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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13) -채만식-

카지모도 2021. 4. 19.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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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쿠다마리의 얼굴들은 대번 금을 그은 듯이 두 갈래로 갈려 버린다.

판 사람들은 턱을 내밀고서 만족하고 산 사람들은 턱을 오므리고서 시치름하고, 이것은 천하에도 두 가지밖에는 더 없는 노름꾼의 표정이다.

이처럼 시세가 내리쏟기자 태수의 친구요 중매점 마루강(丸江)의 바다지인 곱사 형보는 팽팽한 이맛살을 자주 찌푸리면서 손에 쥔 금절표를 활활 넘겨본다.

사각 안에다가 영서로 K자를 넣은 것이 태수의 마크다.

육십 원 증금(證金)으로 육백 원에 천 석을 산 것인데, 인제 앞으로 십 정만 더 떨어져서 이십구 원 팔십팔 전까지만 가면 증금으로 들여논 육백 원은 수수료까지 쳐서 한 푼 남지 않고 ‘아시(證金不足)’이다.

형보는 잠깐 망설이다가 곱사등을 내두르고 아기작아기작 전화통 앞으로 가더니 옆엣사람들의 눈치를 슬슬 살펴 가면서 ××은행 군산지점의 전화를 부른다. 태수한테 기별을 해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한낱 행원으로 미두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보면, 더구나 모범행원이라는 고태수로, 그런 눈치를 은행에서 알게 되는 날이면 일이 재미가 적고 한 터라, 이러한 전화는 걸고받고 하기에 서로 조심을 한다.

××은행 군산지점 당좌계의 창구멍〔窓口〕안에 앉은 고태수, 그는 어젯밤을 새워 먹은 작취로 골머리가 띵하니 아프고, 속이 메스꺼운 것을 겨우 참고 시간 되기만 기다린다.

세시 전이니 아직도 한 시간이 더 남았다.

그래, 팔걸이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고는 하품을 씹어 삼키고 하는 참인데 마침 급사아이가 와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 준다.

태수가 전화통 옆으로 가서,

“하이(네에).”

나른하게 대답을 하는데,

“낼세, 내야.”

하는 게 묻지 않아도 형보다. 태수는 혹시 시세가 올랐다는 기별이었으면 하고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왜 그래”

“뻐게졌네, 뻐게졌어!”

삼십 원대가 무너졌다는 말이다.

태수는 맥이 탁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음-”

태수는 분명치 않은 소리만 낼 뿐, 무어라고 형편을 물어 보고 싶어도 옆에서 상관이며 동료들이 듣는 데라,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는 조다.

“팔 전인데, 여보게”

형보는 딱바라진 음성으로 이기죽이기죽 이야기를 씹는다.

“……팔 전인데, 끊어 버리세”

“글쎄…….”

“글쎄구 개×이구 이대루 십 정만 더 떨어지면 아시야 아시! 알어 들어…… 왜 정신을 못 채리구 이래”

“그렇지만 인제 와서야 머…….”

태수는 지금 그것을 끊는대도 돈이라야 오십 원밖에 남지 않는 것을, 그러구저러구 하기가 도무지 마음에 내키지를 않던 것이다.

애초에 돈 천 원이나 먹을까 하고, 그래서 발등에 당장 내리는 불이나 끌까 하고, 시세가 마침 좋은 것 같아서 쌀을 붙였던 것인데 천 원을 먹기는 고사하고 본전 육백 원이 다 달아난 판이니 깨끗이 밑창을 보게 두어 둘 것이지, 그까짓 것 꼬랑지로 처진 오십 원쯤 시방 이 살판에 대수가 아니다.

“그리지 말게!…… 소바(投機 : 미두)란 그렇게 하는 법이 아니란 말야…… 그러니 내가 시키는대루…….”

형보가 이렇게 타이르는 말을 태수는 성가신 듯, 버럭 것질러,

“긴 소리 듣기 싫여!…… 그만 해두구, 내가 어제 맡긴 것 있지”

“있지.”

형보는 어제 저녁때 태수한테서 액면 이백 원짜리 소절수 한 장을 맡았었다. 진출인은 백석(白石)이라고 하는 고리대금업자요, 은행은 태수가 있는 ××은행 군산지점이다. 형보는 가끔 태수한테서 이러한 부탁을 받는다.

“그걸 오늘 지금 좀, 그렇게 해주게.”

“내일 해달라더니”

“아냐, 오늘루.”

태수는 전화를 끊고 도로 제 자리로 돌아와서 털씬 걸터앉는다. 인제는 마지막 여망이 그쳐 버리고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되었다.

바로 십여 일 전 일이었었다.

그날 태수는 형보가 있는 중매점 마루강에다가 육십 원 증금으로 육백 원을 내고 쌀 천 석을 ‘나리유키(成行)’로 붙였다.

그날이 마침 토요일인데 전장요리쓰케 삼십 원 십칠 전으로 장이 서 가지고는 이절에 이십구 전, 삼절에 삼십육 전, 사절에 사십 전 이렇게 폭폭 솟아 올라갔다.

이 기별을 받은 태수는 마침 기회가 좋은 듯싶어 다음 오절에 사달라고 일렀다. 전화를 걸어 주던 형보는 위태하다고 말렸으나, 태수의 생각에는 그놈이 그대로 일 원대를 무찌르고도 앞으로 백 정은 무난하리라는 자신이 들었었다. 그때에 날이 마침 가물었기 때문에 모낼 시기를 앞두고 그것이 다소 강재(强材)가 아닌 것은 아니었으나, 매우 속된 관찰이요, 더욱이 백 정이 오를 것을 예상한 것은 터무니없는 제 욕심이었었다.

태수는 그날도 은행 전화라 자세하게 이야긴 할 수도 없거니와 또 그럴 필요도 없어, 그냥 시키는 대로나 해달라고 형보를 지천을 했었다.

한 삼십 분 지나서 형보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절에 사십오 전에 샀더니 육절에 또 사 정이 올라 사십구 전일세…… 그렇지만 나는 모르니 알아채려서 하게!”

형보는 여전히 뒤를 내던 것이다.

그날 한시까지 은행일을 마치고 나와서 알아보니까, 그놈 육절에 사십구 전을 절정으로 시세는 도로 떨어져 전장도메 사십육 전이었었다. 그래도 태수는 약간의 반동이거니 하고 안심을 했었다.

그러나 그 뒤로 시세는 태수를 조롱하듯이 조촘조촘 떨어지다가, 오늘 와서는 마침내 삼십 원대를 무너뜨리고 아시란 말까지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은행 시간이 거진 촉하게 되어서, 웬 낯모를 사람이 아까 형보와 이야기하던 소절수를 가지고 돈을 찾으러 왔다. 형보는 태수의 이 심부름을 가끔 해주기는 해도 제 몸을 사리느라고 언제든지 한 다리를 더 놓지, 제가 직접 오는 법이 없다.

태수는 들이미는 대로 소절수를 받아 장부에 기입을 하고 현금계로 넘긴다. 필적이며 그 밖에 조사 대조해 볼 것을 조사 대조해 볼 것도 없이, 그것은 태수 제 손으로 만들어 낸 백석이의 소절수인 것이다.

이어 시간이 다 되자, 태수는 사무상 앞을 걷어치우고 은행을 나섰다. 그는 걱정에 애를 못 삭여 짜증이 났다. 누가 보면 어디 몸이 아프냐고 놀랄 만큼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몸에 풀기가 없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요 기색은 도로 평탄해진다. 그는 무엇이고 오래 두고는 생각하거나 걱정을 하질 않는다. 또 그랬자 별수가 없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걱정하면 소용 있나? 약차하거던 죽어 버리면 고만이지!”

그는 혼자말로 씹어 뱉는 것이다.

그는 일을 저지른 후로 요즈음 와서는 늘 이런 막가는 마음을 먹는다. 그러고 나면 걱정이 되고 속 답답하던 것이 후련해지곤 하던 것이다.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항용 있는 재정의 파탈로, 남의 돈에 손을 댄 것이다.

그는 작년 봄 경성에 있는 본점으로부터 이곳 군산지점으로 전근해 오면서부터 주색에 침혹하기를 시작했다.

그는 얼굴 생긴 것도 우선 매초롬한 게 그렇거니와, 은연중에 그가 서울서 전문학교를 졸업했고, 집안은 천여 석 하는 과부의 외아들이고, 놀기 심심하니까 은행에를 들어갔던 것이 이곳 지점에까지 전근이 되어 내려온 것이라고, 이러한 소문이 떠돌았었고, 그런데 미상불 그러한 집 자제로 그러한 사람임직하게 그의 노는 본새도 흐벅지고, 돈 아까운 줄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던 결과, 반년 남짓해서 육십 원의 월급으로는 엄두도 나지 않게 빚이 모가지까지 찼다.

이러한 억색한 경우를 임시로 메꾸기에, 태수의 컨디션은 안팎으로 좋았다. 지점장의 신임은 두텁고, 은행 내정에는 통달했는데 앉은 자리가 당좌계다.

그래서 작년 겨울 백석이라는 대금업자의 소절수를 만들어 쓰는 것으로부터 그는 ‘사기’와 ‘횡령’이라는 것의 첫출발을 삼았다.

큰 대금업자랄지, 그 밖에 예금한 금액이 많고 은행으로 들이고 내고 하기를 자주 하는 예금주들은, 그러하기 때문에 액면이 많지 않은 위조 소절수가 자기네 모르게 몇 장 은행으로 들어가서 ‘조지리(帳尻 : 총계 대조)’가 맞지 않더라도 좀처럼 눈에 띄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그러한 위조 소절수가 은행에 들어오더라도 그게 위조인지 아닌지를 밝혀야 할 당좌계에서 그냥 씻어서 넘기기만 하면 일은 우선 무사하다. 태수는 그 묘리를 알았던 것이다.

그는 은행에서 소절수첩을 빼내 오고, 백석이의 도장을 그대로 새기고 글씨를 본받아 백석이 자신이 발행한 소절수와 언뜻 달라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기에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놈을, 믿는 친구라는 형보더러 찾아 달라고 맡기고, 그럴라치면 형보는 다시 다른 사람을 시켜 은행으로 찾으러 보낸다. 은행에서는 태수가 그것을 어엿이 받아 장부에 기입을 해서 현금계로 넘기고, 현금계에서는 아무 의심도 없이 돈을 내주고, 그 돈이 조금 후에는 형보의 손을 거쳐 태수에게로 돌아 들어오고, 이것이다.

그가 처음 그렇게 소절수 위조를 해서 쓸 때에는, 손이 떨리고 며칠 동안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했으나, 차차 맛을 들이고 단련이 되면서부터는 돈이 아쉰 때면 제법 제 소절수를 발행하듯이 척척 써먹었다.

또 범위도 넓혀, 역시 예금이 많고 거래가 잦은 ‘농산흥업회사’와 ‘마루나’라고 하는 큰 중매점까지 세 군데 치를 두고 그 짓을 계속했다. 한 것이, 작년 세안부터 지금까지 반년 동안 백석이 것이 일천팔백 원, 농산흥업회사 치가 칠백 원, 마루나 중매점 치가 이번 것까지 팔백 원, 도합하면 삼천삼백 원이다.

이 삼천삼백 원은 형보가 심부름을 해줄 때마다 얼마씩 떼어 쓴 사오백 원과, 요릿집과 기생한테 준 행화와 미두 밑천으로 다 먹혀 버린 것이다.

이 짓을 해놓았으니, 늘 살얼음을 밟는 것같이 마음이 위태위태한 판인데, 지나간 사월 초생부터 그 백석이와 은행 사이에 사소한 일로 등갈이 나가지고, 백석이가 다른 은행으로 거래를 옮기리 어쩌리 하는 소문이 들렸다. 만약 그러는 날이면 예금한 것을 한꺼번에 모조리 찾아갈 것이요, 따라서 태수가 손댄 일천팔백 원이 비는 게 드러날 것이다. 동시에 그날이 태수는 끝장을 보는 날이다.

태수는 어디로 도망을 가거나, 또 늘 입버릇같이 되던 자살을 하거나, 두 가지 외에는 별수가 없다.

소문대로 그가 천여 석 추수를 하는 과부의 외아들이기만 하다면야 모면할 도리가 없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은 백줴 낭설이다.

그의 편모(偏母)는 지금 서울 아현(阿峴) 구석의 남의 집 단칸 셋방에서 아들 태수가 십오 원씩 보내 주는 것으로 연명을 해가고 있다.

태수의 모친은 중년 과부로 남의 집 안잠을 살고 바느질품 빨래품을 팔아 가면서 소중한 외아들 태수를 근근이 보통학교까지만은 졸업을 시켰었다.

샘 같아서는 그 이상 더 높은 학교라도 들여보냈겠지만 늙어 가는 과부의 맨손으로는 힘이 자랄 수가 없고, 그래 태수는 보통학교를 마치던 길로 ××은행의 급사로 뽑혀 들어갔다.

그는 낮으로는 은행에서 심부름을 하고, 밤으로는 다른 부지런한 동무들이 하듯이 야학을 다녀, 을종 상업학교 하나를 졸업했다.

아이가 우선 외모가 똑똑하고, 하는 짓이 영리하고, 그런데다가 을종이나마 학교의 이력과 여러 해 은행에서 치어난 경력과, 또 소속한 과장의 눈에 고인 덕으로, 스물한 살 되던 해엔 승차해서 행원이 되었다.

본점에서 꼬박 이 년 동안 지냈다. 그 동안 태수를 총애하던 과장(그는 男×家이었었다)은 태수가 소위 ‘급사아가리(使童出身)’라서 아무래도 다른 동무들한테 한풀 꺾이는 것을 액색히 생각해서 기회를 보다가 계제를 만나, 작년 봄에 이 군산지점으로 전근을 시켜 주었다.

태수도 서울 본점에 있을 동안은 탈잡을 데 없는 모범행원이었었다. 사무에는 능숙하고, 사람됨이 영리하고, 젊은 사람답지 않게 주색을 삼가고.

그러나 주색을 삼가한 것은 그가 급사로 지내던 타성으로 조심이 되어 그런 것이지, 삼가고 싶어 그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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