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봉이의 웃는 입은 스러질 듯이 미묘하게 아담스럽지만, 계봉이의 웃음은 훤하니 터져 나간 바다와 같이 개방적이요, 남성적이다. 그런만큼 보매도 믿음직하다.
계봉이는 아직 활짝 피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래잖아 초봉이의 남화(南畵)답게 곱기만 한 얼굴보다 훨씬 선이 굵고, 실팍한 여성미를 약속하고 있다.
이 집안의 사남매는 계봉이와 형주와 병주가 한 모습이요, 초봉이가 돌씨같이 혼자 딴판이다. 그러나 그 두 모습이 다 같이 정주사나 유씨의 모습은 아니다. 초봉이는 부계(父系)의 조부를, 계봉이와 형주 병주는 모계(母系)로 외탁을 했다.
초봉이는 부뚜막에 꾸부리고 서서 국을 푸다가 계봉이를 돌려다보다가 웃으면서,
“왜 또, 뚜- 했니”
“나는 머 어디서 얻어다 길렀다나? 자꾸만 구박만 허구.”
계봉이가 잔뜩 부어 가지고 서서 두런두런 두런거리는 것을, 초봉이는 그 꼴이 하도 우스워서 손을 멈추고 자지러지게 웃는다.
“깍쟁이가 왜 자꾸만 웃구 있어! 남 약올르라구.”
“저 계집애가 왜 저래? 내가 무어랬니”
초봉이는 그대로 웃는 얼굴이나, 부드럽게 타이른다.
“……이짐 부리지 말구 어서 아버지 진지상 가지구 들어가아…… 아버지 시장하시겠다. 너두 배고프다믄서 먼첨 먹구.”
초봉이는 부친과 병주와 맞상을 본데다가, 국을 큰놈 작은놈 한 그릇씩 올려놓고, 그 나머지 세오뉘와 모친이 먹을 국은 큰 양재기에다 한데 퍼서 딴 상에 올려놓는다. 따로따로 국을 푸재도 입보다 그릇이 수효가 모자란다.
밥상에는 시커멓게 빛이 변한 짠 무김치 한 접시와 간장에 국뿐이다. 철 늦은 아욱국이기는 하지만, 된장기를 한 구수한 냄새가 우선 시장한 배들을 회가 동하게 한다.
계봉이는 다른 때 같으면 아직 더 고집을 쓰겠지만, 제가 원체 시장한 판이라 직수굿하고 부친의 밥상을 방으로 날라다 놓고 다시 나온다.
그 동안에 초봉이는 승재 방으로 들여보낼 자리끼 숭늉을 해가지고 서서 망설인다.
진작부터 초봉이는 밤저녁으로 승재가 목이 말라도 조심이 되어 물을 청하지 못할 줄을 알고, 언제든지 제가 저녁밥을 짓게 되는 날이면 이렇게 자리끼 숭늉을 해서 내보내곤 한다.
오늘도 숭늉을 해 들고, 기왕이니 든 길에 내 손으로 내다 주어 볼까 하고 벼르는 참인데, 마침 계봉이가 도로 부엌으로 나오니까, 장난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무렴해서 얼핏 계봉이더러 갖다주라고 내맡긴다.
“싫여!…… 왜 내가…… 난 싫여.”
계봉이는 아직도 심술났던 것이 덜 풀린 채로 쏘아붙이는 것이다.
“싫긴 왜 싫여? 남 밤중에 목마른 때 먹으라구 숭늉 한 그릇 해다 주믄 좋잖으냐”
“조믄 나두 좋아? 언니나 좋지…….”
“머”
초봉이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무어라고 말을 할 줄을 모르고 기색이 당황해진다.
“하하하하, 아하하하…….”
계봉이는 언제 심술이 났더냐는 듯이 싹 풀어져 가지고 웃어 대다가,
“……내가 옳게 알아맞혔지? 저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요! 하하하하.”
“저 애가!”
“암만 그래두 난 못 속인다누, 하하하하. 자아, 그럼 내가 메신저 노릇을 해주지, 헴…….”
계봉이는 그제야 자리끼 숭늉을 받아 든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해. 혹시 내가 남서방을 태클할는지도 모르니깐, 응? 언니”
“너 이렇게 까불 테냐”
나무라면서 때릴 듯이 으르니까, 계봉이는 해뜩 돌아서서 아랫방께로 달아나느라고 질름질름 숭늉을 반이나 흘린다.
초봉이는 나머지 밥상을 집어 들고, 뒤를 돌려다보면서 안방으로 들어간다.
계봉이는 아랫방문 앞으로 가더니 일부러 사나이 목소리를 흉내내어,
“헴, 남군 있소”
“거 누구”
미닫이를, 계봉이는 그래도 승재의 대답 소리를 듣고서야 연다.
승재는 아까 돌아올 때의 차림새 그대로 책상 앞에 가 앉아서 책을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히죽 웃는다.
돌아올 때의 차림새라고 했지만, 극히 간단해서 위아랫막이를 검정서지로 만든 쓰메에리 양복 그것뿐이다.
이놈에다가 낡은 소프트를 머리에 얹었으면 장재동(藏財洞)에 있는 병원과 이곳 거처하는 초봉이네 집을 오고 가는 도중에 있을 때요, 그 위에다가 흰 가운(진찰복)을 걸친 때는 병원에서 의사 노릇을 하는 때요, 또 한 가지, 게다가 낡아빠진 왕진가방을 들었을 때는 근동(近洞)의 가난한 집에 병을 보아 주러 무료왕진의 청을 받고 가는 때다.
작년 겨울 승재가 이 방을 세얻어 든 뒤로 심동에 헌 외투 하나를 덧입은 것 외에는, 그의 얼굴이 변하지 않듯이, 그놈 검정 서지의 쓰메에리 양복도 반년이 지난 오늘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래서 대체 날이 더우면, 저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나설 텐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거니와 초봉이한테는 재미스런 궁금거리이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승재라는 사람이 속세의 생활을 한 고패 딛고 넘어서서 탈속(脫俗)이 되었다거나, 달리 무슨 괴벽이 있어서 그러냐 하면 실상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 몸 감장도 할 줄 모르는 탁객(濁客)인 소치다.
그러한데다가 그는 또 가난하다.
승재는 본시 서울 태생이었었고, 다섯 살에 고아가 된 것을 그의 외가 편으로 일가가 된다면 되고 안 된다면 안 되는 어떤 개업의(開業醫)가 마지못해서 거두어 길렀다.
아이가 생김새와는 달리 재주가 있고 배우고 싶어하는 정성이 있음을 본 그 의사는 반은 동정심에서, 반은 어떻게 되나 하는 호기심에서 승재를 보통학교로부터 중등학교까지 졸업을 시켰다.
승재는 학교에 다니는 한편 주인의 진찰실과 제약실에서 자라다시피 했고, 더욱 그가 중등학교의 상급학년 때부터는 그 이상의 상급학교는 바랄 수 없음을 각오하고, 정성껏 진찰실의 실제 공부를 전심했다.
그리고 중학을 마친 뒤에는 이어 삼 년 동안을 꼬박 주인의 조수 노릇 하면서 의사시험을 치를 준비를 했다.
그리하는 동안에, 주인과는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주인도 승재를 어떻게 해서든지 의사시험에 잘 패스가 되어 의사면허장을 얻도록 해주려고 여러 가지로 지도와 편의를 보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승재를 그의 동창이요 이 군산서 금호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윤달식(尹達植)이라는 의사에게 천거하는 소개장 한 장만 남겨 놓고, 마침내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것이 승재가 이 군산으로 굴러오게까지 된 경로요…….
승재가 금호의원으로 와서 있기는 재작년 정월인데, 그 동안 그는 작년 오월과 시월에 두 번 시험을 쳐서 반 넘겨 패스를 했다.
인제 남은 것은 제일부의 생리(生理)와 해부(解剖), 제이부의 병리(病理)와 산부인과(産婦人科), 제삼부의 임상(臨床), 이 다섯 가지 과목뿐이다. 이 중에서도 임상에는 충분한 자신이 있기 때문에 일부러 뒤로 미룬 것이요, 그 나머지만 준비가 덜된 것인데, 어쨌거나 금년 시월이나 명년 오월이 아니면 시월까지의 시험을 치르기만 하면 넉넉 다 패스가 될 형편이다.
승재가 군산으로 와서 있으면서부터는 시험준비의 진보가 더디긴 했다. 매삭 사십 원의 월급에 매달려, 그만큼 일을 해주어야 하는 때문이다.
금호의원의 주인 의사 윤달식은 승재의 임상이 능란한 데 안심하고, 거의 병원을 내맡기다시피 했다. 숙식(宿食)도 전부 병원에 달려 있는 자기 집에서 하게 했었다.
그러고 보니 밤으로도, 밤에 오는 환자와 입원환자 때문에 승재는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달식이도 죽은 친구의 부탁까지 맡은 터이라, 미안히 여겨 마침내 승재더러 따로 방을 얻어 가지고서 밤저녁의 거처 겸 조용히 공부를 하라고 여유를 주었다. 그래서 승재는 작년 봄부터 그렇게 했고, 그러던 끝에 작년 겨울에는 방을 옮기게 된 계제에 이 초봉이네 집으로 우연히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승재는 하필 병원에서 거처하기 때문에만 시험준비가 더디었던 것은 아니다.
“좀 더디면 어떨라구.”
이런 늘어진 배포로서 그는 시험준비를 해야 할 의학서류는 제쳐놓고, 자연과학서류에 재미를
붙여 그 방면엣것을 많이 읽곤 했다. 그래서 그가 거처하고 있는 이 방에도, 책상 하나, 행담 하나, 이부자리 한 채, 이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술한 방이지만, 한편 벽으로 천장 닿게 쌓은 것은 책뿐이요, 그 중에도 삼분지 이 이상이 자연과학서류다.
그뿐 아니라 조용히 들어앉아 공부를 하겠다고 따로 거처를 잡고 나온 그는 도리어 일거리 하나를 더 장만했다.
동네에 병자가 있어 병원에도 다니지 못하고 하는 사람인 줄 알면, 그는 약도 지어서 주고, 다니면서 치료도 해준다. 그것이 소문이 나가지고, 이 근처의 일판에서는 걸핏하면 제 집의 촉탁의사나 불러 대듯이, 오밤중이고 새벽이고 상관없이 불러 댄다. 그래서,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그 수응을 하느라고 매삭 돈 십 원씩이나 제 돈이 녹는다.
월급 사십 원을 받아서 그 중 십 원은 그렇게 쓰고, 이십 원은 책값으로 쓰고, 나머지 십 원을 가지고 방세 사 원과 한 달 동안 제 용돈으로 쓴다. 용돈이라야, 쓴 막걸리 한잔 사먹는 법 없고 담배도 피울 줄 모르고, 내의도 제 손으로 주물러 입으니까, 목간값이나 이발값이 고작이요, 그래서 처지는 놈은 책값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요새 몇 달째는 초봉이네 집에 방세를 미리 들여보내느라고 새어 버린다. 이렇듯 그는 가난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가난 이외의 것을 모르니까, 그는 태평이다. 그는 제가 의사시험에 패스가 되어 의사면허를 얻게 될 것을 유유히 믿는다. 자연과학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해주어 성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을 재미있어한다. 해서 근심도 초조도 없다.
“덩치는 덜씬 커가지구…….”
계봉이는 승재가 언제나 마찬가지로 입은 다문 채 코를 벌씬하고 눈으로만 웃는 것을 마구 대고 놀려먹는다.
“……웃는 풍신이 그게 무어람! 그건 소가 웃는 거지 사람이 웃는 거야”
승재는 계봉이의 하는 양이 도리어 귀엽다고 그대로 눈으로만 순하디순하게 웃고 있다.
“저거 봐요! 그래두 말을 안 듣구서 그래! 아 글쎄 기왕 웃을려거던 하하하하 이렇게 웃던지, 어허허허 이렇게 웃던지 응? 입을 떠억 벌리구 맘을 터억 놓구서 한바탕 웃는 게 아니라, 그건 뭐야! 흠, 이렇게, 입을 갖다가 따악 봉해 놓구 앉어서 코허구 눈허구 웃는 시늉만 하구…… 앵! 그 청년 못쓰겠군. 거 좀 속시원하게 웃어 제치지 못한담매”
“인제 차차 웃지.”
승재는 수염끝이 비죽비죽 솟은 턱을 손바닥으로 문댄다.
“인제란 게 언제야? 남서방 손자가 시방 남서방처럼 턱밑에 그런 수염이 나면? 그때 말이지? 하하하하……!”
계봉이가 웃는 것을 보고, 승재는 아닌게아니라 너는 퍽 시원스럽게 웃는다고 탐탁해 바라다만 본다.
계봉이는 이윽고 웃음을 그치고 나서 자리끼 숭늉을 문턱 안으로 들여놓아 준다.
“자아 숭늉요…… 그런데 이건 거저 숭늉은 숭늉이지만 이만저만찮은 생명수요! 알아듣겠지? 그 말뜻을, 응”
승재는 얼굴이 붉어지면서, 점직하다고 히죽히죽 웃기만 한다.
“하아! 저 청년이 왜 저렇게 무렴해하꼬? 무 캐먹다가 들켰나”
계봉이는 마치 동물원에 간 어린아이들이 곰을 놀려먹듯 한다. 그는 지금 배가 고프지만 않았으면 얼마든지 장난을 하겠지만, 그만 하고 돌아선다.
마악 돌아서는데 승재가 황급하게,
“저어, 나 좀…….”
“무슨 할말이 있는고”
“응, 저녁 해먹었지”
승재는 아까 마당에서 하듯이 양복 저고리 포켓 속에 손을 넣고 무엇을 부스럭부스럭 찾으면서 어렵사리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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