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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탁류 (46) -채만식-

카지모도 2021. 5. 26.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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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세, 전등세, 식모 월급 다 치더라도 십 원이 채 못 될 것이고, 반찬거리라야 제호의 밥상을 어설프지 않게 하기로 하더라도 한 달에 이십 원이면 족할 것이고.

그런즉 오십 원에서 이십 원이나, 잘하면 이십오 원씩은 남을 것이니 그놈을 친정으로 내려보내 주리라. 종차야 제호더러라도 다 설파하게 될 값에, 우선 얼마 동안은 친정 권솔들을 먹여 살려라 어째라 하기도 실상 무엇하고 하니 아예 그렇게 하는 편이 옳겠다.

(그래서 미상불 그 다음달, 그러니까 칠월 보름에 가서 보니, 조략히 쓴 보람도 있겠지만 돈이 이십 원하고도 몇 원이 남았었다. 곧 친정으로 내려보냈을 것이로되, 그 동안 편지가 온 것을 보면 아직은 제가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그다지 옹색지 않은 눈치여서 그대로 꽁꽁 아껴 두었었다.)

두웅둥 떴던 초봉이의 마음은 차차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것도 처음은, 이 생활이 현실로 믿어지지가 않고, 아무래도 인제 내일 아니면 모레는 다시 무슨 풍파가 일어, 또다시 새로운 그 운명이 시키는 대로 낯선 생활을 맞이하게 되려니 싶기만 했었다.

그러는 동안에 열흘 보름 한 달 두 달, 이렇게 지내노라니까 비로소 마음이 훨씬 가라앉고 생활도 자리가 잡히던 것이다.

그는 서울로 와서 제호와 살게 되면서도, 역시 집과 일에다가 정을 붙였다.

조석으로 집안을 정하게 닦달하고, 세간을 보기 좋게 벌여 놓고, 화분을 사다가 화초를 가꾸고, 재봉틀을 놓고 앉아 바느질을 하고, 그래서 마당에 모래알 하나나 방 안의 전등 덮개 하나에까지도 초봉이의 손이 치이고 마음이 쓰이고 하지 않은 것이 없이 모두 알뜰살뜰했다.

제호는 초봉이가 그러는 것을 너무 청승맞아서 복이 붙지 않겠다고 농담삼아 말리곤 했지만, 초봉이한테는 그것이 낙이요, 그 밖에는 마음 붙일 것이 없었다.

아침에 제호가 회사로 나가고 나면 초봉이는 그렇게 심심치 않은 하루를 보내다가, 저녁때부터는 제호의 착실한 아낙 노릇을 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호가 웃으면 같이 웃어 주고, 이야기를 하면 말동무가 되어 주고, 타고난 솜씨에다가 마음까지 써서 조석을 어설프지 않게 살뜰히 공궤하고, 제호가 미리서 말을 이르지 않아도 노상 즐기는 맥주 몇 병은 얼음에 채놓았다가 저녁 밥상머리에 내놀 줄도 알고…….

이렇게 어찌 보면 눈치빠른 애첩 같기도 하고, 정다운 아내나 착한 주부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무슨 제호한테 탐탁스레 정이 있어 그러는 게 아니고, 그런 것 역시 집 안을 깨끗이 치우고, 화초를 가꾸고, 장롱을 훤하게 닦달을 하고, 조각보를 새기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이 다만 제 재미를 위해서 하는 노릇일 따름이었었다.

이러구러 그는 한갓 승재가 가끔 생각나는 때말고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간에 흥분도 없으려니와 불평도 없이, 일에다가 마음을 붙여서 그날그날 지내는, ‘로보트’ 되다가 만 ‘사람’ 노릇을 하기에 골몰하던 것이다.

제호더러는 군산서부터 아저씨라고 불렀고, 친아저씨같이 따랐고, 미더워했고, 그랬기 때문에 시방도 그를 아저씨로 여기고 미더워하고 흔연히 대답을 하고 하기는 해도, 그 이상 남녀간의 짙은 흥이라든가, 부부다운 정이며 의(誼) 같은 것은 우러나지도 않았고 우러날 건지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승재를 그리워하는 회포가 깊었다. 오랜 오랜 옛날에 무엇 소중한 것을 통째로 어디다가 잃어버리고, 그 대신 그득한 슬픔 하나를 얻어 가지고 온 것같이 마음이 허전하니 외롭고,

그럴 때면 그것이 바로 승재가 그리워지는 그 전 순간이곤 했다. 보면 그 다음 순간 영락없이 승재 생각이 나던 것이다.

이것이 초봉이한테는 단 한 가지의 윤기 있는 낙(樂)--괴로운 낙이나, 즐겁게 괴로운 낙이었었다.

그리고 겨우 이것 한 가지로 해서, 그는 오십 넘은 독신의 가정부(家政婦)가 아니고, 아직 청춘이라는 구실(口實)이 되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제호는 오후와 저녁이면 초봉이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적이나 하면 삼방(三防), 석왕사(釋王寺) 같은 데로 초봉이를 데리고 피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새로 시작한 회사일이 하루도 몸을 빼칠 수가 없다.

그 대신 거의 매일 밤, 초봉이를 데리고 본정으로든지 종로든지 산보도 나가고, 나갔다가 눈에 띄는 것이면 옷감이든지 집안 세간이든지 곧잘 사주곤 했다. 그는 초봉이의 마음을 사자고 여간만 정성을 들이는 게 아니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살림을 시작한 지 바로 사흘째 되던 날인데, 초봉이가 부엌에 있다가 저녁상을 들고 들어서니까 제호는 밑도 끝도 없이,

“아니, 초봉이가 그런데, 그게 어떻게 된 셈이야”

떼어 놓고 하는 소리라, 초봉이는 영문을 몰라 뚜렷뚜렷하다가, 혹시 형보의 사단이나 아닐까 하고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다.

“글쎄 내가 말야…….”

제호는 그러나 숟갈을 들면서 심상히 설명을 하던 것이다.

“……윤희를 보내구 나서는, 이내 다른 여자와는 도무지 상관을 한 일이 없었는데, 허허 그거 참…… 아 글쎄 ×× 기운이 있단 말야!…… 허허 제기할 것, 늙은 놈이 이거 망신이지…… 아무튼 그 사람 고 무엇이라는 친구가 초봉한테 골고루 못 할 일을 하구 죽었어!”

이렇게까지 말을 해도, 초봉이는 충분히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제호가 그래서 ××이라는 것에 대해 한바탕 기다랗게 강의를 하니까, 그제야 초봉이는 고개를 숙이고 들지 못했다.

태수와 처음 결혼을 하고 나서 며칠 지나니까, 확실히 시방 제호가 말한 대로 그런 증세가 나타났던 것을 기억할 수가 있었다.

“거 기왕 그리 된 걸 할 수 있나. 인전 치료나 잘 하두룩 해야지, 허허허허 제기할 것…… 뭐 괜찮아 일없어!”

제호는 속이야 어쨌든 겉으로는 이렇게 웃어 버리고는 오히려 말 낸 것을 후회하여 초봉이의 무렴을 꺼주느라고 애를 썼다.

이튿날부터 주사며 약이며 일습을 장만해다 놓고는 제법 익숙하게 주사도 놓아 주고, 저도 놓고, 내외가 앉아서 그다지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치료를 그러나 재미삼아 농도 삼아 계속을 했었다.

이렇게 범사에 제호는 초봉이를 다독거리고 어루만지고 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아내 되는 윤희의 히스테리와 건강치 못한 것으로 해서 가정의 낙은 고사하고 어금니에서 신물이 났던 참인데, 일찍이 마음이 간절했던 초봉이를 얻어 이렇게 아늑한 가정을 이루고 보니 이래저래 초봉이가 귀엽고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초봉이가 새침하니 저는 저대로 나돌고 속정을 주지 않아서 흥이 미흡하고 헤먹는 줄을 모르는 바도 아니요, 사실이지 언제까지고 이대로 알찐 맛이 없이 지내라면 그것은 마치 석고로 빚은 인형을 데리고 사는 것 같아 죽여도 그 짓을 오래 두고는 못 해낼 듯싶었다.

그러나 저도 사람이거든 인제 정이 쏠리는 날이 있겠지, 제 정을 앗자면 내가 더욱 정답게 굴어야지, 이렇게 뒤를 보자고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혹시 초봉이가 새침하든지 하면 제 딴에는 버엉뗑하고 흥을 내준다는 게,

“우리 괭이가 기분이 좋잖은 게로군…… 응…… 아나 괭아, 조굿대가리 주께 이리 온.”

하면서 손을 까불까불, 장난을 청한다.

그럴라치면 초봉이는,

“말대가리 말대가리.”

하면서 눈을 흘기고, 영 심하면 정말 고양이같이 달려들어서는 제호의 까부는 손등이고 빈대머리진 이마빡이고 사정없이 박박 할퀴어 준다. 여느때는 들어 보지도 못한 쌍스런 욕을 내갈기기도 한다.

마음 심란하던 차에 탐탁하지도 않은 사람이 괜히 앉아서 지분덕거리는 게 더욱 싫어서 자연 소갈찌를 내떨곤 하던 것인데, 속을 모르는 제호는 제호대로 그럴 적마다 윤희의 히스테리의 초기적을 생각하고, 초봉이도 그 시초를 잡는 거나 아닌가 싶어 혼자 속으로 입맛이 쓰곤 했다.

 

 

13 흘렸던 씨앗

 

칠월과 팔월은 그럭저럭 지나갔고 더위도 훨씬 물러가, 마음부터 우선 가을이거니 여겨지는 구월이다.

장마가 스쳐간 처마끝의 하늘이, 좁다란 대로 올려다보면 정신이 들게 푸르다.

뜰 앞 화분에는 국화가 망울이 앉고, 억척으로 마당 한 귀퉁이를 파 일궈 심은 다알리아가 한 길이나 탐지게 자랐다.

제호는 인제 며칠 아니면 당하는 추석에, 단풍철의 금강산이나 모처럼 둘이서 휘익 한번 다녀오자고 벼르고 있다. 해서, 즐겁자면 맘껏 즐길 수는 있는 가을이다. 그러나 초봉이는 저놈 다알리아에서 빨갱이가 피려느냐, 노랭이나 하얀 놈이 피려느냐 하고 속으로 점치면서 기쁘게 기다릴 경황조차 없이 마음은 어두워 가기 시작했다.

초봉이는 지나간 오월, 군산에서 고태수와 결혼하던 바로 전날 여자의 타고난 매달 행사 ××을 마쳤었다.

그랬으니 날짜야 쳐보나마나 늦어도 유월 그믐정께까지는 그게 있었어야 할 텐데 그냥 걸러 버렸다. 처녀 적에는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유월 그믐, 그때가 마침 제호와 새살림을 시작해서 수수하기도 했거니와, 일변 결혼을 하면 그런 변조도 생긴다더니, 그래서 그러나 보다고 심상히 여기고 말았다.

그 다음달인 칠월 그믐께도 역시 감감, 소식이 없고 그냥 넘겨 버렸다.

가슴이 더럭 내려앉았으나, 설마 그랬으랴 하는 생각으로 하루 이틀, 매일같이 기다리는 동안에 팔월이 다 가도록 종시 소식이 없고 말았다.

구월로 접어들더니 그제는 분명한 임신의 징조가 보였다. 그것은 여자의 직감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모친이 막내동이 병주를 포태했을 때 여러 가지로 변화가 생기던 것을 본 기억도 도움이 되었다.

맨 처음, 신 것이 많이 먹혔다. 신 것 중에도 살구가 그놈이 약간 설 익는다 해서 시큼한 놈을 실컷 좀 먹고 싶은데, 철이 아니라 할 수 없이 나스미캉(여름 밀감)을 사다가는 이빨이 뻐득뻐득하도록 흠씬 먹었다.

한번은, 여느때는 즐겨하지도 않는 두부가 금시로 먹고 싶어서 식모를 시켜 한목 열 모를 사다가는, 일변 철에다가 기름으로 부치면서 집어 먹으면서 한 것이 두부 열 모를 다 먹어 냈다. 식모가 그걸 보더니 빈들빈들,

“아씨, 애기 서시나 베유”

하는 것을, 새수빠진 소리 작작 하라고 지천을 해주었다.

이 허천 들린 것같이 음식 먹고 싶은 증세가 지나고 나더니, 이번에는 입덧이 나서 욕질이 자꾸만 넘어오고, 가슴이 체한 것처럼 거북하기 시작했다.

밥맛은 뚝 떨어지고, 그렇지 않아도 여름의 더위에 시달려 쇠약해진 몸이 더욱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휘이 휘둘렸다. 그러나 이런 몸의 고통쯤은 약과였었다.

고태수와 결혼을 하고, 장형보한테 열흘 만에 겁탈을 당하고, 다시 보름 만에 박제호를 만났으니 대체 이게 누구의 자식이냔 말이다.

요행 제호의 씨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태수의 씨라면 딱한 노릇이다.

그렇지만 제호는 속이 틘 사람이라, 그런 이해야 해줄 테니 그런 대로 괜찮다 치더라도 만약 불행해서 형보의 씨이고 보면……

생각하면 기가 딱 질렸다. 방금 제 뱃속에 형보와 꼭 같이 생긴 것 하나가 들어 있거니 싶고 오싹 몸서리가 치이곤 했다.

‘대체 뉘 자식이냐’

아무리 답답해도 미리서 알아낼 재주는 없었다. 고가의 자식일 수도 있으면서 아닐 수도 있고, 박가의 자식일 수도 있으면서 아닐 수도 있고, 장가의 자식일 수도 있으면서 요행 아닐 수도 있기는 하고.

그러니 그 분간은 결국 낳아 놓은 담에라야 나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낳아 놓고 보아서 제호면 제호를, 태수면 태수를 닮았다면이거니와 형보를 닮았다면 그것은 해산이 아니라 벼락을 맞는 것이요, 자식을 낳아 놓는 게 아니라, 구렁이같이 징그러운 고깃덩이를 낳아 놓는 것일 것이다.

제호한테도 낯이 없을 뿐 아니라 천하에 그것을 젖꼭지를 물려 가면서 기르다니, 죽으면 죽었지 그 짓은 못 한다.

혹시 아무도 닮지 않고 저만 탁해 주었으면 해롭지 않을 듯하기는 하나, 그러고 보면 이게 뉘 자식이냐는 것을 분간 못 할 테니 안 될 말이다. 애비 모를 자식을 낳아 놓았다께, 가령 제호가 그런 속 저런 눈치를 모르고 제 자식인 양 좋이 기른다 하더라도 남의 계집으로 앉아서는 차마 민망해 못 할 노릇이다.

그뿐더러 애비 모르는 자식이 애비 아닌 애비를 애비로 부르게 하는 것도 본심 있이야 더욱 못할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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