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최인훈 (1,4,3,3,1)

카지모도 2020. 1. 22. 21:35
728x90

-독서 리뷰-

 

[[최인훈]]

<웃음소리>

 

 

<웃음소리>

-최인훈 作-

 

***동우***

2013. 03. 25

 

1966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웃음소리'

이 나라 지식인의 소설이라고 회자(膾炙)되는 '광장'을 쓴 최인훈(1936~ )의 단편소설.

 

관념의 형상화라 할까, 그의 소설은 좀 어렵다.

 

실연의 아픔.. 죽기로 결심한 바(bar)의 여급.. 주변을 정리하고 향한 온천지.. 자살장소로 점찍어 놓은 산 속 호젓한 장소.. 그런데 거기에는 이미 선객(先客)이 있었다.. 남자를 팔베개하고 마주보고 누운 다정한 아베크 한쌍..여자의 행복한 웃음소리..

 

그들은 벌써 며칠 전 정사(情死)한 한쌍의 시체였다.

 

자살을 결심한 여인의 심리적 환상이거나 내면적 풍경화..

자살을 꿈꾸었나, 사랑을 꿈꾸었나.

 

추상화...

웃음소리.

사랑, 그 기억의 허망함.

 

아, 죽음의 까닭이란 그런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웃음소리.

깨달음의 소리.

스스로 치유(治癒)하는 성숙의 소리....

 

***teapot***

2013. 03. 26

 

진짜 어렵네요. 내용이야 그렇다 치지만 뜻하는 의도를 잘 모르겠네요.

정작 그녀가 원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란 뜻인가 봅니다.

아무튼 이리 계획해서 죽으려는 사람은 정말로 죽고 싶은 사람인 것 같아요.

자살이란 대개 일시적 충동에서 일어나는 일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나라가 세계 자살 순위 제1 이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다면서요?

 

***동우***

2013. 03. 27

 

어렵다 하시지만 이 소설, 티팟님이 정확하게 보아 주신것 같습니다.

정작 그녀가 원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그런가 봐요, OECD 국가중 자살율 1위.

특히 나는 아이들 스스로 목슴 버리는 그것, 말할수 없이 안타까워요.

그 자살에 대한 책임은 분명히 사회가 져야 합니다.

 

 

<광장>

-최인훈 作-

 

***동우***

2013.11.08 04:42

 

유명한 소설.

최인훈(1936~ )의 '광장'을 4번에 나누어 올립니다.

 

남과 북.

제3의 이데올로기를 찾지 못한 주인공 이명훈은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1960년 발표된 이래 작가에 의하여 여러번 개작된 굉장히(?) 지적(知的)인 소설이지요.

최인훈이 다시 '광장'을 쓴다면 어떻게 쓸런지?

'열린 사회'(칼 포퍼)의 철두철미한 적(敵)인 작금의 저 북한을...

 

우리나라 지식인이라면 필독서로 회자(膾炙)되는 소설인데, 창피하게도 본격적으로 읽은 기억 없습니다. (지식인이 아닌지라..ㅎ)

이 기회에 나도 정독하렵니다.

함께 읽어요.

 

***홍애(虹厓)***

2013.11.08 11:38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것인데요,

제가 같이 하는 번역 모임에 한국책을 읽는 분들이 계셔요.

그 분들께 동우님 블로그의 리빙북을 알려 주면 딱 맞겠다...

카톡처럼 라인으로 연락하는 거 그룹으로 하고 있으니까

알려 드릴게요.

어렵다 하시겠지만..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왜 여직꺽 그 머리가 안 돌아갔는지 지금에야 공부하는 방법이 생각나네요

 

***동우***

2013.11.09 05:37

 

홍애님의 번역모임과 은비님의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관람후 소개 때문인지 어제 내 블로그의 방문자와 페이지뷰는 기록을 세웠어요. (400에 육박하는 방문자와 1200여 페이지뷰- 평소의 거의 2배랍니다)

과연 영향력있는 홍애님과 은비님 입김빨은 쎕니다그려.

더욱 신중한 선책(選冊)과 포스팅에 정성들여야겠다는 다짐을.ㅎ

 

이번에 정독하는 겁니다만, 최인훈의 광장.

이데올로기, 신념...

실은 홍애님 번역하여 올리시는 '서승'님의 '옥중 19년'의 그 색감을 읽고서 '광장'을 찾아읽고 포스팅하는 겁니다.

서술과 서사가 난삽(難澁)한 느낌 없지 않지만 작금의 시대에도 작가의 사유와 성찰은 액추어리티의 빛을 잃지 않는. 과연 필독의 수작입니다.

광장과 밀실의 은유를 나는 완벽하게 공감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홍애님의 '옥중19년'의 영향으로 그제부터 '서승'님의 동생 '서준식'님의 '옥중서한'을 빌려다 읽고 있는 중이랍니다.

슬픈 시대를 온몸으로 견뎌낸 저 형제들,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인간적 체취와 가족의 소중함에 또한 감동합니다.

1971년부터 1988년 까지의 17년간의 옥중생활, 분량(글쓰는)과 검열을 염두에 두고 쓴 방대한 서한들(골라 실은것만 800페이지가 넘습니다)은 모두 부모와 형제와 고종사촌과 이종사촌에게 쓴 편지들...

1970년대 이후 완벽하게 사상전향을 거부하고 독재의 감옥에서 나온 최초의 장기수, 서준식.

그의 이데올로기는 틀림없는 좌익이지만 그러나 그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체제내화'였습니다.

 

<참다운 래디컬은 체제내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참다운 래디컬은 '민족'이나 '정치'를 넘어선 지점에 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잠시 조성윤교수님을 떠올렸지요.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에서 어렴풋)

민족이라는 집단사고의 함정.

국가주의와 개인 인격의 압살,'체제내화'의 나라, 북한이라는 나라를 그는 결코 긍정하지 않더군요.

 

<나의 17년 감옥살이 후반부는 피를 말리는 고뇌로 점철되어 있었다. 세상과 인간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강한 느낌이 나의 가슴 깊이 박혀 옴에 따라 분명히 자각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20대 초반에 큰 감동으로 학습했고 나의 삶의지주가 되어 온 사회과학 이론이 나에게는 만능의 처방전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의 처절한 고뇌와 멜랑콜리가 시작되었다, '도식'과 집단적 정열에 몸을 내맡기는 아의 안일한 '진보'의 계절은 떠나버리고, 현실의 복잡함을 리얼하게 직시하면서도 '진보' 편에 확고히 서야 하는 고난의 길이 서서히 눈 앞에 열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생'에의 정령이오, 금욕의 아픔이었다.>

 

홍애님을 떠올린 부분.

 

이 방대한 옥중서한집을 일본어로 번역한 이가 있습니다.

일본인 니시무라 마고토씨 부부.

 

<니시무라 씨가 3~4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어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할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중략.... 이 책의 번역은 번역이 아니라 '복원작업'을 의미했다. 니시무라씨는 흡사 금석학자가 글자 하나하나를 추리하면서 고문서를 복원시키는 듯한 무서운 집념을 가지고 이 작업을 해냈다>

 

이를테면 홍애님.

애정이 목표가 되어 집념을 만들고 그 집념이 훌륭한 번역을 이루는가 봅니다.

홍애님께 이 말을 들려드리고 싶어요.

 

'옥중 19년'은 한국어판은 읽지 않습니다.

그 책만은 홍애님의 번역본으로 읽겠습니다.

 

옥중19년...광장...옥중서한.

연이어 홍애님이 내게 읽게 하는 것이랍니다.

 

이 댓글 복사하여 홍애님 어제 포스팅한 옥중19년 '서울 구치소 병동2호실'에 댓글로 답니다.

 

註 : '서승'의 '옥중 19년'은 아래 블로그 '바느질하는 오후'에서 연재 중입니다. 좌우를 불문코 일독을 권합니다 **

http://blog.daum.net/nm-dal

 

***홍애(虹厓)***

2013.11.10 05:51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하는 옛날 영화를 보는 듯이

심각한 얼굴이긴 한데, 저게 어느 적 이야기인가 하게 되는 장면

이번 글의 배경은 배전에서 이전 기억으로 넘어오면서 흑백영화에 나왔던 댄스파티에 뭐에.... 그러다가 이걸 건집니다. 그런데 이 글은 오늘날의 한국자본주의 사회.

미리 그걸 알고 그려낸 것 같습니다.

한국에 당도한 자본주의가 어떻게 되어갈지 예민한 작가에겐 보였던 걸까요?

 

인간은 그 자신의 밀실에서만은 살 수 없어요. 그는 광장과 이어져 있어요. 정치는 인간의 광장 가운데서두 제일 거친 곳이 아닌가요? 외국 같은 덴 기독교가 뭐니 뭐니 해도 정치의 밑바닥을 흐르는 맑은 물 같은 몫을 하잖아요? 정치의 오물과 찌꺼기가 아무리 쏟아져도 다 삼키고 다 실어 가버리거든요. 도시로 치면 서양의 정치 사회는 하수도 시설이 잘 돼 있단 말이예요. 사람이 똥오줌을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정치에도 똥과 오줌은 할 수 없지요. 거기까지는 좋아요, 허지만 하수도와 청소차를 마련해야 하지 않아요? 한국 정치의 광장에는 똥오줌에 쓰레기만 더미로 쌓였어요. 모두의 것이어야 할 꽃을 꺾어다 저희 집 꽃병에 꽂구, 분수 꼭지를 뽑아다 저희 집 변소에 차려 놓구, 페이브먼트를 파 날라다가는 저희 집 부엌 바닥을 깔구.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착한 길 가던 사람이 그걸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도둑놈한테서 몫을 타는 것이지요. 그는 그 몫으로 정조를 사고,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칼을 품고 광장으로 나옵니다. 일거리가 기다리고 있으니깐요. 그렇게 해서 빼앗기고 피 흘린 스산한 광장에 검은 해가 떴다가는 핏빛으로 물들어 빌딩 너머로 떨어져 갑니다. 추악한 밤의 광장. 탐욕과 배신과 살인의 광장. 이게 한국 정치의 광장이 아닙니까? 선량한 시민은 오히려 문에 자물쇠를 잠그고 창을 닫고 있어요.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시장으로 가는 때만 할 수 없이 그는 자기 방문을 엽니다. 한 줌 쌀과 한 포기 시래기를 사기 위해서. 시장, 그건 경제의 광장입니다. 경제의 광장에는 도둑 물건이 넘치고 있습니다. 모조리 도둑질한 물건. 안 놓겠다고 앙탈하는 말라빠진 손목을 도끼로 쳐 떼어 버리고, 빼앗아 온 감자 한 자루가 거기 있습니다. 피 묻은 배추가 거기 있습니다. 정액으로 더럽혀지고 찢긴, 강간당한 여자의 몸뚱이에서 벗겨 온 드레스가 거기 걸려 있습니다. 한푼 두푼 모아서 가계가 늘어 가는 그런 얘기는 벌써 통하지 않아요. 바늘 끝만한 양심을 지키면서 탐욕과 조절을 꾀하자는 자본주의의 교활한 윤리조차도 없습니다. 파는 사람이 사는 사람을 을러 댑니다. 한국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돕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꺼?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또 그곳에서는 아편꽃 기르기가 한창입니다. 개처럼 욕정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워 주는 개인 지도와 좀 대중적인 강습소와 이 두 가지 층이 있습니다. 정치의 광장에서는 서로 으르렁거리던 사람들이 뒷골목에 차려진 작은 지붕 달린 광장들, 바와 카바레에서는 공범자처럼 술을 권합니다. 부정하게 얻은 돈이 마구 뿌려지고, 문간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비굴한 예술가의 낯짝에 지폐 뭉치가 뿌려집니다. 발레리나들은 스커트를 한 번씩 들어 줄 때마다 지폐 한 장씩 다투어 가며 주워 모아서는 핸드백에 소중히 간직합니다. 그 핸드백의 무게가 그녀들의 명성의 바로미터이지요. 할 수 없어요. 그녀들의 연습장은 당수협회에서 뺏어 버렸으니깐. 저 빛무리 눈부신 화랑들의 무술 말이에요.

시인들은 알아볼 수 있는 막끝까지 말을 두들겨 패서 사디즘 충동을 카타르시스합니다. 그들은 가난 하니까 진짜 대상, 여자를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들은, 아니 자네가 정말 카프카와 똑같은 겪음을 했단 말이야? 거짓말 말아, 저놈은 가짭니다. 이런 식으로 국산 카프카를 엉망진창이 되게끔 두들겨 팹니다. 비평가란, 자기만은 박래품이라는 망상에 걸린 불쌍한 미치광이의 별명이지요. 이런 광장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뿐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뿐입니다.

 

***동우***

2013.11.12 04:35

 

홍애님.

이 소설이 1960년 4.19 직후에 씌어졌으니, 당시 경제력이나 사회안정등 모든 면에 있어서 남한은 북한에 한참 뒤져있었지요.

반공 이데올로기는 시퍼렇게 살아있었는데, 그나마 4.19로부터 이듬 5.16까지의 시기니까 이런 소설이 발표될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홍애님 인용하신 부분.

거듭 읽어보니 과연 명문입니다.

 

[시인들은 알아볼 수 있는 막끝까지 말을 두들겨 패서 사디즘 충동을 카타르시스합니다. 그들은 가난 하니까 진짜 대상, 여자를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가들은, 아니 자네가 정말 카프카와 똑같은 겪음을 했단 말이야? 거짓말 말아, 저놈은 가짭니다. 이런 식으로 국산 카프카를 엉망진창이 되게끔 두들겨 팹니다. 비평가란, 자기만은 박래품이라는 망상에 걸린 불쌍한 미치광이의 별명이지요. 이런 광장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느낌이란 불신뿐입니다. 그들이 가장 아끼는 건 자기의 방, 밀실뿐입니다.]

 

이 대목 명확하게 이해할수는 없지만, 국산 카프카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오늘 카프카 짧은 단편 하나 포스팅하였습니다.

 

홍애님 번역물 읽는 요즘 내 독서의 귀한 시간이랍니다.

홍애님의 건필을 항상 응원합니다.

 

***동우***

2013.11.12 04:24

 

이명준은 관념적인 지식인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기질은 개인주의적이고 폐쇄적이고 강박적인 듯 합니다.

느끼건대 그의 내면은 광장(廣場)보다는 밀실적(密室的)입니다.

 

작가의 입으로 서술된 그의 의식의 흐름.

그것은 강박적인 정서 심리적 모습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의 혼돈에서 비롯된 심리밭이었지만.

 

이명준이라는 문학적 캐릭터보다 작가 최인훈의 통찰적 사유가 내게는 더 부각되고 더 깊이 읽힙니다.

 

남과 북.

아버지를 북녘땅에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여읜 내게도 오죽 할 얘기 많겠습니까마는..

이런 생각은 차츰 얘기하기로 합니다.

 

***홍애(虹厓)***

2013.11.13 17:41

 

계속 함께는 못 읽었습니다.

 

광장은, 그에게는 연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돗때기 시장 같은 추잡으로 보였던 부분엔 동감.

화면으로 읽다가 지쳐, 자주 놓치고 마는데

동우님 시력과 저력에 감탄합니다 ^^

 

오늘 저는 겨우겨우... 손에서 자꾸 빠져나가던 무라카미 소설을 마쳤습니다 ^^

모레는 병원

글피는 5박 6일로 나가사키에 연구조사 하는 거 따라 가니

연재 안 올라오면 그런가 알아 주세요 ^^

 

***동우***

2013.11.14 05:40

 

역시 가공할 독서력을 지니신 홍애님.

어느새 무라카미 하루키 '색깔없는 다자키 쯔쿠루와 그의 순례여행'을 독파하셨군요.

일본어 원서로.

포스팅하신 제목만 보았는데 좀 있다 읽으려 합니다만, 기인 제목만큼 유장한 맛이 있었을런지.

유장함과는 거리가 먼 하루키이지만. ㅎㅎ

 

번역 연재.

잊지만 말아주십시오.

'옥중 19년'과 '나를 닮은 사람' 열독하는 독자 곁에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