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신경숙]] -3- (1,4,3,3,1)

카지모도 2020. 4. 29.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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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신경숙]]

<깊은 숨을 쉴 때마다> <모여 있는 불빛>

 

 

<깊은 숨을 쉴 때마다>

-신경숙 作-

 

***동우***  

2014.04.23 05:12

  

신경숙 '깊은 숨을 쉴 때마다'

3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어떤 때에는 자신의 먹고사니즘의 연장(道具)들이 절실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끔찍한 형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빵장수의 빵틀.. 세탁소 주인의 드라이클리닝 기계.. 농부의 쟁기.. 운전사의 핸들..)

 

작가의 절실함은 삶속에서 사유로 채취하는 작가적 연장일 것, 그게 끔찍하게 여겨질 때는 어떤 종류의 맨너리즘에 빠져버렸을 때일것 같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긴장을 잃었을 적, 어느 님의 파리는 생의 활력을 되찾아주는 힐링의 도시지요.

이 소설, 그처럼 남단의 제주라는 섬은 작가에게 힐링의 섬이었던가 봅니다.

자연이 베풀어주는 제주의 풍광.

그리고 스치고 만나고 얘기를 나누고 사연을 듣고 마음을 기울였던 사람들...

제주를 겪고나서 그녀는 다시 글을 쓸수 있게 됩니다.

힐링의 제주는 한반도의 축복입니다. (아, 세월호. 그 섬에 가려다 사라진 저 꽃다운 청춘들...)

 

신경숙.

그 풍광과 사람과 자신의 마음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감상적이고 그러므로 일견 장황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실하게 타자(他者)와 밖의 것들을 자신의 내면에 융화시키면서 꾸준하게 이야기를 밀고 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빛을 찾아서' '힘껏 살고 강렬하고 견고한 사유'를 위하여 나오는, 군더더기가 아닌 필연일겝니다만...

 

차츰 지껄이지요.

 

[제게 소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헤치고 나가 언젠가는 제 존재의 빛을 보게 해주리라 믿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일에 매번 홍역을 치르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가 닿는 마음은, 찰나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입니다. 섬광처럼 지나가는 순간순간을 아로새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애쓰겠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일에서 멀어지지 마세요. 당신은 많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그늘이니 자괴심을 갖지 말아요. 힘껏 살아야 강렬하고 견고한 사유를 하지요. 여기가 끝이 아니니 어서 힘을 내서 또 걸으세요. 멀리, 끝없는 저 길 위를. -소설집에서 작가의 말-]

 

제주의 붉은 당근 밭.

제주 송당의 순덕이 별당 옆에는 너른 무 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비니미니의 코끝, 깊은 숨을 쉴 때마다 무처럼 튼실한 생의 환희 가득 담겨지거라고 부산의 할비는 기원합니다.

 

***동우***  

2014.04.24 05:22

  

평소 우리의 호흡은 얕은 숨입니까.

운동중의 거친 호흡 역시 깊은 숨은 아닐테지요.

 

때로 무엇엔가 사무치면 포~옥 한숨을 쉽니다.

그건 깊은 숨일까요....

 

일상이라는 것, 생활이라는 것의 진부성 혹은 그 상투성을 생각해 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별것도 아닌 것에 웃음을 터뜨리고 막장드라마에 가슴을 에이고...

 

서해 세월호, 시퍼런 바닷속에 잠긴채 엄청난 공포와 고통 속에 어이없이 죽어간 수백의 어린 목숨들, 분노하고 안타까워 하고 슬퍼하면서도 우리는 게걸스레 먹거리를 쑤셔넣고 방귀를 뀌고 똥을 누고 술을 마시고 낄낄거립니다.

아,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올시다.

 

그리하여 깊은 숨은...

우리의 어떤 존재가 무엇을 무거워하면서 쉬는 숨일까요....

 

***동우***  

2014.04.25 05:20

  

[내가 잃어버린 건 무엇일까. 갑자기 내 몸속에서 빠져나가 나를 긴장으로부터 풀어버린 것은? 지난 봄과 여름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은 글쓰기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건 새로운 형식이나 새로운 문제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죽음을 잊자 일상은 무기력해졌고, 가족은 멀어졌다. 한때 가까이 지내다가 이제는 못 만나게 된 몇몇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남긴 눈물, 허전한 걸음걸이, 뒷목의 점이나, 나와는 상관없는 반지가 끼여 있던 손가락. 감당할 수 없었던 부탁이나, 내 마음을 슬프게 하던 흰머리, 연결 안 되는 말들,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 회색 손톱.]

 

은혜와 사랑과 신뢰로서 나와 관계를 이루었던 존재들은 필경 무너져 소멸하고야 만다.

작가는 관계의 소멸을 지켜보기 두려워서 필사적으로 삶에 깃든 그 죽음이라는 것을 잊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과 삶을 천착하는 작가적 긴장을 잃게 하였고, 그 맨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제주를 찾았을 것이다.

 

부모와 형제와, 얼굴빛이 습자지 같았던 처녀, 쌍둥이 동생을 잃은 처녀, 피아노집, 말라깽이 소녀와 절름발이 청년, 성산포의 바다, 둥근 베란다, 당근밭, 관계와 기억, 자살과 죽음과...

연결도 당위도 애매한 이미저리들의 추상적인 집합이지만, 어떤 분위기의 인상(印象)만은 아련하게 남는다.

사랑, 그리움, 슬픔, 정(情), 고독, 혹은 죽음... 타자(他者)와의 관계에 대한 막연하면서도 사무치는 어떤...

 

[우리가 태어나 자라서 우연히 이 시간과 이 공간 속에서 만났다가 헤어지고 언젠가는 광활한 우주의 한줌 먼지로 사라질 때도 이 바닷물은 변함없이 지금 여기 내 발치에서부터 가장 먼 그곳까지 드나들고 있으리라.]

 

그리하여 영원과 시간과 죽음,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작가는 찾았다는것일까.

 

관계.

서로의 깊은 곳에 대하여는 모른척하고 자신의 깊은 곳은 무언가로 들씌어 감추고 사는 우리의 삶.

상대가 대답하기 쉬운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진심이 위장된 상투적인 답변, 타자(他者)와의 관계는 다테마에(建前)로 충분한척 살아가는, 그 감정모체에 반하는 패러독스의 슬픔...

 

깊은 숨이 은유하는 바는 애닲고도 의연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늙어가는 내 주변의 여자들을 생각했다. 맨 먼저 어머니를 다음엔 고모와 이모를, 그리고 역시 그 과정을 거쳐갈 내 친구들 그리고 나. 작년에 막 태어난 동생의 아이가 어쩌면 내가 늙어서 볼 마지막 늙어 갈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고즈넉해졌다.]

 

시간은 이윽고 개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시간은 또한 산 것들에게 치유의 힘을 선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윽고 육체가 소멸하듯, 육체로 이루어졌던 아픈 과거는 살아있는 동안 시나브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당신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나도 그곳을 떠나왔답니다. 그애의 죽음을 내가 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다른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 것이 때로 슬프지만 어쨌든 살아가고 있어요. 그애를 잃고도 살아진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도 하고 사무치기도 해요. 더듬더듬 혼자서 다시 첼로를 켜는 일에 익숙해졌고, 쉽지는 않지만 친구도 사귀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 침몰.

갑자기 닥친 사랑하는 이의 어이없는 죽음.

그 당혹과 애통함 어찌 필설로 다하리까.

시간의 힘을 기원할 뿐입니다.

 

기적을 기원하는 노란 리본이 범람합니다.

이제 헛된 기대는 절망을 더하게 할뿐, 내 생각에는 그만 거두었으면 좋겠습니다만...       

***eunbee***  

2014.04.25 15:56

 

아침부터 비가 내려요

서울에서 온 여행친구와 몽마르트르엘 오르기로 했지요

비 내리는 몽마르트르는 또다른 감상을 데려다 줄 거예요

달리가 기다리고, 로트렉이, 쉬잔 바라동과 위트릴로 그리고.. 그리도 슬프디슬픈 사티의 혼령이 어슬렁 거리는 그곳 몽마르트르

 

창밖에서는 빗속에서도 티티새는 노래하네요

작은딸이 사티를 만나러 간다했더니 스맛폰으로

그의 음악을 들려주고 있어요 지금 옆에서 ㅎ

피아노의 조용하고 슬픈 메로디.

짐노페디Gymnopedie 풀버전으로 듣고있다우

 

동우님

멋진 하루!!

 

***동우***  

2014.04.26 05:04

 

비오는 파리.

은비님 정서에 딱 들어맞는 분위기였겠어요.

게다가 비 내리는 몽마르뜨르.

달리, 로트렉도 그렇지만.

은비님 음성으로 듣는 위트릴로와 그의 어머니 쉬잔 발라동이 가슴을 적십니다.

위트릴로의 그림을 나처럼 좋아하는 사람도 드물거에요.

그림을 알리없는 나, 그런데 호젓한 골목의 담벼락을 그린 그림에 나는 이상하게 꽂혔어요.

이유없이 끌리는 그런걸 '풍크툼'이라고 한다지요?

그리고, 사티.

그의 이름만큼 음악은 많이 들어보지는 못하였는데, 그의 피아노는 그렇게 슬프디 슬픈가 보아요.

언제 사티의 음악 포스팅 한번 하시지요....

내 스마트 폰의 문제, 티티새의 노래는 듣지 못하였지만.

은비님의 비에 젖은 노래 듣는 새벽입니다.

 

멋진 주말.

은비님도.

 

***eunbee***  

2014.04.26 05:49

 

아침에 짐노페디를 들려주며 작은애 하는 말이

아무리 에릭 사티의 이 음악이 좋다고들 말해도

피아노의 대가 쇼팽이나 브람스에는 어림도 없다면서... 쭝쭝 ㅋ

그러나 프랑스의 라디오에서는 편지사연 읽어주는 프로그램 배경음악으로 에릭사티를 흐르게 한다네요

이곳 인터넷 사정 때문에 티티새도 사티도 어디 들을 수나 있으려는지요 ㅠㅠ

답글도 등록되지 않는 상황이에요 ㅠㅠ

 

오늘 몽마르트르 산책 정말 좋았어요

 

동우님도 멋진 주말! ^^

 

 

<모여 있는 불빛>

-신경숙 作-

 

***동우***  

2014.04.29 05:03

  

고모님이 작가에게 묻는다.

"소설이라는 게 뭣이냐?"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고모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나, 내가 글을 쓰고 살긴 하지만 다른 이도 아닌 고모님께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이야. 진짜로 고모님이 그녀에게서 소설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는 대답을 들으려고 던진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 머릿속은 자욱해졌다. 그래 소설이 무엇인가? 그녀는 어느 자리에서 말했었다. 내 소설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소설이란 우선 나 자신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기른 헛것들을 더이상 가두어놓을 수가 없어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을 때, 그때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잊는다, 고.]

 

자신을 견디게 해주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잊는 방도...라.

 

카타르시스.

불안을 배설하는 일종의 쾌감을 말함인가.

 

읽는 이로서는 소설적 허구가 표상하는 작가의 진실의 영역 어디쯤에서 감동을 받는겐지.

소설이란 삶과 세상을 그린 그림인지, 그것을 해석함인지.

 

으흠, 현학적 이론이야 내 알바 없다.

재미와 느낌과 감흥으로 나는 소설을 읽는다.

 

'모여있는 불빛'

어쨌거나 이 소설에서, 나는 몹시 부럽다.

저 '모여있음'의 '관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