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리뷰-
<수염난여자이야기> <소복> <타인의고독> <톱밥난로선생님>
<수염 난 여자 이야기>
-김용희 作-
***동우***
2017.01.21 04:22
김용희.
검색하니 1963년생 여성작가, 문학 평론가이기도 하군요.
수염 난 여자 이야기.
작가는 이 소설의 모티프를 어디서 얻었을까요?
새끼를 낳고 품어 거두어 먹이는 곰 여우 고양이 침팬치 개...
모든 짐승들은 털복숭이입니다.
더불어.
내게 끼처지는바 분명한 것은 '셔우드 앤더슨'의 소설 '숲 속의 죽음 (Death in the Woods)'의 인스피레이션.
전에 그 소설을 올리면서 나는 이런 댓글을 달았었군요.
++++
'셔우드 앤더슨'의 '숲 속의 죽음 (Death in the Woods)'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고달프기 그지없는 슬픈 일생을 살다가 어느 날 숲 속에서 얼어죽은 그라임즈 노파.
노파의 한평생은 사람과 짐승을 먹이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굶어 죽는다고? 그러나 짐승들을 먹여야 하고, 남자들도 먹여야 한다. 아무 쓸모는 없어도 어쩌면 팔릴지도 모르는 말도, 석달 동안이나 젖 한 방울 내지 않는 빈약하고 야윈 저 암소들도 먹여야 하지. 말들, 소들, 돼지들, 개들, 사람들도>
사람이건 짐승이건 무릇 목숨은 먹어야 삽니다.
<'밥'에 비할진대, 유물론이나 유심론은 코흘리개의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 밥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밥을 위해서, 밥으로 더불어 삶은 정당하다. -김훈->
노파는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거나 주접을 떨지 않았습니다.
열사의 사막을 걷는 낙타처럼, 오로지 묵묵하게 엄숙하였습니다.
노파의 죽음.
그 죽음의 묘사가 참으로 기묘하게 신비롭습니다. (이문열은 이 소설을 '죽음의 미학' 편으로 분류하였습디다.)
개들은 야성과 길들여진 습성 사이를 넘나듭니다.
그러나 굶주린 개들은 결코 노파의 몸뚱이에 이빨을 박지는 않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늑대가 아니다. 우리들은 개다. 인간의 종이다. 인간이여, 살아 계시라. 인간이 죽으면, 우리들은 다시 늑대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달빛을 받고서 노파 주위의 눈밭을 빙빙 원을 그리고 도는 개들.
무슨 숭고한 의식(儀式)을 치루는듯 합니다.
<"난 아무런 상처도 못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처녀입니다. 얼굴을 눈 속에 파묻고요.">
노파는 대리석같이 그렇게 희고 아름다운 처녀의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렇게 완전한 일에는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들어 있는 법이다... 나는 나이가 듦에 따라, 노파의 죽음에 대한 얘기 그 전부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과 같이 생각되었다. -소설속 話者->
참으로 빼어난 소설입니다.
나는 가끔 봉래산이나 태종대의 숲속을 걷습니다만 늙어죽은 새(짐승이나)들의 시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새들은 숲 속 어디에서 죽는걸까요?
사람들 모르는 곳에 따로 죽는 장소가 있는건 아닐텐데, 숲길 걸을때마다 공연히 그게 나는 몹시 궁금하답니다.
++++
인류는 언제부터 털없는 원숭이, ‘호모 사피엔스’가 되었을까요.
남아있는 몇 올의 수염(털)마저 매끈하게 제모를 강요하는...
그 文明美라는 것.
원시적 생명력.
털.
그건 관계를 긍정하여 보듬어 안는 저 삶 속에, 목숨들 거두어 먹이는 저 사랑 속에 무성할 터이지요.
<얼마 있다가 시어머니마저 풍을 맞았고 뒷수발을 하는 것도 또 그 여자의 몫이었어. 그 여자는 생에 순종하듯 그 모든 일들을 다 해냈어. 생은 그 여자에게 침묵을 가르치고 겸허를 익히게 한 거야. 존재하는 것은 모두 탐욕스럽고 굶주려서 무엇이든 먹어치우려 하지. 그 여자가 먹이던 존재들은 시부모, 남편과 남편의 두 여동생과 일곱 명의 자식들과 네 명의 일꾼, 그리고 한 마리의 어미 소와 송아지, 돼지와 개와 닭들, 염소와 고양이였어.>
<소복>
-김영수 作-
***동우***
2017.02.06 04:57
김영수 (金永壽,1911~1977)의 '소복'
1930년대 발표한 소설인데, 당시로서는 상당한 에로티시즘이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여자가 외간사내와 밀통하는 장면을 들여다보는 대목...
++++
양서방은 우선 들창 앞으로 바싹 다가선다.
숨을 죽인다. 발끝에 힘을 주어 발돋움을 한다.
하빗자락을 걷어올리머 머리를 싸고 눈만 내 논다. 그리고서 귀를 기울인다.
바람소리만 없었던들 방에서 나는 소리를 양서방은 물론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나 바람은 차게 불어 그는 또 그대로 무한히 안타까웠고 약이 올랐다.
조금 있더니 어딜 어떡허는지 깔깔거리며 계집은 자지러지게 웃고 앙이앙이 하고 앙탈하는 소리와 함께 점점 방안은 재미있어 갔다.
양서방은 확 얼굴이 달아 올랐다. 귀 밑이 뜨끔하였다.
그는 꿀꺽꿀꺽 침을 삼키고 주먹을 단단히 쥐어 본다.
드디어 양서방은 묘한 생각을 해 내고 말았다.
그리고 혀 끝을 창에다 갖다 대며 지그시 밀었다.
침이 백지에 차차 먹어 들어간다. 침은 일전짜리만한 넓이로 번진다.
그래서 그는 손가락을 대고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에라 뚫고 말았다.
창에는 들여다 보기 좋게 알맞는 구멍이 났다.
사람이란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는 이렇게 개나 도야지 같이 되는 걸까--.
들창 구멍에다 눈을 대고서 숨을 죽이고 안을 들여다 보던 양서방은 고만 멈칫하고 얼핏 도로 눈을 떼었다.
그리고 그는 곧 들여다 본 것을 뉘우쳤다.
그것은 방안에 벌어진 풍경이 그에겐 너무도 잔인스러웠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다지 오래 계속되지 못하는 것이어서 양서방은 다시 자못 조심하여 구멍으로 눈을 가져갔다.
방 속에 분명 상고머리와 용녀의 그림자가 한창 어지러웠다.
양서방은 점점 초조해 갔고, 또 웬일인지 한 편으로는 무척 재미있어 갔다.
재미뿐이 아니라 그는 좀더 신경을 날카롭게 하여 스스로 무엇인가를 좀더 좀더 하면서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잠깐 분노를 잊어버리고 다만 재미있어 했고 또한 나중에는 그 재미에 취하여 드디어 방안의 벌거벗은 상고머리와 자기의 위치를 바꾸어도 보았다.
저 상고머리가 나고, 그리고 내가 저 상고머리고 양서방은 점점 상고머리가 되어간다.
상고머리는 양서방이 되고 양서방은 상고머리가 되고…….
양서방은 인젠 정말 상고머리가 되어버렸다. 아주 천연덕스리 그렇게 되고 말았다.
양서방은 그러니까 더욱 숨이 가쁘도록 방안의 모든 것이 재미있고 점점 더 초조해 갔다.
그러자 용녀는 상고머리더러 귀를 달래서 무어라고 소근거리더니 옆에 벗어 놓은 치마로 거기만 가리고 일어나더니만 불을 탁 껐다.
『앗!』
하마터면 양서방은 이렇게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별안간 눈 앞이 캄캄해지니까 상고머리는 도로 얼핏 상고머리가 되었고 양서방 역시 도로 양서방이 되며 그 동안에 잠깐 잊어벼렸던 노여움이 금시로 한 뭉치가 되어 내달았다.
그러니까 다시 양서방은 숨이 가빠지고 마음이 어지러워 갔다.
그는 얼른 들창에서 얼굴을 떼고 대문으로 갔다.
그는 벌써 아까같이 재미있고 유순하지는 않았고 마음이 자못 느긋하지도 않았다.
인제 상고머리는 영영 상고머리로 돌아갔고 양서방은 영영 양서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은 저으기 짧은 순간이었다. 참으로 짧은 순간이었다.
대문이 잠겨 있다. 그러니까 양서방의 노여움을 걷잡을 수가 없이 활활 타오른다.
『문 열어라, 문 열어』
그러나 대문은 굳게 잠겨 있어 꼼짝 안하니까 양서방은 얼마든지 이렇게 험악하게 소리를 질러도 시원할 수가 없었다.
『문 열어!』
++++
영화로도 만들어졌지요.
김진규와 박노식이 나왔다고 기억합니다.
고은아가 용녀역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좀 미스 캐릭터가 아닌가 하였던 생각도...
<타인의 고독>
-정이현 作-
***동우***
2018.11.05 23:52
'정이현(鄭梨賢,1972년~ )'의 '타인의 고독'
많이 읽어보지는 못하였지만, 그녀의 소설은 도회적이고 세련된 느낌이었습니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달콤한 나의 도시'.... )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 역시 '쿨'하기 그지없지만 저들이 살아내는 실존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군요.
두번으로 나누어 올립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굿나잇.
***동우***
2018.11.07 04:33
'정이현'의 '타인의 고독'
이 시대 젊은이들의 의식구조가 죄 저러할까.
관계에 얽매이고 관계에 책임지는게 끔찍하여, 타인과는 언제나 일정한 간격 유지하기.
끈적끈적한 애정도 싫고 구질구질한 연민도 싫고.
도회적 가벼운 상투성.
그것으로 타인의 질량을 가늠하고 자신의 가치를 내비처 그것으로서만 관계맺기...
관계에다 정처(定處)를 두지 않으려는 자의 불안과 고독 쯤이야...
<밤이 되어 버렸다든가 할 때에는 문득 어리벙벙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정도 고독이야 현대인들 누구나 느낄 만한 수준이므로 나도 견딜 만하다고 생각한다.>
삶에 무슨 크라이막스가 있겠는가.
인생이 시시껄렁하다는걸 일찌거니 깨달아버린 애늙은이.
욕망 따위, 유효기간 안에서 소비하는 일회성으로 만족하고.
거기에 사랑이라거나 연민 같은게 끼어들면 어쩔줄을 모른다.
<나는 냉장고 한구석에서 유효기간 지난 계란을 발견하게 될까봐 두려움에 떠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계란을 터뜨리는 순간 그 안에서 반쯤 부화된 채 웅크리고 있던 병아리 한 마리가 튀어나온다면, 그 연악한 어린 짐승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친다면, 어쨌거나, 119에 신고하는 수밖에, 정말로 나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다.>
저들의 이른바 '쿨'한 외양.
그렇다고 저들의 자아는 아프지 않을까.
저 '쿨'함은 어쩌면 두려움이 내지르는 비명은 아닐런지.
자기보호본능에서 우러나온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닐런지.
<관대한 용서를 그리워하면서 나는 지상의 저 먼 바닥을 오래도록 응시하였다.>
저 친구는 필경, 강아지 몽이를 베란다 밖으로 내던지고 말았을까.
<톱밥난로 선생님>
-최성각 作-
***동우***
2018.10.11 22:48
'최성각(1955~ )'의 '톱밥난로 선생님'
저 때, 우리들 학교는 다분히 '폭력교실'이었음은 자명합니다.
척박한 시절이었으니...선생들이나 학생들이나.
우리의 궁둥이는 군대가기 전부터 이미 빳다에 익숙해있었지요.
선생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職)에 대한 사명감이나 보람같은건 별로 없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생도들 역시 학생다움이라는 것에 연연한 포즈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수를 벗어나 선생의 영역을 노골적으로 침범하지는 않았던듯 합니다.
키딩 선생(로빈 윌리언스).
그 비스무리하게라도, 학창시절 내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별로 없습니다.
낫살들어가면서 내가 자주 뇌까리는 세리프가 있었으니. "그때 내게 뉜가 멘토가 있었더라면..."
훌륭한 선생님에게는 멘티로서의 싹수가 당초 뵈이질 않았던, 못생긴 녀석의 못나빠진 푸념이리이다마는.
좋은 선생님을 갖지 못한건 당연지사.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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