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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11) -채만식-

카지모도 2021. 4. 17.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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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응, 해서 지금들 먹는 참이구. 그래서 본인두 어서 들어가서 진지를 자셔야지, 생리학적 기본요구가 대단히 절박해!”

“저어, 이거 갖다가…… 응”

우물우물하더니 지전 한 장, 오 원짜리 한 장을 꺼내서 슬며시 밀어 놓는다.

“……어머니나 아버지 디려요. 아침 나절에 좀 변통해 볼려구 했지만 늦었습니다구.”

계봉이는 승재가 오늘도 아침에 밥을 못 하는 눈치를 알고 가서, 더구나 방세가 밀리기는커녕 이달 오월 치까지 지나간 사월달에 들여왔는데, 또 이렇게 돈을 내놓는 것인 줄 잘 알고 있다.

계봉이는 승재의 그렇듯 근경 있는 마음자리가 고맙고, 고마울 뿐 아니라 이상스럽게 기뻤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얼굴이 꼿꼿하게 들려지지 않을 것같이 무색하기도 했다.

“이게 어인 돈이고”

계봉이는 돈을 받는 대신 뒷짐을 지고 서서 준절히 묻는다.

“그냥 거저…….”

“그냥 거저라니? 방세가 이대지 많을 리는 없을 것이고…….”

“방세구 무엇이구 거저, 옹색하신데 쓰시라구…….”

계봉이는 인제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 번 까댁까댁하더니,

“나는 이 돈 받을 수 없소.”

하고는 입술을 꽉 다문다. 장난엣말로 듣기에는 음성이 너무 강경했다.

승재는 의아해서 계봉이의 얼굴을 짯짯이 건너다본다. 미상불, 여전한 장난꾸러기 얼굴 그대로는 그대로지만, 그러한 중에도 어디라 없이 기색이 달라진 게, 일종 오만한 빛이 드러났음을 볼수가 있었다.

승재는 분명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혹시 나의 뜻을 무슨 불순한 사심인 줄 오해나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비록 마음이야 담담하지만 일이 좀 창피한 것도 같았다.

“왜애”

승재는 속은 그쯤 동요가 되었어도, 좋은 낯으로 심상하게 물어 보던 것이다.

“거지의 특권을 약탈하구 싶던 않으니까…….”

하는 소리도 소리려니와,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뒷짐을 딱 지고 도고하니 고개를 들고 서서 그런 소리를 탕 탕, 남달리 커다란 사내를 다긏는 양이라니, 도무지 깜찍하기란 다시 없다.

그러나 보매 그러한 것 같지, 역시 본심으로다가 기를 쓰고 하는 짓은 아니다. 그는 다만 아까부터 제 무렴에 지쳐서 심술을 좀 부리고 싶은 참인데, 그러자 전에 어떤 잡지에서 본 그 말 한 구절이 마침 생각이 나니까 생각난 대로 그냥 써먹은 것이다.

애꿎이 혼이 나기는 승재다.

승재는 마치 어른한테 꾸지람을 듣고 있는 아이같이 큰 눈을 끄덕끄덕하고 있다가 겨우 발명을 한다는 것이,

“나는 거저 허물없는 것만 여겨서, 그냥…….”

말도 똑똑히 못 하고 비실비실한다.

“그렇지만 말이지…….”

의젓하게 다시 책을 잡는 계봉이는 아이를 나무라는 어른 같다.

“……자선이나 동정 같은 것은 받는 사람의 프라이드를 뺏는 경우두 있는 법이어든.”

“나두 별수없이 다 같은 가난한 사람인걸”

“하하하하, 아하하하…….”

별안간 계봉이는 허리를 잡고 웃어 젖힌다.

“……하하하하, 저 눈 좀 봐요. 얼음판에 미끄러진 황소눈이라니, 글쎄 저 눈 좀 봐요. 하하하하…….”

계봉이는 승재가 아까부터 무렴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는 꼴이 우스워 못 견디겠는 것을 겨우 참고, 그가 하는 양을 좀더 보고 있던 참인데, 인제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어떻게 걷잡을 수가 없었다.

친하면 친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런 만큼 또 체면의 어려움도 없지 않다.

그러한 승재, 즉 남의 집 젊은 총각한테 늘 이렇게 한팔을 꺾이는 듯한 가난, 가난이라고 막연하게보다도 밥을 굶고 늘어지는 창피한 꼬락서니를 들키곤 하는 것이, 마침 열일곱 살배기의 처녀답게 무색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제 무렴이다.

아무튼 그래서, 그 복수는 충분히 했다. 거지의 특권을 약탈하고 싶진 않다고, 자선이나 동정 같은 것은 받는 사람의 프라이드를 뺏는 경우가 있다고, 장난은 역시 장난이면서, 그러나 버젓하게 또 꼼짝 못 하게 해주었으니까…….

그러고 나니까, 께름하던 마음이 풀리는데, 일변 승재의 하는 양이 그러하니 재미가 있어서도 웃고, 그저 우스워서도 웃을밖에 없던 것이다.

계봉이가 그처럼 웃는 것을 보고 승재는 겨우 안심은 했으나 꾀에 넘어가서 사뭇 쩔쩔맨 것이, 이번에는 점직했다.

“원, 사람두…… 나는 정말 노여서 그리는 줄 알구 깜짝 놀랬구면!”

“하하하…… 그렇지만 꼭 장난으루만 그린 건 아니우, 괜히.”

“네에, 잘 알었습니다.”

“그런데에…….”

계봉이는 문제된 오 원짜리 지전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웃고 말았다고는 하지만 그대로 집어 들고 들어가기가 좀 안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종시 안 가지고 가기는 더 안되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그는 돈을 집어 든다.

“……그럼 이건 어머니한테 갖다 디리께요”

고개를 까땍 하면서 돌아서서 가는 계봉이를 승재는 다시 한번 바라다본다.

엄부렁하니 큰 깐으로는 철이 안 나서 늘 까불기나 하고, 동생들과 다투기나 하고, 할말 못할말 함부로 들이대기나 하고, 이러한 털팽이요 심술꾸러기로만 계봉이를 여겨 온 승재는 오늘이야 계봉이가 엉뚱하게 속이 깊고, 깊은 속을 곧잘 표시할 수 있는 지혜와 영리함이 있음을 알았던 것이고, 따라서 탄복스럽던 것이다.

그것은 계봉이도 마찬가지로 승재를 한번 더 다르게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둘이는 마음이 훨씬 더 소통이 되고 친해질 수가 있게 되었다.

한밥이 잡힌 누에들이 통으로 주는 뽕잎을 가로 타고, 기운차게 긁어 먹는 잠박(蠶箔)처럼, 안방에서는 다섯 식구가 제각기 한 그릇 밥에 국을 차지하고 앉아 째금째금 후루룩후루룩 한참 맛있게 밥을 먹고 있다. 모처럼 얻어걸린 밥이니 그렇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계봉이는 어디 갔느냐”

그래도 여럿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을 지경은 아니었던지, 정주사가 이편 밥상을 건너다보고 찾는다.

“아랫방 자리끼 숭늉 내다 주러 갔어요.”

초봉이가 역시 이 애는 무얼 하느라고 이리 더딘고 궁금해하면서 대답을 한다.

“가서 또 쌔왈거리구 까부느라구 그러지, 그년이…….”

유씨는 계봉이 제 말마따나, 어디라 없이 계봉이가 미운 게 사실이어서, 은연중 말이 곱지 않게 나오는 때가 많다.

“거, 너는 왜 밥을 반 그릇만 가지구 그러느냐? 밥이 모자라는 거로구나”

정주사가 초봉이의 밥그릇을 넘겨다보다가 걱정을 한다.

“……그렇거들랑 이 밥 더 갖다 먹어라!”

집어 드는 건 밥상 옆에 옹근째 내려놓은 병주의 밥그릇이다.

제 밥은 아껴 두고 부친의 밥을 뺏어 먹고 있던 병주는 밥 먹던 숟갈을 둘러메면서 발버둥을 친다.

“어머니! 어머니!”

거푸 부르면서 그제야 계봉이가 식구들이 밥을 먹고 있는 안방으로 달려든다.

“……저어, 나아, 돈 오십 전만 주믄, 돈 오 원 어머니 디리지”

식구들은 그게 웬 소린지 몰라 밥을 씹던 채, 숟갈로 밥을 뜨던 채, 혹은 밥숟갈이 입으로 들어가다 말고 모두 뚜렛뚜렛하면서 계봉이를 치어다본다.

이윽고 유씨가 시쁘다고 눈을 흘기면서,

“네년이 돈이 오 원이 있으면, 나는 백 원이 있겠다!”

“정말? 내가 오 원을 내놀 테니깐 어머닌 백 원을 내놔요”

“저년이 한참 까부는구만? 남서방이 딜여보내는 돈일 테지, 제가 돈이 어디서 생겨!”

“해해해해, 자요, 오 원. 인제는 어머니두 백 원 내노시우”

기연가미연가하고 있던 식구들은 모두들 놀란다. 초봉이는 비로소 아까 승재가 마당에서 포켓에 손을 넣고, 무슨 말을 할 듯이 우물우물하던 속을 안 것 같았다.

“이년아, 이게 네 돈이더냐? 바루 남의 돈을 가지구 생색을 내려 들어!”

유씨가 돈을 받으면서 핀잔을 주는 것을,

“그래두 내가 퇴짜를 놨어 보우! 괜히…….”

계봉이는 지지 않고 앙알거리면서 밥상 한 모서리로 앉는다.

“그년이 점점 더 희떠운 소리만 허구 있어! 왜 남이 맘먹구 주는 돈을 마다구 해”

“아무려나 거 그 사람이 웬 돈을 그렇게…… 거 원!”

정주사가 한마디 걱정을 하는 것을 유씨는 받아서,

“아침에 밥 못 해 먹은 줄을 알았던 게지요, 매양…….”

“그러니 말이야. 방세두 이달 치를 지난달에 벌써 내잖었수…… 그런걸…….”

“허긴 나두 허느니 그 걱정이오!”

“거 원, 그 사람두 넉넉지는 못한 모양인가 부던데 내가 그렇게 신세를 져서 원…….”

정주사는 쓰지도 않은 입맛을 쓰게 다신다.

병주가 돈과 부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아버지? 아버지…….”

불러 놓고는 냅다 속사포 놓듯 주워 꿰는 것이다.

“……내 양복허구, 내 모자허구, 내 구두허구, 내 자전거허구, 그리구 빠나나랑 미깡이랑 사주어, 잉? 아버지.”

“저 애는 밤낮 그런 것만 사달래요…….”

저도 한몫 보자고, 형주가 뚜우 해서 나선다.

“……남 월사금도 못 타게! 어머니 나 지난달 치허구 이달 치허구 월사금!…… 그리구 산술공책 허구.”

“깍쟁이! 망할 자식!”

밥 먹던 숟갈을 연신 들어 메면서 병주가 도전을 한다.

“왜 날더러 깍쟁이래? 이따가 너 죽어 봐. 수원 깍쟁이 같으니라구.”

“저놈!”

정주사가 막내동이의 편역을 들어 형주를 꾸짖는다. 막내동이의 편역이 아니라도, 정주사는 유씨가 계봉이를 괜히 미워하듯이 형주를 미워하던 것이다.

“어머니, 나 월사금 주어야지, 머 나두 몰라! 머.”

이번에는 계봉이가 형주를 반박한다.

“이 애야 월사금은 너만 밀렸니? 나두 두 달 치 밀렸다…… 어머니, 아따 월사금은 그믐께 주구, 나 위선 오십 전만 주우? 우리 회람문고(回覽文庫) 지난달 회비 주게, 응? 어머니.”

“월사금이 제일이지 그까짓 게 제일인가? 머.”

“월사금은 이 녀석아, 좀 늦게 줘두 괜찮아. 오십 전만 응? 어머니.”

“이잉, 깍쟁이가…… 난 월사금, 몰라!”

“아버지 아버지, 내 양복허구, 내 모자허구, 내 구두허구, 빠나나랑 사다 주어 응? 자전거랑.”

“오냐 오냐, 허허…….”

정주사는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어이가 없다고 한단 소리다.

“……꼬옥 흥부 자식들이다, 흥부 자식들이야!…… 거 장가딜여 달라구 조르는 놈만 없구나!”

“그리구 당신은 꼬옥 흥부 같구요”

“내가 어째서 흥부야? 여편네가 새수 빠진 소리만 하구 있네!”

“누가 당신 속 모르는 줄 아시우”

“내가 어쨌길래”

“어쩌기는 무얼 어째요? 이놈에서 일 원허구 육 전만 발라서 위선 담배 한 곽 사 피구, 일 원은 두었다가 미두장에 갈 밑천을 할려면서…….”

“허허허허…….”

정주사는 속을 보이고는 할 수 없이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기왕 그런 줄 알았으니, 그럼 일 원허구 육 전만 주구려. 허허…….”

 

 

4 ‘……생애는 방안지라!’

 

조금치라도 관계나 관심을 가진 사람은 시장(市場)이라고 부르고, 속한(俗漢)은 미두장이라고 부르고, 그리고 간판은 ‘군산미곡취인소(群山米穀取引所)’라고 써붙인 ××도박장(賭博場).

집이야 낡은 목제의 이층으로 헙수룩하니 보잘것없어도 이곳이 군산의 심장임에는 갈데없다.

여기는 치외법권이 있는 도박꾼의 공동조계(共同租界)요 인색한 몬테카를로다.

그러나 몬테카를로 같은 곳에서는, 노름을 하다가 돈을 몽땅 잃어버리면 제 대가리에다 대고 한방 탕- 쏘는 육혈포 소리로 저승에의 삼천 미터 출발신호를 삼는 사람이 많다는데, 미두장에서는 아무리 약삭빠른 전재산을 톨톨 털어 바쳤어도 누구 목 한번 매고 늘어지는 법은 없으니, 그런 것을 조선 사람은 점잖아서 그런다고 자랑한다든지!

군산 미두장에서 피를 구경하기는 꼭 한 번, 그것도 자살은 아니다.

에피소드는 이렇다.

연전에 아랫녘〔全南〕어디서라던지, 집을 잡히고 논을 팔고 한 돈을 만 원 가량 뭉뚱그려 전대에 넣어 허리에 차고, 허위단심 군산 미두장을 찾아온 영감님 하나가 있었다.

영감님은 미두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통히 몰랐고, 그저 미두를 하면 돈을 딴다니까, 그래 미두를 해서 돈을 따려고 그렇게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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