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문주반생기 (文酒半生記) -양주동- (1,4,3,3,1)

카지모도 2020. 8. 22.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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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양주동 作-

 

***동우***

2016.05.03 04:31

 

생각건대 우리 시대 삶의 양태.

생활의 후미(後尾)한 디테일에 매달려 끙끙대는, 모두 본류(本流)를 잃고 지엽(枝葉)에 얽매여 허덕이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세상과 세태가 그렇게 부추기는 듯도 합니다.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고 노래하는 것도 살다보면 쥐구멍에도 햇볕 들날 올거니까 기죽지 마라는 것이지 어떤 호연지기(浩然之氣)의 기풍(氣風)을 노래하는 건 아닌듯 합니다.

 

나 역시 시대의 쫌팽이로부터 한치 앞도 벗어나지 못하는 꼬라지임은 너무나 분명하구요.

그러나 변영로(卞榮魯)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이나 양주동의 '문주반생기' 같은 글을 읽노라면 쫌팽이도 자신의 쫌팽이가 답답하고도 답답합니다.

나남없이 째째한 난쟁이들의 세상살이...

 

저 시대 식민지 지식인 청년들, 그들의 호리건곤(壺裏乾坤)에는 좌절과 슬픔과 도피주의 또한 배어있지 않았으리까마는.

그러나 나는 그 호방한 객기 속에서 도저(到底)하게 흐르는 조선선비의 드넓은 기상(氣像)과 고상한 아취와 풍류의 멋들어짐을 느끼곤 합니다.

우정(友情)이 그러하고 관계의 모습들이 그러하고 관계를 다루는 마음들이 그러하고, 거기 곁들인 주풍(酒風)이 또한 그러합니다. ㅎ

 

으흠, 따져보면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그다지 옛도 아닙니다그려.

문인들, 생년과 몰년(沒年)을 검색해 봅니다.

 

최남선(1890-1957), 이광수(1892-1950), 김동인 (1900-1951), 염상섭 (1897-1963), 양주동 (1903-1977), 이은상 (1903-1982), 나도향 (1902-1926), 변영로 (1898-1961), 오상순 (1894-1963), 노자영 (1898-1940), 홍난파 (1898-1941), 이상 (1910-1937), 김유정 (1908-1937)

 

내 아버지가 1917년생이고 내 어머니는 1919년 생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넉넉하게 쳐서 내 한 세대 웃 연배의 사람들입니다. <최남선은 염상섭에게 부집(父執) 정도의 연령차로 생각하였는데 불과 7년 먼저 태어났군요.>

 

양주동의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

문우(文友)들과 어울려 호음(豪飮)하였던 시절의 이야기.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에 버금가는 재미.

 

아래는 본문의 일절

 

++++

<무론 상섭(想涉)이나 나에게 무슨 대단한 ‘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니나, 씨와 나와는 연령의 차이도 있고, 지방성적(地方性的) 상위(相違) ― 씨는 전형적인 서울리앤, 나는 서도(西道) 산(産)의 야인(野人) ― 도 있고 하여, 아무리 주중(酒中)에라도 피차의 ‘체면’과 ‘예의’를 잃지는 않았다. 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각자는 혹 주후(酒後)의 ‘딴 공로(公路)’를 취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길만은 한 번도 어깨동무한 적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종종 취중에 그를 ‘박해(迫害)’한 기억 ― 내가 그때 S를 여의고, K와 갈린 뒤라, 아직도 가슴 속에 약간의 상흔(傷痕)을 남겨, 술만 취하면 돌아와 번번이 나의 구작시(舊作詩) <영원한 비밀>과 <별후(別後)>를 낭음(朗吟)하였다. 읊곤 한바탕 ‘걸작’이라고 떠들고 나서, 상섭(想涉)에게 그 시고(詩稿)를 낭음(朗吟)하라고 한다. 만일 그가 불응하면, 내가 그의 귀를 잡아당기거나 심지어 입을 벌려서까지 기어코 억지로 읽게 한다. ‘시(詩)’에 원래 취미가 적은 그가 나의 ‘실연시(失戀詩)’ 졸작(拙作)에 흥치를 느낄 리가 없다. 날더러 연송 ‘주책없는 소리 말라’고 고집하다가 내 성화에 견디다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그가 마침내 하는 수 없이 꼬부라진 혀로 그 ‘시(詩)’를 낭독하고야 만다.

 

파차욱을 폽니아 (발자욱을 봅니다.)

파차욱을 폽니아 (발자욱을 봅니다.)

파닷가의 초그만 (바닷가의 조그만)

파차욱을 폽니아 (발자욱을 봅니다.)

 

“어때? 과연 걸작이지?”

“듣기 싫어! ‘파차욱’은 무슨 ‘파차욱’? 모두 다 주책없는 소리……”

상섭(想涉)이 ‘시(詩)’에 자못 흥미가 없었음에 대하여 나는 또 그때 ‘소설’의 경계를 아주 몰랐다. 그가 끙끙거리며 열심히 퇴고(推敲)하는 그의 작품의 그 치밀한 묘사와 끈기 있는 줄기찬 문장으로 된 그 순사실적 소설풍(小說風)을 나는 그때 아주 trivialism으로 간주하였으나, 그 반면에 나의 야심 설계작 장편 ‘삼부(三部) 소설은 아직도, 그리고 영영, 복고(腹稿)의 구상뿐으로 숫제 한 줄도 쓰지 못한 터이니, 말하자면 버선 한 켤레도 꼼꼼히 말라보지 못한 시골 색시가 서울 마누라의 저고리 깃ㆍ섶 솜씨를 비평하는 격이었다 할까.>

++++

 

어제 리딩북에 염상섭의 ‘외부내빈(外富內貧)’을 올리면서 했던 말.

"파차욱을 폽니아"하는 반벙어리소리.

이제 무슨 뜻인가 아셨지요?

자신의 걸작시(傑作詩)를 낭음(朗吟)하라고 귀를 쥐어 당기고 코를 비틀리고 입을 어기어 가면서 보채고 조르는데 어떻겁니까.

두 취객이 그걸로 실랑이 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면..ㅎㅎ

 

저와 같은 애교스러운(?) 주태(酒態)는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적 술마시기는 요즘과는 또 달랐을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술은 대체로 즐기는 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적(젊었을 무렵)에는 대체로 까는(?) 술이었지 싶습니다.

주탁 두드리는 젓가락 장단의 노래도 없지는 않았지만, 되도 않는 테마나 유명짜한 문화인물 하나 올려놓고 나름 입에 게거품 물고 까대는 겁니다.

어디서 주어들은 풍월, 잡지에서 슬쩍 곁눈질 하였던 문장같은 걸로, 그 부문의 대단한 천착(穿鑿)이라도 있었던양.

하하, 옆에 서당개 한마리 있었다면 그 개가 앙천(仰天) 가가(可呵)하였을 겁니다.

 

양주동 일당은 가난한 동경 하숙방에서 왜소주 한병을 겨우 구하여 나누어 마십니다.

그리고 세사람은 움직이면 술이 깰까봐, 배가 고플까봐 내 천(川)자로 가지런히 드러누워 부동(不動)의 자세로 온종일 앙와(仰臥)하고 있습니다.

양주동은 벽에다 ‘동즉손(動則損)’ <움직이면 손해>라고 표어까지 써붙이고서.

 

그런데 우리 적 주탁의 게거품은 고요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언설의 근거고 말의 조리고 얘기의 논리고 따위는 뒷전, 주탁에서는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이었지요.

우리의 표어는 ‘動則損’이 아니라 '묵즉손(默則損)' <조용하면 손해>였었을겁니다. ㅎㅎ

그 시절 12시 야간통금이 있었는데, 반산(??) 취보(醉步)로 누군가의 시계를 잡혀 들어간 여관방에서도 '默則損'은 위력을 발휘하였지요.

그건 객기도 아니고 치기도 아니고 따라지 청춘의 열패감과 피해의식이 만들어 낸 슬픈 허세였을겁니다. ㅎ

 

***동우***

2016.05.04 04:41

 

해동천재니 마산천재니하고 다투는 양주동과 이은상.

천재라고 뽐내는 그들의 기억술은 일종의 요령.

그 기억술 얘기가 나와서 몇마디 늘어 놓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저 관념연합에 의한 기억술도 괜찮지만, 내 경우 결합기억법이 더 쉽고 유용하답니다.

팁을 드릴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이를테면 머릿속에 상상의 포스트를 미리 세워두고 거기에다 기억할 대상의 어휘(사물)을 결합하는 방법입니다.

예를들어 1번 머리, 2번 이마, 3번 눈썹, 4번 눈, 5번 코, 6번 입, 7번 턱, 8번 목, 9번 가슴, 10번 배.. 식으로 자신의 신체 상부에서 하부로 번호를 정해, 포스트를 세워 놓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단어의 이미지를 결합하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12 간지를 외워볼까요?

머리털 속에 쥐가 숨어있는 이미지, 이마에 소뿔이 나있는 이미지, 호랑이가 눈썹을 뜯어먹는 이미지, 토끼눈처럼 빨갛게 변한 자신의 눈, 코에서 용처럼 불을 뿜는 모습, 뱀혀가 날름대는 입...

절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젊었을적 나는 우리집 현관을 나서서 회사에 이르기까지 거처지나가는 사물(현관, 계단, 아파트 입구, 비디오 가게, 수퍼, 버스정류장, 순서대로의 정거장....)로 100개의 포스트를 세워 놓았습니다.

아이들에게 무작위 100개의 단어를 쓰고 아비에게 3번쯤 불러보라고 하였지요.

그리고 머릿속으로 단어 이미지를 100개의 포스트에다 붙들어 맸습니다.

불러주는 횟수가 반복될수록 그 이미지는 견고하게 머릿속에 자리잡지요.

한 30여분 걸렸을겁니다. 순서 하나 안틀리고 100개의 단어를 완전히 외울수 있답니다.

뿐만 아니라, 병아리가 몇번째였지? 하고 물으면 서른 네번째하는 식으로 답할수도 있지요.

분명히 말하지만 내 아이큐는 절대 높은 편이 아닙니다,

머릿속에 정확하게 포스트가 자리잡고 있으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숫자 외우기 팁도 하나 드리지요.

1234... 를 ㄱㄴㄷㄹ.. 하는 식으로 순서에 따른 한글의 대체 이미지로 기억하는 기억술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67번은 버스 이미지로, 6 (버, 가다라중 ㅂ은 6번째니까) 7 (스, ㅅ은 7번째니까) 식으로..

그런데 실제로 활용해보면 이 방법은 상당히 번거롭고 결코 쉽지 않더군요.

 

내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것도 숫자 이미지를 발음의 이미지 포스트로서 미리 머릿속에 마련해 두는 겁니다.

오리는 52, 칠판은 78, 두리는 22, 김영삼대통령은 03. 33은 석쇠..하는 식으로.

어느 사람의 전화 번호가 6389 (우산방구)라면 그 사람이 우산쓰고 가는 모습과 우산대 꼭대기에서 방귀가 뽕뽕나오는 이미지와 결합하여 머리속에 새겨넣는 겁니다.

 

나폴레옹이 황제즉위 년도는 1804년입니다, 나는 이걸 이렇게 연상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권총을 쏘아 총알이 흑싸리 화툿장을 꿰 뚫는 그림으로.

18은 '한발'로 04는 '흑싸리 화툿장'으로 내 머릿속에 포스트 되어 있거든요.

 

거듭 거듭, 내 아이큐는 높지 않습니다!

이 방법- 굳건한 포스트가 마련되어 있으면,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나 따위도 한목 하는 기억술,

나는 영도천재이리다. 핫핫핫

새벽 객소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