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Books/Reading Books

<R/B> 탁류 (14) -채만식-

카지모도 2021. 4. 20. 03:39
728x90

 

 

그랬길래 그가 이 군산지점으로 내려와서 기를 탁 펴고 지내게 되자, 지금까지는 금해졌던 흥미의 대상인 유흥과 계집이 상해(上海)와 같이 개방되어 있는 그 속으로 맨먼저 끌려 들어간 것이다. 그는 마치 아이들이 못 보던 사탕을 손에 닿는 대로 쥐어 먹듯이 방탕의 행락을 거듬거듬 집어먹었다.

믿는 외아들 태수가 이 지경이 된 줄 모르고, 그의 모친은 그가 인제는 어서 바삐 장가나 들어 살림이나 시작하면 그를 따라와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려니, 지금도 매일같이 그것만 기다리고 있지, 천석거리 과부란 당치도 않은 소리다.

태수는 지난 사월에 그처럼 사세가 절박해 오자 두루 생각한 끝에 마루나의 육백 원 소절수를 또 만들어 그 돈으로 미두를 해본 것이다.

전에도 가끔 오백 석이고 삼백 석이고 미두를 했고, 그래서 번번이 손을 보았지만, 천 석은 처음이다.

그는 그놈에게 돈 천 원이나 먹으면 어떻게 백석이 것 일천팔백 원을 채워 가지고 백석이한텔 가서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든지, 본점에 있는 그 과장이라도 청해다가 백석이를 위무해서 일을 모면하려던 그런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돈 천 원이 생기기는 고사하고 밑천 육백 원까지 물고 달아났으니 게도 잡지 못하고 구럭까지 놓친 셈이다.

오직 그 동안, 백석이가 말썽부리던 것이 너끔하고, 그래 다른 은행으로 거래를 옮기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그러나 그것도 우선 위급을 면한 것이지, 아무래도 받아 논 밥상인 것을 언제 어느 구석에서 일이 뒤집혀 날지 하루 한시인들 앞일을 안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육장 입버릇같이,

“죽어 버리면 고만이지.”

이 소리를 하고, 할라치면 순간순간은 아무것이고 무섭지도 않고 근심도 놓이고 하던 것이다.

태수는 거리로 나와서, 어디로 갈까 하고 잠깐 망설인다.

이런 때는 어떤 조용한 데, 가령 서울 같으면 찻집 같은 데로 가서, 혼자 우두커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앉아 있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서울서는 별반 다녀 보지도 못한 찻집이 불현듯이 그리웠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런 기분이 가라앉는 순수한 찻집이 없으니 소용없는 말이고, 그냥 선창이나 공원으로 거닐까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은 어제 밤을 새워 술을 먹은 몸이 고단해서 내키지를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제중당으로 초봉이나 만나 보러 갈까 해본다. 어제 낮에 들렀더니 요전번 전화할 때의 말대로 알기는 알겠는지, 얼굴이 발개가지고 대응하는 게 달랐고, 그것이 태수한테는 퍽 유쾌했다.

태수는 초봉이를 두고 생각하면 할수록 절로 입이 벙싯벙싯 벌어진다. 그는 초봉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도 견딜 수 없이 기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초봉이와 결혼이나 해서 단 하루나 이틀이라도 좋으니 재미를 보기가 마지막 소원이요, 그런 다음에는 세상 아무것에 대해서도 미련이 없을 것 같았던 것이다.

태수는 발길이 절로 정거장 쪽으로 떼어 놓여진다.

그러나 바로 어제 들러서 인단이야 포마드야를 더금더금 사왔는데, 오늘 또 채신머리없이 가고보면 초봉이라도 속을 들여다보고 추근추근하다고 불쾌하게 여길 듯싶어 재미가 덜할 것 같았다.

태수는 섭섭하나마 가던 발길을 돌려 개복동으로 들어선다.

개복동 초입에 있는 행화의 집은 아무라도 오라는 듯이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태수는 대문간으로 들어서면서, 지금 초봉이한테를 이렇게 임의롭게 다닌다면 작히나 좋으려니 싶었다.

안방에서는 행화가 흥얼거리는 목소리로 부르던 육자배기를,

“해느은 지이이이고오…….”

하면서 귀곡성을 질러 올렸다가,

“……저문 날인데, 편지 일장이 도온절이로구나아 헤.”

없는 시름이라도 절로 솟아나게 끝을 다뿍 하염없이 흐린다.

“좋다.”

형보의 소리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별로 장소를 달리 정하지 않았으면 요새는 여기서 만날 줄 알고 있다.

신발 소리에 행화가 꺄웃하고 내다보다가 웃으면서, 흐르는 옷허리를 걷어잡고 마루로 나선다.

태수가 방으로 들어서니까, 형보는 아랫목 보료 위에 사방침을 얕게 베고 누운 채 고개만 드는 시늉 하면서,

“인제 오나”

“날이 좋은데!…… 은적사(恩積寺)나 나갈까 부다.”

태수는 모자를 쓴 채로 방 가운데 털씬 주저앉으면서 혼자말같이 두런거린다. 그는 조금 아까부터 그 생각이다. 우선 날이 좋으니 절에라도 나가서 펑청거려 가면서 놂직도 하고, 또 그 밖에는 이 쭈루투룸한 심사를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거 조오치!”

형보가 맞장구를 친다. 태수는 그러나, 이어 딴생각을 하느라고 그냥 우두커니 앉았다가 ‘몇 전 도메’냐고 묻는다. 단념은 했어도, 그래도 조금 남은 미련이 있어, 그놈이 잊자고 해도 강박관념같이 주의를 끌던 것이다.

“구 전…… 육 전까지 갔다가 구 전 도메.”

태수는 다시 말이 없다. 형보는 귀밑까지 째진 입에 담배 꽂은 상아 빨쭈리를 옆으로 물고 누워 태수의 숙인 이마를 곰곰이 올려다본다. 그의 퀭하니 광채 있는 눈은 크기도 간장 종지 한 개만큼씩은 하다.

이 사람을 목간통에서 보면 더욱 기괴하다.

고릴라의 뒷다린 듯싶게 오금이 굽고 발끝이 밖으로 벌어진 두 다리 위에, 그놈 등뒤로 혹이 달린 짧은 동체(胴體)가 붙어 있고, 다시 그 위로 모가지는 있는 둥 마는 둥, 중대가리로 박박 깎은 박통만한 큰 머리가 괴상한 얼굴을 해가지고는 척 올라앉은 양은, 하릴없이 세계 풍속사진 같은데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토템’이다.

그는 체격과 얼굴이 그렇기 때문에 나이는 지금 삼십이로되 사십도 더 넘어 보인다. 부모 처자도 없고 인천이며, 서울이며, 안동현이며, 이런 투기시장으로 굴러다니다가 태수보다 조금 앞서 군산으로 왔었다. 두 사람이 알기는 서울서부터지만 이렇게 단짝이 되기는 태수가 군산으로 내려와서 외입판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에 병정을 서주면서부터다.

그러나 태수는 형보를 미덥고 절친한 친구로 여기지, 결코 병정으로 알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의리를 지킬 각오까지도 있다. 형보도 표면으로만은 그러하다. 그래서 노상 태수의 일을 걱정하고 충고를 하는 체한다.

남녀 세 사람은 형보와 행화까지 태수의 침울해지려는 기분에 섭쓸려 한동안 말이 없다가, 형보가 이윽고 긴하게,

“그런데 여보게 태수”

하더니 발딱 일어나서 도사리고 앉는다.

“……좋은 수가 있기는 하나 있는데, 자네 내가 시키는 대루 할려나”

“수…… 글쎄…….”

은행의 돈 점포낸 그 일에 대한 것인 줄 태수는 알아듣고도, 뭐 그저 수라께 강낭옥수수겠지 하는 생각에 그다지 내켜하지도 않는다.

“자네, 대체 어쩔 셈으루 이리나”

형보는 태수가 당겨하지를 않으니까, 이번에는 짐짓 걱정조로 캐자고 나선다.

“아무 도리두 없지 머…….”

태수는 두 팔을 뒤로 짚고 퍼근히 다리를 뻗고 앉아서 담배만 풀씬풀씬 피운다.

“그러면 잔말 말구, 어쨌든지 나 하라는 대루 하게, 응”

“어떻게”

“지금 백석이까지…….”

말을 꺼내는데 태수가 눈을 끔적끔적한다. 형보는 알아차리고서 행화를 돌려다본다.

“행화, 미안하지만 건넌방으루 잠깐만 가서 있게그려나, 응”

경대 앞에서 심심파적으로 눈썹을 다스리고 있던 행화가 세수 수건을 집어 들고 일어선다.

“난두 세수하러 나갈라던 참이요…… 와? 무슨 수가 생기오”

“응, 단단히 수가 생기네.”

“하아, 오래간만에 장주사 덕분에 술 한잔 얻어묵나 부다…… 인제 수 생기거던 아예 내 모가치 잊지 마소, 예”

“아무렴!…… 또 내가 잊어버리더래두 다아 이 고주사가 있잖나!”

“아무레나 나는 모르겠다. 수나 드북하니 잡소, 들…….”

행화는 웃음 섞어 이런 소리를 하면서 마루로 나간다.

“그래, 세 군데니 말이야…….”

형보는 행화가 다 나가기를 기다려 소곤소곤 이야기를 다시 내놓는다.

“……세 군데서 삼천 환씩 한 만 환 가량만 뽑아 내면 일은 되는데……”

태수는 벌써 고개를 흔들고 시원찮아하다가,

“만 원을 가지구 어떡허게”

“응, 그놈 만 원을 가지구서 나하구 둘이서 서울루 가거던…… 자네 혼자 가기가 적적하거들랑 저 애 행화나 데리구.”

“흥!”

“하아따! 지레 그리지 말구 끝까지 들어 봐요…… 그렇게 서울루 가서, 자넬라컨 문 밖에 아무데나 깊숙이 들어앉어 있으란 말야, 삼 년 아니면 다직해야 사 년…….”

“공금 횡령해 가지구 도망갔다가 잽히잖는 놈 못 봤네…… 제기, 상해나 북경 같은 데루 뛰었다두 잽혀와서 콩밥을 먹는데, 황차 서울!”

“그야 저 하기 나름이지. 조심을 안 하니깐 붙잽히지, 죽은 드끼 들어앉어만 있으면 십 년 가두 일 없어요.”

태수는 말이 없이 혼자서 고개만 가로 흔든다. 그는 잡히고 안 잡히고 간에, 하루 이틀도 아니요 삼사 년을 그처럼 답답하게 처박혀서 숨어 지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날 일이다.

돈을 마음대로 쓰고, 돌아다니면서 즐겁게 노는 그런 움직이는 생활이 아니고는 차라리 죽음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일이 탄로나는 마당에 이르러서도, 자살로써 감옥 가기를 피하려는 각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속도 모르고 형보는 연신 제 계획 설명이다.

“그러니깐 아무 염려 말구, 한 삼 년 그렇게 참구 있으면, 그 동안 나는 그놈 만 환을 가지구 앉어서 쓱 돈장사를 한단 말야! 응? 돈장사.”

“돈장사라니”

“응, 돈장사!…… 수형 할인 띠어먹는 것 말인데, 자세한 것은 종차 이야기하겠지만, 그렇게 만 환을 가지구 종로바닥에 앉어서 재빠르게만 납디면 삼사 년 안에 한 사오만 환찜은 넉넉 잡네!”

“허황한 소리!”

“이건 속두 모르구 이래! 해만 보아요…… 아, 그래서 한 사오만 환 잽히거들랑 그때는 자네가 자포낸 본전 일만삼천 환을 가지구 도루 와서, 자아 돈을 가져왔으니 용서해 주시오, 한단 말야. 비는 장수 목 벨 수 없다구, 그렇게 돈을 물어내 놓구 빌면 징역은 면할 테니깐…… 그리구 나서는 그 돈 나머질 가지구 자네허구 나허구 다시 장사를 하면 버엿하잖어? 어때”

“글쎄…… 그것두 자네가 친구를 생각하는 맘으루 그러는 것이니 고맙기는 고마워이. 그러니 종차 생각해 보세마는…….”

“자네가 그렇게 내 속을 알어주니 말이지, 그게 내한테두 여간만 위태한 일이 아닐세! 잘못하다가는 나두 콩밥이 아닌가…… 그렇지만 하두 자네가 사정이 딱하니깐 친구루 앉어서 그냥 보구 있을 수가 없구 해서 그리는 것이지. 그러니깐 자네두 생각하려니와 내 일을 내가 생각해서라두 여간한 조심할 배가 아니어든…….”

그러나 형보는 태수를 위해서 그런다는 것은 생판 입에 발린 소리요, 또 그렇게 만 원을 빼준대도 지금 이야기한 대로 행할 배짱은 아니다.

형보는 늘 두 가지의 엉뚱한 계획을 품고 지낸다.

 

 

'Reading Books > Reading Books' 카테고리의 다른 글

<R/B> 탁류 (16) -채만식-  (0) 2021.04.22
<R/B> 탁류 (15) -채만식-  (0) 2021.04.21
<R/B> 탁류 (13) -채만식-  (0) 2021.04.19
<R/B> 탁류 (12) -채만식-  (0) 2021.04.18
<R/B> 탁류 (11) -채만식-  (0) 2021.0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