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낙동강. 장삼이사. 바보 용칠이]] (1,4,3,3,1)

카지모도 2020. 8. 31. 21:04
728x90

 

-독서 리뷰-

 

[[조명희]] <낙동강>

[[최명익]] <장삼이사>

[[최태을]] <바보 용칠이>

 

 

<낙동강>

-조명희 作-

 

***동우***

2013.07.01 05:03

 

오늘 아침 우연히 텍스트파일 얻어, ‘포석 조명희'(1894~1938)의 유명한 단편 '낙동강' (1927년 발표)을 올립니다.

프로(프로레타리아) 문학의 이정표적인, 카프 (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내부논쟁을 유발한 중요한 작품이라고 들은 적 있지만 나도 처음 읽었습니다.

사회주의의 조직적 연대성의 대두(擡頭)라던가 하는 평가.

 

읽고난 감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문학적으로는 썩 보잘것 없네요.

이와 같은 작품은 문학 욋적(外的)인, 어휘라던가 행간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바가 더 많은듯 합니다.

더불어 그 시대 젊은 지식인들의 순정한 이념 한조각은 만져지는 듯 합니다.

작금 시대의 오로지한 가치, 개별적 집단적 이기주의..한반도, 남북을 막론하고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을 그 '순정함' 말입니다.

그건 어쩌면 나처럼 범속하고 말랑말랑한 인물에게는 그냥 로맨티시즘이라 해도 좋겠지요만. ㅎ

 

구포역이나 낙동강등은 내게 낯익은 풍광이고, 로자 룩셈부르크나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이나 형평사(박경리 '토지'의 관수의 캐릭터가 떠오릅니다)같은 것들은 내게 어떤 서사의 연상을 자아내는 익숙한 어휘이기도..

 

짧은 소설이니까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장삼이사>

-최명익 作-

 

***동우***

2016.07.20. 04:36

 

'최명익'(崔明翊, 1903~1972)의 '장삼이사(張三李四)'

최명익을 처음 읽습니다. (내가 이렇답니다)

 

다음은 인터넷에서 주어온 그의 프로필입니다.

++++

최명익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나 1916년 평양고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으며, 1923년 돌아와 1928년경부터 유방(柳坊)이라는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해방이후 1945년 9월, 북한 최초의 문화단체인 ‘평양예술문화협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회장직을 맡았다. 1946년 이후, 최명익은 점차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으며 1956년 「서산대사」, 1961년 「임오년의 서울」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부르주아였던 전력이 문제시되어 숙청되었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1941년 발표한 이 소설,

나는 놀랐습니다.

일제 말기 암울한 시대. 식민지 작가의 '모더니즘'에.

 

삼등열차칸의 풍경화.

몇 승객들이 벌이는 작은 소동을 관찰자의 눈으로 묘사하는 소설의 화자(화者)는 지식인인듯한 한 사내입니다.

 

만주일대에서 색시장사하는 포주, 두꺼비같이 생긴 중년신사.

도망갔다가 그에게 잡혀 다시 유곽으로 끌려가는 색시.

그리고 대여섯 승객들.

 

포주를 경원하고 혐오하던 사람들은 그가 건네는 술잔에 슬슬 그의 비위를 맞춥니다.

색시를 두고 모욕스런 짓거리가 낭자합니다.

교대하여 기차에 오른 포주의 아들이 분풀이로 색시의 따귀를 후려갈깁니다.

색시는 이를 악물고 변소로 갑니다.

 

어떤 망상에 사로잡힌 화자(話者)는 초조해집니다.

변소로 들어간 색시가 모욕감에 혀를 깨물고 죽어 있을거라는

그러나 색시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와 자리에 앉습니다.

 

<아아, 그러나 이런 나의 악몽은 요행 짧게 끊어지고 말았다. 그 여인이 내 무릎을 스치며 제 자리로 돌아왔다. 무사히 돌아올 뿐 아니라, 어느새 화장을 고쳤던지 그 뺨에는 손가락 자국도 눈물 흔적도 없이 부우옇게 분이 발려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직업 의식적인 추파로 내게 호의를 표할 듯도 한 눈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 여인이 그렇게 태연히 살아 돌아온 것이 퍽 반가웠다.

"옥주년도 잽혔어요?"

내가 비로소 듣는 그 여인의 말소리였다.

"그래, 너이년들 둘이 트리했던 거로구나."

하는 젊은이의 말도, 지난 일이라 뭐 탄할 것도 없다는 농조였다.

"트리야 뭘 했댔갔소. 해두 이제 가 만나문 더 반갑갔게 말이웨다."

이런 여인의 말에 나는 웬 까닭인지 껄껄 웃어 보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제하였다.>

 

범부범부(凡夫凡婦). 장삼이사(張三李四)..

그렇습니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삶을 사는 우리의 속됨이 대체로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근대 모더니즘, 이상(李箱)만 있었던게 아니었군요.

두루 무지한 나.

 

도서관에서 최명익을 찾아 읽으려 합니다.

최명익, 파일 얻게 되면 또 올립지요.

 

 

<<바보 용칠이>

-최태응 作-

 

***동우***

2017.01.07 04:24

 

'바보 용칠이'는 '최태응(1916∼98)'의 대표작입니다.

 

<날이 밝으면 사람마다 자기 내외를 두고 지껄일 것과는 제법 반대의 뜻을 품고 그는 무연한 벌판을 달리며 혼자 생각하였다. "인제 다른 동네루 가문..... 바보.... 소리두 못 듣갔구나.">

 

에리히 프롬이 설파한바, 사랑은 기술이라고 합니다.

산다는게 하나의 기술인 것처럼.

사랑이란 사랑할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의 문제로서, 그저 상대의 사랑에 달콤하게 빠져드는게 아니라는군요.

사랑은 받는게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말과도 상통할듯 합니다.

 

그옛날 초원의 빛은 죄 어딘가로 가뭇 스러져 버렸지만 늙은 가슴에도 사랑은 남아있습니다.

그 사랑은 내 것이었으므로.

의지로써 사는 삶은 아름답지만 욕망으로써 사는 삶은 추하다고 박경리는 말하더군요.

 

외간사내와 바람핀 헌 계집을 그대로 아내로 데리고 살고자 하는 용칠이.

주류적 양태와는 다른 선택의 방외적 삶.

그건 바보만이 선택한 하냥 루저의 삶일까요.

 

아내를 향한 저 고통스러운 파토스를 극복해 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리오마는.

용칠이는 삶의 오의를 깨달아 긍정적 자기인식에 이른게 아닐는지...

 

용칠이는 적어도 나와 같은 쫌팽이보다는 훨씬 웃길이외다.

 

객설 한마디.

능력이나 지식이나 지성, 철학이나 정의나 이념이나 공정, 가치관이나 도덕관등에 있어서 어처구니없으리만큼 부족하고 부당한 자들.

그리도 모자란 면모들로써 위임된 권력을 제멋대로 농단한 저들.

추호라도 시대의 위너(winner)의식을 갖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운이 나빠서.. 재수 없어서..때가 안좋아서.. 순간의 실수 때문에..따위)

스스로 시대에 부끄러운로 자로서의 의식을 갖게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