자들의 사랑이 널리 퍼지면 퍼질수록 이 책을 구하기가 힘들어져갔던 것도 사실이다.

뉴멕시코 대학 출판국의 복간으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이제 다시 독자들 가까이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독자들은 우리의 가슴을 두드리고 우리의 영혼을 교육하는, 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복간에 즈음하여

1985년 11월, 레나드 스트릭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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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後-

 

***동우***

2017.05.14 04:52

 

'이해가 곧 사랑이다'라는 명제.

개별적 이기적인 'I love you'와 집체적 통찰적인 'I kin ye'

나 따위가 영어의 語意. 語原을 궁구할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소설에서의 느낌이 그렇단 말입니다.

 

삶과 자연에 깃든 개념은 매우 단순한 것입니다.

그것을 무수하게 디파인(define)하여 난해한 것으로 만드는 人文으로 사람은 더 행복해진걸까요?

 

옛날 짜증났던 영어의 불규칙동사, 그냥 어미에다 'ed'만 붙였으면 좋을텐데하였던 기억.

언어가 줄면 개념이 줄고 개념이 줄면 인생이 단순해지고 인생이 단순해지면 사람이 행복해 지는건 아닐까하는 생각...

 

정권이 바뀌면 가장 먼저 부처(部處)의 이름이 바뀌더군요.

새정권이 추구하는 정책개념의 표상으로.

우리는 5년마다 정책적 언어가 바뀝니다.

우리나라가 저 나라 같지도 않은 엉터리 북한보다 불리한 점 있다면 딱 한가지(평생 군림하는 지도자로 인한 일관성)가 그거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게 자유민주주의의 장점일테지요.

 

'과거를 알아둬라'

백인에 의해 유린 당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슬픈 역사.

'작은 거인'이라던가 '솔저 블루', '늑대와 함께 춤을' 같은 영화에 의하여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체로키 인디언의 '눈물의 길'에 관한 기록을 番外로 올립니다.

 

***동우***

2017.05.15 05:34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신론자(理神論者)는 신이 일종의 우주적 지성이라고 보는 반면 범신론자(汎神論者)는 신을 우주 법칙의 비유적 또는 시적 동의어라고 본다는 점에서 다르다. 범신론은 매력적으로 다듬은 무신론(無神論)이다. 이신론은 물을 타서 약하게 만든 유신론(有神論)이다.>

 

범신론(汎神論)은 무신론(無神論)이다.

동의 하십니까?

 

자연 속에서 경험하는 엑스터시.

그리하여 신앙화된 초현실적 세계관.

 

인디언의 저 범신론적(汎神論的) 세계관.

생각건대, 우리에게도 낯선 것이 아닙니다

 

***동우***

2017.05.17 03:56

 

나 또한 내로라하는 술꾼.

 

영조임금 적의 금주령이라던가 근세 미국의 금주법이 그토록 삼엄하였다고 하는데 (이슬람처럼 신정일치의 나라는 그렇다치더라도) 웃기는 짜장면입니다. ㅎ

그리고 주세(酒稅)라니.

수천년 연연한 디오니서스에게 무슨 근거로 국가권력이 세금을 부과합니까?

국가의 횡포입니다.

 

금압(禁壓)이 있음으로 더욱 달콤한 쾌락.

위스키나 와인과 같이 고상틱한 술은 별로 알지 못하지만, 내 기억 속 가장 맛있었던 술은 젊어 마셨던 국제시장 좁은 골목 안 '구로집'의 밀주였습니다그려.

 

밀주 위스키를 '문샤인(moonshine)'이라고 한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빛정책(sunshine)에 빗대어 문재인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예견하여 '달빛정책, 곧 '문샤인(moonshine)'이라고 하더군요.

엊그제 북에서는 또 미사일 도발을 하였는데 '문샤인(moonshine)'의 밝기가 어떻게 되려는지요.

 

***동우***

2017.05.17 04:19

 

다민족 단일국가인 미합중국(美合衆國).

오래전 수프와 샐러드 논쟁을 기억합니다. (여러 민족이 수프처럼 용해되어있는지 샐러드처럼 따로따로 버무려져 잇는건지)

그런 민족끼리의 편파성과 더불어, 자본주의 빈부 하이라키의 갈등.

수월하게 이해할수 있는 나라는 분명 아닙니다.

 

산 속의 삶.

자연으로부터 얻은 지혜로서 살아가는 삶의 양태.

 

내 앞세대만 하여도 새 울음소리에 예언적 의미를 부여하여 길흉을 점쳤지요.

솥이 적다고 소쩍소쩍하고 우는 소쩍새, 손님이 오실까 까치소리, 까끄메는..

 

***동우***

2017.05.18 00:19

 

어느 빈터에 걸었던 꿈들.

사람이 끄는 쟁기.

땅을 파먹고 사는 이들의 인정.

그리고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수탈.

사람이 소마(牛馬)가 되어 피땀의 노동으로 일구어낸 땅을 빼앗기는 이야기는 동서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이 KKK 단의 간부였다니, 해리성 인격도 아닐터인데, 거 참.

 

산꼭대기에서의 하룻밤

산 속,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를 도시양아치들이 당할수 있나요. 어디.

영화 '나홀로 집에'서 꼬맹이 '맥컬리 컬킨'에게 판판이 골탕 먹는 '조 페시'... ㅎ

 

***동우***

2017.05.19 04:28

 

<인디언은 절대 무슨 뜻을 달거나 이유를 붙여서 선물하지 않는다. 선물을 할 때는 그냥 상대방의 눈에 띄는 장소에 놔두고 가버린다.>

 

무언가 남에게 베풀고나서 생색내거나 자랑하지 않기, 참 힘이 들지요.

특히 나와 같은 허영쟁이는. ㅎ

 

<나는 빈터를 가로질러 지름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가 윌로 존이 가는 쪽을 뒤돌아보곤 했다. 그는 절대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그는 백인문명의 언저리에 손을 댄 것이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똑바로 앞만 바라보며 성큼성큼 큰걸음으로 걸었다.>

 

채로키 '윌로 존'의 뒷모습.

타는듯 붉은 석양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점점 사라져가는 어느 거인의 실루엣..

 

백인문명의 언저리에 손을 댄 것이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시나브로 피정복자는 그렇게 정복문화에 순치(馴致)되어 갑니다.

 

아, 여름과일 수박.

속이 익었는지를 어떻게 알아보시나요?

수박 배꼽이나 껍데기 무늬의 선명도를 보던지 하는 방법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건 과도로 삼각추로 도려내어 속을 직접 확인하는 방법...(요즘 그렇게 했다간 안 익었어도 반드시 사야할테지요.)

그리고 얼음덩이에 바늘을 박아 쪼갠 얼음조각 섞어 만든 수박화채... 상상만으로도 보암직 먹음직 시원함직하였던 그 옛날. ㅎㅎ

 

***동우***

2017.05.20 04:16

 

교회의 권위, 종교의 세속화, 신앙의 효용성, 성경의 해석, 애큐매니컬...

인디언의 천진한 신앙관으로 드러나는 여러 명제들.

 

<목사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여서, 천당으로 들어가는 문의 손잡이를 자신이 쥐고 있고,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

 

무소불위한 목사의 권위, 목사직의 세습,

특히 우리나라, 예수그리스도가 삐까번쩍한 목사의 광휘로 가리워진 교회들.

 

며칠전 신문을 보니,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 부자의 징역형(집행유예)이 확정되었더군요.

'예수 믿으면 부자되고 건강하고 평안해진다'는 이른바 3박자 구원론으로 불일듯 부흥하였던 순복음교회.

 

내 고모님들도 한때 된발음으로 "믿쓥니다!."를 연호하였고 순복음 계열 국민일보에서 일하는 조카도 있습니다만. 나는 순복음교회가 왠지 '기복신앙'(심지어 무당)처럼 느껴져서 '정서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내 신앙관 역시 하비콕스의 '세속도시' 쪽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ㅎ

 

엊그제 '앤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로 만든 영화를 보았습니다.

소설에서의 감동과는 그 색감이 사뭇 달랐습니다만, 형식과 도그마를 초월한 기독교의 본질에 관한 생각을 깊게 해주는 영화였습니다.

 

생각건대, 오로지 도그마의 종교가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무엇하나 설명하고 납득시킬수 있겠는지요.

 

나카사키 소토에 마을 언덕에 앤도 슈사쿠의 글비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人間がこんなに哀しいのに 主よ 海があまりに碧いのです"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동우***

2017.05.22 00:36

 

엄마마저 죽어버린 다섯살 짜리 소년.

 

<나는 한발한발 뜰을 가로질러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가 그 긴 다리에 매달렸다. 친척들이 떼놓으려 해도 부둥켜안은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울지도 않고 고함도 지르지 않고, 오직 할아버지 다리만 꼭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한다. 친척들은 떼내려 하고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 하면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있노라니, 할아버지가 가만히 몸을 굽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놓으시고는, “그냥 내버려둬.”라고 하셨다.>

 

무식하고 고집스럽지만 체로키의 지혜와 자신만의 자긍심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 쪽으로 걸어오시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선 채 내가 개들과 함께 내려오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다. 나도 그렇게 하는 게 더 좋았다.>

 

할아버지는 다섯살짜리 손주를 결코 어린아이로 대하지 핞습니다.

강요하거나 주입하려하지 않습니다.

어엿한 한 몫의 '인간'으로 대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웨일즈 할아버지의 훈육이 스스로 보이는 행동이라면 보니 비 할머니의 훈육은 따뜻한 눈길입니다.

 

소년은 자신감과 지혜와 사랑을 심득(心得)하고 체득(體得)합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고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금방 돌아올 거예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냥 그대로 서 계셨다. 저녁 노을 속에서 그 모습은 점점 작아져갔다. 어깨를 떨군 할아버지는 몹시 늙어 보였다.>

 

다시 산으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작은나무는 필경 큰나무로 자랐을겁니다.

 

<가을은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정리할 기회를 주는, 자연이 부여한 축복의 시간이다. 이렇게 정리해나갈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했어야 했던 온갖 일들과... 하지 않고 내버려둔 온갖 일들이 떠오른다. 가을은 회상의 시간이며... 또한 후회의 계절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하지 못한 일들을 했기를 바라고... 하지 못한 말들을 말했기를 바란다...>

 

내 세월의 지금이 가을일런지 겨울일런지..

 

<할아버지는 그놈이 보통 인간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비는 다가오는 죽음을 놓고 안달하지 않았다. 나비는 자신이 할 바를 다했으니 이제 죽는 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옥수숫대 위에 앉아 태양의 마지막 온기를 쬐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비는 다가오는 죽음을 놓고 안달하지 않는다... 참 인상적인 말입니다.

 

남성합창단의 노래를 듣습니다.

sunrise sunset,...

 

2017년 5월도 저물어가는군요.

 

5월.

9년전 미니가 태어났고, 19년전 어머니가 가셨고, 40년전 아들녀석이 태어났고, 70년전 누이동생이 태어났고...

나는 일흔 노인이 되었습니다.

 

세월은 이처럼 속절없는데...

아,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내게도 있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