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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43)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22.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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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햇볕이 차창으로 쬐어 들어, 좌석의 고운 남빛 우단을 더욱 해맑게 드러낸다.

몇 되지 않는 손님들은 제각기 남을 상관 않고 한가로이 앉아 신문을 읽거나 담배를 피운다.

“자아, 이것 좀 먹으라구…….”

제호는 사과 하나를 꺼내고서 과실 바구니를 통째로 내맡긴다.

“……어서 아무거던지 꺼내 먹어요. 자, 칼두 여기 있구.”

제호는 조끼 주머니를 뒤져서 칼을 꺼내 초봉이를 주고는, 저는 손바닥으로 쓱쓱 문대는 둥 마는둥,

“난 머…….”

하더니 그대로 덤쑥 베어 문다.

“지가 벳겨 드리께 인 주세요!”

초봉이는, 제호의 털털한 짓이 저 보기에야 유쾌했지만 다른 자리의 점잖은 손님들이 볼까 봐서 민망했다.

“괜찮어, 괜찮어…….”

제호는 볼퉁이를 불룩불룩하면서 연신 손을 내젓는다.

“……이놈 사과는 껍질째 먹어야 좋다면서…… 초봉이두 어서 먹어요…… 이 사과가, 이놈을 날마다 식후에 한 개씩만 먹으면 머 의사가 소용이 없다구? 허허, 정말 그리다간 우리 약장사놈들두 밥 굶어 죽게? 허허허허, 제기할 것.”

초봉이는 이 유쾌한 사람에게 끌리어 절로 웃음이 나와진다. 보름 만에 웃는 웃음이다.

제호는 초봉이의 웃는 입 가장자리와 턱을 보고, 새침하던 얼굴이 딴판이요, 미상불 이쁘기는 이쁘다고 속으로 새삼스럽게 탄복을 하여 마지않는다.

“그런데, 서울은 무엇 하러 가나”

제호는 소곳한 초봉이의 이마를 의미 있이 건너다보면서 묻는다. 초봉이는 사과 벗기던 손을 멈추고 잠깐 고개를 들었으나 어쩐지,

‘실상은 아저씨를 찾아가는 길이랍니다.’

하는 말은 주저해지고,

“거저 구경삼아서…….”

“구경? 허어!”

제호는 다시 한참이나 초봉이를 건너다보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그런 게 아니라, 아따 저어 무엇이냐, 나두 초봉이 사정을 다아 알았어, 알았는데…….”

초봉이는 제호가 다 안다는 눈치는 알기는 했었지만, 막상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나오는 데는 얼굴이 화틋 달고, 다시금 고개가 깊이 수그러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아! 이 사람, 내한테까지야 무어 그렇게 무렴해할 게 있나!…… 허긴 몰랐을 텐데 우연히 어느 친구가 그런 이야길 하더군그래…… 신문에두 나긴 했더라는데 나는 못 보았지만…… 그리나 저리나 간에 원, 그런 횡액이 있더람!…… 그거 원 참!…… 횡액이야 횡액. 큰 횡액이야!…… 글쎄 듣기에 어떻게 맘이 안됐는지! 제기할 것, 그런 놈의 일이 원!”

제호는 말을 잠깐 멈추고 초봉이의 하얀 가르마를 한참이나 건너다보다가,

“……그렇지만, 응? 이거 봐요 초봉이, 초봉이”

하면서 찔벅거릴 듯이 재우쳐 부른다.

“네”

초봉이는 고개를 숙인 채 벌써 다 벗긴 사과를 먹지도 못하고 만지작거리기만 한다.

“응, 다른 게 아니라 말이지…… 그렇다구 애여 낙심을랑 하지 말아요. 낙심하면 정말루 그건 못쓰지…… 무어 어때? 한번 실수루, 아니 실수가 아니라 횡액으루 그런 일을 좀 당했기루서니 어떤가…… 아무렇지두 않어. 아직 청춘인데…… 그런 건 하룻밤 꿈이거니 해버리면 그만이야. 다아 아무렇지두 않어. 일없어. 그럴 게 아냐? 응? 초봉이.”

“네에.”

초봉이는 가만히, 그러나 마지못해서가 아니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대답을 한다.

그는 제호가 곡진한 태도로 곰살갑게 구는 품이 마치 아픈 자리를 만져 주되 아프지가 않고 시원하여, 어떻게도 고마운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따라서 그는 (하기야 전에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낙명이 된 몸으로 맨손을 쥐고서 넓은 사바(娑婆)로 뛰어나온 막막한 이 경우를 당하여, 인생과 생활에는 든든한 권위가 섰고, 일변으로 활달하여 인정이 있는 이 중년 남자 제호라는 사람이 타악 미덥고 안심되는 품이란, 길을 잃은 아기가 일갓집 아저씨를 섬뻑 만난 것과 같아 인제는 창피나 부끄러운 생각은 다 가시고 만다.

제호 역시 이미 심중에 초봉이를 가지고 만만히 다룰 수가 있다는 뱃심이 들어차서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므로 어떤 기회를 당하게 되면 주저 않고 행동을 일으킬 위인이기는 하나, 그러나 시방 이 자리에서 초봉이를 여러 가지로, 더욱이 장래의 희망을 가지라고 위로를 하고 격려를 하고 하는 것은 결코 잔망스럽게 달콤한 먹이를 먹이자는 것이 아니요, 단순히 어른다운 애정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 그래…… 무슨 일이 있어? 머…….”

제호는 담배를 피워 물면서 다시,

“……그리구 서울루 가는 거 잘 생각했어. 그리지 않아두 내가 올라가서 편지를 하려던 참인데!…… 아무튼 잘했어…… 내가 아무리 힘이 없기루서니 초봉이 하나 잘 돌봐 주지 못하리. 아무 염려두 말아요. 맘 터억 놓아요, 응”

초봉이는 그렇다면, 이편에서 이야기를 낼 것도 없이 아예 잘되었다 싶어 더욱 안심이 되었다.

이야기에 팔려서, 차창 밖으로 변하는 첫여름의 살쪄 가는 들과 산을 한동안 눈여겨보지 않는 사이에 차는 황등(黃登), 함열(咸悅), 강경(江景)을 어느결에 다 지나쳤다.

논산은 학교에 다닐 때 부여로 수학여행을 가느라고 와본 곳이다. 정거장 모습이며, 역엣사람들이 어쩌면 낯이 익은 것 같다.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팥거리〔豆溪〕를 지나서 굴 하나를 빠져나왔을 때에 제호는 초봉이의 무릎에 놓인 조그마한 손을 무심코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에 반지 자국만 남았지, 뽑고 없는 것을 보았다.

“허어! 반지두 다아 뽑아 버렸군…… 아무렴 그래야 하구말구. 그래, 그 께렴직한 과거는 칼루다가 비어 버리듯이 잊어야 해요. 그리구서 심기일전(心機一轉), 응? 허허, 제기할 것.”

제호는 초봉이가 집안의 전당거리라도 되라고 그저 무심코 반지를 뽑아 놓고 온 속사정이야 알턱이 없다.

그러나 초봉이는 막상 그 말을 듣고 보니 도리어 너무 급작스럽게 결혼반지 같은 것을 뽑아 버린 것이 남의 눈에라도 박절하게 보인 것 같아서 화틋 얼굴이 달았다.

차가 대전역에 당도하자, 초봉이를 앞세우고 플랫폼으로 내려서던 제호는 명승고적을 안내하는 간판에서 유성온천(儒城溫泉)이라는 제목이 선뜻 눈에 띄었다.

‘유성온천…… 온천’

제호는 내숭스럽게 싱긋 웃으면서, 간판을 보던 눈으로 초봉이의 뒷맵시를 훑는다. 비로소 그는 제 야심을 의식적으로 행동에 옮겨 볼 생각이 나던 것이다.

오지 않으면, 아무렇게라도 오래잖아 만들기라도 할 박제호지만, 우연히 그에의 찬스는 빨리 왔고 겸하여 좋았을 따름이다.

“초봉이, 온정 더러 해봤나”

쇠뿔은 단김에 뽑으라 했으니 인제는 시간문제라 하겠지만, 시방부터는 옳게 남의 계집을 꾀는 수작이거니 생각하면 일찍이 여염집 계집한테는 못 해보던 짓이라 노상 뒤가 돌려다뵈지 않지도 않았다.

초봉이는 마침 가드 밑을 지나면서 전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갈 제 이것을 보고 진기하게 여기던 그때 일이 생각이 나서 한눈을 파느라고 제호가 재우쳐 물을 때서야 겨우 알아들었다.

“온정이요? 온천”

초봉이는 되묻고서 고개를 가로 흔든다.

“……못 가봤어요.”

“그럼 마침 좋군. 바루 이 근처에 유성온천이라구 있는데, 한번 가볼 만한 데야…… 그래 그래, 구경두 못 했다니 첨으로 온정두 해볼 겸, 또 가서 조용히 앉아서 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초봉이 일두 상의하구, 좋잖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어”

제호는 이건 좀 창피한 고패로다고 어름어름하는데, 이어 초봉이가,

“아저씨 바쁘실 텐데…….”

하는 게, 저도 벌써 알아차리고는 슬며시 드러누우면서도 그저 숫보기답게 부끄럼을 타느라고 괜한 겸사나 한마디 해보는 눈치인 것 같았다. 뭐, 그만하면 다 팔아도 내 땅이다.

“온! 나는 또 무슨 소리라구! 허허 허허, 그런 걱정을라컨 하지두 말아요…… 그럼 그렇게 하기루 하구서, 점심두 아주 거기 가서 먹을까”

“네에.”

“시장하잖어”

“괜찮어요.”

“그럼 됐어. 자아 빨리 나가자구. 자동차를 잡아타야지.”

초봉이는 남자와 단둘이서 호젓하게 온천에를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턱이 없다. 온천도 역시 거리의 목간탕처럼 남탕이 있고 여탕이 있고 해서, 단지 목간을 하기 위한 목간이라고 밖에는 온천이라는 것을 그 이상 달리 생각할 내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생전 처음으로 가보는 온천 목간도 하려니와, 또 제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도 상의하자고 하니 겸사겸사 반갑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제호는 초봉이의 그러한 단순한 마음이야 몰랐고, 너무 쉽사리 제 뜻에 응하는 것이 도리어 헤먹고 싱거운 맛도 없지 않았다.

바로 유성온천으로 떠나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는 다른 두어 사람 승객과 같이 버스를 잡아타고 흔들린 지 삼십 분 만에 신온천의 B라고 하는 여관에 당도했다.

초봉이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바로 근처라더니 이렇게 먼 덴가’

‘언제 목간을 하고, 언제 점심을 먹고, 도로 와서 차를 타려구 이러는고’

이쯤 궁금히 생각도 했으나, 그대로 잠자코 있었다.

버스가 포치에 닿기가 무섭게 앞뒤로 하녀들이 달려들어 문을 열고 손에 든 것을 채어 가고 하면서,

“이랏샤이마세(어서 오십시오)!”

소리를 지르고, 현관으로 들어서니까는 여남은이나 같은 하녀들이 나풋나풋 엎드리면서 한꺼번에, 이랏샤이마세를 외친다.

서슬에 초봉이는 정신이 얼떨떨했다.

목간집이라면서 대체 이게 웬 영문인지를 모르겠다. 군산 있을 때에 목간이라고 가면 수염난 놈팡이가 포장 뒤에 앉아 벙어리 삼신인지 눈만 힐끔하고 돈이나 받을 줄 알지, 오느냐 가느냐 수인사 한마디 하는 법 없는 그런 데만이 목간탕인 줄 알았었는데, 자 이건 도무지 휘황하고도 혼란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어깨가 절로 오므라들려고 한다.

집은 어쩌면 이리도 으리으리하며, 색시들은 어쩌면 이렇게 많이 나오며, 어쩌면 이다지도 소중히 모셔 들이는지, 아마 이런 집에서는 목간삯을, 칠 전은 어림도 없고 일 원이나 그렇게 내야 할 것 같다.

초봉이는 사실로 이런 호강이라고는 꿈에도 받아 본 적이 없는지라, 차마 겁이 나고 황송스러 못한다.

그러나저러나 남탕이니 여탕이니 써붙인 데는 어디며, 수건도 없고 비누도 없으니 비누는 이 전 짜리를 한 개 산다지만, 빌려 주는 수건이 있는지 모르겠어서 종시 두리번거리고 섰는데, 제호는 성큼 마루로 올라가더니,

“어서 올라오잖구”

하면서 히쭉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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