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아무려나 입맛이 날 리가 없고, 야리게 퍼준 밥 한 공기를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하다가 상을 물렸다.
아직까지도 맥주만 들이켜고 있던 제호가 생 성화를 하면서 더 먹으라고 야단야단한다.
초봉이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은 것을 마지못해 많이 먹었노라고 대답을 해주고서, 방 머리께 유리창 밖에다가 베란다 본으로 꾸며 논 자리로 옮아 앉았다.
바깥 풍경은 들 가운데 양옥과 화식집들이 드문드문 놓이고 들에는 모를 심은 논과 보리를 베어낸 밭이 있을 뿐, 퍽 단조했다.
그래도 시원한 등의자에 편안히 걸터앉아 보는 데 없이 벌판을 바라보면서, 막막한 생각에 잠겨들기 시작했다.
제호는 한 시간이나 걸리다시피 밥상머리에 주저앉아 시중 드는 하녀와 구수하니 지껄이면서 맥주를 다섯 병이나 집어 먹고, 밥도 여러 공기 먹는다. 그리고는 데리고 온 초봉이는 잊은 듯이 방석을 겹쳐 베고 버얼떡 드러누워, 이내 코를 골아 젖힌다. 시꺼먼 털이 숭얼숭얼한 정강이를 통째로 드러내 놓고 자빠져 자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초봉이는 커튼으로 몸을 가렸다.
그러나 미구에, 조속조속 달콤하니 오는 졸음에 저도 모르게 앞 탁자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잠이 들 때까지도 그는,
‘보아서 마구 내뻗으면 고만이지…….’
이런, 저도 못 미더운 방안장담이나 해두는 걸로 임시의 위로를 삼았다.
느직이 여덟시가 지나서 저녁을 먹고 다시 탕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보니, 하녀가 널따란 이부자리를 방 한가운데로 그들먹하게 펴놓고 베개 두 개를 나란히 물려 놓는다.
‘필경 이렇게 되고 마는가!’
초봉이는 그대로 문치에 우두커니 지여 서서 눈을 내리감는다.
‘대체 어째서 이렇게 되어지는 것인고’
오늘 아침 군산서 아무 일도 없이--그렇다, 아무 일도 없었다--그런 아무 일도 없이 떠나온 내가, 이건 꿈에도 생각지 않고 졸가리도 닿지 않고 하릴없이 허방에 푹 빠진 푼수지, 이 밤에 저 박제호와 어엿이 한 이불 속에 들어가다니, 이 기막힌 사실을 무엇이 어떻다고 할 기신도 나지 않았다.
이부자리를 다 펴고 난 하녀는 알심을 부린답시고, 고단하실 텐데 어서 주무시라고 납죽거리면서 물러나간다.
베란다에 나앉아서 초봉이의 난감해하는 양을 보고 헤벌씸 혼자 웃던 제호가 이윽고,
“무얼 저러구 섰으까”
하면서 고개를 까분다.
“……일러루 와서 이야기나 해보더라구…… 응? 초봉이.”
이야기란 소리에, 마지못해 초봉이는 제호의 맞은편으로 가서 고즈넉이 걸터앉는다.
“그런데에…… 집은 어떡헐꼬”
제호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더니 밑도 끝도 없이 불쑥 한다는 소리다.
“집? 요”
초봉이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쳐든다.
“응, 집…… 우리 살림할 집, 허허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대체 누구하고 언제 그렇게 다 작정을 했길래 시방 이러느냐고, 짐짓이라도 면박을 줄수 있는 제 자신이었으면 싶었다.
제호는 기다랗게 설명을 한다.
앞으로 윤희와 이혼을 하기는 하겠으나, 그게 용이한 일은 아니다. 저편이 그런 억척인만큼, 너와 내가 동거를 하는 줄을 알고 보면 심술이 나서라도 이혼에 응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윤희와 이혼이 되는 날까지는 일을 속새로 덮어두는 게 좋겠다. 너를 바로 청진동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그런 곡절이기 때문이니 부디 어찌 생각 마라. 하면 네가 살림할 집은 우선 마땅한 놈으로 골라 세를 얻어 주마.
그렇게 따로 살림을 하고 있노라면, 첫째 뜬마음이 안정이 될 뿐만 아니라 홀몸으로 어디 가서 월급이나 한 이삼십 원 받고 지내는 것 같을 것이냐? 그런 생활보다는 우선 살림 범절만 해도 몇곱절 낫게시리 뒤를 대주마.
그리고 그렇게 한동안 참고 지내면 윤희와의 문제가 깨끗하게 요정이 난 뒤에 너를 큰집으로 맞아들일 것은 물론이요, 만약 네가 소원이라면 결혼식이라도 하자꾸나.
그러니 다 그렇게 알고 나를 믿어라. 혹시 나를 의심할는지도 모르겠으나 설만들 내가 이 나이를 해가지고 집안간의 세교를 생각하든지, 또 과거에 너를 귀애했던 것으로든지 너를 한때의 노리갯감으로 주무르다가 내버릴 악심으로야 이럴 이치가 있겠느냐. 그러한 불량한 놈이 아니라는 것은 변명을 않더라도 네가 잘 알리라.
제호의 설명은 대개 이러했다. 한 시간 동안이나 안존히 앉아 수선도 떨지 않고 점잖게, 그리고 간곡히 이야기를 하던 것이다.
미상불 초봉이를 제 것 만들겠다는 일념에, 그의 하던 말은 적어도 이 당장에서는 다 진정임에 틀림이 없었다.
초봉이는 제호의 태도와 말이 진실하다고 믿기보다, 진실하겠지야고 믿어 두고 싶었다.
‘기왕 이리 된 걸…….’
무슨 차마 못 할 노릇을 죽지 못해 억지로 당하는 것처럼이나 강잉하여 마음을 돌리던 것이다.
그는 제호의 이야기한 ‘생활의 설계’가 적잖이 만족했다. 욕심 같아서는 기왕이니 제 의향으로, 가령 친정집의 생활 같은 것도 어떻게 요량을 해달라고 말을 해서 다짐 같은 것이라도 받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지 처음부터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에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제호는 입이 귀밑까지 째지면서, 신혼 축하를 한다고 하녀를 불러 올려 맥주를 청한다.
초봉이는 비로소 제가 제호의 ‘아낙’이 되는 것에 대한 제 기호(嗜好)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아야 스스로 이상할 만큼 좋고 언짢고 간에 분간을 할 수도 없고, 또 가타부타 간의 시비도 가려지지 않고,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제호와 저를 번갈아 보면서 자꾸만,
‘내가 저 아저씨의 아낙’
‘저 아저씨가 내 남편’
해야, 아무래도 실없는 장난이나 거짓말 같아 우습기나 하지 조금도 실감은 나지 않았다. 고태수 적에도 이랬던가 곰곰 생각해 보나, 그러한 것을 마음에 헤아린 기억이 없다.
이튿날 낮 두시, 인제는 정말로 제호의 ‘우리 아낙’이 된 초봉이는 신혼여행을 미리서 온 셈이 된 유성온천을 떠나 대전으로 버스를 달린다. 달리면서 생각은 두루 깊어 어쩌면 한달지간에 이다지도 갖은 변화를 겪는고 하면, 그것이 모두 제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을 잠시 맡아서 해주는 것만 같았다.
초봉이가 제호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서 여관에 묵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집을 드느라고 제호는 자작소롬한 살림 나부랑이를 자동차에 들이 쟁여 가지고 초봉이와 더불어 종로 복판을 동쪽으로 달리기는 오후쯤 해서고.
“저게 우리 회사야…… 위선 임시루 이층을 빌려 쓰는데, 널찍해서 쓸모가 있어요…….”
동관 파주개에서 북편으로 꺾여 올라갈 무렵에, 제호는 길 모퉁이의 이층 벽돌집을 손가락질한다.
“……또오, 저긴 활동사진집…… 우리 괭이 구경다니기 좋으라구, 헤헤.”
제호는 유성온천서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부터 초봉이를 ‘우리 괭이’라고 불렀다.
동관 중간께서 자동차를 내려, 바른편 골목으로 들어서면 바로 뒷골목을 건너 마주 보이는 집이 었었다.
송진 냄새가 나는 듯 말쑥한 새 집이, 문등까지 달리고 드높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산뜻한 게 마음에 앵겼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바른편 방이 행랑이요, 다시 유리창을 한 안대문을 들어서면 왼편이 부엌과 안방, 그리고 고패져서 삼간마루와 건넌방이다. 겉으로 보매 그럴듯한 것이 들어와서 보니 좁고 옹색하다. 마당이 앞집과 옆집의 뒷벽에 코를 부딪칠까 조심되게 좁았다. 그러한 마당에다가 장독대도 시늉은 해놓고, 수통도 있기는 있고, 또 좌가 동남으로 앉은 집이라, 겨울볕은 잘 들어도, 방금 닥쳐 오는 여름철은 서쪽이 막혀서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보증금이 이백 원이요 월세가 삼십 원이라는 소리에, 초봉이는 깜짝 놀랐다.
행랑은 지저분할 테니 두지 말자고, 제호가 미리 말하던 대로 비어 있었다.
주인 내외가 들어오니까, 건넌방에서 배젊어도 빛이 검고 우툴우툴하게 생긴 여자가 공손히 마중을 한다.
식모도 이렇게 미리 구해 놓았고, 또 의복 장롱이야 찬장에 뒤주야 부엌의 살림 제구야 모두 차려 놓은 것을 보니, 초봉이는 태수와 결혼을 하던 날, 역시 이렇게 차려 놓은 집을 들던 일이 생각나서 일변 속이 언짢았다.
살림은 쌀나무와 심지어 빗자루 하나까지도 죄다 구비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반가운 것은 재봉틀이다. 청진동 제호의 큰집에 있던 것을 내려온 듯한데, 초봉이는 윤희가 쓰던 것이거니 하고보자니 치사스럽기도 하나 군산서 모친과 더불어 재봉틀도 없이 삯바느질에 허리가 아프던 일을 생각하면, 윤희한테 치사스러운 것쯤 아무렇지도 않았다.
결국 초봉이는 다 만족한 셈이다. 다만 화단을 만들 자리가 아무리 해도 없는 것이 섭섭했지만, 그것은 화분을 사다 놓기로 하면 때울 수가 있으리라 했다.
이튿날 아침 제호가 조반을 먹고 회사로 나간 뒤에 초봉이는 모친한테 편지를 썼다.
사연은, 무사히 왔고 또 요행히 오던 길로 몸 편하게 잘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조금치도 염려 말라고, 그리고 떠나올 때 편지에 말한 대로 집 보증금 주었던 것이며, 시계, 반지, 양복장 등속을 말끔 팔아서 그렁저렁 지내노라면 종차 형편을 보아 좌우간 무슨 변통을 하겠노라고, 아주 간단히 썼다.
짐작건대 혼인 때 쓰고 남은 돈이 몇십 원 있을 테고, 또 제가 시킨 대로 주워 보태면 이백 원 돈은 될 테니, 서너 달 동안은 그렁저렁 지탱할 듯싶어 우선 그걸로 친정은 안심할 수 있었다. 종차는 제호한테 다 까놓고 이야기를 해서 살림을 조략히 해서라도 할 테니 매삭 이삼십 원 가량씩 따로 내려 보내 달라고 하든지, 그러잖으면 달리 무슨 도리를 구처해 달라고 청을 댈 요량이던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라, 기왕 계봉이와 형주도 군산서 지금 다니는 학교를 마치는 대로 서울로 데려올테니, 그 애들의 교육도 제호더러 감당을 해달라고 할 작정까지도 해두기를 잊지 않았다.
편지를 쓰고 나서도 한동안 붓을 놓지 못하고 망설였다.
기왕 편지를 쓰는 길이니, 시방 제호와 만나 다 이렁저렁 되었다는 사연을 눈치만이라도 비칠까하던 것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도리는 당연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그러고 보면 비록 부모 자식 간일망정 깊은 곡절은 모르고, 계집아이가 몸가짐을 그리 헤피 했을까 보냐고 아닌 속을 아실 것 같고 해서 그래 주저를 한 것인데, 역시 아직 이르다고, 마침내 먼저 쓴 대로 그냥 편지를 봉해 버렸다.
석양쯤 제호가 싱글벙글 털털거리고 들어오더니 빳빳한 십 원짜리로 오십 원을 착 내놓는다.
“자, 이게 우리 괭이 한 달 월급이다. 허허허허, 괭이 월급 주는 놈은 이 세상에 이 박제호 한 놈 뿐일걸? 허허허, 제기할 것, 허허허허.”
“이렇게 많이”
초봉이는 반색을 하면서 웃는다.
아닌게아니라 이삼십 원 월급이나 받는 것보다 월등 낫다는 타산이야 종차 생각나겠지만, 우선 눈앞에 내논 한 달 용돈 오십 원이 푸짐하던 것이다.
“허허! 그게 그리 대단해서!”
제호는 초봉이의 볼때기를 가만히 꼬집어 주면서,
“……돈 오십 원이 그리 푸달지다구? 쓰기 나름이지…… 그걸랑 둬두구서 반찬거리며, 전등세, 수도세, 식모 월급, 그런 거나 주라구…… 집세는 내가 따루 줄 테구, 또 나무 양식두 따루 딜여보낼 테니깐, 알겠지!…… 응, 그리구 참, 달리 무엇 살림 장만할 게 있다던지, 옷감 같은 걸 끊느라구 모갯돈이 들겠거들랑, 날더러 달라구 말을 하구.”
초봉이는 따로 시방 약삭빠른 셈을 따져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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