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봉이는 그제야 구두를 벗고 마루로 올라서니까, 한 여자가 냉큼 가죽 슬리퍼를 집어다가 꿇어 앉으면서 바로 발부리 앞에 놓아 준다.
초봉이는 제발 이러지 말아 주었으면 하여 딱해 못 견딘다.
제호는 보니, 짐을 들고 앞선 여자의 뒤를 따라 이층 층계로 올라가고 있다. 초봉이는 이런 집에서는 목간도 이층에다가 만들어 놓았나 보다고 더욱 신기했으나, 자꾸만 이렇게 둔전거리다가는 촌뜨기 처접을 타지 싶어 얼핏 제호를 따라 올라갔다.
이층으로 올라가서 양탄자를 깐 복도를 한참 가노라니깐 앞서 가던 하녀가 한 방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문을 열어 주는데, 널따란 다다미방이다. 초봉이는 팔조를 모르니, 그냥 넓은 줄만 알 뿐이다.
하녀가 뒤로 따라 들어와서는 비단 방석을 두 개 마주 놓아 주고, 시원하라고 앞 유리창들을 열어 놓고 한다.
“예가 어디래요”
초봉이는 목간통이 보이지 않고, 이렇게 방으로 모셔 들이는 게 궁금할 밖에…….
“어딘? 온정이지.”
“목간은”
“목간? 아무렴, 인제 해야지…… 가만있자, 옷이나 좀 갈아입어야 목간을 하지.”
“옷을”
“하하하, 첨으로 와서 모르는군…… 온정에선 빌려 주는 유카다가 있으니깐, 그걸 갈아입어야 편한 법이어든.”
그것도 미상불 그럴듯하기는 그럴듯했다. 마침 하녀 둘이 하나는 찻쟁반을, 하나는 유카다를 받쳐 들고 들어온다. 들고 날 때면 으레 쪼그리고 앉는 것이 민망해서 볼 수가 없다.
하녀가 차를 따르는 동안 제호는 양복을 훌러덩훌러덩 벗어 던지면서 유카다를 갈아입는다.
초봉이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얼른 외면을 하고 말았으나 내심에는, 제호라는 사람이 그렇진 않던 사람인데 어쩌면 이다지도 무례할까 보냐고 대단히 불쾌했다.
하녀가 유카다를 펴들고서 초봉이더러도 어서 갈아입으라고 속없이 연방 눈웃음을 친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제호가 유카다를 다 갈아입고 돌아서다가, 초봉이의 곤경을 보고는 꺼얼껄 웃으면서 하녀더러 설명을 한다.
우리 아낙은 온천이 처음이기도 하려니와, 또 조선 가정에서는 아낙이 남편 앞에서 남이 보는데 함부로 옷을 벗거나 하지 않는 법이라고, 그러니 그대로 놓아 두라고…….
‘우리 아낙이라니’
초봉이는 단박 면박이라도 주고 싶게 제호가 괘씸했다. 그의 눈살은 졸연찮게 꼿꼿해서 제호를 거듭떠본다. 그러나 제호는 초봉이의 그러한 눈치는 거니를 챘어도, 어째 그러는지 속내는 알 수가 없었다.
아까 대전역에선 그만큼 선선히 내 뜻에 응하던 사람이 인제 와서는 이다지 비쌜 게 무엇이란 말인고
옳아, 그런 게 아니고 저게 부끄럼을 타는 모양인 게로군. 그러면 그렇지 원…….
“허허 제기할 것. 그렇게 부끄러울 게 무에 있더람…… 그래두 너무 그렇게 서먹서먹하질랑 말아요!…… 여기 여자들이 보는데, 마치 남의 집 여자를 꼬여 가지구 온 것처럼 수상하게 여길라구…… 그러잖어”
말이 그럴듯하여, 초봉이는 마음이 약간 풀렸다. 역시 꾀고, 꾐을 받아서 온 것으로 보인다면야 차라리 아닐지언정 겉으로라도 내외간인 체하는 것이 그보다는 덜 창피할 테라서…….
“자아, 그런데 어떡헐꼬? 응…… 목간을 먼점 할까? 시장한데 무어 요기를 먼점 할까”
“글쎄요…….”
초봉이는 시장하기는 하나, 이러자거니 저러자거니 제 의견을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 아주 기분 좋게 목간을 하구 나와서 먹드라구? 좀 시장하더래두, 기왕 참던 길이니.”
제호는 기다리고 섰는 하녀더러 탕에 들어갔다가 나올 동안에 화식(和食)을 준비하든지 그게 안되겠으면 돔부리나 그런 것이라도 먹게 해달라고, 그리고 우리 아낙은 집에서도 나하고 같이 목간을 하는 법이 없으니 따로 독탕에 안내해 주라고 주절주절 이른 뒤에, 하녀가 받쳐 주는 타월을 어깨에다 걸치고 나가 버린다.
초봉이는 기다리고 섰는 하녀가 제일에 민망해서 할 수 없이 유카다를 갈아입는다. 새수빠진 하녀가 연신 아씨 아씨 해가면서 생 근사를 피우는데 딱 질색을 하겠다.
탕에는 독탕이라 혼자다. 유황내가 나고 호젓한 게 마음에 헤적헤적했지만, 그래도 조용하고 정갈한 것이 좋기는 좋았다.
물탕 바닥의 푸른 타일에 비쳐, 깊은 연못의 물인 듯 새파란 물이 가장자리로 남실남실 넘쳐흐르는 것이 아까울 만큼 흐뭇해 보인다.
물은 너무 뜨거운 것 같았으나 참고 그대로 들어가서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잠겨 있노라니까, 여러 날 동안의 피로가 새 채비로 몸에서 풍기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어 다 씻겨 나가는 성싶어 여간만 개운한 게 아니다.
맑은 물 속으로 하얀 제 몸뚱이가 들여다보인다.
대체 이다지도 곱고 깨끗한 몸뚱이가 그만 더럽혀지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냐.
그러나마 그게 한 가지도 아니요, 두 가지씩…… 남이 부끄러운 체면의 수치가 하나, 제 마음에 부끄러운 비밀한 수치가 하나.
이 두 가지의 형적 없는 때가 이렇듯이 곱고 정갈해 보이는 내 몸뚱이에 적이 돋은 듯 눌어붙어 한평생을 가도 벗어지지 않다니.
이리 생각하면 마구 껍질이 한벌 벗도록 부욱북 문질러 씻어라도 내보고 싶어진다. 그래 부리나케 물탕 밖으로 나와서 몸을 문지른다. 그러나 미끈미끈하기만 하고 시원치가 않아서, 여기저기 둘러보아야 비누 같은 것은 놓아 둔 게 없다. 이만큼 차려 놓고 수건까지 주면서 비누는 주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 뒤에 어느 말끝엔가 제호더러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 유황 온천에서도 비누를 쓰느냐고 조롱을 받은 것은 후일담이고.
탕에서 나와서, 방을 잊어버리고 어릿어릿하는데 지나가던 하녀가 쪼르르 데려다 준다. 제호는 기다란 얼굴이, 심지어 대머리 벗어진 데까지 불크레하니 익어 가지고 조그마한 밥상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 초봉이의 밥상도 따로 갖다 놓았다. 조선식으로 맞상을 안 한 것이 다행스러웠다.
“어때? 기분이 아주 좋지”
제호는 부채질을 하면서 무엇이 그리 기쁜지 연신 싱글벙글 좋아한다.
“……자아 밥 먹더라구. 퍽 시장했을 거야! 그새 여러 날 걱정으루 지내느라구 무얼 변변히 먹지두 못했을 텐데.”
밥상 앞에 가 무릎을 뉘고 앉으니까, 하녀가 간드러지게 공기에다 밥을 퍼올린다. 초봉이는 두 손으로 덤쑥 받는다.
“어여 먹어요. 많이 배불르게 먹어요. 인전 아무 걱정두 할라 말구서 잘 먹구 맘두 편안히 가지구 그래요. 마침 목간을 했으니깐 그걸루 과거는 말끔 씻어 바린 요량을 하구 말이지, 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그렇기는커녕 비누가 없어서 때도 못 씻은걸 하고 속으로 웃었다.
“……자아 어서 먹어요…… 원 저렇게 이쁜 사람이, 원 그런 악착스런 일을 당하구 그리다니, 에이 가엾어!…… 가엾어 볼 수가 없단 말야, 허허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이건 바로 어린애를 어르듯 한다고 서글퍼서 우습지도 않았다.
“……자, 난 반주를 한잔…….”
제호는 하녀한테 유리 곱뿌를 들이댄다.
“……연애라껀 유쾌한 물건이니깐, 술을 한잔 먹으면 더 유쾌하다구? 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겨우 가라앉던 심정이 또다시 더럭 상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면서, 대체 저 사람이 어찌 이리 실없는고 하고 제호의 얼굴을 똑바로 거듭떠본다.
그러나 제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헤벌씸 웃으면서 하녀가 부어 주는 맥주를 버큼째 쭈욱 들이켠다.
“어허 시언하다!…… 어때? 한잔 해보까”
제호는 지저분하게 거품이 묻은 입술을 손바닥으로 닦으면서 초봉이에게 곱뿌를 건네 준다.
초봉이는 패앵팽한 눈살로 제호를 거듭떠보다가 외면을 한다.
“싫여…… 어허허허.”
초봉이가 보기에는 하릴없이 미친놈같이 제호는 꺼얼껄 웃어 대면서 하녀한테 곱뿌를 들이민다.
초봉이는 밥 먹던 젓갈을 내던지고 일어설 만큼 부아가 더럭 치달았다.
대관절 연애를 한다니 어따 대고 하는 말이며, 또 술을 먹으라고 하니 이건 약간 무례 따위가 아니라 사람을 망신을 주려 드는 게 아니냐
아니, 인제 보니 저 위인이 딴 속이 있어 가지고 나를 이리로 꼬여온 것이 아닌가? 섬뻑 만나던 길로 여편네를 쫓았느니 이혼을 하느니 풍을 치던 것이며, 횡액이라고 동정해 주는 체 앞일은 제가 감당하마던 것이며, 다 배짱이 달라서 한 수작이 아닌가? 하녀더러 아낙이니 남편이니 한 것도, 그러니까 거짓말삼아 정말을 한 것이고.
이렇게 제호의 속을 차근차근 캐고 보니, 이건 큰일도 분수가 있지 기가 딱 막힌다.
‘음충맞은 도둑놈!’
밉살머리스럽고, 또 도둑놈은 말고라서 역적놈이라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일은 단단히 커두었다. 어느결에 이렇게 옭혀 들었는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러노라니, 깔고 앉은 방석에 바늘이 박힌 것 같아 어서어서 이 자리를 피해 달아나야겠다고 마음이 담뿍 단다. 그러나 그러는 하면서도 웬셈인지, 과단 있이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대신 기운이 차악 까라지고 한숨이 터져 나온다.
온갖 여망을 거기다가 붙이고 찾아가던 그 사람인 것을 여기서 떼치고 혼자 나설 일을 뒤미처 생각하니 겁이 더럭 나고, 그것은 마치 어머니를 길에서 잃어버린 아기 적인 듯 천지가 아득하여 어쩔 바를 모를 것 같기만 하던 것이다. 이게 다 무슨 약비한 짓이냐고 애써 저더러 지천도 해보기는 했으나, 종시 제가 제 말을 들어 주지를 않는다.
그러나 실상인즉, 그는 제호를 떼쳐 버리기가 겁이 나기 전에, 저와 마주 떠억 퍼버리고 앉아 있는 제호라는 인물의 커다란 몸집에서 무겁게 퍼져 나오는 이상한 압기, 이 압기에 눌려 나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꼼짝 못 하고 저편이 잡아 끄는 대로 끌려 가고라야 말지 별수가 없느니라고 미리 단념부터 하고 있는 제 자신을 의식지 못할 뿐더러, 그 압기라는 건 제호라는 위인이 버엉떼엥하면서 남을 덮어 누르고 제 고집대로 하는 뱃심도 뱃심이겠지만, 그보다도 결국 그가 이편을 구해 줄 수 있는 능력의 우상인 데 지나지 않는 것을, 그만 것에 눌려 지레 자겁을 하도록 초봉이 제 자신이 본시 앙칼지지도 못했고, 겸하여 인생의 첫걸음을 실패한 것으로 부지중 자긍을 잃고 자포자기가 된 구석이 없지 못했던 때문인 줄을 그는 제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서 무단히 앉아, 속절없이 이 운명 앞에 꿇어 엎디는 제 자신의 만만한 신세를 힘없이 한탄이나 하는 것으로 겨우 저를 위로하자고 든다.
철든 이후로 무엇에고 나를 고집 못 하던 나!
고태수와 결혼한 것도 알고 보면 내 마음이 무른 탓이요, 장형보에게 욕을 본 것도 사람이 만만한 탓이 아니더냐. 그러한 보과로는 내 몸과 청춘을 잡친 것밖에는 무엇이 더 있느냐.
그리고서 시방 또다시 새로운 운명이 좌우되는 이 마당에 임해서도 다부진 소리 한마디를 못 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
이걸로써 저를 용서하는 대신, 답답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탄식거리에는 족했었다. 미상불 그는 한숨을 몰아 내쉬면서 눈에는 눈물까지 어렸다.
그러나 근본을 따지고 보면, 시방 초봉의 한탄이란 그다지 근거가 있는 것이 되질 못한다. 그는 애당초에 제가 박제호의 뜻을 받아 그의 계집이 된다는 새로운 사실에 대해서 전연 비판을 가지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그랬기 때문에 그 사실--초봉이 제가 박제호의 계집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 가한지 불가한지를 통히 모르고 있다. 하물며, 불가하면 무엇이 어쩌니 불가하다는 것이랄지, 따라서 제가 마음에 정녕 싫은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니, 좀 과하게 말을 하자면, 종일 통곡에 부지하마누라상사라는 우스꽝스런 초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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