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오돌막집과 옹달샘. 우기의 시. 광대 김선생]] (1,4,3,3,1)

카지모도 2020. 6. 19.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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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이문희]]

<오돌막집과 옹달샘> <우기의 시>

[[한말숙]]

<광대 김선생>

 

 

<오돌막집과 옹달샘>

-이문희 作-

 

***동우***

2016.09.30 04:37

 

이문희 (李文熙, 1933~1990)

마침 그의 단편 '오돌막집과 옹달샘'이 눈에 띄어 올립니다.

젊은 날 이문희만큼 내 감성적 성장에 영향을 끼친 작가도 드물겁니다.

그의 장편 '흑맥(黑麥)‘이 떠올라 (이만희가 감독한 영화와 함께) 다시 훑어보려고 뒤져보았는데.

을유문고의 단편집과 장편 '흑맥'과 '논산'이 내게 있을터인데 어느구석 박혀있는지 찾지를 못하겠네요.

 

이문희는 후배작가 이문구와 충남보령 출신으로 동향(同鄕)이지요.

이문희 서기원 이문구 김문수 신동엽 권정하....

충청도의 언어와 정서는 문학적으로나 감성적으루다 내게 정겨워 유장한(?ㅎ) 곳입니다.

 

오돌막집과 옹달샘, 이 소설은 토속적 배경이지만 이문희는 이문구와는 달리 다소 도회적 감성의 작가입니다.

 

이문희의 '오돌막집과 옹달샘'

두 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아래는 그에 대한 문평(文評)입니다.

인터넷에서 업어왔습니다.

 

++++

‘한국단편문학대계’(1969)에서 발췌

<이문희, 감성적(感性的) 화술(話術)>

-천이두(千二斗)-

 

이문희는 전형적인 감성적(感性的) 작가다. 그를 전형적인 감성적 작가라고 하는 것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의 작품을 읽게 되면, 언제나 그것이 수월하고 거뜬하게 써진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는다는 점이다. 치밀하고 끈기 있는 계산과 심사숙고의 과정을 통항 고된 출산의 진통을 겪지 않고 언제나 순산(順産)의 행운을 누리며 태어난 작품 같은 인상을 그의 작품에서는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가 그의 연배의 작가 가운데서 유례없는 다작(多作)의 작가라는 것으로도 충분히 반증된다. 소재의 범위도 매우 다채롭다. 무슨 이야기건 붓을 들기만 하면 단숨에 거뜬히 만들어 낼 수 있는 재간을 그는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의 작품 흐름에서 이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치밀하고 끈기 있는 계산과 심사숙고의 고된 과정을 거쳐야만 반드시 걸작이 생산된다는 법도 없는 이상, 순산의 특권을 누리게 되는 그의 작품들은 아무튼 행운이라 할 수밖에 없겠다.

그를 전형적인 감성적 작가라고 느끼게 되는 둘째 이유는 자기 작품이 내포해야 할 바 추상적 명제 혹은 테마에 대해서 그는 언제나 무관심 이상의 방심상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헉슬리 같은 작가의 경우 그로 하여금 붓을 들게 하는 직접적 계기는 어떤 추상적 명제에 대한 흥미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전달해야 할 절실한 이슈를 위해서 결국 붓을 들 수밖에 없다 하는 식이 헉슬리의 경우다.

이문희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의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어 글을 쓴다 하는 식이라기보다도 글을 쓰기 위해서 무엇이든 말한다 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헉슬리의 경우 소설의 이야기는 자기의 추상적 이슈를 전달하기 위한 부차적(副次的) 의의를 갖는 것이라 하겠으나, 이문희의 경우는 다만 이야기 그 자체를 위해서 이야기를 쓴다 하는 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문희의 이야기는 항상 순수한 유희성(遊戱性)으로 뒷받침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의 이야기의 유희성(遊戱性)이란 소설의 줄거리에서 오는 재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통속소설이나 야담(野談)에서와 같은 아기자기한 줄거리를 엮어내는 일이거나, 일부 주지적인 작가들이 시도하고 있는 바와 같은 복합적인 구성의 묘미를 보인다거나 하는 따위의 노력은 작가 이문희에 있어서는 흥미 밖의 일이다. 실상 이문희의 소설은 그 줄거리나 구성이 평범하고 평면적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의 묘미는 이처럼 평범하고 평면적인 이야기일망정 그것을 이끌어 나가는 화술(話術)이 뛰어나게 능란하다는 것이다. 듣고 나면 결국 시시한 이야기인데, 그 시시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입담이 희한하게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서 느끼는 이야기의 재미는 한 이야기의 종착점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기보다도(이러한 재미는 가령 통속서설이나 추리소설이 주는 재미이겠다.) 그 이야기의 전행 과정에서 느껴지는 재미인 것이다.

그를 감성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세 번째 근거는 그의 모든 단편에는 섬세하고 선연한 시적(詩的) 정서(情緖)가 기본적 톤으로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에 있어서 시적 정서란 결코 장식적(裝飾的) 효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인 문학 가치로서의 그것이다. 앞서 그의 소설의 이야기에는 일종의 순수한 유희성(遊戱性)이 뒷받침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그러한 이야기의 재미를 단순한 통속작가의 그것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시적 정서다. 독자를 자기 이야기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어서 그는 희한한 화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하찮은 이야기다. 더구나 소설에서 어떤 추상적 이슈를 찾아내고서야 비로소 안심하는 습성을 가진 독자에게는 그의 이야기란 정말 시시한 이야기처럼 보일지 모른다. 대체 이 소설의 테마가 뭐란 말인가? 하고. 그러나 그의 이야기의 흐름을 좇다 보면, 어느새 그의 섬세하고 선연한 시적 감상에 독자는 젖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문희의 기본적 매력은 다만 이야기의 재미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독자로 하여금 섬세하고 선연한 시적 정서 속에 젖게 하는 데 있다고 해야 하겠다. 요컨대 그의 문학을 바르게 감상하는 방법은 그의 능란한 화술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요, 그의 시적 정서에 함께 감염되는 일이다.

 

-아래 계속-

 

***동우***

2016.09.30 04:45

 

-위에서 받음-

 

그의 데뷔 작품인 <우기(雨期)의 시(詩)>에서 어떤 거창한 테마를 찾으려는 독자가 있다면 이내 실망할 것이다. 복잡한 이야기의 줄거릴 찾으려는 독자가 있다면 또한 살망할 것이다. 실상 이 작품에는 이렇다 할 테마도 없고, 뼈대 굵은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친척 누이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영상을 그 누이를 닮은 다른 여성에게서 찾으려 하는 그것은 흔히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가 잔잔하게 가라앉은 문장의 흐름 속에 매우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다.

주인공이며 내레이터인 ‘나’의. 자꾸 안으로만 침잠하는, 그리하여 그리움의 대상인 ‘성자’(친척누이)에의 집념으로만 내닫는 마음의 분위기를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듯이 구중중한 비가 내린다. 그리고 그러한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어느 날 ‘성자’와 비슷한 모습의 한 여인 ‘혜영’을 만난다. ‘나’에 있어서 ‘혜영’은 ‘혜영’으로서가 아니라, ‘성자’의 대상(代償)으로만 뜻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자’에 대한 자기의 금기(禁忌)의 사랑을 ]혜영‘에게 이야기함으로써 ’혜영‘이 나타내는 반응 속에, 이제는 기억의 피안(彼岸)에 가둬 둘 수밖에 없는 ’성자‘의 실체를 확인해 본다. 그것은 곧 ’유방이 없는‘ 사랑의 실체를 유방이 있는 ’혜영‘에게서 찾아보는 노력인 것이다. 이 작품은 이문희의 문학적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인간의 마을>은 ‘형익’, ‘윤수’, ‘지숙’ 세 빨치산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비교적 테마에의 이식이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땅굴 속에 숨어 살면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이 세 남녀를 그림으로써 작자는 인간의 생명에의 질긴 집념, 추악한 이기심, 끈덕진 증오심, 죽음에의 물리적 공포심 등을 파헤치고 있다. 음울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의 긴 센텐스들은 이 작품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데 효과적으로 나타나 잇고, 세 남녀의 각기 다른 개성들을 파악하는 데도 비교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결국 그 속에 섞여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을’에의 간절한 그리움의 표백으로 끝맺고 있다. ‘지숙’이 땅굴을 탈출한 것은 결국 ‘인간의 마을’로 되돌아가기 위함이었으니까.

<하모니카의 계절>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의 초기작인 <우기(雨期)의 시(詩)>의 바리에이션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에 있어서도 <우기(雨期)의 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금기(禁忌)의 문제가 작품의 주요한 모티브로 되어 있다. <우기의 시>에 있어서는 금기(禁忌: 친척 사이라는) 앞에서 간절한 사랑의 출구를 얻지 못한 인간의 괴로움이 모티브로 되어 있다면, 이 작품에서는 그 금기(禁忌)를 범한 인간의 죄책감이 액션의 기본적 에이젠트로 되어 있다.

‘영규’는 제수(弟嫂)와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병든 실직자(失職者)로서 아내(제수)에게 기식(寄食)하고 있다. 죽은 자기 동생의 딸인 ‘난이’는 ‘영규’를 아빠라고 부르고 큰아빠라고도 부른다. 금기를 범한 죄악의 실체는 ‘난이’의 호칭의 난맥상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이 잘못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세 사람 중에 누구든 하나가 죽어야 한다. 이리하여 ‘영규’는 자살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의적(義賊)이라 불리는 이웃집 사나이의 하모니카 소리가 작중 상황의 음산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효과적인 배음(背音)이 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소리는 ‘영규’의 죄의식을 날카롭게 불러일으키는 양심의 소리라고 볼 수도 있다. 그 하모니카 소리에 이끌려 ‘영규’의 모든 액션들은 규제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기(雨期)의 시(詩)>에 있어서 그 구중중한 비가 작중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조성하고 있듯이 이 작품에 있어서의 하모니카 소리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의 장편 <흑맥(黑麥)> 이후 이문희의 감성적 작가로서의 면모는 서서히 본격적인 산문적 작가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

++++

 

위의 이문희 평(評)에 대한 글,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독자마다의 감성 나름이겠지요.

위의 글에 언급된 '우기의 시'도 텍스트 파일 구하였습니다.

다음에 올리지요.

 

***동우***

2016.10.01 04:19

 

헐려버린 오돌막집과 묻혀버린 옹달샘.

이 슬픈 모자(母子)의 사연도 버얼써 그렇게 잊혀졌겠지요.

 

아저씨.

그를 파멸케 한 것은 그의 천성일까요, 시대일까요.

어쩄거나 그는 잘난듯 못나빠지고 강한듯 나약하고 뚜렷한듯 물렁합니다.

 

왜놈들 등쌀에도 난리 통에도 살아나고 살려낸 천지간 오로지 하나 뿐인 핏줄 외아들인데.

제 목숨 제가 끊어, 터무니없게 죽고 말았습니다.

 

영감 해가기(시집가기) 전날밤 잣골대모는 지붕에 올라가 울었습니다.

당자(當者) 아닌 사람으로서 그 심사(深思) 헤아릴수 있으리까.

그 사연 가까운 곳에 있었던 애틋한 마음이 함께 울어줄 뿐이지요.

 

<떠나기 전날 밤 오돌막집의 지붕에 올라가 울었다는 그분의 형상을 생각하고는 나도 울었다. 부락사람들은 잣골 대모네 옛집을 흉가(凶家)라고 해서 헐고 봇둑 옆에 있는 이끼가 파랗게 돋은 옹달샘도 묻어버렸다.>

 

근세를 겪으면서 슬프게 살다가 슬프게 죽은 사람들.

가까운 이들의 사연, 이야기로 쓰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그 오돌막집과 옹달샘도 이제 내 가슴속에서 헐려버리고 묻혀버렸습니다려.

어쩌다 그이들 형상 생각날적 마음 어느 한켠 쬐끔 쓸쓸해질 뿐.

 

 

<우기의 시>

-이문희 作-

 

***동우***

2016.10.31 00:47

 

이문희 (李文熙, 1933~1990)의 '雨期의 詩'

참으로 고급스러운 연애소설입니다.

 

만연체로 들려주는 아름답고 섬세하게 직조된 연애심리.

이런 정조(情操)를 요즘 세대는 도저히 느낄수 없지 싶습니다.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잡설은 마저 올리고나서...

 

***동우***

2016.11.01 04:20

 

호젓함...침묵...온유와 겸손... 선(善)...

저만치 감춰진 선의 움직임에서 뽀얗게 풍기는 적요(寂寥)... 또한 그렇게 자리잡은 적요 속에 항시 해도는 따사로움... 싫증나지 않는 따사로움이 삽삽히 배인 눈동자...

 

순수와 절대의 이미지.

<나>는 친척누이 성자를 사무치게 권모(眷慕, 돌이켜 그리워함)하지만, 그녀는 <나>와는 이루어질수 없는 추상 속의 사랑입니다.

 

<성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나>를 향한 <혜영>의 사랑.

발랄하고 영리한 혜영이지만 그녀의 사랑은 슬픕니다.

 

눈물이 터져야만 울음인가요.

 

<"멀리만 바라보세요. 성자가 그렇게 가지 않겠어요? 지금 이 눈물이 성자 오빠를 향한 것인지 선생님을 향한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허지만 아무튼 오늘 저는 선생님을 뒤에 느끼면서 도망해 가는 것이에요. 아마 선생님도 저를 잊지야 않으시겠지요? 못난 소리예요. 추태구. 허지만 그런 여자도 있었다고 두고두고 이야기해 주세요. 빗속에서 와서 빗속으로 가며 신의 죄를 해명하고 그 신의 죄를 선량하게 교사하고는 울었다고... 선생님 저 선량했죠? 선량했어요. 선생님 그렇죠?">

 

혜영의 마음의 슬픔, 다소곳하지만 이 얼마나 격한 알레고리입니까?

 

성자와는 입맞춤은 커녕 겨우 그녀의 뺨에 자신의 뜨거운 뺨을 부벼 보았을 뿐이지만, 아마 혜영과는 깊은 관계를 가졌던듯 하지요? (나는 그렇게 읽힙니다만)

 

신의 죄, 유방이 없는 애인...

필경 유방이 없는 사랑(성자)의 실체는 유방이 있는 혜영일 터인데 <나>의 방황이 그저 답답합니다.

근데 '양손의 떡' 사이에서의 방황 어쩌구 하시면 이 소설을 모욕하는겁니다. ㅎ

 

<"눈물이 터져야만 울음인가!" '혜영이'하고 부르면 '성자야'가 될 것만 같아 말 대신 혜영이가 돌아서지 말기만 빌어보는 것이었으나 그러나 성자를 위해서도 헤영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성자야'라고 불리우면 혜영이는 '혜영이'로 알아들어 줄 듯한 먼 신념이, 그리고 기쁨이 오늘만의 따스한 두려움이기도 하였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런 소설이 읽혀질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일단 만연체(蔓衍體)의 문장이나 의고체(擬古體)의 어휘가 낯설기도 하려니와, 저런 식의 고답(高踏)한 연애감정... 느끼기도 힘들듯 싶습니다만.

은은하고 나른하고 황홀하게 감정의 밑바닥으로부터 번져 올라오는 그 신비한 연애감정이라는게 요즘 애들에게 있기는 한지 모르겠습니다.

'원나잇 스탠드'니 '몸친'이니 하면서 오로지 섹슈얼이 지배하는, 연애관계에 있어서는 이른바 <쿨>이라는게 하나의 현대적 덕목이라는데...

 

아해들아.

늬들이 사랑을 알아? ㅎ

 

 

<광대 김선생>

-한말숙 作-

 

***홍애(虹厓)***

2012.12.27 09:34

 

단문, 간결한 ㅠ 문체.. 주목하게 ㅠ 되네요.

몇 주전 티비에 ㅠ 어머니전으로 이 분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나왔던 것 ㅠ같아요. 아들이 수학자였어요. ㅠㅠ

 

***동우***

2012.12.27

 

정확한 문법과 반듯한 필체의 우리 홍애님인데, 오타와 어수선한 문장.

흐음, 이게 모두 모바일 자판 탓이로다.ㅎ

나도 가급적 SNS 몰입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지요.

 

새해에는 홍애님 블로그에 충실하여야겠다는 작정 엿본바 있다오.

호호야님에게서도.

나 역시. 하하하

 

한말숙님의 남편이 바로 황병기님이예요.

가야금 명인인.

황병기와 한말숙은 홍애님과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무당 이해경과도 친밀한 사이이기도 하지요.

 

두 분 사이의 큰 아드님이 이름난 수학자일겁니다.

그리고 아버지에 이어 아들까지, 부자가 호암상을 받아 화제가 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 기억으로는 남편 황병기가 아내보다 한참 연하인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시절 상당한 연배차의 연하남편이란 매우 희귀하였을텐데.ㅎ

 

그리고 한말숙은 소설가 고 한무숙의 동생이랍니다.

옛날 어린 시절, 내 어머니와도 어떤 교류가 있었던지(아마도 다나모시-契-관계였을 것) 한무숙을 본적도 있었습니다.

어린 눈에도 상당한 미인이라는 느낌이었지요.

한말숙은 언니에 비하면 그다지. ㅎ

 

예전 책부족 '오만과 편견'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우리나라 여류작가들은 참 뛰어나다는 생각입니다.

제인 오스틴 못지 않는.

한말숙의 소설들도 좋았지만 나는 한무숙의 소설을 좋아하였어요.

 

하하, 홍애님.

인간관계라는게 한다리, 많아봐야 서너다리만 건너면 죄 이리저리 얼키고 설킨 가까운 사이랍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