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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B> 부활 (8) -톨스토이-

카지모도 2021. 7. 10.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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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재판장은 서류를 한번 쭉 훑어본 후, 정리와 서기에게 두세 가지 질문을 던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피고의 출정을 지시했다. 그러자 곧 가름장 난간 뒤의 문이 열리며 모자를 쓴 두 사람의 헌병이 군도를 빼들고 들어왔다. 그 뒤로 주근깨투성이의 붉은 머리 사내가 먼저 들어오고 잇달아 여자 둘이 들어왔다. 남자는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법정에 들어올 때 엄지손가락을 쑥 밀다시피 하면서 바지 옷솔기에 두손을 갖다 대어 너무 긴 소매가 늘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그는 재판관이나 방청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피고석을 응시하며 긴 의자로 다가갔다. 다른 사람이 앉을 자리를 남겨 두고 맨 끝자리에 가 앉아, 재판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뭔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듯 볼의 근육을 실룩거리기 시작하였다. 그 뒤를 이어 역시 죄수복을 걸친 중년 여자 하나가 들어왔다. 여자의 머리는 스카프로 동여져 있었으며 잿빛을 띤 창백한 얼굴에는 눈썹도 없독 눈만 빨갰다.

이 여자는 아주 태연해 보였다. 그녀가 자기 자리로 갈 때 죄수복이 무엇엔가 걸렸는데 서두르는 기색 없이 유유히 그것을 벗기고, 제자리에 가 앉았다.

세 번째 피고는 마슬로바였다.

그녀가 들어오자 법정 안 모든 사내들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쏠렸다. 반짝거리는 까만 눈에 하얀 얼굴, 죄수복 위로 불룩 도두라진 젖가슴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헌병들까지도 그녀가 옆을 지나갈 때 그 모습에 시선을 드고, 그녀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눈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자리에 가 앉자 그들은 마치 나쁜 짓이나 하다 들킨 것처럼 한결같이 고개를 돌리고 몸을 한두 번 흔들더니 곧장 정면에 보이는 창문 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재판장은 피고들이 제각기 제자리에 앉고 마지막으로 마슬로바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자 곧 서기를 돌아보았다.

여느 때의 순서대로 공판이 시작되었다. 배심원의 점호, 결석자에 대한 심의, 그들에 대한 벌금 부과, 면제를 신청한 사람에 대한 재가, 결석자에 대한 보충 임명 등등이 진행되었다.

이어서 재판장은 조그만 표를 접어서 유리 쟁반 속에 넣고 금몰이 달린 법의 소매를 조금 걷어올려 무척 털이 많이 난 팔을 드러내면서 마치 마술사 같은 솜씨로 표를 한 장 한 장 꺼내더니 그것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걷어올린 소매를 내리고는 배심원의 선서 순서를 사제에게 재촉했다.

부석부석 누렇게 뜬 얼굴에 갈색 법의를 입고 목에 금십자가를 걸고, 그 옆에 알 수 없는 조그만 훈장을 달고 있는 늙은 사제는 뻣뻣한 다리를 느릿느릿 법의 밑으로 옮겨 놓으면서 성상 앞에 놓여 있는 선서대로 다가갔다.

배심원들도 일어나서 한데 몰려 선서대 쪽으로 나아갔다.

"여러분, 이쪽으로!" 사제는 통통한 손가락으로 가슴 위의 십자가를 만지면서 배심원 일동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 사제는 이미 46년간이나 이 직책을 맡아왔는데 앞으로 3년만 더 있으면 얼마 전에 대사원의 주교가 행한 것처럼 성직 50주년 기념 축하식을 거행할 작정으로 있었다. 그는 지방 재판소 창설 당시부터 줄곧 근무해 왔으므로 선서시킨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그렇게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와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한결같이 봉사해 오면서, 자신의 가족을 위하여 현재 살고 있는 집 이외에도 공채와 증권으로 3만 루블 남짓한 재산을 갖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모든 서약을 금하고 있는 성경 앞에서 사람들에게 선서를 시키는 재판소에서의 그의 일이 옮지 않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거니와, 또 그것을 성가시게 여기지도 않았을뿐더러 익숙해진 이 일에 대하여 애착까지 느끼고 있었는데 더구나 이것은 상류 계급의 인사들과 친교할 기회도 적지 않았으므로 자기 직분을 더욱 좋아했다. 지금도 그는 유명한 변호사와 알게 되었으므로 속으로 매우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 변호사가 모자에 큰 꽃을 단 노부인 사건 하나로 거뜬히 1만 루블이나 되는 엄청난 사례금을 받았다고 하므로 그는 그 변호사에 대하여 경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배심원 일동이 조그만 층계를 밟고 단상에 올라왔을 때, 사제는 희끗희끗한 대머리를 한쪽으로 갸우뚱하더니 헐거운 법의 틈으로 천천히 손을 내밀어 드문드문 난 머리털을 한번 쓰다듬은 다음, 배심원들 쪽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오른손을 드십시오. 손가락을 이렇게 하고." 그는 늙은이다운 목소리로 느릿느릿하게 말하면서 손가락마다 옴쏙옴쏙 통통한 손을 위로 들어서 물건을 잡을 때처럼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한데 모았다. "내가 말하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하고는 선서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거룩한 복음서와 생명의 근원인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맹세하나이다. 이 법정에서 심리되는 사건..."하고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매듭을 지어가면서 말했다. "손을 내리시면 안 됩니다. 계속 들고 계셔야 합니다." 그는 손을 내리려던 젊은 배심원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 법정에서 심리되는 사건에 있어..."

구레나룻을 기른 풍채 좋은 신사와 대령과 상인 등은 사제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을 합친 손을 마치 대단한 자부심이라도 맛보는 듯 높이 쳐들고 있었으나, 그 밖의 사람들은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듯 적당히 흉내만 내고 있었다. 그 중에는 화가 난 듯이 엄청나게 큰 소리로 '여하튼 할 수 있는 데까지 따라해 보겠다.'는 듯이 사제의 말을 되뇌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저 중얼중얼할 뿐, 사제보다도 매우 뒤처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놀란 듯이 따라가려고 했지만 엉뚱한 구절을 되풀이하기가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마치 무엇을 떨어뜨리지나 않으려는 것처럼 보라는 듯한 손짓으로 힘껏 손가락을 모으고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손가락 끝을 벌렸다가 생각난 듯이 다시 모으곤 했다. 누구나가 어색한 기분이었는데 늙은 사제 혼자만은 자기가 중대하고 유익한 일을 하고 있음을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선서가 끝나자 재판장은 배심원들에게 배심원장을 선출하라고 제언하였다.

배심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앞을 다투어 배심원실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모두들 담배를 꺼내서 피우기 시작했다. 누군가 풍채 좋은 신사를 배심원장으로 선출하자고 제의하자, 모두들 찬성하고 피우다 만 담배를 비벼 끄고는 법정으로 되돌아왔다. 선출된 배심원장이 자기가 선출되었음을 재판장에게 보고하고 일동은 다시 높은 등받이 의자에 2열로 줄지어 앉았다.

모든 일이 거침없이, 그리고 빠르고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규칙바르고, 일관성이 있고, 엄숙한 진행은 분명히 모든 참석자들에게 어떤 민족감을 주었으며 자기들이 진지하고 중대한 사회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의식케 했다. 네플류도프도 그런 기분을 맛보았다.

배심원들이 착석하자 재판장은 그들의 권리와 의무, 그리고 책임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러한 주의를 주고 있는 동안 재판장은 쉴 새 없이 자세를 바꾸었다. 왼쪽 팔꿈치를 짚는가 하면 오른쪽 팔꿈치를 문지르고, 의자 등받이나 팔걸이에 몸을 기대기도 하고, 종이를 가지런히 챙겨 놓는가하면, 페이퍼 나이프를 만지작거리거나 연필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배심원의 권리란 재판장을 통하여 피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물적 증거를 체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배심원의 의무는 허위가 아닌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책임도 있어서 심리의 비밀을 누설하거나 외부 사람과 연락을 위하거나 했을 경우 처벌을 받는다고 했다.

일동은 정중히 경청하고 있었다. 상인은 술냄새를 풍기다가 트림을 간신히 참으면서 한 마디 한마디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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