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원고료 이백원>
-강경애 作-
***동우***
2016.01.28 04:20
일제시기의 여성작가 가운데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강경애 (姜敬愛, 1907~1943).
강경애는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에 가입하지 않았으면서도 프로문학(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지향하였던 작가입니다.
궁핍한 환경에서 성장하고 공부한 그녀의 생각들은 이론이나 관념에서 비롯된게 아니라 최서해(1901~1933)처럼 몸으로 체득한 사상이라지요.
원고료 이백원.
그러나 이 소설, 사상이고 나발이고, 나는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오릅니다.
저 남편이라는 작자도 그렇거니와 그에 순복하여 직수굿이 기어들어가는 저 아내짜리의 행태에도.
<"그래. 당신은 그 돈을 어떻게 썼으면 좋을 듯 싶소?" 그 물음에 나는 혀를 깨물고 참았던 눈물이 샘솟듯 쏟아지더구나. 그 순간 남편이야말로 돌이나 깎아논 듯 그렇게도 답답하고 안타깝게 내 눈에 비치어지더구나. 무엇보다도 제가 결혼 당시에 있어서도 남들이 다하는 결혼 반지 하나 못해 주었고 구두 한 켤레 못 사주지 않았겠니. 물론 그것이야 제가 돈이 없어서 그리한 것이니 내가 그만한 것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이 생긴 오늘에 그것도 남편이 번 것도 아니오 내 손으로 번 돈을 가지고 평생의 원이던 반지나 혹은 구두를 선선히 해 신으라는 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겠니. 그런데 이 등신 같은 사내는 그런 것은 염두에도 먹지 않은 모양이더라. 나는 이것이 무엇보다도 원망스러웠다.>
스스로 번 돈으로 평생의 원이던 반지나 구두를 갖고싶다는 아내의 저 소박한 소망.
그런 아내의 뺨을 후려치고 북국의 찬바람 속으로 쫓아내는 저 남편짜리.
사회주의라는 대의를 표방하는 듯한 남편의 저 냉혹한 강개(慷慨)야말로 개인주의이고 스스로 의식치 못하는 지독한 위선입니다.
도그마에 순치된 광신도.
더불어 여필종부라는 옛 윤리의식을 떠나, 도무지 남자라는 명색이 한 여자의 마음을 대하는 마땅한 예의가 도무지 도무지 아닙니다.
아무리 봉건적 잔재와 시대정신의 절박성을 감안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저 한심한 아내짜리도 가관입니다그려.
야, 나와 같은 처지에서 금시계, 금반지, 털외투가 무슨 소용이 있는 게냐. 그것을 사는 돈으로 동지의 한 생명을 구원할 수 있다면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떳떳한 일이냐. 더구나 남편의 동지임에랴. 아니 내 동지가 아니냐. 나는 담박에 문 앞으로 뛰어갔다.. "여보. 나 잘못했오." 뒤미처 문이 홱 열리더구나. 그래서 나는 뛰어들어가 남편을 붙들었다. "여보. 나 잘못했오. 다시는. 응" 목이 메어 울음이 쓸어나왔다.>
인간주의적 리얼리즘을 짓밟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눈가리고 아웅-
이념에 경도된 짓거리들이 흔히 저러합니다.
강경애는 프로문학을 하기 전에 페미니즘부터 주창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 참.
검색하여 보니 그녀는 페미니스트 운동가이기도 하였다네요.
야, 너는 책상 위에서 배운 그 지식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이제야말로 실천으로 말미암아 참된 지식을 얻어야 할 때이다. 그리하야 너는 오직 너의 사회적 가치(社會的 價値)를 향상시킴에 힘써야 한다. 이 사회적 가치를 떠난 그야말로 교환가치(交換價値)를 향상시킴에만 몰두한다면 너는 낙오자요 퇴폐자이다. 이것은 결코 너를 상품시 혹은 물건시하는 데서 하는 말이 아니오. 사람이란 인격상 취하는 방면도 이러한 두 방면이 있다는 것을 네게 알려주고자 함이다.>
저 남편이라는 작자와 아내라는 가시버시.
도무지 목불인견(目不忍見)이올시다.
요즘 여성들, 이 소설 속 사회적가치니 어쩌니하는 세리프는 죄 귀신 씨나락 까먹는 헛소리로 들릴겁니다.
오히려 사회적 가치라는 것에 대한 반발이 앞설겁니다.
좌파들이 극우작가로 폄훼해 마지않는 소설가 이문열.
개인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에 경도된 현대여성의 가치관을 나무라는 이문열의 충고가 차라리 진실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래, 이문열의 글을 덧붙입니다. (이문열의 책 '사색'중에서, 가지고 있는 텍스트 파일 일부를 베껴 쓴 것입니다)
***동우***
2016.01.28 04:23
++++
<'사색' 중에서 발췌>
-이문열-
이름 모를 누이여
생각하고, 쓰는 일에 꽤 오랜 기간과 열정과 성의를 바쳐왔지만, 언제나 이런 종류의 글은 내게 곤혹과 피로를 준다. 아직 내 나이는 삶의 참뜻을 속속들이 맛보았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여 내 체험과 사려도 남에게 교훈을 줄 만큼은 되지 못하고, 또 해박한 지식이나 심오한 학설을 전할 만큼 고구(考究)에 잠겨 본 바도 없다. 더군다나 그런 것들이라면 나보다 몇배 훌륭한 스승들이며 위대한 저술들이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몇 달 전에 나는 그 어떤 흥취에선지 그대들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청탁을 받아들인 바 있다. 그 뒤 나는 그 성급한 수락을 깊이 후회하면서도 이 글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로 궁리해 보았다. 그 결과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이름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 그대들을 모두 손 아래 누이로 보고, 이 허심탄회한, 그러나 자칫 지루하고 막연할지도 모르는 편지를 내는 일이었다.
약속은 이행되어야 한다.
이름 모를 누이여.
나는 오래 전부터 그대들 사이에 세상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없으며, 영원이나 절대나 완성은 물론, 진실이며 아름다움조차도 필경엔 주관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우려해 왔다. 우리 시대의 한 특징인 가치관의 혼란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예로서 짐작컨대 그것은 가치의 결핍에서가 아니라 지나친 풍요에서 왔다.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도 모든 것이 단순하고 자명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시대에는 신(神)이 절대적인 가치였고, 완성이었고, 영원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선택의 필요 없이도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있었고, 우리의 삶도 단순히 그것에 맞게 채워가면 그 뿐이었다. 또 어떤 시대에는 국가가 신을 대신하기도 했고, 다르게는 이성이나 특정한 이념이 절대의 가치로 군림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시대에 들어서면서 갑작스런 가치의 폭발이 있었다. 수많은 가치가 저마다의 주장을 가지고 똑같이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승인을 요구했다. 그중 어떤 것은 전시대에는 다른 강력한 가치에 종속돼 있던 것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인되어 있기도 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지금 시끄럽게 자기를 주장하는 그 모든 가치들도 새로이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자신만만하고 힘있던, 그러나 그만큼 오류와 편견에 빠져있던 판관(判官)일 뿐이다. 평판(平板) 위에 올려진 여러 가치 앞에서 우리 스스로 선택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선택은 어렵다. 더구나 우리의 삶을 인도할 중요한 것이, 이토록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은 그 선택을 단순한 혼란 이상의 고통으로 만든다. 그러나 선택 혼란이나 고통이 가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그대들에게 말한다. 세상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도 있으며, 진실과 아름다움은 물론 영원도, 절대도, 완성도, 존재한다고. 그리고 또한 말한다.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는 반드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이름 모를 누이여.
이 또한 앞서의 단정을 부연하는 것이 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대들이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두 발로 서기를 포기한 것 같은 의구를 버릴 수가 없다. 그대들이 언제나 기다리는 것은 타자(他者)로부터의 신호 이며, 찾는 것은 완제품과 같은 결정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오는 것은 대부분 엉터리 신호이거나 과대 포장된 불량품이었다. 나는 그대들이 갖가지 상품적인 이데올로기나 진실의 탈을 쓴 독선에 분별없이 빠져드는 것을 보았다. 화려한 언어의 탈을 벗기면 한줌의 감상과 동물적인 육욕밖에 눈에 띄지 않는 책들을 즐겨 취하는 것을 보았고, 낡은 사상들을 자기의 것인 양 변조해서 아무런 동정이나 연민도 없이 단순히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 사회 밑바닥의 참혹한 얘기나 즐기고, 더러는 자신의 부패한 애정편력이나, 깊이도 성실성도 다같이 의심되는 종교적 체험을 과장스레 떠벌인 장르 불명의 책을 끼고 다니는 것도 보았다. 진정으로 유익한 타자로부터의 신호를 받아들이기 위해 바쳐야 할 노력과 성의를 아낀 탓으로, 까닭없이 가슴 섬뜩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노력과 성의를 아끼지 않는다 해도 결국 타자로부터 오는 것은 타자의 것일 뿐이다. 상품과는 달라서 모든 정신 활동의 소산에는 그대로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 완제품은 없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 양질의 재료이며, 그것들 자신의 사유로 가공된 후에야 삶을 위해 어떤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리고 그대들을 지칭하는 지성인이란 말은 보석이나 사치한 의상처럼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라, 바로 그런 양질의 재료를 선별하는 안목과 그 재료를 자신의 삶에 유익한 어떤 것으로 가공하는 능력을 남보다 좀더 연마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아래 계속-
***동우***
2016.01.28 04:24
-위에서 받음-
이름 모를 누이여.
또 나는 그대들이 선악이라든가 도덕 혹은 윤리 같은 말들에 점점 둔감해지는 것 같은 징후에 씁쓸해 한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강 저편 언덕에서는 죄악이 되는 일이 이편 언덕에서는 자랑이 되는 수가 있고, 재난은 선악을 불문하고 우리를 찾아들며, 옳음과 곧음이 마침내는 이기게 되리라는 믿음은 어디서나 의심받고 있지만, 나는 그대들에게서까지 그같은 징후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하면 인류의 출발을 백만년 전으로 잡는다해도 병들어 죽거나 늙어 죽은 동료의 시체를 뜯어 먹거나 들판에 버리지 않고 정중히 묻어주는 데 무려 구십 칠만 년이 걸렸을 만큼 우리들 도덕감의 진보는 느렸다. 그러나 나는 믿고 싶다. 불이나 언어나 도구의 사용 못지 않게 인류의 오늘날을 가져온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느린 대로 그런 도덕감의 진보일 것이라고, 그리고 어떤 시대가 특별히 불행했던 것은 그 시대의 도덕감이 마비된 탓이었지, 그 시대가 불행해서 인류의 도덕감이 마비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이름 모를 누이여.
그리하여 나는 점차 그대들의 정신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가는 거대한 이기(利己)를 확인하게 되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사실 이기가 합리 혹은 개성 등의 이름으로 자신을 미화한지는 오래 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더욱 찬란한 구실과 설득력있는 변명을 장만하여 우리 정신을 유혹하고 있다. 그대들보다 더욱 성숙되고 지혜로워야 할 사람들조차 거기에 감염되어, 주기보다는 받기에, 봉사하기보다는 봉사 받는 데에 더 큰 관심과 기대를 나타내는 이런 시대에, 유독 그대들에게만 그런 이익이 많고 편한 사고방식을 포기하도록 바라는 것은 무리일는지도 모른다. 또 그대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지적에 발끈할 것이고, 더러는 적극적으로 어떤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반증으로 내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합리적이고 개성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도 대개는 다만 이기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을 뿐이며, 때로는 봉사하고 헌신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도 그것은 결국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을.
예를 들어, 양친의 경제력이 허용된 범위 안에서 한 벌의 고급 블라우스를 사들이는 것일지라도, 그 한 벌 값에 해당하는 임금을 벌기 위해 몇 날 혹은 몇 달이고 비위생적인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는 자매들을 떠올릴 수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둔감 이상의 이기이며, 설령 그대들이 이웃에게 곧바로 일용할 양식을 내어주고 있더라도 진정한 애정과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허영이나 사치, 다시 말해 이기(利己)의 한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 모를 누이여.
그 다음 도덕감의 마비와 관련 되어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그대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성(性)에 대한 그릇된 해설과 오도(誤導)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성(性)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워야 한다 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성적인 자유란 곧 개방이다 라고.
그러나 조금만 유의해 살피면 거기에는 논리 자체가 잘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쉽게 볼 수 있다.
첫째로 자연과 자유라는 개념의 관련이다. 도대체 자연은 자유로와야 한다든가 억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은 어떻게 나온 거일까? 내가 보기에 인간의 문화는 언제나 자연을 억제하고 조절하는 가운데에게 이루어졌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혜택 또한 대부분 억제되고 조절된 자연에서 얻어졌다. 그런데도 다른 모든 것은 그대로 누리려 하면서 유독 성(性)만은 저 거칠고 무분별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둘째로는 자유와 개방의 관련이다. 자유라는 것과 즉흥적이고 무원칙한 개방이라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연결이 없다. 그런데도 그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이 사회에 유포되어 있음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나친 단순화의 흠은 있지만, 그것은 그것을 주장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에 의해 조작된 논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 이 역시 표면적인 관찰일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자일 것이라는 의심은 버릴 수 없다. 어떤 지역, 어떤 문화 형태에서이건 성적인 문제에 관한 한 아직도 남자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 특히 우리처럼 여전히 전통적 사회의 인습과 윤리관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에서는 십중팔구 피해를 입는 쪽은 여자가 되고 만다. 일견 모든 것이 허용된 것 같은 서구에 있어서도 결과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인형의 집을 떠난 노라 가 행복해졌다는 뒷소식을 듣지 못했고, 채터리 부인 이나 더 많은 성적인 투쟁으로 명성을 드날린 여인들도 그로 인해 행복을 쟁취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만약 그곳에서 여성의 지위가 이곳보다 높아졌다면 그것은 다른 방면에서의 성과이지 성(性)의 해방에서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양보할 기분이 없다. 그대들이 진심으로 섬뜩하게 상기해 보아야 할 일이다.
이름 모를 누이여.
그 밖에 나는 또 그대들이 지나치게 물질적이고 향락적인 문화에 쏠려들고 있음을 근심한다. 지난 이십년간 쉴새없이 잘 살아보자 라는 구호로 그대들의 정신을 길러왔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취된 후에는 소비의 미덕만을 과장스레 떠벌여온 기성세대가 일차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대들까지 변명되지는 않는다. 좀 구식의 비유일는지는 몰라도 화려한 의상과 찬란한 보석은 언젠가 땅위에 남겨두고 가야하고, 편안하고 잘 먹여 가꾼 육신도 끝내는 흙 속의 벌레들에게 내주어야 한다. 어떤 이는 한 번 뿐인 삶을 내세워 스스로를 변명하지만, 한 번 뿐인 삶이기에 우리는 더욱 가치 있는 일에 써야하지 않겠는가?
이름 모를 누이여.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노성(老成)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였을는지 모른다. 그것도 그대들 중 극소수의 예를 마치 그대들 모두가 빠져 있는 끔찍한 잘못이나 되는 것처럼 은근히 나무라가며, 거기다가 아직은 이미 한 얘기의 곱절이나 더 할 얘기가 남아있다면 그대들 대부분은 아마도 나에게 분개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게도 변명은 있다. 그대들의 아름다움과 지혜로움과 상냥함에 대해 감탄하는 일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들을 위해서 피했다. 바보만이 칭찬을 나무람보다 기뻐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나는 표현에 있어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강요적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내 말의 권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들이 이 시대, 이 사회에 가치 있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기억해야 할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사람은 저마다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그대들이 이 사회에서 혜택받은 계층에 속한다는 것은 그것을 누릴 권리가 아니라, 바르게 써야 할 의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나는 다만 그걸 상기시키기 위해 필요이상 낮을 찌푸리고 목소리를 굳게 하였을 뿐이며, 그대들에 대한 애정과 기대는 이 사회 누구보다도 못지않다.
++++
***eunbee***
2016.01.28 06:50
에궁~~ '벼르던 제사'가 됐네욤.ㅋㅋ
3시반 너머까진 유키 구라모토와 친구들,이란 예당콘서트홀 연주회 이어폰 감상하던 내가 그새 두시간반쯤 어디갔다 왔대유? ㅎㅎ
6시 막 지난 동천
별도 없고... 샛별이 내가 눈 감고 있던것 알았나 보아요.
구름낀 아침하늘.
피아노와 신지아의 바이올린이 자장가였네요. ㅋ
이문열 아저씨 꺼만 읽었어요.
더 잘까.. 본문 읽을까... 계산하는 중.
***동우***
2016.01.28 07:43
그냥 더 주무슈, 은비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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