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서점의 추억> <코끼리를 쏘다>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作-
***동우***
2014.01.09 05:02
저널리즘.
김일성족속의 저 맹목(盲目)의 프로파간다에도 북녘인민은 속는다.
맑스도 레닌도 녹아있지 않는 엉터리 어거지 유치찬란한 그것에 말이다.
속는채 하는 것일까.
그래야 사니까.
그렇다고 남녘의 우리 저널리즘에는 정의로운 철학과 공정한 진실이 얼마나 있을까.
많은 부분 당파적 프로파간다가 황색저널리즘 속에 발톱을 숨기고 있지싶다.
'나는 왜 쓰는가'
스스로 비주류 아웃사이더의 입장에서 글을 쓴 '조지 오웰' (Eric Arthur Blair, George Orwell, 1903~1950)
나는 조지 오웰의 책은 '1984년'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딱 세권을 읽었을 뿐이다.
'카탈로니아 찬가'조차도 아직 읽지 못하였다.
그러나 읽었던 세권만으로도 오웰의 反제국 反전체 反자본의 좌파적 면모는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그리하여 좌파에서는 즐겨 그를 인용하지만, 그러나 오웰은 (인간성에 대하여 통찰이 결여된) 단순무식한 교조적 좌파에 대하여는 통렬한 비판자였음 또한 나는 익히 알고 있다.
그의 면모에 트로츠키가 있었으면 있었지, 추호도 스탈린은 없었다
작가라는 존재.
'왜 글을 쓰는가' 혹은 ‘왜 글을 써야하는가‘
이기적 허영심의 발동인가, 미학적 충동에 겨워 그런가, 세상사 진실에 대한 기록 욕구때문인가, 아니면 세상을 일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인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차피 정치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유형의 인간이다.
그리고 조지 오웰은 분명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쓴다고 고백한다.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었을 때일수록 나는 어김없이 생명력 없는 책들을 썼고 분홍색의 화려한 단락과 의미 없는 문장과 수식형용사들 속으로 속아 넘어갔으며 그래서 대체로 허튼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당파의식, 곧 불의(不義)에 대한 의식이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게 깊이 뿌리 내린 개인적 호오(好惡)들을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근본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들에 어떻게 화해를 시키는가라는 것이다.>
<단지 나는 근년들어 아름답게 쓰기보다는 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한다는 말만 해두고자 한다>
우리 저널리즘, 짐짓 정치적 의도에 대한 건 시치미 뚝 뗀채 요리조리 미장(美裝)하고 개칠하여 사실을 호도(糊塗)한다.
그리하여 그건 가공된 팩트이기 일쑤다.
조지오웰 역시 허영과 미학, 그리고 기록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내재적 충동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통렬한 자기고백.
[읽어보니 마치 나의 글쓰기 동기가 전적으로 공적 정신에서 나온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나는 그것을 이 글의 최종적 인상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강하고 이기적이며 게으르다.]
그러니까 오웰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저널리즘이 아닌 문학이었던 것이다.
정치적 글쓰기가 예술이 되게 하는 일...
조지 오웰은 정치적 목적에 매몰되어 문학적 품위를 저버린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으며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정치적 무관심 또한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이건 부정할수 없다.
우리는 정치라는 물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인가.
나는 결코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고 정치과잉의 우리사회를 혐오하는 사람이지만 내 사회적 존재가 정치에 종속되어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후기자본주의.
조지 오웰이 절실하다.
<서점의 추억>
-조지 오웰 作-
***동우***
2016.09.27 06:21
서너권 '조지 오웰' (Eric Arthur Blair, George Orwell, 1903 ~1950)을 읽었을 뿐이지만 그의 성실한 인간성 앞에서는 늘 숙연해 진다.
오웰은 내가 감히 도달할수 없는 고매한 사람이다.
비주류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반전체주의 반제국의 좌파적 면모 약여한 그이지만 그는 단순 무구한 이념가가 아니다.
동물농장을 보라.
교조적 공산주의자(a doctrinaire communist)를 그처럼 경멸한 사람도 없다.
서점의 추억(Bookshop Memories, 1936년 발표)
짧은 수필... 영국인다운 유머와 은근한 독설이 있다.
검색하여 보니 그는 실제로 1934년 11월부터 1936년 1월까지 런던의 헌책방에서 임시직원으로 일한바 있다고 한다.
예전에 내가 주로 책을 구입하였던 곳도 헌책방이었다.
부산 보수동에는 유명한 헌책방 골목이 있다.
헌책방 서가 구석에서 발견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먼지더깨 앉은 책들.
아직 내게 있는, 청하신서의 사회학 책들, 한국아카데미총서, 삼민사, 대우출판사의 종교서적들 등등...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었던.
월간 '영화예술'이나 일본영화잡지들은 1960년대 광복동 야시장 카바이트 불빛 땅바닥에 늘어 놓았던 너덜너덜한 헌책들 사이에서 건져올린 보물들이었다.
무더기로 구할수 있었던 지난잡지(過月紙)들은 (월간시사지, 음악동아, 뿌리깊은 나무등등...)그야말로 똥값으로 내 지적 예술적 똥폼허영을 자족케 하였다.
그리고 기억하는가, 월부 책장사들이 팔고다니던 호화장정 두꺼운 하드카버의 문고본들.
총각때 어머니를 졸라 샀거나 박봉 쪼개어 월부로 구입하였던 여러 질을 아직도 갖고 있거니와. (그런데 그것들 사분지일쯤은 여적 완독하지 못한채 책장에 먼지 뒤집어 쓴채 꽂혀있다.)
내 책욕심은 지적 속물주의에 다름아니다.
이제 늙었으니 좀 벗어났는가 모르겠다만.
<코끼리를 쏘다>
-조지 오웰 作-
***동우***
2016.12.02 01:16
조지 오웰'의 (Eric Arthur Blair, George Orwell, 1903 ~1950)의 '코끼리를 쏘다'
이 짤막한 에세이에서도 스스로에 대하여 이리 엄격합니다.
자신의 나라 대영제국, 그 사악한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
피압제(被壓制) 민족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도 비굴하면서도 교활한 그들에 대한 혐오감.
'나는 왜 쓰는가'에서 조지 오웰은 자신은 '아름답게 쓰기보다는 더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조지 오웰의 사상이 반제국 좌파인 건 분명하지만, 그처럼 교조적 전체주의에 대하여 통렬한 비판자인 사람도 드물 겁니다.
'동물농장'을 읽어보면 알거 아닙니까.
우리 저널리즘은 조지 오웰로부터 느끼고 배우고 따라야 합니다.
<유럽인들 사이에선 의견이 갈렸다. 나이 든 사람들은 내가 옳았다고 했고, 젊은 사람들은 쿨리를 죽였다고 코끼리를 쏘는 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했다. 코끼리는 그 어떤 드라비다 쿨리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그 쿨리가 코끼리 때문에 죽은 걸 큰 다행으로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법적으로 정당할 수 있었고, 코끼리를 쏠 핑계가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코끼리를 쏜 게 순전히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 짓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나, 어쩌다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는 수가 있습니다.
나는 입에 침을 튀기면서 여기저기에 떠벌리며 자랑하고 다닙니다.
작정하여 노리고 있다가 정확하게 겨냥하여 재빠른 솜씨로 쥐를 잡은것이라고.
조지 오웰을 생각하면, 아아 나의 모든 글은 레토릭입니다
나를 허영하고 나를 장식하고 나를 거짓합니다.
조지 오웰은 나 따위 도달할수 없는 고매한 정신입니다.
시름깊어 늦은 밤.
편히 주무십시오.
아래는 인터넷에서 주어온 해설입니다.
++++
코끼리를 쏘다「Shooting an Elephant」. 1936년 가을 〈뉴 라이팅〉지에 게재. 「교수형」과 더불어 버마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며, 사후에 출간된 에세이집의 제목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1936년은 오웰이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할 만큼 그의 작가 인생에서 중요한 해였다. 같은 해 6월에 결혼한 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게를 하고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 열중했는데, 1월부터 3월까지는 한 진보단체의 의뢰를 받아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을 취재했고, 12월에는 이 르포 원고를 완성하자마자 스페인내전에 참전하러 떠났다. 이 원고는 오웰이 스페인에서 싸우던 이듬해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란 책으로 발간되어 이전에 출간한 4권을 다 합친 것보다 널리 읽혔다.
++++
-독서 리뷰-
[[조지 오웰]]
<스파이크> <교수형> <두꺼비에 대한 몇가지 생각>
<스파이크>
-조지 오웰 作-
***동우***
2017.01.20 04:24
'조지 오웰' (Eric Arthur Blair, George Orwell, 1903 ~1950)의 르뽀르따쥬 에세이 '스파이크 (The Spike)'
조지 오웰은 아름답게 글을 쓰려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할 뿐.
그러기 위하여 오웰은 현장에 뛰어들어 손수 체험합니다.
도시빈민.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아더 모리슨의 '마땅한 대책도 없이'
존 스타인 벡의 '분노의 포도'
한세기 전. 촬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빈민구제.
중세 종교기관의 빈민 구호활동은 자비와 은혜의 입장으로 베푼 것이었을 겁니다.
근세,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로 인하여 도시빈민은 더욱 양산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인민의 최저생활보장 같은 생존적 기본권이라거나 빈민구제 정책같은걸 국가적 책무로서 인식하였을까요.
소비에트가 대두되기까지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시혜(施惠)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겝니다.
심지어 도시빈민을 일종의 사회악으로 취급하여 천시와 격리와 학대의 대상으로 취급하기도 하였었지요.
예전 우리나라의 재건대니 삼청교육대니 하는 것들...
작금에 이르러 그 의식으로부터 얼마나 진보하였을까요.
서울역 부산역의 노숙자들. (도회의 후진 변두리 우리 동네에도 노숙자가 있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별세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심화되는 양극화.
중산층이 무너져 내린다고 합니다.
언제 거리로 내몰릴지모르는 불안한 삶의 양태.
신자유주의.
경제성장이라던가 분배의 문제.
무조건적으루다 부(富)나 자본이 악은 아닐터이고 빈(貧)이나 노동이 선은 아닐터입니다.
노동귀족있는가하면 자본빈민도 없지 않습니다.
이제 단순하게 자본과 노동의 문제로서만 재단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복잡해 진듯 합니다.
좌니 우니, 진보니 보수니.
그런 것들 부질없습니다.
인간성에 깃들어 있는 선(善)한것이 의(義)입니다.
우짜든둥 불의(不義)하지 아니하고 국민들 잘 살게 하는 놈이 장땡입니다.
정의도 비전도 지혜도 지식도 능력도 리더쉽도 없는 지도자는 이제 아니 됩니다.
<교수형>
-조지 오웰 作-
***동우***
2017.03.14 04:33
조지 오웰(Eric Arthur Blair, George Orwell, 1903 ~1950)'의 '교수형'
혹시 사형집행 장면을 목격하신 적 있나요?
영화에서나 보았을까, 나처럼 대부분의 사람들도 경험하지 못하였을겁니다.
무어라 표현할수 없는 전율과 공포와 모욕감과 분노가 범벅이 된 요상한 감정으로 읽었던, 미국의 사형장 교도관이 쓴 '전기의자'라는 책, (그 책을 누가 가져갔는지)
아우슈비츠의 기록물들.
실제로 전기의자에서 죽어가는, 눈알이 부풀고 귀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동영상도 본적 있습니다.
사형집행 현장의 리얼리티를 경험한 사람은 사형제폐지론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사형제 폐지론자인지는 자신할수 없습니다.
집행현장 목격의 경험이 있었더라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솔직히 내 복수심을 제어할 자신이 없습니다.
상상으로 그려보는 바, 내 사랑하는 사람을 무참하게 살해한 가상의 인물을 상정할 적에는.
간결하고 인상적인 이 산문, 나는 또 감탄합니다.
감정의 진실성에 대한 글쓰기의 엄격함.
오웰은 영국의 명문 이튼을 나온 수재입니다만,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영국 식민지 버마의 경찰이 됩니다.
이방의 권력자로서 그가 겪는 자의식.
<5년 동안 나는 억압적 체제의 일부였고, 이는 내 양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는 내가 속죄해야 할 엄청난 죄의 무게를 느꼈다.>
전율과 공포와 분노와 수치심과 죄의식.
그것이 껄껄껄껄 웃는 농담으로 변이되는 것은 일종의 방어기제 일겁니다.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한 자들이 두려움과 죄의식이 도망 가 숨는.
오웰 역시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나중에 오웰은 수치심으로 스스로에게 이를 갈았을 것 같습니다.
참, 전에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를 올린 적 있지요?
권력자로서 식민지 사람들에게 쪽 팔리지 않으려고 치명적 위협이 되지 않는 코끼리를 쏘아 죽인 이야기.
오웰은 그것 또한 얼마나 부끄러워 하였을까요.
<그리고 한 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 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웅덩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형장으로 가는 도중, 몇분 후에 죽을 사람이 웅덩이를 피해 걷는다...
전에 사형을 집행하였던 우리나라 교도소에서도 이런 류의 얘기를 읽은적 있습니다.
어떤 생명이라도 삶을 포기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나는 살기를 원하는 생명의 한복판에 있는 살고자 하는 생명이다. -쉬바이처->
생명에게는 다른 생명을 죽일 그 어떤 당위나 정당성이 없습니다.
식민지의 경찰관 오웰은 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백인이 폭군이 될때 그가 파괴하는 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자유였다.>
얼마전 방영한 '이제 만나러 갑니다'라는 프로그램.
거기 출연한 탈북자들은 대부분 사형집행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더군요.
강제로 끌려들 나와서.
그런데 말입니다.
사형수의 직계 가족들을 군중의 가장 앞자리 앉혀서 보게 한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식이 형이 동생이 총맞아 죽는 광경을.
현대에 존재하는 저런 나라, 야만도 그런 야만은 지구상 없을겝니다.
<두꺼비에 대한 몇가지 생각>
-조지 오웰 作-
***동우***
2019.04.14 21:41
자유방임의 자본주의를 혐오한 '조지 오웰'의 르포르타주, 그의 비판의식은 좌파적 치열함이었지만 노동자와 빈민등 소외된 자들을 향한 그의 눈길은 얼마나 따뜻합니까.
사회경제적 구조혁명을 바라는, 그는 분명히 좌파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덕성을 잃은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분노 역시 치열하였습니다.
조지 오웰의 시회주의 운동을 추동하는 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윤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회자되는 말이 있습니다.
보수주의자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빼져있고 진보주의자는 일종의 도덕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는거라고.
이를테면 사자가 영양을 잡아먹는 자연현상, 그러니까 생명 존재양식으로서의 당위로서 양육강식(경쟁)이란 사회현상은 어쩔수 없는 것이라는 보수꾼.
그리고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대접받아야 하므로 개인적 격차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진보꾼..
컹건대, 한번 자신을 곰곰 들여다 보십시오.
그렇습니까? 저 두 생각중 오로지 하나에만 빠져 있으십니까?
생각건대 이데올로기의 헛됨이 바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조지 오웰의 "두꺼비에 대한 몇 가지 생각"
봄, 봄, 봄,
흉물스런 두꺼비에게서 보석같은 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를 예찬하는 '조지 오웰'
그리고 조지 오웰은 넌즈시 강남좌파(캐비어 좌파)를 힐난합니다.
<봄을 비롯한 계절의 변화를 보며 즐거워하는 일이 위험한가? 더 정확히 말해 우리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족쇄에 묶여 신음하거나, 어쨌든 신음해야 하는 상황에서 노래하는 검은 새나 노랗게 물든 시월의 느릅나무처럼 돈 한 푼 들지 않을뿐더러 좌파 신문 편집장들이 계급 관점이라 부를 만한 게 없는 자연 현상 덕택에 삶이 종종 살 만하다고 말한다면 정치적으로 비난받을 일인가? 분명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내가 기사에서 "자연"을 호의적으로 언급하기만 해도 비난 편지가 날아온다. 대개 이런 편지들의 키워드는 내 글이 "감상적"이라는 것이지만 두 가지 생각이 섞여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실제 삶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그게 무엇이든 일종의 정치적 침묵을 조장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이런 생각에 따르면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워야 하며 우리의 임무는 우리가 느끼는 결핍은 배가시키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늘리지 않는 것이다. >
내가 강남좌파라고 하는 까닭은 저들의 감정모체 역시 자지러지게 <봄>을 느꺼워한다는걸 알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똥폼을 잡고 "그까짓 봄이 무엇이관대..."하면서 근엄한 입술을 씰룩이지만 말입니다.
어느 작가도 말했지만 한 인간을 일호정연(一毫精姸)하게 규정하는 사람을 나는 결코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씨부리는 사람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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