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오발탄>
-이범선 作-
***동우***
2013.03.05 07:00
이범선(1920∼1982)의 '오발탄'은 1961년 제5회 동인 문학상 수상작.
유현목이 영화(김진규,최무룡,문정숙등 출연)로 만들어 그 어두운 화면과 더불어 당시 센세이널한 반응을 불러 일으킨 소설이다.
50년대 戰後의 비참한 현실.
영호의 말처럼, 저 암울한 상황에서 양심 도덕따위 무슨 아랑곳일까.
오발탄..
방향잃은 허무주의.
기회주의 수완가 '꺼삐딴 리'에 대응하는 인물, 무능해 빠진 家長의 전형으로 '철호'라는 인물을 얘기하려 포스팅하였는데, 다시 읽어 보니 사뭇 다르게 읽히는 바 있다.
1950년대, 전후의 비참한 혼란상과 인간적 양심의 비애랄까하는 주제는 여일하게 읽혀지지만, 그러나 사회적 부조리의 모습은 별로 만져지지 않는구나.
절대적 궁핍으로 인한 절대적 비극만이 더욱 부각되어 읽힌다.
동생 영호의 말대로 철호가 양심과 도덕률을 버리고 나선다 한들 저 상황을 극복할수 있었을까.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한 것 인줄은 알겠는데, 아 도무지 그 시절 세상 어디 비빌 언덕이나 있었어야지.
당시 이 나라에 편만한 궁핍. (남한의 GNP는 북한에 한참이나 못미쳤었다)
도대체가 나라(國)의 상(床)에 차려진 파이 자체가 너무나 너무나 빈약하였다.
저와 같은 나라가 선택해야 할 방향은 어디 있어야 했을까.
생각건대, 1961년 검은안경 낀 자그마한 사나이가 나타나 외쳤던 '잘 살아보세'는 옳았던 것이다.
북녘땅을 떠올려 보라.
고난의 행군이라니.
옥쇄(玉碎)를 하려면 저희끼리나 할 내기지.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념이 무엇이관대 주체탑만 부둥켜 안은채 인민들을 굶어 죽게 하는가.
시대사적 정의로움, 역사적 정당성운운..
굶주려 무더기로 송장나는 판에.
이념이라고라?
엿이나 먹어라.
같은 문화 같은 말을 쓰는 이 땅 한반도 연연한 동포들.
해골처럼 여윈채 숨을 거두고, 꽃제비가 되어 엄동을 떠돌고, 뙤놈에게 가랑이를 유린 당하는 생명들이 내 새끼들이라 생각하면 살이 떨린다.
따지고 보면, 인류사도 진화(進化)의 역정에 다름 아니다.
자연선택이고 자연도태이다.
삶이란 정의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다.
이념이 근거하는 바도 그것이어야 한다.
나는 기꺼이 '네오콘'이련다.
늘 그렇습니다만, 또 엉뚱하였습니다. ㅎ
***teapot***
2013.03.06 08:43
동우님, 동감합니다.
철호하고 캡튼 리는 특성이 다르네요~
많이 답답한데 웃기는 소설 부탁합니당~~ㅋ
***동우***
2013.03.08 05:57
티팟님댁 엿보아하니.
몸뚱이 똘똘 감아 웅크린 오브젝트 남성을 그리신 스케치도 멋지고, 더구나 캘리포니아의 봄도 화사하던데.
어디가 답답하실까. 티팟님은.
좀 전에 포스팅한 잉여인간도 그닥 유쾌한 소설은 아니었고.
티팟님 말씀듣고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려니 기실 유쾌한 소설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문학은 본시 비극을 사랑하는가 봅니다.
우리 티팟님 웃으시게, 상쾌한 소설 한편 찾아 보겠습니다만.. ㅎ
***teapot***
2013.03.08 16:03
철호때문에 답답하지요 지지리도 못 사는게.....
못사는게 죄는 아니지만 여간 불편한게 아닌것 같아서....
오늘은 늦었으니(핵교 다녀 왔어요) 이만 자고 내일 다음 소설 읽으러 오겠읍니다.
굳나잇
***동우***
2013.03.09 05:44
아이들의 궁핍은 부모의 죄라고 은비님이 말씀하셨지요.
궁핍이란 불편함을 넘어선 목숨의 부자유함입니다.
티팟님.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김훈->
나는 북한을 다스린다는 저 집단이 밥 앞에서 똑 어리광과 주접을 떠는듯 느껴집니다. 하
켈리포니아는 지금쯤 한밤중.
깊은 잠 빠진 티팟님께 굳나잇하기는 그렇고. 굿바이.
***베로니카***
2013.03.09 23:08
댓글들 주욱 보면서 웃습니다
이방에오면 뭘 골라 읽어보지?
방대한 작품들.
그걸 다 읽다보면 문학이 딸린 골빈 머리가 잠시 탄로난다는 느낌입니다
찌들대로 찌든 돌머리... ㅋㅋ
용케도 흙만 만지면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참 다행이지요?
돌아갈 제위치를 그건만은 확실하게 안다는 일입니다
생명의 움트림속에 잠시 경이로움과 감탄을 연발하면서 오늘도 편하게 쉬십시요 ..동우님의 난해한 머리님을요 ^*^
***동우***
2013.03.10 05:17
하하, 베로니카님.
골빈 어쩌구....자폄이 너무 십하십니다그려.
흙만 만지면 자연으로 돌아갈수 있는 그것 하나로 베로니카님은 나보다는 백배로 복된 삶을 누리시는 분이랍니다.
이제 봄이 오면 더욱 행복하실 베로니카님.
지난 연휴때 내 딸아이 내외 비니미니 데리고 며칠동안 곡성 전주등 나들이 하고 왔지요.
전주의 한옥마을이나 인심등.. 그런 상찬 있었지만 무엇보다 음식 찬사 낭자하더군요.
성미당의 비빔밥은 어른 입맛을 황홀하게 하였고 그 집 떡국은 비니미니를 행복하게 하였다지요.
전주가맥(처음 들어보는 가게맥주)인가.. 전일수퍼의 황태구이.. 영동수퍼의 닭발구이 (댓글에다 사진 올릴수 있다면 우리 미니 닭발 뜯는 게걸스런 모습 올릴텐데. ㅎㅎ)..
전주 가는줄 알았다면 베로니카님의 하록당을 가보라하였을 껄. ㅎ
***베로니카***
2013.03.10 10:13
따님이 다녀가셨군요
근데 한옥마을에 비까뻔쩍한 한옥들을 엄청 지금 짓고있답니다
한옥마을에 손님들이 몰린다 소문나니 서울 돈있는사람들이 너도나도 난리랍니다
땅값은 하늘을 치솟고..
전 평상에 앉아 가만 생각합니다..
아유 이런 누추한집에서 어케 장사하누
대단한 용기랍니다
첨엔 전 이 업을 하려는 생각도 못했지요
집이 특히 작은 마당에 필이 꽂혀 죽어라 무리하여 샀지요
앞마당과 옆마당에 작은 화단을 만들어서 남원 우리 뜰에서 야생화와 나무도 옮겨심으니 그리 좋았어요
시부모님모시고 사는 전 숨쉴 공간이 필요했어요
전주에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후배가 이집을 잘 리모델링해서 민박으로 하고 있었어요
이걸 사느라 그동안 모은 비자금. 도망갈 자금을 다아 털었지요
아주 작고 소박하고 안엔 석가래가 살아있어 전 좋았지요
내로라한 요즘식 한옥을 뒤로하고 주로 외국인들은 참 좋아해주시지요
특히 일본분들은 소박하고 작은것들을 좋아하더군요
텃밭에서 가지 고추 못생긴 코마코 오이를 가지고와서 나눠드리면 그리 좋아해요
금 토 일요일 일을 하며 여기서 살지요
한옥마을 먹거리가 참 많습니다
닭발... 아유 침이 돋네
동우님 말씀 되려 저가 적어놨어요
서울에서 남원으로 시집 온 저는 전주는 잘 몰라요
그런데 서울 인사동이나 북촌 남산한옥 마을보다 좀 아기자기한 따스한 사람냄새가 나는 것 같아 좋아요
근데 이젠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오면 여기도 변하겠지요
지금도 카페가 더 많아지고 상업화가 되어가고 있답니다
그래도 먹는데는 잘 아는가했는데 저도 못가본 곳이 많군요
성미당도 맛나지만 가족회관은 그 할머니 솜씨는 대단하세요
그러고 황태구이 아고야 닭발 어딘지 알아가지고 제가 먹으러 가야겠어요
동우님도 은제 놀러오시와요
***동우***
2013.03.12 05:22
베로니카님.
서울아씨의 남도땅 살이.
그리고 남원과 전주.
대비되는듯 하면서 무언가 바라이어티한 활력이 느껴지는 삶.
그림도 그리시고.
타향살이 애환없을까마는 일단 멋지고, 그리하여 부럽습니다.ㅎ
돈되는 곳 사람 몰리고 사람 몰리니 땅값 치솟고.
전주 역시 사람몰리는 대도시인데, 어련할라구요.
그래도 전주라면 고풍서린 고아한 고장이라는 느낌없지 않은데, 이곳 부산처럼 상전벽해는 말아주었으면 합니다.
남원 땅은 모쪼록 파헤치지 말고.
어쨌거나 베로니카님은 멋진 삶을 영위하시는 분.
하록당도 그렇거니와 그림도, 가꾸시는 푸른 것들도, 함께 뒹구는 깨순이도 ...
으흠, 부러울 따름올시다.
-독서 리뷰-
[[이범선]]
<살모사> <고장난 문> <피해자>
<살모사>
-이범선 作-
***동우***
2014.05.20 04:12
살아오는 동안 극명하게 악(惡)으로 분류될만한 사람을 몇이나 만났을까.
그런데 '그 놈이야말로 惡人이었다'고 지적하여 쏘옥 끄집어 낼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 둘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인물 없지 않은듯도)
그러고보니 내 살아온 역정이란 컨트라스틱한 드라마와는 거리가 먼 두루뭉실 어영부영한 그런 것임이 틀림없으렷다.
내게 부정적인 인상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악(惡)이라는 단어보다는, 거개가 추(醜)라던가 교(驕)라던가 교(狡)라던가 폭(暴)이라던가 계(計)라던가 사(詐)와 같이 일견 치사한 연민성 어휘와 더불어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순수악(純粹惡)이 아닌 것이다.
이범선 (1920~1981)의 '살모사' (살모사가 실은 殺母하는 뱀이 아니라던데)
생부와 생모를 가차없이 살해하는, 저 惡도 역시 순수하지 아니하다.
느끼건대, 교(狡)와 계(計)가 들어있다.
한니발 헥터, 하스미 세이지...쯤 되어야 순수악을 표방할수 있을라나.
영화나 소설 속의 純粹惡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일법 하다.
그런데, 넌픽션으로 출몰하는 현실 속의 저 악은 어이 할꺼나.
불순물(평범성) 가득 섞인 저 비순수 악.
한나 아렌트가 말하였던가.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하여.
살모사...
결단코 있지 아니하다고 맹세할수 있는가.
자신에게 숨어있는 사이코 패스의 얼굴.
<고장 난 문>
-이범선 作-
***동우***
2014.10.14 05:18
고장 난 문.
이범선 (1920~1981), 이런 고도의 심리적인 소설도 썼군요.
너른 공간, 사방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는 방.
질식사.
나가지 <않>는다는 것과 나가지 <못>한다는 것.
물리적 상황이 아니라 정신적 상황이 사람을 죽입니다.
정신이 절망하면 육체가 죽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플라시보 효과.
생각이 밝으면 운명은 효험을 나타냅니다.
이른바 '의미치료'라지요.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
<피해자>
-이범선 作-
***동우***
2017.06.28 04:12
'이범선(1920~1981)'의 '피해자'
한국 교회.
교회인의 고민과 피해의식.
작금에 이르러, 1950년대의 저 분위기와 어떻게 다른지요.
4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동우***
2017.06.30 00:19
신앙의 뼈다귀(形骸)에, 그리고 짓눌린 자의식의 암시에.
최장로도 요한도 그의 아내도 명숙도 무슨 허깨비들 같습니다그려.
저런 신앙인의 모습.
작금도 낯설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보다도 더 가벼울런지도.
바리새거나 사두개거나...
내일 마저 올리고..
굿나잇.
***동우***
2017.07.01 04:24
<그녀는 죽었습니다. 죽은 것입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행위올시다. 그렇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그녀를 몰아넣은 사람이 바로 당신들이란 말입니다. 당신들 한국 교회의 목사, 장로, 그리고 말 많은 교인들이란 말입니다.>
비겁한 요한.
회의하고 고뇌하면서도 완고한 관계로부터 꼼짝도 못하면서 허우적거리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요한.
그리 명숙을 사랑하였으면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불태우지 않고서리.
그런데 명숙의 자살은 좀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루지 못할 사랑에 절망하여 아사녀의 순애적 로맨티시즘으로 절벽에서 몸을 던진건가요?
죽음에 이르도록 절절한 사랑을 좀 더 정치하게 묘파하였으면 좋겠구마는, 요한의 구차한 세리프로 끝내버리는군요.
오발탄을 쓴 작가, '이범선(1920~1981)'
현실의식이라거나 역사의식 같은건 뛰어났을법 하지만, 로망에 있어서는 참 보잘것 없습니다그려. ㅎ (그가 쓴 서정적인 소설도 꽤 있습니다만..)
도그마의 뼈다귀거나, 혹은 종교적 나르시시즘에 함몰되어 자족하는 신앙관.
요한의 아버지가 그러하고 요한의 아내가 그러합니다.
요한의 아버지와 아내, 저 신앙적 자의식(自覺?)은 어쩌면 일종의 엑스터시입니다.
일상 속에서 구현되는 접신(接神)의 황홀함...
죄인인 자신에게 스스로 채찍질하면서 피흘리는 편타고행자(鞭打苦行者)의 행각처럼.
그렇지만 한 세대 전.
비록 위선이거나 자기기만이거나 허영일 망정 저들 꼿꼿한 신앙의 자세에는 한줌의 결기 없지 않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고있는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
요즘 어떤 세태, 세속적 맘모니즘과 헤도니즘에 얼씨구나하는 사이비 크리스찬에 비하면 말입니다.
그건 그렇거니와, 조직신학의 도그마 속에만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면 그 분은 내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게는 구약 유대광야에서 노여워 하는 야훼하나님보다 갈릴리 풀밭에 길게 누운 예수께서 내 하나님의 이미지올시다.
내 삶의 구체성 안에 들어오시는 분은 늘 그 분입지요.
내 슬픈 실존을 납득시키려 그윽한 눈으로 내 눈망울을 들여다보는 분은 그 분입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침묵'
로드리고는 '주님을 찬양하면서 장엄하게 죽으리라'라는 순교의 열정 하나만으로 일본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종장에, 그는 예수의 얼굴(聖畵)을 짓밟고 교회를 부정하고 배교(背敎)하고 맙니다.
예수를 밟는 순간, 그의 귀에는 스승 페레이라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성화를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나는 충분하느니라.“
그리하여 로드리고는 일본에서 늙도록까지 살다가 한사람의 크리스찬으로서 죽었습니다.
그가 배반한 것은 교회(가톨릭)이지 예수는 아니었던 거지요.
좋은 주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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