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잡설들

[[루이제 린저]] -1.2- (1,4,3,3,1)

카지모도 2020. 9. 2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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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운명을 넘어서 그대에게>

-루이제 린저 作-

 

***동우***

2014.06.23 04:15

 

'루이제 린저' (Luise Rinser,1911~2002)

그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는 꽤 읽혀 우리에게 친숙하지요.

윤이상이나 북한과의 관계로서도 잘 알려진 작가이고 김일성의 애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ㅎ

 

루이제 린저의 '운명을 넘어서 그대에게'

4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어디 누가 옳은지 두고보자구.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갈 길을 가고 말 테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 안젤리나는 참으로 꿋꿋한 여성입니다.

인간과 역사와 세계에 대한 인식, 뚜렷한 삶의 목표와 의지, 선택과 투신, 그리고 행동.

 

그리하여 가열찬 투쟁을 초극(超克)하여 안젤리나가 도달한 영토는 어디일까요?

아, 그곳은 그러나 유물론의 어떤 경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줄곧 고개를 저었던 神의 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늙어 내게 무엇이 있는가 생각하면 앗득합니다.

생과 대결하는 헛폼 한조각 남아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여적도 심령에 몽롱한데..

 

[아, 때때로 모든 것을 내던져버릴 만한 위험이 없는 생이란 무가치한 거야. 라고 나는 말하고 나서 나도 모르게 나에게 엄습해 온 남의 사상에 놀랐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 내가 그걸 믿고 한 말인지를 스스로 분간할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여태가지 무엇을 과감하게 해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생의 한가운데-]

 

***꿈쟁이***

2014.06.24 17:29

 

루이제 린저.. 젊을때 무척 좋아했는데 이작품은 처음입니다.

읽을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삶이 어딘가를 향한 여정이라면 안젤리나처럼 '그분'을 향해 가는것 아닐까요.

 

***동우***

2014.06.25 02:31

 

꿈쟁이님.

나도 이 작품 처음 읽었습니다.

 

기억 속, '생의 한가운데'

하나의 치열한 여성성으로 남아있는데, 이 소설은 좀 뜻밖이었습니다.

'루이제 린저'의 기조에 기독교가 담겨있음도 처음 알았습니다.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요.

진지하게 읽어주시는 꿈쟁이님 같은 분에게.

 

***동우***

2014.06.24 04:36

 

神父는 말합니다.

<"그분이 내놓은 조건은 우리에게 살상을 그만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여야만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는 당신네들이 소망하는 바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평화는 그분께서 말씀하신 평화와는 또 다른 것입니다.">

 

안토니오는 내뱉습니다.

<"저도 그건 압니다. 당신네들의 그 영혼의 평화, 정신적인 만족에서 비롯된다는 그 불쾌한 위안!">

 

유물론자에게 神이란 그렇습니다.

"그 불쾌한 위안!" 이라고.

 

혁명가는 형이상학 따위, 사변을 경멸합니다.

그들의 휴머니즘과 정의와 이념은 현실의 사회구조 속에서 우러난 과학적인 것들입니다..

신의와 용기와 지혜. 어떠한 어려운 상황이라 정면으로 맞닥뜨려서 헤쳐나가려는 행동주의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기반합니다.

 

'루이제 린저'

그녀도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국가반역죄와 군사력파괴죄로 나치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45년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전쟁이 끝나서 살아났다고 하지요.

 

그런데 무엇일까요.

살륙과 파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싹트는 투사 안젤리나의 神의식...

인간에 대한 저 편만한 사랑, 그 구체성은.

 

<그래서 무얼 했냐구? 난 한 가지 서약을 했어. 내가 저지른 일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자기 앞의 생, 무수한 길.

스스로에 다하여 의미있는 삶.

 

다 늙어 두리번 거리는 '삶의 의미'

요즘, '빅터 프랭클'을 읽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의 '쾌락에의 의지' 아들러의 '권력에의 의지.

빅터 프랭클은 '의미에의 의지'를 설파하는 비엔나 제3 학파, '로고데라피'의 창시자이지요.

'의미'가 인간을 살게 하는 원초적 동력이라는...

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좀 지껄일 기회가 있겠지요.

 

***동우***

2014.06.25 02:14

 

예수께서는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쳤습니다.

그는 바울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그러기 위해서 나를 쓰러뜨려 발을 삐게 하신 건가요?>

 

빈 수도원 ,진지하고도 엄격한 명제를 가지고 안젤리나는 하나님과 싸움합니다.

유물론자인 그녀는 신과의 그 고독한 쟁투가 고통이었지만 그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안젤리나의 회심,

더듬어 느낄 뿐입니다.

 

<벗어남은 또 하나의 속박이요, 속박 속에 거주하는 자만이 자유를 얻는다.>

 

시편 137편.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너희들 중 자식들을 집어들어 반석에다 패대기를 친 자는 행복하여라라고. 나는 누구도 그렇게까지 저주해 본 적은 없었어. 파시스트들이 우리 아버지를 끌고 갔을 때도 그런 식의 저주는 하지 않았거든. 필경 시편 속에 나오는 그 저주의 말에는 다른 의미가 있을 거야. 하지만 난 아직 그걸 전혀 모르겠어.">

 

그 오의(奧義), 나같은 날나리가 더듬을수 있으리까.

다만 간구할 따름이지요.

Lnveni, guem diligit anima mea. <내 영혼의 쉴 곳, 나 여기서 발견하다.>

 

***동우***

2014.06.26 04:36

 

<당신은 이제 당신의 그 현실에 대한 참여를 진정 천주님께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당신의 머리와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치에 대한 의식을 지울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당신이 이 세상을 돕는 데는 당신의 기도와 희생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당신이 이런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당신의 부모 형제는 흡족해 하십니까?>

 

안젤리나는 필경 神에 도달하였다.

 

<"바로 그대 떠날수 있거든 떠나라.">

 

반파시즘, 이념, 인류애, 사랑, 부모, 공부..

그런 세상의 영역으로 안젤리나는 왜 떠나지 못하는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인가, 섭리인가.

 

격동의 시대.

부정의에 저항하여 시련과 싸우면서 자기신념과 강인한 의지로 살아가는 이지적인 여성, 안젤리나.

그녀의 격렬한 삶 속에 무슨 계기가 있었던가.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거나 어떤 도덕적 각성(사람을 죽였다는)에서 비롯된 것일까.

무엇이 그녀의 행동주의 속에서 실존적 회의가 싹트게 하였을까.

 

'루이제 린저'의 기독교는 명확하지 아니하지만, 안젤리나는 하나의 운명의 이야기로 아름답다.

'안젤리나' 라는 개성적 운명에다가 기꺼이 자신의 미래를 투신하여 동참하는 '기울리아'의 운명도.

 

만년에 루이제 린저는 이런 술회를 하였다고 한다.

 

<1911년 4월30일.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날.아주머니 한 분이, 침대 머리맡에 꽃다발을 든 소녀가 벼랑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수놓은 양탄자를 걸어 주셨다 양탄자 속의 소녀는 자신의 길이 얼마나 험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러나 소녀는 뒤쪽에 떠도는 천사같은 존재를 느꼈으리라.나는 어린 시절 그 존재를 가리켜 나를 보호해주는 천사라고 불렀고 그 후에는 신이라고 불렀으며 나중에는 운명이라 불렀고 에로스라고도 불렀으며 이제는 다시 신이라고 부르게 됐다.>

 

***꿈쟁이***

2014.06.26 12:45

 

이제야 '떠날수 있다면 떠나시지요'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본 기억이 납니다.

엔도 슈샤쿠의 '깊은 강'을 보면서 이 글을 같이 읽게 되었는데

두 작품 이 '모든 것을 당신께로 이끄시는 분(하느님)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동우***

2014.06.27 03:54

 

'떠날수 있다면 떠나시지요."

벌써 출판된 이 제목의 작품이 있었군요.

 

"그대 떠날수 있거든 떠나라."

이 문장의 오의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크리스찬이 흔히 하는 말.

‘그 분께 사로잡히다'

그 의미..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은 몇년전 책부족의 과제로 열독하였던 소설입니다. (몇번으로 나누어 포스팅한 것도..)

거기에도 '양파'에 사로잡힌 신학생 얘기가 나오지요.

도그마를 떠난 예수의 오의..

 

 

 

-독서 리뷰- 

 

[[루이제 린저]]

<빨간 고양이> <사랑> <에고이스트> <어두운 이야기> 

 

 

<빨간 고양이>

-루이제 린저 作-

 

***동우***

2014.09.13 06:21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2002)의 '빨간 고양이'

 

폐허가 된 종전후의 독일.

 

["이제 그 짐승을 죽여버려요." 하고 말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떤 짐승을 죽인다는 거냐?" 하고 반문하면서 엄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았다. "그 고양이 말이에요!" 나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척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나는 이 말의 결과가 어떨지 잘 알고 있었다. 온 식구가 나에게 일제히 덤벼들었다. "뭐라고? 우리 고양이를? 부끄럽지도 않아?" "나는 부끄러울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대답했다. "그 고양이는 우리들이 먹을 것을 대신 뺏어먹고 살이 찐 거야. 그놈은 돼지 새끼같이 살이 쪘어. 그놈은 아직 어리고 하니 지금쯤 죽여버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머니와 어린 두동생..

궁핍과 허기의 나날.

전쟁.

뉘라 어린이에게 순수한 동심이 깃들기를 바라리까.

 

열세살짜리 꼬마는 나름 의연한 가장(장남)이었습니다.

 

[사실 그 조그마한 동물이 먹는다 해도 과연 얼마나 먹었을 것인가.]

이런 생각, 생존이 다소 안돈된 연후 먼 훗날의 생각이겠지요.

 

'기억 속의 들꽃 (윤흥길)' 처럼..

 

***eunbee***

2014.09.14 20:49

 

목숨이 일곱개라는 고양이를 죽을 때까지 후려쳐 끝내 얼음물 위로 떠가게 만들어야했던 그들의 허기.

이해될 듯도 하나 너무도 끔찍스런 장면에 '헛구역질이 올라온다'라는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대목이었어요.

 

까비,

요즘은 우리집 망나니가 됐어요.

맛난 먹이를 먹기 싫을 때까지 주지 않으면 따라다니며 다리를 물어요.ㅎ

까비가 늘 먹던 메뉴에서 다른 것으로 바꾸었는데, 그것이 그렇게나 맛이 좋은가 봐요.

까비 답지 않게 게걸스럽게 먹어요.ㅎ 그 우아한 포스가 새로운 메뉴앞에서 모두 달아났지뭐예요.

 

고양이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나도 그런줄 알았는데, 까비 밥을 챙겨 먹이다보니(젓가락으로 떠먹이지요 ㅎ)

고양이들도 많이 먹어요. 얼마나 자주 달라는지, 고기먹고, 특식먹고, 과자먹고...

새벽에 잠에서 우릴 깨우는 것도 까비이고(놀아주고 먹이달라고) 새벽에 맨 먼저 밥먹는 것도 까비예요. 우선 까비를 먹여놔야 졸졸 따라다니며 다리를 물어대는 것에서 놓여날 수 있으니까요.ㅎㅎ

 

루이제 린저의 빨간 고양이.

사람도 짐승도 전쟁통에 태어나거나 힘들게 살일은 아니에요. 너무 참혹하고 슬퍼요.

 

***동우***

2014.09.15 04:50

 

고양이를 패대기쳐 죽이는 소년.

까비를 생각하면 끔찍하지요? 은비님.

나는 모파상의 '피에로'가 더 엽기스럽습니다만.

 

그 행위의 동인은 다만 허기만은 아니었을거라는 부분..

소년의 다른 행위를 보면, 큰 아들로서의 어떤 책임감.

그 강한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고양이를 향한 미움같은...

 

까비.

고기먹고 특식먹고 과자먹고.

 

도도한 기품은 다른 사람들에게.

은비네야 제 식구들인데 무에 우아한 포즈 차릴 필요 있겠어요? 어디. ㅎㅎ

 

 

<사랑 (나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방법)>

-루이제 린저 作-

 

***동우***

2017.02.27 07:51

 

예전에 홍세화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프랑스는 '똘레랑스'의 사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똘레랑스.

그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고 합니다.

 

입에 익은 공학용어들로 소통하였던 옛 직장생활.

그 중 '캘리브레이션 토러런스 (calibration tolerance)' 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허용오차라는 뜻이지요.

명확한 공학적 의미인 '토러런스'라는 영어단어가 프랑스 어휘로는 '똘레랑스'였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의 척도와 취향에 맞고 쉽게 뚫어볼 수 있으며 다루기 쉬울 때, 우리는 좋아한다. 그리고 쉽게 우리편으로 동화시킬 수 있는 사람을 친구로 만들고 싶어한다. 우리의 손안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큰 사람을 우리는 거부한다.>

 

혁명이다, 폭동이다.

양극으로 쫙 갈린 작금의 우리사회.

 

제가끔 '우리 편'만 있을 뿐입니다.

오로지 정(情)이라거나 감정의 동지애로만 뭉처진.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명확하게 내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눈을 씻고 찾아봐도 상대편에 대한 똘레랑스는 없습니다.

똘레랑스에는 이성적 명징성이 있지만 情에는 오직 감정적 격앙만이 있습니다.

 

 

<에고이스트>

-루이제 린저 作-

 

***동우***

2018.02.02 04:23

 

인간을 어떤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지요?

아마 성욕 식욕과 같은 본능적 욕구로 채워진 동물로서의 인간, 생물학적으로 인간을 파악하는 인간관도 없지 않을테지요.

그러나 그보다 우리 의식 속에는 많은 부분 자본주의적 인간관이 차지하고 있을겁니다.

경쟁과 탐욕과 물신숭배와 개인주의와 소유욕같은 것으로 채워진 인간.

에고이즘의 원리에 의하여 움직이는.

그러한 인간관이 형성되도록, 우리는 너무나 자본주의에 순치되어 있을겝니다.

자본주의적 인간, 그게 과연 인간의 본성에 근거한 것인가요?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와 사랑과 가치(삶의 의미)라고.

인간의 본성이 충족되면 인간은 행복하고 본성이 좌절되면 불행한 것이랍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욕구가 채워지면 인간은 행복한가요?

그러나 자본주의적 인간으로서는 자유도 사랑도 보람도 충족되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살고있는 현대인은 고립감과 무력감과 권태감의 늪 속에서 신음한다지요.

자본에 대하여 무력한 자는 물론, 자본에 힘있는 자 또한.

 

길게 지껄이려다 그만.

루이제 린저의 수필 하나 올려놓고 힘 딸리는 객설은. ㅎ

 

 

<어두운 이야기>

-루이제 린저 作-

 

***동우***

2019.02.13 07:40

 

명작 단편소설로 회자되는, '루이제 린저' (Luise Rinser,1911~2002)의 '어두운 이야기'​

 

벤틀리와 영사와 나.

실제 등장인물은 3명이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벤틀리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피상적 인물 '슈톤부리지'일 겁니다.

 

1938년의 독일.

나치, 게슈타포, 수정의 밤...

 

헤밍웨이의 빙산이론.

수면에 떠오른 부분만으로 슈톤부리지의 비극을 우리는 짐작만 할 뿐입니다만. 그는 존재론적 니힐리스트가 되어 버린 인물입니다.

세상의 행복이란 존재를 믿을수 없게된 공허한 허깨비.

 

슈톤부리지에게서 나는 라비크(레마르크의 '개선문'의 주인공)를 봅니다.​

라비크와 조앙 마듀(개선문)와의 사랑에 세기말적 니힐리즘이 가득 배어있듯. 바바라에게 몰입하는 슈톤부리지의 사랑에는 절망적 색채 가득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그것은 꿈 속에서 행복을 더듬으며 어둠속 지붕위를 걷는 몽유병입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자신의 내면에 뿌리깊이 잠재한, 절망적 감정모체의 현실을 각성하여 추락하고 맙니다.

 

바바라를 사랑하게 된 벤틀리 대위.

우정은 모럴이지만 사랑은 원초적 맹목입니다.

벤틀리의 막연한 염원의 미필적고의.

슈톤브리지가 떠남을 바바라에게 고지하여 슈톤부리지로 하여금 현실을 각성시킴으로, 몽유병자를 추락하게 한 벤틀리 대위.

 

<나는 벤틀리가,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는 어떤 단순한 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법률적인 문제나 권위로 확신을 시켜 줄 공적장소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이내 알아차렸다.>

 

우정과 사랑 사이.

그 어디에도 순도 100%의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의무봉 효자라도 그 효심이 순도 100% 짜리는 아닐겝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불쌍한 악마일테지요.

 

이 소설, 필경은 나치로 인한 독일의 트라우마를 얘기하고 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