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지 가는 길
김원일
1. 그늘 속의 사람들
밤이 깊다. 바깥 날씨가 차갑다, 센바람에 창틀 유리가 떤다. 인희엄마의 숨소리가 커진다. 내 옷을 벗기는 그네의 손길이 바쁘다. 나는 알몸이 된다. 인희엄마가 내 위로 몸을 싣는다. 나는 고개를 젖힌다. 잠든 인희 쪽을 본다. 깜깜하다. 인희의 숨소리가 고르다. '뭘 봐? 한잠 들었다니깐.' 내 귓바퀴에 인희엄마가 입김을 뿜는다. 인희엄마의 머리카락이 내 입술에 붙는다. 나는 인희엄마의 화장 내음을 맡는다. 어젯 밤과 내음이 다르다. 어젯밤엔 레몬 냄새가 났다. 오늘 밤은 쑥내음이다. 식물의 잎사귀 뒤쪽마다 약 1백만 개의 공기 구멍이 있어. 그 공기 구멍으로 식물은 향기를 내뿜는다. 그 방향이 바로 산소야. 산소가 대기를 채워. 은은한 향기에서 강한 향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향기는 식물이 만들어내지. 시우야, 이 쑥내음 맡아 봐. 강하게 쏘는데도 향긋하지? 식물의 향기는 산소라서 그런 거야. 동물의 몸에서도 냄새가 나지. 그건 향기가 아니라 냄새일뿐. 마셔버린 이야 숨을 내쉴 때 우리는 이산화탄소를 내보내고 산소를 빨아들여.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선 산소를 내보내구.' 아버지가 말했다. 산이 첩첩한 산골이었다. 강이 흘렀다. 송천과 골지천이 합류했다. 두 갈래의 내가 합쳐지는 석울목을 아우라지라 불렀다. 나루터가 있었다. 강 양쪽에 빨랫줄처럼 나룻줄을 걸쳐놓았다. 사공이 그 줄을 당겨 나룻배가 내왕했다. 유천리와 여랑리를 잇는 뱃길이었다. 싸리골은 십여 호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우리 식구는 그 마을에서 살았다. 언제였던가. 어느 봄날, 어머니가 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봄을 또 한차례 지냈다. 그해 어느 봄날, 날씨가 따뜻했다. 햇살이 눈부시게 맑았다. 향기가 온 산과 들에 진동했다. 나비와 벌이 꽃을 찾아 날아다녔다. 수수밭 지나 솔바위오름이었다. 종다리가 맑은 하늘을 날았다. 찌르, 찌르, 쪼르로롱... 종다리가 노래를 불렀다. 하얀 토끼풀꽃, 좁쌀 같은 분흥냉이, 보라색 엉겅퀴꽃이 언덕에 가득 피어 있었다. 나비와 벌이 꽃들 사이에서 바쁘게 숨바꼭질을 했다. 아버지는 지쳐 있었다. 토끼풀밭에 누웠다. 아버지의 숨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가쁜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눈이 감겨졌다. 숨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아버지가 종다리 노래를 듣는 줄 알았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하늘을 나는 종다리를 보고 있었다. 종다리들은 짓까불며 장난을 쳤다. 아버지는 내내 말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해가 서산에 걸려 있었다. '아버지' 하며, 나는 아버지를 흔들었다. 아버지가 쓴 검은 테 안경이 풀밭에 떨어졌다.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소주병이 그 옆에 버려져 있었다. 아버지가 마셔버린 술병이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술냄새가 났다. 아버지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귀를 아버지 코에 대어보았다. 정말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겁이 났다. '하, 할머니!' 나는 할머니를 데려오려 언덕길을 뛰어내려갔다. 머릿골이 바늘로 찌르듯 아팠다. '얜 시작할 때먼 왜 이렇게 늘 목석 같냐. 덩치는 커가지구선. 어떻게 좀 움직여봐. 그렇지, 그렇게 깊이...' 인희엄마가 말한다. 나른하던 내 몸이 차츰 긴장된다. 샅께로 힘이 모인다. 인희엄마가 나를 껴안은 채 몸을 뒤집는다. 인희엄마가 내 아래에 깔린다. 나는 푹신한 풀밭에 누운 듯하다. 토끼풀은 없다. 토끼풀 이름은 클로버라 했다. '우리나라 토종 식물이 아니지' 하고 아버지가 말했다. 인희엄마의 얼굴에는 쑥내음이 난다. 그런 냄새가 나는 비누가 있다. 끈적한 몸에서는 땀내가 난다. 그때, 나는 무슨 소리를 들은 듯하다. 토끼처럼 귀를 세운다. 바람 소리에 섞여 식당문이 덜컹거린다. 인희엄마는 가쁜 숨만 내쉰다. 잠시 뒤다. '문 열어!' 누가 식당문을 발길로 찬다. '시간이 몇 신데. 웬 작자야.' 아직도 인희엄마의 숨길이 가쁘다. '모른체하면 가겠지 뭐. 어서 문을 열라니깐!" 술 취한 목소리가 아니다. 식당 문짝을 부술듯 흔든다. 나는 경찰봉을 떠올린다. 가슴이 뛴다. 불안하다. '인희아빈지 몰라. 뜸하다 싶으면 나타나 돈이나 뜯어가는 개자식. 어디서 뒈졌는지 몇 달째 보이지 않더니만.' 인희엄마가 일어난다. 어둠 속에 옷을 찾아 입는다. 나는 인희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나도 발치를 더듬는다. 급한 김에 청바지를 찾아 입는다. 스웨터를 머리에 뒤집어쓴다. '이 밤중에 누구야?' 인희엄마가 방을 나선다. 형광등을 켠다. 홀이 환해진다. '어서 문을 따라니깐!' 인희엄마가 머리 매무새를 다듬는다. 식당 문고리를 벗긴다. 밖에서 문을 열어제친다. 점퍼 입은 사내 둘이 흘로 들어선다. 나는 방 입구에서 떨고 서 있다. 머릿골이 바늘로 찌르듯 아프다. 놀랄 때면 늘 그렇게 머릿골이 쑤셨다. '저앤 놀라기만 하면 골치 부터 아픈가봐.' 엄마가 말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생각하는 능력. 즉 대뇌가 발달되었기 때문인데, 시우는 어디 그 부분에 미세한 장애가 있는 게 틀림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너 마시우 맞지? 별명은 마두구.' 한 사내가 구둣발째 방안을 덮친다. 사내는 나의 오른손을 뒤로 꺽는다. 멱살을 틀어쥔다. 나를 홀로 끌어낸다. 그가 허리춤에서 수갑을 꺼낸다.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잠을 깬 인희가 울음을 터뜨린다. '우리 시우, 무슨 죄가 있어요?' 인희엄마가 형사 둘에게 묻는다. 저쪽의 대답이 없다. 인희엄마가 나를 본다. '시우야, 너 여기 오기전에 무슨 죄 졌니?' 나는 떨고만 있다.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머릿골이 몹시 아프다. 나는 수갑에 채워진 조직의 식구를 본 적이 있었다. 수갑을 채운 형사가 내 뒷덜미를 잡아 누른다. 나를 밖으로 끌어낸다.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죄 졌니?' 아우라지에 살 때, 마을 사람들이 개를 올가미 매어 강으로 끌고 갔다. 개가 끌려가지 않으려 버팅겼다. 그들은 개를 나무에 매달았다. 보자기로 개의 머리통을 싸매었다. 장작개비로 개를 팻다. 개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 끝내 개의 울부짖음이 약해졌다. 개는 축 늘어졌다. '개는 때려서 잡아야 맛이 좋아. 명태 두들기듯 말야. 그래야 살이 부드럽다니깐.' 팔배아저씨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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