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염상섭]]
<두파산> <임종> <외부내빈> <짖지않는 개>
<두 파산>
-염상섭 作-
***동우***
2014.06.13 05:09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 1897 ~1963)의 소설은 처음 올리는 것 같습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나 '삼대'등의 소설로 유명한 우리나라 자연주의 문학을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는 염상섭.
내게는 해방후 그의 후기 단편소설들이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세태와 인간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묘파하여 치밀한 문체로 그려내는 그의 소설은 사실주의 문학이란 이런 것이로구나하는 느낌이 절로.
한시대의 세태소설로서도 재미있지만 (그 시절 서울 중산층의 소설 분위기는 내게 너무도 익숙하지요),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 인간성을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상당합니다.
두 파산.
정례모친의 경제적 파산과 옥임이의 정신적 파산.
작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지만 오랜 친구에 대한 옥임의 저 용심은 좀 쓸쓸하네요.
횡보의 후기소설들은 시정(市井)의 소시민들의 소소한 삶을 다루고 있지만 그는 호방한 사나이였답니다.
내 애독서 중 수주(樹州) '변영로'의 '명정40년'.
어느 여름날 주도(酒道)의 명인들인 橫步 염상섭, 空超 오상순, 誠齋 이관구 그리고 樹州 변영로가 성균관 뒷산에서 낭자한 술판을 벌리고 흠씬들 취하여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채 소를 타고 산을 내려오는 대목.
그들이 술잔 나누면서 호기롭게 나누었을 客談 古談 弄談 痴談 文學談들...
말석이나마 술꾼이라 자부하는 나로서는 마음맞는 벗들과 어울리는 그 쾌음(快飮) 호음(豪飮)이 부러웠지요.
왕년 내 주우(酒友)들 가끔 내 블로그 들여다보는 모양이던데, 알량한 블로그로 나대는 친구에 대한 용심은 아닐터이나 호리도 기척없음은 술 酒 字에 못미치는 용렬함일터... ㅎ
<임종>
-염상섭 作-
***동우***
2016.01.14 04:30
고집세고 술을 좋아하여 횡보(橫步)라는 호를 썼다는 염상섭 (廉想涉,1897~1963).
그에 대한 일화는 변영로의 '명정40년'이나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에서도 자못 요란합니다.
염상섭의 임종(臨終)
요즘 작가도 범접치 못할 리얼리즘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뭔가 새로운 것, 아주 두렵고 여태까지 그의 일생에서 만난 적이 없었던 중대한 사태가 그의 몸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직 이반 일리이치 그 혼자만 알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겐 매사가 예전처럼 아무 탈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톨스토이와 더불어 '퀀블로 로스' 박사(죽음에 이르는 인간의식의 과정)가 떠오르고 '할머니의 죽음'(현진건)도 떠오릅니다.
<남의 고통은 조금도 몰라 주고 성한 사람들이 저의 대중만 치고 저의 형편 좋을 대로만 하겠다는 것이 화가 나서 역정을 와락 내어 보았으나 숨결이 또다시 되어지며 말은 입속에서 어름어름하여져 버렸다. 병자는 성한 사람들이 자기에게 대한 동정과 성의가 부족하다고 늘 불만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리얼리즘의 극점(極點)인 임종.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것입니다.
살아서 접하는 모든 죽음은 어디까지나 타자화(他者化)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소설 속 명호는 죽음에 대하여 시사여귀(視死如歸,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뜻) 운운하며 객관화 할수 있는 것입니다.
<... 백년을 산대도 가던 길을 반도 못 걷고 하던 일을 손에 붙든 채 쓰러지고 마는 것이 아닌가. 자기 완성을 하고 떠나지는 못하는 것인데 미완성인 대로 뒷대에 물려주고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야 죽은 뒤에 남은 처자식이 어떻게 되든지 뒤를 깡그리 드리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다만 그것을 두 손으로 바당기고 막아 내리는 것이 생물의 본능이나 좋게 말하자면은 생리적 조건이 허락하는 때까지의 자기 주장이요, 자기의 존재를 잃지 않겠다는 무서운 단판 씨름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자기 완성을 허락지 않는 바에야 항복이 아니라 앞질러 선선히 길을 비켜서서 뒤에 물려주고 시사여귀로 조용히 물러가라는 말인데, 그렇지만 시사여귀란 저마다 할 수 있는 노릇인가.'>
아아, 아닙니다.
자신의 죽음 역시 그렇습니다.
죽기까지 자신이 겪는 죽음까지도 타자화된 죽음입니다.
<탈진을 하여 가면서도 맑게 갠 병인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언제까지 스러지지 않았다. '.... 이것은 사형수보다도 더 못 견딜 일이다. 사형수는 제 운명을 알구나 있지 않은가? 사형을 집행할 때라 두 미리 일러는 줄 테지. 이놈들이 정작 내게는 누구보다 더 먼저 알아야 할 내게는 알리려 들지를 않구서 목숨의 임자가 저희들인 듯싶게 저희들만 뒷구멍으로 숙설숙설하구 우물쭈물하다니! 대관절 산다는 거냐? 살려 주겠다는 거냐?' 눈을 감고 누웠던 병인은 머릿속이 점점 환하여지며 조리가 뻔하게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눈을 별안간 번쩍 뜨고, 누구든지 눈에 띄는 대로 소리를 버럭 질러 보려고 이상한 광채가 솟으며 부리부리 휘둘러 보았으나,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목이 탁 잠겨서 소리가 아니 나왔다. 눈의 정채가 훅 꺼지며 앞에 앉은 아내의 얼굴이 차차 멀어간다. 다시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 감기며 잠이 혼곤히 들어 버렸다. 그러나 금시로 드르렁 하고 코고는 소리가 나다가 그 소리에 소스라쳐 다시 눈을 번쩍 뜨고 두리번두리번 사방을 둘러본다. '.... 응, 잠이 들었던 게로군!' 그는 죽는 것이 아니었고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잠이 들었다가 그대로 숨이 넘어가지나 않는가 하여 잠이 드는 것도 겁이 나고 싫었다.>
진짜배기 자아화(自我化)된 죽음은 딱 한번 임종의 그 순간뿐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임종인은 죽음을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마치 그 순간을 경험한듯 합니다.
<'아, 얼마나 상쾌한 기분이냐! 얼마나 간단한 것이냐!'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고통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고통은? 응,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 이제 그만이다. 뭐, 아플 테면 아파 봐라. 거리낄 것이라곤 없다.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 있는 거냐?' 그는 이제 친숙해진 죽음의 공포를 찾아 보았으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죽음은 어디 있지? 죽음이란 뭐냐? 아무 공포도 없었다.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거기에 빛이 있었다. "아아! 이것이었구나!" 갑자기 그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 얼마나 기쁘냐!" '죽음은 마지막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죽음은 없는 것이다.' 그는 공기를 들여 마시려고 했으나 깊은 호흡은 중간에서 끊어지고, 몸을 한 번 쭉 뻗자 그대로 죽어 버렸다.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아무도, 가는 이의 이기심이라거나 보내는 자의 속물성이라거나를 어쩌구저쩌구 운위(云謂)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제가끔 저마다들 지니고 있는 죽음이니까요.
***eunbee***
2016.01.15 01:18
참으로 오랜만에 읽는 염상섭이에요. 예전사람에 속할 작가의 언어와 문체는 지금의 작가들과 다를 것 없이 읽기에 매끄럽네요. '간호부' '상제' 옛 화폐 단위 '환' 그런 단어들이 우리네 부모님 적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뿐.ㅎ
죽음이 코앞에 당도한 사람의 또렷한 정신,
보는 사람은 더욱 슬픔이 짙어지는 상황일 것 같아요.
'탈진을 하여 가면서도 맑게 갠 병인의 머릿속...'
죽을 거란 생각을 않고 이것저것 부탁하고 지시하는.. 목숨이 경각이면서도 살아내고 있는 습관적인 살이의 자세.
죽음이 임박한 병자를 다급함 속에서 집으로 모시면서도 가족들은
돈을 계산하느라...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 슬프네요. 한 일생이 끝나는 순간이건만.
소소한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니, 산다는 것이 참 서글퍼요.ㅎ
이글 읽으며, 언니 오빠가 들려준 내 엄마의 끝날 마지막 정경이 떠올랐어요.
'얘들아, 유월 초하루가 언제냐?'(그해는 윤오월이 들었던지라, 윤달은 없는 달이라잖아요.)
'왜? 엄마 떠날날 받아놓았어요?'
'그래~'
이틀 후인가, 유월 초하루 새벽, 엄마는 이야기 하더랍니다.
'얘들아, 내가 죽었으니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거라'
언니 오빠는 엄마가 우스갯 소리 하시는 줄 알고, '아이고~ 아이고~'하며 우는 시늉을 했답니다.
'얘야~(언니를 부르시며) 저기 저기 동산에 꽃들이 활짝 피었구나. 차암 경치가 좋다. 너도 함께 가자꾸나'
'엄마 혼자 가, 난 싫어~'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지요. 그러는 중에도 섬뜩하더랍니다. 이 또한 인간적인..너무도 인간적인 심경.ㅋ
농담처럼 잡담처럼 그러한 이야기를 주고 받고나서 살포시 잠이 들었답니다.
의자 팔걸이 위의 엄마 손이 아래로 툭 떨어지더랍니다.
가실날까지 염두에 두시고 이승 작별하신 내 엄마,
그 누구보다도 담담하고 깔끔하고 평온하게, 어쩌면 거룩하시다 할만큼 멋지게 가신 내 엄마,
병원도 마다하시고, 고집부리시며 자연사를 그대로 받아 들이신 그 아름다운 엄마,
엊그제는 내 엄마가 나를 낳아주신 섣달 초사흘
엄마 생각하며 하늘 바라보았더랍니다.
좀 전, 창문 열고 하늘 보았지요. 눈이 잠시 멈추었는지
시나브로 내리던 눈이 먼 하늘가에 머물고 있는지
온통 하늘은 분홍빛입니다.
온 하늘이 뽀오얀 기운 머금은 분홍으로 포근합니다.
동우님,
코~ 따숩게 주무시어요. 이 밤도.^^
***동우***
2016.01.15 05:01
은비님.
떠나는 이의 자기중심적 이기주의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내는 이들의 현실주의 타산적 속물성 역시 호리도 탓할바 없습니다.
좀 슬플지언정, 은비님 처럼..
은비님 어머니의 임종.
전에도 들은 기억 있는데, 가시는 이와 보내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 그 정경이 은비님이 묘사해 주는것보다 더 잔잔한 아름다음으로 마음을 적십니다.
상상의 여지가 많아서...
눈이 내리다 멈추고 자정 지난 깊은 밤 분홍빛 하늘....
그 또한 남녘 새벽, 상상의 영역이올시다. ㅎ
<외부내빈(外富內貧)>
-염상섭 作-
***동우***
2016.05.02 11:14
오늘 P/C 인터넷 연결이 여의치 않아 뒤늦게 모바일로 올리는 불편함.
橫步 廉想涉의 ‘外富內貧’
나이 든 횡보(橫步), 한칸 모옥(茅屋)에서 왕년(往年)의 그리움을 그리워 합니다.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 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紀)..
나보다 한 세대 앞 선 이들의 호기(豪氣) 작금 어디서 찾겠습니까.
의고풍(擬古風) 멋스러움... 한자는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파차욱을 폽니아’는 내일 밝히지요.ㅎ
<짖지 않는 개>
-염상섭 作-
***동우***
2018.01.05 06:26
횡보 염상섭(橫步 廉想涉,1897~1963)의 '짖지 않는 개'
시대의 아이러니.
해방후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 어느 도시의 모습을 냉정하고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군림자였던 일본인 판사가족, 딸은 소련 장교의 하녀(노리개)가 되고 아내는 자청하여 조선인의 식모가 되고..
도둑처럼 찾아 온 해방.
갑자기 들이닥치는 역사의 현장, 그래도 개는 짖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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